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요요와 불교산책4회] 무엇이 비린 것인가?

요요
2022-01-16 17:08
443

무엇이 비린 것인가

 

세상의 살아있는 생명을 수호하지 못하고, 남의 것을 빼앗으면서 그들을 해치려 하고, 계행을 지키지 않고, 잔인하고, 거칠고, 무례한 것, 이것이야말로 비린 것이지 육식이 비린 것이 아닙니다.(『숫타니파타』 『아마간다의 경』)

 

훔친 돼지만이 살아남았다

『훔친 돼지만이 살아남았다』를 읽었다. 새벽이라는 돼지가 있다. 새벽이는 직접행동DxE(Direct Action Everywhere) 활동가들이 화성에 있는 한 종돈장에서 훔쳐온 돼지이다. 이들은 왜 돼지를 훔치는 절도의 범죄를 저질렀을까? 디엑스이 활동가들은 2019년 4월부터 자발적 참여자들과 함께 매주 도살장을 찾아다니기 시작했다. 그들은 온몸으로 도살장으로 들어가는 차를 막았다. 도살을 막을 수 있다고 생각해서가 아니었다. 마지막으로 동물들의 얼굴을 잠시라도 마주하기 위해서였다.

 

첫 도살장 방문 후 세 달이 지난 어느 날 밤 그들은 돼지 5,000여 마리를 기르는 종돈장에 몰래 들어가 태어난 지 얼마 안 된 새끼돼지 세 마리를 훔쳤다. 세 마리 중 한 마리가 살아남았다. 우리나라에서는 매년 1,700만 마리의 돼지가 도살된다. 새벽이는 공개 구조되어 살아남은 돼지의 이름이다.

 

이들은 우여곡절 끝에 새벽이의 보금자리인 생추어리를 만들었다. 생추어리(sanctuary)는 ‘saint’와 마찬가지로 ‘성스러운 곳’을 뜻하는 라틴어 ‘sanctuarium’에서 왔다.(위키피디아) 생추어리는 마치 누구라도 그곳에 들어가면 면책특권이 주어지고 보호받을 수 있는 ‘소도’와 같은 성역이자 피난처이다. 수태될 때부터 고기가 되기로 운명 지어진 돼지들이 태어난 지 6개월 만에 도살되는 현실에서 새벽이는 지옥행 운명으로부터 구조된 돼지가 되었다. ‘훔친 돼지만이 살아남았다’는 역설은 ‘죽이는 것은 합법이고 살리는 것은 불법인’(작가 홍은전의 추천사에서 인용) 공장식 축산의 현실을 웅변한다.

 

새벽이에 대한 이야기를 읽고 나니 더더욱 고기를 얻기 위해 동물을 집단 사육하고 그렇게 생산된 고기를 먹는 삶의 방식에 대해 회의가 커진다. 이런 현실을 마주하면서 고심 끝에 나름의 윤리적 결정으로 채식을 선택하는 사람들이 늘어나고 있다.

 

 

육식 권하는 사회

그러나 아직도 우리 사회는 고기 권하는 사회이다. 육식문화는 튼튼한 몸과 강인한 체력을 강조하는 건강담론, 위생담론과 함께 사회 진보와 경제 성장의 상징이 되었다. 아시아에서 가장 먼저 근대화의 길을 간 일본을 보자. 일본은 7세기 이후 1000년이 넘도록 이런 저런 이유로 네발달린 짐승을 먹는 것이 금지된 나라였다. 그런 일본이 메이지 유신 이후 국가의 정책으로 육식을 장려하기 시작했다. 그 이유는 몸집이 왜소한 것도 나라가 부강하지 않은 것도 육식을 하지 않아서라고 생각했기 때문이었다. 와규가 맛있고 비싼 고급 쇠고기로 등극하고 쓰끼야끼와 같은 음식이 일본의 대표음식이 된 것은 채 150년이 되지 않는다. 메이지 유신은 일본의 불교문화마저 바꾸어버렸다. 그때부터 승려들의 육식이 허용되었기 때문이다. 개화된 문명인으로 살려면 육식을 좋아해야 했다!

 

힌두교의 영향으로 인도도 오랫동안 채식문화가 일반적이었다. 소년시절의 간디 역시 인도가 영국의 식민지에서 벗어나려면 서양인처럼 강해져야 한다고 생각했다. 간디의 부모는 경건한 힌두교도로 육식을 멀리했다. 간디는 부모 몰래 친구들과 육식을 한 것 때문에 양심의 고통을 느꼈던 경험을 자서전에 기록하고 있다. 이렇게 근대문명은 고기를 전 세계의 식탁 위에 올려놓았다. 그 결과 공장식 축산과 도살은 근대문명에 필수적인 하나의 구성요소가 되었다.

