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논어 카메오 열전 12회] 저물어가는 춘추시대

진달래
2023-07-11 00:24
312

진성자(제나라 대부 진항)가 간공을 시해했다. 공자께서 목욕재계하고 조정에 나가 애공에게 알렸다.

“진항이 그의 임금을 시해하였으니 그를 토벌하십시오.”

애공이 말했다.

“세 대부들에게 말하시오.”

공자께서 말씀하셨다.

“내가 대부의 자리에 있었기 때문에 감히 고하지 않을 수 없었는데 임금께서는 세 대부들에게 말하라 하시는구나.”

공자께서 세 대부들에게 가서 말했으나 모두 안 된다고 하자, 공자께서 말씀하셨다.

“내가 대부의 자리에 있었기 때문에 감히 고하지 않을 수 없었다.”

(陳成子弑簡公 孔子沐浴而朝 告於哀公曰 陳恆弑其君 請討之 公曰 告夫三子 孔子曰 以吾從大夫之後 不敢不告也 君曰 告夫三子者 之三子告 不可 孔子曰 以吾從大夫之後 不敢不告也) <논어> 헌문-22

 

내가 동양 고전을 처음 읽었을 때 겪은 어려움 중 하나는 한 사람이 여러 이름으로 등장하는 것이다. 진성자(陳成子)도 그런 사람 중에 하나였는데, 여기는 진성자라고 되어 있지만 대체로 전성자(田成子)라고 하고, 진항(陳恒), 전항(田恒), 혹 전상(田常)이라고도 한다. 여기서 성자(成子)는 그의 시호이며, 이름이 항(恒)인데 『사기』에는 상(常)으로도 되어 있다. 진성자 혹은 전성자라고 하는 것은 원래 이들이 진(陳)나라에서 살다가 제(齊)나라로 이주하여 성을 전(田)으로 바꾸었기 때문이다.

 

  1. ()씨의 제나라에서 전()씨의 제나라로

 

사마천의 『사기(史記)』 중 「세가(世家)」는 춘추전국시대 제후국들의 역사를 쓰고 있다. 그러니까 노나라의 역사는 「노세가」에 진나라는 「진세가」를 살펴보면 된다. 그런데 제나라의 경우 「제세가」로 되어 있지 않고 「제태공세가」와 「전경중완세가」로 나누어져 있다. 제나라 군주의 자리가 강태공의 강씨에서 바로 진성자, 아니 전성자의 전씨로 바뀌는 일이 있었기 때문이다.

진(陳)나라에서 처음 제나라로 이주한 이는 진완(陳完)이다. 완은 원래 진나라의 공족(公族)이었다. 진나라는 순임금의 후예들에게 봉해 준 나라로 규(嬀)성이다. 진(陳) 선공 21년, 그가 친하게 지내던 태자 어구가 죽임을 당하는 사건이 일어난다. 이에 겁이 난 진완은 제나라로 도망을 갔다. 당시 제나라의 군주는 환공이었는데 도망 온지 얼마 되지 않은 완에게 경(卿)의 자리를 제안한다. 이 때 완은 “객지를 떠도는 신하로서 이처럼 은혜를 입은 것만으로도 다행으로 여깁니다.”라고 말하며 정중하게 제 환공의 제안을 사양했다. 완의 겸손한 태도가 마음에 든 환공은 수공업자들을 감독하는 공정(工正) 자리를 맡게 했다. 이 사람이 바로 「전경중완세가」의 전경중, 그러니까 전완이다.

완이 어렸을 때 주나라의 태사가 그를 보고 주역 점을 봤는데 그가 다른 나라에 가서 귀하게 될 것이며, 후대에는 천자의 귀한 손님이 될 것이라고 했다. 여기서 다른 나라는 강(姜)성을 가진 나라일 것이며 반드시 후대에 그렇게 될 것이라고 했다고 한다. 물론 이런 이야기는 아마도 후대에 만들어 진 것이겠지만 이들은 완 이후 5대 전환자 때에 이르면 제나라 유력 대부의 집안으로 자리를 잡게 되고, 8대 후손인 전성자(田常)는 간공을 시해하고 정권을 장악했으며, 그 100년 뒤 전화(田和)가 왕이 되면서 전(田)씨의 제나라가 된다.

