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요요와불교산책16회] 수행은 고행이 아니다

요요
2023-09-20 20:35
436

 

수행은 고행이 아니다

 

아, 우리는 아주 안락하게 산다. 원한 품은 자들 속에 원한 없이, 원한을 품은 사람들 사이에서 우리는 원한을 여읜 자로 살아간다. 아, 우리는 아주 안락하게 산다. 우리의 것이라고는 결코 없어도, 광음천 세계의 천신들처럼, 기쁨을 음식으로 삼아 지내리라.(『법구경』 197, 200)

 

 

고행을 멈추다

 

보리수 아래에서 위대한 깨달음을 얻기 전 붓다는 어떻게 수행했을까? 붓다의 수행에 대한 가장 큰 오해 중 하나가 엄청난 고통스런 수행의 결과 깨달음에 이르렀다는 것이다. 먹지도 않고 잠을 자지도 않고 피가 마르고 살이 마르는 고행을 해야지만 깨달음에 이를 수 있다면, 우리 같은 평범한 중생에게 깨달음이란 언감생심 꿈도 꿀 수 없는 일이 된다. 그러나 이미 말했듯이 이것은 오해다.

 

간다라 미술품 중에 유명한 고행상이 있다. 피골이 상접하여 갈비뼈가 그대로 드러난 붓다상이다. 많은 사람들이 이 고행상을 사랑하고, 인간의 한계 끝까지 정진한 붓다에게 경의를 표한다. 깨닫기 전의 붓다가 한 고행은 그야말로 상상 초월의 것이었다. 하루에 곡식 한 톨로 연명하는 곡기를 끊는 수행의 결과 문제의 고행상처럼 등뼈과 창자가 들러붙었다. 영양실조 상태에서 손으로 문지르기만 해도 사지의 털이 몸에서 떨어져 나갔다. 몇 개월이고 잠을 자지 않아 피부와 눈은 그 빛을 잃었고 대소변을 보려고 하면 머리가 앞으로 꼬꾸라졌다. 오랫동안 호흡을 멈추는 수행을 하다 보니 힘센 사람이 머리를 가죽끈으로 조이는 듯한 극심한 두통과 이명에 시달렸다.

 

일반적으로 붓다의 생애의 주요 장면을 설명하는 도식이 팔상성도(八相成道)이다. 도솔천으로부터 어머니의 자궁에 드는 입태(1)와 룸비니 동산에서의 출생(2), 성밖에서 생로병사의 고통을 마주하는 사문유관(四門遊觀)(3), 고뇌 끝에 집을 떠나는 출가(4), 설산에서의 고행(5), 보리수 아래에서의 깨달음(6), 다섯 비구에 대한 첫 설법(7), 사라쌍수 아래에서의 열반(8)이 그것이다. 깨닫기 전 고행이 팔상성도에 포함된 것을 보면 그의 고행이 얼마나 많은 사람들에게 깊은 감명을 주었는지 알 수 있다. 그러나 당시 출가 수행자 누구도 경험한 적 없는 강도높은 수행을 6년간이나 이어갔음에도 붓다는 깨달음을 얻지 못했다. 고행은 깨달음으로 이끄는 길이 아니었다. 극단까지 고행을 밀어붙였던 붓다는 마침내 회의했다. “깨달음에 이르는 다른 길이 있지 않을까?”

 

 

 

마음의 집중과 통찰로

 

고행은 괴로움으로부터의 해방이 아니라 괴로움의 끝없는 반복이었다. 붓다는 고행이 올바른 수행이 아니라는 것에 대해 숙고하고 고행을 중단하기로 결심했다. 붓다는 출가하던 그 날처럼 다시 출발점에 섰다. 그간의 수행에 대한 미련을 내려놓고 ‘깨달음에 이르는 다른 길’을 찾기로 한 그때 어떤 기억이 떠올랐다. 어린 시절, 아버지를 따라간 농경제에서 잠부나무 그늘 아래 선정에 들었던 기억이었다. 아마도 고대 인도의 명상적 문화의 전통 속에서 가능한 경험이었겠지만 그때 느꼈던 기쁨과 평화를 떠올린 것이다. 그동안 여러 고행을 해 온 붓다는 직감적으로 알았다. 몸과 마음을 괴롭히는 것이 아니라 바로 그와 같은 기쁨과 평화를 통해 깨달음에 이르는 길을 찾을 수 있으리라는 것을! 그 순간을 붓다는 이렇게 회고한다.