 

여전히 우리 사회에는 고기를 먹지 않으면 건강해질 수 없고, 힘을 발휘할 수 없다는 믿음이 지배한다. 채식주의자들은 이런 식의 생각과 행위를 육식주의, 고기 중독이라고 부른다. 육식이 몸에 좋고 더 맛있다는 것 역시 하나의 이데올로기라는 것이다. 미각의 쾌락을 극대화해서 보여주는 관음증적 포르노에 가까운 먹방 마다 육즙이 뚝뚝 떨어지는 고기가 등장하고 그것을 보며 입맛을 다시는 우리를 보면 육식주의가 만들어진 이데올로기가 아니라고 말하기도 쉽지 않다.

 

육식은 비린 것, 채식은 향기로운 것?

그렇다면 붓다는 육식에 대해 어떤 입장을 취했을까? 불교는 육식을 금한다는 우리의 통념과 달리 붓다는 고기를 먹으면 안 된다고 말한 적이 없다. 걸식으로 음식을 구한 고대 인도의 불교 수행승들은 음식의 종류를 가리지 않았다. 붓다가 금지한 것은 살아있는 것들에 대한 폭력과 살생이었지 육식이 아니었다. 세 가지 경우에 육식이 금지되었다. 죽이는 것을 직접 보았거나, 자신을 위해 죽였다고 듣거나, 자신에게 먹이기 위해 죽인 것이라고 판단되는 경우는 고기를 먹어서는 안 되었다. 그런 경우를 제외한다면 주어진 음식이 어떤 것이든 가리지 않았다.

 

이런 불교 수행승들의 음식문화는 육식과 기름진 음식을 엄격하게 금지하던 수행자들로부터 의혹을 샀다. 『숫타니파타』에는 대놓고 붓다의 육식을 문제 삼는 대화가 등장한다. 히말라야산에서 야생수수, 풀씨, 야생 콩, 나무열매와 같은 수수하고 거친 음식만을 먹으며 금욕하던 아마간다라는 고행자가 있었다. 그는 육식을 비린 것, 청정하지 못한 것이라 생각했다. 아마간다는 붓다가 물고기나 동물고기를 먹는다는 것을 알고 붓다를 찾아가 비난 섞인 질문을 던진다.

 

하느님의 친척인 그대는 새의 고기를 훌륭하게 요리해서 쌀밥과 함께 즐기면서도, 나는 비린 것을 허락하지 않는다고 합니다. 그 뜻을 그대에게 묻건대 그대가 말한 비린 것이란 어떤 것입니까?(『숫타니파타』 『아마간다의 경』)

 

아마간다의 물음에 붓다는 무엇이라고 답했을까? 붓다의 대답은 명확했다. 육식이 비린 것이 아니라, 잘못된 견해, 잘못된 사유, 잘못된 말과 행위, 욕망을 제어하지 못하고 적대적이고 공격적이고 비천하게 행동하는 것이 비린 것이라는 답을 내놓았다. 육식이냐 채식이냐를 가지고 비린 것이냐 아니냐를 따지려 하지 말고 네가 무엇을 생각하고, 어떻게 말하고, 어떻게 행동하고 있는지가 더 중요하다는 답이었다.

 

세상의 살아있는 생명을 수호하지 못하고, 남의 것을 빼앗으면서 그들을 해치려 하고, 계행을 지키지 않고, 잔인하고, 거칠고, 무례한 것, 이것이야말로 비린 것이지 육식이 비린 것이 아닙니다.(『숫타니파타』 『아마간다의 경』)

 

붓다는 하지 말아야 할 것을 지키는 데만 급급한 나머지 무엇을 살펴야 하는 지 놓치고 있는 아마간다의 허를 찔렀다. 붓다는 매일같이 고행하고 경전을 외우고 철마다 수련하는 루틴에 철저하다고 하여 청정해지는 것이 아니라고 생각했다. 중요한 것은 자신의 욕망이 어떻게 작동하는지, 자신이 무엇에 집착하고 있는지 알고 그 조건을 잘 살펴 의혹에서 떠나는 것이다. 청정한 삶은 어떤 금기나 계율을 묵수하기만 하는 것이 아니라 알고 보는 것, 즉 지혜로부터 오기 때문이다.

 

붓다는 식사초대를 받아 훌륭한 음식이 나오면 거절하지도 물리치지도 않았다. 어떤 음식이든 감사히 먹었다. 붓다의 위대함은 고기를 먹지 않는다는 것에 있지 않았다. 붓다의 위대함은 음식의 맛에 탐닉하거나 매혹되지 않는 데 있었다. 식사 초대에 응하여 음식을 먹을 때 붓다는 다음에도 이렇게 좋은 음식을 대접받고 싶다는 생각을 일으키지 않았다. 그럴 수 있었던 것은 미각에 대한 탐욕과 집착을 버렸기 때문이다.(『맛지마니까야』 『지바까의 경』) 육식이냐, 채식이냐가 아니라 맛에 집착하지 않고 음식에 대해 절제하는 것, 그것이야말로 붓다가 제자들에게 일관되게 요구한 일상의 윤리이자 태도였다. 비린 것은 육식이 아니라 끊임없는 괴로움을 낳는 탐·진·치인 것이다.

