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요요와불교산책14회] 허스토리, 고대 인도의 여성수행자들

요요
2023-07-20 23:24
478

허스토리, 고대 인도의 여성 수행자들 

 

 

마음이 잘 집중되어, 최상의 진리를 보는 자에게, 지혜가 항상 나타난다면, 여성의 존재가 무슨 상관이랴. (『테리가타』 3장 「쏘마 장로니의 시」)

 

 

고대 인도의 여성철학자들

 

기원전 4세기, 헬레니즘문명과 인도문명의 만남이 이루어졌다. 전쟁을 통해서였다. 당시 평화조약 체결을 위해 인도에 온 메가스테네스는 『인도견문록』에 ‘인도에는 여성 철학자들이 있어서 남성들과 난해한 것을 당당하게 논의한다’는 기록을 남겼다. 고대 그리스의 민주주의는 남성 시민들의 민주주의였고 철학도 남성들의 전유물이었다. 고대 인도에서도 여성들은 결코 존중받는 존재가 아니었다. 여성은 바라문교의 성전 『베다』를 학습할 수도 없었으므로 지식에 가까이 갈 수조차 없었다. 여성은 남성을 유혹하는 위험한 존재로 취급받았다. 여성들은 월경 전인 어린 나이에 조혼을 강요당했고, 자식을 낳지 못하면 비난 받았으며, 남자의 소유물이나 다를 바 없었다. 남편과 아들의 보호를 받지 못하는 여성은 폭력에 노출되어 있었다. 개인으로서의 여성이 독자적인 목소리를 낸다는 것은 상상하기도 어려운 사회였다. 그런데 메가스테네스가 본, 남성들과 난해한 것을 당당하게 논의하던 고대의 여성들, 그녀들은 누구였을까?

 

그녀들은 불교 승가로 출가한 비구니들이었다. 기원전 6~5세기, 붓다 재세시부터 최고의 깨달음을 얻은 다수의 비구니들이 존재했다. 그녀들은 여성에게 강요되는 사회적 의무에서 자유로운 존재로서 명상적 삶에 헌신하였고, 붓다의 가르침을 연구하고 토론하며, 제자들을 길러냈다. 다행히 우리는 그녀들의 삶을 『테리가타』를 통해 확인할 수 있다. 『테리가타』는 2,500년 전에 살았던 깨달은 여성들의 성취와 해탈의 기쁨을 노래한 시집이다. 여기에는 모두 73개의 시가 실려있다. 시 중에서 두 편은 30명과 500명이 함께 읊은 시로 전해진다. 500명(Pancasata)을 한사람이라고 보는 해석도 있으므로 『테리가타』는 최소 102명, 최대 601명의 시를 모은 시집이라 할 수 있다. 결코 적지 않은 숫자다.

 

 

 

일상의 수행자 테리까

 

첫 번째 노래의 주인공은 테리까다. 그녀는 출가하여 수행자로 살고자 했으나 남편의 허락을 얻지 못해 가정에 머물러야 했다. 결혼한 남성은 아내의 허락이 없이 출가하는 것이 가능했지만 여성에게는 그런 자유가 없었기 때문이다. 그러나 테리까는 할 수 있는 만큼 통찰지를 닦는 수행을 계속했다. 어느날 부엌에서 카레를 끓이던 중 그릇에 불이 붙었다. 그 불은 그릇을 새까맣게 불태웠다. 그녀는 그 불을 관찰하면서 무상(無常)을 통찰했고, 모든 것에는 실체라 할만한 것이 없다는 지혜를 성취하여, 감각적 욕망을 완전히 끊은 불환자의 경지에 올랐다.

불환자는 초기 불교의 수행자들이 얻는 세 번째 단계이다. 첫 번째는 붓다와 붓다의 가르침에 대해 흔들리지 않는 신뢰를 갖고 깨달음의 흐름에 들어간 예류자(預流者, 수다원)다. 두 번째는 다음 생에는 깨달음을 얻게 되는 일래자(一來者, 사다함), 세 번째는 욕망의 세계를 벗어난 곳에 태어나 그곳에서 깨달음을 얻어 다시는 이 세상으로 돌아오지 않는 불환자(不還者, 아나함), 마지막으로 지금 여기에서 해탈한 지혜의 완성자 아라한이다. 테리까는 물질적이고 정신적인 영역에서 거의 모든 탐욕이 사라져 신체를 아름답게 꾸미는 일체의 장식을 멀리하게 되었다. 그녀의 남편은 아내에게 탐욕이 없어졌다는 것을 알게 되자 아내의 출가를 허락하지 않을 수 없었다.

 

[붓다] 옹기 속의 마른 야채처럼 그대의 탐욕은 실로 지멸하였다.(『테리가타』, 「테리까 장로니의 시」)

 

그녀의 경지를 찬탄한 붓다의 게송이 테리까의 노래가 되었다. 가정생활을 하면서도 수행을 계속해 온 테리까에게 출가는 수행의 시작이 아니라 수행의 완성을 의미했다. 테리까에게 출가는 번뇌를 종식한 아라한으로서의 새로운 삶의 시작이었다. 재가의 삶을 살면서도 출가자 못지않게 수행에 진심이었던 테리까의 이야기를 통해 우리는 재가의 삶 속에서도 굴하지 않고 통찰지를 닦았던 여성들의 존재를 알 수 있다.

