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읽고쓰기1234] 완전히 자동화된 화려한 공산주의

정군
2023-05-30 01:13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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완전히 자동화된 화려한 공산주의
(Fully Automated Luxury Communism)

- 정군

노동이 사라진다, 그리고 소비자도
오늘날의 자본주의는 지속적으로 파열음을 내고 있다. 가장 가까운 예는 코로나 펜데믹 이후 갑작스러운 고금리, 통화량 긴축을 견디지 못한 은행들의 연쇄 파산일 것이다. 그 뿐인가? 이른바 ‘영끌족’들은 매수한 자산 가격 하락으로 영혼을 지불 중이다. 생물학적 전염병의 유행이 일시적으로 멈춤과 동시에 사회적 전염병으로서 빈곤은 쉼 없이 감염자 수를 늘려나가는 중이다. 이렇게 세계가 얼어붙을수록 이른바 선진국의 출산율은 지속적으로 떨어진다. 이 와중에 지구를 덮친 때 이른 더위와 태풍은 이 세계의 끝이 결코 멀지 않았음을 예감케 한다. 그렇다고 해서 상황이 갑자기 나빠진 것은 아니다. 이 세계는 마치 사람들의 ‘돈 걱정’을 연료 삼아 작동하는 기관인 듯하다. 자본주의 체제 아래에서 돈 때문에 힘들지 않은 사람은 거의 없다. 그러니까 이 체제의 ‘위기’는 워낙 만성적이어서 오늘날 닥쳐온 것과 같은, 세상이 끝장나버릴 것 같은 위기가 와도 걱정은 되지만 생생하게 위기감을 느낄 정도는 아닌 것 같다. 그러나 체감이 그런 것과 실제 상황은 조금 다르다. 이 위기는 이전에 자본주의가 겪었던 몇몇 위기들과는 질적으로 다르다. 이를테면, 선진국 제조업의 이윤율 저하로 케인즈주의가 박살났을 때, 자본은 선진국의 산업을 기술, 금융, 서비스 중심으로 재편하고 임금이 싼 개발도상국으로 생산기지를 옮기는 공간적 대응으로 위기를 돌파했다1). 기술, 금융, 서비스와 아무 상관없는 삶을 살았던 나의 부모님을 생각해 보면 90년대, 2000년대 내내 우리 집이 왜 그렇게나 힘들었던 것인지 이해가 가기도 한다. 요컨대 해당 시기 선진국 경제의 막차를 탄 한국은 비싼 노동과 값싼 노동의 분화, 자본 소득과 임금 소득의 양극화가 막 시작되었던 것이다. 바스타니는 이제 그와 같은 공간적 대응으로는 자본주의의 파열을 회복할 수 없는 한계 상황이 다가오고 있다고 분석한다. 먼저 질적으로 다른 이 위기는 다음의 다섯 가지로 요약된다.

 

 

“첫째, 기후 변화와 지구온난화의 결과다. 둘째, 자원 부족이다. 특히 에너지와 광물, 신선한 물 부족이 큰 문제다. 셋째, 사회의 고령화다. 수명이 느는 데 출생률은 떨어진다. 넷째, 세계적으로 넘쳐나고 갈수록 늘어나는 빈곤층이다. 이들은 어느 때보다 많은 ‘잉여 계층unnecessariat’을 형성한다. 다섯째, 새로운 기계의 시대가 오고 있다는 사실이다. 이것이야말로 가장 중요한 위기일지 모른다. 새로운 기계의 시대는 역사상 가장 규모가 큰 기술적 실업의 시대를 예고한다.”2)

 

어느 것 하나 해결 할 수 있을 것 같은 문제가 없다는 게 이 위기들의 공통점이다. 물론 이 위기들을 크게 두 범주로 나눠 볼 수는 있다. 앞의 세 가지, 기후, 자원, 생명의 위기는 말하자면 ‘조건의 위기’다. 그에 비해 뒤의 두 가지, 잉여 계층의 증가와 ‘기계 시대의 도래’는 서로 맞물려 있는데, 요컨대 이것은 ‘노동의 위기’라고 부를 수 있다. 바스타니는 그 중에서도 특히 다섯 번째 문제를 핵심이라고 본다. 이는 물론 관점에 따라 달라질 수 있지만, ‘자본주의’의 입장에서 볼 때는 다섯 번째 ‘기계 시대의 도래’가 핵심적인 문제인 것은 맞다. 왜냐하면, ‘대규모 기술적 실업’이 의미하는 바는 ‘자본 증식의 한계’를 의미하기 때문이다.

 

“자본주의는 제대로 작동할 경우 종업원이 자신의 노동으로 만든 상품과 서비스를 구매할 수 있는 길을 터줬다. 이는 자본주의가 생산성 향상을 기반으로 한 계급 간 타협과 부자를 위한 이윤, 다른 모든 사람의 생활수준을 점진적으로 향상하기 위한 토대임을 입증했다.”3)

 