 

 

우리는 어디에 서 있는가

붓다는 당시의 고행주의자들과 달리 금욕과 고행을 절대선이라고 생각하지 않았다. 쾌락주의는 눈먼 욕망을 따르는 것이요, 고행주의는 욕망을 죄악시하는 것이다. 붓다의 관심은 육식이냐 채식이냐, 쾌락이냐 고행이냐 중 하나를 선택하는 것이 아니었다. 그 때문에 붓다가 감각적 쾌락과 미식을 즐긴다고 오해받는 경우도 많았다. 다른 한편 이와 반대로 붓다가 감각적 쾌락을 멀리하는 삶을 살기 때문에 존경을 받는다고 생각한 사람도 있었다.

 

바라문 우다인은 제자들이 붓다를 존경하고 따르는 이유가 무엇일까, 궁금해 했다. 그는 붓다가 ‘식사를 적게 하고, 어떠한 옷으로도 만족하고, 어떠한 음식으로도 만족하고, 어떠한 처소로도 만족하고, 고요한 숲속에서 멀리 여읨을 닦기 때문’이 아닐까 생각했다.

 

붓다를 찾아가 그런 것 아니냐고 물었을 때 붓다는 그의 믿음에 어긋나는 대답을 했다. 자신은 때때로 양껏 배부르게 먹기도 하며, 좋은 옷감으로 만든 멋진 옷을 입기도 하고, 고급요리를 먹기도 하며, 럭셔리한 인테리어가 된 누각에서 지내기도 하고, 재가자, 대신들, 왕들, 이교도들과 어울리기도 한다고 말했다. 제자들이 자신을 스승으로 믿고 따르는 것은 금욕 때문이 아니라 괴로움에서 벗어나는 해탈의 지혜를 가르치기 때문이라고 답한 것이다.(『맛지마니까야』 『훌륭한 가문의 우다인에 대한 큰 경』)

 

붓다의 대답은 ‘나의 가르침은 고행이나 금욕을 권하는 것이 아니라 괴로움에서 벗어나는 지혜’라는 것을 강조하기 위한 일종의 반어법이라고 할 수 있다. 아마간다의 물음에 대해 ‘육식이 비린 것이 아니다’라고 한 대답 또한 마찬가지이다. 우리는 붓다가 누구보다도 당시에 성행했던, 제사를 빙자한 무의미한 동물 살육에 강력하게 반대했다는 것을 알고 있다. 살아있는 생명을 해치고, 잔인하고, 공격적이고, 무례한 것이야말로 비린 것이다. 비린 것은 우리 자신을 괴로움에 빠뜨릴 뿐만 아니라 타자들 또한 괴로움에 빠뜨리는 말과 행동과 생각이다.

 

우리는 더 이상 붓다가 비판했던 동물희생제의를 지내지 않는다. 그러나 오늘날 인간의 고기가 되기 위해 사육되고 죽임을 당하는 동물의 수는 당시의 동물희생제의와 비교할 수 없을 정도로 상상을 초월한다. 우리나라에서만 2020년 한 해에 도살된 전체 가축 수가 11억 마리가 넘는다.(이중 10억 마리가 닭이다.) 전 지구적인 범위에서 생각하면 어떻게 될까? 매년 100억 마리 이상의 가축이 도살되고 있다. 만일 지금 우리의 세상에 붓다가 함께 살고 있다면 아마간다의 질문에 대해 붓다는 과연 어떻게 대답할까?

 

 

나는 ‘육식이 비린 것은 아니다’라는 붓다의 대답이 여전히 유효하다고 생각한다. ‘육식이 비린 것이 아니다’라는 붓다의 대답은 피비린내와 악취가 진동하는 육식의 현실에 대한 외면도 도피도 체념도 합리화도 아니다. 붓다의 대답은 육식은 나쁘고 채식은 좋다는 선악 판단이나 이것이냐, 저것이냐의 선택의 문제로부터 우리를 해방시킨다. 나아가 그 대답은 비린 것의 근본을 탐색하게 한다. 더 맛있는 것을 원하고 미각의 쾌락을 좇고, 그리고 생명 보다 자본과 이윤을 더 중요하게 생각하는 우리의 욕망이 어디서 와서 어디로 향하고 있는지, 어떤 세상을 만들어 내고 있는지를 생각하게 한다.

 

아마간다는 ‘당신이 생각하는 비린 것이란 무엇인가?’라고 물었고 붓다는 ‘육식이 비린 것이 아니다’라고 대답했다. 붓다의 대답을 듣고 아마간다는 그동안 자신이 옳다고 고수했던 고행과 금욕을 버리고 붓다의 제자가 되었다. 그렇다면 지금 한편으로는 동물들을 오직 인간을 위한 고기로만 취급하는 공장식 축산의 현실에 분노하고, 다른 한편 종종 육식과 채식 사이에서 번뇌에 빠지곤 하는 우리는 쾌락주의와 고행주의 사이 그리고 아마간다와 붓다 사이 어디쯤 서 있는 것일까. 그리고 어디에서 어디로 가고 있는 중일까? 나는 언제쯤이면 붓다를 따라 담담하게 ‘육식이 비린 것이 아니다’라고 말할 수 있게 될까?

