맑스에세이발표 오후 후기 & 쫑파티

띠우
2016-12-27 06:29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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점심먹고 에세이 발표는 계속되었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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무담님은 <인공지능과 인간소외>에 대한 글을 발표하셨다. 딥러닝 기법의 발전으로 인해 다가올 인공지능 시대를 상상하고 그로 인해 노동력이 대체됨으로써 일어나는 소외를 언급하였다. 글이 디스토피아적이라는 의견에 대해 무담님은 당장의 일상에서 대안을 찾는 방법도 가능하지만 큰 그림을 그리는 선에서 접근하고 싶었다는 말과 함께 거시적으로는 디스토피아적이지만 파국으로 가는 과정이 디스토피아적인 것이지 파국 이후에는 어떤 세상이 펼쳐질지 모른다. 힘과 힘의 대결을 의식하고 이야기하는 사람도 있어야 하는 게 아닐까라는 생각도 이야기하셨다. 그리고 문제는 인공지능기술, 딥러닝이 모두에게 공평한 것 같지만 무척이나 자본에 유리하다는 것을 주목해야한다.


한편 데이터셋을 모으는 것이 굉장히 중요한데 우리가 모을 수 있는 수준은 한계가 있다. 구글이나 페이스북등을 통해 자동적으로 그것을 모을 수 있는 덫을 놓는다. 그것들은 자연스럽게 막대한 데이터 수집장치가 된다. 지금까지 자본과는 달리 딥러닝은 공개적이고 많은 부문을 공유할 수 있다. 달리 말해 이것은 오히려 그들의 자신감으로 보인다. 결국 승리는 자기들이 가져갈 수밖에 없다는... 무담님은 공부하면서 이것이 프롤레타리아의 무기가 어떻게 될 수 있는가는 좀 더 찾아봐야할 것 같다는 말씀도 남기셨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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명식군은 맑스, 바쿠닌, 크로포트킨, 로자를 통해 의식성과 자생성에 관한 이야기를 들려주었다. 이 주제를 왜 쓰려고 했느냐는 질문에 대해 원래 아나키스트 책을 많이 읽어오던 차에 맑스를 읽다보니 다른 각도에서 그들을 보게 되었고, 그 사이에 어떤 차이가 있는지 생각하면서 문탁에서 배워온 것들을 되짚어 삶 속에서 어떤 것을 지향해야 할지에 대해 고민해보게 되었다고 말했다. 아나키즘은 자생성에, 맑스는 의식성에 중점을 둔 듯하긴 하지만 확실하게 단정지을 자료는 부족하다고 보았다.


내용이 시대착오적일 수도 있다는 말에 대해 고샘은 시대착오적이란 말은 칭찬이다, 위대한 문제는 사라지지 않고 다시 돌아오는데 주제를 계속 변주하면서 새롭게 해석할 수 있기 때문이다. 고샘은 이 주제를 계속 밀고 나가기를 권하셨다. 그것이 꼭 새로운 해결책으로 이어지지 않더라도 그 공부 과정은 사람과 공동체를 보는 시각에 분명히 어떤 영향을 줄 것이라는 말과 함께. 개인적으로는 바쿠닌과 크로포트킨을 읽어보고 싶어졌다.


 



광합성님은 <국가 권력의 해체와 꼬뮌의 자기통치>에 대한 글을 발표하셨다. 맑스의 프랑스 내전을 통해 국가가 해체되는 과정, 꼬뮌이 철저하게 개방적인 정치형태였다는 것이다. 그러한 꼬뮌적 자기 통치를 유럽에서의 풀뿌리 시민정당과 맞물려 설명한다. 이들의 활동의 특징은 반제도권, 반부패를 표방하며 정치인의 특권을 해체한다. 이중에서 오성운동의 3선 금지같은 것은 직업으로서의 정치적 특권을 확실히 없애는 조치일 수 있겠다는 이야기가 오갔다.


노동자 계급의 거버먼트로서 협동조합이라는 형태를 띤 이탈리아의 볼로냐나 스페인 몬드라곤 협동조합의 실험적인 정당활동의 예를 이야기한다. 스페인의 예를 들어 연정이 안 되면 선거를 다시 해야 하는 상황이 반복될 수 있다는 이야기는 인상적이다. 중요한 것은 서로 말하고 이야기를 듣는 과정이 중요하다. 정치스타트업 와글의 이야기도 꽤 오갔는데 또 다른 대의제일 뿐이라는 한계를 이야기했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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달팽이, 뚜버기, 향기님은 <소외의 해체-거버너되기>이다. 노동 소외는 소외의 감성을 낳는다. 거기에 모든 소외는 공동체의 해체와 관련이 있다는 것으로 공동체란 여러 기관들이 모여 하나의 신체를 구성하듯이 운동의 리듬을 맞추어가는 집합적 신체다. 노동자는 소외의 노동의 결과 소유를 낳는다. 사적 소유는 소외의 필연적인 귀결이라고 본다. 소외에 의해 일면화된 인간의 감성은 오직 소유의 감각으로만 세계를 만난다.