 

이러한 생각이 떠올랐습니다. ‘감각적 쾌락에 대한 욕망이나 악하고 불건전한 상태와는 관계없는 즐거움에 대하여 두려워할 필요가 있을까?’ 그래서 생각했습니다. ‘나는 감각적 쾌락에 대한 욕망이나 악하고 불건전한 상태와는 관계가 없는 즐거움에 대해서는 두려워할 필요가 없다.’(『맛지마니까야』 36 「삿짜까에 대한 큰 경」)

 

당대의 고행자들이 그랬듯이 붓다는 오랫동안 즐거움을 누리는 것을 피해왔다. 즐거움이란 감각적 쾌락이나 불선한 마음의 상태라고 보고, 수행자를 삿된 길로 이끄는 마라의 속삭임이라고 두려워했다. 그러나 세속적 즐거움과 다른 영적인 즐거움이 있다는 것을 깨닫자 그간 붓다를 지배해왔던 통념과 두려움으로부터 자유로워질 수 있었다. 어떤 두려움도 없이 기꺼이 영적 즐거움을 누릴 수 있다고 생각함으로써 엄청나게 중요한 전환이 일어났다. 이 전환으로부터 붓다는 욕망을 억압하는 것이 아니라 욕망이 어떤 조건에서 일어나고 어떤 조건에서 사라지는가를 살피는 해방의 길, 중도의 길을 찾아냈다. 그것은 거대한 파도가 될 영적 혁명의 시작이었다. 이제 붓다는 강에 들어가 몸을 씻고 쇠약해진 몸을 회복하기 위해 쌀죽을 먹었다. 붓다가 고행주의를 버린 것을 알게 되자 함께 수행하던 동료들은 배신감을 느끼고 손가락질 하며 떠나갔다. 붓다는 혼자가 되었다.

 

팔상성도에는 이 전환의 장면이 포함되어 있지 않다. 그러나 나는 고행의 장면이 아니라 고행을 버리는 장면이야말로 붓다를 붓다로 만든 가장 위대한 순간이라고 생각한다. 붓다의 출가는 세속이 귀하게 여기는 부와 명예와 쾌락을 떠나는 것이었다. 그러나 출가의 목적이 실현되기 위해서는 첫 번째 떠남만으로는 충분하지 않았다. 당시 거의 모든 출가자들이 귀하게 여기던 고행으로부터 떠나는 두번째 떠남이 있어야 했다. 고행으로 피폐해진 몸을 회복한 붓다는 보리수 아래에 앉아 깨어있는 마음으로 분명히 알아차리며 호흡을 관찰하기 시작했다.

 

이제 나는 단단한 음식이나 쌀죽을 먹어 힘을 얻고, 감각적 쾌락에 대한 욕망을 여의고 악하고 불건전한 상태를 떠나서, 사유를 갖추고 숙고를 갖추어, 멀리 여읨에서 생겨나는 희열과 행복으로 가득한 첫 번째 선정을 성취했습니다. 그러나 나의 안에서 생겨난 그러한 즐거운 느낌은 나의 마음을 사로잡지 않았습니다.(『맛지마니까야』 36 「삿짜까에 대한 큰 경」)

 

선정이 점차 깊어지자 평온과 고요 속에서 마음은 ‘때묻지 않고 오염되지 않고 유연하고 유능하게 확립되어 흔들리지 않았다.’ 그렇게 탐욕과 성냄과 어리석음이 엷어지고 평정하고 동요 없는 상태가 되자 마음의 눈을 가리는 것이 없어진 만큼 통찰의 힘도 커졌다. 고요하고 집중된 마음은 번뇌의 발생과 소멸에 대한 앎으로 향했다. 붓다는 무상(無常)을 봄으로써 모든 것이 조건적이라는 것을 깨달았고 어디에도 ‘나’와 ‘나의 것’이라고 할만한 것이 없다는 것을 깨달았다. 그는 자아에 대한 집착으로부터 벗어났다. 마침내 생로병사의 두려움과 탐·진·치의 번뇌로부터 자유로운 자, 지혜의 눈으로 세상을 볼 수 있는 깨달은 자, 붓다가 되었다.

 

깨달음의 장소 보드가야에 세워진 대탑

 

 

와서 보라

 

언젠가 꼬살라국의 왕 빠세나디는 번다한 일상에 지쳤을 때 잠시 머리를 식히기 위해 왕궁으로부터 멀리 떨어진 숲으로 갔다. 그런데 숲의 아름다운 정경을 보자 불현듯 숲에서 명상하며 온몸으로 기쁨을 표현하며 사는 붓다의 제자들이 떠올랐다. 무소불위의 권력을 쥐었지만 미래에 대한 두려움과 불안에서 벗어나지 못하는 자신과 달리 모든 것을 보시와 탁발에 의존함에도 불구하고 평화와 안락을 누리는 수행자들의 행복이 대비되었기 때문이었다. 그는 수레를 돌려 붓다를 찾아갔다. 그리고 붓다를 만나 경외하는 마음으로 자신에게 일어난 생각을 털어놓았다.

