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한뼘 양생 6회> 동의보감에서 찾아 본 여름의 양생법

기린
2021-08-24 07:19
371

  올 여름 폭염이 기승을 부렸다.(자료에 의하면 37일간 폭염경보가 계속되었다고 한다) 아침부터 에어컨을 트는 파지사유에서는 그런대로 견딜만했다. 그러나 집에 오면 온 집안 기물들이 전부 열기를 뿜었다. 서향이라 오후 세시쯤부터 넘어가는 햇빛이 쏟아져 들어오기 때문이었다. 집안의 창문을 다 열어 놓고 찬물로 샤워를 하고 선풍기를 풀가동해도 열이 식지 않았다. 저절로 냉커피를 찾게 되었다. 그래도 잠자리에 들면 열기 때문에 뒤척이기 일쑤였다. 이런 여름엔 어떻게 일상을 지내는 것이 몸을 잘 보살피는 양생일까 궁금해서 요즘 공부하고 있는 『동의보감』을 펼쳤다.

 

 

 

네 계절 중 여름철이 가장 조섭하게 힘드네

묵은 추위 몸 안에 숨어 있어 배가 차네

보신할 탕약이 없어서는 안 될 것

싸늘하게 식은 음식 입에 대지 말지어다

심장 기운 왕성함과 신장 기운 쇠약함을 금해야 하지만

특히 정(精)과 기(氣)의 유설을 꺼려야 할 것

자는 곳은 삼가 문을 꼭꼭 문을 닫고

생각을 가라앉혀 마음을 평화로이 하라

얼음물과 찬 과실도 몸에 좋지 않아

가을철 반드시 학질을 일으킨다네

『한 권으로 읽는 동의보감』 536쪽 「위생가(衛生歌)」

 

 위의 노래에서는 여름의 더위를 찬 기운으로 다스리는 것을 경계하고 있다. 몸 안이 차지면 오장육부의 활동에 영향을 미치기 때문이다. 그보다는 여름의 더위를 피하지 말고 땀을 내서 기운을 밖으로 보내는 것이 양생의 도라고 한다. 하지만 올 여름의 폭염은 여름의 양생의 도를 따르기에는 너무 심했다. 양산 없이 밖을 나가는 것은 엄두도 못 냈고, 잠깐만 나갔다와도 땀범벅이 되었다. 여름의 열기에 열린 땀구멍으로 땀이 줄줄 흘렀다. 에어컨 없는 실내를 상상할 수 없는 날씨였다.

 

 

 

 『동의보감』에서는 오장육부의 장기의 작용에 대해 음양오행과 짝지어 설명하고 있다. 여름의 화기(火氣)와 연결된 심장은 열을 담지한 혈을 전신으로 퍼뜨리면서 몸의 기본 대사를 책임지는데, 이런 심장을 ‘군주지관(君主之官)’으로 불렀다. 심장에서 퍼뜨리는 혈액이 온 몸 구석구석으로 돌아다니는 것을 군주의 영향력에 비유한 것이다. 겨울의 수기(水氣)와 연결된 신장은 혈액, 눈물, 진액, 뇌, 골수, 오줌 등 물의 형태인 것들의 순환에 관여한다. 신장은 ‘작강지관(作强之官)’으로 불리는데, 태어날 때부터 간직한 정(精)을 저장하고 몸의 70프로를 차지하는 각종 물을 주관하는 강력한 영향력을 가진 장기라는 의미이다.

 

 심장의 화기는 온 몸의 맥을 따라 따뜻하게 흐르는 혈로써 신장의 수기와 지속적으로 교류를 해야 순환이 원활하다. 그런데 양기가 발산되는 여름은 심장의 화기도 밖으로 뻗으려고 더욱 왕성해질 수밖에 없다. 신장의 물을 끌어올려 그런 심장의 화기를 제어해야 한다. 그런데 신장의 물이 부족하다면 어떻게 될까? 심장이 점점 뜨거워지면서 몸 안의 진액을 더욱 마르게 한 결과 병증이 나타나기도 할 것이다.

