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요요와불교산책15회] 초기불교의 흑역사, 여성 차별적인 팔경법

요요
2023-08-17 13:42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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초기 불교의 흑역사, 여성 차별적인 팔경법

 

 

깔라마들이여, 소문이나 전승이나 여론에 끄달리지 말고, 성전의 권위나 논리나 추론에도 끄달리지 말고, 상태에 대한 분석이나 견해에 대한 이해에도 끄달리지 말고 그럴듯한 개인적인 인상이나 ‘이 수행자가 나의 스승이다’라는 생각에도 끄달리지 마십시오. … 이러한 것들은 실천하여 받아들이면 유익하지 못하고 괴로움을 야기하는 것이라고 스스로 알게 되면 깔라마인들이여, 그 때에 그것들을 버리십시오. (『앙굿따라니까야』 「깔라마의 경」)

 

붓다가 가르침을 펴기 시작한 초기에 붓다를 따르는 출가수행자들은 모두 남자들 뿐이었다. 여성은 다만 재가 신자로만 붓다와 관계를 맺었다. 아마 당시로서는 마을에서 떨어진 한적한 숲에서 명상하고, 집도 절도 없이 걸식하는 길 위의 삶을 사는 여성의 존재는 생각할 수도 없었기 때문일 것이다. 고대 인도 사회에서 가족의 보호 밖에 있는 여성은 손쉽게 취할 수 있는 성적인 대상이자 남성을 유혹하는 위험한 존재로 인식되었다. 그러므로 여성이 집을 떠나 출가자가 된다는 것은 위험을 무릅쓰는 일이었다. 그러나 붓다의 설법을 듣고 구도의 삶을 살겠다고 결심을 한 남자들이 나온 것처럼 출가하여 수행자로 살겠다는 용감한 여자들이 나오는 것도 시간문제일 뿐이었다. 게다가 붓다가 이끄는 비구 승가는 세속에서의 신분과 나이에 의한 차별을 뛰어넘어 오직 출가한 햇수에 따라 예를 표하는 평등한 공동체의 이상을 보여주고 있었다. 대안적 공동체로서의 승가의 현존은 여성들에게도 ‘바람에 걸리지 않는 그물처럼, 진흙에 더러워지지 않는 연꽃처럼’ 살 수 있다는 희망을 갖게 했을 터. 과연 누가 출가한 여성 수행자로 첫발을 뗄 것인가, 오직 그것이 문제였다.

 

 

최초의 여성 출가자, 마하빠자빠띠

 

붓다는 오비구가 원하지도 않았는데도 그들에게 가서 설법했고, 숲속을 헤매는 야사를 불러 출가의 마음을 일으켰다. 붓다는 이 사람들로 승가를 조직했다. 그런데 여성의 출가는 달랐다. 먼저 여성의 출가를 원한 것은 붓다도 아니었고 비구승가도 아니었다. 그것은 여성들 자신으로부터 왔다.

 

출가 수행자가 되고 싶다는 의사를 밝힌 최초의 여성은 붓다의 양모인 마하빠자빠띠였다. 붓다가 깨달음을 얻은 후 처음으로 고향을 방문한 이래 붓다의 아버지 슛도다나왕과 양모는 충실한 재가 제자이자 후원자로 살았다. 붓다의 아버지가 죽은 뒤 마하빠자빠띠는 안락한 왕궁의 삶을 버리고 출가 수행자로 살겠다고 결심했다. 붓다는 그녀의 출가 요청을 받아들이지 않았다. 일설에 따르면 계를 지키며 집에서 수행할 것을 권했다고도 한다. 그러나 마하빠자빠띠의 결심은 확고했다. 붓다의 허락이 없었음에도 그녀는 삭발하고 가사를 입고 길 위에 섰다. 출가의 뜻을 같이 하는 여성들이 그 뒤를 따랐다. 마하빠자빠띠는 먼 길을 걸어 발이 부르트고 온몸에 먼지를 뒤집어 쓴 채 붓다를 찾아왔다. 그 모습을 보고 감동한 아난다는 붓다를 찾아가 이렇게 물었다.