 

세존이시여, 여기에서 수행승들이 미소를 짓고, 즐거워하고, 참으로 기뻐하고, 감관이 청정하고, 평안하고, 두려움이 없고, 다른 사람들이 주는 것으로 살고, 사슴처럼 평화로운 마음으로 지내는 것을 보니 세존의 가르침 안에서, 차츰차츰 이루어지는 명상의 뛰어난 특징들을 깨닫고 있다고 생각합니다. (『맛지마니까야』 89 「진실에 대한 장엄의 경」)

 

빠세나디 왕의 말에서 우리는 명상적 삶에 대한 찬탄을 발견한다. 선정의 행복을 누리는 붓다의 제자들의 모습은 빠세나디 왕에게도 다른 수행자 집단과 확연히 달라 보였다. 바로 그렇게 즐거움을 누리는 모습 때문에 당시 붓다의 제자들을 향해 ‘몸은 닦지 않고 마음만 닦는 자들’이라는 비난이 퍼부어지기도 했다. 붓다는 이런 비난에 대해 반박하지 않았다. 오히려 선정으로 얻는 내면의 깊은 만족감이야말로 탁발 음식으로도 기쁨을 얻고, 나무 밑 처소에서도 안온하게 살고, 풀 섶을 깐 침구로도 만족하며 수행을 계속할 수 있는 힘이 된다고 말했다.

 

그렇다고 해서 붓다가 제자들에게 마음을 집중하는 명상[samādhi, 定]만 중시하고 명상법만을 가르친 것은 아니었다. 붓다가 고행을 버리는 전환의 순간에 생각한 것을 다시 환기해보자. 명상의 즐거움은 감각적 쾌락이나 다른 존재는 아랑곳 없이 자기 이익만 추구하는 불건전한 마음의 상태와는 관계없는 영적인 즐거움이었기에 추구할만한 가치가 있는 것이었다. 그것은 윤리적인 삶, 즉 계[sīla, 戒]를 지키는 삶을 토대로 한다. 계를 지키는 삶은 타자의 생명을 해치지 않고, 다른 존재의 고통과 행복에 관심을 갖는 일상의 윤리 바로 그것이었다.

 

또 감각적 쾌락이 우리를 애착하게 하는 것과 달리 명상은 애착을 내려놓는 지혜를 향한다. 물론 우리는 명상의 즐거움에도 쉽게 집착한다. 그러나 붓다는 명상의 즐거움조차 조건적으로 생겨나고 조건적으로 사라지는 것을 통찰하게 했고, 그럴 때 명상은 지혜의 완성, 통찰지[pannā, 慧]로 향하는 길이 된다. 그러므로 붓다가 제자들을 깨달음으로 이끈 것은 ‘오직 명상’이 아니라 계·정·혜 삼학(三學)이었다. 만일 그렇지 않다면 명상 또한 일시적으로 마음의 안식을 얻는 것에 그치고 말 것이다. 그러므로 그 길에 충실했던 붓다의 제자들은 한결같이 입을 모아 스승의 가르침을 이렇게 찬탄했다.

 

벗이여, 나는 눈앞에 분명한 것을 제쳐두고 시간이 걸리는 것을 추구하는 것이 결코 아닙니다. 벗이여, 나야말로 시간이 걸리는 것을 제쳐두고 눈앞에 분명한 것을 추구합니다. 왜냐하면, 세존께서는 감각적 욕망이란 시간이 걸리는 것이고 괴로움과 절망이 가득하며 거기에는 많은 위험이 따른다고 하셨기 때문입니다. 그러나 이 법은, 세존에 의해서 잘 설해졌고, 지금 당장 눈앞에 드러나는 것이고, 시간이 걸리지 않는 것이고, '와서 보라'고 할 수 있는 것이고, (사람들을) 향상시키는 것이고, 슬기로운 이들이 스스로 알 수 있고 실천할 수 있는 것이기 때문입니다. (『쌍윳따니까야』 1:20 「사밋디경」)

 

 

 

 

수행은 기쁘고 즐겁다

 

붓다의 시대와 달리 오늘날은 누구도 고행의 미덕을 찬탄하지 않는다. 고통을 참고 견디느니 차라리 진통제를 찾는다. 그래서 그런가, 명상이 일시적으로 괴로움을 없애주는 힐링 상품처럼 취급되기도 한다. 명상이 영성의 외피를 쓴 세속화된 상품이 되는 것을 걱정하는 사람들도 많다. 그러나 명상이 영적 수행이라면, 그것은 단지 일시적인 위로가 아니라 전체적인 삶의 변화를 이루어내는 것일 수밖에 없다. 그러니 대증요법에 그치고 마는 것은 어떻게 아름답게 포장이 된다해도 영적 수행이라 부를 수는 없을 것이다.

