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2021양생에세이③] 예순, 페미니스트 선언

먼불빛
2021-07-09 15:12
247

언어가 없었다

 

나는 60세. 전형적인 가부장제 가정의 딸로 태어나, 남녀차별의 한복판에서 자랐다. 나는 공교육에서, 더 빈번하게는 혈연관계 아버지로부터 순결교육을 받았다. 나는 한치의 의심도 없이 이성애자가 되어 결혼을 했고, 아이를 낳았다. 결혼 이후 독박육아가 시작되면서 나는 남/녀, 가부장의 모순이 얼마나 폭력적이며 심각한 문제인지를 깨달았다. 그때의 나는 우울하지 않으면 늘 화가 나 있었다.

 

90년대 초. 남편의 구타와 학대로 죽게된 아내들의 사건이 연일 사회적 이슈가 되고 있었을 때, 나는 여성의전화에서 상담원 활동을 하게 되었다. 같이 살던 남자에게 향하는 화를 사회적으로 풀고 싶었다. 전화 상담은 너무나 많은 여성들이 상상할 수 없을 정도의 차별과 폭력의 고통 속에서 살고 있다는 사실을 확인시켜 주었다. 전화기 속의 수많은 그녀들과 나는 똑같은 가부장 이데올로기 희생자라는 생각으로 연대감을 가지게 되었다(고 생각했다).

 

 

그런데 절반의 여성이라는 동질감과 연대의식이 왜 나를 페미니스트로 만들지는 못했을까?

아마도 그것은 나에게 페미니즘 운동으로 뛰어들게 만들 수 있는 이론적 무기가 없었기 때문 아니었을까? 상담을 하면 할수록 나는 점점 더 남성혐오자가 되어 갔고, 남/녀 대립으로 치닫기만 하는 감정적 언어와 화법밖에 쓰지 못하는 현실이, 나의 한계가 지겨웠다. 그래서 때려치웠다.

 

 

 

곤란함과 낯섬

 

해러웨이의 선언문을 읽은 후 나는 뭐라 말할 수 없는 곤란한 감정에 휩싸였다.

단순히 오랫동안 모호한 채로 방치된 과거의 경험이 다시 소환되었기 때문만은 아니었다. 물론 한편으로는 과거의 내가 왜 지쳐 나자빠질 수밖에 없었는지, 모호한 채로 묻어둔 것의 정체가 무엇이었는지, 알 것 같은 시원함도 있었다. 그러나 동시에 알게 됨으로써 내가 가져야 하는 책임감은 또 무엇이어야 할까, 그런 고민이 시작되었기 때문이다.

 

 

“페미니즘의 탐구는 오히려 세상이 어떻게 돌아가고 누가 행위를 하고 있으며 무엇이 가능할지, 어떻게 세속의 행위자들이 서로를 책임감 있게 대하면서 덜 폭력적인 방식으로 함께 살아갈 수 있을지를 이해하는 문제와 결부된다”( <해러웨이선언문> ,p124)

 

페미니즘은 차이라는 것에 기초하여 세계와 그 안의 관계자들을 이해하는 인식론이고, 그런 인식 속에서 어떻게 살 것인가에 대한 윤리, 철학적 규범을 세워나가는 실천적 담론이다. 이것은 자기배려적 주체화의 양식을 찾아가는 양생의 문제와도 맞닿는 것 아닐까.

 

페미니스트가 된다는 것은 무엇인가? 거창한 정치적 행동주의자가 되어야 한다는 것일까?

차이의 철학인 페미니즘을 받아들이고 이해한다는 것만으로 페미니스트가 된다고 할 수 있을까? 나의 이런 고민은 페미니스트에 대한 어떤 표상이 있는 것은 아닐까?

원본도 없고, 본질도 없으며, 기원도, 순수 자연도 없는 것이 물질이라면 나 또한 무엇이라도 될 수 있는 것 아닐까? 해러웨이의 저 탁월한 문장만으로도 페미니스트-되기의 이유는 충분해 보인다. 일단 도전!