 

세존이시여, 여인들이 세존의 법에 들어와, 집에서 집 없는 곳으로 출가하면 흐름에 든 경지나(예류자), 한 번 돌아오는 경지(일래자)나, 돌아오지 않는 경지(불환자)나, 거룩한 경지(아라한)를 실현하는 것이 가능합니까?(『율장』)

 

여성들은 출가하더라도 깨달음을 얻지 못하느냐는 질문이었다. 붓다는 여성도 출가하면 성자가 될 수 있다고 답했다. 그렇다면 여성의 출가를 허락하지 않을 이유가 무엇이란 말인가. 아난다는 마하빠자빠띠의 공덕과 성품을 찬탄했다. 그녀는 태어나자마자 어머니를 잃은 싯다르타를 사랑으로 키운 자애로운 양어머니였던 것이다. 아난다의 설득 덕분이었던 것일까. 아니면 마하빠자빠띠의 굳은 의지 때문이었을까? 결국 붓다는 여성의 출가를 받아들이기로 한다. 그런데 그 허락에는 조건이 붙어 있었다. 팔경법(八敬法)이라는 조건이었다. 마하빠자빠띠는 그 조건을 받아들이고 불교 역사상 첫번째 비구니가 되었다. 그녀를 따라온 여성들도 팔경법에 따라 출가의 구족계를 받았다. 이로써 비구니 승가가 만들어졌다.

 

마하빠자빠띠 고따미, 김재일화백(법보신문)

 

 

여성 출가의 조건, 팔경법

 

붓다가 제시한 팔경법은 여성 출가자와 남성 출가자의 관계에 대한 규정이었다. 그 내용은 이렇다. 1. 출가한 지 100년 된 비구니라 하더라도 방금 출가한 신참 비구에게 무조건 예를 표해야 한다. 2. 우기의 안거 기간에 비구니는 비구가 있는 곳에서 안거해야 한다. 3. 비구니는 보름마다 비구에게 가르침을 받아야 한다. 4. 안거를 마친 후 비구니는 비구 승가 앞에서도 참회해야 한다. 5. 팔경법을 어기면 참회해야 한다. 6. 비구니는 비구니 승가와 비구 승가 두 곳 모두에서 구족계를 받아야 한다. 7. 비구니는 어떤 경우에도 비구를 비웃거나 비난해서는 안 된다. 8. 비구니는 비구에게 충고해서는 안 되지만 비구는 비구니에게 충고할 수 있다. 그런데 이 규정들을 살펴보면 가부장적 질서를 승가의 남녀관계에도 그대로 재현하는 듯이 보인다. 이런 조항들이 여성 출가의 조건으로 제시된 배경은 무엇이었을까.

 

먼저 놓치지 말아야 할 것은 승가가 흔히 생각하듯이 은둔과 피세의 조직이 아니었다는 점이다. 마을 사람들은 출가자들에게 먹을 것과 입을 것을 보시했고, 승가는 사람들에게 가르침을 설했다. 수행자 없이 승가가 있을 수 없었지만 다른 한편 승가는 세간의 지지 없이 단 하루도 유지될 수 없는 조직이었다. 붓다가 처음 비구 승가를 만들 때와 달리 비구니 승가가 출범할 즈음 승가는 세간과 깊이 상호의존하고 있었다. 그만큼 세간의 평가에 예민할 수밖에 없는 조건이었다. 당시 여성의 출가를 받아들인다는 것은 재가자들의 불신과 의혹을 불러일으켜 승가를 위험에 빠뜨릴 지도 모르는 사태였다. 그런 까닭에 승가의 현실 지도자였던 붓다는 마하빠자빠띠의 출가 선언을 무조건 지지하기 어려웠을지도 모른다. 뿐만 아니라 여성을 남성의 수행을 방해하는 유혹자로 보는 보수적인 비구들의 동요도 분란을 야기할 수 있었다. 출가 수행자라 하더라도 그들이 내면화해 온 가부장적 관점과 여성에 대한 편견을 모두 떨쳐버리지는 못했을 터이니 말이다. 또 대중의 지지를 놓고 경쟁하는 다른 사문집단들의 비난도 고려해야 했다.

 

그러므로 큰 틀에서 보면 팔경법은 비구니가 비구의 지도하에 있다는 것을 대내외적으로 천명함으로써 비구니의 출현으로 인해 발생할지도 모를 내외의 혼란과 의혹을 미연에 예방하는 조치였다고 이해할 수도 있다. 비구니는 비구가 있는 곳에서 안거해야 한다는 규정은 세속의 눈을 의식하는 것이면서 여성 출가자를 보호하기 위한 규정일 수도 있다. 또 비구니는 보름마다 비구에게 가르침을 받아야 한다는 규정도 여성 지도자의 역량이 쌓이지 않은 상태라는 점을 고려한 조항일 수 있다. 비구니 승가의 존재가 대중적으로 용인되고 또 여성 지도자들의 경험과 연륜이 쌓이면 이런 조항들은 의미를 잃게 될, 그야말로 한시적 조항이 될 수도 있었다.