 

사실 명상은 우리에게 어떤 물질적인 이득을 주지 못한다. 일용할 양식과 안전한 주거를 보장해 주는 것도 아니며, 질병의 고통과 노화와 죽음을 없애지도 못한다. 당장 기후위기와 전쟁의 위기와 방사능의 위협을 줄여주지도 못한다. 불평등을 낳는 사회구조를 바꾸지도 못한다. 그러나 명상은 아주 개인적인 것으로부터 사회적이고 우주적인 차원에 이르기까지 우리를 고통스럽게 만드는 것에 대해 우리가 얼마나 두려워하고 불안해하고 분노하고 미워하는지 또렷이 알아차리게 한다. 그 두려움과 불안 때문에 우리는 고통과 마주할 용기를 내지 못하는 경우가 많다. 우리는 분별과 망상에 지나지 않는 온갖 이야기를 지어내며 끊임없이 자기를 강화한다. 그러나 그것을 알아차릴 때 우리는 ‘나’에 대한 집착을 내려놓고 마음의 동요 없이 다른 존재들과 함께 하는 삶을 살필 수 있게 된다.

 

지난 몇 년간 지속적으로 명상하는 루틴을 통해 나는 비록 짧은 순간이나마 영적인 즐거움을 느끼고 때로 깊은 고요와 평화를 누릴 수 있었다. 그것은 일상에서 일어나는 온갖 감정과 번뇌를 가라앉히는 데 실질적인 도움이 되었다. 명상은 현세에서 효과가 있고 유익을 가져다 주는 수행이 틀림없다. 단지 호흡을 지켜보는 수행만으로 무상과 무아를 통찰하는 힘이 커지는 경험은 매우 놀라운 것이었다. 사실 붓다가 가르친 무상과 무아라는 개념을 지적으로 이해하는 것은 어렵지 않다. 그러나 그 단순해 보이기까지 한 가르침을 실제 삶에 적용하는 것은 전혀 다른 문제다. 그런데 수행은 내 속에서 일어나는 탐욕과 성냄과 어리석음을 알아차릴 수 있는 힘을 키워준다. 명상하는 동안의 마음의 고요와 평화도 기쁨을 주지만 일상에서의 작은 변화들이 일어날 때 그 만족감은 더욱더 깊어진다.

 

그러나 이 실감은 단지 경험적인 것에 그치지 않는다. 자신과 세계를 보는 인식의 구조를 바꾸는 실감이기 때문에 억지로 애쓰지 않아도 삶을 다른 시선으로 보게 된다. 그 효과로서 자아의식이 점점 힘을 잃고 약해진다. 이 과정은 모든 존재가 깊이 서로에게 상호의존하고 있다는 존재의 실상을 깨치는 과정이기도 하다. 우리는 더 윤리적인 삶을 살고, 더 마음의 평화를 누리고, 더 지혜로워질 수 있다. 그러니 어찌 붓다의 가르침을 따르는 수행자의 하루하루가 기쁨을 음식으로 삼는 광음천의 천신들처럼 즐겁고 행복하지 않을 수 있겠는가.

 

아, 우리는 아주 안락하게 산다. 원한 품은 자들 속에 원한 없이, 원한을 품은 사람들 사이에서 우리는 원한을 여읜 자로 살아간다. 아, 우리는 아주 안락하게 산다. 우리의 것이라고는 결코 없어도, 광음천 세계의 천신들처럼, 기쁨을 음식으로 삼아 지내리라.(『법구경』 197, 200)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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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이 글이 <요요와 불교산책>의 마지막 편이다. ‘공부한 것을 글로 쓰는 것이 문탁의 윤리’라는 친구들의 강압과 은근한 권유가 있었다. 그 응답으로 연재를 시작했다. 한 달에 한 편 쓰겠다는 약속을 수시로 어긴 탓에 열 여섯 편의 글을 올리는 데 2년이 걸렸다. 솔직히 글쓰기는 고행에 가까웠다. 작지만 소중한 깨달음의 순간을 만날 때 비로소 고행적 글쓰기는 명상적 글쓰기가 되었다. 그럼에도 매번 새로운 글을 올릴 때마다  부끄러웠다. 그러나 내가 쓴 글 역시 내 것이 아니라 한 시절의 이야기요 인연 조건의 산물이라는 것을 기꺼이 받아들이게 된 진전이 있었다. 연재를 마치게 되어 기쁘다.

 

그동안 읽어주셔서 감사합니다!!

 

 

댓글 8
  • 2023-09-21 06:49

    고생하셨습니다.
    그동안 독자로서도 즐거움이 컸습니다.

    잠시 쉬었다가 다음엔 또 다른 요요님의 글로 만나길 기대할게요

    박수2.jpg

  • 2023-09-24 12:40

    고행이 아닌 수행으로서의 명상이 일상와 괴리된 것이 아니라 통제할 수 없는 것을 통제하려는 마음을 놓아버리게 함으로써 일상을 더 잘 살게 하는 것임을 조금 알것 같습니다.
    붓다가 와서, 보라! 라고 하신 그 앎에 다가서는 길을 욕심내지 않고 천천히 가보고 싶습니다~

  • 2023-09-25 22:00

    와~~ 2년 동안 쓰셨군요
    그동안 잘 읽었습니다
    요요샘을 보면서 읽은 글이라 더 좋았던 것 같습니다
    저도 명상적 글쓰기가 되는 날을 기대해봐도...될까요? ㅎ

  • 2023-09-26 00:14

    아... 샘... 금요 클래식은 또 언제 하는 거에요 ?
    그 시간도 기쁨이었고 음식이 되어 배불렀습니다.
    그동안 불교 산책도 그랬답니다.
    감사 또 감사드립니다.

