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요요와 불교산책3회] 무소의 뿔처럼 혼자서 가라

요요
2021-10-20 11:01
619

무소의 뿔처럼 혼자서 가라

 

소리에 놀라지 않는 사자와 같이, 그물에 걸리지 않는 바람과 같이,

흙탕물에 더럽혀지지 않는 연꽃과 같이, 무소의 뿔처럼 혼자서 가라.(『숫타니파타』 71)

 

『무소의 뿔 경』 전체를 읽어본 적이 없더라도 ‘무소의 뿔처럼 혼자서 가라’는 구절을 모르는 사람은 거의 없을 것이다. 대개의 경우 이 구절은 독립, 자유, 결단, 마이 웨이와 같은 이미지와 결부된다. 지리멸렬한 현실에서 과감하게 벗어나라, 이런저런 주위의 시선과 기대 따위 훌훌 털어 버리고 네 식대로 살아도 좋다는 희망과 위로를 주는 선언으로 들리기 때문일 게다. 또 다른 한편으로는 모두 제 살 길 외에는 관심 없는 각자도생의 시대에 얽히고설켜서 잘 사는 방법을 찾아도 모자랄 판인데 불교마저 개인주의를 부추기는 것 아닌가 하는 느낌을 주기도 한다. 그런데 이 말이 나오게 된 배경과 맥락을 생각하면 이런 식의 이해들은 다소간 오해일 수도 있다. 왜냐하면 ‘무소의 뿔처럼 혼자서 가라’는 누구에게도 의존하지 않는 홀로서기를 감행하라, 남의 눈치 보지 말고 제 갈 길 가라, 자신의 욕망에 충실해라, 라는 이야기는 아니었기 때문이다.

 

출가(出家), 익숙한 습속을 떠나라

먼저 ‘무소의 뿔처럼 혼자서 가라’는 깨달음을 구하기 위해 집을 떠난 출가사문들을 향한 말이었다는 것을 기억할 필요가 있다. 출가사문이란, 붓다의 시대인 기원전 6세기경에 고대인도사회에 새롭게 등장한, 비판적이고 이단적인 자유사상가들이었다. 이들은 오랫동안 당연한 것으로 믿어져온 성스러운 『베다』의 가르침과 제식주의에 이의를 제기했다. 무엇보다 이들은 사제계급인 바라문들이 주관하는, 수많은 희생동물을 바치는 거대한 제사가 선업과 공덕을 쌓는 최고의 길이라는 믿음을 강하게 비판했다. 이들은 고행과 절제, 명상적 삶 그리고 그것을 통해 얻게 되는 지식과 통찰만이 우리의 삶을 자유와 해방으로 이끈다고 주장했다.

 

이들 출가사문들은 바라문들과는 전혀 다른 라이프스타일을 추구했다. 바라문들이 가정을 꾸리고 부를 축적하면서 현세의 쾌락을 마다하지 않았던 것과 달리 자유사상가들은 집을 떠나 오직 수행하는 삶에 올인했다. 바라문계급은 출생에 의해 결정되었지만 사문은 출신을 따지지 않았다. 사문은 출생과 상관없이 집을 떠나 수행·정진하는 자들에게 부여된 칭호였다. 붓다 역시 출가사문의 한 사람이었다. 붓다는 통치자 계급으로 태어난 크샤트리아였지만, 자신의 출신을 버리고 사문이 되었다.

 

‘무소의 뿔처럼 혼자서 가라’가 출가자를 향한 말이었다는 것은 그가 가는 방향이 분명했다는 이야기이다. 그것은 집을 떠나는 것이었다. 우리에게 집이란 무엇일까. 대개 집은 안식처이거나 귀환의 장소에 비유된다. 돌아온 탕아에게도 오딧세우스에게도 집은 돌아갈 곳이었다. 그러나 ‘무소의 뿔처럼 혼자서 가는’ 자에게 집은 버리고 떠나야 하는 곳이다! 붓다에게 집이란 익숙한 사유와 습속을 유지하고 반복하고 재생산하는 삶의 장소이다. 그러므로 ‘집’을 떠나야 비로소 다른 삶을 생각할 수 있고 다르게 살 수 있다. 그런 점에서 ‘무소의 뿔처럼 혼자서 가라’는 집에 대한 생각을 바꾸는 데 그치지 않고 자신의 정체성이라고 믿어온 것들을 해체하고 떠나는 실천을 하라는 요구이다.

 

자식과 아내, 아버지와 어머니, 재산도 곡식도 친지들도, 모든 욕망의 경계까지도 다 버리고, 무소의 뿔처럼 혼자서 가라. ‘이것은 집착이다. 여기에는 행복이 없다. 이곳에는 만족은 적고 괴로움이 많다. 이것은 낚시 바늘이다’라고 현자라면 알아, 무소의 뿔처럼 혼자서 가라. 물에 사는 물고기가 그물을 찢는 것처럼, 모든 장애들을 끊어버리고, 불꽃이 불탄 곳으로 되돌아가지 않는 것처럼, 무소의 뿔처럼 혼자서 가라. 산호나무가 잎들을 떨어뜨리는 것처럼, 재가자로서 지닌 모든 특징을 버리고, 출가하여 가사를 걸치고, 무소의 뿔처럼 혼자서 가라.(『숫타니파타』 60~64)

 

 

걸식, 작은 것이 아름답다

집밥이라는 말을 들으면 입에 침이 돌고 뱃속이 든든하고 따뜻해지는 느낌이 드는 것처럼 집은 밥의 장소이다. 집을 떠난 붓다는 어떻게 밥을 해결했을까? 붓다에게 출가는 곧 걸식을 의미했다. 불교의 승려를 비구, 비구니라고 부르는데, 이 말은 걸식하는 남자, 걸식하는 여자라는 뜻이다.