‘기계 시대의 도래’는 바로 이 모델을 결정적으로 파괴한다. 어떻게? ‘기술적 대량 실업’으로 말이다. 그런데, ‘자본주의’는 아니, 자본의 대리인들은 이와 같은 기술 발달이 자신들을 파괴한다는 것을 모르는 걸까? 어떻게 그럴 수가 있는가? 그것은 무엇보다 기술적 혁신이 자본의 운동법칙과 구조적으로 긴밀하게 결합되어 있기 때문이다. 단적으로 자본주의는 증기기관과 함께 시작했고, 석유에너지와 함께 세계를 재패했으며, 반도체와 함께 절정에 이른 것이다. 이 모든 기술 발달을 추동한 것은 단 한 가지 원리다. 너무나도 익숙한 그 명제, 바로 ‘경쟁력의 확보’다. 오늘날에도 상황은 똑같다. 테슬라와 같은 자동차 회사부터 아디다스 같은 소비재 기업까지 모든 제조업의 핵심과제는 ‘노동자 없는 공장’의 가동에 있다. 임금을 주지 않으면 비용을 극적으로 낮출 수 있고, 그렇게 되면 시장에서 가격을 유동적으로 조절할 수 있는 여유가 생긴다. 그렇게 경쟁자를 따돌릴 수 있다. 경쟁자를 따돌리는 자에게 시장은 최대 이윤을 약속한다. ‘노동자 없는 공장’의 화룡점정은 ‘인공지능’이 될 것이다. 스스로 생산량을 조절하고, 공정의 속도를 제어하며, 전체 생산 공정을 일관되게 통제하는 ‘인공지능 공장’은 자본가의 꿈이다. 자, 여기에 문제가 있다. 생산자이면서 동시에 거대한 소비자 대중을 이루는 임금 노동자가 사라지면 누가 모델3를, 아이폰을, 슈퍼스타4)를 구입할 것인가?


1)“‘공간적 해결’은 세계적 분배와 생산의 재배치가 특징인 현대의 세계화를 뒷받침한다”, 『완전히 자동화된 화려한 공산주의』, 아론 바스타니, 김민수·윤종은 옮김, 57-58쪽, 황소걸음.

2) 같은 책, 39-40쪽.

3) 같은 책, 104쪽.

4) 아디다스가 1969년 출시한 농구화. 80년대 힙합 뮤지션들이 신으면서 하나의 문화 아이콘이 되어 현재까지 생산되고 있다. 재미있는 것은 아디다스가 독일에 설립한 전자동 운동화 생산공장 ‘스피드 팩토리’의 자동화 공정으로는 ‘슈퍼스타’ 같은 천연가죽과 고무 아웃솔로 이루어진 고전적인 운동화를 생산할 수 없었다고 한다. 2019년 스피드 팩토리의 폐쇄는 아디다스 매출의 상당 부분을 차지하는 이러한 고전적 운동화의 생산 차질과 관련이 있다.

 

청정하게, 무한하게, 화려하게
이른바 ‘가속주의자들'5)이라고 불리는 사람들의 논지는 생각보다 간단하다. 자본주의가 기술적 해결책을 찾는 것을 반대해서는 안 되고 오히려 기술 발달을 가속화해야 한다는 것이다. 그들은, 거기서 더 나아가 이 과정에서 과잉 공급되는 일련의 기초 자원들의 평등한 분배를 요구해야 한다고 주장한다. 바스타니가 『완전히 자동화된 화려한 공산주의』에서 말하는 바도 그와 같다. 앞서 열거한 다섯 가지 위기, ① 기후 위기, ② 자원 위기, ③ 인구 위기, ④ 빈곤 위기, ⑤ 노동 위기는 각각 그에 상응하는 기술적 해결책이 있다는 것이다. 그것의 내용은 다음과 같다.

 

① 노동의 무한 공급
고전 경제학에서 ‘노동’은 무한히 공급될 수 있는 것이 아니었다. 노동자가 노동 시장에서 자신의 노동에 값을 매길 수 있었던 것도 그 때문이다. 노동의 가격이 한없이 낮을 수는 있어도 그것인 유한한 것인 한, 따라서 개념적으로 희소한 것인 한 노동은 임금-노동이어야만 한 것이었다. 그런데, 이 조건이 변화하고 있다. 일례로 강남에서 운영 중인 한 식당에서는 사장 1인과 조리용 로봇 1대로 구성된 우동가게가 성업 중이다. 소매업뿐이 아니다. 대공장에서는 이미 이와 같은 자동화가 상당히 진척된 사례가 흔히 발견된다. 애플의 생산공장인 폭스콘의 공장도 노동자를 공장에서 제거하고 있고, 테슬라 역시 마찬가지다. 아디다스의 독일 공장에서도 로봇들이 최상급 선수용 러닝화를 제작하고 있다. 요컨대 생산과정에서 인간 노동이 차지하고 있던 불가결한 지위가 점차 사라지고 있는 셈이다. ‘일자리’가 줄어드는 것은 당연하다. 이것은 ‘한계 비용 0’를 꿈꾸는 자본의 꿈이 실현 직전에 와있다는 의미다.

 

② 에너지의 무한 공급
현재 인류가 봉착한 최대 문제는 탄소 에너지로 인해 야기된 ‘기후 위기’다. 당장은 탄소 기반 에너지를 쓸 수밖에 없지만, 그렇게 할 수 있는 시간이 얼마 남지 않았다는 것은 모두 알고 있다. 그런 이유에서 대체 에너지를 개발하려는 흐름도 뚜렷하게 관찰된다. 사실 ‘에너지’ 자체는 문제가 되지 않는다. 태양에서부터 지구로 공급되는 태양에너지를 손실 없이 90분 동안만 저장할 수 있다면 인류는 100년 동안 에너지 걱정 없이 살 수 있을 테니 말이다. 그런 이유에서 현재 핵심적인 노력이 투여되고 있는 분야는 에너지 채집 저장 기술이다. 이 기술은 현재로서는 탄소기반 에너지에 비해 경제성이 떨어지지만, 멀지 않은 미래에 이 관계는 역전될 것으로 보인다. 지난 40년 간 꾸준히 하락한 태양 전지 패널의 가격이 이를 방증한다. 요컨대 어느 시점에선가 자본은 ‘비싼’ 탄소 에너지 대신 ‘싼’ 재생 에너지를 선호하게 될 것이다. 매우 낮은 에너지 가격, 결코 고갈되지 않는 에너지원이 의미하는 것은 에너지 희소성의 종말이다.

