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읽고쓰기1234]문어가 된다는 것은 어떤 것일까?

요요
2023-06-17 11:14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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문어가 된다는 것은 어떤 것일까

피터 고프리스미스, 『아더 마인즈』

 

 

 

나의 문어 선생님

친정집 제사상에는 늘 삶은 문어가 올라왔다. 제사가 끝나면 문어를 먹기 좋게 잘라 음복을 한 뒤 술안주로 초고추장에 찍어 먹곤 했다. 그렇게 내게 문어는 특별한 날에만 먹는 숙회 이상도 이하도 아니었다. 그런데 넷플릭스 다큐 <나의 문어 선생님>을 통해 만난 문어는 한낱 먹거리가 아니었다. 문어는 한 인간의 아픔을 치유하고 자연의 신비와 생명에 대한 경이를 되살려 그를 다시 살게 한 신비롭고 놀라운 존재였다.

 

다시 문어를 만났다. 이번에는 영화가 아니라 책 <아더 마인즈>로. 이 책의 저자인 철학자 피터 고프리스미스 역시 <나의 문어 선생님>의 주인공과 같은 스쿠버 다이버다. 그는 스쿠버다이빙을 하면서 문어를 만났고, 문어를 관찰하고, 문어의 마음에 대해 물었고, 그 물음은 마음의 탄생에 대한 탐구로까지 나아갔다. <아더 마인즈>에서 시작한 그의 물음은 더 심화되어 의식과 마음의 진화 그리고 생명의 의미를 탐색하는 <후생동물>을 쓰게 되기에 이르렀다. 두 권의 책 모두 진화론의 관점에서 마음과 의식의 문제에 접근한다. 그는 인간이 진화의 정점에 서 있다고 보는 관점에 매우 비판적이다. 두권의 책 모두에서 마음과 의식에 대한 철학적 탐구는 최근의 과학과 철학의 첨예한 담론들을 건드리며 전개된다. 사실 이 담론들은 매우 흥미로운 주제이긴 하지만 이 글에서는 마음과 의식의 진화보다는 문어를 알아가는 것에 초점을 맞추려고 한다. (마음과 의식의 진화 문제는 살펴보아야 할 쟁점이 많을 뿐만 아니라 관련한 공부가 더 필요하다고 생각되어 언젠가 기회가 되면 다시 정리해보고 싶다.)

 


 

 

문어에게 배운다

문어는 우리 인간과 달라도 너무 다르다. 영화 <콘택트>의 외계인이 커다란 문어 형상을 했던 것처럼 문어야말로 인간과 다른 정신적 존재를 탐구할 때 가장 적합한 생명체인지도 모른다. 무엇보다 문어의 몸은 척추동물의 구조화된 몸과 다르다. 문어는 자신의 눈 크기 정도의 구멍이라면 몸을 접거나 구부려서 얼마든지 통과할 수 있다. 문어의 몸의 모습과 구조, 그리고 능력은 우리의 상상을 훌쩍 뛰어넘는다. 문어의 피는 푸르고 심장은 세 개다. 문어는 똑똑하다. 문어는 사람의 얼굴을 구별할 줄 안다. 실험실에서의 문어는 싫어하는 사람에게만 먹물을 쏘기도 한다. 또 문어는 사람이 보지 않을 때를 기다렸다가 실험실 수조에서 벗어나 배수구를 통해 바다로 가는 길을 찾아 나서기도 한다. 인간의 눈에는 문어가 계획을 세운 것처럼 보이기도 한다.

 

문어는 무척추 동물 세계에서는 가장 똑똑한 생물 넘버1이다. 인간은 1000억개, 벌은 100만개, 개가 5억개 정도의 뉴런을 갖고 있다고 하는데, 문어의 신경계에는 5억개 정도의 뉴런이 있다. 문어의 신경계는 척추동물들과 달리 머리-뇌의 중추신경 중심이 아니다. 문어는 전체 신경계 중 3분의 2가 여덟 개의 다리에 분포되어 있다. 우리의 팔다리와 달리 문어의 다리는 머리와의 관계에서 상대적으로 자율적이다. 문어의 다리는 중앙뇌의 명령 없이도 자율적으로 활동하고 맛보고 세계를 탐색한다. 문어 다리의 빨판 하나에 100만개 정도의 뉴런이 있다고 하니 그 자체가 작은 뇌라고 볼 수도 있을 것 같다. 인간의 뇌가 중앙통제형인 것과 다르게 문어는 몸전체가 뇌인 셈이다.