 

붓다는 아침이 되면 수행처인 숲에서 나와 마을로 탁발하러 가는 것으로 하루 일과를 시작했다. 붓다는 먹고 사는 문제를 전적으로 재가자들이 공양하는 음식과 시주물에 의지했다. ‘무소의 뿔처럼 혼자서 가라’는 이렇게 걸식하면서 무소유의 삶을 실천하러 가는 것이었다. 걸식은 어떤 축적도 없는 삶의 방식을 의미한다. 붓다가 자신과 제자들에게 허락한 소유물이란 진흙으로 빚은 발우 하나, 버린 천을 기워 만든 가사 한 벌, 소의 똥오줌으로 만든 비상약품 약간이 전부였다.

 

집을 떠난 출가자들은 세상과의 인연을 끊고 심산유곡에 들어가 고요히 은거하는 은자들이 아니었다. 그들은 유유자적 텃밭을 가꾸며 자급자족하지도 않았다. 수행승들의 걸식은 마을을 향해 열린 삶의 방식이었다. 그들은 아침이면 발우를 들고 마을의 집을 가가호호 방문하며 먹을 것을 구했다. 붓다도 매일 마을에 걸식하러 가면서 세상의 칭찬과 비난, 거부와 환대, 예배와 모욕, 이 모든 것과 마주했을 것이다. 밥을 얻지 못한 날도 있었다. ‘무소의 뿔처럼 혼자서 가라’는 먹을 것을 마을 사람들의 선의와 호의에 의지하는 출가사문들에게 주는 말이었다. 그런 상황에서도 마음이 흔들리지 않고 평정을 유지할 수 있으려면 소욕지족(少欲知足)이 몸에 배야 한다.

 

일반사람들이 집착하는 욕망과 탐욕을 떠나 눈을 갖춘 님이 된다면 바른 길을 갈 수 있고 이 지옥을 벗어날 수 있습니다. 배를 가득 채우지 말고 음식을 절제하고 욕심을 적게 하고 탐욕을 일으키지 마십시오. 욕망이 없어지고 버려져서, 욕망을 여읜 것이 열반입니다. 성자의 삶을 사는 님은 탁발을 하고 나서, 나무 아래로 가까이 가서 자리를 잡고 숲 속의 빈터에 머무는 것이 좋습니다. 슬기롭게 선정에 전념하고, 숲 속에서 즐기며, 스스로 만족해하며, 나무 아래서 선정을 닦으십시오.(『숫타니파타』706~709)

 

 

유행(遊行), 흔적을 남기지 말라

붓다의 시대에 불교 수행자들의 삶의 기본 형태는 유행이었다. 집을 떠난 이들은 지붕 없는 곳에서 먹고 자고 수행하는 유행자로 살았다. 심지어 붓다는 수행승들에게 한 나무 아래에서 사흘 이상 머물지 말라고도 했다. 수행하기 위해 찾은 숲속의 나무 그늘조차 사흘 이상 한 곳에 머물면 ‘내 것’이라는 집착이 생기는 것을 경계했기 때문이다. 걸식과 유행은 무소유와 무집착을 닦는 수행이었고, 또 무소유와 무집착을 구현한 삶의 방식이기도 했다.

 

문탁에는 공간을 이용한 후에 ‘흔적을 남기지 않는다’는 생활윤리가 있다. 그런데 흔히 생각하는 것처럼 흔적이 반드시 뒷정리를 잘 하는 것에만 해당되는 것은 아니다. 가령 문탁 공부방에는 내가 즐겨 앉는 자리가 있다. 우리 모두 공부방에는 특정인의 자리란 없다고 생각한다. 그런데도 어느새 그 책상은 나에게도 다른 친구들에게도 내 자리처럼 되어버렸다. 아무리 머릿속에서 내 자리가 없다고 생각해도 그것은 생각일 뿐이다. 한 곳에 머물지 않고 계속해서 자리를 옮겨야 흔적이 남지 않는다.

 

유행은 흔적을 남기지 않는 삶이다. ‘무소의 뿔처럼 혼자서 가라’는 그저 혼자 가라는 이야기가 아니다. 그것은 감정이든 생각이든 물건이든 주렁주렁 매달고 다니는 소유적 삶에 대한 경계이다. 흔적을 남기지 않는 것이 유행자의 삶의 방식이다. ‘무소의 뿔처럼 혼자서 가라’는 하늘을 나는 새가 허공에 자취를 남기지 않는 것처럼 집착으로부터 자유로운 삶의 방식에 대한 가르침이기도 하다.