소유는 존재의 빈곤을 낳게 된다. 소외의 감각이 사적소유를 낳는다면 공통감각은 공통의 부를 낳는다. 신체를 통해 얻은 새로운 감각은 언어를 통해 받아들일 때 이전과는 다른 감각으로 느끼게 된다. 공통적인 감각을 깨워 다른 감성의 발명하는 것, 그리고 타자와 감응하는 신체가 되는 것은 고난이다. 공통의 리듬은 각 개체에 새로운 파동을 전달하고 개체들의 연결과 능동적 변형을 촉진한다. 그런 가운데 각 구성원들은 통치당하는 존재가 아니라 공동체의 통치자, 거버터 되기가 가능해진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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자누리, 작은물방울님의 발표는 <독일이데올로기의 교통과 공유지>였다. 처음 질문은 전체에 관한 것이었다. 전체를 조망하고 계획하고 전체를 창안하고 관리한다고 하는 것은 어떤 의미인가. 어떤 식으로든 분업은 일어나겠지만 의식적 분업이 어떤 협업을 위한 분업이라고 해보자. 예를 들어 우리의 공유지를 모델로 해 보면 이곳에서는 누가 분배해주지 않아도 노동 분업이 일어난다. 그런데 그 생산력이 생산하는 꼬뮌적 주체들의 힘이라고 보면 협업이 일어나는 그 장소 자체를 전체라고 볼 수 있지 않을까라는 이야기가 있었다.


연대의 문제, 공유지라는 것이 꼬뮌을 이야기할 때 흥미로운 것은 교통으로서의 꼬뮌을 말하는 부분이다. 공동체와 다른 공동체가 결합하는 방식, 연합으로서의 방식에 대한 이야기 속에서 고샘의 공동체에서의 경험이야기는 공감되는 부분이 많았다. 능동성과 자연발생성의 문제인지, 동질화 사이의 긴장인지, 사유화와 공유지 사이의 팽팽한 긴장감이 어떤 것인지 생각해 볼 만하다. 마지막에 연대를 교통으로 표현하는 것은 새롭다는데 모두가 동의하며 앞으로 이런 표현이 오가는 것이 아닐까 하는 이야기가 오갔다. 여러분, 우리 교통하러 갈까요?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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새털,건달바,히말라야님의 발표는 <유령이 돌아왔다. ‘마르크스와 우리상속자들>이라는 제목으로 유령을 불러왔다. 데리다의 마르크스의 유령들에서는 유령은 과거와 지금까지의 뭇 타자들의 이야기라고 한다. 늘 지금 있는 사람보다 먼저 있었던 존재로서 유령은 명령하고 우리는 복종한다는 것, 그들은 어떤 일 때문에 먼저 이야기를 하고 있고 그들이 하라는 대로 하지 않더라도 그 얘기를 듣고 복종의 위치에 있다는 것은 복종의 수동성과 비대칭적 면이 있는 것 같다. 앞서 이야기된 바틀비와는 다른 수동성과 비대칭성. 여기에 응답하는 것은 매우 윤리적인 사람이 된다라는 의미도 있다는. 혹시 맑스도 실천이라는 유령에 붙들려 괴로웠을수도 있었겠다는 이야기도 나왔다.


어긋남이 우리에게 주어져 있다. 어긋났기 때문에 이야기할 수 있다. 그래서 우리가 이렇게 소통할 수 있고 반복을 이렇게 이야기하는 것은 선물이다. 에세이에 인용된 레미제라블햄릿에서 인용한 문구는 아주 인상적이었다. 그리고 재미있는 것은 프랑스어로 존재와 유령이 발음상으로는 구별되지 않는다고 한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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길고 긴 에세이 발표가 6시에 끝났다. 이후 뒤풀이가 11시까지 이어질 정도로 분위기 좋게 마무리되었다. ^^



댓글 2
  • 2016-12-27 11:02

    이걸 다 정리하다니~

    띠우님의 꼼꼼함에 감탄할 뿐입니다.

    정리하느라 수고하셨어요~

  • 2016-12-27 20:07

    쫑파티 사진도 남겨요! ^^ 

    6시에 시작했으나...끝나는 건 항상 같다는...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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