 

 

  나의 경우 오래된 변비가 있어서 유산균도 먹고 섭생도 신경 쓰면서 그럭저럭 다스렸다. 이번 여름 변비가 다시 심해졌다. 다른 변화가 없었는데 갑자기 이런 병증이 나타나는 까닭이 뭘까 싶어 책을 찾아보니 “화 기운이 너무 강해서 진액을 말리면 대변도 굳어서 변비가 된다.”(양생과 치유의 인문학 동의보감 331쪽)고 했다. 너무 더운 올 여름 땀도 많이 흘렸고 냉커피도 잦았으니 진액이 더 졸아 들었을 테다. 신장에 물이 부족하니 심장의 불을 끄러 올라 갈 여력도 없었던 셈이다.

 

  일단 저녁마다 마셨던 냉커피를 끊었다. 찬 음료로 잠깐의 열기는 식힐지 몰라도 몸 안에서는 카페인 성분으로 진액을 더 말리는 것 같아서였다. 마침 텃밭 꾸러미에서 채소들을 받아서 일삼아 쌈을 싸먹기도 했다. 그렇다고 단번에 효과가 나타나지는 않았다. 일단 항문 주변의 통증이 차도가 있나 가늠하면서 계속 살펴보는 중이다.

 

  주중에는 에어컨 있는 실내에서 보냈지만 휴일 날 뜨끈뜨끈한 집안에서 지내는 일은 도저히 감당이 안 되었다. 어느 일요일, 햇빛이 더 강렬해지기 전에 배낭에 이것저것 챙겨 넣고 집을 나섰다. 주말마다 여러 둘레길을 쏘다니며 봐 두었던 약수터로 가기 위해서였다. 집에서 출발해 두 시간 정도 걸어서 상현동 광교산 자락에 있는 매봉 약수터에 도착했다. 여름 숲 그늘이 제대로 드리워져 있었다. 약수터 주변에 마련된 벤치에 자리를 잡았다. 한 여름이라 그런지 약수터에 오르는 등산객도 뜸했고, 적당히 서늘한 그늘 밑에서 때때로 골짜기로 불어오는 바람 줄기가 한결 시원했다. 챙겨간 간식을 먹고 책도 읽었다. 점점 잡생각이 가라앉으니 집중도 잘 되고 책장이 착착 넘어갔다. 정수리 위에 꽂히던 햇빛이 등 뒤로 넘어가는 시간이 흐르고 나서 집으로 돌아왔다. 서향으로 지어진 집에서 보내는 여름은 양생에  확실히 불리했다.

 

                                                                  <               약수터 벤치뒤로 넘어가던 한 여름 오후의 햇살>

 

 한여름의 더위로 빠져나가는 기운을 다스리기 위해 잠을 잘 때는 문까지 꼭꼭 닫아야 한다는 양생법은 엄두도 낼 수 없었다. 에어컨이 있다면 가능할지도 모르겠지만. 이참에 에어컨을 장만하라는 주변의 걱정이 귀담아 들리지 않는 것을 보면, 이 정도의 폭염은 어찌어찌 견딜 만한가 싶기도 하다. 그사이 입추가 지나고 처서도 지나면서 집안의 공기도 살만해졌다. 몸의 통증도 많이 호전되었다. 올 여름 폭염을 통과하면서 자연의 기운과 내 몸이 연결되어 있음을 톡톡히 느꼈다. 본격 가을이 다가오는 즈음 내 몸이 이 계절과는 또 어떻게 조응할지 궁금해진다.

 

댓글 5
  • 2021-08-24 13:14

    살다살다 이리 강렬한 여름은 또 처음인 것 같습니다. 앞으론 매년 기록을 갱신하겠지요.

    2001년 첫 애 낳던 해가 그렇게 가물었는데, 그 땐 연일 방송에서 이렇게 가다가는 앞으로 25년 안에 가뭄으로

    인해 지구가 어떻게 된다는 협박성 뉴스를 계속하고 있었어요. 애 낳고 병원에서 이런 뉴스를 접하면서

    '아이고 이 아이들이 앞으로 살아갈 지구 환경이 너무 걱정되었더랬습니다'  사실은 주변 환경에 전혀 관심이 

    없었는데, 자식으로 하여금 주변을 보게 되는 계기가 되기도 했었습니다. (그래서 자연스레 환경정의 회원이 되었더랍니다 ㅋ)

    다행히 그 뉴스처럼 가뭄이 지속되진 않았지만, 요새 지구촌 저쪽에서 물이 부족하여 어쩌고 하는 뉴스를 접할 때면

    20년 전이 떠오릅니다. 

