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요요와 불교산책 6회] 나는 세상과 싸우지 않는다

요요
2022-05-08 22:55
375

나는 세상과 싸우지 않는다

 

나는 세상과 싸우지 않는다. 세상이 나와 싸운다. 진리를 설하는 자는 세상의 누구와도 싸우지 않는다.(『쌍윳따니까야』 22:94)

 

바람이 움직이는가 깃발이 움직이는가

 

깊은 산에 있는 사찰은 본당에 이르기까지 여러 개의 문을 거쳐야 하는 경우가 많다. 그 문들 중 첫 번째 문이 일주문(一柱門)이다. 기둥 하나로 지붕을 받치고 있기 때문에 일주문이라고 한다. 일주문의 현판에는 보통 산 이름과 절 이름이 쓰여 있다. 그런데 역사가 오랜 절에 가보면 일주문에 앞서 사찰의 존재를 알리는 돌기둥이 있다. 바로 당간지주(幢竿支柱)다. 본래는 두 개의 돌기둥 사이에 높이 솟은 당간이 세워져 있었다. 당간이란 당(幢)이라고도 하고 번(幡)이라고도 하는 깃발을 거는 기둥이다. 당간지주의 용도는 당간을 양옆에서 지지하는 것이다. 절에 행사가 있을 때 그 당간에 깃발을 걸어 행사를 알렸다고 한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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일주문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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당간지주

 

선(禪) 수행자들을 위해 화두 48개를 모아 놓은 『무문관』 29칙에 이 깃발과 관련된 유명한 에피소드가 나온다. 중국 선종의 여섯 번째 조사인 혜능이 주인공이다. 당간지주에 매달린 깃발이 흔들리는 보고 두 스님이 다투고 있었다. 한 스님은 ‘바람이 움직인다’고 했고 다른 스님은 ‘깃발이 움직인다’고 주장했다. 모든 시비가 그렇듯이 두 스님은 꽤 열을 올리며 서로 네가 옳다, 내가 옳다 요란하게 다투었던 모양이다. 그 절에 왔던 혜능이 한 마디 던졌다. “바람이 움직이는 것도 아니고, 깃발이 움직이는 것도 아닙니다. 그대들의 마음이 움직이는 것입니다.” 그 소리에 다툼이 멈추었다.

 

움직이는 것은 바람도 아니고 깃발도 아니다

 

아무리 천오백년 전 일이라지만 두 스님의 논쟁을 그저 덤앤더머 두 땡중의 어리석고 무익한 말싸움이라고 볼 수는 없다. 정말 그렇다면 아무리 멋진 말을 했다 한들 혜능의 개입이 무슨 의미가 있겠는가. 어디에도 그런 기록은 없지만 내 생각에 아마도 두 사람은 깃발이 흔들리는 것을 보고 이야기를 나누다 바람과 깃발 중 무엇이 더 근본적인지 따졌던 것 같다. 바람이 움직인다고 한 스님은 바람이 일차적이고 깃발은 부차적이라고 보았다. 바람이 능동이고 깃발은 수동인 셈이다. 다른 스님은 만일 당간에 깃발이 걸려 있지 않았더라면 바람이 불더라도 거기에는 흔들리는 것이 없었을 터이니 이 상황에서는 깃발이 더 근본적이라고 본 것 같다.

 

바람이냐 깃발이냐를 따져 묻는 것은, 물질이 근본적인가 정신이 근본적인가, 유신론인가 무신론인가, 자아는 실체인가 아닌가, 세계는 유한한가 무한한가와 같은 형이상학적 논쟁들만큼 두 스님에게는 공부로 쌓은 도력과 내공을 다투는 문제였는지도 모른다. 두 스님은 자신들이 아는 온갖 지식을 인용하고 근거를 대며 논쟁하고 있지 않았을까. 주위 사람들 역시 그들의 논쟁을 주의 깊게 지켜보고 있었다.

 

깃발을 걸었던 당간

 

그런 상황에 혜능이 개입한다. “바람이 움직이는 것도 아니고 깃발이 움직이는 것도 아닙니다. 움직이는 것은 그대들의 마음입니다.” 혜능은 자신의 견해를 옹호하기 바쁜 두 스님에게 그 한마디를 던졌다. 『무문관』은 혜능의 개입이 그들의 다툼을 한순간에 그치게 했다고 한다. 과연 그랬을까, 솔직히 말해 나는 그것이 좀 의심스럽다. 자신의 견해를 증명하는데 열을 올리고 있는 사람들에게 “바보야, 지금 문제는 깃발도 바람도 아니고, 집착 때문에 동요하는 네 마음”이라고 말한들 귀에나 들어오겠는가. 만일 ‘논쟁에서 이기고 지는 것에 연연해서 지금 흔들리고 있는 네 마음을 보라’는 그 한마디 말로 다툼이 그쳤다면 우리가 주목해야 할 사람은 주인공인 혜능대사가 아니다. 오히려 논쟁의 장을 떠나 성찰의 장으로 즉시 방향을 바꿀 수 있었던 그 이름 없는 스님들이야말로 우리의 귀감이 되어야 할 것이다.