 

<춘엽니(비구니)> 권진규

 

 

자식을 잃고 수행한 끼사꼬따미

 

끼사 꼬따미는 아들이 어린 나이로 죽자 반미치광이가 되었다. 그녀는 죽은 아이를 안고 다니며 아이를 살릴 약을 구했다. 사람들은 그녀를 비웃었지만 붓다는 아이를 살려주겠노라고 약속했다. 단 조건이 있었다. 한 사람도 죽은 이가 없는 집에서 겨자씨를 구해와야 한다는 조건이었다. 자식을 살리고 싶었던 끼사 꼬따미는 모든 집의 문을 두드렸다. 그 과정에서 그녀는 죽음은 누구도 피할 수 없다는 것을 깊이 깨닫고 아들의 죽음에 대한 자책과 회한, 비탄과 슬픔으로부터 벗어났다. 오랫동안 내게 이 이야기의 주인공은 아들 잃은 여성이 아니라 그녀를 구원한 위대한 스승 붓다였다. 그랬기에 나는 이후 그녀가 어떤 삶을 살았는지 아무 관심이 없었다. 그런데 『테리가타』를 통해 그녀의 이름을 알았고, 그 뒤 출가하여 아라한이 되었다는 것을 알게 되었다. 비구니 끼사 꼬따미는 『쌍윳따 니까야』 「수행녀의 품」에도 등장한다.

 

[빠삐만] 그대, 아들을 잃어버리고 홀로 슬퍼하는 얼굴을 하고 있는가? 외롭게 숲속 깊이 들어와 혹시 남자를 찾고 있는 것은 아닌가?

[끼사 꼬따미] 언제나 자식을 잃은 어머니도 아니고, 남자도 지난 일이다. 나는 슬퍼하지 않고 울지 않으니, 벗이여, 그대를 두려워하지 않는다. 모든 환락은 부서졌고, 어두운 존재의 다발은 파괴되었으니, 죽음의 군대에 승리하여, 나는 속세의 번뇌를 여의고 살아간다.(『쌍윳따니까야』 5:3 「꼬따미의 경」)

 

끼사 꼬따미는 아들을 잃은 슬픔에서 벗어났을 뿐 아니라 출가 수행을 통해 생과 사에 수반되는 일체의 번뇌와 두려움에서도 벗어났다. 악마 빠삐만은 그런 그녀를 ‘아들을 잃고 슬퍼하는 여인으로, 남자에게 의지하려는 연약한 여성으로’ 규정하고 싶어한다. 수행자로 독립적으로 살아가는 여성을 가부장제에 예속된 존재로 돌려놓으려는 남성의 목소리이다. 해탈한 여성 끼사 꼬따미는 그런 목소리를 가볍게 물리친다. 그녀의 내공이 어느 정도인지 짐작할만하다. 메가스테네스가 본 여성 철학자들 역시 이런 당당한 여성이 아니었을까?

 

 

깨달음에 남녀는 없다고 선언한 쏘마

 

깨달음을 얻은 여성들이 실제로 존재했음에도 불구하고 여성 수행자를 불신하는 의심의 눈초리는 언제나 존재해 왔다. 여성혐오적인 담론도 그친 적이 없었다. 여성은 머리가 나쁘다, 여성은 질투심이 강하다, 여성은 속이 좁다, 여성은 지도자의 자질이 부족하다, 여성은 화를 잘낸다, 여성은 사치스럽다, 등등. 가부장제의 질서와 이념은 열등한 인간으로 여자를 규정하고, 남자와 여자는 본래적으로 본성과 역할이 다르다는 말을 되풀이 한다.

 

[악마] 선인만이 도달할 수 있을 뿐, 그 경지는 성취하기 어려우니, 두 손가락만큼의 지혜를 지닌, 여자로서는 그것을 얻을 수 없다.

[쏘마] 마음이 잘 집중되어, 최상의 진리를 보는 자에게 지혜가 항상 나타난다면, 여성의 존재가 무슨 상관이랴. (『테리가타』 3장 「쏘마 장로니의 시」, 『쌍윳따니까야 』 5:2 「쏘마의 경」)

 

이 대화에 등장하는 악마는 여성의 지혜는 보잘것없어서 여성들은 깨달음을 얻을 수 없다고 보는 남성중심적이고 가부장적인 담론을 대변한다. 고대 인도에서만 이런 생각이 지배적이었던 것이 아니다. 가부장적 질서가 있는 곳이라면 어디에나 여성 혐오적 통념은 때로는 공공연하게 때로는 은밀하게 온존한다. 비구니 쏘마는 여성과 남성을 구별하는 것은 악마의 견해일 뿐, 지혜에는 남녀가 없다고 응수함으로써 악마의 목소리를 잠재운다.