 

감각적 쾌락은 다양하고 달콤하고 즐거우니, 여러 가지 모양으로 마음을 혼란시킨다. 욕망의 가닥들에서 이러한 위험을 보고, 무소의 뿔처럼 혼자서 가라. 이것이 내게 고뇌이고 종기이고 재난이며, 질병이고 화살이고 공포이다. 욕망의 가닥들에서 이러한 두려움을 보고, 무소의 뿔처럼 혼자서 가라.(『숫타니파타』 50~51)

 

 

공동체, 선우(善友)와 함께 가라

물질에 대한 소유욕이나 감각적인 욕망의 위험만큼이나 붓다가 경계한 것이 있었으니, 그것은 인간관계에서 생겨나는 탐욕과 성냄과 어리석음이었다. 출가자도 유행자도 혼자서 살지 않는다. 마을과의 관계에서 밥을 얻고, 유행하며 수행자들을 만나 벗이 되고, 같이 수행하는 벗들과 서로 배우고 가르치면서 살아가지 않을 수 없다. 그러므로 ‘무소의 뿔처럼 혼자서 가라’는 인간관계로부터 떨어져 홀로 지내라는 것이 아니라 인간관계에 집착할 때의 위험을 잘 살펴야 한다는 가르침이다.

 

금세공사가 잘 만들어낸 빛나는 한 쌍의 황금 팔찌도 한 팔에서 서로 부딪치는 것을 보면서 무소의 뿔처럼 혼자서 가라. 이와 같이 두 사람이 같이 있으면, 잔소리와 말다툼이 일어나리니, 이러한 두려움이 다가옴을 잘 살펴, 무소의 뿔처럼 혼자서 가라.(『숫타니파타』 48~49)

교제가 있으면 애착이 생기고, 애착을 따라 이러한 괴로움이 생겨나니, 애착에서 생겨나는 위험을 살펴, 무소의 뿔처럼 혼자서 가라. 친구들이나 동료들과 정을 나누며, 마음이 얽매이면 유익함을 잃으리니, 사귐에서 오는 이러한 두려움을 살펴, 무소의 뿔처럼 혼자서 가라.(『숫타니파타』 36~38)

 

구더기 무서워서 장을 담그지 못하는 것이 아니듯이 교제에서 생기는 애착과 불화를 두려워하여 모임을 피하는 것이 반드시 능사는 아니다. 웬만한 내공을 갖춘 사람이 아니라면 혼자 공부하는 것보다 주위 사람들의 격려와 지지를 받으면서 공부할 때 더 자극을 받고 힘을 얻는다는 것을 우리는 안다. 공부에서도 수행에서도 성숙하고 좋은 벗을 얻는 것보다 더 큰 행복이 어디 있겠는가.

 

좋은 삶에는 좋은 벗이 필요하다. 깨달음을 얻고 나서 붓다가 가장 먼저 한 일 역시 이전에 함께 수행했던 다섯 비구를 찾아가 설법한 것이었다. 이 만남을 통해 최초의 불교 수행자 공동체인 승가가 탄생했다. 붓다는 평생토록 걸식하고 유행하며 흙먼지 나는 길 위에서 계속해서 사람들을 만났다. 숲속의 나무 아래에서, 하룻밤 잠자리를 구해 들어간 옹기장이의 움막에서 인연이 된 사람들에게 자신이 깨달은 바를 전했고, 승가를 함께 꾸려갈 소중한 도반들을 구했다. 사리뿟따도, 목갈라나도, 마하가섭도 그렇게 길 위에서 만난 좋은 벗, 선우들이었다.

 

만일 어질고 단호한 동반자, 성숙한 벗을 얻는다면, 어떠한 난관들도 극복하리니, 기쁘게 새김을 확립하여 그와 함께 가라. 어질고 단호한 동료수행자, 현명하고 성숙한 벗을 얻지 못한다면, 왕이 정복한 나라를 버리고 가듯, 무소의 뿔처럼 혼자서 가라. 우리는 참으로 친구를 얻은 행복을 기린다. 훌륭하거나 비슷한 친구를 사귀되, 이런 벗을 만나지 못하면 허물없음을 즐기며, 무소의 뿔처럼 혼자서 가라.(『숫타니파타』 45~47)

 

 *         *        *

나는 ‘무소의 뿔처럼 혼자서 가라’를 모두가 당연하다고 생각하는 삶의 방식을 좇지 말고 다른 삶의 방식을 발명하라는 붓다의 선언으로, 또 뉴노멀이니 뭐니 말은 많지만 여전히 욕망을 키우는 것에 몰빵하는 일방통행로를 달려가고 있는 지금의 우리에게 주는 붓다의 메시지로 이해해보고 싶었다. 그렇게 보면 ‘무소의 뿔처럼 혼자서 가라’를 ‘내 욕망에 충실하겠다는 자유선언’이나 ‘홀로 서기의 행복’이나 ‘마이 웨이’에 대한 예찬이 아니라 ‘욕망을 버리는 자유’와 ‘어질고 현명한 벗과 함께 하는 삶’과 ‘치열한 정진’에 대한 독려로 읽을 수 있다.