 

『논어』에 등장하는 전/진성자가 간공을 시해할 당시 제나라의 상황은 매우 복잡했다. 제 경공은 안자(晏子)와 함께 한동안 나라를 안정되게 다스렸지만 안자가 죽고 난 이후에 제나라에 유력 대부들 사이에 권력 다툼이 일어나면서 군주가 여러 번 바뀌는 일이 일어났기 때문이다. 경공은 말년에 장성한 아들을 놔두고 어린 아들인 도(筡)를 태자로 세웠다. 경공이 죽자 대대로 세력이 있었던 국(國)씨와 고(高)씨가 도를 군주로 세웠다. 그러나 평소 국씨와 고씨와 세력 다툼을 하던 포(鮑)씨와 전(田)씨가 경공의 다른 아들인 양생을 도공으로 옹립했다. 얼마 지나지 않아 도공과 사이가 나빠진 포씨가 도공을 시해하고 도공의 아들을 즉위시켰는데 그가 간공(簡公)이다.

간공은 즉위 후 전성자와 감지를 재상으로 두었다. 간공이 감지를 총애하자, 감지는 전성자를 죽이려했다. 그러나 전성자가 역으로 이를 치고, 간공을 시해했다. 전성자는 간공을 대신해서 평공(平公)을 세웠다. 제 경공 시기에 평화는 안자에 의해 각 대부들 사이에 힘의 균형을 이루었기 때문에 유지된 것이었다. 안자가 죽고 각 대부들의 권력 다툼은 표면으로 드러나게 되었다. 간공의 시해 사건은 이러한 권력 다툼에서 전씨가 제나라의 권력을 장악하게 되는 결정적인 사건이었다.

 

 

  1. 명분이 사라지는 시대

 

춘추시대 말 대부들에 의해 제후가 바뀌는 경우는 워낙 빈번하게 일어나는 일 중 하나였다. 그러니까 전성자에 의해 간공이 시해되고 평공이 세워진 일이 그렇게 특별한 일이 아닐 수 있다. 하지만 『논어』에 이 장면이 등장하면서 이 일은 춘추시대가 끝나고 있음을 알려주는 상징적인 사건이 되었다.

공자가 노 애공에게 제나라 토벌을 건의하는 이 장면은 여러모로 이상한 점이 많다. 먼저 제나라 군주가 시해 당했는데 노나라에서 토벌을 해야 한다고 하는 것이다. 다음으로 제나라 같은 큰 나라를 작은 노나라가 토벌을 하네 마네 하는 것 자체가 말이 되지 않는다. 더구나 이런 일을 성토(討)하는 것은 천자(天子)의 역할이기 때문에 패자(覇者)는 되어야 이런 일을 도모할 수 있다. 그런 의미에서 공자가 패자도 아닌 노나라 군주에게 전성자를 토벌해야 한다고 하는 것은 오히려 예(禮)에 맞는 일이 아니다. 그렇다면 공자는 무슨 의도를 가지고 이런 말을 했을까?

『춘추좌전』에도 이 때 공자가 애공에게 고하는 장면이 나온다. 애공이 약한 노나라가 어떻게 제나라를 이길 수 있겠냐고 묻자 공자가 대답한다. “진항이 그 임금을 시해하였으니 백성들 중에 그의 편이 아닌 자가 반은 될 것입니다. 노나라 군대와 진항에 반대하는 백성 반을 합하면 승리할 수도 있습니다.” 물론 애공이 이를 계손에게 이야기 하라고 하자 공자가 그만두었다고 하였다. 『좌전』에 남아 있는 이 기록을 보면 공자는 간공 시해 사건을 계기로 제나라를 칠 수 있는 명분을 챙기면서 내란으로 혼란해진 틈을 이용하려고 한 듯하다. 이즈음 제나라와 노나라 사이에는 전쟁이 빈번하게 일어나고 있었고, 애릉 전투에서 노나라는 제나라에게 크게 패한 일이 있었다.

