해답과 정답 사이(시소)

시소
2023-08-29 10:57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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  지난 시간 세미나에서 현모양처와 관련된 나의 이중적인 태도에 대해 의문을 제기하셨다. 그때는 단순히 현모양처가 아이 옷을 잘 입히는 게 아니지 않나 하고 속으로 생각했었다. 난 우리 아이의 마음을 잘 알아주는 엄마이고 애를 자율적으로 키웠다고 자부하고 살았으니까 말이다. 하지만 돌아오는 내내 이상한 생각이 들었다. 난 왜 현모양처가 되고 싶었을까? 노력도 안 하면서 왜 그토록 줄기차게 애기하고 다닐까?

 

 

  난 기억력이 안 좋은 편임에도 기억나는 몇 가지들은 음식에 대한 것이 많다. 엄마 심부름으로 아빠 드릴 보신탕을 사러 심부름 하던 기억. 비린 것을 싫어하는 엄마가 생선을 좋아하는 아빠를 위해 해주시던 생선조림. 가족이 많다 보니 항상 음식은 부족했고 엄마음식은 너무 맛있었다. 그 시절 우리 가족의 엥겔지수는 상당했을 것이다. 애들은 서로서로 같이 잘 켰고 엄마는 때에 맞춰서 밥을 해주는 것으로도 엄마의 소임을 다 하신건데 거기다 돈까지 벌어오셨다. 물론 엄마의 고단한 생활은 어린 자식들에게 폭발한 적이 많았지만 그 정도는 괜찮았다.

 

 

  명절에도 엄마의 주방은 빛을 발한다. 육형제의 장남인 아버지 형제들과 그 가족까지 모두 모이면 30명은 족히 되는 대가족의 음식준비의 대장인 엄마는 작은 엄마들을 지휘하며 요리를 만드시고 그 모든 행사가 끝나시면 그것으로 아빠에게 유세를 하셨다. 나이가 90을 바라보는 지금도 엄마는 아빠의 밥을 챙겨주시는 것으로 아내의 도리를 다했다고 생각하신다. 배우자가 정말 원하는 게 무언지 궁금하지도 묻지도 않으신다. 엄마에게는 가족을 위해 차리는 밥상이 집에서 본인의 위치를 드러내는 가장 강력한 무기였다.

 

 

  다 큰 자식들이 집에 오면 힘들어서 외식하고 싶은 마음과 젊은 시절 본인의 강력한 무기를 쓰고 싶은 마음이 충돌하는 순간이 있으신 것 같다.

 

 

 

  식구(食口)

  애들을 키우면서 저학년 때는 같이 저녁식사를 하는데 문제가 없었다. 고학년이 되면서 평일 학원수업이 생기면서 평일 식사시간은 점점 힘들어졌다. 내가 생각한 가족은 단란해야 하고 밥을 같이 먹어야 하고 주말을 같이 보내야 한다고 생각했다. 상황은 자꾸 변해서 타협안으로 제시 된 게 주중에는 각자의 위치에서 최선을 다하고 주말에는 같이 보내자는 것이었다. 토요일은 가족과 같이 또는 따로 시간을 보내다가도 저녁6시에는 집에 모여야 했다. 남편이 골프에 취미를 가지면서, 애들이 고학년이 되면서 반발들이 생기기 시작했다. 그때마다 나의 대답은 왜 식구가 식구인 거냐고 물었고 하루 종일 같이 먹을 음식 준비하는 사람생각을 하라고 얘기했다. 생각해 보니 웃긴다. 누가 시킨 것도 아닌데. 그런데 그때는 내가 베이스 캠프가 되어야 한다고 생각했던 것 같다. 나까지 나가 놀 수 없으니 집에서 반찬을 만들며 6시만을 기다렸다. 기다리는 나도 6시에 맞춰서 들어와야 하는 사람도 스트레스 받기는 마찬가지였을 것이다. 내가 정한 가족의 허상-가족은 단란하고 시간을 같이 보내야 한다-을 지키기 위해 나는 가족들에게 가족을 빌미로 무기를 휘둘렸다.