     

    그나저나, 올 여름 이리 더웠고 전염병까지 기승을 부리는 데  입추 ~ 처서까지 잘 넘어오셨어요..

    앞으로의 여름은 동의보감을 지혜를 얻어와서 또 한 해 넘겨보는 기술을 익힐 수 있지 않을까요... ^^

    물론 동의보감 시절과 지금은 너무도 다른지라,  저렇게 범생이 스탈의 문구들에 혹하게 되진 않네욤. 쩝.

    그래도 찬 음식 피해라, 배는 늘 따뜻하게 해라... 이 정도만 적당히 잘 버무리고 습을 만들어가면 더위로 인한

    건 쪼매 피해갈 수 있지 않을지... (아아 안마시는 저는 이렇게 이야기 하죠..   ㅋㅋㅋ)

    그리고 땀 좀 흘리고 살 좀 뺐나 ? 하고 들여다보고... (땀을 잘 안흘리는 저는 땀 좀 뺐다는 분들 보면 부럽더라고요)

    내년엔 훠어씬 건강한 여름을 날 수 있을 거에요.  기술의 발달로 인해. (더위를 견디는 기술 !!)  

    기린 🦒 응원합니다 !!!

  • 2021-08-24 13:35

    에어컨 구입!!!!

    • 2021-08-25 10:42

      사계절이 있는 우리나라, 그 안에서 나온 동의보감...

      인디언샘 말씀처럼 사철내내 똑같은 환경이 되어버렸고,  우리의 면역력은 어디로 갔는지...

      자연의 순환을 찾아보자고 공부하는 동의보감인데,

      그냥 답이 에어컨이면 너무 하자누~~  기교가 아니라 기본이라며 !!

      • 2021-08-25 12:30

        에어컨이 기본인 시대요.....나는 애어컨 켜고 여름 났으니 기린도 그러기를...

  • 2021-08-25 09:57

    요즘은 여름도 겨울도 없어요

    에어컨에 난방기에 다 같은 조건을 만들어버리니까요

    사철 내내 같은 과일들이 마트에 쏟아져 나오니 제철 과일이 뭔지도 모르고

    꽃들도 온실에서 사철내내 피어나지요

    과일, 꽃들은 어떻게 지내는지 모르겠지만

    우리 몸은 점점 더 면역력을 잃어가고 있지요

    코로나 팬데믹은 괜히 오는게 아니고 앞으로는 또 어떤 것들이 올지... 

     