 

그러나 후대 성리학자들은 이보다는 공자가 진항을 토벌해야 한다고 청한 것을 춘추시대의 예(禮)를 행하려고 한 것으로 보았다. 즉 명분을 더 중요하게 여긴 것이다. 북송 때의 정자(程子)는 ‘공자의 뜻이 명분을 바로잡고 그 죄를 천자에게 고하고 여러 제후들에게 알려서 제후국들과 함께 그를 성토하려 하는데 있다.’고 하였다. 그렇다면 패자도 아닌 노나라가 어떻게 제나라를 성토할 수 있다고 생각했을까? 그건 노나라에 주나라의 예법이 가장 많이 남아 있다고 생각했기 때문이다.

공자는 춘추시대의 혼란이 주(周)나라의 질서가 무너졌기 때문이라고 생각했다. 그는 평생을 이러한 질서를 바로 세우기 위해 고군분투했다. 따라서 이 일도 무너져가는 옛 질서를 세우려는 공자의 사명감으로 본 것이다. 그러나 공자의 말에 애공은 이를 ‘세 대부(三桓)’에게 고하라고 한다. 제후에게는 힘이 없음을, 이 또한 대부들에게 결정권이 있음을 단적으로 보여준다고 할 수 있다.

 

  1. 해야 할 일을 할 뿐이다

 

『춘추좌전』을 읽다보면 가장 많이 보는 단어 중 하나가 회(會)와 맹(盟)이다 우리가 흔히 회맹(會盟)이라고 하는 것으로 매년 누가, 누구누구와 어디에서 맹약을 맺었다는 말이 나온다. 지금으로 치면 국제회담 격으로 볼 수 있는데 이들은 맹약을 맺고 주로 잘못이 있는 나라에 가서 성토를 한다. 물론 이런 춘추시대의 수많은 회맹(會盟)들이 명분만을 추구하는 것은 아니다. 그 뒤에 각각의 나라들은 서로의 이해관계를 숨기고 있었다. 그럼에도 이들은 명분이 없이는 함부로 군사를 낼 수 없었고, 자기 나라에 이익이 되는 일만 할 수도 없었다. 춘추시대는 이익보다는 명분과 의(義)를 중요시했다고 할 수 있다.

그래서 진(陳)나라에서 이주한 전씨가 제나라에서 유력한 대부 집안으로 자리를 잡을 수 있었던 이유를 전완의 이야기에서는 그의 겸손함에서 비롯된 것으로 보여준다. 그러나 후대로 갈수록 그들이 권력을 잡을 수 있었던 이유를 민심을 얻었기 때문이라고 한다.

 

 

특히 전성자의 아버지인 전희자(전걸)는 평소에 백성들에게 곡식을 빌려 줄 때 큰 됫박으로 빌려주고 돌려받을 때 작은 됫박을 사용한 일이 유명하다. 또 이들은 목재나 생선 혹은 소금을 구입할 때 상인들이 부르는 대로 값을 쳐주었다. 내란이 일어났을 때는 자기들의 이익을 모두 나라에 바쳤고, 망명했던 공족들이 돌아오면 봉록을 올려 주었다. 또 작위가 없는 자들에게는 사적(私的)으로 전답을 나누어 주고, 오갈 데 없는 백성들에게는 양식을 나누어 주었다. 그래서 『사기세가』에 의하면 전씨가 제후의 자리에 올랐을 때 나라 사람들에게 큰 저항을 받지 않았다고 한다.

이렇게 전씨가 한 일들은 대체로 백성들을 위해 한 일들로 여겨졌고 사람들에게 칭송을 받았다. 그러나 이들이 한 일이 과연 백성들을 위한 것인지, 자기 집안을 위한 것인지 잘 살펴보아야 한다. 만약 이들이 백성을 위해 이런 일들을 했다면 오히려 집안 일로 할 것이 아니라 나라 전체에 행해질 수 있는 정책이나 제도를 만들어야 할 것이다. 그러니까 이들은 이런 일들을 전씨가 민심을 얻는데 사용한 것이지 제나라 전체를 위해서 사용했다고 볼 수 없다. 한편으로 전씨가 제후의 자리에 오르는데 제나라 사람들이 크게 저항하지 않았다고 한 것도 이들 역시 자기에게 이익이 된다면 누가 군주가 되어도 상관없다고 여긴 것이다. 그러니까 제후의 자리에 오르는 이도 그를 받아들이는 백성들도 모두 자기의 이익을 최선으로 여긴 것이라고 할 수 있다.