 

 

 

  현모양처

  어릴 때부터 좋은 곳에 시집 가서 애들 잘 키우면 최고라는 소리를 듣고 자랐다. 그래서 순종적인 아내 넘치는 모성애를 장착한 엄마가 나오는 드라마를 보고 그렇게 살아야 한다고 생각했다. 학생 때는 공부한다고 살림을 안하고 사회생활하면서부터는 결혼하면 하니 살림은 손도 대지 말라는 엄마의 만류로 속옷도 빨지 않고 생활하다 시집을 갔다. 결혼해서는 남편보다 더 경제력이 있다는 이유로 -표면적으로는 사랑한다는 이유로-가사의 부담은 적었다. 나는 경제적인 활동을 하기 때문에 현모양처가 되기 위한 준비를 못하는 거지 시간이 주어진 다면 언제라도 현모양처의 대열에 뛰어들 수 있다는 생각을 하고 살았다. 애들이 태어나고 일을 그만두고 현모양처(전업)의 길로 뛰어들 수 있는 선택의 순간에도 나는 입으로는 현모양처를 부르짖으며 일을 그만두는 선택은 하지 않았다. 나에게는 언제나 핑계가 있었다. “ 난 진짜 현모양처가 꿈인데 시간이 없어서 내가 살림을 못하는 거야. 내가 여유가 있으면 잘할 수 있어”

 

 

  5년 전 이직을 하고 이혼을 하며 시간적이 여유가 생겼다. 그동안 시간이 부족해서 못했다고 생각한 살림도 할 수 있고 애들에게 주중에도 따뜻한 밥을 해줄 수 있다고 생각했다. 하지만 현실은 달랐다. 난 살림을 못하는 사람이고 잘하고 싶은 사람이 아니었다. 화폐로 환산되지 않는 집안일은 나의 생각과 달랐다. 일한 만큼 성과가 따르는 사회생활과 달리 집안일은 해도 티가 안 났지만 안 하면 너무 티가 나는 구조였다. 열심히 준비한 식사를 맛나게 먹어주면 그래도 좋을 텐데 인스턴트 음식에 길들여진 가족들은 나의 노력을 애써 외면하는 것 같았다.

 

 

  내가 꿈꾸는 현모양처도 허상이었다.

 

 

 

부분적 관점을 열심히 훈련하고 체화한다면 수월하겠지만, 나를 포함해 인간은 욕심이 많고 어리석다. 자신이 생각하는 자기와 타인이 생각하는 ‘나’는 대개 큰 차이가 있다. 자기 존재의 부분성을 깨닫고 자신이 무엇을 모르고 아는지를 알기 어렵다. 세상 탓을 하자면 ‘내 생각이 객관적’이라는 식의 자기 방어 없이는 이 시대를 살기 힘들다. 윤리적이려고 노력하는 사람.‘정신승리’에 익숙한 사람, 그 중간에서 고뇌하는 사람.....여러 유형의 인생이 좁은 우리 안에서 사투를 벌이는 시대다

(정희진, 『영화가 내 몸을 지나간 후』, 17쪽)

 

 

 

 

 

 

  정희진은 자기가 생각하는 자기와 타인이 생각하는 ‘나’는 큰 차이가 있다고 이야기 한다. 어쩌면 남들 눈에 보이는 모습을 나만 모르고 살아왔던 것일 수 있다. 말로는 ‘현모양처’를 외치지만 행동은 모순적인 나처럼. 좋아하는 사람이 생기면(이성이든 동성이든)나는 먹을 거를 싸들고 다녔다. 무대작업을 할 때 늦은 밤 야식 준비를 위해 엄마 냉장고의 닭을 훔쳐오기도 했고 재수학원에도 간식을 싸들고 다니니까 우리 집이 슈퍼를 하는 줄 아는 친구도 있었다. 그 사람이 좋아하는 모습을 상상하고 준비하고 같이 먹는 행위는 다른 표현 방법보다 시간과 마음이 많이 소요되는 것이다. 이렇듯 나의 사랑표현은 ‘식’에 집중이 되어있다. 나의 사랑표현 방식이 이러니 나는 현모양처가 꿈 인줄 알았던 것이다. 내가 나를 잘 몰랐다.

 

 

  내가 나를 잘 알고 모르고와는 별개로 여전히 나는 ‘현모양처’라는 감옥에 갇혀있다. 내가 뱉은 ‘현모양처’라는 단어가 주는 이미지에 스스로를 붙잡아 두고 있는 것이다. 가족들에게 물리적인 베이스캠프가 아닌 심리적인 베이스캠프가 되어야 함에도 갇혀있는 사고의 한계는 나를 집이라는 감옥에 붙잡아 두고 있는 것이다.

