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요요와 불교산책 5회] 나는 멈추었다

요요
2022-03-18 17:16
437

나는 멈추었다

 

나는 언제나 일체의 뭇 삶에 폭력을 멈추고 있다. 그러나 그대는 살아있는 생명에 자제함이 없다. 그러므로 나는 멈추었고 그대는 멈추지 않았다.(『맛지마니까야』 86, 『앙굴리말라의 경』)

 

앙굴리말라 이야기

초기 경전 『앙굴리말라의 경』에는 연쇄살인마 앙굴리말라에 대한 이야기가 나온다. 앙굴리말라의 어릴 적 이름은 비폭력이라는 뜻의 아힘사카(Ahimsaka)였다. 앙굴리말라라는 이름은 손가락 목걸이라는 뜻이다. 사람을 죽인 후 손가락을 꿰어서 목걸이를 만들었기 때문에 사람들은 그를 앙굴리말라라고 불렀다.

 

어느 날 아침, 붓다는 탁발에서 돌아와 식사를 하고 자리를 정리한 후 앙굴리말라가 출몰하는 방향으로 길을 나섰다. 도중에 만난 사람들마다 그 길은 위험하다고 붓다를 만류했다. 그럼에도 불구하고 붓다는 묵묵히 그저 길을 갈 뿐이었다. 멀리서 붓다가 오는 것을 본 앙굴리말라는 칼과 방패, 활과 화살을 갖추고 붓다에게 다가갔다.

 

나는 붓다가 어떤 방법으로 사나운 앙굴리말라를 상대할지 궁금했다. 내가 기대한 시나리오는 앙굴리말라가 붓다를 잡으려 해도 잡지 못하다 결국 지쳐 떨어져 항복하거나, 활을 쏘고 날카로운 무기를 던져도 붓다를 맞히지 못하는 중국 무협영화의 한 장면 같은 것이었다. 초인적인 신통력이 아니고서는 앙굴리말라를 꼼짝 못하게 할 방법이 없으리라 생각했기 때문이다. 이후 전개를 보면 내 예상은 반은 맞고 반은 틀렸다.^^

 

경전에 묘사된 바에 의하면 무장한 장정들 수십 명이 몰려가도 속절없이 앙굴리말라에게 당하던 형국이었다. 그런데 혈혈단신 홀로 앙굴리말라를 향해 걸어오는 수행자 한 사람. 그는 앙굴리말라의 이름만 들어도 두려움에 벌벌 떨던 수많은 사람들과 달리 태연자약했다. 그 수행자에게서 풍겨 나오는 어떤 공포심도 없는 고요와 평화는 앙굴리말라에게는 참으로 낯선 것이었다.

 

 

 

앙굴리말라는 아무리 애를 써도 붓다에게 가까이 갈 수 없었다. ‘묻지마 살인’을 저질러 온 흉적이 뒤에서 쫓아가는데 붓다는 다만 고요히 걸어갈 뿐이었다. 죽고 죽이는, 쫓고 쫓기는 상황과는 전혀 다른 분위기! 앙굴리말라는 당황했다. 이미 앙굴리말라의 마음속에는 ‘이게 뭐지?’라는 강한 의혹이 생겨나고 있었다. 뒤쫓기를 단념하고 ‘멈추라’고 외치는 앙굴리말라에게 붓다는 마침내 입을 열어 조용히 한 마디를 던졌다.

 

“앙굴리말라여, 나는 멈추었다. 너도 멈추어라.”

 

살인자에서 수행자로 거듭나다

붓다의 답은 사리에 맞지 않았다. 멈추지 않고 가고 있는 것은 앙굴리말라가 아니라 붓다 자신이었기 때문이다. 하여 앙굴리말라는 묻지 않을 수 없었다.

 

“수행자여, 그대는 가고 있으면서 ‘나는 멈추었다’고 말하고, 멈추어 있는 나에게 ‘너도 멈추어라’고 말한다. 수행자여, 나는 그대에게 그 의미를 묻는다. 어찌하여 그대는 멈추었고 나는 멈추지 않았는가?”