그런 면에서 간공을 시해한 전성자를 토벌 할 수 없음을 보여주는 『논어』의 이 장면은 명분을 중시하는 춘추시대가 이제 막을 내리고 있음을 분명하게 나타낸다. 이제 이익이 되지 않은 일에는 누구도 나서지 않으며, 이익이 되는 일이라면 어떤 일이라고 할 수 있는 시대가 된 것이다.

 

처음 “내가 대부의 자리에 있었기 때문에 감히 고하지 않을 수 없었다.(以吾從大夫之後 不敢不告也)”를 읽었을 때는 공자가 안 될 줄 알면서도 할 수 밖에 없었다고만 읽혔다. 자기 행동에 대한 변명처럼 느껴지기도 했다. 그런데 자꾸 보다보니 목욕재계하고 애공에게 나가 전성자를 성토해야 한다고 말하는 공자의 마음에서 사뭇 비장함이 느껴졌다. 아마도 공자는 다가올 시대가 오직 서로 이익(利)을 위해서 다투는 시대가 되리라는 것을 알고 있었을 것이다. 그러나 공자는 그 일에 대해 화를 내거나 한탄하지 않았다. 오히려 자기가 해야 할 일을 했다. 누가 알아주지 않아도, 혹은 그 일이 성사되지 않아도 말이다. 누구도 시대의 흐름을 막을 수는 없다. 그럼에도 우리는 각자 해야 할 일을 할 뿐이다.

 

 

댓글 3
  • 2023-07-12 17:00

    안되는 줄 알면서도 묵묵히 해야 할 일을 하는 공자의 마음이 새삼 무겁게 다가오네요. 그 마음을 과연 명분에 사로잡힌 고집이라고 폄하할 수 있을까요?

  • 2023-07-14 11:45

    그런 상황에 자신이 해야할 일이 그것밖에 없음을 알고 그렇게 한게 아닐까요? 어려운 시대여서 공자가 공자님이 될 수 있었던 것도 같네요 ^^
    잘 읽었습니다~~