 

 

 

 

 

댓글 10
  • 2022-01-17 10:35

    미각의 쾌락~ 딱 요즘 맛집전성시대 문화네요. 전 어디선가 본 이 말을 자주 떠올리는데요, 맛을 탐닉할수록 멋을 상실한다는..멋을 찾고 싶어요~~

    잘 읽었습니다. 멋진 세상에 대한 성찰로 읽혔어요^^

  • 2022-01-17 10:40

    이건 좀 다른 이야기이긴 한데...ㅋㅋ... 요요님의 글을 읽으면서 예전에 동아시아 근대성 공부할 때 읽었던 <메이로쿠자시>(明六雜誌)가 떠올랐어요. 그 잡지는 메이지초기 계몽학술잡지였어요. 메이지유신의 주역들이 만들었던 최초의 근대잡지이죠. 그런데 그 잡지에 '소고기' 이야기가 엄청 나와요. '소고기'를 먹을 것인가, 말 것인가가 근대 일본 지식인들의 엄청난 이슈였죠. 단발이나 양복 못지 않게 소고기를 먹는 문제가 '근대'로 나아갈 수 있는가, 아닌가의 바로미터였으니까요. 결국 1872년(메이지 5년) 천황은 고기반찬을 들이라 명합니다. 근대화가 공식적으로 천명된 것이지요.

    그런데 일본과 달리 조선에서는 오랫동안 육식을 해왔지요.세종대왕이 엄청 육식을 즐겼다는 거 아닙니까? (그래서 당뇨?! ㅋㅋㅋ)  왜 전근대 일본사회는 육식을 하지 않았는데 조선은 육식을 했을까? 자기수양-성리학적 주체인 조선 사대부들은 육식에 대해 어떤 태도를 가졌을까? 이런 궁금증이 듭니다.

    갑자기 육식에 대한 문화적 해석, 고고학적 접근을 해보고 싶어졌어요^^ 

  • 2022-01-17 10:55

    최근 <Seaspiracy>와 <Cowspiracy>라는 다큐를 보고... 식구들과 먹거리에 대한 생각을 나누며 고민이 깊어졌더랬지요.

    부다의 가르침에 대한 선생님의 글이 참 절실하게 다가옵니다.

    무엇이 비린것이고, 탐진치인지를!

    다시 생각해보게 되네요.

    고민으로부터 해탈하는 지혜!

    탐나네요^^

    선생님 글 잘 읽었습니다~

  • 2022-01-17 11:20

     "육식이냐, 채식이냐가 아니라 맛에 집착하지 않고 음식에 대해 절제하는 것, 그것이야말로 붓다가 제자들에게 일관되게 요구한 일상의 윤리이자 태도였다. 비린 것은 육식이 아니라 끊임없는 괴로움을 낳는 탐·진·치인 것이다."

    요즘 여러가지 이유로 채식을 해야하나 고민중이었는데 샘 글을 읽으니 그게 중요한게 아니라는 깨달음이 오네요^^

    감사합니다~~

     

  • 2022-01-17 11:25

    너무 좋은 글이네요! 잘 읽었습니다~

  • 2022-01-17 12:44

    무엇이 비린 것인가...

    맛에 집착하지 않고 음식에 대해 절제하는 것!

     

    채식모임하면서 고민했던 부분이라 깊이 와닿았습니다

    요요샘,  감사합니다~~

     

  • 2022-01-17 18:23

    무엇을 먹느냐가 아니라 어떻게 먹느냐의 문제일 수 있겠네요... 잘 읽었습니다~

  • 2022-01-18 09:54

    주말에 만난 아낫님은 비건이세요. 아낫님은 공장삭축산과 도살을 업으로 하는 사람들의 위험성을 말씀하시더라구요. 사람다운 일을 하기 어려운 세상이네요....잘 읽었습니다.

  • 2022-01-19 18:11

    오랜 질문을 여러 결에서 다시 생각해보게 하네요. 잘 읽었습니다. 

  • 2022-02-06 11:23

    먹는 걸 좋아하는 자신에게 질문이 생깁니다.

    그리고 제 마음에 들어온 한 구절은 이거에요.

     “붓다는 하지 말아야 할 것을 지키는 데만 급급한 나머지 무엇을 살펴야 하는 지 놓치고 있는 아마간다의 허를 찔렀다.”