 

 

 

세계에 있는 것은 누구이며, ‘우리는 무엇인가?

 

페미니스트 되기의 출발점은 무엇이어야 할까? 그것은 아마도 ‘알던 것’에서 벗어날 수 있는 참된 담론을 장착하는 것 아닐까? 그래서 나는 페미니즘의 윤리 실천적 이론을 세우기 위해 해러웨이가 몹시도 중요하게 생각했던 이 존재론적 질문을 쫓아가 보기로 한다.

 

지금 여기 있는 우리는 누구인가? 단순히 인간이라고만 할 수 없는 “우리”는 어떤 존재인가?

 

해러웨이는 소중한 타자, <반려종>을 설명하기 위해 철학자 화이트헤드의 ‘포착의 합생’(‘구체적인 것’) 개념을 가져왔다. ‘무수한 실제 사건들에 의해 이루어진 포착의 합생’은 세상에 존재하는 모든 것들(자연+문화)은 혼자 존재하는 것이 아니며, 서로를 향해 뻗어나가며 인식의 대상으로 ‘포착’ 되어 파악되는 순간 ‘합생’, 즉 다른 어떤 새로운 존재로 공구성된다는 말이다. 따라서 존재(자연+문화)는 관계의 산물이며 선행하지 않는다. ‘개체는 고정된 실체가 아니라 개체화의 과정을 통해 해체 및 재조립이 지속되는 유동적인 과정 속의 한 단면이다’(해러웨이선언문/123/각주). 그러므로 내가 그렇게 집착했던 여자, 남자, 혹은 보편=인간이라는 것은 출발선에도 없었으며, 고정된 무엇도 아닌 것이다. 자연과 문화가 아닌 자연문화이며, 근원도 행위주체도, 목적도 없다. 나선의 존재론적 안무 속에서 매번 다르게 구성되는 존재이다. 이 하나의 개념에서 나는 모호한 채 눌러 두었던 과거의 엉킨 실타래가 풀리는 느낌을 받는다.

 

 

“페미니즘 이론은 유형학적 사고, 이항적 이원론, 다양한 취향의 상대주의와 보편주의 모두를 거부하며 창발, 과정, 역사성, 차이, 구체성, 동거, 공구성 및 우연을 다루는 방법들을 풍부하게 제공한다”(<해러웨이선언문> ,p124)

 

나를 해석한다는 것 또한 포착의 합생이 이루어지는 순간이 아닐까?

해러웨이의 존재론적 질문은 나에게 페미니스트로서의 가능성, 이원론의 미로에서 탈출할 수 있는 길을 열어주었다.

 

 

 

 

호명

 

해러웨이의 선언은  나를 호명해 들인다. 그것은 우리 또는 나를 새로운 윤리적 삶의 가능성으로 인도한다. 나는 해러웨이와 브라이도티와 주디스버틀러, 그리고 나와 공명을 일으킬 수 있는 더 많은 철학자들과 페미니스트들을 모순투성이인 현재의 구성물로 호명해 들이겠다. 이 호명의 주요 결과는 삶과 죽음, 고통과 기쁨, 용기와 상상력이다. 우리는 살/실체 속에서 이데올로기만으로는 다 설명할 수 없는 방식을 통해 함께 뒤섞일 것이다. 우리의 희망은 여기에 있다.

 

 

나는 페미니스트가 되겠다.

 

이 선언은 개인적인 기록이고, 가부장제 경험과 이분법을 넘고자하는 시도이자 닫히는 가능성의 목록만으로 회자되는 60세의 몸에 중첩된 모순이 페미니스트 주체화를 더디게 할지라도 어떻게 하면 이 도전을 계속할 수 있을까에 대답하기 위한 작업이다. 나는 차이를 이해하기 위한 지식과 언어를 구성하는데 게을리하지 않을 것이며, 이 세계 안의 ‘우리’가 누구인지 끊임없이 질문하면서, 책임감 있게 덜 폭력적인 방식으로 더불어 살아가기 위해, 관조하거나 타자화하지 않는 부분적 연결성의 관계 맺기를 하겠다. 이 선언은 미시적 권력의 효과와, 나이듦의 불가역적 경험이 나를 유혹할지라도 존재의 춤을 안무하면서, 실패와 불협화음의 한복판에서도 충실히 살고자 하는 나와의 약속이다. 나는 이제 페미니스트가 되겠다.