  • 2023-07-16 09:58

    논어에서 공자가 계속 아쉬워하고 비통해하는 것이 그런 것이었군요. 명분이 어떤 위중함을 갖고 있었는지 이해가 잘 되네요..!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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2023.08.17 | 조회 300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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요요
2023.07.20 | 조회 481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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2023.07.11 | 조회 312
한문이예술
昔, 어떤 과거는 오래된 극복이다   동은     1. 하고 싶은 말      언젠가 한 친구가 나에게 물었다. "선생님은 왜 선생님을 하기로 했어요?" 짧은 순간이었지만 여러 생각이 스쳤다. '내가 선생이었나?'부터 '내가 선생이어도 될까?', 그리고 '내가 어쩌다 선생이 되었지?'라는 물음으로 이어졌다. 나는 질문한 친구에게 되물었다. "왜 그런 질문을 했을까?" 친구는 "그냥 궁금해서요."라고 했지만 곧이 곧대로 듣기에는 조금 찔리는 부분들이 있었다. 내가 선생이라기엔 하고 다니는 행색이 너무 선생답지 않았나? 수업이 별로인가? 아니면 (그럴 것 같진 않지만) 혹시라도 너무 '선생'같은가^^?? 스스로 선생이라기보다는 학생이라고 생각해온 시간이 훨씬 길어서 그런지 친구의 질문에 쉽게 대답할수 없었다. 하지만 내가 <한문이 예술>에서 아이들 앞에 서있는 이유는 생각보다 선명했다.      그 친구의 질문에 대한 나의 대답은 이랬다. "너희들한테 한자로 해주고 싶은 이야기가 있어서인 것 같아." 짐짓 태연한 목소리로 말했지만 사실 말을 시작하는 순간부터 나는 묘한 감정에 휩싸였다. 뭐라고 설명해야할까? 몰랐던 것을 '나 정말 그랬구나!'하고 이제서야 깨닫는 느낌이었다. 실제로 수업준비의 대부분은 아이들에게 어떻게 한자의 이야기를 전할지 고민하는 시간이었다. 어떻게 전달할지에 대한 방식보다도 어떤 내용을 전달할지에 대한 내용이 훨씬 많았다. 그랬으면서 왜 하고 싶은 말이 있었다는 것을 잊고 있었던 건지...!     2. 昔      한자로 상상조차 힘든 과거를 이야기하는 것은 어쩌면 무의미한 일일지도 모른다. 과거로 회귀하라는 것도 아니고, 그럴 수도 없는데 완전히 달라진 오늘날에 고대의 일에...
昔, 어떤 과거는 오래된 극복이다   동은     1. 하고 싶은 말      언젠가 한 친구가 나에게 물었다. "선생님은 왜 선생님을 하기로 했어요?" 짧은 순간이었지만 여러 생각이 스쳤다. '내가 선생이었나?'부터 '내가 선생이어도 될까?', 그리고 '내가 어쩌다 선생이 되었지?'라는 물음으로 이어졌다. 나는 질문한 친구에게 되물었다. "왜 그런 질문을 했을까?" 친구는 "그냥 궁금해서요."라고 했지만 곧이 곧대로 듣기에는 조금 찔리는 부분들이 있었다. 내가 선생이라기엔 하고 다니는 행색이 너무 선생답지 않았나? 수업이 별로인가? 아니면 (그럴 것 같진 않지만) 혹시라도 너무 '선생'같은가^^?? 스스로 선생이라기보다는 학생이라고 생각해온 시간이 훨씬 길어서 그런지 친구의 질문에 쉽게 대답할수 없었다. 하지만 내가 <한문이 예술>에서 아이들 앞에 서있는 이유는 생각보다 선명했다.      그 친구의 질문에 대한 나의 대답은 이랬다. "너희들한테 한자로 해주고 싶은 이야기가 있어서인 것 같아." 짐짓 태연한 목소리로 말했지만 사실 말을 시작하는 순간부터 나는 묘한 감정에 휩싸였다. 뭐라고 설명해야할까? 몰랐던 것을 '나 정말 그랬구나!'하고 이제서야 깨닫는 느낌이었다. 실제로 수업준비의 대부분은 아이들에게 어떻게 한자의 이야기를 전할지 고민하는 시간이었다. 어떻게 전달할지에 대한 방식보다도 어떤 내용을 전달할지에 대한 내용이 훨씬 많았다. 그랬으면서 왜 하고 싶은 말이 있었다는 것을 잊고 있었던 건지...!     2. 昔      한자로 상상조차 힘든 과거를 이야기하는 것은 어쩌면 무의미한 일일지도 모른다. 과거로 회귀하라는 것도 아니고, 그럴 수도 없는데 완전히 달라진 오늘날에 고대의 일에...