  • 2023-09-26 08:20

    일상의 윤리(계)가 바탕이 되는 기쁨과 즐거움의 수행이라니 능동의 기쁨이란 바로 이런것이겠군요. 연재를 마친 요요샘의 기쁨에 왠지 저도 기뻐집니다~

  • 2023-09-27 12:16

    잠시 쉬었다가 딴 글로 만나겠죠^^ 감사히 잘 읽었습니다~~

  • 2023-09-28 00:30

    그동안 잘 읽었습니다.
    샘 애쓰신거 이렇게 거저 먹어도 되나?
    잠시 그런 생각을 했습니다.^^

  • 2023-10-03 18:00

    요요쌤 글 기다리면서 읽었는데.. 마지막인걸 이제 알았네요ㅜ
    2년 동안 연재하셨다니 너무 대단합니다!! 애독자임을 이제야 밝힙니다!! ㅎㅎ

요요와 불교산책
  수행은 고행이 아니다   아, 우리는 아주 안락하게 산다. 원한 품은 자들 속에 원한 없이, 원한을 품은 사람들 사이에서 우리는 원한을 여읜 자로 살아간다. 아, 우리는 아주 안락하게 산다. 우리의 것이라고는 결코 없어도, 광음천 세계의 천신들처럼, 기쁨을 음식으로 삼아 지내리라.(『법구경』 197, 200)     고행을 멈추다   보리수 아래에서 위대한 깨달음을 얻기 전 붓다는 어떻게 수행했을까? 붓다의 수행에 대한 가장 큰 오해 중 하나가 엄청난 고통스런 수행의 결과 깨달음에 이르렀다는 것이다. 먹지도 않고 잠을 자지도 않고 피가 마르고 살이 마르는 고행을 해야지만 깨달음에 이를 수 있다면, 우리 같은 평범한 중생에게 깨달음이란 언감생심 꿈도 꿀 수 없는 일이 된다. 그러나 이미 말했듯이 이것은 오해다.   간다라 미술품 중에 유명한 고행상이 있다. 피골이 상접하여 갈비뼈가 그대로 드러난 붓다상이다. 많은 사람들이 이 고행상을 사랑하고, 인간의 한계 끝까지 정진한 붓다에게 경의를 표한다. 깨닫기 전의 붓다가 한 고행은 그야말로 상상 초월의 것이었다. 하루에 곡식 한 톨로 연명하는 곡기를 끊는 수행의 결과 문제의 고행상처럼 등뼈과 창자가 들러붙었다. 영양실조 상태에서 손으로 문지르기만 해도 사지의 털이 몸에서 떨어져 나갔다. 몇 개월이고 잠을 자지 않아 피부와 눈은 그 빛을 잃었고 대소변을 보려고 하면 머리가 앞으로 꼬꾸라졌다. 오랫동안 호흡을 멈추는 수행을 하다 보니 힘센 사람이 머리를 가죽끈으로 조이는 듯한 극심한 두통과 이명에 시달렸다.   일반적으로 붓다의 생애의 주요 장면을...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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초기 불교의 흑역사, 여성 차별적인 팔경법     깔라마들이여, 소문이나 전승이나 여론에 끄달리지 말고, 성전의 권위나 논리나 추론에도 끄달리지 말고, 상태에 대한 분석이나 견해에 대한 이해에도 끄달리지 말고 그럴듯한 개인적인 인상이나 ‘이 수행자가 나의 스승이다’라는 생각에도 끄달리지 마십시오. … 이러한 것들은 실천하여 받아들이면 유익하지 못하고 괴로움을 야기하는 것이라고 스스로 알게 되면 깔라마인들이여, 그 때에 그것들을 버리십시오. (『앙굿따라니까야』 「깔라마의 경」)   붓다가 가르침을 펴기 시작한 초기에 붓다를 따르는 출가수행자들은 모두 남자들 뿐이었다. 여성은 다만 재가 신자로만 붓다와 관계를 맺었다. 아마 당시로서는 마을에서 떨어진 한적한 숲에서 명상하고, 집도 절도 없이 걸식하는 길 위의 삶을 사는 여성의 존재는 생각할 수도 없었기 때문일 것이다. 고대 인도 사회에서 가족의 보호 밖에 있는 여성은 손쉽게 취할 수 있는 성적인 대상이자 남성을 유혹하는 위험한 존재로 인식되었다. 그러므로 여성이 집을 떠나 출가자가 된다는 것은 위험을 무릅쓰는 일이었다. 그러나 붓다의 설법을 듣고 구도의 삶을 살겠다고 결심을 한 남자들이 나온 것처럼 출가하여 수행자로 살겠다는 용감한 여자들이 나오는 것도 시간문제일 뿐이었다. 게다가 붓다가 이끄는 비구 승가는 세속에서의 신분과 나이에 의한 차별을 뛰어넘어 오직 출가한 햇수에 따라 예를 표하는 평등한 공동체의 이상을 보여주고 있었다. 대안적 공동체로서의 승가의 현존은 여성들에게도 ‘바람에 걸리지 않는 그물처럼, 진흙에 더러워지지 않는 연꽃처럼’ 살 수 있다는 희망을 갖게 했을 터. 과연 누가 출가한 여성 수행자로 첫발을 뗄 것인가,...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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2023.08.17 | 조회 292