 

나는 앙굴리말라가 한 번도 경험한 적 없던 낯선 상황에서 그의 내면에서 생겨난 의심과, 그로 인해 촉발된 하심(下心)으로의 전환이 『앙굴리말라의 경』에서 가장 핵심적인 장면 아닐까 생각한다. 앙굴리말라는 사람목숨을 파리 목숨보다 하찮게 여기던 살인자에서 붓다에게 질문하고 간절히 답을 구하는 자가 되었기 때문이다. 다마스커스로 가는 길에 신의 목소리를 듣고, 예수의 제자들을 탄압하던 불신자에서 열렬한 전도자가 된 바울의 회심에 비견할만한 극적인 사건이다. 기독교인이라면 아마 ‘회심’이라고 하고, 대승경전에서는 ‘초발심’이라고 하고, 선승이라면 ‘화두’를 드는 것 같은 최초의 전환이 여기에서 일어났다.

 

이 사건 이후 앙굴리말라는 살인행각을 멈추고 붓다에게 귀의했다. 그는 머리를 깎고 걸식하며 유행하는 수행자가 되었다. 꼬살라의 국왕 빠세나디는 백성들의 거듭되는 청원에 군대를 이끌고 앙굴리말라를 처단하러 가던 길에 앙굴리말라의 회심 소식을 들었다. 국왕은 붓다와 함께 있는 앙굴리말라를 만났을 때 앙굴리말라를 살인자로서가 아니라 수행자로서 공경하고 공양하였다. 그 장면은 앙굴리말라의 존재 전환을 사회적으로 승인받는 장면이라고 할 수 있다.

 

물론 사회적 인정이라는 상징적 절차가 끝났다 해도 그가 한때 살인자였다는 사실이 지워질 수는 없었다. 그는 자신이 저지른 살인으로 가족을 잃는 고통을 겪은 사람들로부터 쏟아지는 비난과 공격을 감수해야 했다. 탁발을 나갈 때마다 흙덩이와 몽둥이가 날아왔고, 다치고 발우가 부서지고 옷이 찢어졌다. 붓다는 인과응보는 피할 수 없다고 설하고 분노를 품지 말고 인내하라고 가르쳤다. 살인자에서 수행승으로 거듭난 앙굴리말라는 다음과 같은 시로서 화답했다.

 

관개하는 사람은 물꼬를 트고, 활 만드는 사람은 화살촉을 바로잡고, 목수는 나무를 바로잡고, 현자는 자신을 다스립니다.(『앙굴리말라의 경』, 『법구경』 145)

 

나는 멈추었다

어떻게 해야 우리는 자신을 다스리는 사람이 될 수 있을까? ‘왜 그대는 멈추었고 나는 멈추지 않았는가, 그 숨은 의미를 말해 달라’는 앙굴리말라의 질문에 대한 붓다의 대답에서 그 힌트를 찾아보자.

 

앙굴리말라여, 나는 언제나 일체의 뭇 삶에 폭력을 멈추고 있다. 그러나 그대는 살아있는 생명에 자제함이 없다. 그러므로 나는 멈추었고 그대는 멈추지 않았다.

 

뭇 삶은 중생이다. 중생은 단지 인간만이 아니다. 동물, 식물을 포함하여 모든 생명 있는 존재를 포함한다. 나에게 내가 사랑스럽고 소중한 것과 마찬가지로 모든 존재는 자기 자신을 사랑스럽게 여기고 소중하게 여긴다. 내가 죽음과 폭력을 두려워하는 것만큼 다른 모든 존재들 역시 죽음과 폭력을 두려워한다. 붓다는 무릇 생명 있는 것이라면 어느 것이든 자신을 사랑하고 폭력을 두려워하는 것을 알고 뭇 삶에 대한 폭력을 멈춘 사람이었다. 자신을 다스리는 사람은 자기 자신을 해치지 않을 뿐 아니라 자신 이외의 다른 존재들에게도 해를 끼치지 않는 자이다. 그는 살아있는 생명을 해치는 것을 자제하는 자이다.

