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요요와 불교산책 2회] 두번째 화살에 맞지 않으려면

요요
2021-09-08 10:16
613

두 번째 화살에 맞지 않으려면

 

번뇌의 화살을 뽑아 집착 없이 마음의 평안을 얻는다면 모든 슬픔을 뛰어 넘어 슬픔 없는 님으로 열반에 들 것입니다.

(『숫타니파타』 3품 8 『화살의 경』)

 

최근 나는 그 어느 때보다 삶이 고해(苦海)라는 것을 실감하며 살고 있다. 작년 가을, 긍정과 명랑의 아이콘이었던 어머니에게 갑자기 심각한 우울증이 왔다. 추운 겨울날 새벽 어머니는 자살충동을 느끼고 집을 나섰다. 천만 다행으로 길에 쓰러져 있던 어머니를 찾은 우리는 사태의 심각성을 느끼고 급히 어머니를 입원시켰다. 이번에는 치매가 진행 중이던 아버지에게 문제가 생겼다. 아버지는 무조건 어머니를 데려오라고 시도 때도 없이 고함을 지르고 화를 내며 점점 폭력적으로 변해갔다. 아버지도 입원해서 약물치료를 받아야했다.

 

퇴원한 날 어머니는 엎친 데 덮친 격으로 낙상사고를 당해 고관절 수술을 받았다. 요양병원에 입원한 어머니와 집으로 돌아온 아버지의 몸과 마음은 여전히 불안했다. 살얼음을 딛는 것 같은 몇 개월을 보내고 이제 겨우 한숨 돌리나 했는데 얼마 전 어머니의 직장과 질 사이에 누공이 생긴 것을 알게 되었다. 망설이고 주저하다 수술을 결정했는데 수술 후 어머니는 컨디션 난조를 보이고 있다. 상황이 달라질 때마다 내 마음은 오르락내리락 롤러코스터를 탄다. 일희일비하지 않고 평정심을 유지하며 다가오는 일들에 대처하고 싶은데, 그것이 참, 쉽지 않다.

 

첫 번째 화살과 두 번째 화살

 

내 부모님이 그렇듯이 아무리 피하고 싶어도 생로병사의 사건들은 결국 닥쳐오고야 만다. 2500년 전 왕자로 태어난 고타마 싯다르타가 안락한 왕궁을 떠나 출가한 것도 늙고, 병들고, 죽는 사람들과 마주쳤기 때문이었다. 그 마주침을 통해 그는 삶이란 괴로움이고 그것은 누구도 피할 수 없다는 것을 예리하게 직시했다. 고타마 싯다르타는 생사의 괴로움에서 벗어날 수 있는 길을 찾아 수행자가 되었고 마침내 깨달은 자 붓다가 되어 고통이 종식되었음을 선언했다. 그가 성취한 괴로움의 종식이란 어떤 상태일까. 깨달은 자가 되면 어떤 고통도 느끼지 않는 것일까? 이 문제를 주제로 붓다 자신이 제자들에게 직접 질문을 던진 적이 있다.

 

수행승들이여, 일반 사람들은 즐거운 느낌도 느끼고, 괴로운 느낌도 느끼고, 즐겁지도 괴롭지도 않은 느낌도 느낀다. 수행승들이여, 지혜로운 사람들도 역시 즐거운 느낌도 느끼고, 괴로운 느낌도 느끼고, 즐겁지도 괴롭지도 않은 느낌도 느낀다. 수행승들이여, 그렇다면 일반 사람들과 지혜로운 사람들 사이에 어떠한 차이가 있는가?(『쌍윳따니까야』 36:6, 『화살의 경』)

 

붓다에 따르면 깨달은 자도 보통 사람들과 마찬가지로 즐거운 느낌과 괴로운 느낌을 느낀다. 느낌이란 무엇일까? 신경생물학자 안토니오 다마지오는 『스피노자의 뇌』에서 느낌이란 우리 신경계의 자동적 항상성 조절 기제라고 설명한다. 그는 느낌을 좀 더 세분하여 정서와 느낌의 두 가지로 구분한다. 그에 따르면 정서는 신경계의 작용인 신체적 표상이고, 느낌은 신체적 표상(정서)에 대응하는 심적 표상이다. 즉 느낌은 특정한 신체상태에 대한 관념 혹은 지각이다.