 

견해에 대한 집착은 위험하다

 

나 역시 하루하루 ‘바람이냐, 깃발이냐’와 같은 문제 앞에서 흔들리는 삶을 살고 있다. 일상에서 내 생각과 다른 견해들과 마주칠 때마다 마음이 불편하다. 나이를 먹을수록 지혜가 자라나서 다른 사람들과 함께 살아가는데 더욱 유능해지거나 도통할 만도 한데 희한하게도 그게 그렇지가 않다. 오히려 나이가 들수록 소통의 능력이 커지는 것이 아니라 고집불통이 되는 사람도 많으니 말이다. 게다가 우리 사회는 자신과 견해가 다른 사람에 대한 비난과 혐오가 도를 넘고 있다. 최근 나는 포털 사이트의 뉴스를 검색하다 댓글의 혐오와 조롱의 수준에 기함한 경우가 한두 번이 아니다. 표현에 정도의 차이는 있겠지만 서로 생각이 다른 사람들이 다투고, 그 과정에서 어떻게든 남을 이겨 먹으려 하는 것은 예나 지금이나 크게 다르지 않은 것 같기도 하다.

 

기원전 5~6세기, 붓다의 시대는 수많은 자유사상가들의 시대이기도 했다. 붓다 역시 새롭게 등장한 자유사상가들 중의 한 사람이었다. 초기 경전인 『범망경』에서 붓다는 당시 그와 어깨를 겨눈 자유사상가들의 견해가 62가지라고 자세히 알려준다. 그렇게 다양한 생각들이 서로 자신이 옳다며 논쟁을 벌이던 시대의 한복판에서 붓다는 무엇을 주장했을까?

 

『니까야』의 곳곳에는 많은 도전자들이 찾아와 ‘당신이 주장하는 것이 무엇인지 말을 해 봐라. 어디 한 번 진검승부를 가려 보자’는 식으로 붓다에게 싸움을 거는 장면이 자주 등장한다. 그런데 그때마다 붓다는 자신의 견해를 주장하기보다 자신은 특정 견해에 이끌리지 않는다고 답한다. 그것은 논쟁을 피하는 것과는 다른 입장이었다. 붓다는 모름지기 논쟁이 벌어지면 어떻게든 이겨서 세상의 명예와 칭찬을 얻고자 하는, 도전자들이 당연하게 생각하는 전제에 대해 문제를 제기한 것이다.

 

‘이것만이 진리이고 다른 것은 거짓이다’라고 보고 말하는 수행자들은 그와 마찬가지로 그렇게 보고 말하는 수행자들과 이견을 갖게 될 것입니다. 내가 이들과 이견을 갖게 되면 논쟁이 있게 되고 논쟁이 있으면 싸움이 있게 되고, 싸움이 있게 되면 해침이 있게 됩니다. 올바른 수행자는 이견, 논쟁, 싸움, 해침을 자신 안에서 올바로 알아차려서 그러한 견해를 버리고 다른 견해에도 집착하지 않습니다. 이와 같이 해서 올바른 수행자는 견해를 버리고 견해를 떠납니다.(『맛지마니까야』 74 『디가나카의 경』)

 

이 말을 수행자는 어떤 견해도 가져서는 안 된다고 말한 것으로 오해해서는 안 된다. 우리는 살아있는 한 우리가 만나는 대상에 대해 어떤 식으로든 느낌과 견해와 의도를 가지지 않을 수 없다. 그러나 견해 역시 다른 것과 마찬가지로 그가 살아온 경험과 사회적 배경, 맥락과 조건에 의지하여 만들어지는 것이다. 그런 것들과 무관하게 생겨난 견해는 없다. 그러니 견해는 조건적이고 변화하는 것이며 고정되고 독립적인 실체가 없는 것이다. 견해도 우리의 몸이나 자아와 마찬가지로 물거품이나 아지랑이처럼 무상한 것이다. 그것을 통찰하지 못하고 자신의 견해에 탐착하고 다른 견해를 가진 상대방에 대해 어리석고 현명하지 못하다고 비난한다면 그는 스스로 만든 견해의 그물-아집과 독단에 사로잡힌 것이다.