 

③ 자원의 무한 공급
일론 머스크, 제프 베조스의 공통점은 부자라는 점만이 아니다. 이 둘은 모두 우주 기업을 가지고 있다6). 이 둘이 목표로 하는 것은 우주로 나가는 비용을 획기적으로 낮추는데 있고 이미 이전과 비교해 보면 10% 수준까지 떨어진 상태다. 이들은 왜 우주로 나가려고 할까? ‘꿈’ 때문에? 그럴리가! 지구 근처의 소행성, 근지구소행성의 수가 1만 6천개쯤 된다고 한다. 이 소행성들의 크기는 제각각이다. 어쨌든, 소행성들 전체는 아니겠지만, 현재까지 발견된 소행성들 중 몇몇에서 지구에 매장된 모든 광물의 총량을 아득히 뛰어넘을 정도의 광물 자원이 있다고 한다. 이러한 우주자원 채굴 기술을 누가 먼저 확보하느냐에 따라 자본들 간의 희비가 엇갈릴 가능성이 매우 높지 않겠는가? 머스크도 베조스도 바로 그 점을 노리고 있다.
캘리포니아 공대의 연구 결과 근지구대의 소행성을 채굴의 용이성을 위해 지구 궤도로 끌어오는 데 드는 비용이 대략 26억 달러, 한국 돈 3조4천억원 쯤 된다고 한다7). 미국 정부의 1년 국가 예산 9100조에서 3조원쯤은 줌왈트급 구축함 하나 안 만들면 되는 정도로 확보할 수 있을 것이다. 우주로 대용량 화물 우주선을 보내는 기술, 저중력 상태에서 자원을 채굴하는 기술, 채굴한 자원을 다시 가지고 돌아오는 기술과 같은 제반 기술이 확보되면 언제라도, 누구라도 다투어 우주로 떠날 게 뻔하다. 그리고, 온 세계의 관련 연구 기관, 기업에서 이미 이 전쟁에 뛰어든 상태다. 이야기 속에 총이 등장하면 발사되어야만 하는 것처럼, 좋든 싫든 ‘우주개발’은 이미 시작되었다고 보아야 한다. 일단 시작되면, 더는 휴대폰 베터리 수명을 걱정하지 않아도 된다8).

 

④ 식량의 무한 공급
‘생명의 무한 공급’이라는 말은 조금 무리가 따르는 말이기는 하지만, 그럼에도 불구하고 상당히 ‘무한’에 가까워진 것은 사실이다. 이를테면 이것은 태양열 집열판의 꾸준한 가격 하락과 비슷한 성격을 가지고 있다. 2008년 세포 배양육의 가능성이 실증되었을 때, 배양육 한 조각의 가격은 무려 32만5000달러였다. 그러던 것이 2011년에는 1000달러로 하락하고, 2015년에는 80달러까지 떨어진다. 그리고 여전히 떨어지는 중이다9). 동물 세포를 배양하는 것뿐이 아니다. 식물의 단백질을 변형하는 경우까지 고려하면 앞으로 인류가 먹을 고기의 대부분은 동물 없는 고기일 가능성이 높다. 이 또한 다른 것과 마찬가지로, 그 고기의 생산비용이 동물 사육비용보다 낮아질 것이기 때문이다. 이와 같은 일이 농경에서도 벌어진다. 흔하디 흔한 스마트팜 이야기가 그것인데, 워낙 자주 많이 이야기 된 바 있으니 간단하게, 스마트팜의 소출량도 점점 늘어나고 있다는 점, 스마트팜 기술의 발달상황에 따라 아예 재배지를 우주로 옮겨버릴 수 있다는 점만 집고 넘어가자.

언급한 네 가지 기초 자원 이외에도 필요량 이상으로 공급될 가능성이 높은 것들은 많다. 어쨌든 중요한 것은 이 모든 것들이 모두 자본주의의 운동에, 순방향으로 맞물려 있다는 데 있다. 자본주의는 제 한계를 돌파하기 위해 ‘기술’을 확보하지 않을 재간이 없다. 이쯤에서 이에 대한 맑스의 언급을 볼 필요가 있다.

 

“자본은 기계를 사용한다. 다만 노동자가 자기 시간을 상당 부분 자본을 위해 일하게 하고, 상당 부분 자신에게 속하지 않은 시간으로 받아들이게 하며, 다른 사람을 위해 더 오래 일하도록 만드는 데 기계를 사용한다. 이런 과정을 거쳐 특정한 물건 하나를 생산하는 데 필요한 노동의 양은 최소화된다. 그러나 그 물건을 최대한 많이 만들 때는 노동의 양이 최대치가 된다는 사실을 깨닫는다. 첫 번째 측면이 중요한 까닭은, 이 경우 자본이 인간의 노동을 최소화하기 때문이다. 이런 상황은 노동이 해방됨으로써 얻는 혜택에 기여할 것이며, 노동 해방을 위한 조건이기도 하다.10)

 

 

지금까지의 기술 발달은 인용문의 언급대로 오히려 노동자의 노동을 초과 투입시키는 근거가 되어왔다. 그런데 기술발달이 어느 한계를 넘어서면 어떻게 될까? 한 사이클 당 필요한 노동량을 꾸준히 낮춰오다가 결국엔 노동이 불필요해지는 지점에 이르게 되면 말이다. 그 순간 앞서 언급한 ‘대량의 기술적 실업’이 도래하게 된다. 그렇게 ‘노동 해방’의 조건이 무르익는다.


5) 알렉스 윌리엄스, 닉 셔니섹, 「가속주의선언」

6) 머스크의 스페이스X, 베조스의 블루오리진.

7) 같은 책, 189쪽.