 

붓다는 금수저냐 흙수저냐의 출생이 아니라 무엇을 말하고 행하고 생각하느냐가 그 사람이 어떤 사람인지 말해준다고 가르쳤다. 붓다는 과거의 업이나 절대자가 내 운명을 결정한다는 숙명론적 결정론을 단호히 거부했다. 동시에 붓다는 각각의 사물에 주어진 고정불변의 본질이나 실체가 있다는 본질주의도 거부했다. 모든 사물은 조건적으로 발생하고 소멸하며, 만물은 상호의존적이라는 연기설은 여성과 남성에게 불변하는 본질과 역할이 있다는 전제와는 양립할 수 없다. 여성은 열등한 존재여서 지혜를 성취할 수 없다는 주장은 붓다의 가르침에 반하는 악마의 견해일 뿐이다. 깨달음에 남녀는 없다는 비구니의 사자후다.

 

<승려복을 입은 여인> 최우석

 

 

아들을 해탈로 이끈 밧다의 어머니

 

밧다의 어머니는 아들 밧다를 친척에게 맡기고 출가했다. 그녀는 일체의 번뇌를 여읜 아라한이 되었다. 밧다도 장성하여 붓다의 가르침을 따라 출가하였다. 어느날 밧다가 어머니의 처소를 방문했다. 밧다의 행동거지는 사사로이 어머니를 찾아온 아들의 모습이었다. 밧다의 어머니는 밧다의 안일함을 꾸짖었다. 이에 밧다는 크게 느낀 바가 있어서 용맹정진하였고, 마침내 모든 번뇌가 가라앉은 적멸을 얻었다. 밧다의 어머니의 시는 밧다와 그 어머니 사이의 대화로 구성되어 있다.

 

[밧다의 어머니] 통찰을 얻기 위하여 선인들이 닦은 길을 가는 것에, 밧다여, 헌신하라. 괴로움의 종식을 위한 것이니라.

[밧다] 어머니, 확신을 가지고 그 의취를 말씀하셨으니, 어머니, 생각건대 당신께는 저에 대한 애착이 없습니다.

[밧다의 어머니] 어떠한 형성된 것들에 대해서든 낮거나 높거나 중간이건 간에, 아주 작은, 또는 원자의 크기라도 결코 나에게 애착은 없다.

[밧다] 나는 그녀의 말씀, 어머니의 가르침을 듣고 진리에 대한 외경을 얻어 멍에로부터의 안온에 도달했다. 어머니로부터 자극받아 그래서 나는 노력을 기울여 밤낮으로 게으름이 없었으니 최상의 적멸에 도달했다.(『테리가타』 제9장 「밧다의 어머니 장로니의 시」)

.

밧다의 어머니는 자식의 성취를 위해 헌신하는 맹모도 아니고 자식의 매니저인 헬리콥터 맘도 아니었다. 높은 깨달음을 성취한 그녀는 자신을 결코 밧다의 어머니로 정체화하지 않았다. 밧다의 어머니는 밧다의 어머니이면서 밧다의 어머니가 아니었다. 비구니 밧다의 어머니를 통해 우리는 젠더로서의 ‘남자, 여자’의 정체성에 구속되지 않을 뿐만이 아니라 핏줄로 얽힌 ‘어머니, 자식’ 관계의 애착마저 벗어버리고 대자유인이 된 여성 수행자를 만난다. 밧다의 어머니는 모성에 대한 통념을 가뿐히 뛰어 넘는다. 붓다가 라훌라에게 한 것처럼 밧다의 어머니 역시 밧다의 정진을 독려하여 최상의 열반으로 이끈 스승이었다. 아마도 밧다의 어머니는 아들 밧다만이 아니라 가르침을 구하는 사람들을 멍에로부터 벗어난 안온으로 이끄는 훌륭한 스승이었을 것이다.

 

전국비구니회(여성신문)

 

 

여성 수행자들의 학교, 비구니 승가

 

개인으로서 여성들은 독자적 목소리를 낼 수 없는 시대였다. 이 여성 철학자들이 시대의 한계에 갇히지 않고 자신의 목소리를 남길 수 있었던 것은 그녀들이 뛰어난 능력을 가졌기 때문만은 아니었다. 무엇보다 여성 출가자들의 수행을 돕는 공동체가 잘 조직되어 있었기 때문에 가능한 일이었다. 붓다의 시대로부터 물적 토대와 교육시스템을 갖춘 비구니 승가가 존재했기 때문에 이들 여성 출가자들은 가정과 사회의 의무와 구속에서 벗어나 수행 생활에 온전히 집중하며 탁월한 성취를 이룩할 수 있었다.

 

붓다에게는 뛰어난 비구 제자들이 많았다. 사리뿟따, 목갈라나, 마하깟싸빠와 아난다 등. 그들의 출가와 수행에 얽힌 이야기는 널리 알려져 있다. 우리는 그들이 어떤 삶을 살았는지를 앎으로써 깊은 감동을 받는다. 그런데 붓다의 여성 제자들은 그렇게 널리 알려져 있지도 않거니와 경전에서도 쉽사리 만나기 어렵다.(왜 그렇게 되었는지가 다음 글의 주제다.) 그러나 붓다는 뛰어난 여성 제자들을 많이 길러냈다. 그랬기 때문에 그녀들이 해탈의 기쁨을 노래한 『테리가타』가 우리에게 전해질 수 있었다. 『테리가타』의 시를 통해 그 존재감을 드러내는 비구니들 역시 사리뿟따 등에 못지않은 뛰어난 스승이었고 설법자이고 명상가들이었다.