 

                                           바르샤바 버스터미널. 피난가방 위에 앉아 있는 우크라이나 아이들(한겨레 신문에서 퍼옴)

 

하늘에서 내려다본 건물 양쪽에 '어린이'라고 쓴 흰색 글씨가 선명히 보입니다. 우크라이나 남부 해안 도시 마리우폴의 한 극장에 공습을 피해 어린이들이 모여 있다는 표식입니다. 하지만 러시아군은 아랑곳하지 않고 이 건물을 폭격했습니다. 어린이와 여성들이 대피해 있던 시립 수영장도 폭격에 처참히 무너졌습니다. 이번 폭격으로 최소 수백 명의 민간인이 사망한 것으로 전해졌습니다. 우크라이나 정부는 러시아가 병원과 학교, 주택은 물론, 대피 중인 시민들까지 공격하고 있다고 주장했습니다. 쉴 새 없이 병원으로 밀려드는 환자들 가운데, 상당수는 어린입니다. 넘쳐나는 시신들을 보관할 곳이 없어 바닥에 방치되는 일도 벌어지고 있습니다.(3월 17일, SBS뉴스)

https://news.sbs.co.kr/news/endPage.do?news_id=N1006679868&plink=COPYPASTE&c

 

‘그대는 살아있는 생명에 자제함이 없다.’ 우크라이나 전쟁으로 인해 우리가 사는 시대가 폭력의 시대라는 것이 그 어느 때보다도 피부에 와 닿는 지금, 붓다의 말의 울림은 크다. 전쟁이야말로 국가의 힘에 기댄 조직적이고 집단적인 살인과 파괴행위이다. 그런데 전쟁만이 아니다. 우리를 고통으로 몰아넣는 경제적 불평등도 혐오도 차별도 모두 뭇 삶에 대한 폭력이다. 당장의 편리한 일상을 포기하지 못하여 우리가 손 놓고 있는 기후위기도, 매일매일 내 밥상과 무관하지 않는 공장식 축산도, 수십만년 썩지 않는 방사능 폐기물을 쏟아내고 있는 핵발전도 뭇 삶에 대한 폭력이다. 아마존 우림이 초원이 될 지경에 처하고, 빙하가 녹고, 플라스틱 쓰레기 천지의 세상이 되면서 우리 인간만이 아니라 동물의 삶도 식물의 삶도 위협받고 있다.

 

너도 멈추어라

어쩌면 우리는 모두 앙굴리말라의 후예인지도 모르겠다. 손가락으로 만든 목걸이를 걸지 않았을 뿐, 살아있는 생명에 자제함이 없는 것은 앙굴리말라에 비해 결코 덜하지 않다. 붓다는 우리 앙굴리말라들에게 모든 폭력의 멈춤을, 아힘사(ahimsa)를 설한다(아힘사는 앙굴리말라의 어릴 때 이름이기도 하다). 폭력의 관성을 멈추려면 그 힘보다 더 강한 힘을 우리의 내면에서 끌어내야 한다. 아힘사는 능동적 멈춤이다.

 

                                                      (전쟁 저항자 인터내셔널 로고)

 

폭력을 멈춘다는 것은 모든 불평등과 혐오와 갈라치기와 전쟁에 반대하는 것이며, 원한을 원한으로 분노를 분노로 갚지 않는 것이며, 폭력의 피해자들과 연대하고 비폭력의 삶을 살려는 사람들을 지지하는 것이다. 폭력을 멈추려면 폭력 앞에 침묵하거나, 폭력을 폭력으로 되갚는 것과는 완전히 차원이 다른 절제와 용기가 필요하다. 탐욕과 분노 대신에 자제와 자비로, 어리석음 대신에 통찰과 지혜로 나아가는 것이 멈추는 것이다.