 

그러나 팔경법 중에는 오늘 우리의 관점에서는 납득하기 곤란한 조항도 있다. 법랍 100년된 비구니라 하더라도 새내기 비구에게 예를 표해야 한다는 조항과 비구가 잘못한 것이 있을 때 비구니는 꾸짖거나 충고할 수 없다는 조항이 그러하다. 물론 2,500년 전의 상황을 지금 우리의 관점에 대입하여 조목조목 비판하는 것은 무리일지도 모른다. 우리가 알지 못하는 그때의 맥락과 조건이 있을 테니 말이다. 심지어 오늘날까지도 여성에게 목사안수나 사제서품, 성직자의 역할이 허락되지 않는 전통과 관습이 건재하다는 것을 생각해 보라. 그런 점에서 보통 인간의 지혜를 뛰어넘는 통찰지를 갖춘 붓다라 할지라도 여성의 출가를 허락하고자 할 때 그 일이 얼마나 고심에 찬 결정이었을지 이해하려 노력할 필요는 있을 것 같다.

 

 

 

중도적 지혜인가, 절충적 타협인가

 

그런데 만일 팔경법이 여성의 안전을 위한 배려고 대중의 불신과 혼란을 잠재우기 위한 한시적 규정이었다면 비구니 승가가 어느 정도 자리 잡은 후에는 없애거나 고치는 것이 마땅하다. 그렇기 때문에 비구니들의 지도자였던 마하빠자빠띠가 팔경법의 첫 번째 조항의 개정을 요구한 일화는 의미심장하다. 비구니 승가 출범 후 어느 정도 시간이 흘렀을 때 마하빠자빠띠는 이 규정을 남자와 여자에 상관없이 법랍의 순서대로 예를 표하는 것으로 바꾸자고 요구했다. 경전에 의하면 안타깝게도 그 요구는 받아들여지지 않았다. ‘자이나교와 같은 다른 사문집단에서도 남성이 여성에게 예를 표하는 경우는 없다’는 것이 거절의 근거였다. 평소 붓다와 달리 당대의 통념에 입각한 답변이어서 솔직히 구차하고 옹색한 변명처럼 느껴진다.

 

붓다는 여성들의 영적 진보를 응원했고 뛰어난 성취를 이룬 여성들의 역량을 찬탄했다. 재가자들에 대한 설법에서도 여성들이 월경, 임신, 출산으로 겪는 고통에 깊이 공감했고, 남아선호를 비판했으며, 가정을 꾸려가는 여성의 책임을 높이 샀고, 부부 사이의 상호존중을 강조했다. 그런 만큼 비구 승가의 운영에서는 당시 사회에서 당연시하던 출생 신분과 나이의 차별을 철폐한 붓다가 남녀 승가 사이의 젠더 차별구조를 바꾸려 하지 않고 온존시켰다는 사실은 우리를 매우 곤혹스럽게 한다.

 

팔경법은 여성의 출가와 비구니 승가를 현실화하기 위해 세속의 가부장적 질서나 편견과의 불필요한 정면충돌을 피하고 누구와도 불화하지 않으려는 붓다의 지혜로운 중도적 대안이었을 까? 아니면 젠더의 문제가 카스트 차별보다 더 풀기 어려운 고차 방정식이었기 때문에 한 발 후퇴하여 팔경법으로 당대의 습속과 타협하는 현실적이고 정치적인 선택을 한 것일까? 어쩌면 팔경법에 대해 오롯이 붓다의 선택이라고 보기보다 여성 출가를 둘러싼 당대의 복합적인 입장과 견해들의 절충의 결과라고 보아야 할 지도 모르겠다. 그렇다면 팔경법의 기원과 책임을 오직 붓다에게서 찾는 것 자체가 과도한 책임 전가일 수 있다. 붓다 역시 시대의 아들이기도 했고, 다른 한편 팔경법 역시 인연과 조건의 산물이었을 테니 말이다.