8) 포스코경영연구소 2023년 발표, “전기차 41년 간 생산하면 ‘리튬’ 고갈”, 디지털 데일리 3월15일자.

9) 같은 책, 237-240쪽.

10) 칼 맑스, 『정치 경제학 비판 요강』. 같은 책에서 재인용.

 

완전하게 자동화된 화려한 공산주의... 그리고 기술이라는 ‘자연’
자본주의가 자신의 내적 동학에 따라 결국에는 파멸하리라 예상했던 맑스는 그 예언의 섬뜩함 때문에 그다지 주목받지 않았던 성질을 가지고 있다. 그것은 그의 사유 전반에 흐르는 낙천성이다. 파멸하는 것은 자본주의지 인간들의 세계가 아니기 때문이다. 요컨대 그것은 오늘날 절대적인 것이 되어버린 ‘자본주의’를 역사적인 것으로 상대화한다. 그리고 도래할 것은, 낮엔 낚시하고, 밤에는 시를 쓰는 사람들의 자유로운 공동체, 공산주의다. 맑스의 사상 자체에 관한 다른 이론적 검토들이 필요하겠지만, 바스타니가 주장하는 바는 단순하다. 맑스가 말한 바 있는 극대화된 생산력이 실현되는 시점은 20세기 초가 아니라 바로 지금이고, 앞서 열거한 기초 자원들의 초과 공급 가능성은 그러한 생산력을 수용하는 생산관계의 변혁을 요구한다는 것이다. 당연하게도 그 생산관계는 ‘공산주의’다. 어떤 공산주의? 완전하게 자동화된 화려한 공산주의다. 그렇다면 생산관계에 대한 이 ‘변혁’은 어떻게 이루어질 수 있을까? 텍스트에는 ‘신자유주의’를 비판하는 여느 텍스트들이 제시하는 것과 크게 다르지 않은 내용들이 제시된다. 사회 각 분야에서 전 사회적인 수평적 연대를 통해 무상으로 ‘몫’을 요구해야 한다는 것, 무한하게 공급되는 자원을 통제함으로써 시대를 뒤로 돌리려는 자본에 반대해야 한다는 것 등이다. 그 외에 중앙은행의 역할을 ‘정치적’으로 확대하여 생산관계 변혁에 중요한 역할을 맞도록 해야 한다는 점 등이 눈에 띈다. 어쨌든 이쯤에 이르면 그 희망차고, 대단한 분석에 비해 어쩐지 허무한 기분이 드는 것은 어쩔 수 없다. 그렇다고 치자. 차라리 이 부분과 관련해서는 「가속주의선언」의 몇몇 항목의 언급이 훨씬 더 유효성 있게 다가온다(「가속주의선언」 참고 링크). 어쨌든 완전히 자동화된 세계만이 공산주의를 실현한다. 그 공산주의는 화려하다.

 

농업혁명, 산업혁명에 비견되는, 아니 어쩌면 그보다 인류의 삶을 훨씬 더 크게 바꿔놓을지도 모르는 이 격변의 상황에서 나는 어떻게 살아야 할까? 한 가지 고백을 하자면, 나는 절제보다 낭비를 훨씬 더 좋아한다. 이미 보통의 경우보다 전기를 훨씬 더 많이 쓰는 삶을 살고 있다는 점, 그리고 그걸 그다지 아끼고 싶지 않다는 점에서 이를 인정할 수밖에 없다. 뿐만 아니다. 나는 취미도 아주 많다. 자전거를 타고, 책과 만년필을 모으고, 게임기로 게임을 하고, 음향기기를 이렇게 저렇게 만진다. 컴퓨터로 코딩이나 해킹을 하지는 않지만, 컴퓨터와 그 주변 기기들이 현대의 산업적 미美를 최대치로 구현해낸 물건이라고 생각하는 편이다. 이런 내가 아끼는 걸 좋아할 리가 없다. 게다가 여기엔 그냥 방종이나 무절제만 있는 것도 아니다. 이 모든 것들이 나의 존재 역량, 어떤 수용력을 끊임없이 확대시켜 준다고 생각한다. 이를테면 탄소섬유로 만든 자전거는 도로와 나를 훨씬 긴밀하게 조응시킨다. 언리얼 엔진5로 제작한 게임은 평면적이고 정태적인 회화나 텍스트로만 구성된 소설에서는 느낄 수 없는 전혀 새로운 미적 지각을 열어준다.

 

 

문제는 이것들은 공짜가 아니라는 데 있다. 내가 뭘 할 때마다 자원은 무언가 다른 것으로 바뀐다. 사라지지는 않는다. 심지어 비 오는 날 어쩔 수 없이 집에서 자전거를 탈 때, 그때도 나는 전기를 쓴다. 그런데 이런 나의 일상적 모습이 석유문명이 낳은 현대인의 병리적 상태라고는 생각되지 않는다. 이게 병적인 것이라면 ‘정상적 상태’가 있어야 할 텐데 이 경우 ‘정상’이란 이른바 ‘자연적인 것’으로 표상되는 경우가 많다. 요컨대 우리는 ‘자연’에서 멀어졌다는 것이다. 그런데 오히려 ‘병리적 상태’라고 불리는 그 상태가 인간의 자연성인 것은 아닐까? 다시 말해 지구를 이렇게 뜨겁게 만드는 중에도 인간이 자연과 분리되었던 적은 단 한 번도 없었다는 것이다. ‘분리’되기에는 자연이 너무 크고, 인간이 너무 작다. 우리는 자연에서 멀어진 적이 없다.