 

우리는 붓다가 말하는 느낌을 안토니오 다마지오가 정의하는 정서와 느낌을 통칭한 것이라고 이해해도 크게 어긋나지 않을 것 같다. 즐거운 느낌이든 괴로운 느낌이든 그 기반은 외부와 접촉하면서 생겨나는 몸의 반응과 그것에 대한 심적 표상이다. 신체의 상태에 따라 우리는 즐거운 느낌을 갖거나 괴로운 느낌을 갖게 된다. 몸에 열이 나면 괴로운 느낌을 갖게 되고, 열이 떨어지면 즐거운 느낌을 갖게 된다. 사랑하는 사람을 만나면 즐거운 느낌이 일어나고, 사랑하는 사람과 헤어지면 괴로운 느낌이 일어난다. 그러니 보통사람이든 붓다든 자기 신체 상태에 대한 지각으로서 느낌을 갖는 것은 너무나 당연한 일이다. 그런데 비록 느낌을 갖는다는 점에서는 같지만, 느낌이 일어날 때 어떻게 생각하고 행동하는가는 완전히 다르다.

 

일반 사람들은 괴로운 느낌에 접촉하면 슬퍼하고, 비탄하고, 비통해 하고, 가슴을 치며 울고, 착란에 빠진다. 그들은 두 가지 종류의 고통, 즉 신체적인 고통과 정신적인 고통을 느낀다.(…) 지혜로운 사람은 괴로운 느낌에 접촉하면 슬퍼하지 않고, 비탄하지 않고, 비통해하지 않고, 가슴을 치며 울지 않고, 착란에 빠지지 않는다. 그는 한 가지의 고통, 즉 신체적인 고통은 느끼지만 정신적인 고통은 느끼지 않는다.(『쌍윳따니까야』 36:6, 『화살의 경』)

 

보통 사람들은 괴로운 느낌에 접촉하면 신체적 고통에 더해 정신적 고통을 느낀다. 그러나 지혜로운 사람들은 괴로운 느낌에 접촉하면 그것의 일어남과 사라짐을 알아차리는 것에서 멈춘다. 붓다는 괴로운 느낌으로 인한 신체적 고통을 첫 번째 화살에, 신체적 고통에 덧붙여지는 정신적 고통을 두 번째 화살에 비유했다. 지혜로운 사람들이 첫 번째 화살만을 맞는 것에 비해 보통 사람들은 첫 번째 화살에 이어 두 번째 화살을 맞는다는 것이다.

 

 

정신적 고통의 뿌리, ··치 삼독

 

살아있는 한 첫 번째 화살은 누구도 피할 수 없다. 이와 달리 두 번째 화살은 겪을 수도 있고 겪지 않을 수도 있는 정신적 고통이다. 두 번째 화살은 신체적인 느낌에 덧붙여지는 ‘인간적인 너무나 인간적인’ 감정과 생각들이다. 불교는 이와 같이 정신적 고통을 낳는 마음의 작용을 특별히 번뇌라고 부른다. 번뇌는 우리의 마음을 산란하게 하고, 사태를 있는 그대로 보지 못하게 하며, 우리를 수동적이고 무력한 존재로 만들고, 생산적 역량을 감소시킨다. 두 번째 화살은 바로 그러한 번뇌들이다. 번뇌에 붙들려 버릴 때 우리는 필연적으로 두 번째 화살로 인한 괴로움을 겪게 된다.