 

인간과 문어는 공통조상으로부터 6억년전쯤 갈라졌고, 각자 다른 길을 걸어서 지금에 이르렀다. 45억년 지구의 역사에서 생명이 나타난 것이 38억년 전, 진핵세포가 나타난 것은 15억년 전. 진핵세포인 단세포들이 뭉쳐진 다세포 생물이 출현한 것은 약 9억년 전이다. 다세포 생물은 단세포 생물이 세포막으로 외부와 경계를 짓고 자극에 감각하고 반응하던 것과 차원이 다른 혁명적 변화를 조건으로 생겨났다. 바로 하나의 개체 내부에서의 세포들 사이의 소통과 신호체계, 그리고 협응시스템이 나타난 것이다. 그런 내부 소통이 없다면 다세포 생물은 존재할 수 없다. 이런 내면적 소통 시스템의 발생은 세포들 사이에서 아주 빠르게 전기화학적 신호를 주고받는 신경계의 출현을 예고하는 것이었다. 과학자들은 대략 7억~8억년 전에 초보적 차원의 신경계가 등장한 것으로 추정한다. 바로 인간과 문어의 공통조상이 갈라지기 직전이었다. 그 조상은 아마 아주 작은 벌레 모양을 하고 있었을 지도 모르겠다.

 

6억년 전 공통조상으로부터 분기하여 오늘에 이른 인간과 문어는 전혀 다른 디자인의 신경계, 즉 뇌를 갖게 되었다. 이로부터 우리는 자연이 단 하나의 신경계, 단 하나의 뇌, 나아가 단 하나의 마음만을 만들지 않았다는 것을 알 수 있다. 그러므로 인간의 뇌와 마음을 척도로 삼아 다른 생명체의 마음과 의식을 바라보는 관점은 단지 인간중심적인 것일 뿐만 아니라 자연을 있는 그대로 파악하지 못하는 편협한 것일 수밖에 없다.

 

 

 

의식의 통일성의 문제

인간을 비롯한 척추동물의 신경계는 중앙에서 통제하는 뇌구조를 갖추고 있다. 일반인들, 그리고 많은 과학자들과 철학자들도 정신과 뇌를 단일한 것으로 여긴다. 몸도 하나, 뇌도 하나, 정신도 하나, 자아도 하나라고 생각한다. 주관적 경험을 한 마디로 말하자면 내가 나를 나인 것처럼 느끼는 경험이다. 이러한 주관적 경험에 대해서 우리는 당연히 ‘나’라는 통일된 자아를 상정한다.

 

그런데 분할뇌 실험은 다른 사실을 보여준다. 1940년대부터 간질환자의 발작을 해결하기 위한 방법으로 좌뇌와 우뇌를 연결하는 뇌량절제수술이 시작되었다. 이 수술을 받은 환자들은 일상에서 아무 문제가 없다. 그런데 특별하게 조직된 실험에서는 보통 사람과 다른 결과를 보였다. 오른쪽 눈을 가리고 달걀을 보여준 뒤, 무엇을 보았느냐고 하면 이 사람은 아무것도 보지 못했다고 말한다. 언어중추인 좌뇌가 말로 하는 답변이다. 그런데 여러 물건 중에서 자신이 본 것을 고르라고 하면 왼손은 달걀을 고른다. 우뇌의 답변이다. 이 실험으로 뇌량을 끊었을 때 좌뇌와 우뇌의 각 반구가 독립적으로 활동한다는 것을 알게 되었다. 분할뇌 실험은 하나로 통일된 자아에 대한 우리의 상식을 흔들었다. 의식이나 자아가 하나라는 생각에 균열이 온 것이다.

 

그런데 자연에서는 좌뇌와 우뇌가 두껍고 단단한 뇌량에 의해 강하게 연결된 인간의 경우가 오히려 특별하다고 할 수 있다. 우리와 같은 포유류에 속하는 돌고래는 좌뇌와 우뇌를 연결하는 뇌량이 인간에 비해 가늘고 좁다. 돌고래는 잘 때 한쪽 뇌만이 잠을 잔다. 반대편은 깨어 있다. 돌고래에게 자아가 있다면 돌고래의 자아는 어느 쪽 뇌에 있다고 말할 수 있을까. 양서류인 개구리의 경우 왼쪽 뇌는 주로 먹이감을, 오른 쪽 뇌는 환경과의 관계에 특화되어 있다. 먹이가 오른쪽에 나타나면 백발백중이지만 왼쪽에 나타나면 쉽게 놓친다. 또 천적이 왼쪽에 나타나면 얼른 피할 수 있지만 오른쪽에 나타나면 잘 분간을 못하고 잡아먹히기 쉽다. 자, 그렇다면 통합이 덜 된 뇌는 덜 떨어진 것인가, 그게 아니라면 통합이 되지 않는 경우는 두 정신을 갖는다고 보아야 할까.