 

 

 

‘여성’이 알면 안 되는 진실이 있고, 민초들이 자각하면 안 되는 사실이 있다. 페미니즘과 마르크스주의가 왜 그토록 미움을 받았겠는가. 이것이 인간의 역사다. 말할 것도 없이 권력자들은 비밀을 통제하고 관리한다. 그래서 피억압자들에게 앎, 깨달음은 해방이기도 하고 기꺼운 고통의 시작이기도 하다. 만일 여성들이 밥하는 일이 여자의 운명(성역할)이 아니라는 것을 깨달을 때 세상이 어떻게 되겠는가.(59쪽)

 

 

 

  각자의 기질이나 성향과는 무관하게 엄마가 가족을 위해 밥을 하는 게 당연하다는 성에 따른 역할 교육을 받았고 아버지는 바깥일을 하고 엄마는 집안일을 하는 게 평범한 가정이라는 사고가 생겼다. 누군가를 챙기기를 좋아하는 사람인지 아님 여자는 그렇게 해야 한다고 사회에서 배운 것인지 오랜 시간 그렇게 교육 받은 나는 어디까지가 나의 기질인지 아닌지 이제는 잘 모르겠다. 다양한 사랑표현의 방식 중 왜 나는 밥이었을까 이런 물음을 나에게 던지다 보면 사회에서 여자에게 요구하는 성역할에 충실히 길들여진 나를 보게 된다. 애써 현모양처의 이미지로 미화했지만 집이 감옥이라고 인식하는 것에 해답이 있었던 것이다.

 

 

 

 

댓글 1
  • 2023-09-17 22:01

    밥과 현모양처에 대한 성찰! 너무 흥미롭네요~
    시어머니나 주변의 어머니 나이대의 분들이 항상 '뭐 먹고 사니'라면서 밥걱정을 저에게 하실 때마다 너무 불편했었거든요.
    시대가 지나면서 따뜻한 밥에서 이제는 배달음식으로 한끼 때우는 삶의 패턴의 변화했고, 여전히 밥을 이야기하는 것이 부담스러웠던 것 같기도 했어요.
    그런데 저도 이제 엄마가 되어보니 삼시세끼 집에서 밥을 먹어야하고, 또 아기를 먹이는 입장이 되어보니 어머니의 마음이 조금은 이해가 되었어요.
    시대와 사회가 주는 '나의 기질'과 '여성의 역할'이 계속 달라지지만, 어떤 지점에서 고민은 비슷한거 같네요.
    "자기가 생각하는 자기와 타인이 생각하는 ‘나’는 큰 차이가 있다고 이야기 한다." 여기서 저의 모순은 뭐가 있는지 고민하게 되네요.. ㅎㅎ