 

일반 사람은 (…) 괴로운 느낌에 접촉되면 분노를 품게 된다. 그가 분노를 품게 될 때 분노의 잠재적 경향이 그에게 잠재된다. (…) 그가 감각적 쾌락의 즐거움을 찾을 때 즐거운 느낌에 대한 탐욕의 경향이 그에게 잠재된다. 그는 그러한 느낌들의 발생과 소멸, 유혹과 위험, 그리고 여읨에 관하여 있는 그대로 알지 못한다. 그것을 있는 그대로 알지 못할 때 괴롭지도 즐겁지도 않은 느낌에 대한 무지의 잠재적 경향이 그에게 잠재된다.(『쌍윳따니까야』 36:6, 『화살의 경』)

 

두 번째 화살은 탐욕, 분노 그리고 무지(어리석음)로 인한 괴로움이다. 이것을 탐(貪)·진(瞋)·치(癡) 삼독이라고 부른다. 즐거운 느낌, 괴로운 느낌, 즐겁지도 괴롭지도 않은 느낌이 일어날 때 보통 사람들은 그 느낌들에 대해 탐욕과 분노와 무지의 잠재적 경향, 즉 번뇌의 습기를 쌓아 나간다. 잠재적 경향은 습관과 패턴으로 반복된다. 괴로운 느낌이 일어나면 분노를 품고, 분노를 키운다. 즐거운 느낌이 일어나면 갈애를 느끼고, 갈망을 키운다. 느낌들은 무상하다. 조건이 갖추어지면 느낌도 생겨나고 조건이 사라지면 느낌도 사라진다. 그것을 있는 그대로 알지 못하기 때문에 내게 일어난 무상한 느낌들을, 무상한 느낌들에 대한 습의 반복을 아무런 반성적 성찰 없이 곧바로 ‘나’라고, ‘나의 것’이라고 집착한다. 그럴 때 여지없이 우리는 스스로 불러들인 두 번째 화살에 맞는다.

 

부모님에게 문제가 생겼을 때 나 역시 크게 다르지 않았다. ‘나’만 이런 일을 겪는 것처럼 비통해 하고, 세상에 ‘나’보다 더 가여운 사람이 없다는 듯이 자기연민에 빠지고, 비극의 주인공이 된 것처럼 ‘나’의 처지를 한탄하고, ‘나‘의 수고로움을 몰라주는 주변사람들을 원망했다. 갈팡질팡하는 ‘나’의 무능력을 탓하고 자책했다. 그러니 감정의 롤러코스터를 타는 두 번째 화살을 피할 수 없었다.

 

두 번째 화살은 이렇게 우리를 정신적 고통에 빠뜨릴 뿐만 아니라 자신이 처해있는 조건과 상황을 있는 그대로 살피지 못하게 한다. 한마디로 우리를 착란에 빠뜨려서 내 생각과 감정 외에는 보이는 것도 들리는 것도 없는 사람이 되게 한다. 상상이나 망상에 가까운 부적합한 관념과 그로 인한 정신적 괴로움의 노예가 된다. 두 번째 화살의 비유는 그런 속박된 마음의 메커니즘을 잘 보여준다.

 

 

두 번째 화살은 공부와 수행의 영역

 

두 번째 화살을 맞지 않으려면 번뇌가 일어나지 않게 하는 지혜와, 이미 번뇌가 일어났을 경우에는 그것을 알아차리고 멈출 수 있는 수행이 필요하다. 수행과 지혜를 길러 탐·진·치 삼독으로부터 벗어난 사람은 두 번째 화살을 맞지 않는다. 그러나 그가 아무 고통도 느끼지 못하는 죽은 나무토막 같은 존재가 되거나 감정이 메마른 냉정한 사람이라는 뜻은 아니다. 오히려 자신을 둘러싼 주변 사물들을 명징하게 인식하고 온갖 생명체와 사람들의 기쁨과 슬픔에 대해 더 예민한 감각을 갖고 풍부한 감정을 느끼지만 그의 마음의 평화가 흔들리지 않는다는 것을 의미한다. 첫 번째 화살을 맞았지만 두 번째 화살로부터 자유로웠던 붓다를 통해서 그것을 알 수 있다.