 

나는 수행녀들의 허스토리와 그녀들의 이름을 알게 되어 기쁘고 벅차다. 이 글에서 소개한 테리까, 끼사 꼬따미, 쏘마 그리고 그 외에도 여러 난관을 뚫고 스스로를 구원한 여성들의 이야기가 더 많은 사람들에게 알려졌으면 좋겠다. 영적인 성취를 이룬 여성들의 존재는 우리의 상상력과 영감을 자극하고, 우리를 구속하는 안팎의 한계를 넘어 우리의 잠재력을 끌어내고, 더 많은 가능성을 꿈꾸게 하기 때문이다.

 

댓글 5
  • 2023-07-23 11:48

    수행녀... 번다한 일상 속에서 영적 성취를 이룬 여성들의 이야기, 잘 읽었습니다~
    이들의 이야기는 출가수행만이 수행이 아니다, 일상과 수행이 따로 떨어져 있지 않고 깨달음 역시 멀리 있지 않다는 걸 보여주네요.
    솔직히 제겐 너무나 요원한 이야기처럼 느껴지지만, 그럼에도 불구하고 "우리를 구속하는 안팎의 한계를 넘어 잠재력을 끌어내고 더 많은 가능성을 꿈꾸게 한다"는 말을 마음에 담아두겠습니다.

  • 2023-07-24 11:29

    모성과 애착에서 벗어난 어머니
    감동입니다^^
    이글을 쓰면서 느꼈을 요요샘의 마음을 쪼끔은 알것도 같네요
    다음글도 또 기대됩니다
    왜 그랬을까요? ㅎ

  • 2023-07-26 23:30

    회사에 다니면서 수많은 사람들을 만났는데 그 중 한 사람의 회사 이름이 '라훌라' 였어요. 아마도 그 회사 이름을 만든 분은 불교에 대해 어느 정도 지식이 있었나봅니다. 저는 그때 불교 까막눈이었으니 '그냥 그런가보다' 했었지요.ㅎ

    어머니와 자식이면서 어머니와 자식관계를 뛰어넘어 어머니와 자식이 아닌 경지에 오르고 싶습니다....ㅠㅠㅠ

  • 2023-07-29 09:19

    수유하면서 이 글을 읽는데 육아로 지친 마음에 새로운 에너지로 채워지네요.

    살면서 이렇게 집에만 있었던 적이 없었는데 매일 반복되는 일상과 집안일을 하는 것 만큼 대단한 수행이 없는 거 같다는 생각이 들더라고요 ㅎㅎ 일상의 수행자 테리까로부터 오늘 하루도 깨어 있을 수 있는 지혜를 얻고 싶네요.

    저도 자식과 부모의 관계를 넘어서 독립적인 개인으로 관계 맺고 싶은데 밧다의 어머니처럼 서로 깨달음을 주는 존재가 될 수 있을지..? ㅎㅎㅎ 저의 수행에 달려있겠죠??