 

출가를 문자 그대로 집을 떠나는 것이 아니라 자신의 정체성을 해체하는 실천으로 재정의 한다면 우리는 출가에 대해 얼마든지 다른 이야기를 해 볼 수 있다. 인생에 단 한 번 감행되는 특별한 사건으로서의 출가가 아니라, 끊임없이 현재의 삶에 대해 질문하고 다른 삶을 상상하는 현재진행형의 사건으로 출가를 이해한다면 재가자와 출가자의 형식적 구분이 뭐 그리 중요하겠는가. 걸식과 유행 또한 마찬가지다. 소욕지족하는 삶, 머물지 않는 삶, 흔적을 남기지 않는 삶 역시 출가냐 재가냐, 불교신자냐 아니냐로 결정되는 것이 아니다. 그러니 우리도 지금 여기에서 좋은 벗을 찾아 그와 함께 좋은 삶에 대해 상상하고 시도하기를 멈추지 말자.

 

소리에 놀라지 않는 사자와 같이,

그물에 걸리지 않는 바람과 같이,

흙탕물에 더럽혀지지 않는 연꽃과 같이,

무소의 뿔처럼 혼자서 가라.(『숫타니파타』 71)

 

 

 

 

 

 

댓글 5
  • 2021-10-20 12:14

    군자 식무구포 거무구안 민어사이신어언 취유도이정언 가위호학야이의 (학이 14)   논어 문장이 저절로 읊어지는 글이예요^^ 샘, 잘 읽었습니다 ~

  • 2021-10-20 13:14

    니까야를 읽으면서, 좋은 말씀인건 알겠는데 뭘 어떻게 해야할지 막막했어요. 명상, 수행 이런거랑 안친해서^^ 

    그런데 샘의 글을 읽으니 역시 일상에서구나 하는 생각이 드네요. 

    항상 듣던 말이고 안다고 생각했던 말인데 매번 잊어버리고 누가 알려줘야 깨닫게 되니, 참 아직도 멀었습니다.  ㅎㅎ

  • 2021-10-20 16:35

    갑자기 선재스님이 생각나는 건 왜일까요? 

    고급스러운 사찰음식이 아니라 소박한 음식으로 소욕지족을 실천하라고 했을텐데

    사람들은 여기에서조차 자신의 욕망을 드러내는 것이겠지요...

    소욕지족의 실천... 참 쉽지 않은 문제지만 

    좋은 친구와 함께라면 내 뒤통수를 쳐주는 사람도 있을테니 포기하지 말고 계속 가봐야지요

    늘 요요샘께 많이 배웁니다. 고맙습니다^^ 

     

  • 2021-10-21 14:36

    저의 경우,  깨달음. 내려놓음. 알아차림..... 이런 것들도 모두 극단으로 표현하고 생각하는게 대부분입니다.

    게다가 요새는 갱년기라고 ‘내 욕망에 충실해보겠다는 자유선언’이나 ‘홀로 서기의 행복’이나 ‘마이 웨이’에 대한 예찬으로

    자칫 표현하기 쉬웠는데, 그 게 아니라, 

    ‘욕망을 버리는 자유’와 ‘어질고 현명한 벗과 함께 하는 삶’과 ‘치열한 정진’에 대한 독려로,

    그저그저 일상을 꾸리면 된다고 다시 한 번 일러주시네요.  더 지혜로워져야함을.... 😉

     

     

     