 

이런 예들을 통해 피터 고프리스미스는 우리가 갖고 있는 자아의 통일성에 대한 이미지는 생명의 진화과정에서의 하나의 선택이고 성취이며 발명품일 가능성이 높다고 말한다. 인간의 경우가 생명을 보는 유일한 척도일 수 없다는 이야기다. 물론 살아있는 생명체라면 어느 정도의 통일성은 불가피하다. 그러나 인간의 뇌처럼 강하게 통합되지 않은 뇌 역시 자연의 성취이며 발명품이라는 것을 누가 부인할 수 있겠는가. 그러므로 인간이 경험하는 주관적 경험만이 유일한 주관적 경험이라고 말할 수 없다.

 

문어의 주관적 경험 역시 마찬가지이다. 앞서 말한 주관적 경험의 정의는 자신을 자신인 것처럼 느끼는 것이다. 문어가 자신과 다른 것들을 구별한다는 것은 이미 다양한 관찰과 실험을 통해 확인되었다. 그런데 문어가 자신을 문어인 것처럼 느끼는 주관적 경험은 어떤 양상을 띄는 것일까? 문어의 다리가 중앙뇌의 통제를 받지 않고 상대적으로 자율적으로 행동할 때 문어의 주관적 경험은 우리 인간과는 다를 수밖에 없다. 그런데 문어의 다리는 자율적으로 행동하고 판단하기도 하지만, 또 머리와 다리가 완전히 하나의 몸인 것처럼 행동할 때도 있다. 이런 관찰의 결과 피터 고프리스미스는 아마도 문어는 덜 통합된 상태와 더 통합된 상태 사이를 자유자재로 오가는 지도 모른다는 가설을 제시한다. 아무튼 문어는 뇌중심 패러다임으로는 설명할 수 없다.

 

다른 한편 문어는 신체 중심의 체화된 인지이론의 관점으로도 설명하기 힘들다. 체화된 인지이론은 인지능력이 뇌에만 있는 것이 아니라 신체에 체화되어 있어서 마치 즉흥 재즈 연주에서 각 연주자가 호흡을 맞추며 연주를 구성해 나가듯이 우리의 인지가 구성된다고 말한다. 문어는 체화된 인지이론이 뇌중심 인지이론을 비판할 때 자주 예시로 등장하는 동물이기도 하다. 그러나 인간의 신체의 각 부위가 특정한 기능과 역할과 한계를 갖고 있는 것과 달리 문어의 신체는 변화무쌍하고 가능성으로 가득하기 때문에 문어에게 체화된 인지가 있다면, 문어는 우리 인간과는 전혀 다른 ‘체화’를 가지고 있다고 보아야 한다. 그런 점에서 중앙통제형 뇌중심 인지이론을 비판하는 체화된 인지이론조차도 인간중심의 패러다임에 갇힌 것인지도 모른다. 문어는 우리가 생각하는 통상적인 신체와 뇌의 구분 너머에 사는, 인간과 달라도 너무 다른 생명체다.

 

 

고통의 문제

피터 고프리스미스는 의식만이 주관적 경험의 전부는 아니라는 것을 고통을 예로 들어서 설명한다. 오랫동안 동물의 고통 문제는 의식과 주관적 경험에서 중요한 이슈였다. 데카르트적 심신 이원론의 입장에서는 영혼이 없는 존재는 고통을 느끼지 못하는 것으로 간주된다. 심신 이원론은 마치 고통을 겪는 것처럼 보이는 동물의 행동이라 할지라도 그것은 진정한 고통이 아니라 기계적인 반사행동에 지나지 않는다고 판단했다. 그래서 동물실험도, 공장식 축산도 고통을 느끼지 못하는 동물에게는 아무런 문제가 없는 것이라고 정당화할 수 있었다.

 

그런데 ‘동물해방’이라는 개념을 만들어 낸 피터싱어 같은 철학자는 동물이 고통을 감각한다는 사실에 주목한다. 동물이 고통을 느낀다면 그것은 의식이 있다는 증거이므로 인간은 같은 의식적 존재로서 윤리적 책무를 가지는 것이 마땅하다는 것이다. 과학적인 이유든 윤리적인 이유든 과학자들은 동물이 고통을 느끼는지 아닌지 알기 위해 여러 실험을 했다. 동물의 몸에 상처를 내고 그들이 상처를 보듬는지 아닌지, 어류가 진통제가 포함되어 있는 물을 선호하는지 아닌지, 혹은 고통완화 효과가 있는 음식을 먹는지 아닌지 등등. 소라게를 대상으로 한 전기충격실험도 있다. 그 실험에서 소라게는 똑같이 전기충격을 받았더라도 그들의 상황과 맥락에 따라 소라껍질을 벗고 도망가기도 하고 가지 않기도 했다. 아주 안전하고 튼튼한 소라껍질을 가진 경우에도, 주변에 포식자가 있는 경우에도 소라게가 망설이고 주저하는 것이 감지되었다. 소라게가 감각적 고통을 느끼는 것처럼 보이는 상황에서도 그들이 어떤 행동을 선택하는가는 소라게 차원에서도 복잡한 판단의 문제가 개입된다는 것을 알 수 있다.