정화와 임수의 좌충우돌 가족-되기
  아무튼, 공동체력   2023.8.31. 정화편 Designed by Cho-hui           (앞으로 꽃길만 걷고 싶은) 백수 꿈나무 살림의료사회적협동조합 조합원, 희망법/생애문화연구소 옥희살롱/한국성폭력상담소 후원회원 문탁에서 함께 공부하던 임수를 꼬드겨 '쫌 다른 가족-되기' 실험 중 소박하게 꾸린 정임합목 양생하우스에서 앎과 삶에 관해 질문하며 살고 있다.     백수에게도 번아웃이?   갭이어(Gapyear)의 중간 지점을 지나고 있다. 20년의 직장생활을 꾸역꾸역 마무리한 후 맞는 꿀맛같은 휴식이다...라고 쓰고 싶지만, 질끈 눈을 감고 싶을만큼 즐비한 사건사고 때문에 뉴스, 신문, 솔직히는 책과도 거리를 두고 싶은 나날들이다.   두달 전 긴 제주여행 끝에 번아웃이 찾아왔다. 백수에게 번아웃이 웬말이냐며 나조차 비웃었지만, 아무것도 하기 싫었다. 문탁 양생프로젝트 1학기 에세이를 겨우 마무리하고 나서도 번아웃은 좀 더 이어졌고, 7월 중순이 되어서야 나아졌다. 나름 퇴직증후군을 겪고 있는가보다 했지만, 사실 직장생활을 하던 중에도 짧고 길게 번아웃은 찾아왔었다. 사치라며 뒤로 미루거나 지는 척 대충 겪어내면서 미봉해왔을 뿐이었다.       <미생>의 장그래처럼 나에게도 운동과 체력은 주저앉고 싶을 때마다 버팀목이 되어 주었다. 가뿐 숨을 몰아쉬며 달리고 나면, 상념은 사라지고 근육의 통증과 심장 박동만이 남는 순간이 온다. 땀에 흠뻑 젖은 몸뚱이만이 지금 이 순간 살아있다는 사실을 알려주었고, 지지고 볶았던 많은 것들이 하찮게 느껴졌다.     돌잡이의 매직   학창시절에도 공부와 운동을 병행했다. 돌잡이로 연필과 공을 동시에 잡았던 운명 탓이려나? 초딩 때는 하루 이틀 상간에 수학경시대회와 육상대회를...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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무사
2023.08.31 | 조회 509
인문약방 에세이
    따스함과 자유   『먼길로 돌아갈까?』(게일 콜드웰, 문학동네, 2023)는 게일 콜드웰이 마흔 둘에 폐암으로 죽은 캐럴라인 냅과의 우정을 기억하며 쓴 책이다. 그들은 우정이라고 말하지만 나는 사랑이라는 말도 추가하고 싶다. 이들의 사랑은 희생, 인내, 고통 보다 자기 긍정, 성장, 자유와 연결된다. 그들이 함께한 시간은 5,6년이었다. 둘 다 결혼하지 않고, 아이도 갖지 않았으며, 독신으로 살았다. 그렇다고 해도 그녀들이 만들어낸 사랑과 우정의 경이로움이 줄어드는 것은 아니다.      게일은 친밀한 관계가 어려운 사람이었다. 자연스러운 관계가 주는 따스함과 오롯한 자유로움 둘 다를 원했던 그녀는 따스한 관계가 만족되면 자유를 잃었고, 자유를 얻었다 싶으면 홀로 남겨진 듯한 외로움을 처리하기 힘들었던 것 같다. 캐럴라인도 게일 못지않게 다른 사람의 자유를 침해하는 것도, 자신의 자율을 침해 받는 것도 두려워하던 사람이었다. 그러나 그녀들은 따스함과 자유가 공존하는 관계를 구현해낸다.       게일과 캐럴라인은 닮은꼴이다. 게일은 소아마비를 이겨냈고, 캐럴라인은 거식증의 물살을 헤쳐 나왔다. 두 여성은 알코올중독이라는 자기 파괴의 늪에서도 과감하게 살아나와 존재를 파산시키지 않으면서 사랑하는 법을 개를 통해서 터득하는 중이었다. 그녀들은 공통적으로 술이든 사람이든 무엇에도 의존하지 않고 독립과 자립을 지켜내기 위해, 그런 힘을 지니기 위해 분투했던 투쟁의 역사를 가지고 있었다. 그리하여 그녀들이 공유한 명제는 “삶은 고되고 때로 가장 치열한 싸움은 고독하게 치러야 하지만, 두려움 속으로 걸어 들어가 상처를 입고 나올지라도 여전히 숨을 쉴 수 있다는 믿음”(119쪽)이었다.       이런...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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윤아
2023.08.29 | 조회 233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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    “ 난 난파선을 탐색하러 내려왔다/ 단어들이 목적이다 /단어들이 지도이다/ 난 이미 행해진 파괴의 정도와 그럼에도 불구하고 살아남은 보물들을 보러왔다/<중략> 내가 찾으러 왔던 것/ 그것은 잔해이지 잔해에 대한 이야기가 아니다/ 그 자체일뿐 그것을 둘러싼 신화가 아니다” (에이드리언 리치, 『우리 죽은 자들이 깨어날 때』, 「난파선 속으로 잠수하기」, 6쪽)      에이드리언 리치의 시 <난파선 속으로 잠수하기>는 그녀의 작품 활동의 주된 목적이 무엇인지 밝히는 일종의 선언문과 같은 것이다. 1960년대 서구 가부장제 사회를 ‘난파선’으로 명명하며 위험한 심해에 들어가 그녀가 응시하고자 한 ‘잔해’에 대한 이야기는 무엇이었을까? 시 속의 자아는 불편한 잠수복을 입고 산소마스크를 달고 내려가 검은색으로 변한 바다 속으로 몸을 옯겨 놓는다. 