  • 2021-12-13 12:16

    숫타니파타를 암송해볼 생각입니다. 요요샘, 낭송에 알맞게 원고를 만들어주세요.ㅎㅎ

요요와 불교산책
나는 세상과 싸우지 않는다   나는 세상과 싸우지 않는다. 세상이 나와 싸운다. 진리를 설하는 자는 세상의 누구와도 싸우지 않는다.(『쌍윳따니까야』 22:94)   바람이 움직이는가 깃발이 움직이는가   깊은 산에 있는 사찰은 본당에 이르기까지 여러 개의 문을 거쳐야 하는 경우가 많다. 그 문들 중 첫 번째 문이 일주문(一柱門)이다. 기둥 하나로 지붕을 받치고 있기 때문에 일주문이라고 한다. 일주문의 현판에는 보통 산 이름과 절 이름이 쓰여 있다. 그런데 역사가 오랜 절에 가보면 일주문에 앞서 사찰의 존재를 알리는 돌기둥이 있다. 바로 당간지주(幢竿支柱)다. 본래는 두 개의 돌기둥 사이에 높이 솟은 당간이 세워져 있었다. 당간이란 당(幢)이라고도 하고 번(幡)이라고도 하는 깃발을 거는 기둥이다. 당간지주의 용도는 당간을 양옆에서 지지하는 것이다. 절에 행사가 있을 때 그 당간에 깃발을 걸어 행사를 알렸다고 한다.   일주문   당간지주   선(禪) 수행자들을 위해 화두 48개를 모아 놓은 『무문관』 29칙에 이 깃발과 관련된 유명한 에피소드가 나온다. 중국 선종의 여섯 번째 조사인 혜능이 주인공이다. 당간지주에 매달린 깃발이 흔들리는 보고 두 스님이 다투고 있었다. 한 스님은 ‘바람이 움직인다’고 했고 다른 스님은 ‘깃발이 움직인다’고 주장했다. 모든 시비가 그렇듯이 두 스님은 꽤 열을 올리며 서로 네가 옳다, 내가 옳다 요란하게 다투었던 모양이다. 그 절에 왔던 혜능이 한 마디 던졌다. “바람이 움직이는 것도 아니고, 깃발이 움직이는 것도 아닙니다. 그대들의 마음이 움직이는 것입니다.” 그 소리에 다툼이 멈추었다.   움직이는 것은...
나는 세상과 싸우지 않는다   나는 세상과 싸우지 않는다. 세상이 나와 싸운다. 진리를 설하는 자는 세상의 누구와도 싸우지 않는다.(『쌍윳따니까야』 22:94)   바람이 움직이는가 깃발이 움직이는가   깊은 산에 있는 사찰은 본당에 이르기까지 여러 개의 문을 거쳐야 하는 경우가 많다. 그 문들 중 첫 번째 문이 일주문(一柱門)이다. 기둥 하나로 지붕을 받치고 있기 때문에 일주문이라고 한다. 일주문의 현판에는 보통 산 이름과 절 이름이 쓰여 있다. 그런데 역사가 오랜 절에 가보면 일주문에 앞서 사찰의 존재를 알리는 돌기둥이 있다. 바로 당간지주(幢竿支柱)다. 본래는 두 개의 돌기둥 사이에 높이 솟은 당간이 세워져 있었다. 당간이란 당(幢)이라고도 하고 번(幡)이라고도 하는 깃발을 거는 기둥이다. 당간지주의 용도는 당간을 양옆에서 지지하는 것이다. 절에 행사가 있을 때 그 당간에 깃발을 걸어 행사를 알렸다고 한다.   일주문   당간지주   선(禪) 수행자들을 위해 화두 48개를 모아 놓은 『무문관』 29칙에 이 깃발과 관련된 유명한 에피소드가 나온다. 중국 선종의 여섯 번째 조사인 혜능이 주인공이다. 당간지주에 매달린 깃발이 흔들리는 보고 두 스님이 다투고 있었다. 한 스님은 ‘바람이 움직인다’고 했고 다른 스님은 ‘깃발이 움직인다’고 주장했다. 모든 시비가 그렇듯이 두 스님은 꽤 열을 올리며 서로 네가 옳다, 내가 옳다 요란하게 다투었던 모양이다. 그 절에 왔던 혜능이 한 마디 던졌다. “바람이 움직이는 것도 아니고, 깃발이 움직이는 것도 아닙니다. 그대들의 마음이 움직이는 것입니다.” 그 소리에 다툼이 멈추었다.   움직이는 것은...
요요
2022.05.08 | 조회 374
요요와 불교산책
나는 멈추었다   나는 언제나 일체의 뭇 삶에 폭력을 멈추고 있다. 그러나 그대는 살아있는 생명에 자제함이 없다. 그러므로 나는 멈추었고 그대는 멈추지 않았다.(『맛지마니까야』 86, 『앙굴리말라의 경』)   앙굴리말라 이야기 초기 경전 『앙굴리말라의 경』에는 연쇄살인마 앙굴리말라에 대한 이야기가 나온다. 앙굴리말라의 어릴 적 이름은 비폭력이라는 뜻의 아힘사카(Ahimsaka)였다. 앙굴리말라라는 이름은 손가락 목걸이라는 뜻이다. 사람을 죽인 후 손가락을 꿰어서 목걸이를 만들었기 때문에 사람들은 그를 앙굴리말라라고 불렀다.   어느 날 아침, 붓다는 탁발에서 돌아와 식사를 하고 자리를 정리한 후 앙굴리말라가 출몰하는 방향으로 길을 나섰다. 도중에 만난 사람들마다 그 길은 위험하다고 붓다를 만류했다. 그럼에도 불구하고 붓다는 묵묵히 그저 길을 갈 뿐이었다. 