 

우크라이나 전쟁과 같은 거대한 폭력 앞에서, 일상의 불평등과 차별 앞에서, 우리는 내 마음속에서 일어나는 탐욕과 분노와 어리석음을 멈출 수 있을까? 붓다는 말한다. “나는 멈추었다. 너도 멈추어라.” 이 말은 2500년 전의 앙굴리말라만이 아니라 지금 여기의 우리를 향해 던져진 말이다. 앙굴리말라가 멈추었듯이 우리도 멈추자. 멈추지 못하면 제대로 볼 수가 없고, 제대로 보지 못하면 멈출 수 없다. 그러니 멈추는 것과 제대로 보는 것은 둘이 아닌 듯하다. 멈추는 힘[止]과 제대로 보는 힘[觀]을 같이 닦아야 하는 이유이다.

 

 

 

 

 

 

댓글 7
  • 2022-03-19 08:12

    나무아미타불

    • 2022-09-05 18:13

      진짜? 드디어?

  • 2022-03-19 13:23

    노자에도 멈출줄 알아야 위태롭지않다는 말이 몇 번 나옵니다. 무엇으로 앞으로만 내달리기 쉬운 인간의 욕망을 멈추게 할 수 있을까요. 우크라이나에 하루 빨리 평화가 오기를 바랍니다.

    잘 읽었습니다. 

  • 2022-03-19 16:31

    잘 읽었습니다

     

  • 2022-03-21 09:35

    샘^^ 잘 읽었습니다

  • 2022-03-21 11:43

    폭력 앞에서 침묵도 아니고 되갚음도 아닌, "차원이 다른 절제와 용기"가 필요하다, 그게 멈춤이다..어렵네요

  • 2022-03-21 12:25

    지금 당장 내가 멈춰야할 것들이 생각났습니다. 작은 습 하나도 멈추기 힘든 게 나의 상태구나… 싶네요… 잘 읽었습니다.