     

요요와 불교산책
  수행은 고행이 아니다   아, 우리는 아주 안락하게 산다. 원한 품은 자들 속에 원한 없이, 원한을 품은 사람들 사이에서 우리는 원한을 여읜 자로 살아간다. 아, 우리는 아주 안락하게 산다. 우리의 것이라고는 결코 없어도, 광음천 세계의 천신들처럼, 기쁨을 음식으로 삼아 지내리라.(『법구경』 197, 200)     고행을 멈추다   보리수 아래에서 위대한 깨달음을 얻기 전 붓다는 어떻게 수행했을까? 붓다의 수행에 대한 가장 큰 오해 중 하나가 엄청난 고통스런 수행의 결과 깨달음에 이르렀다는 것이다. 먹지도 않고 잠을 자지도 않고 피가 마르고 살이 마르는 고행을 해야지만 깨달음에 이를 수 있다면, 우리 같은 평범한 중생에게 깨달음이란 언감생심 꿈도 꿀 수 없는 일이 된다. 그러나 이미 말했듯이 이것은 오해다.   간다라 미술품 중에 유명한 고행상이 있다. 피골이 상접하여 갈비뼈가 그대로 드러난 붓다상이다. 많은 사람들이 이 고행상을 사랑하고, 인간의 한계 끝까지 정진한 붓다에게 경의를 표한다. 깨닫기 전의 붓다가 한 고행은 그야말로 상상 초월의 것이었다. 하루에 곡식 한 톨로 연명하는 곡기를 끊는 수행의 결과 문제의 고행상처럼 등뼈과 창자가 들러붙었다. 영양실조 상태에서 손으로 문지르기만 해도 사지의 털이 몸에서 떨어져 나갔다. 몇 개월이고 잠을 자지 않아 피부와 눈은 그 빛을 잃었고 대소변을 보려고 하면 머리가 앞으로 꼬꾸라졌다. 오랫동안 호흡을 멈추는 수행을 하다 보니 힘센 사람이 머리를 가죽끈으로 조이는 듯한 극심한 두통과 이명에 시달렸다.   일반적으로 붓다의 생애의 주요 장면을...
  수행은 고행이 아니다   아, 우리는 아주 안락하게 산다. 원한 품은 자들 속에 원한 없이, 원한을 품은 사람들 사이에서 우리는 원한을 여읜 자로 살아간다. 아, 우리는 아주 안락하게 산다. 우리의 것이라고는 결코 없어도, 광음천 세계의 천신들처럼, 기쁨을 음식으로 삼아 지내리라.(『법구경』 197, 200)     고행을 멈추다   보리수 아래에서 위대한 깨달음을 얻기 전 붓다는 어떻게 수행했을까? 붓다의 수행에 대한 가장 큰 오해 중 하나가 엄청난 고통스런 수행의 결과 깨달음에 이르렀다는 것이다. 먹지도 않고 잠을 자지도 않고 피가 마르고 살이 마르는 고행을 해야지만 깨달음에 이를 수 있다면, 우리 같은 평범한 중생에게 깨달음이란 언감생심 꿈도 꿀 수 없는 일이 된다. 그러나 이미 말했듯이 이것은 오해다.   간다라 미술품 중에 유명한 고행상이 있다. 피골이 상접하여 갈비뼈가 그대로 드러난 붓다상이다. 많은 사람들이 이 고행상을 사랑하고, 인간의 한계 끝까지 정진한 붓다에게 경의를 표한다. 깨닫기 전의 붓다가 한 고행은 그야말로 상상 초월의 것이었다. 하루에 곡식 한 톨로 연명하는 곡기를 끊는 수행의 결과 문제의 고행상처럼 등뼈과 창자가 들러붙었다. 영양실조 상태에서 손으로 문지르기만 해도 사지의 털이 몸에서 떨어져 나갔다. 몇 개월이고 잠을 자지 않아 피부와 눈은 그 빛을 잃었고 대소변을 보려고 하면 머리가 앞으로 꼬꾸라졌다. 오랫동안 호흡을 멈추는 수행을 하다 보니 힘센 사람이 머리를 가죽끈으로 조이는 듯한 극심한 두통과 이명에 시달렸다.   일반적으로 붓다의 생애의 주요 장면을...
요요
2023.09.20 | 조회 434
요요와 불교산책
초기 불교의 흑역사, 여성 차별적인 팔경법     깔라마들이여, 소문이나 전승이나 여론에 끄달리지 말고, 성전의 권위나 논리나 추론에도 끄달리지 말고, 상태에 대한 분석이나 견해에 대한 이해에도 끄달리지 말고 그럴듯한 개인적인 인상이나 ‘이 수행자가 나의 스승이다’라는 생각에도 끄달리지 마십시오. … 이러한 것들은 실천하여 받아들이면 유익하지 못하고 괴로움을 야기하는 것이라고 스스로 알게 되면 깔라마인들이여, 그 때에 그것들을 버리십시오. (『앙굿따라니까야』 「깔라마의 경」)   붓다가 가르침을 펴기 시작한 초기에 붓다를 따르는 출가수행자들은 모두 남자들 뿐이었다. 여성은 다만 재가 신자로만 붓다와 관계를 맺었다. 아마 당시로서는 마을에서 떨어진 한적한 숲에서 명상하고, 집도 절도 없이 걸식하는 길 위의 삶을 사는 여성의 존재는 생각할 수도 없었기 때문일 것이다. 