 

곤충은 어떨까? 일반적으로 곤충은 몸의 일부가 손상되어도 개의치 않고 하던 일을 계속한다. 그러나 그들이 고통을 느끼지 않는다고 해서 그들의 상태가 그전과 똑같은 것은 아니다. 벌실험을 통해 몸이 손상된 벌들이 하던 일에 의욕을 보이지 않는 것과 같은 부정적 감정을 느낀다는 것이 확인되었다. 유사감정 상태는 곤충만이 아니라 달팽이와 같은 복족류에서도 확인된다. 이 실험들의 윤리성 문제는 미뤄두고 생각하더라도 고통의 문제 역시 인간 중심적 관점에서만 볼 수 없다는 것이 분명하다. 인간은 감각과 판단 양측면에서 고통을 느낀다. 그러나 인간이 경험하는 고통의 방식이 동물의 고통에 대한 주관적 경험을 결정하는 척도가 될 수는 없다. 인간이 아닌 다른 동물에 대해서 물리-생물학적 생명 시스템은 온전히 작동하는 데도 불구하고 오직 주관적 경험 혹은 의식의 영역만이 텅 비어 있는 생화학적 기계라고 판단하는 관점이 과연 타당할 수 있을까.

 

문어가 고통에 어떻게 반응하는지 알기는 쉽지 않다. 피터 고프리스미스의 관찰에 따르면 문어는 부상을 입었을 때 다친 부위를 돌보거나 보듬기도 하고, 때로는 포식자로부터 달아나기 위해 다리를 잘라내기도 한다. 다른 물고기가 몸의 일부를 깨물었을 때 사람처럼 깜짝 놀라 튀어 오르기도 하지만, 싸움에 열중하고 있을 때는 거의 의식하지 않는 것처럼 보이기도 한다. 유럽의 동물보호법은 연체동물은 그 적용대상이 아니었다. 그러나 문어에 대해 더 많은 것을 알게 됨에 따라 문어는 ‘명예 척추동물’로 대우받으며 보호의 대상이 되기 시작했다. 유럽의 경우 동물보호법의 대상이 척추동물 중심이기는 하지만, 문어를 포함한 동물의 주관적 경험과 고통 문제는 인간과 동물의 관계에서 그 어느 때보다도 중요한 문제로 떠오르고 있다.

 

 

바다는 우리의 과거이고 미래

바다에서 단세포 생명체가 탄생한 이후 생명은 수십억년의 진화의 과정을 거쳐왔다. 그 진화의 결과로 우리의 존재가 있게 되었다. 그런데 그것은 단지 인간에게만 해당되는 서사가 아니다. 지금 우리와 함께 살고 있는 생명들은 모두 생명의 나무에서 우리와 동등한 위치에 있는 존재들이다. 그들과 우리는 우주와 지구의 진화사라는 공통 서사와 함께 각자의 서사를 갖는다. 문어를 만난 이후 바닷속을 탐험하며 수많은 생명들의 마음과 의식의 진화를 탐구하는 철학자 피터 고프리스미스가 알려준 문어의 삶도 다르지 않다. 나의 신경계가 진화의 결과인 것처럼 문어의 신경계 역시 그러하다. 두족류의 뇌는 포유류의 뇌가 자연의 유일무이한 표준모델이 아니라는 것을 알려준다. 더 나아간다면 마음도, 정신도, 의식도 그러하지 않을까. 곰팡이와 버섯과 같은 균류 그리고 지의류가 그랬듯이 그동안 알지 못했던 다른 존재와의 만남은 인간중심적 세계관에 균열을 일으킨다.

 

특히 문어와의 만남은 생명의 기원이자 마음과 의식이 생겨난 모태인 바다를 더 생생하게 느끼게 한다. 우리에게 바다란 무엇일까. 바다는 문어의 터전이다. 바다는 인간을 위한 먹을거리를 내어놓는 공장이거나 우리의 눈을 즐겁게 하고 마음을 위로하는 멋진 풍경 이상이다. 우리 몸 속에도 바다가 있다. 육상생물들이 살아남을 수 있었던 것이 그들이 바다를 떠나면서 세포 속에 바닷물을 간직하고 나왔기 때문이다. 바다는 생명의 기원이고 자궁이다. 바다가 없다면 우리도 없다. 물론 지금 바다에서 살고 있는 생명체들은 더 말할 나위가 있겠는가. 바다는 우리의 과거이고 현재고 미래이다. 후쿠시마 오염수 방류를 목전에 둔 지금, 우리는 바다란 우리에게 무엇인가, 라는 질문에 대해 답해야 한다. 문어와의 만남을 통해 생명에 대해, 의식에 대해, 바다에 대해, 새로운 질문이 떠오르고 있다.