동은
2023.07.04 | 조회 358
봄날의 주역이야기
  쌀벌레가 나타나야 쌀이 상한 것을 안다 십년이 넘도록 함께 웃고 지내던 동아리에 일이 생겼다. 표면적으로는 멤버 중 몇몇의 술이 과해서 벌인 쌈박질이지만, 그것은 오랫동안 동아리 내에서 묵혀두었던 ‘과거사’ 때문에 벌어진 일이었다. 육십갑자가 넘은 사람들이 해도 되는 말과, 절대로 하면 안되는 말을 마구 내뱉었다. 욕설을 몇 번 주고받던 사람들이 급기야 의자를 집어던지고 주먹다짐을 하고 말았다. 장수하는 동아리로, ‘성격 좋은 사람들’이 모인 동아리로 주변의 부러움을 샀었는데, 비록 술기운을 빌렸다고 하지만, 누군가의 가슴 속에 상처가 되는 말들이 거침없이 쏟아져 나왔다. 십년의 우정은 어디로 가고, 곪을대로 곪아버린 관계만이 드러났다. 그것은 주역의 18번째 괘인 산풍고(山風蠱)괘가 형상화한 ‘벌레먹은 그릇’, 바로 그것이었다.   괘명인 고(蠱)라는 한자는 그릇(皿) 속에 많은 벌레가 있는 모양을 하고 있다. 벌레의 종류를 정확하게 규정하지 않고 있지만, 이때의 벌레는 쌀에서 생겨나는 바구미 같은 류를 생각하는 것이 적당할 듯하다. 좀 오래된 쌀독을 열었을 때 갑자기 튀어나오는 바구미처럼, 우리는 벌레를 발견하기 전까지는 쌀이 상했을 것이라고 전혀 생각하지 않는다. 바구미가 튀어나온 순간, 일은 완전히 다른 국면으로 넘어가고, 시선은 쌀에서 벌레로 옮겨간다.     산 아래 머무는 바람이 하는 일 이렇게 나도 알지 못하는 사이에 어떤 일이 벌어진 데에는 나름대로 원인이 있을텐데, 64괘가 배열된 차례를 보면 고개가 끄덕여지는 측면이 있다. 산풍고괘는 18번째 괘인데, 16번째 괘는 ‘기쁨’을 나타내는 뇌지예(雷地豫)괘이고, 17번째는 ‘남을 따른다’는 뜻을 가진 택뢰수(澤雷隨)괘이다. 그러니까, 기뻐하고 따르는...
  쌀벌레가 나타나야 쌀이 상한 것을 안다 십년이 넘도록 함께 웃고 지내던 동아리에 일이 생겼다. 표면적으로는 멤버 중 몇몇의 술이 과해서 벌인 쌈박질이지만, 그것은 오랫동안 동아리 내에서 묵혀두었던 ‘과거사’ 때문에 벌어진 일이었다. 육십갑자가 넘은 사람들이 해도 되는 말과, 절대로 하면 안되는 말을 마구 내뱉었다. 욕설을 몇 번 주고받던 사람들이 급기야 의자를 집어던지고 주먹다짐을 하고 말았다. 장수하는 동아리로, ‘성격 좋은 사람들’이 모인 동아리로 주변의 부러움을 샀었는데, 비록 술기운을 빌렸다고 하지만, 누군가의 가슴 속에 상처가 되는 말들이 거침없이 쏟아져 나왔다. 십년의 우정은 어디로 가고, 곪을대로 곪아버린 관계만이 드러났다. 그것은 주역의 18번째 괘인 산풍고(山風蠱)괘가 형상화한 ‘벌레먹은 그릇’, 바로 그것이었다.   괘명인 고(蠱)라는 한자는 그릇(皿) 속에 많은 벌레가 있는 모양을 하고 있다. 벌레의 종류를 정확하게 규정하지 않고 있지만, 이때의 벌레는 쌀에서 생겨나는 바구미 같은 류를 생각하는 것이 적당할 듯하다. 좀 오래된 쌀독을 열었을 때 갑자기 튀어나오는 바구미처럼, 우리는 벌레를 발견하기 전까지는 쌀이 상했을 것이라고 전혀 생각하지 않는다. 바구미가 튀어나온 순간, 일은 완전히 다른 국면으로 넘어가고, 시선은 쌀에서 벌레로 옮겨간다.     산 아래 머무는 바람이 하는 일 이렇게 나도 알지 못하는 사이에 어떤 일이 벌어진 데에는 나름대로 원인이 있을텐데, 64괘가 배열된 차례를 보면 고개가 끄덕여지는 측면이 있다. 산풍고괘는 18번째 괘인데, 16번째 괘는 ‘기쁨’을 나타내는 뇌지예(雷地豫)괘이고, 17번째는 ‘남을 따른다’는 뜻을 가진 택뢰수(澤雷隨)괘이다. 그러니까, 기뻐하고 따르는...
봄날
2023.07.04 | 조회 293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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