 

80세의 노쇠한 붓다는 금세공사 쭌다가 공양한 음식을 먹고 혈변이 섞인 설사증세로 죽음의 문턱까지 갔다. 붓다 역시 늙음과 질병과 죽음이라는 첫 번째 화살을 피할 수 없었다. 그러나 그는 극심한 고통 속에서도 강한 선정과 삼매의 힘으로 평정을 유지했다. 붓다는 쭌다를 원망하는 것이 아니라 쭌다가 자신에게 공양한 일로 괴로워하거나 남들로부터 비난받을까 염려했다. 그는 쭌다를 위해 “열반 직전의 붓다에 대한 공양만큼 공덕이 큰 것은 없다”는 자비의 말을 남겼다.

 

사람이 모인 곳이다 보니 붓다를 따르는 수행자 공동체에서도 갈등과 불화가 그치지 않았다. 아무리 붓다라 해도 공동체적 삶 속에서 생겨나는 감정의 소용돌이로부터 자유로울 수는 없었다. 언젠가 우안거 중에 꼬삼비의 수행자들 사이에서 어떤 사람이 화장실 뒤처리를 제대로 하지 않은 문제를 둘러싸고 의견이 대립되었다. 이로부터 그들은 두 패로 나누어져 사사건건 서로를 비난하고 저주했다. 분노에 사로잡힌 이들의 귀에는 화합하라는 붓다의 조언이 들리지도 않았다. 붓다는 자신의 견해에 완고하게 사로잡혀 있는 사람들과 논쟁하지 않았다. 그는 꼬삼비를 떠나 홀로 숲으로 갔다. 붓다가 아니라 서로 내가 옳다며 다투는 수행자들에게 더 쉽게 감정이입이 되는 나는 이런 상황에서 숲에서 붓다가 누렸을 평정과 고요를 짐작조차 하기 어렵다.

 

첫 번째 화살의 비유에서 알 수 있듯이 불교는 괴로움을 삶의 불가피한 조건으로 파악한다. 첫 번째 화살이 우리가 어찌할 수 없는 필연성의 영역에 속한다면 두 번째 화살은 우리가 하기에 따라 피할 수도 있는 자유의 영역에 속한다. 두 번째 화살은 공부와 수행의 영역이다. 공부와 수행을 통해 우리는 첫 번째 화살의 필연성을 직시함으로써 두 번째 화살의 고통으로부터 자유로워질 수 있다. 붓다는 어떤 고통도 없는 삶이 아니라 고통을 마주하는 우리의 관점과 태도를 변화시킴으로써 고통에 속박되지 않는 자유를 누릴 수 있다는 것을 가르쳤다.

 

그러니 지금 우리가 두 번째 화살을 맞고 괴로워하고 있다 해도 다행인 것은 이 괴로움이 우리를 영원히 얽매는 족쇄는 아닐 수 있다는 것이다. 비록 족쇄라 하더라도 언젠가는 풀 수 있는 족쇄이기 때문이다. 지금 당장 그 족쇄를 완전히 풀지 못한다 해도 그 괴로움이 탐·진·치로부터 비롯되는 정신적 고통인 번뇌라는 것을 알고 지혜를 키우는 공부와 수행을 계속한다면 언젠가는 두 번째 화살을 뽑을 희망도 있지 않겠는가.