 

그래서 어떤 사람들은 지금 남아 있는 팔경법의 조항 모두를 붓다가 만들었을 리 없다고 주장한다. 오히려 붓다 입멸 이후 비구 승가의 주류였던 보수적 비구들의 입장과 분위기를 반영한다는 해석이다. 붓다는 아난다에게 자신이 제정한 계율 중 사소한 것들은 폐지해도 좋다는 유훈을 남겼다. 승가의 운영 규칙은 해결해야 할 문제가 생길 때마다 케이스 바이 케이스로 만들어지고 계속 추가되고 개변되었다. 그러므로 붓다 입멸 후 이러한 소소계(小小戒)에 대한 대처는 남겨진 사람들의 몫일 수밖에 없었다. 아무튼 경전과 율장이 구두로 전수되다 문자로 기록되는 과정에서 가필과 삽입이 있었든 없었든 팔경법은 살아 남았다. 비구승가 내에는 아난다처럼 여성 출가에 우호적인 비구도 있었고 비판적인 입장의 비구들도 있었지만 아무래도 붓다 재세시에도 입멸 후에도 아난다의 입장이 주류였던 적은 없는 듯하다. 붓다도 그 힘 관계를 반전시키지 못했다. 그 결과 ‘여성은 아라한이 될 수 없다’거나 ‘비구니승가가 만들어졌기 때문에 승가의 수명이 500년 단축될 것이다’ 등과 같은 이야기들이 붓다가 한 말로 경전에 남게 되었다.

 

『니까야』에 남겨진 여성과 관련한 붓다의 말은 대체적으로는 ‘깨달음에 남녀는 없다’는 원리에 충실하지만 그럼에도 불구하고 혼란스럽고 착종된 구절이 남아 있는 것은 이러한 경향의 반증이 아닐까. 또 붓다 입멸 후 경전결집을 위한 아라한들의 1차 회의에 여성 아라한이 참가했다는 어떤 흔적도 없다. 이것은 무엇을 의미할까. 승가내의 여성의 위상이 미미했다는 것일 수도 있고, 이 역시 팔경법이 미친 부정적 효과로 볼 수도 있지 않을까 생각된다. 아무튼 이렇게 승가 내의 주요한 활동에서 여성의 영향력이 배제되어 가는 흐름 속에서 여성 아라한들의 자취는 점점 희미해지고 지워져 갔음에 분명하다.

 

아난다상(석굴암)

 

흑역사를 대하는 법

 

오늘날 팔경법은 한 마디로 시대착오 그 이상도 이하도 아니다. 우리는 팔경법은 존재의 평등을 설한 붓다의 가르침과 어긋난다고 한마디로 일축해버릴 수도 있다. 그런데 그렇게 날카롭게 비판하고 치워버리면 되는 것일까? 어쩌면 이것은 여성의 출가와 관련된 문제만은 아닐 수 있다. 비구 승가의 경우에도 존재 자체로 출가가 허락되지 않는 사람들이 있었다. 장애를 가진 사람은 출가할 수 없었다. 여기에는 신체적 장애와 정신적 장애 모두 포함된다. 어쩌면 여성의 출가를 문제 삼는 관점은 장애의 문제와도 통하는 면이 있다. 여성이 깨달을 수 없는 존재라 거부된 것이 아니었듯이 남성 장애인의 출가가 거부된 것 역시 깨달을 수 없기 때문이 아니다. 그것은 여성과 마찬가지로 탁발, 유행 등과 같은 출가 생활에 적응하기 어렵고 특별한 보호와 돌봄이 필요하다는 실제적 이유 때문이었다.

 

여성과 장애로부터 우리는 더 도발적인 문제로 나아갈 수도 있다. 출가와 재가의 구별은 그렇게 의미 있는 것일까? 이미 대승불교는 출가자만이 깨달음을 얻을 수 있다거나 혹은 깨달은 자는 출가할 수밖에 없다는 전제에 정면으로 도전하면서 보살사상을 발전시켰다. 나아가 초목도 성불할 수 있다는 과감한 주장도 펼쳤다. 그러니 설령 그 기원이 붓다에 있는 것이라 할지라도 성역은 없다. 여자와 남자, 장애와 비장애만이 아니라 정상과 비정상, 젊은이와 늙은이, 건강과 질병, 인간과 비인간 등 우리 삶에 기준과 척도가 되는 수많은 구분들 역시 실체적인 것이라기보다 인습적이고 관습적인 것에 지나지 않는다. 붓다가 그러했듯이 불교는 당연하게 여겨오던 것에 대해 계속해서 질문하게 하는 사유이면서 실천이 아니던가. 나는 팔경법이 불교의 흑역사일 수 있다고 생각한다. 그저 올바른 법이 아니라고 비판하고 치워버리거나 쉬운 반성으로 끝내지 않는 방식으로 흑역사를 성찰하려면 어떻게 해야 할까?