영화대로 42길
  언제 어디서나 영화를 볼 수 있지만, 정작 영화에 대해 묻지 않는 시대.  우리는 영화와 삶의 사이길, 영화대로 사는 길에 대한 질문으로,  산업과 자본의 도구가 아닌 영화로서의 영화를 보고 읽습니다.   *본 리뷰에 사용된 이미지에 대한 저작권은 해당 영화에 있습니다.   삶은 내 맘대로 되지 않는다 빔 벤더스의 <돈 컴 노킹Don't Come Knocking (2005)>       1. 퇴물 카우보이, 어머니를 찾아가다   평소 알고 지내던 두 부부와 함께 점심을 먹었다. 이야기를 나누다가 서로의 휴대폰을 사적공간으로 볼 것이냐에 대해 다른 입장들이 있음을 알게 되었다. 부부 혹은 가족이라면 남과는 다른 정도로 공유해야 한다는 사람과 휴대폰을 본다는 것 자체를 이해 못하는 사람까지, 여섯 명의 생각에서 차이들이 드러났다. 태어날 때부터 휴대폰이 몸의 일부인 젊은 세대라면 당연히 사적공간이라는 쪽이 강하겠지만, 전제가 부부나 가족이 되면 그 경계에 대해 모호한 입장들을 취하는 경우가 있었다. 피는 물보다 진한 만큼 어떤 잘못도 용서와 사랑으로 감싸주는 것이 가족이라는 달콤한 말이 여러 매체의 형태로 재생산되어 우리 앞에 나타난다. 그런 만큼 우리는 ‘가족’이라는 이미지의 환상에 갇혀 있는 것이 분명하다.     <돈 컴 노킹Don't Come Knocking>의 오프닝은 인상적이다. 검은 화면에 난 두 개의 구멍 사이로 파란 하늘이 보인다. 영화를 보다 보면 그것이 주인공의 두 눈과 매우 닮아있음을 알게 된다. 광활한 서부에서 말을 타고 사라지는 인물의 모습에 정통 서부극인가 할 찰나에 볼품없고 작은...
  언제 어디서나 영화를 볼 수 있지만, 정작 영화에 대해 묻지 않는 시대.  우리는 영화와 삶의 사이길, 영화대로 사는 길에 대한 질문으로,  산업과 자본의 도구가 아닌 영화로서의 영화를 보고 읽습니다.   *본 리뷰에 사용된 이미지에 대한 저작권은 해당 영화에 있습니다.   삶은 내 맘대로 되지 않는다 빔 벤더스의 <돈 컴 노킹Don't Come Knocking (2005)>       1. 퇴물 카우보이, 어머니를 찾아가다   평소 알고 지내던 두 부부와 함께 점심을 먹었다. 이야기를 나누다가 서로의 휴대폰을 사적공간으로 볼 것이냐에 대해 다른 입장들이 있음을 알게 되었다. 부부 혹은 가족이라면 남과는 다른 정도로 공유해야 한다는 사람과 휴대폰을 본다는 것 자체를 이해 못하는 사람까지, 여섯 명의 생각에서 차이들이 드러났다. 태어날 때부터 휴대폰이 몸의 일부인 젊은 세대라면 당연히 사적공간이라는 쪽이 강하겠지만, 전제가 부부나 가족이 되면 그 경계에 대해 모호한 입장들을 취하는 경우가 있었다. 피는 물보다 진한 만큼 어떤 잘못도 용서와 사랑으로 감싸주는 것이 가족이라는 달콤한 말이 여러 매체의 형태로 재생산되어 우리 앞에 나타난다. 그런 만큼 우리는 ‘가족’이라는 이미지의 환상에 갇혀 있는 것이 분명하다.     <돈 컴 노킹Don't Come Knocking>의 오프닝은 인상적이다. 검은 화면에 난 두 개의 구멍 사이로 파란 하늘이 보인다. 영화를 보다 보면 그것이 주인공의 두 눈과 매우 닮아있음을 알게 된다. 광활한 서부에서 말을 타고 사라지는 인물의 모습에 정통 서부극인가 할 찰나에 볼품없고 작은...
띠우
2022.01.17 | 조회 314
요요와 불교산책