그곳에는 중력이 없고 산소가 없다. 그러므로 위험하다. 권력이 없고 너와 내가 없다. 그러므로 자유롭다. 스트레스를 아직도 가슴에 품고 있는 익사자의 시체, 고장난 나침반, 물먹은 일지. 그곳에서는 이 모두가 그녀 자신이며, 우리이다. 여기에서 길어올린 ‘나’, ‘그녀’에 관한 이야기는 레즈비언이며 가부장제에 부역한 이혼녀이고 세 아이의 엄마였던 미국여성 시인인 그녀의 글속에서 자유롭게 횡단하고 있다. 그녀의 에세이 <뿌리에서 갈라지다>와 <피,빵 그리고 시>에서는 자신을 손에서 놓치지 않으면서 세계를 향해 문을 열어 제치는 그녀의 소심함과 용기가 그대로 담겨 있다. 특히, 유대인이면서 미국 주류 사회의 토큰이 되고자 했던 그녀 아버지에 관한 이야기는 수치스럽지만 꼭 써야만 하는 의무감으로 표현된다. “내가 유대인인 것은 기독교인 어머니에게 물려받은 것이 아니라 아버지에게서 물려받은 것이니까”(288쪽) , “유대인으로서 나의 양가감정이 대체 어디서...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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꿈틀이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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2023.08.29 | 조회 126
인문약방 에세이
    출생의 비밀 잠결에 엄마와 외할머니의 말소리를 들었다. “남의 자식 키우는 거 아무나 할 수 있는 일이 아니다.” 억울하다는 엄마의 목소리는 곧 울음소리로 바뀌었다. 잠결이지만 나는 놀랐다. ‘이런 일이 우리 집에? 나에게?’ 나와 여섯 살 차이 나는 언니가 가출을 했다. 언니네 담임선생님이 우리 집을 찾아왔고, 엄마에게 “계모라서 애한테 너무 신경 안 쓴 거 아니냐고” 모진 소리를 하고 갔다. 살기 바빠서 내 새끼고 남의 새끼고 간에 건사하지 못한 건 맞지만, 본인 또래의 여자에게 계모소리 들은 것을 엄마는 분해했다. “지가 뭐라고!” 언니는 가출청소년이 되었고, 우리 집은 문제아가 있는 문제 가정이 되었다. 당시는 밤 9시만 되면 텔레비전과 라디오에서 “청소년 여러분 이제 집으로 돌아갈 시간입니다”라는 ‘계몽적’ 멘트가 나왔던 시절이다. 뉴스에서는 ‘문제 청소년은 문제 가정에서 나온다’는 캠페인을 자주 내보냈다. 나는 우리 집의 문제가 걱정스러웠지만, 그것보다는 이걸 사람들이 알지 못했으면 좋겠다는 바람이 우선이었다.     언니의 가출은 계모 때문일까? 아니라고는 말 못 한다. 그러나 언니네 담임선생님 말고 언니의 가출을 엄마와 연관 지어 생각한 사람은 우리 주변에는 아무도 없었다. 엄마가 계모라서가 아니라 우리 집이 가난해서 언니는 가출했다는 것이 좀 더 맞는 말이다. 가난과 돌봄의 공백은 이어진 문제이고, 아무도 신경 써주지 않는 질풍노도의 시기를 언니는 격렬하게 맨몸으로 겪어냈다. 언니의 가출은 두 달 정도 지속되었다. 돌아왔지만 우리와 살지 않고 혼자 사는 고모네 집으로 갔다. 거기서 학교에 다녔는데, 몇...
    출생의 비밀 잠결에 엄마와 외할머니의 말소리를 들었다. “남의 자식 키우는 거 아무나 할 수 있는 일이 아니다.” 억울하다는 엄마의 목소리는 곧 울음소리로 바뀌었다. 잠결이지만 나는 놀랐다. ‘이런 일이 우리 집에? 나에게?’ 나와 여섯 살 차이 나는 언니가 가출을 했다. 언니네 담임선생님이 우리 집을 찾아왔고, 엄마에게 “계모라서 애한테 너무 신경 안 쓴 거 아니냐고” 모진 소리를 하고 갔다. 살기 바빠서 내 새끼고 남의 새끼고 간에 건사하지 못한 건 맞지만, 본인 또래의 여자에게 계모소리 들은 것을 엄마는 분해했다. “지가 뭐라고!” 언니는 가출청소년이 되었고, 우리 집은 문제아가 있는 문제 가정이 되었다. 당시는 밤 9시만 되면 텔레비전과 라디오에서 “청소년 여러분 이제 집으로 돌아갈 시간입니다”라는 ‘계몽적’ 멘트가 나왔던 시절이다. 뉴스에서는 ‘문제 청소년은 문제 가정에서 나온다’는 캠페인을 자주 내보냈다. 나는 우리 집의 문제가 걱정스러웠지만, 그것보다는 이걸 사람들이 알지 못했으면 좋겠다는 바람이 우선이었다.     언니의 가출은 계모 때문일까? 아니라고는 말 못 한다. 그러나 언니네 담임선생님 말고 언니의 가출을 엄마와 연관 지어 생각한 사람은 우리 주변에는 아무도 없었다. 엄마가 계모라서가 아니라 우리 집이 가난해서 언니는 가출했다는 것이 좀 더 맞는 말이다. 가난과 돌봄의 공백은 이어진 문제이고, 아무도 신경 써주지 않는 질풍노도의 시기를 언니는 격렬하게 맨몸으로 겪어냈다. 언니의 가출은 두 달 정도 지속되었다. 돌아왔지만 우리와 살지 않고 혼자 사는 고모네 집으로 갔다. 거기서 학교에 다녔는데, 몇...
겸목
2023.08.29 | 조회 151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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