 

 

 

*이 에세이는 「해러웨이 선언문」,「흰머리 휘날리며, 예순 이후 페미니즘」, 그리고 문탁샘의 페미니즘 강의안을 두루두루 참고 인용, 모방하여 썼습니다. 아직도 제 언어가 짧고 부족한 까닭입니다.

 

 

http://moontaknet.com/?page_id=5254&mod=document&uid=33691

 

댓글 4
  • 2021-07-09 21:37

    먼불빛님의 메니페스토군요! 

    읽는 동안 가슴이 뛰었습니다.

  • 2021-07-10 09:48

    강의녹음 파일도 복습하신다는 얘기 듣고 놀랐어요~ 그런 공부가 이런 선언으로 이어지는군요^^

  • 2021-07-13 10:33

    아.. 먼불빛쌤

    읽으면서 슬슬 가슴이 뛰기 시작하더니 끝에는 뜨거운 것이 올라오네요 

    끈기있는 공부의 결과물이군요~존경합니다!!

  • 2021-07-14 13:37

    먼불빛 샘 선언문!

    샘의 얼굴이 떠오르면서 빛이 지나가는 느낌이 드는건 뭘까요?

    샘의 페미니스트 선언, 응원합니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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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진짜' 군인은 없다. - <지.아이.제인>(’97), <MBC 진짜 사나이 95회:여군특집>(’15), <엣지 오브 투모로우>(’14) 여성 군인 재현 분석        누구에게나 말하기 싫은 이야기가 하나쯤은 있다. 너무 자주 말해서든 말하기 어려워서든. 나에게는 내 직업과 군대가 그렇다. 그래도 기회가 있을 때마다 꾸준히 쓰고 말하려는 이유는 어떻게든 ‘공부하는 몸’으로, 현재의 배움을 바탕으로, 내 언어로 풀어내고 싶어서다. 전쟁, 평화, 폭력 등등 하고 싶은 말은 많지만, 아직 ‘내 몸에, 내 생각에, 내 삶에 ‘개념’을 붙여가는 일’(정승연, 세미나책, 193)이 어렵다. 이번에도 할 수 있는 만큼만. 그래서 이 글은 딱 그만큼의 에세이다. 새로운 현상을 분석한다거나 궁금증에 답을 하는 에세이는 아니다.(문탁샘께서 제목이 길다고 하셔서 바꿨습니다. 원제 : 여성 군인, '진짜 사나이', '어머니', '피해자', 무엇으로 명명되든 재현을 넘어 수행으로)      2006년 페미니즘을 공부하기 시작하면서 난 내 직업이 불편해졌다. ‘너 역시 군사주의와 성별 이분법적 사고에 갇혀 있다’고 일갈하는 페미니즘을 그냥 외면하고 싶기도 했다. 그러나 현재 우리가 겪고 있는 대다수의 문제들이 ‘가부장제-자본주의-군사주의’*의 견고한 동맹에서 비롯되었다는 페미니즘의 진단에 동의하면서 내 직업 현장에 대해 단순히 불편함을 토로하기보다 진지한 고민을 해보고 싶어졌다.    전사(戰死)와 전사(戰士)      역사적으로 여성은 늘 전쟁의 한가운데 있었지만 피보호자 아니면 피해자로 재현되었다. 행주치마로 돌을 나르고(공병/포병), 부상 장병을 치료하며(의정/간호), 전장에서 밥을 지었지만(병참) 여성은 전투를 ‘지원’했을뿐 전사로 호명되지는 못했다. 직접 전투에 참전하지 않았다는 이유로 여성들의 목소리는 묻혔다. 환향녀와 전시 강간...