    이렇게 육아를 하니 불교 공부와 인연이 있다는 것 자체 만으로도 감사한 마음이 드네요. 글 너무 잘 읽었습니다 🙂

  • 2023-08-11 06:29

    와 다음 글이 기대됩니다!
    출가가 수행의 시작이 아니라 끝이었다는 게 너무 멋지네요... 크

세미나 에세이 아카이브
“Probably Approximately Correct - 기계학습을 다시 묻다” Leslie Valiant 2013 作, 이광근 2021 譯   도대체 컴퓨터는 어떻게 작동하나?      컴퓨터 프로그램을 짤 때 제일 난감한 경우가 내가 짠 프로그램이 ‘Looping 도는 경우이다(끝나지 않음)’. 운영자에게 killed된 프로그램을 들여다 보면, 논리적으로 이상이 없는데(반드시 이상이 있다!), 루핑이라는 것이다. 루핑됨을 미리 알 수 있으면 좋으련만 그럴 수 없다. 도대체 컴퓨터가 어떻게 작동되길래 그러는지 알고 싶어지는 순간이다.    S/W는 언어와 논리로 만들어 진다. 결과물을 내고 싶은 것을 언어로 표현하고, 그것을 논리적으로 프로그래밍하는 것이다. 개와 고양이를 구분하라는 문제를 생각해 보자. 먼저 언어(문장)로써 그것들을 구분하는 특징들을 적는다. 그런 뒤에 그 특징들을 입력값으로 하여 논리적인 추론을 만들어 프로그래밍한다. 그런데, 그 구분을 문장으로 만드는 것이 의외로 쉽지 않다. 소위 특징 설계(Feature Design)문제이다. 2000년대에도 해결되지 않았다. 그런데, 2014년 구글은 6.65%의 에러율로 고양이를 식별하였고(인간은 5.51% 에러), 2019년 MS사는 152개 층 구조로 천만건의 유투브를 학습시킨 결과 에러율을 3.56% 로 낮추었다. 그들은 기계학습(machine learning) 방법을 적용하였다고 말한다. 기계·학습? 먼저 기계적이란 어떤 것인가?   계산 가능함: 기계적 계산이란 무엇인가?     생명체들은 어떻게 정보를 처리하고 행동을 결정하는 걸까? 튜링이 1936년에 논문(*)을 내기 전까지는 인류는 이 문제에 대해서 정의조차 하지 못하였다. 1928년 수학자인 David Hilbert는 수학명제를 입력으로 받아서 참과 거짓을 기계적으로 판단하는 소위, ‘수리명제 자동생성 문제’를 낸다. 튜링은 그것은 ‘불가능하다’라는 결론을 손쉬운 구체적인...
“Probably Approximately Correct - 기계학습을 다시 묻다” Leslie Valiant 2013 作, 이광근 2021 譯   도대체 컴퓨터는 어떻게 작동하나?      컴퓨터 프로그램을 짤 때 제일 난감한 경우가 내가 짠 프로그램이 ‘Looping 도는 경우이다(끝나지 않음)’. 운영자에게 killed된 프로그램을 들여다 보면, 논리적으로 이상이 없는데(반드시 이상이 있다!), 루핑이라는 것이다. 루핑됨을 미리 알 수 있으면 좋으련만 그럴 수 없다. 도대체 컴퓨터가 어떻게 작동되길래 그러는지 알고 싶어지는 순간이다.    S/W는 언어와 논리로 만들어 진다. 결과물을 내고 싶은 것을 언어로 표현하고, 그것을 논리적으로 프로그래밍하는 것이다. 개와 고양이를 구분하라는 문제를 생각해 보자. 먼저 언어(문장)로써 그것들을 구분하는 특징들을 적는다. 그런 뒤에 그 특징들을 입력값으로 하여 논리적인 추론을 만들어 프로그래밍한다. 그런데, 그 구분을 문장으로 만드는 것이 의외로 쉽지 않다. 소위 특징 설계(Feature Design)문제이다. 2000년대에도 해결되지 않았다. 그런데, 2014년 구글은 6.65%의 에러율로 고양이를 식별하였고(인간은 5.51% 에러), 2019년 MS사는 152개 층 구조로 천만건의 유투브를 학습시킨 결과 에러율을 3.56% 로 낮추었다. 그들은 기계학습(machine learning) 방법을 적용하였다고 말한다. 기계·학습? 먼저 기계적이란 어떤 것인가?   계산 가능함: 기계적 계산이란 무엇인가?     생명체들은 어떻게 정보를 처리하고 행동을 결정하는 걸까? 튜링이 1936년에 논문(*)을 내기 전까지는 인류는 이 문제에 대해서 정의조차 하지 못하였다. 1928년 수학자인 David Hilbert는 수학명제를 입력으로 받아서 참과 거짓을 기계적으로 판단하는 소위, ‘수리명제 자동생성 문제’를 낸다. 튜링은 그것은 ‘불가능하다’라는 결론을 손쉬운 구체적인...
가마솥
2023.08.29 | 조회 134
세미나 에세이 아카이브