 

견해에 대한 집착은 참으로 뛰어넘기 어려우니, 생각을 깊이 하더라도 독단을 고집하기 마련이다. 그러므로 사람은 이러한 집착 안에서 독단을 취하기도 하고 또한 버리기도 한다.(『숫타니파타』785)

 

자신의 견해로 완결되어 있는 사람은 나만 옳다는 교만으로 미쳐있고 자만이 넘친다. 붓다는 견해에 대한 집착 때문에 일어나는 번뇌-집착, 승부욕, 분노, 원한, 억울함, 복수심, 후회-를 올바르게 알아차리라고 요청한다. 알아차림 없이 분별 망상들을 멈추게 할 수는 없다. 마음에서 일어나는 그런 망상들에 붙들려서 산다면 남을 해치고 자신도 해치게 된다.

 

나는 세상과 싸우지 않는다

 

붓다는 우리를 괴로움으로 이끄는 것이 갈애와 집착이라고 말한다. 집착에는 네 가지 종류가 있다. 감각적 욕망에 대한 집착인 욕취(欲取), 계율과 금기에 대한 집착인 계금취(戒禁取), 견해에 대한 집착인 견취(見取), 자아에 대한 집착인 아어취(我語取)가 그것이다. 그런데 견해에 대한 집착은 다른 세 가지 집착에 밀접하게 의지하고 있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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내가 어떤 견해를 갖는가는 우리의 경험과 느낌에 강하게 의존한다. 나의 경험과 느낌이야말로 욕망의 장에서 벌어지는 일이 아니던가. 내가 집착하는 욕망은 내 견해를 좌우하는 힘을 행사한다. 견해에 대한 시비 판단은 욕망만이 아니라 도덕적 판단과도 깊이 관련되어 있다. 계율과 금기에 대한 집착이란 우리가 은연중에 당연히 지켜야 한다고 내면화한 도덕적인 잣대에 대한 집착이다. 그 또한 견해와 결코 무관하지 않다. 또 우리는 자신의 견해나 생각을 자기 자신과 동일시하는 경우가 많다. 내 생각이 곧 나의 정체성이라고 믿어 의심치 않기 때문에 내 생각에 딴지를 거는 사람이 있으면 마치 그가 나의 존재를 부정이나 한 듯이 쉽게 모욕감을 느끼고 분노한다.

 

네 가지 집착 중 견해에 대한 집착은 나머지 세 가지 즉 욕망에 대한 집착, 도덕적 판단에 대한 집착, 자아에 대한 집착과 떼려야 뗄 수 없는 관계에 있다. 수행자는 이런 집착들을 알아차리고 그것들을 약화시키기 위해 수행하는 사람이고, 붓다는 이런 집착들로부터 완전히 해방된 사람이다. 그런 까닭에 붓다는 이렇게 말할 수 있었다.

 

이와 같이 마음이 해탈된 수행승은 그 누구의 편도 들지 않고 누구와도 싸우지 않습니다. 그래서 그는 세상에서 쓰는 말에 집착하지 않고 세상에서 쓰는 말을 사용합니다.(『맛지마니까야』 74 『디가나카의 경』)

 

붓다는 싸우지 않는 사람이다. 그것은 붓다가 세상으로부터 초월해 있는 존재라거나 세상일에 무관심하거나 홀로 자신의 평화를 즐기는 사람이라는 것을 의미하지 않는다. 역사상 실존한 고따마 붓다 역시 깨달은 이후 45년의 생을 길 위에서 풍찬노숙하며 대중을 만나는데 헌신했다. 그의 삶은 곧 그가 남긴 말이기도 했다. 그는 세상의 말을 사용하되, 그 말에 집착하지 않았다. 누구와 말하느냐에 따라 붓다의 말은 천변만화한다. 모든 말이 방편이고 각 사람의 근기에 맞는 대기설법이었다.

 

무릇 모든 개념과 견해는 무상하게 변화하는 자연과 욕망과 사유의 흐름을 언어의 틀 안에 고정시키고 가둔다. 그러므로 우리는 말에 갇히지 않고 그것이 설해진 배경과 맥락, 말 너머의 현실까지 폭넓게 볼 수 있는 시야를 가져야 한다. 들리지 않는 말도 들을 수 있는 귀를 열어야 한다. 말로 표현되는 개념과 견해는 달을 가리키는 손가락 같은 것이다. 지혜의 눈으로 손가락이 아니라 달을 보지 못한다면 우리는 끝내 견해에 대한 집착으로 끝없는 논쟁의 세계에 갇히고 말 것이다.