 

 

 

댓글 3
  • 2023-06-18 13:59

    그래도 문어는 맛있어요......<- 퍽
    오염수를 버리라고 '주면 마시겠다'는 한국 총리는 ?
    문어보다 못한 생물!!!!!

    '바다는 생명의 기원이고 자궁이다. 바다가 없다면 우리도 없다'.

    몇가지 방사능 기준치인 알량한 IAEA기준으로 괜찮다고 하는 인간들은
    가장 열등한 생물일지도.

  • 2023-06-29 21:31

    뇌, 신경계, 의식의 진화론적 계보는 문어를, 인간 신체의 해부학적 구조는 물고기의 계통 발생학을 (내 안의 물고기, 닐 슈빈, 김영사) 참고해 공부하면 좋겠어요. 그러고보니 어느쪽이든 뒤돌아 볼수록 바다를 향해 가고 있군요. 버섯(진균류)까진 아직 멀었네요. 더 한참 가야 만나겠죠? 3억년 정도? ^^

    • 2023-06-30 11:48

      세션샘! 같이 자연공부할래요? 닐 슈빈책도 반쯤 읽다가 멈춘 상태.^^ <자연은 어떻게 발명하는가>도 사놓고 못읽고 있네요.ㅎ
      바다도 무궁무진한데.. 올해는 두루두루 살펴보는 게 더 재미있어서 다음 1234는 하늘로 가려고요. 땅속에서 바다로, 바다에서 하늘로 유랑하는 독서를 합니다. 하하하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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초기 불교의 흑역사, 여성 차별적인 팔경법     깔라마들이여, 소문이나 전승이나 여론에 끄달리지 말고, 성전의 권위나 논리나 추론에도 끄달리지 말고, 상태에 대한 분석이나 견해에 대한 이해에도 끄달리지 말고 그럴듯한 개인적인 인상이나 ‘이 수행자가 나의 스승이다’라는 생각에도 끄달리지 마십시오. … 이러한 것들은 실천하여 받아들이면 유익하지 못하고 괴로움을 야기하는 것이라고 스스로 알게 되면 깔라마인들이여, 그 때에 그것들을 버리십시오. (『앙굿따라니까야』 「깔라마의 경」)   붓다가 가르침을 펴기 시작한 초기에 붓다를 따르는 출가수행자들은 모두 남자들 뿐이었다. 여성은 다만 재가 신자로만 붓다와 관계를 맺었다. 아마 당시로서는 마을에서 떨어진 한적한 숲에서 명상하고, 집도 절도 없이 걸식하는 길 위의 삶을 사는 여성의 존재는 생각할 수도 없었기 때문일 것이다. 고대 인도 사회에서 가족의 보호 밖에 있는 여성은 손쉽게 취할 수 있는 성적인 대상이자 남성을 유혹하는 위험한 존재로 인식되었다. 그러므로 여성이 집을 떠나 출가자가 된다는 것은 위험을 무릅쓰는 일이었다. 그러나 붓다의 설법을 듣고 구도의 삶을 살겠다고 결심을 한 남자들이 나온 것처럼 출가하여 수행자로 살겠다는 용감한 여자들이 나오는 것도 시간문제일 뿐이었다. 게다가 붓다가 이끄는 비구 승가는 세속에서의 신분과 나이에 의한 차별을 뛰어넘어 오직 출가한 햇수에 따라 예를 표하는 평등한 공동체의 이상을 보여주고 있었다. 대안적 공동체로서의 승가의 현존은 여성들에게도 ‘바람에 걸리지 않는 그물처럼, 진흙에 더러워지지 않는 연꽃처럼’ 살 수 있다는 희망을 갖게 했을 터. 과연 누가 출가한 여성 수행자로 첫발을 뗄 것인가,...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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2023.07.20 | 조회 480
논어 카메오 열전