고대 인도 사회에서 가족의 보호 밖에 있는 여성은 손쉽게 취할 수 있는 성적인 대상이자 남성을 유혹하는 위험한 존재로 인식되었다. 그러므로 여성이 집을 떠나 출가자가 된다는 것은 위험을 무릅쓰는 일이었다. 그러나 붓다의 설법을 듣고 구도의 삶을 살겠다고 결심을 한 남자들이 나온 것처럼 출가하여 수행자로 살겠다는 용감한 여자들이 나오는 것도 시간문제일 뿐이었다. 게다가 붓다가 이끄는 비구 승가는 세속에서의 신분과 나이에 의한 차별을 뛰어넘어 오직 출가한 햇수에 따라 예를 표하는 평등한 공동체의 이상을 보여주고 있었다. 대안적 공동체로서의 승가의 현존은 여성들에게도 ‘바람에 걸리지 않는 그물처럼, 진흙에 더러워지지 않는 연꽃처럼’ 살 수 있다는 희망을 갖게 했을 터. 과연 누가 출가한 여성 수행자로 첫발을 뗄 것인가,...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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2023.08.17 | 조회 291
요요와 불교산책
허스토리, 고대 인도의 여성 수행자들      마음이 잘 집중되어, 최상의 진리를 보는 자에게, 지혜가 항상 나타난다면, 여성의 존재가 무슨 상관이랴. (『테리가타』 3장 「쏘마 장로니의 시」)     고대 인도의 여성철학자들   기원전 4세기, 헬레니즘문명과 인도문명의 만남이 이루어졌다. 전쟁을 통해서였다. 당시 평화조약 체결을 위해 인도에 온 메가스테네스는 『인도견문록』에 ‘인도에는 여성 철학자들이 있어서 남성들과 난해한 것을 당당하게 논의한다’는 기록을 남겼다. 고대 그리스의 민주주의는 남성 시민들의 민주주의였고 철학도 남성들의 전유물이었다. 고대 인도에서도 여성들은 결코 존중받는 존재가 아니었다. 여성은 바라문교의 성전 『베다』를 학습할 수도 없었으므로 지식에 가까이 갈 수조차 없었다. 여성은 남성을 유혹하는 위험한 존재로 취급받았다. 여성들은 월경 전인 어린 나이에 조혼을 강요당했고, 자식을 낳지 못하면 비난 받았으며, 남자의 소유물이나 다를 바 없었다. 남편과 아들의 보호를 받지 못하는 여성은 폭력에 노출되어 있었다. 개인으로서의 여성이 독자적인 목소리를 낸다는 것은 상상하기도 어려운 사회였다. 그런데 메가스테네스가 본, 남성들과 난해한 것을 당당하게 논의하던 고대의 여성들, 그녀들은 누구였을까?   그녀들은 불교 승가로 출가한 비구니들이었다. 기원전 6~5세기, 붓다 재세시부터 최고의 깨달음을 얻은 다수의 비구니들이 존재했다. 그녀들은 여성에게 강요되는 사회적 의무에서 자유로운 존재로서 명상적 삶에 헌신하였고, 붓다의 가르침을 연구하고 토론하며, 제자들을 길러냈다. 다행히 우리는 그녀들의 삶을 『테리가타』를 통해 확인할 수 있다. 『테리가타』는 2,500년 전에 살았던 깨달은 여성들의 성취와 해탈의 기쁨을 노래한 시집이다. 여기에는 모두 73개의 시가 실려있다. 시 중에서 두...
허스토리, 고대 인도의 여성 수행자들      마음이 잘 집중되어, 최상의 진리를 보는 자에게, 지혜가 항상 나타난다면, 여성의 존재가 무슨 상관이랴. (『테리가타』 3장 「쏘마 장로니의 시」)     고대 인도의 여성철학자들   기원전 4세기, 헬레니즘문명과 인도문명의 만남이 이루어졌다. 전쟁을 통해서였다. 당시 평화조약 체결을 위해 인도에 온 메가스테네스는 『인도견문록』에 ‘인도에는 여성 철학자들이 있어서 남성들과 난해한 것을 당당하게 논의한다’는 기록을 남겼다. 고대 그리스의 민주주의는 남성 시민들의 민주주의였고 철학도 남성들의 전유물이었다. 고대 인도에서도 여성들은 결코 존중받는 존재가 아니었다. 여성은 바라문교의 성전 『베다』를 학습할 수도 없었으므로 지식에 가까이 갈 수조차 없었다. 여성은 남성을 유혹하는 위험한 존재로 취급받았다. 여성들은 월경 전인 어린 나이에 조혼을 강요당했고, 자식을 낳지 못하면 비난 받았으며, 남자의 소유물이나 다를 바 없었다. 남편과 아들의 보호를 받지 못하는 여성은 폭력에 노출되어 있었다. 개인으로서의 여성이 독자적인 목소리를 낸다는 것은 상상하기도 어려운 사회였다. 