멀리서 붓다가 오는 것을 본 앙굴리말라는 칼과 방패, 활과 화살을 갖추고 붓다에게 다가갔다.   나는 붓다가 어떤 방법으로 사나운 앙굴리말라를 상대할지 궁금했다. 내가 기대한 시나리오는 앙굴리말라가 붓다를 잡으려 해도 잡지 못하다 결국 지쳐 떨어져 항복하거나, 활을 쏘고 날카로운 무기를 던져도 붓다를 맞히지 못하는 중국 무협영화의 한 장면 같은 것이었다. 초인적인 신통력이 아니고서는 앙굴리말라를 꼼짝 못하게 할 방법이 없으리라 생각했기 때문이다. 이후 전개를 보면 내 예상은 반은 맞고 반은 틀렸다.^^   경전에 묘사된 바에 의하면 무장한 장정들 수십 명이 몰려가도 속절없이 앙굴리말라에게 당하던 형국이었다. 그런데 혈혈단신 홀로 앙굴리말라를 향해 걸어오는 수행자 한 사람. 그는 앙굴리말라의 이름만 들어도 두려움에 벌벌 떨던 수많은 사람들과 달리 태연자약했다. 그 수행자에게서...
나는 멈추었다   나는 언제나 일체의 뭇 삶에 폭력을 멈추고 있다. 그러나 그대는 살아있는 생명에 자제함이 없다. 그러므로 나는 멈추었고 그대는 멈추지 않았다.(『맛지마니까야』 86, 『앙굴리말라의 경』)   앙굴리말라 이야기 초기 경전 『앙굴리말라의 경』에는 연쇄살인마 앙굴리말라에 대한 이야기가 나온다. 앙굴리말라의 어릴 적 이름은 비폭력이라는 뜻의 아힘사카(Ahimsaka)였다. 앙굴리말라라는 이름은 손가락 목걸이라는 뜻이다. 사람을 죽인 후 손가락을 꿰어서 목걸이를 만들었기 때문에 사람들은 그를 앙굴리말라라고 불렀다.   어느 날 아침, 붓다는 탁발에서 돌아와 식사를 하고 자리를 정리한 후 앙굴리말라가 출몰하는 방향으로 길을 나섰다. 도중에 만난 사람들마다 그 길은 위험하다고 붓다를 만류했다. 그럼에도 불구하고 붓다는 묵묵히 그저 길을 갈 뿐이었다. 멀리서 붓다가 오는 것을 본 앙굴리말라는 칼과 방패, 활과 화살을 갖추고 붓다에게 다가갔다.   나는 붓다가 어떤 방법으로 사나운 앙굴리말라를 상대할지 궁금했다. 내가 기대한 시나리오는 앙굴리말라가 붓다를 잡으려 해도 잡지 못하다 결국 지쳐 떨어져 항복하거나, 활을 쏘고 날카로운 무기를 던져도 붓다를 맞히지 못하는 중국 무협영화의 한 장면 같은 것이었다. 초인적인 신통력이 아니고서는 앙굴리말라를 꼼짝 못하게 할 방법이 없으리라 생각했기 때문이다. 이후 전개를 보면 내 예상은 반은 맞고 반은 틀렸다.^^   경전에 묘사된 바에 의하면 무장한 장정들 수십 명이 몰려가도 속절없이 앙굴리말라에게 당하던 형국이었다. 그런데 혈혈단신 홀로 앙굴리말라를 향해 걸어오는 수행자 한 사람. 그는 앙굴리말라의 이름만 들어도 두려움에 벌벌 떨던 수많은 사람들과 달리 태연자약했다. 그 수행자에게서...
요요
2022.03.18 | 조회 436
요요와 불교산책
무엇이 비린 것인가   세상의 살아있는 생명을 수호하지 못하고, 남의 것을 빼앗으면서 그들을 해치려 하고, 계행을 지키지 않고, 잔인하고, 거칠고, 무례한 것, 이것이야말로 비린 것이지 육식이 비린 것이 아닙니다.(『숫타니파타』 『아마간다의 경』)   훔친 돼지만이 살아남았다 『훔친 돼지만이 살아남았다』를 읽었다. 새벽이라는 돼지가 있다. 새벽이는 직접행동DxE(Direct Action Everywhere) 활동가들이 화성에 있는 한 종돈장에서 훔쳐온 돼지이다. 이들은 왜 돼지를 훔치는 절도의 범죄를 저질렀을까? 디엑스이 활동가들은 2019년 4월부터 자발적 참여자들과 함께 매주 도살장을 찾아다니기 시작했다. 그들은 온몸으로 도살장으로 들어가는 차를 막았다. 도살을 막을 수 있다고 생각해서가 아니었다. 마지막으로 동물들의 얼굴을 잠시라도 마주하기 위해서였다.   첫 도살장 방문 후 세 달이 지난 어느 날 밤 그들은 돼지 5,000여 마리를 기르는 종돈장에 몰래 들어가 태어난 지 얼마 안 된 새끼돼지 세 마리를 훔쳤다. 세 마리 중 한 마리가 살아남았다. 우리나라에서는 매년 1,700만 마리의 돼지가 도살된다. 새벽이는 공개 구조되어 살아남은 돼지의 이름이다.   이들은 우여곡절 끝에 새벽이의 보금자리인 생추어리를 만들었다. 생추어리(sanctuary)는 ‘saint’와 마찬가지로 ‘성스러운 곳’을 뜻하는 라틴어 ‘sanctuarium’에서 왔다.(위키피디아) 생추어리는 마치 누구라도 그곳에 들어가면 면책특권이 주어지고 보호받을 수 있는 ‘소도’와 같은 성역이자 피난처이다. 수태될 때부터 고기가 되기로 운명 지어진 돼지들이 태어난 지 6개월 만에 도살되는 현실에서 새벽이는 지옥행 운명으로부터 구조된 돼지가 되었다. ‘훔친 돼지만이 살아남았다’는 역설은 ‘죽이는 것은 합법이고 살리는 것은 불법인’(작가 홍은전의 추천사에서 인용) 공장식 축산의...