  감정을 어떻게 다룰 것인가? 후기 스토아학파 에픽테토스Epiktetos의 《강의Discourses》       죽음은 전혀 두려운 것이 아니다 내가 스토아학파 그중에서도 에픽테토스의 글을 읽고 꽂힌 부분은 가령 이런 구절이다.     사람들을 심란하게 하는 것은 그 사안 자체가 아니라, 그 사안에 대한 그들의 판단이다. 예를 들어 죽음은 전혀 두려운 것이 아니다. 그렇지 않다면 소크라테스에게도 역시 그렇게 여겨졌을 것이지만, 죽음에 관한 믿음, 즉 두렵다는 것, 바로 이것이 두렵기 때문이다. 그렇기 때문에 우리가 방해를 받거나 심란하거나 슬픔을 당할 때에도 결코 다른 사람을 탓하지 말고, 나 자신을, 즉 나 자신의 판단을 탓해야만 한다.(<앵케이리디온Encheiridion>, 제5장)   *헬라스어로 ‘획득된’이라는 의미인 에픽테토스(AD.55?~135?)는 노예 출신으로 한쪽 다리가 불구였다고 한다. 후기 스토아학파의 대표 주자인 그의 작품으로 남아 있는 《강의/담화록》(4권)과 《앵케이리디온(핸드북)》(52개의 짧은 장)은 제자인 아리아누스Arrianus가 그의 강의를 들으며 필기한 것을 출판한 것이다. 여기서 인용한 책은 《에픽테토스 강의 1.2/ 3.4/ 엥케이리디온》(김재홍 옮김, 그린비, 2023)이다.     에픽테토스의 《강의》는 대개 대화의 형식을 띠는데, 제자의 질문에 에픽테토스가 답을 한다. 제자의 질문은 가족, 직업, 가난, 명성에서 병이나 죽음에 관한 질문에까지 다양하다. 잘 짜여진 대화록은 아니지만 어쨌든 이런 형식으로 이뤄진 강의에서, 결국 에픽테토스가 말하고자 하는 바는 그 일을 하기로 결심하고 실행에 옮기는 것이 내게 달려 있는가 그렇지 않으면 내가 통제할 수 없는 것에서 비롯되었음을 아는가 였다.   나는 책을 읽으면서 대부분 내가 갱년기를 보내면서 내...
  감정을 어떻게 다룰 것인가? 후기 스토아학파 에픽테토스Epiktetos의 《강의Discourses》       죽음은 전혀 두려운 것이 아니다 내가 스토아학파 그중에서도 에픽테토스의 글을 읽고 꽂힌 부분은 가령 이런 구절이다.     사람들을 심란하게 하는 것은 그 사안 자체가 아니라, 그 사안에 대한 그들의 판단이다. 예를 들어 죽음은 전혀 두려운 것이 아니다. 그렇지 않다면 소크라테스에게도 역시 그렇게 여겨졌을 것이지만, 죽음에 관한 믿음, 즉 두렵다는 것, 바로 이것이 두렵기 때문이다. 그렇기 때문에 우리가 방해를 받거나 심란하거나 슬픔을 당할 때에도 결코 다른 사람을 탓하지 말고, 나 자신을, 즉 나 자신의 판단을 탓해야만 한다.(<앵케이리디온Encheiridion>, 제5장)   *헬라스어로 ‘획득된’이라는 의미인 에픽테토스(AD.55?~135?)는 노예 출신으로 한쪽 다리가 불구였다고 한다. 후기 스토아학파의 대표 주자인 그의 작품으로 남아 있는 《강의/담화록》(4권)과 《앵케이리디온(핸드북)》(52개의 짧은 장)은 제자인 아리아누스Arrianus가 그의 강의를 들으며 필기한 것을 출판한 것이다. 여기서 인용한 책은 《에픽테토스 강의 1.2/ 3.4/ 엥케이리디온》(김재홍 옮김, 그린비, 2023)이다.     에픽테토스의 《강의》는 대개 대화의 형식을 띠는데, 제자의 질문에 에픽테토스가 답을 한다. 제자의 질문은 가족, 직업, 가난, 명성에서 병이나 죽음에 관한 질문에까지 다양하다. 잘 짜여진 대화록은 아니지만 어쨌든 이런 형식으로 이뤄진 강의에서, 결국 에픽테토스가 말하고자 하는 바는 그 일을 하기로 결심하고 실행에 옮기는 것이 내게 달려 있는가 그렇지 않으면 내가 통제할 수 없는 것에서 비롯되었음을 아는가 였다.   나는 책을 읽으면서 대부분 내가 갱년기를 보내면서 내...
자작나무
2023.08.28 | 조회 203
세미나 에세이 아카이브
아타락시아를 향해 『에피쿠로스의 네 가지 처방』을 읽고   쾌락에 대한 오해 고대 그리스 철학자 에피쿠로스는 행복한 삶의 시작이자 끝은 쾌락이라고 했다. 쾌락이라니... 아마도 사람들은 쾌락이 고상한 철학자의 입에서 나올 말은 아니라고 생각할 것이다. 쾌락이라는 단어에서 연상되는 향락, 방탕함 등을 자연스레 떠올리면 말이다. 그렇지만 사전적 의미의 쾌락은 유쾌하고 즐거움. 또는 그런 느낌을 뜻한다. 그리고 사실 에피쿠로스가 말한 쾌락도 이런 의미이다. 그런데 어떤 이유에서인지는 모르겠지만 본래 에피쿠로스의 철학을 가리키는 말이었던 ‘에피쿠로스주의’가 전용되어 감각적 향락주의, 즉 육체 탐닉이라든가 식도락 등을 의미하게 되었다고 한다.(네이버)   실제 에피쿠로스 당대에도 에피쿠로스에 대한 비판이 많았다. 고대 그리스 철학자 티몬은 에피쿠로스에 대해 “자연철학자 중에서 가장 후안무치한 자, 사모스에서 온 문법학교 교사, 모든 살아 있는 것 중에서 가장 완고하고 다루기 힘든 자”라고 평했다. 