이렇게 생각하면 오히려 과제가 간단해 진다. 모든 자연물이 자신의 존재를 유지하려 애를 쓰는 것처럼, 인간 역시 자기 존재를 유지하려 애를 쓴다. 그런데 지금까지 하던 대로 하다가는 ‘인간’은 사라져간 여러 종들과 마찬가지로 사라질 것이다. 어떻게 살아남을 것인가? 다시 인간 이전의 상태로 돌아갈 것인가? 지금보다 훨씬 더 적게 쓰는 자발적 빈곤을 택할 것인가? 검약과 절제로 스스로를 갱신할 수 있다면 그것도 좋다. 그건 그 행위 자체로 그 존재를 더 강하게 만드니까 말이다. 그런데 나는 그것을 물질적 희소성이 사라진 세계에서 할 수 있으면 더 좋을 것 같다. 어쩔 수 없어서 하고 싶지는 않다. 그런 이유에서 나는 ‘기술’이 우리를 어디로 끌고 가는지 다양한 각도에서 생각해 봐야 한다고 생각한다. 그것이 불러올 세상, 우리가 살게 될 세상이 지금 겪는 모든 문제를 공짜로 해결해 줄 리는 없기 때문이다. 그러나 동시에 그것은 이 문제들을 해결할 충분한 잠재력이 있는 것도 사실이다. 요컨대 ‘기술’은 환경의 적도, 인간의 친구도, 동식물의 학살자도 아니다. 기술은 다만, 어떤 자연일 뿐이다. 우리는 우리 자신에게 적응할 수밖에 없다. 

댓글 3
  • 2023-05-31 08:30

    쌤의 말씀처럼 기술이 인간과 떨어진 적이 없으며 그 기술에 대한 논의가 매우 중요한 것 같아요.
    기술은 인간의 자연성인 것도 같구요. 그러려면 자연도 어떤 자연, 기술도 어떤 기술이라고 해야겠네요.
    자연의 일부로서의 자연을 말할 때는 그 반대편에 '추출적 자연'에 대한 경계가 있을테고,
    기술이 어디로 갈지를 말할 때는 그 반대편에 '못가게 하는 기술'도 있을 것 같아요.
    자연이나 기술 등에 대해 좀 더 다양한 속성으로 구별할 때가 온 것 같네요. ㅎㅎ

  • 2023-06-02 21:01

    기후위기가 백년쯤 뒤의 일이었다면 완전히자동화된 화려한 코뮤니즘이 장미빛 미래로 상상해볼만도 한데..
    그러기엔 너무 긴급한 상황이 많은 것 같아요..

  • 2023-06-03 06:58

    마치 물고기가 물 안에서 살듯이 기술 속에서 살고 있건만,
    공기같은 기술에 대해 어떻게 생각하고 대응해야 할지 막막할 때가 많은 것 같아요.
    얼마전 누리호 발사에 열광하는 언론과 사회분위기를 보면서도 속이 꽉막힌 듯 답답증을 느꼈는데 말이에요.