진성자(제나라 대부 진항)가 간공을 시해했다. 공자께서 목욕재계하고 조정에 나가 애공에게 알렸다. “진항이 그의 임금을 시해하였으니 그를 토벌하십시오.” 애공이 말했다. “세 대부들에게 말하시오.” 공자께서 말씀하셨다. “내가 대부의 자리에 있었기 때문에 감히 고하지 않을 수 없었는데 임금께서는 세 대부들에게 말하라 하시는구나.” 공자께서 세 대부들에게 가서 말했으나 모두 안 된다고 하자, 공자께서 말씀하셨다. “내가 대부의 자리에 있었기 때문에 감히 고하지 않을 수 없었다.” (陳成子弑簡公 孔子沐浴而朝 告於哀公曰 陳恆弑其君 請討之 公曰 告夫三子 孔子曰 以吾從大夫之後 不敢不告也 君曰 告夫三子者 之三子告 不可 孔子曰 以吾從大夫之後 不敢不告也) <논어> 헌문-22   내가 동양 고전을 처음 읽었을 때 겪은 어려움 중 하나는 한 사람이 여러 이름으로 등장하는 것이다. 진성자(陳成子)도 그런 사람 중에 하나였는데, 여기는 진성자라고 되어 있지만 대체로 전성자(田成子)라고 하고, 진항(陳恒), 전항(田恒), 혹 전상(田常)이라고도 한다. 여기서 성자(成子)는 그의 시호이며, 이름이 항(恒)인데 『사기』에는 상(常)으로도 되어 있다. 진성자 혹은 전성자라고 하는 것은 원래 이들이 진(陳)나라에서 살다가 제(齊)나라로 이주하여 성을 전(田)으로 바꾸었기 때문이다.   강(姜)씨의 제나라에서 전(田)씨의 제나라로   사마천의 『사기(史記)』 중 「세가(世家)」는 춘추전국시대 제후국들의 역사를 쓰고 있다. 그러니까 노나라의 역사는 「노세가」에 진나라는 「진세가」를 살펴보면 된다. 그런데 제나라의 경우 「제세가」로 되어 있지 않고 「제태공세가」와 「전경중완세가」로 나누어져 있다. 제나라 군주의 자리가 강태공의 강씨에서 바로 진성자, 아니 전성자의 전씨로 바뀌는 일이 있었기 때문이다. 진(陳)나라에서 처음 제나라로 이주한 이는 진완(陳完)이다. 완은 원래 진나라의 공족(公族)이었다. 진나라는 순임금의 후예들에게 봉해...
진성자(제나라 대부 진항)가 간공을 시해했다. 공자께서 목욕재계하고 조정에 나가 애공에게 알렸다. “진항이 그의 임금을 시해하였으니 그를 토벌하십시오.” 애공이 말했다. “세 대부들에게 말하시오.” 공자께서 말씀하셨다. “내가 대부의 자리에 있었기 때문에 감히 고하지 않을 수 없었는데 임금께서는 세 대부들에게 말하라 하시는구나.” 공자께서 세 대부들에게 가서 말했으나 모두 안 된다고 하자, 공자께서 말씀하셨다. “내가 대부의 자리에 있었기 때문에 감히 고하지 않을 수 없었다.” (陳成子弑簡公 孔子沐浴而朝 告於哀公曰 陳恆弑其君 請討之 公曰 告夫三子 孔子曰 以吾從大夫之後 不敢不告也 君曰 告夫三子者 之三子告 不可 孔子曰 以吾從大夫之後 不敢不告也) <논어> 헌문-22   내가 동양 고전을 처음 읽었을 때 겪은 어려움 중 하나는 한 사람이 여러 이름으로 등장하는 것이다. 진성자(陳成子)도 그런 사람 중에 하나였는데, 여기는 진성자라고 되어 있지만 대체로 전성자(田成子)라고 하고, 진항(陳恒), 전항(田恒), 혹 전상(田常)이라고도 한다. 여기서 성자(成子)는 그의 시호이며, 이름이 항(恒)인데 『사기』에는 상(常)으로도 되어 있다. 진성자 혹은 전성자라고 하는 것은 원래 이들이 진(陳)나라에서 살다가 제(齊)나라로 이주하여 성을 전(田)으로 바꾸었기 때문이다.   강(姜)씨의 제나라에서 전(田)씨의 제나라로   사마천의 『사기(史記)』 중 「세가(世家)」는 춘추전국시대 제후국들의 역사를 쓰고 있다. 그러니까 노나라의 역사는 「노세가」에 진나라는 「진세가」를 살펴보면 된다. 그런데 제나라의 경우 「제세가」로 되어 있지 않고 「제태공세가」와 「전경중완세가」로 나누어져 있다. 제나라 군주의 자리가 강태공의 강씨에서 바로 진성자, 아니 전성자의 전씨로 바뀌는 일이 있었기 때문이다. 진(陳)나라에서 처음 제나라로 이주한 이는 진완(陳完)이다. 완은 원래 진나라의 공족(公族)이었다. 진나라는 순임금의 후예들에게 봉해...