 

논쟁의 능력이 찬탄의 대상이 되고 스펙이 되는 세상에서 견해에 대한 집착을 버리고 견해를 떠나라는 붓다의 생각은 세상의 흐름을 거스른다. 붓다는 견해의 유혹과 위험을 지적하는데 그치지 않고 그것을 끝까지 밀고 나갔다. 그 철저함으로 그는 마침내 자신이 설한 가르침조차 뗏목처럼 여기라고 한다. 강을 건너면 뗏목을 버리듯이 가르침에도 집착하지 않아야 한다는 데에 이르렀던 것이다. 우리 역시 말과 생각으로 하루하루를 쌓아간다. 설령 대부분의 시간을 ‘바람이냐 깃발이냐’를 따지는 논쟁의 세계에서 좌충우돌 헤매더라도 오늘 하루만이라도 견해에 집착하지 않고 마음의 동요를 잘 알아차리고 지혜롭게 대처하는 사람이 되기를 소망해 본다. 오늘은 세상과 싸우지 않는 사람, 부처님께서 오신 날이다.

 

 

 

댓글 7
  • 2022-05-09 08:19

    부처님 오신날, 요요님의 법문이네요.

    이 글은, 자체로 아름다와요.

    다만, 당파성을 버리지 않으면서도 분별심을 동시에 버리는 게 어떻게 가능한지, 현실에서는 여전히 잘 모르겠어요. 

    또 자신의 수행의 영역(마음의 동요를 알아차리고 집착과 갈애, 분별심에서 벗어나는 것)과 사회적 공론장에서의 합의(민주주의)의 문제가 또 어떻게 같고 다른지도 요요님과 이야기해보고 싶네요.

     

    그래도 요요님 글 기다렸는데, 고맙습니다.

  • 2022-05-09 08:41

    어제 ,그러니까 5월 8일 밤 티비에 법륜스님이 나오셔서 탐진치를 버린 사람이 고통에서 벗어날 수 있을 것이라는 

    설법을 듣고 잤는데, 아침에 요요샘의 글을 읽네요^^ 

    탐진치에서 벗어나 세상과 싸우지 않는 사람... 되고 싶어요^^ 어떻게?  그게 문제네요.

     

     

     

  • 2022-05-09 09:03

    하루만이라면 해볼 수 있을 것 같아요. 하루만이라도....

  • 2022-05-09 11:09

    저한테 쓰신 글 같네요 ㅠㅠ

     스스로하고도 세상하고도 싸움을 그만하고 싶습니다..

  • 2022-05-09 16:56

    무문관의 화두 40여개 중 몇 개를 읽어 봤던 기억이 납니다.  이런 개가 풀 뜯어 먹는 소리를 왜 했을까? 그러다가 요요샘 말씀처럼 말 이전의 사유, 언어화/개념화 이전의 무언가를 이야기 하는 것 같다는 생각만 품은 채 다음을 기약했습니다. 더 읽어 본들... 더 깊이 내 안으로 들어가 본들, 개똥철학이나 정신 승리 밖에 못했을 나이였으니 어쩌면 잘했는지 모르겠습니다. 세상은 넓고 읽을 건 많았으니까요... 얼마전 화두라는 말이 공안이란 말과 같은 의미라는 것도 새로이 알았습니다.  이제 그때와는 다르게 혈기도 결기도 잃어가는 걸 보면...늦되긴 했어도 읽을 만한 연배가 되어 가는걸까요? 잘 읽었습니다.

  • 2022-05-10 12:47

    예리한 동시에 부드럽고

    단호하지만 공격적이지 않은,

    무엇보다 자극적이지 않은 글이 마음에 와 닿습니다.

    오늘 하루만이라도 견해에 집착하지 않겠다는 낮은 고백의 말에 더불어 위로와 힘을 얻습니다.

    저도 오늘 하루 그런 마음 가져 볼래요.

    글 감사합니다.

    -지나가는 사람-

     

  • 2022-05-16 11:22

    그는 세상의 말을 사용하되, 그 말에 집착하지 않았다. 

    이 세상을 떠나지도 않고 관심을 버리지도 않고 그러면서도 싸우지 않을 수 있는 방법...  아!!!