 

깔라마인들이 붓다에게 진리와 거짓의 판별기준을 물었을 때 붓다는 “성전의 권위나 논리나 추론에도 끄달리지 말고, 스승이라는 생각에도 끄달리지 말라.” “이러한 것들을 실천하여 받아들이면, 유익하지 못하고 괴로움을 야기하는 것이라고 스스로 알게 되면 그때에 그것들을 버리라”고 말했다. 그게 참 어렵다.

 

댓글 3
  • 2023-08-18 06:15

    <불교 페미니즘>이라....
    고은이는 '유교 페미니즘' 관련 책을 읽고 있는 모양인데... 음, 둘다 어려운 문제에요.

    그런데 사실 '기독교'도 마찬가지 아닐까요?
    여자 교황이나 여자 사제 이야기는 들어본 적도 없고
    개신교 이후에도 여자목자...문제는... 늘 쟁점이구....

    고대종교와 페미니즘... 이런 세미나라도 열어야 할 것 같아요^^

    그런데 이 공부에서 가장 중요한 것은, 저는 방법론인 것 같아요. 예를 들어 전 페미니즘은 근대의 인식론인데 그걸 고대담론에 적용시키는 게 적절한가? 그런 문제의식을 가지고 있습니다^^. '유교페미니즘' 이런 이야기를 들을 때마다 '유교자본주의'라는 개념이 저절로 따라오면서 약간 ??? 이런 느낌도 들구요. ㅋㅋㅋ...

    잘 읽었습니다^^

  • 2023-08-18 10:11

    잘 읽었습니다~^^
    불교 이야기는 재밌는데,
    늘 실천은 참 어렵네요~

  • 2023-08-18 14:09

    어려운 문제...네요
    근데 진짜 고대와 근대페미니즘...이것도 좀 생각해볼 문제인것도 같아요
    어쨌거나 지금 이 시대 우리가 고대를 만나다보니 어쩔 수 없는 문제이긴 하지만.
    유익하지 못하고 괴로움을 야기하는 것이라고 스스로 알게 되면 그때에 그것들을 버리라...하셨으니
    이에 따르면 되지 않을까요? ㅎ