세미나 에세이 아카이브
아타락시아를 향해 『에피쿠로스의 네 가지 처방』을 읽고   쾌락에 대한 오해 고대 그리스 철학자 에피쿠로스는 행복한 삶의 시작이자 끝은 쾌락이라고 했다. 쾌락이라니... 아마도 사람들은 쾌락이 고상한 철학자의 입에서 나올 말은 아니라고 생각할 것이다. 쾌락이라는 단어에서 연상되는 향락, 방탕함 등을 자연스레 떠올리면 말이다. 그렇지만 사전적 의미의 쾌락은 유쾌하고 즐거움. 또는 그런 느낌을 뜻한다. 그리고 사실 에피쿠로스가 말한 쾌락도 이런 의미이다. 그런데 어떤 이유에서인지는 모르겠지만 본래 에피쿠로스의 철학을 가리키는 말이었던 ‘에피쿠로스주의’가 전용되어 감각적 향락주의, 즉 육체 탐닉이라든가 식도락 등을 의미하게 되었다고 한다.(네이버)   실제 에피쿠로스 당대에도 에피쿠로스에 대한 비판이 많았다. 고대 그리스 철학자 티몬은 에피쿠로스에 대해 “자연철학자 중에서 가장 후안무치한 자, 사모스에서 온 문법학교 교사, 모든 살아 있는 것 중에서 가장 완고하고 다루기 힘든 자”라고 평했다. 에피쿠로스에 적대적이었던 스토아학파 철학자 디오티모스는 에피쿠로스가 50통의 음란한 서신을 썼다고 신랄하게 비판했다. 에픽테토스는 에피쿠로스를 음탕한 말을 늘어놓는 자라고 맹렬히 비난했다. 심지어 에피쿠로스 학교에서 수학하다가 중도에 떠난 티모크라테스는 에피쿠로스가 방탕하고 사치스러운 삶 때문에 하루에 두 번이나 토했고, 밤늦게까지 벌어지는 철학 토론과 비밀 회합을 자신도 지긋지긋해했다고 주장했다. 비난의 이유 중 매춘도 빠지지 않았다. 물론 이런 비난은 에피쿠로스의 쾌락의 의미를 알면 믿을 수 없는 것이지만, 이렇게 많은 사람들이 비난을 퍼부어댄 이유는 아마도 에피쿠로스학파가 ‘정원’을 꾸려 공동체생활을 했기 때문이지 않을까? 신비주의는 때로 황당한 소문을 낳게 마련이니까. 그리고 오히려 이러한 많은...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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2023.08.28 | 조회 141
한문이예술
한자의 바다에서 작고小 약한 것弱을 길어올리기   동은     1. 수많은 한자들 중에서     오늘날 일상에서 사용되고 있는 한자는 2천자에서 5천자 정도 된다. 3천자 정도의 간극이 있긴 하지만 이미 30개 남짓 되는 한글이나 알파벳에 비하면 과하게 많다고 할 수 있다. 그런데 한자가 사용된 6000년이 넘는 시간동안 만들어졌다가 사라진 문자만 해도 5만자(!)가 넘고, 같은 뜻을 가졌지만 형태가 다른 한자들까지 더하면 8만자(!!)가 넘는다고 한다. 이쯤되면 한자를 만든 사람도 무슨 한자가 있는지 절대 모를 수준이다. 게다가 새로운 형태의 갑골문이 계속해서 발견되고 있다고 하니 한자의 갯수는 계속해서 늘어나고 있는 것이나 마찬가지다. 정말이지 한자에 대해서 알면 알수록 어떻게 지금까지 계속 사용되는지 신기할 따름이다.     그런데 내가 <한문이 예술>에서 아이들에게 수업을 하는 한자는 한 시즌에 겨우 10자 정도밖에 되지 않는다. 사실 10자도 많은 편이다. 하루에 하나씩 외워도 10년을 외워야 할 수준인데 이렇게 비효율적으로 수업을 해도 괜찮은지 가끔 걱정이 된다. 하지만 그럴 때마다 아무리 생각해도 괜찮다는 확신이 든다. 내가 아이들에게 전하고 싶은 이야기는 한자의 갯수와는 아무 상관 없으니 말이다.     그야말로 한자의 바다!       2.  수업을 하다보면     아이들과 함께 있다보면 ‘날것’이 드러나는 상황이 종종 펼쳐진다. <한문이 예술>에는 어릴 때부터 동네에서 자주 보며 가까워진 친구들이 함께 오는 경우가 많다. 같은 학교를 다니거나, 학원을 다니면서 자연스럽게 친해진 뒤에 <한문이 예술>에 오게...
한자의 바다에서 작고小 약한 것弱을 길어올리기   동은     1. 수많은 한자들 중에서     오늘날 일상에서 사용되고 있는 한자는 2천자에서 5천자 정도 된다. 3천자 정도의 간극이 있긴 하지만 이미 30개 남짓 되는 한글이나 알파벳에 비하면 과하게 많다고 할 수 있다. 그런데 한자가 사용된 6000년이 넘는 시간동안 만들어졌다가 사라진 문자만 해도 5만자(!)가 넘고, 같은 뜻을 가졌지만 형태가 다른 한자들까지 더하면 8만자(!!)가 넘는다고 한다. 이쯤되면 한자를 만든 사람도 무슨 한자가 있는지 절대 모를 수준이다. 게다가 새로운 형태의 갑골문이 계속해서 발견되고 있다고 하니 한자의 갯수는 계속해서 늘어나고 있는 것이나 마찬가지다. 정말이지 한자에 대해서 알면 알수록 어떻게 지금까지 계속 사용되는지 신기할 따름이다.     그런데 내가 <한문이 예술>에서 아이들에게 수업을 하는 한자는 한 시즌에 겨우 10자 정도밖에 되지 않는다. 사실 10자도 많은 편이다. 하루에 하나씩 외워도 10년을 외워야 할 수준인데 이렇게 비효율적으로 수업을 해도 괜찮은지 가끔 걱정이 된다. 하지만 그럴 때마다 아무리 생각해도 괜찮다는 확신이 든다. 내가 아이들에게 전하고 싶은 이야기는 한자의 갯수와는 아무 상관 없으니 말이다.     그야말로 한자의 바다!       2.  수업을 하다보면     아이들과 함께 있다보면 ‘날것’이 드러나는 상황이 종종 펼쳐진다. <한문이 예술>에는 어릴 때부터 동네에서 자주 보며 가까워진 친구들이 함께 오는 경우가 많다. 같은 학교를 다니거나, 학원을 다니면서 자연스럽게 친해진 뒤에 <한문이 예술>에 오게...