'진짜' 군인은 없다. - <지.아이.제인>(’97), <MBC 진짜 사나이 95회:여군특집>(’15), <엣지 오브 투모로우>(’14) 여성 군인 재현 분석        누구에게나 말하기 싫은 이야기가 하나쯤은 있다. 너무 자주 말해서든 말하기 어려워서든. 나에게는 내 직업과 군대가 그렇다. 그래도 기회가 있을 때마다 꾸준히 쓰고 말하려는 이유는 어떻게든 ‘공부하는 몸’으로, 현재의 배움을 바탕으로, 내 언어로 풀어내고 싶어서다. 전쟁, 평화, 폭력 등등 하고 싶은 말은 많지만, 아직 ‘내 몸에, 내 생각에, 내 삶에 ‘개념’을 붙여가는 일’(정승연, 세미나책, 193)이 어렵다. 이번에도 할 수 있는 만큼만. 그래서 이 글은 딱 그만큼의 에세이다. 새로운 현상을 분석한다거나 궁금증에 답을 하는 에세이는 아니다.(문탁샘께서 제목이 길다고 하셔서 바꿨습니다. 원제 : 여성 군인, '진짜 사나이', '어머니', '피해자', 무엇으로 명명되든 재현을 넘어 수행으로)      2006년 페미니즘을 공부하기 시작하면서 난 내 직업이 불편해졌다. ‘너 역시 군사주의와 성별 이분법적 사고에 갇혀 있다’고 일갈하는 페미니즘을 그냥 외면하고 싶기도 했다. 그러나 현재 우리가 겪고 있는 대다수의 문제들이 ‘가부장제-자본주의-군사주의’*의 견고한 동맹에서 비롯되었다는 페미니즘의 진단에 동의하면서 내 직업 현장에 대해 단순히 불편함을 토로하기보다 진지한 고민을 해보고 싶어졌다.    전사(戰死)와 전사(戰士)      역사적으로 여성은 늘 전쟁의 한가운데 있었지만 피보호자 아니면 피해자로 재현되었다. 행주치마로 돌을 나르고(공병/포병), 부상 장병을 치료하며(의정/간호), 전장에서 밥을 지었지만(병참) 여성은 전투를 ‘지원’했을뿐 전사로 호명되지는 못했다. 직접 전투에 참전하지 않았다는 이유로 여성들의 목소리는 묻혔다. 환향녀와 전시 강간...
musa
2021.07.12 | 조회 260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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언어가 없었다   나는 60세. 전형적인 가부장제 가정의 딸로 태어나, 남녀차별의 한복판에서 자랐다. 나는 공교육에서, 더 빈번하게는 혈연관계 아버지로부터 순결교육을 받았다. 나는 한치의 의심도 없이 이성애자가 되어 결혼을 했고, 아이를 낳았다. 결혼 이후 독박육아가 시작되면서 나는 남/녀, 가부장의 모순이 얼마나 폭력적이며 심각한 문제인지를 깨달았다. 그때의 나는 우울하지 않으면 늘 화가 나 있었다.   90년대 초. 남편의 구타와 학대로 죽게된 아내들의 사건이 연일 사회적 이슈가 되고 있었을 때, 나는 여성의전화에서 상담원 활동을 하게 되었다. 같이 살던 남자에게 향하는 화를 사회적으로 풀고 싶었다. 전화 상담은 너무나 많은 여성들이 상상할 수 없을 정도의 차별과 폭력의 고통 속에서 살고 있다는 사실을 확인시켜 주었다. 전화기 속의 수많은 그녀들과 나는 똑같은 가부장 이데올로기 희생자라는 생각으로 연대감을 가지게 되었다(고 생각했다).     그런데 절반의 여성이라는 동질감과 연대의식이 왜 나를 페미니스트로 만들지는 못했을까? 아마도 그것은 나에게 페미니즘 운동으로 뛰어들게 만들 수 있는 이론적 무기가 없었기 때문 아니었을까? 상담을 하면 할수록 나는 점점 더 남성혐오자가 되어 갔고, 남/녀 대립으로 치닫기만 하는 감정적 언어와 화법밖에 쓰지 못하는 현실이, 나의 한계가 지겨웠다. 그래서 때려치웠다.       곤란함과 낯섬   해러웨이의 선언문을 읽은 후 나는 뭐라 말할 수 없는 곤란한 감정에 휩싸였다. 단순히 오랫동안 모호한 채로 방치된 과거의 경험이 다시 소환되었기 때문만은 아니었다. 물론 한편으로는 과거의 내가 왜 지쳐 나자빠질 수밖에...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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먼불빛