요요와 불교산책
  수행은 고행이 아니다   아, 우리는 아주 안락하게 산다. 원한 품은 자들 속에 원한 없이, 원한을 품은 사람들 사이에서 우리는 원한을 여읜 자로 살아간다. 아, 우리는 아주 안락하게 산다. 우리의 것이라고는 결코 없어도, 광음천 세계의 천신들처럼, 기쁨을 음식으로 삼아 지내리라.(『법구경』 197, 200)     고행을 멈추다   보리수 아래에서 위대한 깨달음을 얻기 전 붓다는 어떻게 수행했을까? 붓다의 수행에 대한 가장 큰 오해 중 하나가 엄청난 고통스런 수행의 결과 깨달음에 이르렀다는 것이다. 먹지도 않고 잠을 자지도 않고 피가 마르고 살이 마르는 고행을 해야지만 깨달음에 이를 수 있다면, 우리 같은 평범한 중생에게 깨달음이란 언감생심 꿈도 꿀 수 없는 일이 된다. 그러나 이미 말했듯이 이것은 오해다.   간다라 미술품 중에 유명한 고행상이 있다. 피골이 상접하여 갈비뼈가 그대로 드러난 붓다상이다. 많은 사람들이 이 고행상을 사랑하고, 인간의 한계 끝까지 정진한 붓다에게 경의를 표한다. 깨닫기 전의 붓다가 한 고행은 그야말로 상상 초월의 것이었다. 하루에 곡식 한 톨로 연명하는 곡기를 끊는 수행의 결과 문제의 고행상처럼 등뼈과 창자가 들러붙었다. 영양실조 상태에서 손으로 문지르기만 해도 사지의 털이 몸에서 떨어져 나갔다. 몇 개월이고 잠을 자지 않아 피부와 눈은 그 빛을 잃었고 대소변을 보려고 하면 머리가 앞으로 꼬꾸라졌다. 오랫동안 호흡을 멈추는 수행을 하다 보니 힘센 사람이 머리를 가죽끈으로 조이는 듯한 극심한 두통과 이명에 시달렸다.   일반적으로 붓다의 생애의 주요 장면을...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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2023.08.17 | 조회 292
요요와 불교산책
허스토리, 고대 인도의 여성 수행자들      마음이 잘 집중되어, 최상의 진리를 보는 자에게, 지혜가 항상 나타난다면, 여성의 존재가 무슨 상관이랴. (『테리가타』 3장 「쏘마 장로니의 시」)     고대 인도의 여성철학자들   기원전 4세기, 헬레니즘문명과 인도문명의 만남이 이루어졌다. 전쟁을 통해서였다. 당시 평화조약 체결을 위해 인도에 온 메가스테네스는 『인도견문록』에 ‘인도에는 여성 철학자들이 있어서 남성들과 난해한 것을 당당하게 논의한다’는 기록을 남겼다. 고대 그리스의 민주주의는 남성 시민들의 민주주의였고 철학도 남성들의 전유물이었다. 고대 인도에서도 여성들은 결코 존중받는 존재가 아니었다. 여성은 바라문교의 성전 『베다』를 학습할 수도 없었으므로 지식에 가까이 갈 수조차 없었다. 여성은 남성을 유혹하는 위험한 존재로 취급받았다. 여성들은 월경 전인 어린 나이에 조혼을 강요당했고, 자식을 낳지 못하면 비난 받았으며, 남자의 소유물이나 다를 바 없었다. 남편과 아들의 보호를 받지 못하는 여성은 폭력에 노출되어 있었다. 개인으로서의 여성이 독자적인 목소리를 낸다는 것은 상상하기도 어려운 사회였다. 그런데 메가스테네스가 본, 남성들과 난해한 것을 당당하게 논의하던 고대의 여성들, 그녀들은 누구였을까?   그녀들은 불교 승가로 출가한 비구니들이었다. 기원전 6~5세기, 붓다 재세시부터 최고의 깨달음을 얻은 다수의 비구니들이 존재했다. 그녀들은 여성에게 강요되는 사회적 의무에서 자유로운 존재로서 명상적 삶에 헌신하였고, 붓다의 가르침을 연구하고 토론하며, 제자들을 길러냈다. 다행히 우리는 그녀들의 삶을 『테리가타』를 통해 확인할 수 있다. 『테리가타』는 2,500년 전에 살았던 깨달은 여성들의 성취와 해탈의 기쁨을 노래한 시집이다. 여기에는 모두 73개의 시가 실려있다. 시 중에서 두...