요요와 불교산책
나는 세상과 싸우지 않는다   나는 세상과 싸우지 않는다. 세상이 나와 싸운다. 진리를 설하는 자는 세상의 누구와도 싸우지 않는다.(『쌍윳따니까야』 22:94)   바람이 움직이는가 깃발이 움직이는가   깊은 산에 있는 사찰은 본당에 이르기까지 여러 개의 문을 거쳐야 하는 경우가 많다. 그 문들 중 첫 번째 문이 일주문(一柱門)이다. 기둥 하나로 지붕을 받치고 있기 때문에 일주문이라고 한다. 일주문의 현판에는 보통 산 이름과 절 이름이 쓰여 있다. 그런데 역사가 오랜 절에 가보면 일주문에 앞서 사찰의 존재를 알리는 돌기둥이 있다. 바로 당간지주(幢竿支柱)다. 본래는 두 개의 돌기둥 사이에 높이 솟은 당간이 세워져 있었다. 당간이란 당(幢)이라고도 하고 번(幡)이라고도 하는 깃발을 거는 기둥이다. 당간지주의 용도는 당간을 양옆에서 지지하는 것이다. 절에 행사가 있을 때 그 당간에 깃발을 걸어 행사를 알렸다고 한다.   일주문   당간지주   선(禪) 수행자들을 위해 화두 48개를 모아 놓은 『무문관』 29칙에 이 깃발과 관련된 유명한 에피소드가 나온다. 중국 선종의 여섯 번째 조사인 혜능이 주인공이다. 당간지주에 매달린 깃발이 흔들리는 보고 두 스님이 다투고 있었다. 한 스님은 ‘바람이 움직인다’고 했고 다른 스님은 ‘깃발이 움직인다’고 주장했다. 모든 시비가 그렇듯이 두 스님은 꽤 열을 올리며 서로 네가 옳다, 내가 옳다 요란하게 다투었던 모양이다. 그 절에 왔던 혜능이 한 마디 던졌다. “바람이 움직이는 것도 아니고, 깃발이 움직이는 것도 아닙니다. 그대들의 마음이 움직이는 것입니다.” 그 소리에 다툼이 멈추었다.   움직이는 것은...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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2022.05.08 | 조회 375
요요와 불교산책
나는 멈추었다   나는 언제나 일체의 뭇 삶에 폭력을 멈추고 있다. 그러나 그대는 살아있는 생명에 자제함이 없다. 그러므로 나는 멈추었고 그대는 멈추지 않았다.(『맛지마니까야』 86, 『앙굴리말라의 경』)   앙굴리말라 이야기 초기 경전 『앙굴리말라의 경』에는 연쇄살인마 앙굴리말라에 대한 이야기가 나온다. 앙굴리말라의 어릴 적 이름은 비폭력이라는 뜻의 아힘사카(Ahimsaka)였다. 앙굴리말라라는 이름은 손가락 목걸이라는 뜻이다. 사람을 죽인 후 손가락을 꿰어서 목걸이를 만들었기 때문에 사람들은 그를 앙굴리말라라고 불렀다.   어느 날 아침, 붓다는 탁발에서 돌아와 식사를 하고 자리를 정리한 후 앙굴리말라가 출몰하는 방향으로 길을 나섰다. 도중에 만난 사람들마다 그 길은 위험하다고 붓다를 만류했다. 그럼에도 불구하고 붓다는 묵묵히 그저 길을 갈 뿐이었다. 멀리서 붓다가 오는 것을 본 앙굴리말라는 칼과 방패, 활과 화살을 갖추고 붓다에게 다가갔다.   나는 붓다가 어떤 방법으로 사나운 앙굴리말라를 상대할지 궁금했다. 내가 기대한 시나리오는 앙굴리말라가 붓다를 잡으려 해도 잡지 못하다 결국 지쳐 떨어져 항복하거나, 활을 쏘고 날카로운 무기를 던져도 붓다를 맞히지 못하는 중국 무협영화의 한 장면 같은 것이었다. 초인적인 신통력이 아니고서는 앙굴리말라를 꼼짝 못하게 할 방법이 없으리라 생각했기 때문이다. 이후 전개를 보면 내 예상은 반은 맞고 반은 틀렸다.^^   경전에 묘사된 바에 의하면 무장한 장정들 수십 명이 몰려가도 속절없이 앙굴리말라에게 당하던 형국이었다. 그런데 혈혈단신 홀로 앙굴리말라를 향해 걸어오는 수행자 한 사람. 그는 앙굴리말라의 이름만 들어도 두려움에 벌벌 떨던 수많은 사람들과 달리 태연자약했다. 그 수행자에게서...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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2022.03.18 | 조회 438