진달래
2023.07.11 | 조회 310
한문이예술
昔, 어떤 과거는 오래된 극복이다   동은     1. 하고 싶은 말      언젠가 한 친구가 나에게 물었다. "선생님은 왜 선생님을 하기로 했어요?" 짧은 순간이었지만 여러 생각이 스쳤다. '내가 선생이었나?'부터 '내가 선생이어도 될까?', 그리고 '내가 어쩌다 선생이 되었지?'라는 물음으로 이어졌다. 나는 질문한 친구에게 되물었다. "왜 그런 질문을 했을까?" 친구는 "그냥 궁금해서요."라고 했지만 곧이 곧대로 듣기에는 조금 찔리는 부분들이 있었다. 내가 선생이라기엔 하고 다니는 행색이 너무 선생답지 않았나? 수업이 별로인가? 아니면 (그럴 것 같진 않지만) 혹시라도 너무 '선생'같은가^^?? 스스로 선생이라기보다는 학생이라고 생각해온 시간이 훨씬 길어서 그런지 친구의 질문에 쉽게 대답할수 없었다. 하지만 내가 <한문이 예술>에서 아이들 앞에 서있는 이유는 생각보다 선명했다.      그 친구의 질문에 대한 나의 대답은 이랬다. "너희들한테 한자로 해주고 싶은 이야기가 있어서인 것 같아." 짐짓 태연한 목소리로 말했지만 사실 말을 시작하는 순간부터 나는 묘한 감정에 휩싸였다. 뭐라고 설명해야할까? 몰랐던 것을 '나 정말 그랬구나!'하고 이제서야 깨닫는 느낌이었다. 실제로 수업준비의 대부분은 아이들에게 어떻게 한자의 이야기를 전할지 고민하는 시간이었다. 어떻게 전달할지에 대한 방식보다도 어떤 내용을 전달할지에 대한 내용이 훨씬 많았다. 그랬으면서 왜 하고 싶은 말이 있었다는 것을 잊고 있었던 건지...!     2. 昔      한자로 상상조차 힘든 과거를 이야기하는 것은 어쩌면 무의미한 일일지도 모른다. 과거로 회귀하라는 것도 아니고, 그럴 수도 없는데 완전히 달라진 오늘날에 고대의 일에...
昔, 어떤 과거는 오래된 극복이다   동은     1. 하고 싶은 말      언젠가 한 친구가 나에게 물었다. "선생님은 왜 선생님을 하기로 했어요?" 짧은 순간이었지만 여러 생각이 스쳤다. '내가 선생이었나?'부터 '내가 선생이어도 될까?', 그리고 '내가 어쩌다 선생이 되었지?'라는 물음으로 이어졌다. 나는 질문한 친구에게 되물었다. "왜 그런 질문을 했을까?" 친구는 "그냥 궁금해서요."라고 했지만 곧이 곧대로 듣기에는 조금 찔리는 부분들이 있었다. 내가 선생이라기엔 하고 다니는 행색이 너무 선생답지 않았나? 수업이 별로인가? 아니면 (그럴 것 같진 않지만) 혹시라도 너무 '선생'같은가^^?? 스스로 선생이라기보다는 학생이라고 생각해온 시간이 훨씬 길어서 그런지 친구의 질문에 쉽게 대답할수 없었다. 하지만 내가 <한문이 예술>에서 아이들 앞에 서있는 이유는 생각보다 선명했다.      그 친구의 질문에 대한 나의 대답은 이랬다. "너희들한테 한자로 해주고 싶은 이야기가 있어서인 것 같아." 짐짓 태연한 목소리로 말했지만 사실 말을 시작하는 순간부터 나는 묘한 감정에 휩싸였다. 뭐라고 설명해야할까? 몰랐던 것을 '나 정말 그랬구나!'하고 이제서야 깨닫는 느낌이었다. 실제로 수업준비의 대부분은 아이들에게 어떻게 한자의 이야기를 전할지 고민하는 시간이었다. 어떻게 전달할지에 대한 방식보다도 어떤 내용을 전달할지에 대한 내용이 훨씬 많았다. 그랬으면서 왜 하고 싶은 말이 있었다는 것을 잊고 있었던 건지...!     2. 昔      한자로 상상조차 힘든 과거를 이야기하는 것은 어쩌면 무의미한 일일지도 모른다. 과거로 회귀하라는 것도 아니고, 그럴 수도 없는데 완전히 달라진 오늘날에 고대의 일에...
동은
2023.07.04 | 조회 357
봄날의 주역이야기