2021.07.09 | 조회 247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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소녀를 구하라   사회복지학과를 졸업하고서 다닌 첫 직장은 성폭력상담소 부설 청소녀 쉼터였다. 성폭력 피해 10대,20대 청소녀들이 거주하는 공간으로 쉼터의 간사로 활동했다. 아침, 점심, 저녁 세 끼를 모두 해 먹고 아이들을 깨워서 학교를 보내는 것이 일이었다. 90%가 친부에 의한 성폭력이었고, 유산 경험이 있으며, 어릴 때부터 정서적 학대로 인해서 지능이 발달하지 못해 지적발달장애를 가졌고, 지속적인 성폭력 피해를 받는 딸아이를 외면하는 친모를 가진, 청소녀들이, 거기 있었다. 그 때부터 성(性)에 관심이 높아졌다. 성폭력에 대한 공부를 시작하면서 성이 무엇인지, 성차가 무엇인지 배웠다. 그 즘 레즈비언과 게이를 알게 되었고 트랜스젠더를 알게 되었다. 그렇게 페미니즘을 배웠다. 양성평등을 위해서 페미니즘이 존재하는 것이라고. 성폭력 없는 사회를 만들어내기 위해서 정책을 만들어내고 어린이와 청소년들의 성교육이 절실히 필요하다는 것을 알게 되었다. 그랬다. 페미니즘은 양성평등을 위한 것이었다. 남성보다 차별받는 여성이 좀 더 잘 사는 세상으로 나아가기 위한 운동이 페미니즘이라고 생각했다.     나의 친구, 레즈비언   ‘여성’이 좀 더 잘 사는 세상이 궁금했고 그러한 세상을 만들어 나가는 사람들을 만나고 싶었다. 여성단체에서 실시한 아카데미에 참여해 여성주의적 관점에서 문화예술분야를 바라본다는 것은 무엇인지 배웠다. 그리고 많은 레즈비언을 만났다. 울퉁불퉁하게 생겼을 줄 알았던 그 사람들은 지극히 평범한 사람이었다. 대화가 잘 되었고 유쾌했으며 자신의 성 정체성에 대해 분명하게 말할 줄 아는 사람들이었다. 그러나 대다수의 사람들은 벽장 속에 갇혀 있어 커밍아웃을 하지 못했으며 아웃팅 당할까봐 전전긍긍한다고 말하는 그들과 나는...
소녀를 구하라   사회복지학과를 졸업하고서 다닌 첫 직장은 성폭력상담소 부설 청소녀 쉼터였다. 성폭력 피해 10대,20대 청소녀들이 거주하는 공간으로 쉼터의 간사로 활동했다. 아침, 점심, 저녁 세 끼를 모두 해 먹고 아이들을 깨워서 학교를 보내는 것이 일이었다. 90%가 친부에 의한 성폭력이었고, 유산 경험이 있으며, 어릴 때부터 정서적 학대로 인해서 지능이 발달하지 못해 지적발달장애를 가졌고, 지속적인 성폭력 피해를 받는 딸아이를 외면하는 친모를 가진, 청소녀들이, 거기 있었다. 그 때부터 성(性)에 관심이 높아졌다. 성폭력에 대한 공부를 시작하면서 성이 무엇인지, 성차가 무엇인지 배웠다. 그 즘 레즈비언과 게이를 알게 되었고 트랜스젠더를 알게 되었다. 그렇게 페미니즘을 배웠다. 양성평등을 위해서 페미니즘이 존재하는 것이라고. 