요요와 불교산책
나는 세상과 싸우지 않는다   나는 세상과 싸우지 않는다. 세상이 나와 싸운다. 진리를 설하는 자는 세상의 누구와도 싸우지 않는다.(『쌍윳따니까야』 22:94)   바람이 움직이는가 깃발이 움직이는가   깊은 산에 있는 사찰은 본당에 이르기까지 여러 개의 문을 거쳐야 하는 경우가 많다. 그 문들 중 첫 번째 문이 일주문(一柱門)이다. 기둥 하나로 지붕을 받치고 있기 때문에 일주문이라고 한다. 일주문의 현판에는 보통 산 이름과 절 이름이 쓰여 있다. 그런데 역사가 오랜 절에 가보면 일주문에 앞서 사찰의 존재를 알리는 돌기둥이 있다. 바로 당간지주(幢竿支柱)다. 본래는 두 개의 돌기둥 사이에 높이 솟은 당간이 세워져 있었다. 당간이란 당(幢)이라고도 하고 번(幡)이라고도 하는 깃발을 거는 기둥이다. 당간지주의 용도는 당간을 양옆에서 지지하는 것이다. 절에 행사가 있을 때 그 당간에 깃발을 걸어 행사를 알렸다고 한다.   일주문   당간지주   선(禪) 수행자들을 위해 화두 48개를 모아 놓은 『무문관』 29칙에 이 깃발과 관련된 유명한 에피소드가 나온다. 중국 선종의 여섯 번째 조사인 혜능이 주인공이다. 당간지주에 매달린 깃발이 흔들리는 보고 두 스님이 다투고 있었다. 한 스님은 ‘바람이 움직인다’고 했고 다른 스님은 ‘깃발이 움직인다’고 주장했다. 모든 시비가 그렇듯이 두 스님은 꽤 열을 올리며 서로 네가 옳다, 내가 옳다 요란하게 다투었던 모양이다. 그 절에 왔던 혜능이 한 마디 던졌다. “바람이 움직이는 것도 아니고, 깃발이 움직이는 것도 아닙니다. 그대들의 마음이 움직이는 것입니다.” 그 소리에 다툼이 멈추었다.   움직이는 것은...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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2022.05.08 | 조회 374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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2022.03.18 | 조회 437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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무엇이 비린 것인가   세상의 살아있는 생명을 수호하지 못하고, 남의 것을 빼앗으면서 그들을 해치려 하고, 계행을 지키지 않고, 잔인하고, 거칠고, 무례한 것, 이것이야말로 비린 것이지 육식이 비린 것이 아닙니다.(『숫타니파타』 『아마간다의 경』)   훔친 돼지만이 살아남았다 『훔친 돼지만이 살아남았다』를 읽었다. 새벽이라는 돼지가 있다. 새벽이는 직접행동DxE(Direct Action Everywhere) 활동가들이 화성에 있는 한 종돈장에서 훔쳐온 돼지이다. 이들은 왜 돼지를 훔치는 절도의 범죄를 저질렀을까? 디엑스이 활동가들은 2019년 4월부터 자발적 참여자들과 함께 매주 도살장을 찾아다니기 시작했다. 그들은 온몸으로 도살장으로 들어가는 차를 막았다. 도살을 막을 수 있다고 생각해서가 아니었다. 마지막으로 동물들의 얼굴을 잠시라도 마주하기 위해서였다.   첫 도살장 방문 후 세 달이 지난 어느 날 밤 그들은 돼지 5,000여 마리를 기르는 종돈장에 몰래 들어가 태어난 지 얼마 안 된 새끼돼지 세 마리를 훔쳤다. 세 마리 중 한 마리가 살아남았다. 우리나라에서는 매년 1,700만 마리의 돼지가 도살된다. 새벽이는 공개 구조되어 살아남은 돼지의 이름이다.   이들은 우여곡절 끝에 새벽이의 보금자리인 생추어리를 만들었다. 생추어리(sanctuary)는 ‘saint’와 마찬가지로 ‘성스러운 곳’을 뜻하는 라틴어 ‘sanctuarium’에서 왔다.