요요와 불교산책
무엇이 비린 것인가   세상의 살아있는 생명을 수호하지 못하고, 남의 것을 빼앗으면서 그들을 해치려 하고, 계행을 지키지 않고, 잔인하고, 거칠고, 무례한 것, 이것이야말로 비린 것이지 육식이 비린 것이 아닙니다.(『숫타니파타』 『아마간다의 경』)   훔친 돼지만이 살아남았다 『훔친 돼지만이 살아남았다』를 읽었다. 새벽이라는 돼지가 있다. 새벽이는 직접행동DxE(Direct Action Everywhere) 활동가들이 화성에 있는 한 종돈장에서 훔쳐온 돼지이다. 이들은 왜 돼지를 훔치는 절도의 범죄를 저질렀을까? 디엑스이 활동가들은 2019년 4월부터 자발적 참여자들과 함께 매주 도살장을 찾아다니기 시작했다. 그들은 온몸으로 도살장으로 들어가는 차를 막았다. 도살을 막을 수 있다고 생각해서가 아니었다. 마지막으로 동물들의 얼굴을 잠시라도 마주하기 위해서였다.   첫 도살장 방문 후 세 달이 지난 어느 날 밤 그들은 돼지 5,000여 마리를 기르는 종돈장에 몰래 들어가 태어난 지 얼마 안 된 새끼돼지 세 마리를 훔쳤다. 세 마리 중 한 마리가 살아남았다. 우리나라에서는 매년 1,700만 마리의 돼지가 도살된다. 새벽이는 공개 구조되어 살아남은 돼지의 이름이다.   이들은 우여곡절 끝에 새벽이의 보금자리인 생추어리를 만들었다. 생추어리(sanctuary)는 ‘saint’와 마찬가지로 ‘성스러운 곳’을 뜻하는 라틴어 ‘sanctuarium’에서 왔다.(위키피디아) 생추어리는 마치 누구라도 그곳에 들어가면 면책특권이 주어지고 보호받을 수 있는 ‘소도’와 같은 성역이자 피난처이다. 수태될 때부터 고기가 되기로 운명 지어진 돼지들이 태어난 지 6개월 만에 도살되는 현실에서 새벽이는 지옥행 운명으로부터 구조된 돼지가 되었다. ‘훔친 돼지만이 살아남았다’는 역설은 ‘죽이는 것은 합법이고 살리는 것은 불법인’(작가 홍은전의 추천사에서 인용) 공장식 축산의...
무엇이 비린 것인가   세상의 살아있는 생명을 수호하지 못하고, 남의 것을 빼앗으면서 그들을 해치려 하고, 계행을 지키지 않고, 잔인하고, 거칠고, 무례한 것, 이것이야말로 비린 것이지 육식이 비린 것이 아닙니다.(『숫타니파타』 『아마간다의 경』)   훔친 돼지만이 살아남았다 『훔친 돼지만이 살아남았다』를 읽었다. 새벽이라는 돼지가 있다. 새벽이는 직접행동DxE(Direct Action Everywhere) 활동가들이 화성에 있는 한 종돈장에서 훔쳐온 돼지이다. 이들은 왜 돼지를 훔치는 절도의 범죄를 저질렀을까? 디엑스이 활동가들은 2019년 4월부터 자발적 참여자들과 함께 매주 도살장을 찾아다니기 시작했다. 그들은 온몸으로 도살장으로 들어가는 차를 막았다. 도살을 막을 수 있다고 생각해서가 아니었다. 마지막으로 동물들의 얼굴을 잠시라도 마주하기 위해서였다.   첫 도살장 방문 후 세 달이 지난 어느 날 밤 그들은 돼지 5,000여 마리를 기르는 종돈장에 몰래 들어가 태어난 지 얼마 안 된 새끼돼지 세 마리를 훔쳤다. 세 마리 중 한 마리가 살아남았다. 우리나라에서는 매년 1,700만 마리의 돼지가 도살된다. 새벽이는 공개 구조되어 살아남은 돼지의 이름이다.   이들은 우여곡절 끝에 새벽이의 보금자리인 생추어리를 만들었다. 생추어리(sanctuary)는 ‘saint’와 마찬가지로 ‘성스러운 곳’을 뜻하는 라틴어 ‘sanctuarium’에서 왔다.(위키피디아) 생추어리는 마치 누구라도 그곳에 들어가면 면책특권이 주어지고 보호받을 수 있는 ‘소도’와 같은 성역이자 피난처이다. 수태될 때부터 고기가 되기로 운명 지어진 돼지들이 태어난 지 6개월 만에 도살되는 현실에서 새벽이는 지옥행 운명으로부터 구조된 돼지가 되었다. ‘훔친 돼지만이 살아남았다’는 역설은 ‘죽이는 것은 합법이고 살리는 것은 불법인’(작가 홍은전의 추천사에서 인용) 공장식 축산의...