성폭력 없는 사회를 만들어내기 위해서 정책을 만들어내고 어린이와 청소년들의 성교육이 절실히 필요하다는 것을 알게 되었다. 그랬다. 페미니즘은 양성평등을 위한 것이었다. 남성보다 차별받는 여성이 좀 더 잘 사는 세상으로 나아가기 위한 운동이 페미니즘이라고 생각했다.     나의 친구, 레즈비언   ‘여성’이 좀 더 잘 사는 세상이 궁금했고 그러한 세상을 만들어 나가는 사람들을 만나고 싶었다. 여성단체에서 실시한 아카데미에 참여해 여성주의적 관점에서 문화예술분야를 바라본다는 것은 무엇인지 배웠다. 그리고 많은 레즈비언을 만났다. 울퉁불퉁하게 생겼을 줄 알았던 그 사람들은 지극히 평범한 사람이었다. 대화가 잘 되었고 유쾌했으며 자신의 성 정체성에 대해 분명하게 말할 줄 아는 사람들이었다. 그러나 대다수의 사람들은 벽장 속에 갇혀 있어 커밍아웃을 하지 못했으며 아웃팅 당할까봐 전전긍긍한다고 말하는 그들과 나는...
하현
2021.07.09 | 조회 243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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1. 정체화된 페미니즘의 현장   페미니즘을 처음 접했을 때 나는 그게 뭔지는 몰라도 긍정적인 지지를 보냈다. 페미니즘을 통해 새로운 시선을 얻을 수 있었고, 내가 조금 더 나에 가깝게 설명되는 것 같았다. 하지만 꽤 오랜 시간동안 스스로를 페미니스트라고 지칭하지 못했다. 공공장소에서는 페미니즘이라는 단어를 말할 때 의식적으로 작게 소리 냈고, 페미니즘을 여성주의로 번역하기를 꺼려했다. 그것은 무엇보다 페미니스트라고 말했을 때 사람들이 나를 오해할 것 같았기 때문이다. 페미니스트와 메갈을 동어로 쓰는 사람들이 있었다. 이기적이거나 폭력적인 메갈로 오해받기 싫었다. 또, 페미니스트라면 PC(PoliticalCorrectness·정치적 올바름)하거나, 탈코르셋을 한 외관을 가져야 할 것 같았다. 하지만 나는 PC하기엔 너무 흔들리는 사람이었고, 매일 화장을 하며 죄책감을 가지는 사람이었다.   나는 페미니즘을 그렇게 생각했다. PC하고, 모두가 숏컷하고 바지 입는, 혹은 메갈인 것. 미용실에서 머리를 자르고 온 친구가 나 진짜 페미니스트 같지 않아? 라고 말한 날이 있었다. 그때 친구는 자신의 발언이 언피씨하다고 바로 정정했지만, 우리의 머릿속에는 그런 게 있었다. 페미니스트다운 것, ‘진짜 페미니스트’의 이미지 말이다. 시간이 흘러 내가 서점에서 일하게 됐을 때 ‘진짜 페미니스트는 없다’라는 책을 보게 된 적이 있다. 저자는 이렇게 말한다.   낙인의 의미로 페미니스트 되기는 밥 먹듯이 쉽지만, ‘진짜’ 페미니스트는 너무도 숭고하여 셀수 없이 많은 판관들의 인증을 거쳐야 한다. 나는 ‘진짜’를 지향하지 않는다. ‘진짜’가 되려는 윤리적 욕망은 때로 타인을 폭력적으로 규정짓고 배척하며 제압할 위험이 있다. (이라영, 『진짜 페미니스트는 없다』 들어가는...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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현민
2021.07.09 | 조회 446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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