무엇이 비린 것인가   세상의 살아있는 생명을 수호하지 못하고, 남의 것을 빼앗으면서 그들을 해치려 하고, 계행을 지키지 않고, 잔인하고, 거칠고, 무례한 것, 이것이야말로 비린 것이지 육식이 비린 것이 아닙니다.(『숫타니파타』 『아마간다의 경』)   훔친 돼지만이 살아남았다 『훔친 돼지만이 살아남았다』를 읽었다. 새벽이라는 돼지가 있다. 새벽이는 직접행동DxE(Direct Action Everywhere) 활동가들이 화성에 있는 한 종돈장에서 훔쳐온 돼지이다. 이들은 왜 돼지를 훔치는 절도의 범죄를 저질렀을까? 디엑스이 활동가들은 2019년 4월부터 자발적 참여자들과 함께 매주 도살장을 찾아다니기 시작했다. 그들은 온몸으로 도살장으로 들어가는 차를 막았다. 도살을 막을 수 있다고 생각해서가 아니었다. 마지막으로 동물들의 얼굴을 잠시라도 마주하기 위해서였다.   첫 도살장 방문 후 세 달이 지난 어느 날 밤 그들은 돼지 5,000여 마리를 기르는 종돈장에 몰래 들어가 태어난 지 얼마 안 된 새끼돼지 세 마리를 훔쳤다. 세 마리 중 한 마리가 살아남았다. 우리나라에서는 매년 1,700만 마리의 돼지가 도살된다. 새벽이는 공개 구조되어 살아남은 돼지의 이름이다.   이들은 우여곡절 끝에 새벽이의 보금자리인 생추어리를 만들었다. 생추어리(sanctuary)는 ‘saint’와 마찬가지로 ‘성스러운 곳’을 뜻하는 라틴어 ‘sanctuarium’에서 왔다.(위키피디아) 생추어리는 마치 누구라도 그곳에 들어가면 면책특권이 주어지고 보호받을 수 있는 ‘소도’와 같은 성역이자 피난처이다. 수태될 때부터 고기가 되기로 운명 지어진 돼지들이 태어난 지 6개월 만에 도살되는 현실에서 새벽이는 지옥행 운명으로부터 구조된 돼지가 되었다. ‘훔친 돼지만이 살아남았다’는 역설은 ‘죽이는 것은 합법이고 살리는 것은 불법인’(작가 홍은전의 추천사에서 인용) 공장식 축산의...
요요
2022.01.16 | 조회 445
요요와 불교산책
무소의 뿔처럼 혼자서 가라   소리에 놀라지 않는 사자와 같이, 그물에 걸리지 않는 바람과 같이, 흙탕물에 더럽혀지지 않는 연꽃과 같이, 무소의 뿔처럼 혼자서 가라.(『숫타니파타』 71)   『무소의 뿔 경』 전체를 읽어본 적이 없더라도 ‘무소의 뿔처럼 혼자서 가라’는 구절을 모르는 사람은 거의 없을 것이다. 대개의 경우 이 구절은 독립, 자유, 결단, 마이 웨이와 같은 이미지와 결부된다. 지리멸렬한 현실에서 과감하게 벗어나라, 이런저런 주위의 시선과 기대 따위 훌훌 털어 버리고 네 식대로 살아도 좋다는 희망과 위로를 주는 선언으로 들리기 때문일 게다. 또 다른 한편으로는 모두 제 살 길 외에는 관심 없는 각자도생의 시대에 얽히고설켜서 잘 사는 방법을 찾아도 모자랄 판인데 불교마저 개인주의를 부추기는 것 아닌가 하는 느낌을 주기도 한다. 그런데 이 말이 나오게 된 배경과 맥락을 생각하면 이런 식의 이해들은 다소간 오해일 수도 있다. 왜냐하면 ‘무소의 뿔처럼 혼자서 가라’는 누구에게도 의존하지 않는 홀로서기를 감행하라, 남의 눈치 보지 말고 제 갈 길 가라, 자신의 욕망에 충실해라, 라는 이야기는 아니었기 때문이다.   출가(出家), 익숙한 습속을 떠나라 먼저 ‘무소의 뿔처럼 혼자서 가라’는 깨달음을 구하기 위해 집을 떠난 출가사문들을 향한 말이었다는 것을 기억할 필요가 있다. 출가사문이란, 붓다의 시대인 기원전 6세기경에 고대인도사회에 새롭게 등장한, 비판적이고 이단적인 자유사상가들이었다. 이들은 오랫동안 당연한 것으로 믿어져온 성스러운 『베다』의 가르침과 제식주의에 이의를 제기했다. 무엇보다 이들은 사제계급인 바라문들이 주관하는, 수많은 희생동물을 바치는 거대한 제사가...