  쌀벌레가 나타나야 쌀이 상한 것을 안다 십년이 넘도록 함께 웃고 지내던 동아리에 일이 생겼다. 표면적으로는 멤버 중 몇몇의 술이 과해서 벌인 쌈박질이지만, 그것은 오랫동안 동아리 내에서 묵혀두었던 ‘과거사’ 때문에 벌어진 일이었다. 육십갑자가 넘은 사람들이 해도 되는 말과, 절대로 하면 안되는 말을 마구 내뱉었다. 욕설을 몇 번 주고받던 사람들이 급기야 의자를 집어던지고 주먹다짐을 하고 말았다. 장수하는 동아리로, ‘성격 좋은 사람들’이 모인 동아리로 주변의 부러움을 샀었는데, 비록 술기운을 빌렸다고 하지만, 누군가의 가슴 속에 상처가 되는 말들이 거침없이 쏟아져 나왔다. 십년의 우정은 어디로 가고, 곪을대로 곪아버린 관계만이 드러났다. 그것은 주역의 18번째 괘인 산풍고(山風蠱)괘가 형상화한 ‘벌레먹은 그릇’, 바로 그것이었다.   괘명인 고(蠱)라는 한자는 그릇(皿) 속에 많은 벌레가 있는 모양을 하고 있다. 벌레의 종류를 정확하게 규정하지 않고 있지만, 이때의 벌레는 쌀에서 생겨나는 바구미 같은 류를 생각하는 것이 적당할 듯하다. 좀 오래된 쌀독을 열었을 때 갑자기 튀어나오는 바구미처럼, 우리는 벌레를 발견하기 전까지는 쌀이 상했을 것이라고 전혀 생각하지 않는다. 바구미가 튀어나온 순간, 일은 완전히 다른 국면으로 넘어가고, 시선은 쌀에서 벌레로 옮겨간다.     산 아래 머무는 바람이 하는 일 이렇게 나도 알지 못하는 사이에 어떤 일이 벌어진 데에는 나름대로 원인이 있을텐데, 64괘가 배열된 차례를 보면 고개가 끄덕여지는 측면이 있다. 산풍고괘는 18번째 괘인데, 16번째 괘는 ‘기쁨’을 나타내는 뇌지예(雷地豫)괘이고, 17번째는 ‘남을 따른다’는 뜻을 가진 택뢰수(澤雷隨)괘이다. 그러니까, 기뻐하고 따르는...
  쌀벌레가 나타나야 쌀이 상한 것을 안다 십년이 넘도록 함께 웃고 지내던 동아리에 일이 생겼다. 표면적으로는 멤버 중 몇몇의 술이 과해서 벌인 쌈박질이지만, 그것은 오랫동안 동아리 내에서 묵혀두었던 ‘과거사’ 때문에 벌어진 일이었다. 육십갑자가 넘은 사람들이 해도 되는 말과, 절대로 하면 안되는 말을 마구 내뱉었다. 욕설을 몇 번 주고받던 사람들이 급기야 의자를 집어던지고 주먹다짐을 하고 말았다. 장수하는 동아리로, ‘성격 좋은 사람들’이 모인 동아리로 주변의 부러움을 샀었는데, 비록 술기운을 빌렸다고 하지만, 누군가의 가슴 속에 상처가 되는 말들이 거침없이 쏟아져 나왔다. 십년의 우정은 어디로 가고, 곪을대로 곪아버린 관계만이 드러났다. 그것은 주역의 18번째 괘인 산풍고(山風蠱)괘가 형상화한 ‘벌레먹은 그릇’, 바로 그것이었다.   괘명인 고(蠱)라는 한자는 그릇(皿) 속에 많은 벌레가 있는 모양을 하고 있다. 벌레의 종류를 정확하게 규정하지 않고 있지만, 이때의 벌레는 쌀에서 생겨나는 바구미 같은 류를 생각하는 것이 적당할 듯하다. 좀 오래된 쌀독을 열었을 때 갑자기 튀어나오는 바구미처럼, 우리는 벌레를 발견하기 전까지는 쌀이 상했을 것이라고 전혀 생각하지 않는다. 바구미가 튀어나온 순간, 일은 완전히 다른 국면으로 넘어가고, 시선은 쌀에서 벌레로 옮겨간다.     산 아래 머무는 바람이 하는 일 이렇게 나도 알지 못하는 사이에 어떤 일이 벌어진 데에는 나름대로 원인이 있을텐데, 64괘가 배열된 차례를 보면 고개가 끄덕여지는 측면이 있다. 산풍고괘는 18번째 괘인데, 16번째 괘는 ‘기쁨’을 나타내는 뇌지예(雷地豫)괘이고, 17번째는 ‘남을 따른다’는 뜻을 가진 택뢰수(澤雷隨)괘이다. 그러니까, 기뻐하고 따르는...
봄날
2023.07.04 | 조회 292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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