무엇이 비린 것인가   세상의 살아있는 생명을 수호하지 못하고, 남의 것을 빼앗으면서 그들을 해치려 하고, 계행을 지키지 않고, 잔인하고, 거칠고, 무례한 것, 이것이야말로 비린 것이지 육식이 비린 것이 아닙니다.(『숫타니파타』 『아마간다의 경』)   훔친 돼지만이 살아남았다 『훔친 돼지만이 살아남았다』를 읽었다. 새벽이라는 돼지가 있다. 새벽이는 직접행동DxE(Direct Action Everywhere) 활동가들이 화성에 있는 한 종돈장에서 훔쳐온 돼지이다. 이들은 왜 돼지를 훔치는 절도의 범죄를 저질렀을까? 디엑스이 활동가들은 2019년 4월부터 자발적 참여자들과 함께 매주 도살장을 찾아다니기 시작했다. 그들은 온몸으로 도살장으로 들어가는 차를 막았다. 도살을 막을 수 있다고 생각해서가 아니었다. 마지막으로 동물들의 얼굴을 잠시라도 마주하기 위해서였다.   첫 도살장 방문 후 세 달이 지난 어느 날 밤 그들은 돼지 5,000여 마리를 기르는 종돈장에 몰래 들어가 태어난 지 얼마 안 된 새끼돼지 세 마리를 훔쳤다. 세 마리 중 한 마리가 살아남았다. 우리나라에서는 매년 1,700만 마리의 돼지가 도살된다. 새벽이는 공개 구조되어 살아남은 돼지의 이름이다.   이들은 우여곡절 끝에 새벽이의 보금자리인 생추어리를 만들었다. 생추어리(sanctuary)는 ‘saint’와 마찬가지로 ‘성스러운 곳’을 뜻하는 라틴어 ‘sanctuarium’에서 왔다.(위키피디아) 생추어리는 마치 누구라도 그곳에 들어가면 면책특권이 주어지고 보호받을 수 있는 ‘소도’와 같은 성역이자 피난처이다. 수태될 때부터 고기가 되기로 운명 지어진 돼지들이 태어난 지 6개월 만에 도살되는 현실에서 새벽이는 지옥행 운명으로부터 구조된 돼지가 되었다. ‘훔친 돼지만이 살아남았다’는 역설은 ‘죽이는 것은 합법이고 살리는 것은 불법인’(작가 홍은전의 추천사에서 인용) 공장식 축산의...
무엇이 비린 것인가   세상의 살아있는 생명을 수호하지 못하고, 남의 것을 빼앗으면서 그들을 해치려 하고, 계행을 지키지 않고, 잔인하고, 거칠고, 무례한 것, 이것이야말로 비린 것이지 육식이 비린 것이 아닙니다.(『숫타니파타』 『아마간다의 경』)   훔친 돼지만이 살아남았다 『훔친 돼지만이 살아남았다』를 읽었다. 새벽이라는 돼지가 있다. 새벽이는 직접행동DxE(Direct Action Everywhere) 활동가들이 화성에 있는 한 종돈장에서 훔쳐온 돼지이다. 이들은 왜 돼지를 훔치는 절도의 범죄를 저질렀을까? 디엑스이 활동가들은 2019년 4월부터 자발적 참여자들과 함께 매주 도살장을 찾아다니기 시작했다. 그들은 온몸으로 도살장으로 들어가는 차를 막았다. 도살을 막을 수 있다고 생각해서가 아니었다. 마지막으로 동물들의 얼굴을 잠시라도 마주하기 위해서였다.   첫 도살장 방문 후 세 달이 지난 어느 날 밤 그들은 돼지 5,000여 마리를 기르는 종돈장에 몰래 들어가 태어난 지 얼마 안 된 새끼돼지 세 마리를 훔쳤다. 세 마리 중 한 마리가 살아남았다. 우리나라에서는 매년 1,700만 마리의 돼지가 도살된다. 새벽이는 공개 구조되어 살아남은 돼지의 이름이다.   이들은 우여곡절 끝에 새벽이의 보금자리인 생추어리를 만들었다. 생추어리(sanctuary)는 ‘saint’와 마찬가지로 ‘성스러운 곳’을 뜻하는 라틴어 ‘sanctuarium’에서 왔다.(위키피디아) 생추어리는 마치 누구라도 그곳에 들어가면 면책특권이 주어지고 보호받을 수 있는 ‘소도’와 같은 성역이자 피난처이다. 수태될 때부터 고기가 되기로 운명 지어진 돼지들이 태어난 지 6개월 만에 도살되는 현실에서 새벽이는 지옥행 운명으로부터 구조된 돼지가 되었다. ‘훔친 돼지만이 살아남았다’는 역설은 ‘죽이는 것은 합법이고 살리는 것은 불법인’(작가 홍은전의 추천사에서 인용) 공장식 축산의...
요요
2022.01.16 | 조회 444
영화대로 42길