(위키피디아) 생추어리는 마치 누구라도 그곳에 들어가면 면책특권이 주어지고 보호받을 수 있는 ‘소도’와 같은 성역이자 피난처이다. 수태될 때부터 고기가 되기로 운명 지어진 돼지들이 태어난 지 6개월 만에 도살되는 현실에서 새벽이는 지옥행 운명으로부터 구조된 돼지가 되었다. ‘훔친 돼지만이 살아남았다’는 역설은 ‘죽이는 것은 합법이고 살리는 것은 불법인’(작가 홍은전의 추천사에서 인용) 공장식 축산의...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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2022.01.16 | 조회 446
요요와 불교산책
무소의 뿔처럼 혼자서 가라   소리에 놀라지 않는 사자와 같이, 그물에 걸리지 않는 바람과 같이, 흙탕물에 더럽혀지지 않는 연꽃과 같이, 무소의 뿔처럼 혼자서 가라.(『숫타니파타』 71)   『무소의 뿔 경』 전체를 읽어본 적이 없더라도 ‘무소의 뿔처럼 혼자서 가라’는 구절을 모르는 사람은 거의 없을 것이다. 대개의 경우 이 구절은 독립, 자유, 결단, 마이 웨이와 같은 이미지와 결부된다. 지리멸렬한 현실에서 과감하게 벗어나라, 이런저런 주위의 시선과 기대 따위 훌훌 털어 버리고 네 식대로 살아도 좋다는 희망과 위로를 주는 선언으로 들리기 때문일 게다. 또 다른 한편으로는 모두 제 살 길 외에는 관심 없는 각자도생의 시대에 얽히고설켜서 잘 사는 방법을 찾아도 모자랄 판인데 불교마저 개인주의를 부추기는 것 아닌가 하는 느낌을 주기도 한다. 그런데 이 말이 나오게 된 배경과 맥락을 생각하면 이런 식의 이해들은 다소간 오해일 수도 있다. 왜냐하면 ‘무소의 뿔처럼 혼자서 가라’는 누구에게도 의존하지 않는 홀로서기를 감행하라, 남의 눈치 보지 말고 제 갈 길 가라, 자신의 욕망에 충실해라, 라는 이야기는 아니었기 때문이다.   출가(出家), 익숙한 습속을 떠나라 먼저 ‘무소의 뿔처럼 혼자서 가라’는 깨달음을 구하기 위해 집을 떠난 출가사문들을 향한 말이었다는 것을 기억할 필요가 있다. 출가사문이란, 붓다의 시대인 기원전 6세기경에 고대인도사회에 새롭게 등장한, 비판적이고 이단적인 자유사상가들이었다. 이들은 오랫동안 당연한 것으로 믿어져온 성스러운 『베다』의 가르침과 제식주의에 이의를 제기했다. 무엇보다 이들은 사제계급인 바라문들이 주관하는, 수많은 희생동물을 바치는 거대한 제사가...
무소의 뿔처럼 혼자서 가라   소리에 놀라지 않는 사자와 같이, 그물에 걸리지 않는 바람과 같이, 흙탕물에 더럽혀지지 않는 연꽃과 같이, 무소의 뿔처럼 혼자서 가라.(『숫타니파타』 71)   『무소의 뿔 경』 전체를 읽어본 적이 없더라도 ‘무소의 뿔처럼 혼자서 가라’는 구절을 모르는 사람은 거의 없을 것이다. 대개의 경우 이 구절은 독립, 자유, 결단, 마이 웨이와 같은 이미지와 결부된다. 지리멸렬한 현실에서 과감하게 벗어나라, 이런저런 주위의 시선과 기대 따위 훌훌 털어 버리고 네 식대로 살아도 좋다는 희망과 위로를 주는 선언으로 들리기 때문일 게다. 또 다른 한편으로는 모두 제 살 길 외에는 관심 없는 각자도생의 시대에 얽히고설켜서 잘 사는 방법을 찾아도 모자랄 판인데 불교마저 개인주의를 부추기는 것 아닌가 하는 느낌을 주기도 한다. 그런데 이 말이 나오게 된 배경과 맥락을 생각하면 이런 식의 이해들은 다소간 오해일 수도 있다. 왜냐하면 ‘무소의 뿔처럼 혼자서 가라’는 누구에게도 의존하지 않는 홀로서기를 감행하라, 남의 눈치 보지 말고 제 갈 길 가라, 자신의 욕망에 충실해라, 라는 이야기는 아니었기 때문이다.   출가(出家), 익숙한 습속을 떠나라 먼저 ‘무소의 뿔처럼 혼자서 가라’는 깨달음을 구하기 위해 집을 떠난 출가사문들을 향한 말이었다는 것을 기억할 필요가 있다. 출가사문이란, 붓다의 시대인 기원전 6세기경에 고대인도사회에 새롭게 등장한, 비판적이고 이단적인 자유사상가들이었다. 이들은 오랫동안 당연한 것으로 믿어져온 성스러운 『베다』의 가르침과 제식주의에 이의를 제기했다. 무엇보다 이들은 사제계급인 바라문들이 주관하는, 수많은 희생동물을 바치는 거대한 제사가...