허스토리, 고대 인도의 여성 수행자들      마음이 잘 집중되어, 최상의 진리를 보는 자에게, 지혜가 항상 나타난다면, 여성의 존재가 무슨 상관이랴. (『테리가타』 3장 「쏘마 장로니의 시」)     고대 인도의 여성철학자들   기원전 4세기, 헬레니즘문명과 인도문명의 만남이 이루어졌다. 전쟁을 통해서였다. 당시 평화조약 체결을 위해 인도에 온 메가스테네스는 『인도견문록』에 ‘인도에는 여성 철학자들이 있어서 남성들과 난해한 것을 당당하게 논의한다’는 기록을 남겼다. 고대 그리스의 민주주의는 남성 시민들의 민주주의였고 철학도 남성들의 전유물이었다. 고대 인도에서도 여성들은 결코 존중받는 존재가 아니었다. 여성은 바라문교의 성전 『베다』를 학습할 수도 없었으므로 지식에 가까이 갈 수조차 없었다. 여성은 남성을 유혹하는 위험한 존재로 취급받았다. 여성들은 월경 전인 어린 나이에 조혼을 강요당했고, 자식을 낳지 못하면 비난 받았으며, 남자의 소유물이나 다를 바 없었다. 남편과 아들의 보호를 받지 못하는 여성은 폭력에 노출되어 있었다. 개인으로서의 여성이 독자적인 목소리를 낸다는 것은 상상하기도 어려운 사회였다. 그런데 메가스테네스가 본, 남성들과 난해한 것을 당당하게 논의하던 고대의 여성들, 그녀들은 누구였을까?   그녀들은 불교 승가로 출가한 비구니들이었다. 기원전 6~5세기, 붓다 재세시부터 최고의 깨달음을 얻은 다수의 비구니들이 존재했다. 그녀들은 여성에게 강요되는 사회적 의무에서 자유로운 존재로서 명상적 삶에 헌신하였고, 붓다의 가르침을 연구하고 토론하며, 제자들을 길러냈다. 다행히 우리는 그녀들의 삶을 『테리가타』를 통해 확인할 수 있다. 『테리가타』는 2,500년 전에 살았던 깨달은 여성들의 성취와 해탈의 기쁨을 노래한 시집이다. 여기에는 모두 73개의 시가 실려있다. 시 중에서 두...
요요
2023.07.20 | 조회 464
요요와 불교산책
부처님의 죽음, 완전한 열반     “아난다여, 그대는 나를 위해 쌀라 쌍수 사이에 머리를 북쪽으로 한 침상을 만들어라, 아난다여, 나는 피곤하니 누워야겠다.”(『디가니까야』 「대반열반경」)   아난다는 두 그루 나무 사이에 머리를 북쪽으로 침상을 마련했다. 부처님은 오른쪽 옆구리를 밑으로 하여 사자의 형상을 취한 채, 한 발을 다른 발에 포개고, 새김을 확립하고 올바른 알아차림을 갖추며 누웠다. 꾸시나라의 말라족을 불러 작별인사를 나누고, 제자들과도 마지막 대화를 나누었다. “방일하지 말고 정진하라”는 말씀을 끝으로, 마음을 집중한 고요한 상태로 완전한 열반에 들었다. 부처님의 열반상이 옆으로 누운 모습을 하고 있는 까닭이다.       프롤로그: 부처님 없는 승가에 대한 암시   기원전 6~5세기, 부처님이 활동한 북인도 지역은 중앙집중적 왕권국가들이 벌이는 정복전쟁이 벌어지던 폭력의 시대이기도 했다. 이런 시대에 부처님은 자신을 따르는 수행자들의 조직을 사라져가는 부족 공화국들의 운영원리를 간직한 이름, 상가라고 불렀다. 승가란 상가(saṅgha)를 음차한 말로, 구성원들의 토론과 합의에 의해 운영되는 모임을 의미했다. 승가는 중앙집중적인 복종과 명령, 통제가 아니라 수행자들의 화합과 자율로 운영되는 조직이었다. 부처님은 승가의 조직자이자 지도자였지만, 자신이 승가를 이끈다거나 승가가 자신의 명령에 따라야 한다는 생각을 하지 않았다. 따라서 부처님에게는 승가의 열쇠를 건넬 후계구도도 의발의 전수도 없었다. 부처님의 마지막 가르침을 전하는 경전 『대반열반경』은 부처님이 제자들게 무엇을 남기고 싶어했는지 그 정수를 투명하게 보여준다.   『대반열반경』은 부처님에게 마가다국의 재상이 찾아와서 왕이 밧지족과의 전쟁을 계획하고 있는데 이길 수 있겠는지 질문하는 장면으로 시작한다. 평화와...
부처님의 죽음, 완전한 열반     “아난다여, 그대는 나를 위해 쌀라 쌍수 사이에 머리를 북쪽으로 한 침상을 만들어라, 아난다여, 나는 피곤하니 누워야겠다.”(『디가니까야』 「대반열반경」)   아난다는 두 그루 나무 사이에 머리를 북쪽으로 침상을 마련했다. 부처님은 오른쪽 옆구리를 밑으로 하여 사자의 형상을 취한 채, 한 발을 다른 발에 포개고, 새김을 확립하고 올바른 알아차림을 갖추며 누웠다. 꾸시나라의 말라족을 불러 작별인사를 나누고, 제자들과도 마지막 대화를 나누었다. “방일하지 말고 정진하라”는 말씀을 끝으로, 마음을 집중한 고요한 상태로 완전한 열반에 들었다. 부처님의 열반상이 옆으로 누운 모습을 하고 있는 까닭이다.       프롤로그: 부처님 없는 승가에 대한 암시   기원전 6~5세기, 부처님이 활동한 북인도 지역은 중앙집중적 왕권국가들이 벌이는 정복전쟁이 벌어지던 폭력의 시대이기도 했다. 이런 시대에 부처님은 자신을 따르는 수행자들의 조직을 사라져가는 부족 공화국들의 운영원리를 간직한 이름, 상가라고 불렀다. 승가란 상가(saṅgha)를 음차한 말로, 구성원들의 토론과 합의에 의해 운영되는 모임을 의미했다. 승가는 중앙집중적인 복종과 명령, 통제가 아니라 수행자들의 화합과 자율로 운영되는 조직이었다. 부처님은 승가의 조직자이자 지도자였지만, 자신이 승가를 이끈다거나 승가가 자신의 명령에 따라야 한다는 생각을 하지 않았다. 따라서 부처님에게는 승가의 열쇠를 건넬 후계구도도 의발의 전수도 없었다. 부처님의 마지막 가르침을 전하는 경전 『대반열반경』은 부처님이 제자들게 무엇을 남기고 싶어했는지 그 정수를 투명하게 보여준다.   『대반열반경』은 부처님에게 마가다국의 재상이 찾아와서 왕이 밧지족과의 전쟁을 계획하고 있는데 이길 수 있겠는지 질문하는 장면으로 시작한다. 평화와...