그런데 메가스테네스가 본, 남성들과 난해한 것을 당당하게 논의하던 고대의 여성들, 그녀들은 누구였을까?   그녀들은 불교 승가로 출가한 비구니들이었다. 기원전 6~5세기, 붓다 재세시부터 최고의 깨달음을 얻은 다수의 비구니들이 존재했다. 그녀들은 여성에게 강요되는 사회적 의무에서 자유로운 존재로서 명상적 삶에 헌신하였고, 붓다의 가르침을 연구하고 토론하며, 제자들을 길러냈다. 다행히 우리는 그녀들의 삶을 『테리가타』를 통해 확인할 수 있다. 『테리가타』는 2,500년 전에 살았던 깨달은 여성들의 성취와 해탈의 기쁨을 노래한 시집이다. 여기에는 모두 73개의 시가 실려있다. 시 중에서 두...
요요
2023.07.20 | 조회 463
요요와 불교산책
부처님의 죽음, 완전한 열반     “아난다여, 그대는 나를 위해 쌀라 쌍수 사이에 머리를 북쪽으로 한 침상을 만들어라, 아난다여, 나는 피곤하니 누워야겠다.”(『디가니까야』 「대반열반경」)   아난다는 두 그루 나무 사이에 머리를 북쪽으로 침상을 마련했다. 부처님은 오른쪽 옆구리를 밑으로 하여 사자의 형상을 취한 채, 한 발을 다른 발에 포개고, 새김을 확립하고 올바른 알아차림을 갖추며 누웠다. 꾸시나라의 말라족을 불러 작별인사를 나누고, 제자들과도 마지막 대화를 나누었다. “방일하지 말고 정진하라”는 말씀을 끝으로, 마음을 집중한 고요한 상태로 완전한 열반에 들었다. 부처님의 열반상이 옆으로 누운 모습을 하고 있는 까닭이다.       프롤로그: 부처님 없는 승가에 대한 암시   기원전 6~5세기, 부처님이 활동한 북인도 지역은 중앙집중적 왕권국가들이 벌이는 정복전쟁이 벌어지던 폭력의 시대이기도 했다. 이런 시대에 부처님은 자신을 따르는 수행자들의 조직을 사라져가는 부족 공화국들의 운영원리를 간직한 이름, 상가라고 불렀다. 승가란 상가(saṅgha)를 음차한 말로, 구성원들의 토론과 합의에 의해 운영되는 모임을 의미했다. 승가는 중앙집중적인 복종과 명령, 통제가 아니라 수행자들의 화합과 자율로 운영되는 조직이었다. 부처님은 승가의 조직자이자 지도자였지만, 자신이 승가를 이끈다거나 승가가 자신의 명령에 따라야 한다는 생각을 하지 않았다. 따라서 부처님에게는 승가의 열쇠를 건넬 후계구도도 의발의 전수도 없었다. 부처님의 마지막 가르침을 전하는 경전 『대반열반경』은 부처님이 제자들게 무엇을 남기고 싶어했는지 그 정수를 투명하게 보여준다.   『대반열반경』은 부처님에게 마가다국의 재상이 찾아와서 왕이 밧지족과의 전쟁을 계획하고 있는데 이길 수 있겠는지 질문하는 장면으로 시작한다. 평화와...
부처님의 죽음, 완전한 열반     “아난다여, 그대는 나를 위해 쌀라 쌍수 사이에 머리를 북쪽으로 한 침상을 만들어라, 아난다여, 나는 피곤하니 누워야겠다.”(『디가니까야』 「대반열반경」)   아난다는 두 그루 나무 사이에 머리를 북쪽으로 침상을 마련했다. 부처님은 오른쪽 옆구리를 밑으로 하여 사자의 형상을 취한 채, 한 발을 다른 발에 포개고, 새김을 확립하고 올바른 알아차림을 갖추며 누웠다. 꾸시나라의 말라족을 불러 작별인사를 나누고, 제자들과도 마지막 대화를 나누었다. “방일하지 말고 정진하라”는 말씀을 끝으로, 마음을 집중한 고요한 상태로 완전한 열반에 들었다. 부처님의 열반상이 옆으로 누운 모습을 하고 있는 까닭이다.       프롤로그: 부처님 없는 승가에 대한 암시   기원전 6~5세기, 부처님이 활동한 북인도 지역은 중앙집중적 왕권국가들이 벌이는 정복전쟁이 벌어지던 폭력의 시대이기도 했다. 이런 시대에 부처님은 자신을 따르는 수행자들의 조직을 사라져가는 부족 공화국들의 운영원리를 간직한 이름, 상가라고 불렀다. 승가란 상가(saṅgha)를 음차한 말로, 구성원들의 토론과 합의에 의해 운영되는 모임을 의미했다. 승가는 중앙집중적인 복종과 명령, 통제가 아니라 수행자들의 화합과 자율로 운영되는 조직이었다. 부처님은 승가의 조직자이자 지도자였지만, 자신이 승가를 이끈다거나 승가가 자신의 명령에 따라야 한다는 생각을 하지 않았다. 따라서 부처님에게는 승가의 열쇠를 건넬 후계구도도 의발의 전수도 없었다. 부처님의 마지막 가르침을 전하는 경전 『대반열반경』은 부처님이 제자들게 무엇을 남기고 싶어했는지 그 정수를 투명하게 보여준다.   『대반열반경』은 부처님에게 마가다국의 재상이 찾아와서 왕이 밧지족과의 전쟁을 계획하고 있는데 이길 수 있겠는지 질문하는 장면으로 시작한다. 평화와...