동은
2023.08.18 | 조회 547
기린의 공동체가 양생이다
1.포정해우   처음 소를 잡을 때는 소가 통째로만 보였습니다. 삼 년이 지나자 소의 갈라야 할 부분이 보였습니다. 지금은 소를 눈으로 보지 않고 신묘한 기운으로 대합니다. 감각기관은 활동을 멈추고 신묘한 기운이 움직이는 것이지요. 다시 말해 소의 자연스러운 결에 따라, 살과 뼈 사이의 빈틈에 칼을 넣어 움직이며, 원래 나 있는 길을 따라 나아가는 것입니다. (.....) 지금 제 칼은 십구 년이 되었습니다. 그동안 소를 수천 마리나 잡았지만 이 칼은 막 숫돌에서 갈아낸 듯 예리합니다. 소의 뼈마디에는 틈이 있고 칼날은 더없이 얇아 두께가 없습니다. 두께 없는 것이 틈새로 들어가니 넓은 공간에서 칼이 자유자재로 놀고도 남는 것입니다. 이 때문에 십구 년이 지났어도 이 칼은 막 숫돌에서 갈아낸 듯 예리합니다. <낭송장자> 84쪽     「양생주」 2장은 소를 잡는 백정 포정의 이야기다. 포정은 자신이 소를 잡는 일에 대해 기술로 한 것이 아니라 도(道)로 했다고 했다. 처음 보았을 때 통째로 보였던 소가 삼 년이 지나자 갈라야 할 부분이 보이는 변화였다. 포정은 그 시간동안 덩어리째 보이는 소를 분해하는 기술부터 습득하면서 기술에 그치지 않고 소를 이해하기에까지 나아갔다. 즉, 소의 생김새라든가 섭생, 생명의 주기 등이었다. 이를 통해 소로 태어난 생명이 살아가는 이치를 통해 도의 운행을 깨우치게 되었다. 이렇게 깨우친 도로 십구 년이나 이어진 포정의 일은 여느 백정의 일과는 다른 길(道)을 낸 것이다.         포정이 수천 마리의 소를 잡으면서...
1.포정해우   처음 소를 잡을 때는 소가 통째로만 보였습니다. 삼 년이 지나자 소의 갈라야 할 부분이 보였습니다. 지금은 소를 눈으로 보지 않고 신묘한 기운으로 대합니다. 감각기관은 활동을 멈추고 신묘한 기운이 움직이는 것이지요. 다시 말해 소의 자연스러운 결에 따라, 살과 뼈 사이의 빈틈에 칼을 넣어 움직이며, 원래 나 있는 길을 따라 나아가는 것입니다. (.....) 지금 제 칼은 십구 년이 되었습니다. 그동안 소를 수천 마리나 잡았지만 이 칼은 막 숫돌에서 갈아낸 듯 예리합니다. 소의 뼈마디에는 틈이 있고 칼날은 더없이 얇아 두께가 없습니다. 두께 없는 것이 틈새로 들어가니 넓은 공간에서 칼이 자유자재로 놀고도 남는 것입니다. 이 때문에 십구 년이 지났어도 이 칼은 막 숫돌에서 갈아낸 듯 예리합니다. <낭송장자> 84쪽     「양생주」 2장은 소를 잡는 백정 포정의 이야기다. 포정은 자신이 소를 잡는 일에 대해 기술로 한 것이 아니라 도(道)로 했다고 했다. 처음 보았을 때 통째로 보였던 소가 삼 년이 지나자 갈라야 할 부분이 보이는 변화였다. 포정은 그 시간동안 덩어리째 보이는 소를 분해하는 기술부터 습득하면서 기술에 그치지 않고 소를 이해하기에까지 나아갔다. 즉, 소의 생김새라든가 섭생, 생명의 주기 등이었다. 이를 통해 소로 태어난 생명이 살아가는 이치를 통해 도의 운행을 깨우치게 되었다. 이렇게 깨우친 도로 십구 년이나 이어진 포정의 일은 여느 백정의 일과는 다른 길(道)을 낸 것이다.         포정이 수천 마리의 소를 잡으면서...
기린
2023.08.17 | 조회 285
요요와 불교산책
초기 불교의 흑역사, 여성 차별적인 팔경법     깔라마들이여, 소문이나 전승이나 여론에 끄달리지 말고, 성전의 권위나 논리나 추론에도 끄달리지 말고, 상태에 대한 분석이나 견해에 대한 이해에도 끄달리지 말고 그럴듯한 개인적인 인상이나 ‘이 수행자가 나의 스승이다’라는 생각에도 끄달리지 마십시오. … 이러한 것들은 실천하여 받아들이면 유익하지 못하고 괴로움을 야기하는 것이라고 스스로 알게 되면 깔라마인들이여, 그 때에 그것들을 버리십시오. (『앙굿따라니까야』 「깔라마의 경」)   붓다가 가르침을 펴기 시작한 초기에 붓다를 따르는 출가수행자들은 모두 남자들 뿐이었다. 여성은 다만 재가 신자로만 붓다와 관계를 맺었다. 아마 당시로서는 마을에서 떨어진 한적한 숲에서 명상하고, 집도 절도 없이 걸식하는 길 위의 삶을 사는 여성의 존재는 생각할 수도 없었기 때문일 것이다. 고대 인도 사회에서 가족의 보호 밖에 있는 여성은 손쉽게 취할 수 있는 성적인 대상이자 남성을 유혹하는 위험한 존재로 인식되었다. 그러므로 여성이 집을 떠나 출가자가 된다는 것은 위험을 무릅쓰는 일이었다. 그러나 붓다의 설법을 듣고 구도의 삶을 살겠다고 결심을 한 남자들이 나온 것처럼 출가하여 수행자로 살겠다는 용감한 여자들이 나오는 것도 시간문제일 뿐이었다. 게다가 붓다가 이끄는 비구 승가는 세속에서의 신분과 나이에 의한 차별을 뛰어넘어 오직 출가한 햇수에 따라 예를 표하는 평등한 공동체의 이상을 보여주고 있었다. 대안적 공동체로서의 승가의 현존은 여성들에게도 ‘바람에 걸리지 않는 그물처럼, 진흙에 더러워지지 않는 연꽃처럼’ 살 수 있다는 희망을 갖게 했을 터. 과연 누가 출가한 여성 수행자로 첫발을 뗄 것인가,...