          언제 어디서나 영화를 볼 수 있지만, 정작 영화에 대해 묻지 않는 시대.  우리는 영화와 삶의 사이길, 영화대로 사는 길에 대한 질문으로,  산업과 자본의 도구가 아닌 영화로서의 영화를 보고 읽습니다.   *본 리뷰에 사용된 이미지에 대한 저작권은 해당 영화에 있습니다.       카메라로 드러나는 질문의 태도 | 킬링필드, The Killing Fields | 롤랑 조페 감독 | 1984             영화 <킬링필드>는 1973년 캄보디아에서 시작합니다. 인접한 베트남에서 전쟁에 패한 미국이 막 철수할 무렵이었죠. 그로 인해 미국의 지원을 받던 캄보디아 ‘론 놀’정권의 세력도 약해지고, 론 놀 역시 하와이로 망명을 떠나게 됩니다. 이때 캄보디아의 급진적인 좌익무장단체인 ‘크메르 루즈’가 무정부 상태의 캄보디아를 장악하게 됩니다. 뉴욕타임즈의 기자 시드니(샘 워터스톤)는 급박한 캄보디아의 상황을 취재하기 위해 수도 프놈펜으로 날아갑니다. 공항에서 그를 기다리는 현지통역인 겸 기자인 프란(행 S. 응고르)은 비행기가 연착되고, 지프차들이 어디론가 급하게 이동하는 모습을 보고 뭔가 ‘사건’이 일어났음을 직감합니다. 그의 예상대로 그날, 크메르 루즈군을 섬멸하기 위한 폭격이 미국의 잘못으로 인해 엉뚱한 곳으로 폭탄이 투하되고 수 백 명의 민간인이 사망하는 사건이 일어났습니다.   왼쪽이 시드니, 오른쪽이 프란   다음 날 두 사람은 함께 사건현장으로 달려가려하지만 가는 길이 쉽지 않습니다. 사건을 은폐하려는 미군의 방해로 미군 헬기를 이용할 수도 없었습니다. “내가 누군지 알아? 난 기자라고, 기자!!” 물론 소용없습니다.시드니는 미군 대령에게도, 프란에게도...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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청량리
2022.01.03 | 조회 285
세미나 에세이 아카이브
1. 너무나 인간적인 세계   ‘숲은 생각한다’라는 이 짧은 문장은 내 안의 환상을 불러일으킨다. 어쩌면 나는 이 문장을 말할 때 꽤 희망적이게 된다. 페미니스트와 비건 지향인이 되기로 하면서 나는 내가 살고 싶은 세상보다 살고 싶지 않은 세상을 더 많이 마주했다. 너무나 인간적인 세계 말이다. 정상성을 모방하며 종종 정상성의 범주에 들지 않는 나는 나와 비슷한 인간들을 만날 때마다, 혹은 인간이 아닌 존재들을 만날 때마다 세계가 협소하게 느껴졌다. ‘숲은 생각한다’는 말은 어쩔 수 없는 인간인 나의 상상력을 확장시킨다.   만약 사고가 인간적인 것을 넘어서 존재한다면, 우리 인간은 이 세계 속에 있는 유일한 자기들selves이 아니다.   <숲은 생각한다>에서는 자기self라는 개념이 나온다. ‘자기’는 우리가 흔히 주체라고 생각하는 ‘인간’ 뿐만 아니라 살아가기 위해 기호작용을 하고 표상하는 모든 존재를 지칭한다. 비인간 존재도 ‘자기’로 명명되며, 숲은 생각하는 존재가 된다. 숲 속의 수많은 존재들은 살아있는 ‘자기’다. 그러면 이 세계는 인간만의 것이 아니게 된다.   우리는 언제 어디에서 도덕성이 존재하게 되는지를 정확하게 말할 수 있어야 한다. 단도직입적으로 말하면, 인류가 이 지구 위를 걷기 전에는 도덕성도 윤리도 존재하지 않았다. 도덕성은 우리와 이 행성을 공유하는 비인간 존재들로부터 구성되는 것이 아니다.   이제 인간적인 것들이 비인간 자기들의 것을 무시한 채 이 세계의 오랜 생태계를 바꾸고 있다는 건 명백한 사실이다. 더 이상 내게 일어나는 일들을 이 세상의 도덕으로 해석하고 답을 찾는건 너무 부족하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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인문약방