무소의 뿔처럼 혼자서 가라   소리에 놀라지 않는 사자와 같이, 그물에 걸리지 않는 바람과 같이, 흙탕물에 더럽혀지지 않는 연꽃과 같이, 무소의 뿔처럼 혼자서 가라.(『숫타니파타』 71)   『무소의 뿔 경』 전체를 읽어본 적이 없더라도 ‘무소의 뿔처럼 혼자서 가라’는 구절을 모르는 사람은 거의 없을 것이다. 대개의 경우 이 구절은 독립, 자유, 결단, 마이 웨이와 같은 이미지와 결부된다. 지리멸렬한 현실에서 과감하게 벗어나라, 이런저런 주위의 시선과 기대 따위 훌훌 털어 버리고 네 식대로 살아도 좋다는 희망과 위로를 주는 선언으로 들리기 때문일 게다. 또 다른 한편으로는 모두 제 살 길 외에는 관심 없는 각자도생의 시대에 얽히고설켜서 잘 사는 방법을 찾아도 모자랄 판인데 불교마저 개인주의를 부추기는 것 아닌가 하는 느낌을 주기도 한다. 그런데 이 말이 나오게 된 배경과 맥락을 생각하면 이런 식의 이해들은 다소간 오해일 수도 있다. 왜냐하면 ‘무소의 뿔처럼 혼자서 가라’는 누구에게도 의존하지 않는 홀로서기를 감행하라, 남의 눈치 보지 말고 제 갈 길 가라, 자신의 욕망에 충실해라, 라는 이야기는 아니었기 때문이다.   출가(出家), 익숙한 습속을 떠나라 먼저 ‘무소의 뿔처럼 혼자서 가라’는 깨달음을 구하기 위해 집을 떠난 출가사문들을 향한 말이었다는 것을 기억할 필요가 있다. 출가사문이란, 붓다의 시대인 기원전 6세기경에 고대인도사회에 새롭게 등장한, 비판적이고 이단적인 자유사상가들이었다. 이들은 오랫동안 당연한 것으로 믿어져온 성스러운 『베다』의 가르침과 제식주의에 이의를 제기했다. 무엇보다 이들은 사제계급인 바라문들이 주관하는, 수많은 희생동물을 바치는 거대한 제사가...
요요
2021.10.20 | 조회 619
요요와 불교산책
두 번째 화살에 맞지 않으려면   번뇌의 화살을 뽑아 집착 없이 마음의 평안을 얻는다면 모든 슬픔을 뛰어 넘어 슬픔 없는 님으로 열반에 들 것입니다. (『숫타니파타』 3품 8 『화살의 경』)   최근 나는 그 어느 때보다 삶이 고해(苦海)라는 것을 실감하며 살고 있다. 작년 가을, 긍정과 명랑의 아이콘이었던 어머니에게 갑자기 심각한 우울증이 왔다. 추운 겨울날 새벽 어머니는 자살충동을 느끼고 집을 나섰다. 천만 다행으로 길에 쓰러져 있던 어머니를 찾은 우리는 사태의 심각성을 느끼고 급히 어머니를 입원시켰다. 이번에는 치매가 진행 중이던 아버지에게 문제가 생겼다. 아버지는 무조건 어머니를 데려오라고 시도 때도 없이 고함을 지르고 화를 내며 점점 폭력적으로 변해갔다. 아버지도 입원해서 약물치료를 받아야했다.   퇴원한 날 어머니는 엎친 데 덮친 격으로 낙상사고를 당해 고관절 수술을 받았다. 요양병원에 입원한 어머니와 집으로 돌아온 아버지의 몸과 마음은 여전히 불안했다. 살얼음을 딛는 것 같은 몇 개월을 보내고 이제 겨우 한숨 돌리나 했는데 얼마 전 어머니의 직장과 질 사이에 누공이 생긴 것을 알게 되었다. 망설이고 주저하다 수술을 결정했는데 수술 후 어머니는 컨디션 난조를 보이고 있다. 상황이 달라질 때마다 내 마음은 오르락내리락 롤러코스터를 탄다. 일희일비하지 않고 평정심을 유지하며 다가오는 일들에 대처하고 싶은데, 그것이 참, 쉽지 않다.   첫 번째 화살과 두 번째 화살   내 부모님이 그렇듯이 아무리 피하고 싶어도 생로병사의 사건들은 결국 닥쳐오고야 만다. 2500년 전 왕자로 태어난 고타마 싯다르타가...
두 번째 화살에 맞지 않으려면   번뇌의 화살을 뽑아 집착 없이 마음의 평안을 얻는다면 모든 슬픔을 뛰어 넘어 슬픔 없는 님으로 열반에 들 것입니다. (『숫타니파타』 3품 8 『화살의 경』)   최근 나는 그 어느 때보다 삶이 고해(苦海)라는 것을 실감하며 살고 있다. 작년 가을, 긍정과 명랑의 아이콘이었던 어머니에게 갑자기 심각한 우울증이 왔다. 추운 겨울날 새벽 어머니는 자살충동을 느끼고 집을 나섰다. 천만 다행으로 길에 쓰러져 있던 어머니를 찾은 우리는 사태의 심각성을 느끼고 급히 어머니를 입원시켰다. 이번에는 치매가 진행 중이던 아버지에게 문제가 생겼다. 아버지는 무조건 어머니를 데려오라고 시도 때도 없이 고함을 지르고 화를 내며 점점 폭력적으로 변해갔다. 아버지도 입원해서 약물치료를 받아야했다.   퇴원한 날 어머니는 엎친 데 덮친 격으로 낙상사고를 당해 고관절 수술을 받았다. 요양병원에 입원한 어머니와 집으로 돌아온 아버지의 몸과 마음은 여전히 불안했다. 살얼음을 딛는 것 같은 몇 개월을 보내고 이제 겨우 한숨 돌리나 했는데 얼마 전 어머니의 직장과 질 사이에 누공이 생긴 것을 알게 되었다. 망설이고 주저하다 수술을 결정했는데 수술 후 어머니는 컨디션 난조를 보이고 있다. 상황이 달라질 때마다 내 마음은 오르락내리락 롤러코스터를 탄다. 일희일비하지 않고 평정심을 유지하며 다가오는 일들에 대처하고 싶은데, 그것이 참, 쉽지 않다.   첫 번째 화살과 두 번째 화살   내 부모님이 그렇듯이 아무리 피하고 싶어도 생로병사의 사건들은 결국 닥쳐오고야 만다. 2500년 전 왕자로 태어난 고타마 싯다르타가...
요요
2021.09.08 | 조회 619
글쓰기