요요
2023.06.11 | 조회 371
요요와 불교산책
견해의 결박에서 벗어나려면     사변적 견해는 견해의 정글이고 견해의 광야이고 견해의 왜곡이고 견해의 동요이고 견해의 결박입니다. 그것은 고통을 수반하고 파멸을 수반하고 번뇌를 수반하고 고뇌를 수반합니다.(『맛지마니까야』 「불의 비유와 밧차곳따의 경」)   설법 중에 붓다가 꽃 한 송이를 들어 올렸다. 대중들이 모두 무슨 뜻인지 몰라 어리둥절하고 있는데 오직 마하가섭만이 빙그레 미소를 띠었다. 꽃을 든 붓다의 뜻이 이심전심으로 전해진 것이다. 염화시중(拈花示衆), 꽃을 들어 대중에게 보인다는 뜻의 사자성어를 낳은 에피소드다. ‘염화미소(拈花微笑)’라고도 한다. 동아시아 선불교 전통은 이런 방식으로 마음에서 마음으로 법이 전해지는 것을 강조했다. 선불교가 말과 글자에 매이지 않는다는 의미의 불립문자(不立文字)를 강조할 때 근거로 삼는 중요한 에피소드다.   그러나 2,500년 전 붓다의 육성을 느낄 수 있는 『니까야』나 『아함경』에는 이 장면이 등장하지도 않는다. 초기경전에서 만나는 붓다는 선사들처럼 맥락을 짐작하기 힘든 함축적인 말 한마디를 툭 던진다거나 무언가를 암시하는 어떤 행동으로 자신의 뜻을 전달하지 않는다. 오히려 논리정연한 말로 설득하고, 무릎을 칠 수밖에 없는 적절한 비유로 마음을 움직이고, 의표를 찌르는 반문으로 질문자 스스로 자신의 허점을 시인하게 하는 변재의 달인, 수사학의 달인에 가깝다. 그러나 그렇게 논리와 비유, 반문 등 어느 것 하나 흠잡을 데 없는 자유자재한 변재의 능력을 가진 붓다가 묵묵부답, 침묵으로 응답한 특별한 경우가 있다. 그것을 십무기(十無記)라 한다.         붓다의 침묵   무기(無記)란 질문에 응답하지 않았다는 뜻이다. 질문이 열 가지였기 때문에 십무기라 한다. 대관절 어떤...
견해의 결박에서 벗어나려면     사변적 견해는 견해의 정글이고 견해의 광야이고 견해의 왜곡이고 견해의 동요이고 견해의 결박입니다. 그것은 고통을 수반하고 파멸을 수반하고 번뇌를 수반하고 고뇌를 수반합니다.(『맛지마니까야』 「불의 비유와 밧차곳따의 경」)   설법 중에 붓다가 꽃 한 송이를 들어 올렸다. 대중들이 모두 무슨 뜻인지 몰라 어리둥절하고 있는데 오직 마하가섭만이 빙그레 미소를 띠었다. 꽃을 든 붓다의 뜻이 이심전심으로 전해진 것이다. 염화시중(拈花示衆), 꽃을 들어 대중에게 보인다는 뜻의 사자성어를 낳은 에피소드다. ‘염화미소(拈花微笑)’라고도 한다. 동아시아 선불교 전통은 이런 방식으로 마음에서 마음으로 법이 전해지는 것을 강조했다. 선불교가 말과 글자에 매이지 않는다는 의미의 불립문자(不立文字)를 강조할 때 근거로 삼는 중요한 에피소드다.   그러나 2,500년 전 붓다의 육성을 느낄 수 있는 『니까야』나 『아함경』에는 이 장면이 등장하지도 않는다. 초기경전에서 만나는 붓다는 선사들처럼 맥락을 짐작하기 힘든 함축적인 말 한마디를 툭 던진다거나 무언가를 암시하는 어떤 행동으로 자신의 뜻을 전달하지 않는다. 오히려 논리정연한 말로 설득하고, 무릎을 칠 수밖에 없는 적절한 비유로 마음을 움직이고, 의표를 찌르는 반문으로 질문자 스스로 자신의 허점을 시인하게 하는 변재의 달인, 수사학의 달인에 가깝다. 그러나 그렇게 논리와 비유, 반문 등 어느 것 하나 흠잡을 데 없는 자유자재한 변재의 능력을 가진 붓다가 묵묵부답, 침묵으로 응답한 특별한 경우가 있다. 그것을 십무기(十無記)라 한다.         붓다의 침묵   무기(無記)란 질문에 응답하지 않았다는 뜻이다. 질문이 열 가지였기 때문에 십무기라 한다. 대관절 어떤...
요요
2023.03.20 | 조회 448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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