요요와 불교산책
허스토리, 고대 인도의 여성 수행자들      마음이 잘 집중되어, 최상의 진리를 보는 자에게, 지혜가 항상 나타난다면, 여성의 존재가 무슨 상관이랴. (『테리가타』 3장 「쏘마 장로니의 시」)     고대 인도의 여성철학자들   기원전 4세기, 헬레니즘문명과 인도문명의 만남이 이루어졌다. 전쟁을 통해서였다. 당시 평화조약 체결을 위해 인도에 온 메가스테네스는 『인도견문록』에 ‘인도에는 여성 철학자들이 있어서 남성들과 난해한 것을 당당하게 논의한다’는 기록을 남겼다. 고대 그리스의 민주주의는 남성 시민들의 민주주의였고 철학도 남성들의 전유물이었다. 고대 인도에서도 여성들은 결코 존중받는 존재가 아니었다. 여성은 바라문교의 성전 『베다』를 학습할 수도 없었으므로 지식에 가까이 갈 수조차 없었다. 여성은 남성을 유혹하는 위험한 존재로 취급받았다. 여성들은 월경 전인 어린 나이에 조혼을 강요당했고, 자식을 낳지 못하면 비난 받았으며, 남자의 소유물이나 다를 바 없었다. 남편과 아들의 보호를 받지 못하는 여성은 폭력에 노출되어 있었다. 개인으로서의 여성이 독자적인 목소리를 낸다는 것은 상상하기도 어려운 사회였다. 그런데 메가스테네스가 본, 남성들과 난해한 것을 당당하게 논의하던 고대의 여성들, 그녀들은 누구였을까?   그녀들은 불교 승가로 출가한 비구니들이었다. 기원전 6~5세기, 붓다 재세시부터 최고의 깨달음을 얻은 다수의 비구니들이 존재했다. 그녀들은 여성에게 강요되는 사회적 의무에서 자유로운 존재로서 명상적 삶에 헌신하였고, 붓다의 가르침을 연구하고 토론하며, 제자들을 길러냈다. 다행히 우리는 그녀들의 삶을 『테리가타』를 통해 확인할 수 있다. 『테리가타』는 2,500년 전에 살았던 깨달은 여성들의 성취와 해탈의 기쁨을 노래한 시집이다. 여기에는 모두 73개의 시가 실려있다. 시 중에서 두...
허스토리, 고대 인도의 여성 수행자들      마음이 잘 집중되어, 최상의 진리를 보는 자에게, 지혜가 항상 나타난다면, 여성의 존재가 무슨 상관이랴. (『테리가타』 3장 「쏘마 장로니의 시」)     고대 인도의 여성철학자들   기원전 4세기, 헬레니즘문명과 인도문명의 만남이 이루어졌다. 전쟁을 통해서였다. 당시 평화조약 체결을 위해 인도에 온 메가스테네스는 『인도견문록』에 ‘인도에는 여성 철학자들이 있어서 남성들과 난해한 것을 당당하게 논의한다’는 기록을 남겼다. 고대 그리스의 민주주의는 남성 시민들의 민주주의였고 철학도 남성들의 전유물이었다. 고대 인도에서도 여성들은 결코 존중받는 존재가 아니었다. 여성은 바라문교의 성전 『베다』를 학습할 수도 없었으므로 지식에 가까이 갈 수조차 없었다. 여성은 남성을 유혹하는 위험한 존재로 취급받았다. 여성들은 월경 전인 어린 나이에 조혼을 강요당했고, 자식을 낳지 못하면 비난 받았으며, 남자의 소유물이나 다를 바 없었다. 남편과 아들의 보호를 받지 못하는 여성은 폭력에 노출되어 있었다. 개인으로서의 여성이 독자적인 목소리를 낸다는 것은 상상하기도 어려운 사회였다. 그런데 메가스테네스가 본, 남성들과 난해한 것을 당당하게 논의하던 고대의 여성들, 그녀들은 누구였을까?   그녀들은 불교 승가로 출가한 비구니들이었다. 기원전 6~5세기, 붓다 재세시부터 최고의 깨달음을 얻은 다수의 비구니들이 존재했다. 그녀들은 여성에게 강요되는 사회적 의무에서 자유로운 존재로서 명상적 삶에 헌신하였고, 붓다의 가르침을 연구하고 토론하며, 제자들을 길러냈다. 다행히 우리는 그녀들의 삶을 『테리가타』를 통해 확인할 수 있다. 『테리가타』는 2,500년 전에 살았던 깨달은 여성들의 성취와 해탈의 기쁨을 노래한 시집이다. 여기에는 모두 73개의 시가 실려있다. 시 중에서 두...