요요
2022.01.16 | 조회 446
요요와 불교산책
무소의 뿔처럼 혼자서 가라   소리에 놀라지 않는 사자와 같이, 그물에 걸리지 않는 바람과 같이, 흙탕물에 더럽혀지지 않는 연꽃과 같이, 무소의 뿔처럼 혼자서 가라.(『숫타니파타』 71)   『무소의 뿔 경』 전체를 읽어본 적이 없더라도 ‘무소의 뿔처럼 혼자서 가라’는 구절을 모르는 사람은 거의 없을 것이다. 대개의 경우 이 구절은 독립, 자유, 결단, 마이 웨이와 같은 이미지와 결부된다. 지리멸렬한 현실에서 과감하게 벗어나라, 이런저런 주위의 시선과 기대 따위 훌훌 털어 버리고 네 식대로 살아도 좋다는 희망과 위로를 주는 선언으로 들리기 때문일 게다. 또 다른 한편으로는 모두 제 살 길 외에는 관심 없는 각자도생의 시대에 얽히고설켜서 잘 사는 방법을 찾아도 모자랄 판인데 불교마저 개인주의를 부추기는 것 아닌가 하는 느낌을 주기도 한다. 그런데 이 말이 나오게 된 배경과 맥락을 생각하면 이런 식의 이해들은 다소간 오해일 수도 있다. 왜냐하면 ‘무소의 뿔처럼 혼자서 가라’는 누구에게도 의존하지 않는 홀로서기를 감행하라, 남의 눈치 보지 말고 제 갈 길 가라, 자신의 욕망에 충실해라, 라는 이야기는 아니었기 때문이다.   출가(出家), 익숙한 습속을 떠나라 먼저 ‘무소의 뿔처럼 혼자서 가라’는 깨달음을 구하기 위해 집을 떠난 출가사문들을 향한 말이었다는 것을 기억할 필요가 있다. 출가사문이란, 붓다의 시대인 기원전 6세기경에 고대인도사회에 새롭게 등장한, 비판적이고 이단적인 자유사상가들이었다. 이들은 오랫동안 당연한 것으로 믿어져온 성스러운 『베다』의 가르침과 제식주의에 이의를 제기했다. 무엇보다 이들은 사제계급인 바라문들이 주관하는, 수많은 희생동물을 바치는 거대한 제사가...
무소의 뿔처럼 혼자서 가라   소리에 놀라지 않는 사자와 같이, 그물에 걸리지 않는 바람과 같이, 흙탕물에 더럽혀지지 않는 연꽃과 같이, 무소의 뿔처럼 혼자서 가라.(『숫타니파타』 71)   『무소의 뿔 경』 전체를 읽어본 적이 없더라도 ‘무소의 뿔처럼 혼자서 가라’는 구절을 모르는 사람은 거의 없을 것이다. 대개의 경우 이 구절은 독립, 자유, 결단, 마이 웨이와 같은 이미지와 결부된다. 지리멸렬한 현실에서 과감하게 벗어나라, 이런저런 주위의 시선과 기대 따위 훌훌 털어 버리고 네 식대로 살아도 좋다는 희망과 위로를 주는 선언으로 들리기 때문일 게다. 또 다른 한편으로는 모두 제 살 길 외에는 관심 없는 각자도생의 시대에 얽히고설켜서 잘 사는 방법을 찾아도 모자랄 판인데 불교마저 개인주의를 부추기는 것 아닌가 하는 느낌을 주기도 한다. 그런데 이 말이 나오게 된 배경과 맥락을 생각하면 이런 식의 이해들은 다소간 오해일 수도 있다. 왜냐하면 ‘무소의 뿔처럼 혼자서 가라’는 누구에게도 의존하지 않는 홀로서기를 감행하라, 남의 눈치 보지 말고 제 갈 길 가라, 자신의 욕망에 충실해라, 라는 이야기는 아니었기 때문이다.   출가(出家), 익숙한 습속을 떠나라 먼저 ‘무소의 뿔처럼 혼자서 가라’는 깨달음을 구하기 위해 집을 떠난 출가사문들을 향한 말이었다는 것을 기억할 필요가 있다. 출가사문이란, 붓다의 시대인 기원전 6세기경에 고대인도사회에 새롭게 등장한, 비판적이고 이단적인 자유사상가들이었다. 이들은 오랫동안 당연한 것으로 믿어져온 성스러운 『베다』의 가르침과 제식주의에 이의를 제기했다. 무엇보다 이들은 사제계급인 바라문들이 주관하는, 수많은 희생동물을 바치는 거대한 제사가...