요요
2023.06.11 | 조회 371
요요와 불교산책
견해의 결박에서 벗어나려면     사변적 견해는 견해의 정글이고 견해의 광야이고 견해의 왜곡이고 견해의 동요이고 견해의 결박입니다. 그것은 고통을 수반하고 파멸을 수반하고 번뇌를 수반하고 고뇌를 수반합니다.(『맛지마니까야』 「불의 비유와 밧차곳따의 경」)   설법 중에 붓다가 꽃 한 송이를 들어 올렸다. 대중들이 모두 무슨 뜻인지 몰라 어리둥절하고 있는데 오직 마하가섭만이 빙그레 미소를 띠었다. 꽃을 든 붓다의 뜻이 이심전심으로 전해진 것이다. 염화시중(拈花示衆), 꽃을 들어 대중에게 보인다는 뜻의 사자성어를 낳은 에피소드다. ‘염화미소(拈花微笑)’라고도 한다. 동아시아 선불교 전통은 이런 방식으로 마음에서 마음으로 법이 전해지는 것을 강조했다. 선불교가 말과 글자에 매이지 않는다는 의미의 불립문자(不立文字)를 강조할 때 근거로 삼는 중요한 에피소드다.   그러나 2,500년 전 붓다의 육성을 느낄 수 있는 『니까야』나 『아함경』에는 이 장면이 등장하지도 않는다. 초기경전에서 만나는 붓다는 선사들처럼 맥락을 짐작하기 힘든 함축적인 말 한마디를 툭 던진다거나 무언가를 암시하는 어떤 행동으로 자신의 뜻을 전달하지 않는다. 오히려 논리정연한 말로 설득하고, 무릎을 칠 수밖에 없는 적절한 비유로 마음을 움직이고, 의표를 찌르는 반문으로 질문자 스스로 자신의 허점을 시인하게 하는 변재의 달인, 수사학의 달인에 가깝다. 그러나 그렇게 논리와 비유, 반문 등 어느 것 하나 흠잡을 데 없는 자유자재한 변재의 능력을 가진 붓다가 묵묵부답, 침묵으로 응답한 특별한 경우가 있다. 그것을 십무기(十無記)라 한다.         붓다의 침묵   무기(無記)란 질문에 응답하지 않았다는 뜻이다. 질문이 열 가지였기 때문에 십무기라 한다. 대관절 어떤...
견해의 결박에서 벗어나려면     사변적 견해는 견해의 정글이고 견해의 광야이고 견해의 왜곡이고 견해의 동요이고 견해의 결박입니다. 그것은 고통을 수반하고 파멸을 수반하고 번뇌를 수반하고 고뇌를 수반합니다.(『맛지마니까야』 「불의 비유와 밧차곳따의 경」)   설법 중에 붓다가 꽃 한 송이를 들어 올렸다. 대중들이 모두 무슨 뜻인지 몰라 어리둥절하고 있는데 오직 마하가섭만이 빙그레 미소를 띠었다. 꽃을 든 붓다의 뜻이 이심전심으로 전해진 것이다. 염화시중(拈花示衆), 꽃을 들어 대중에게 보인다는 뜻의 사자성어를 낳은 에피소드다. ‘염화미소(拈花微笑)’라고도 한다. 동아시아 선불교 전통은 이런 방식으로 마음에서 마음으로 법이 전해지는 것을 강조했다. 선불교가 말과 글자에 매이지 않는다는 의미의 불립문자(不立文字)를 강조할 때 근거로 삼는 중요한 에피소드다.   그러나 2,500년 전 붓다의 육성을 느낄 수 있는 『니까야』나 『아함경』에는 이 장면이 등장하지도 않는다. 초기경전에서 만나는 붓다는 선사들처럼 맥락을 짐작하기 힘든 함축적인 말 한마디를 툭 던진다거나 무언가를 암시하는 어떤 행동으로 자신의 뜻을 전달하지 않는다. 오히려 논리정연한 말로 설득하고, 무릎을 칠 수밖에 없는 적절한 비유로 마음을 움직이고, 의표를 찌르는 반문으로 질문자 스스로 자신의 허점을 시인하게 하는 변재의 달인, 수사학의 달인에 가깝다. 그러나 그렇게 논리와 비유, 반문 등 어느 것 하나 흠잡을 데 없는 자유자재한 변재의 능력을 가진 붓다가 묵묵부답, 침묵으로 응답한 특별한 경우가 있다. 그것을 십무기(十無記)라 한다.         붓다의 침묵   무기(無記)란 질문에 응답하지 않았다는 뜻이다. 질문이 열 가지였기 때문에 십무기라 한다. 대관절 어떤...
요요
2023.03.20 | 조회 448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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