초기 불교의 흑역사, 여성 차별적인 팔경법     깔라마들이여, 소문이나 전승이나 여론에 끄달리지 말고, 성전의 권위나 논리나 추론에도 끄달리지 말고, 상태에 대한 분석이나 견해에 대한 이해에도 끄달리지 말고 그럴듯한 개인적인 인상이나 ‘이 수행자가 나의 스승이다’라는 생각에도 끄달리지 마십시오. … 이러한 것들은 실천하여 받아들이면 유익하지 못하고 괴로움을 야기하는 것이라고 스스로 알게 되면 깔라마인들이여, 그 때에 그것들을 버리십시오. (『앙굿따라니까야』 「깔라마의 경」)   붓다가 가르침을 펴기 시작한 초기에 붓다를 따르는 출가수행자들은 모두 남자들 뿐이었다. 여성은 다만 재가 신자로만 붓다와 관계를 맺었다. 아마 당시로서는 마을에서 떨어진 한적한 숲에서 명상하고, 집도 절도 없이 걸식하는 길 위의 삶을 사는 여성의 존재는 생각할 수도 없었기 때문일 것이다. 고대 인도 사회에서 가족의 보호 밖에 있는 여성은 손쉽게 취할 수 있는 성적인 대상이자 남성을 유혹하는 위험한 존재로 인식되었다. 그러므로 여성이 집을 떠나 출가자가 된다는 것은 위험을 무릅쓰는 일이었다. 그러나 붓다의 설법을 듣고 구도의 삶을 살겠다고 결심을 한 남자들이 나온 것처럼 출가하여 수행자로 살겠다는 용감한 여자들이 나오는 것도 시간문제일 뿐이었다. 게다가 붓다가 이끄는 비구 승가는 세속에서의 신분과 나이에 의한 차별을 뛰어넘어 오직 출가한 햇수에 따라 예를 표하는 평등한 공동체의 이상을 보여주고 있었다. 대안적 공동체로서의 승가의 현존은 여성들에게도 ‘바람에 걸리지 않는 그물처럼, 진흙에 더러워지지 않는 연꽃처럼’ 살 수 있다는 희망을 갖게 했을 터. 과연 누가 출가한 여성 수행자로 첫발을 뗄 것인가,...
요요
2023.08.17 | 조회 292
요요와 불교산책
허스토리, 고대 인도의 여성 수행자들      마음이 잘 집중되어, 최상의 진리를 보는 자에게, 지혜가 항상 나타난다면, 여성의 존재가 무슨 상관이랴. (『테리가타』 3장 「쏘마 장로니의 시」)     고대 인도의 여성철학자들   기원전 4세기, 헬레니즘문명과 인도문명의 만남이 이루어졌다. 전쟁을 통해서였다. 당시 평화조약 체결을 위해 인도에 온 메가스테네스는 『인도견문록』에 ‘인도에는 여성 철학자들이 있어서 남성들과 난해한 것을 당당하게 논의한다’는 기록을 남겼다. 고대 그리스의 민주주의는 남성 시민들의 민주주의였고 철학도 남성들의 전유물이었다. 고대 인도에서도 여성들은 결코 존중받는 존재가 아니었다. 여성은 바라문교의 성전 『베다』를 학습할 수도 없었으므로 지식에 가까이 갈 수조차 없었다. 여성은 남성을 유혹하는 위험한 존재로 취급받았다. 여성들은 월경 전인 어린 나이에 조혼을 강요당했고, 자식을 낳지 못하면 비난 받았으며, 남자의 소유물이나 다를 바 없었다. 남편과 아들의 보호를 받지 못하는 여성은 폭력에 노출되어 있었다. 개인으로서의 여성이 독자적인 목소리를 낸다는 것은 상상하기도 어려운 사회였다. 그런데 메가스테네스가 본, 남성들과 난해한 것을 당당하게 논의하던 고대의 여성들, 그녀들은 누구였을까?   그녀들은 불교 승가로 출가한 비구니들이었다. 기원전 6~5세기, 붓다 재세시부터 최고의 깨달음을 얻은 다수의 비구니들이 존재했다. 그녀들은 여성에게 강요되는 사회적 의무에서 자유로운 존재로서 명상적 삶에 헌신하였고, 붓다의 가르침을 연구하고 토론하며, 제자들을 길러냈다. 다행히 우리는 그녀들의 삶을 『테리가타』를 통해 확인할 수 있다. 『테리가타』는 2,500년 전에 살았던 깨달은 여성들의 성취와 해탈의 기쁨을 노래한 시집이다. 여기에는 모두 73개의 시가 실려있다. 시 중에서 두...
허스토리, 고대 인도의 여성 수행자들      마음이 잘 집중되어, 최상의 진리를 보는 자에게, 지혜가 항상 나타난다면, 여성의 존재가 무슨 상관이랴. (『테리가타』 3장 「쏘마 장로니의 시」)     고대 인도의 여성철학자들   기원전 4세기, 헬레니즘문명과 인도문명의 만남이 이루어졌다. 전쟁을 통해서였다. 당시 평화조약 체결을 위해 인도에 온 메가스테네스는 『인도견문록』에 ‘인도에는 여성 철학자들이 있어서 남성들과 난해한 것을 당당하게 논의한다’는 기록을 남겼다. 고대 그리스의 민주주의는 남성 시민들의 민주주의였고 철학도 남성들의 전유물이었다. 고대 인도에서도 여성들은 결코 존중받는 존재가 아니었다. 여성은 바라문교의 성전 『베다』를 학습할 수도 없었으므로 지식에 가까이 갈 수조차 없었다. 여성은 남성을 유혹하는 위험한 존재로 취급받았다. 여성들은 월경 전인 어린 나이에 조혼을 강요당했고, 자식을 낳지 못하면 비난 받았으며, 남자의 소유물이나 다를 바 없었다. 남편과 아들의 보호를 받지 못하는 여성은 폭력에 노출되어 있었다. 개인으로서의 여성이 독자적인 목소리를 낸다는 것은 상상하기도 어려운 사회였다. 그런데 메가스테네스가 본, 남성들과 난해한 것을 당당하게 논의하던 고대의 여성들, 그녀들은 누구였을까?   그녀들은 불교 승가로 출가한 비구니들이었다. 기원전 6~5세기, 붓다 재세시부터 최고의 깨달음을 얻은 다수의 비구니들이 존재했다. 그녀들은 여성에게 강요되는 사회적 의무에서 자유로운 존재로서 명상적 삶에 헌신하였고, 붓다의 가르침을 연구하고 토론하며, 제자들을 길러냈다. 다행히 우리는 그녀들의 삶을 『테리가타』를 통해 확인할 수 있다. 『테리가타』는 2,500년 전에 살았던 깨달은 여성들의 성취와 해탈의 기쁨을 노래한 시집이다. 여기에는 모두 73개의 시가 실려있다. 시 중에서 두...
요요
2023.07.20 | 조회 465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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