요요
2023.07.20 | 조회 465
요요와 불교산책
부처님의 죽음, 완전한 열반     “아난다여, 그대는 나를 위해 쌀라 쌍수 사이에 머리를 북쪽으로 한 침상을 만들어라, 아난다여, 나는 피곤하니 누워야겠다.”(『디가니까야』 「대반열반경」)   아난다는 두 그루 나무 사이에 머리를 북쪽으로 침상을 마련했다. 부처님은 오른쪽 옆구리를 밑으로 하여 사자의 형상을 취한 채, 한 발을 다른 발에 포개고, 새김을 확립하고 올바른 알아차림을 갖추며 누웠다. 꾸시나라의 말라족을 불러 작별인사를 나누고, 제자들과도 마지막 대화를 나누었다. “방일하지 말고 정진하라”는 말씀을 끝으로, 마음을 집중한 고요한 상태로 완전한 열반에 들었다. 부처님의 열반상이 옆으로 누운 모습을 하고 있는 까닭이다.       프롤로그: 부처님 없는 승가에 대한 암시   기원전 6~5세기, 부처님이 활동한 북인도 지역은 중앙집중적 왕권국가들이 벌이는 정복전쟁이 벌어지던 폭력의 시대이기도 했다. 이런 시대에 부처님은 자신을 따르는 수행자들의 조직을 사라져가는 부족 공화국들의 운영원리를 간직한 이름, 상가라고 불렀다. 승가란 상가(saṅgha)를 음차한 말로, 구성원들의 토론과 합의에 의해 운영되는 모임을 의미했다. 승가는 중앙집중적인 복종과 명령, 통제가 아니라 수행자들의 화합과 자율로 운영되는 조직이었다. 부처님은 승가의 조직자이자 지도자였지만, 자신이 승가를 이끈다거나 승가가 자신의 명령에 따라야 한다는 생각을 하지 않았다. 따라서 부처님에게는 승가의 열쇠를 건넬 후계구도도 의발의 전수도 없었다. 부처님의 마지막 가르침을 전하는 경전 『대반열반경』은 부처님이 제자들게 무엇을 남기고 싶어했는지 그 정수를 투명하게 보여준다.   『대반열반경』은 부처님에게 마가다국의 재상이 찾아와서 왕이 밧지족과의 전쟁을 계획하고 있는데 이길 수 있겠는지 질문하는 장면으로 시작한다. 평화와...
부처님의 죽음, 완전한 열반     “아난다여, 그대는 나를 위해 쌀라 쌍수 사이에 머리를 북쪽으로 한 침상을 만들어라, 아난다여, 나는 피곤하니 누워야겠다.”(『디가니까야』 「대반열반경」)   아난다는 두 그루 나무 사이에 머리를 북쪽으로 침상을 마련했다. 부처님은 오른쪽 옆구리를 밑으로 하여 사자의 형상을 취한 채, 한 발을 다른 발에 포개고, 새김을 확립하고 올바른 알아차림을 갖추며 누웠다. 꾸시나라의 말라족을 불러 작별인사를 나누고, 제자들과도 마지막 대화를 나누었다. “방일하지 말고 정진하라”는 말씀을 끝으로, 마음을 집중한 고요한 상태로 완전한 열반에 들었다. 부처님의 열반상이 옆으로 누운 모습을 하고 있는 까닭이다.       프롤로그: 부처님 없는 승가에 대한 암시   기원전 6~5세기, 부처님이 활동한 북인도 지역은 중앙집중적 왕권국가들이 벌이는 정복전쟁이 벌어지던 폭력의 시대이기도 했다. 이런 시대에 부처님은 자신을 따르는 수행자들의 조직을 사라져가는 부족 공화국들의 운영원리를 간직한 이름, 상가라고 불렀다. 승가란 상가(saṅgha)를 음차한 말로, 구성원들의 토론과 합의에 의해 운영되는 모임을 의미했다. 승가는 중앙집중적인 복종과 명령, 통제가 아니라 수행자들의 화합과 자율로 운영되는 조직이었다. 부처님은 승가의 조직자이자 지도자였지만, 자신이 승가를 이끈다거나 승가가 자신의 명령에 따라야 한다는 생각을 하지 않았다. 따라서 부처님에게는 승가의 열쇠를 건넬 후계구도도 의발의 전수도 없었다. 부처님의 마지막 가르침을 전하는 경전 『대반열반경』은 부처님이 제자들게 무엇을 남기고 싶어했는지 그 정수를 투명하게 보여준다.   『대반열반경』은 부처님에게 마가다국의 재상이 찾아와서 왕이 밧지족과의 전쟁을 계획하고 있는데 이길 수 있겠는지 질문하는 장면으로 시작한다. 평화와...