에피쿠로스에 적대적이었던 스토아학파 철학자 디오티모스는 에피쿠로스가 50통의 음란한 서신을 썼다고 신랄하게 비판했다. 에픽테토스는 에피쿠로스를 음탕한 말을 늘어놓는 자라고 맹렬히 비난했다. 심지어 에피쿠로스 학교에서 수학하다가 중도에 떠난 티모크라테스는 에피쿠로스가 방탕하고 사치스러운 삶 때문에 하루에 두 번이나 토했고, 밤늦게까지 벌어지는 철학 토론과 비밀 회합을 자신도 지긋지긋해했다고 주장했다. 비난의 이유 중 매춘도 빠지지 않았다. 물론 이런 비난은 에피쿠로스의 쾌락의 의미를 알면 믿을 수 없는 것이지만, 이렇게 많은 사람들이 비난을 퍼부어댄 이유는 아마도 에피쿠로스학파가 ‘정원’을 꾸려 공동체생활을 했기 때문이지 않을까? 신비주의는 때로 황당한 소문을 낳게 마련이니까. 그리고 오히려 이러한 많은...
아타락시아를 향해 『에피쿠로스의 네 가지 처방』을 읽고   쾌락에 대한 오해 고대 그리스 철학자 에피쿠로스는 행복한 삶의 시작이자 끝은 쾌락이라고 했다. 쾌락이라니... 아마도 사람들은 쾌락이 고상한 철학자의 입에서 나올 말은 아니라고 생각할 것이다. 쾌락이라는 단어에서 연상되는 향락, 방탕함 등을 자연스레 떠올리면 말이다. 그렇지만 사전적 의미의 쾌락은 유쾌하고 즐거움. 또는 그런 느낌을 뜻한다. 그리고 사실 에피쿠로스가 말한 쾌락도 이런 의미이다. 그런데 어떤 이유에서인지는 모르겠지만 본래 에피쿠로스의 철학을 가리키는 말이었던 ‘에피쿠로스주의’가 전용되어 감각적 향락주의, 즉 육체 탐닉이라든가 식도락 등을 의미하게 되었다고 한다.(네이버)   실제 에피쿠로스 당대에도 에피쿠로스에 대한 비판이 많았다. 고대 그리스 철학자 티몬은 에피쿠로스에 대해 “자연철학자 중에서 가장 후안무치한 자, 사모스에서 온 문법학교 교사, 모든 살아 있는 것 중에서 가장 완고하고 다루기 힘든 자”라고 평했다. 에피쿠로스에 적대적이었던 스토아학파 철학자 디오티모스는 에피쿠로스가 50통의 음란한 서신을 썼다고 신랄하게 비판했다. 에픽테토스는 에피쿠로스를 음탕한 말을 늘어놓는 자라고 맹렬히 비난했다. 심지어 에피쿠로스 학교에서 수학하다가 중도에 떠난 티모크라테스는 에피쿠로스가 방탕하고 사치스러운 삶 때문에 하루에 두 번이나 토했고, 밤늦게까지 벌어지는 철학 토론과 비밀 회합을 자신도 지긋지긋해했다고 주장했다. 비난의 이유 중 매춘도 빠지지 않았다. 물론 이런 비난은 에피쿠로스의 쾌락의 의미를 알면 믿을 수 없는 것이지만, 이렇게 많은 사람들이 비난을 퍼부어댄 이유는 아마도 에피쿠로스학파가 ‘정원’을 꾸려 공동체생활을 했기 때문이지 않을까? 신비주의는 때로 황당한 소문을 낳게 마련이니까. 그리고 오히려 이러한 많은...
토용
2023.08.28 | 조회 147
한문이예술
한자의 바다에서 작고小 약한 것弱을 길어올리기   동은     1. 수많은 한자들 중에서     오늘날 일상에서 사용되고 있는 한자는 2천자에서 5천자 정도 된다. 3천자 정도의 간극이 있긴 하지만 이미 30개 남짓 되는 한글이나 알파벳에 비하면 과하게 많다고 할 수 있다. 그런데 한자가 사용된 6000년이 넘는 시간동안 만들어졌다가 사라진 문자만 해도 5만자(!)가 넘고, 같은 뜻을 가졌지만 형태가 다른 한자들까지 더하면 8만자(!!)가 넘는다고 한다. 이쯤되면 한자를 만든 사람도 무슨 한자가 있는지 절대 모를 수준이다. 게다가 새로운 형태의 갑골문이 계속해서 발견되고 있다고 하니 한자의 갯수는 계속해서 늘어나고 있는 것이나 마찬가지다. 정말이지 한자에 대해서 알면 알수록 어떻게 지금까지 계속 사용되는지 신기할 따름이다.     그런데 내가 <한문이 예술>에서 아이들에게 수업을 하는 한자는 한 시즌에 겨우 10자 정도밖에 되지 않는다. 사실 10자도 많은 편이다. 하루에 하나씩 외워도 10년을 외워야 할 수준인데 이렇게 비효율적으로 수업을 해도 괜찮은지 가끔 걱정이 된다. 하지만 그럴 때마다 아무리 생각해도 괜찮다는 확신이 든다. 내가 아이들에게 전하고 싶은 이야기는 한자의 갯수와는 아무 상관 없으니 말이다.     그야말로 한자의 바다!       2.  수업을 하다보면     아이들과 함께 있다보면 ‘날것’이 드러나는 상황이 종종 펼쳐진다. <한문이 예술>에는 어릴 때부터 동네에서 자주 보며 가까워진 친구들이 함께 오는 경우가 많다. 같은 학교를 다니거나, 학원을 다니면서 자연스럽게 친해진 뒤에 <한문이 예술>에 오게...