요요
2021.10.20 | 조회 619
요요와 불교산책
두 번째 화살에 맞지 않으려면   번뇌의 화살을 뽑아 집착 없이 마음의 평안을 얻는다면 모든 슬픔을 뛰어 넘어 슬픔 없는 님으로 열반에 들 것입니다. (『숫타니파타』 3품 8 『화살의 경』)   최근 나는 그 어느 때보다 삶이 고해(苦海)라는 것을 실감하며 살고 있다. 작년 가을, 긍정과 명랑의 아이콘이었던 어머니에게 갑자기 심각한 우울증이 왔다. 추운 겨울날 새벽 어머니는 자살충동을 느끼고 집을 나섰다. 천만 다행으로 길에 쓰러져 있던 어머니를 찾은 우리는 사태의 심각성을 느끼고 급히 어머니를 입원시켰다. 이번에는 치매가 진행 중이던 아버지에게 문제가 생겼다. 아버지는 무조건 어머니를 데려오라고 시도 때도 없이 고함을 지르고 화를 내며 점점 폭력적으로 변해갔다. 아버지도 입원해서 약물치료를 받아야했다.   퇴원한 날 어머니는 엎친 데 덮친 격으로 낙상사고를 당해 고관절 수술을 받았다. 요양병원에 입원한 어머니와 집으로 돌아온 아버지의 몸과 마음은 여전히 불안했다. 살얼음을 딛는 것 같은 몇 개월을 보내고 이제 겨우 한숨 돌리나 했는데 얼마 전 어머니의 직장과 질 사이에 누공이 생긴 것을 알게 되었다. 망설이고 주저하다 수술을 결정했는데 수술 후 어머니는 컨디션 난조를 보이고 있다. 상황이 달라질 때마다 내 마음은 오르락내리락 롤러코스터를 탄다. 일희일비하지 않고 평정심을 유지하며 다가오는 일들에 대처하고 싶은데, 그것이 참, 쉽지 않다.   첫 번째 화살과 두 번째 화살   내 부모님이 그렇듯이 아무리 피하고 싶어도 생로병사의 사건들은 결국 닥쳐오고야 만다. 2500년 전 왕자로 태어난 고타마 싯다르타가...
두 번째 화살에 맞지 않으려면   번뇌의 화살을 뽑아 집착 없이 마음의 평안을 얻는다면 모든 슬픔을 뛰어 넘어 슬픔 없는 님으로 열반에 들 것입니다. (『숫타니파타』 3품 8 『화살의 경』)   최근 나는 그 어느 때보다 삶이 고해(苦海)라는 것을 실감하며 살고 있다. 작년 가을, 긍정과 명랑의 아이콘이었던 어머니에게 갑자기 심각한 우울증이 왔다. 추운 겨울날 새벽 어머니는 자살충동을 느끼고 집을 나섰다. 천만 다행으로 길에 쓰러져 있던 어머니를 찾은 우리는 사태의 심각성을 느끼고 급히 어머니를 입원시켰다. 이번에는 치매가 진행 중이던 아버지에게 문제가 생겼다. 아버지는 무조건 어머니를 데려오라고 시도 때도 없이 고함을 지르고 화를 내며 점점 폭력적으로 변해갔다. 아버지도 입원해서 약물치료를 받아야했다.   퇴원한 날 어머니는 엎친 데 덮친 격으로 낙상사고를 당해 고관절 수술을 받았다. 요양병원에 입원한 어머니와 집으로 돌아온 아버지의 몸과 마음은 여전히 불안했다. 살얼음을 딛는 것 같은 몇 개월을 보내고 이제 겨우 한숨 돌리나 했는데 얼마 전 어머니의 직장과 질 사이에 누공이 생긴 것을 알게 되었다. 망설이고 주저하다 수술을 결정했는데 수술 후 어머니는 컨디션 난조를 보이고 있다. 상황이 달라질 때마다 내 마음은 오르락내리락 롤러코스터를 탄다. 일희일비하지 않고 평정심을 유지하며 다가오는 일들에 대처하고 싶은데, 그것이 참, 쉽지 않다.   첫 번째 화살과 두 번째 화살   내 부모님이 그렇듯이 아무리 피하고 싶어도 생로병사의 사건들은 결국 닥쳐오고야 만다. 2500년 전 왕자로 태어난 고타마 싯다르타가...
요요
2021.09.08 | 조회 620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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