요요
2023.06.11 | 조회 372
요요와 불교산책
견해의 결박에서 벗어나려면     사변적 견해는 견해의 정글이고 견해의 광야이고 견해의 왜곡이고 견해의 동요이고 견해의 결박입니다. 그것은 고통을 수반하고 파멸을 수반하고 번뇌를 수반하고 고뇌를 수반합니다.(『맛지마니까야』 「불의 비유와 밧차곳따의 경」)   설법 중에 붓다가 꽃 한 송이를 들어 올렸다. 대중들이 모두 무슨 뜻인지 몰라 어리둥절하고 있는데 오직 마하가섭만이 빙그레 미소를 띠었다. 꽃을 든 붓다의 뜻이 이심전심으로 전해진 것이다. 염화시중(拈花示衆), 꽃을 들어 대중에게 보인다는 뜻의 사자성어를 낳은 에피소드다. ‘염화미소(拈花微笑)’라고도 한다. 동아시아 선불교 전통은 이런 방식으로 마음에서 마음으로 법이 전해지는 것을 강조했다. 선불교가 말과 글자에 매이지 않는다는 의미의 불립문자(不立文字)를 강조할 때 근거로 삼는 중요한 에피소드다.   그러나 2,500년 전 붓다의 육성을 느낄 수 있는 『니까야』나 『아함경』에는 이 장면이 등장하지도 않는다. 초기경전에서 만나는 붓다는 선사들처럼 맥락을 짐작하기 힘든 함축적인 말 한마디를 툭 던진다거나 무언가를 암시하는 어떤 행동으로 자신의 뜻을 전달하지 않는다. 오히려 논리정연한 말로 설득하고, 무릎을 칠 수밖에 없는 적절한 비유로 마음을 움직이고, 의표를 찌르는 반문으로 질문자 스스로 자신의 허점을 시인하게 하는 변재의 달인, 수사학의 달인에 가깝다. 그러나 그렇게 논리와 비유, 반문 등 어느 것 하나 흠잡을 데 없는 자유자재한 변재의 능력을 가진 붓다가 묵묵부답, 침묵으로 응답한 특별한 경우가 있다. 그것을 십무기(十無記)라 한다.         붓다의 침묵   무기(無記)란 질문에 응답하지 않았다는 뜻이다. 질문이 열 가지였기 때문에 십무기라 한다. 대관절 어떤...
견해의 결박에서 벗어나려면     사변적 견해는 견해의 정글이고 견해의 광야이고 견해의 왜곡이고 견해의 동요이고 견해의 결박입니다. 그것은 고통을 수반하고 파멸을 수반하고 번뇌를 수반하고 고뇌를 수반합니다.(『맛지마니까야』 「불의 비유와 밧차곳따의 경」)   설법 중에 붓다가 꽃 한 송이를 들어 올렸다. 대중들이 모두 무슨 뜻인지 몰라 어리둥절하고 있는데 오직 마하가섭만이 빙그레 미소를 띠었다. 꽃을 든 붓다의 뜻이 이심전심으로 전해진 것이다. 염화시중(拈花示衆), 꽃을 들어 대중에게 보인다는 뜻의 사자성어를 낳은 에피소드다. ‘염화미소(拈花微笑)’라고도 한다. 동아시아 선불교 전통은 이런 방식으로 마음에서 마음으로 법이 전해지는 것을 강조했다. 선불교가 말과 글자에 매이지 않는다는 의미의 불립문자(不立文字)를 강조할 때 근거로 삼는 중요한 에피소드다.   그러나 2,500년 전 붓다의 육성을 느낄 수 있는 『니까야』나 『아함경』에는 이 장면이 등장하지도 않는다. 초기경전에서 만나는 붓다는 선사들처럼 맥락을 짐작하기 힘든 함축적인 말 한마디를 툭 던진다거나 무언가를 암시하는 어떤 행동으로 자신의 뜻을 전달하지 않는다. 오히려 논리정연한 말로 설득하고, 무릎을 칠 수밖에 없는 적절한 비유로 마음을 움직이고, 의표를 찌르는 반문으로 질문자 스스로 자신의 허점을 시인하게 하는 변재의 달인, 수사학의 달인에 가깝다. 그러나 그렇게 논리와 비유, 반문 등 어느 것 하나 흠잡을 데 없는 자유자재한 변재의 능력을 가진 붓다가 묵묵부답, 침묵으로 응답한 특별한 경우가 있다. 그것을 십무기(十無記)라 한다.         붓다의 침묵   무기(無記)란 질문에 응답하지 않았다는 뜻이다. 질문이 열 가지였기 때문에 십무기라 한다. 대관절 어떤...
요요
2023.03.20 | 조회 448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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