한자의 바다에서 작고小 약한 것弱을 길어올리기   동은     1. 수많은 한자들 중에서     오늘날 일상에서 사용되고 있는 한자는 2천자에서 5천자 정도 된다. 3천자 정도의 간극이 있긴 하지만 이미 30개 남짓 되는 한글이나 알파벳에 비하면 과하게 많다고 할 수 있다. 그런데 한자가 사용된 6000년이 넘는 시간동안 만들어졌다가 사라진 문자만 해도 5만자(!)가 넘고, 같은 뜻을 가졌지만 형태가 다른 한자들까지 더하면 8만자(!!)가 넘는다고 한다. 이쯤되면 한자를 만든 사람도 무슨 한자가 있는지 절대 모를 수준이다. 게다가 새로운 형태의 갑골문이 계속해서 발견되고 있다고 하니 한자의 갯수는 계속해서 늘어나고 있는 것이나 마찬가지다. 정말이지 한자에 대해서 알면 알수록 어떻게 지금까지 계속 사용되는지 신기할 따름이다.     그런데 내가 <한문이 예술>에서 아이들에게 수업을 하는 한자는 한 시즌에 겨우 10자 정도밖에 되지 않는다. 사실 10자도 많은 편이다. 하루에 하나씩 외워도 10년을 외워야 할 수준인데 이렇게 비효율적으로 수업을 해도 괜찮은지 가끔 걱정이 된다. 하지만 그럴 때마다 아무리 생각해도 괜찮다는 확신이 든다. 내가 아이들에게 전하고 싶은 이야기는 한자의 갯수와는 아무 상관 없으니 말이다.     그야말로 한자의 바다!       2.  수업을 하다보면     아이들과 함께 있다보면 ‘날것’이 드러나는 상황이 종종 펼쳐진다. <한문이 예술>에는 어릴 때부터 동네에서 자주 보며 가까워진 친구들이 함께 오는 경우가 많다. 같은 학교를 다니거나, 학원을 다니면서 자연스럽게 친해진 뒤에 <한문이 예술>에 오게...
동은
2023.08.18 | 조회 557
기린의 공동체가 양생이다
1.포정해우   처음 소를 잡을 때는 소가 통째로만 보였습니다. 삼 년이 지나자 소의 갈라야 할 부분이 보였습니다. 지금은 소를 눈으로 보지 않고 신묘한 기운으로 대합니다. 감각기관은 활동을 멈추고 신묘한 기운이 움직이는 것이지요. 다시 말해 소의 자연스러운 결에 따라, 살과 뼈 사이의 빈틈에 칼을 넣어 움직이며, 원래 나 있는 길을 따라 나아가는 것입니다. (.....) 지금 제 칼은 십구 년이 되었습니다. 그동안 소를 수천 마리나 잡았지만 이 칼은 막 숫돌에서 갈아낸 듯 예리합니다. 소의 뼈마디에는 틈이 있고 칼날은 더없이 얇아 두께가 없습니다. 두께 없는 것이 틈새로 들어가니 넓은 공간에서 칼이 자유자재로 놀고도 남는 것입니다. 이 때문에 십구 년이 지났어도 이 칼은 막 숫돌에서 갈아낸 듯 예리합니다. <낭송장자> 84쪽     「양생주」 2장은 소를 잡는 백정 포정의 이야기다. 포정은 자신이 소를 잡는 일에 대해 기술로 한 것이 아니라 도(道)로 했다고 했다. 처음 보았을 때 통째로 보였던 소가 삼 년이 지나자 갈라야 할 부분이 보이는 변화였다. 포정은 그 시간동안 덩어리째 보이는 소를 분해하는 기술부터 습득하면서 기술에 그치지 않고 소를 이해하기에까지 나아갔다. 즉, 소의 생김새라든가 섭생, 생명의 주기 등이었다. 이를 통해 소로 태어난 생명이 살아가는 이치를 통해 도의 운행을 깨우치게 되었다. 이렇게 깨우친 도로 십구 년이나 이어진 포정의 일은 여느 백정의 일과는 다른 길(道)을 낸 것이다.         포정이 수천 마리의 소를 잡으면서...
1.포정해우   처음 소를 잡을 때는 소가 통째로만 보였습니다. 삼 년이 지나자 소의 갈라야 할 부분이 보였습니다. 지금은 소를 눈으로 보지 않고 신묘한 기운으로 대합니다. 감각기관은 활동을 멈추고 신묘한 기운이 움직이는 것이지요. 다시 말해 소의 자연스러운 결에 따라, 살과 뼈 사이의 빈틈에 칼을 넣어 움직이며, 원래 나 있는 길을 따라 나아가는 것입니다. (.....) 지금 제 칼은 십구 년이 되었습니다. 그동안 소를 수천 마리나 잡았지만 이 칼은 막 숫돌에서 갈아낸 듯 예리합니다. 소의 뼈마디에는 틈이 있고 칼날은 더없이 얇아 두께가 없습니다. 두께 없는 것이 틈새로 들어가니 넓은 공간에서 칼이 자유자재로 놀고도 남는 것입니다. 이 때문에 십구 년이 지났어도 이 칼은 막 숫돌에서 갈아낸 듯 예리합니다. <낭송장자> 84쪽     「양생주」 2장은 소를 잡는 백정 포정의 이야기다. 포정은 자신이 소를 잡는 일에 대해 기술로 한 것이 아니라 도(道)로 했다고 했다. 처음 보았을 때 통째로 보였던 소가 삼 년이 지나자 갈라야 할 부분이 보이는 변화였다. 포정은 그 시간동안 덩어리째 보이는 소를 분해하는 기술부터 습득하면서 기술에 그치지 않고 소를 이해하기에까지 나아갔다. 즉, 소의 생김새라든가 섭생, 생명의 주기 등이었다. 이를 통해 소로 태어난 생명이 살아가는 이치를 통해 도의 운행을 깨우치게 되었다. 이렇게 깨우친 도로 십구 년이나 이어진 포정의 일은 여느 백정의 일과는 다른 길(道)을 낸 것이다.         포정이 수천 마리의 소를 잡으면서...
기린
2023.08.17 | 조회 288
글쓰기