2022.01.02 | 조회 330
세미나 에세이 아카이브
인간(Man, 人間)을 넘어선다는 것   나는 인간을 별로 좋아하지 않는다. 인간들보다 인간이 아닌 것, 예를 들어 비인간 동물이나 자연이 더 잘 이해된다. 나에게 ‘인간’이라는 단어는 이해되지 않는 범죄들을 저지르고, 동물들은 소유물 혹은 고깃덩어리로 대하며, 여자를 사람으로 보지 않는 ‘남자’들을 생각나게 한다. 그렇다고 내 주변에 이런 사람이 가득한 건 아니다. 다만 매일 올라오는 각종 폭력 범죄들, 도로에서 마주치는 동물의 사체들, 이해되지 않는 행동과 말을 하는 사람들, 이들을 마주칠 때마다 인간에 대한 애정이 뚝뚝 떨어진다. 페미니즘, 환경, 동물권을 알게 되면서 더 자주 인간들이 싫어졌다. 처음 공부를 할 때는 ‘인간’을 넘어설 수 있을 것 같다는 기대가 컸다. 하지만 공부를 하면 할수록, 이분법적인 사고방식에 사로잡혔다. 나에게 인간은 곧 남자가 되어버렸고, 나는 남자에게 마음을 열어주기가 쉽지 않다. 어차피 이 세상에서 그들과 나 둘 중에 하나만 살아갈 방법은 없다는 것도 안다. 그렇다면 내가 그들과 관계를 맺을 수 있는 방법은 무엇일까. 내가 그들을, 그들이 나를 해석할 수 있을까. 나의 이분법적인 사고방식을 넘어설 수 있을까?           처음에 양생 세미나를 신청할 때는 몸과 마음이 연결되는 것이 궁금했다. 하지만 <숲은 생각한다>를 읽으며 어느새 인류학까지 왔다. ‘나’에서 숲으로 확장된 셈이다. <숲은 생각한다>는 “인간적”인 것에 의문을 던진다. 인간적인 것을 넘어선 인류학을 아마존 숲속에 있는 루나족의 생활을 통하여 이야기한다. 그들이 어떻게 문명과 야생 사이에서 소통을 하고 있는지 담겨있다. 인간은...
인간(Man, 人間)을 넘어선다는 것   나는 인간을 별로 좋아하지 않는다. 인간들보다 인간이 아닌 것, 예를 들어 비인간 동물이나 자연이 더 잘 이해된다. 나에게 ‘인간’이라는 단어는 이해되지 않는 범죄들을 저지르고, 동물들은 소유물 혹은 고깃덩어리로 대하며, 여자를 사람으로 보지 않는 ‘남자’들을 생각나게 한다. 그렇다고 내 주변에 이런 사람이 가득한 건 아니다. 다만 매일 올라오는 각종 폭력 범죄들, 도로에서 마주치는 동물의 사체들, 이해되지 않는 행동과 말을 하는 사람들, 이들을 마주칠 때마다 인간에 대한 애정이 뚝뚝 떨어진다. 페미니즘, 환경, 동물권을 알게 되면서 더 자주 인간들이 싫어졌다. 처음 공부를 할 때는 ‘인간’을 넘어설 수 있을 것 같다는 기대가 컸다. 하지만 공부를 하면 할수록, 이분법적인 사고방식에 사로잡혔다. 나에게 인간은 곧 남자가 되어버렸고, 나는 남자에게 마음을 열어주기가 쉽지 않다. 어차피 이 세상에서 그들과 나 둘 중에 하나만 살아갈 방법은 없다는 것도 안다. 그렇다면 내가 그들과 관계를 맺을 수 있는 방법은 무엇일까. 내가 그들을, 그들이 나를 해석할 수 있을까. 나의 이분법적인 사고방식을 넘어설 수 있을까?           처음에 양생 세미나를 신청할 때는 몸과 마음이 연결되는 것이 궁금했다. 하지만 <숲은 생각한다>를 읽으며 어느새 인류학까지 왔다. ‘나’에서 숲으로 확장된 셈이다. <숲은 생각한다>는 “인간적”인 것에 의문을 던진다. 인간적인 것을 넘어선 인류학을 아마존 숲속에 있는 루나족의 생활을 통하여 이야기한다. 그들이 어떻게 문명과 야생 사이에서 소통을 하고 있는지 담겨있다. 인간은...
인문약방
2022.01.02 | 조회 261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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