요요
2021.10.20 | 조회 619
요요와 불교산책
두 번째 화살에 맞지 않으려면   번뇌의 화살을 뽑아 집착 없이 마음의 평안을 얻는다면 모든 슬픔을 뛰어 넘어 슬픔 없는 님으로 열반에 들 것입니다. (『숫타니파타』 3품 8 『화살의 경』)   최근 나는 그 어느 때보다 삶이 고해(苦海)라는 것을 실감하며 살고 있다. 작년 가을, 긍정과 명랑의 아이콘이었던 어머니에게 갑자기 심각한 우울증이 왔다. 추운 겨울날 새벽 어머니는 자살충동을 느끼고 집을 나섰다. 천만 다행으로 길에 쓰러져 있던 어머니를 찾은 우리는 사태의 심각성을 느끼고 급히 어머니를 입원시켰다. 이번에는 치매가 진행 중이던 아버지에게 문제가 생겼다. 아버지는 무조건 어머니를 데려오라고 시도 때도 없이 고함을 지르고 화를 내며 점점 폭력적으로 변해갔다. 아버지도 입원해서 약물치료를 받아야했다.   퇴원한 날 어머니는 엎친 데 덮친 격으로 낙상사고를 당해 고관절 수술을 받았다. 요양병원에 입원한 어머니와 집으로 돌아온 아버지의 몸과 마음은 여전히 불안했다. 살얼음을 딛는 것 같은 몇 개월을 보내고 이제 겨우 한숨 돌리나 했는데 얼마 전 어머니의 직장과 질 사이에 누공이 생긴 것을 알게 되었다. 망설이고 주저하다 수술을 결정했는데 수술 후 어머니는 컨디션 난조를 보이고 있다. 상황이 달라질 때마다 내 마음은 오르락내리락 롤러코스터를 탄다. 일희일비하지 않고 평정심을 유지하며 다가오는 일들에 대처하고 싶은데, 그것이 참, 쉽지 않다.   첫 번째 화살과 두 번째 화살   내 부모님이 그렇듯이 아무리 피하고 싶어도 생로병사의 사건들은 결국 닥쳐오고야 만다. 2500년 전 왕자로 태어난 고타마 싯다르타가...
두 번째 화살에 맞지 않으려면   번뇌의 화살을 뽑아 집착 없이 마음의 평안을 얻는다면 모든 슬픔을 뛰어 넘어 슬픔 없는 님으로 열반에 들 것입니다. (『숫타니파타』 3품 8 『화살의 경』)   최근 나는 그 어느 때보다 삶이 고해(苦海)라는 것을 실감하며 살고 있다. 작년 가을, 긍정과 명랑의 아이콘이었던 어머니에게 갑자기 심각한 우울증이 왔다. 추운 겨울날 새벽 어머니는 자살충동을 느끼고 집을 나섰다. 천만 다행으로 길에 쓰러져 있던 어머니를 찾은 우리는 사태의 심각성을 느끼고 급히 어머니를 입원시켰다. 이번에는 치매가 진행 중이던 아버지에게 문제가 생겼다. 아버지는 무조건 어머니를 데려오라고 시도 때도 없이 고함을 지르고 화를 내며 점점 폭력적으로 변해갔다. 아버지도 입원해서 약물치료를 받아야했다.   퇴원한 날 어머니는 엎친 데 덮친 격으로 낙상사고를 당해 고관절 수술을 받았다. 요양병원에 입원한 어머니와 집으로 돌아온 아버지의 몸과 마음은 여전히 불안했다. 살얼음을 딛는 것 같은 몇 개월을 보내고 이제 겨우 한숨 돌리나 했는데 얼마 전 어머니의 직장과 질 사이에 누공이 생긴 것을 알게 되었다. 망설이고 주저하다 수술을 결정했는데 수술 후 어머니는 컨디션 난조를 보이고 있다. 상황이 달라질 때마다 내 마음은 오르락내리락 롤러코스터를 탄다. 일희일비하지 않고 평정심을 유지하며 다가오는 일들에 대처하고 싶은데, 그것이 참, 쉽지 않다.   첫 번째 화살과 두 번째 화살   내 부모님이 그렇듯이 아무리 피하고 싶어도 생로병사의 사건들은 결국 닥쳐오고야 만다. 2500년 전 왕자로 태어난 고타마 싯다르타가...
요요
2021.09.08 | 조회 619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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