 

지혜로운 사람은 괴로운 느낌을 느끼더라도 속박을 여읜 상태에서 그것을 느낀다. 그는 즐거운 느낌을 느끼더라도 속박을 여읜 상태에서 그것을 느낀다. 그는 괴롭지도 즐겁지도 않은 느낌을 느끼더라도 속박을 여읜 상태로 그것을 느낀다. 이들을 태어남, 늙음, 죽음에서 여읜 자, 슬픔과 비탄과 고통과 불쾌와 절망에서 여읜 자, 괴로움에서 여읜 자라고 한다.(『쌍윳따니까야』 36:6, 『화살의 경』)

 

댓글 11
  • 2021-09-08 11:02

    지난 해 올해 너무 많은 일들이 있었어요!! 이런 생각도 두 번째 화살이겠죠? 두 번째 화살 피하기 어렵네요.....

  • 2021-09-08 11:58

    저를 지나쳐 날아가는 화살도 가져다가 제 몸에 꽂아넣는 저에게 큰 깨달음을 주는 글이었습니다. ㅠ

  • 2021-09-08 12:05

    요양원에 계시는 아버지에게 전화가 왔습니다. 귀가 안들리시니 급하게 연락할 일이 아니면 전화를 잘 하지 않게 되니 한참 연락없이 있었는데 아버지가 참다참다 전화를 하신 듯.ㅎㅎ 요 며칠 새 기침이 심하고 몸도 안 좋은데 꿈자리도 안좋다고, 자식 걱정에 전화하신 거였어요. 그런데 일단 아버지가 내 말도 잘 못들으시니까 당신이 한 말 또 하고, 한 말 또하고...그러려면 왜 전화를 하셨나 싶을 정도로 우린 불통이었어요. 고함을 지르듯 해야 겨우 한 두 마디 알아들으시니 그냥 듣고 있지만 '기침이 많이 나온다'는 이야기만 열댓번 하는 아버지와의 통화는 짜증이 났지요. 그러다 요요샘의 이 글이 생각났어요. '아, 아흔이 넘은 아버지가 저렇게 큰 목소리로 이야기를 할 수 있는 것만도 어디냐, 꿈자리가 나쁘다고 자식걱정을 하는 멀쩡한 정신을 가지고 있는게 어디냐'하는 생각에 미치자, 오히려 행복한 느낌이 밀려오네요. 이 건에 대해서는 두번 째 화살을 피한 것 같습니다.ㅎㅎ

    • 2021-09-08 12:09

      ㅋㅋㅋㅋㅋㅋㅋㅋㅋㅋㅋㅋ

  • 2021-09-08 12:08

    傷! 

    喜怒哀樂之未發, 謂之中; 發而皆中節, 謂之和. 中也者, 天下之大本也; 和也者, 天下之達道也. 致中和, 天地位焉, 萬物育焉onebyone.gif?action_id=68dae09acacd7acb36a918266dd2100!!

    버뜨 나는.... ㅠㅠ

  • 2021-09-08 12:55

    첫번째 화살을 맞으면 마치 자동문이 열리는 것처럼 우리는 두번째 화살을 가슴에 박고

    살아가는 존재가 아닌가 합니다

    이건 두번째 화살이니까 괴로워할 필요없어 하고 생각할 때,우리는 이미 그 화살을 끌어안아버리고 있죠

    저는 그 첫번째 화살을 온전히 맞아버리는 능력 또는 힘에 두번째 화살을 피할수 있는 열쇠가 있다는 생각이 듭니다

    물론 그 능력은 요요샘 글에도 있듯이 수행,성찰, 공부..이런 것들이겠죠~

    요요샘~오랜만에 ..너무 잘 읽었습니다!

     

  • 2021-09-08 13:09

    첫번째 화살의 필연성을 알게되면 피할수 있는 두번째 화살

    관점과 태도의 변화로 자유로울 수 있다

    그건 다른 누가 하는게 아니라 바로 내가 하는 것이다

    두번째 화살이라도 피해가보자 고 생각은 하나...



     

  • 2021-09-08 19:44

    공부와 수행을 통해 우리는 첫 번째 화살의 필연성을 직시함으로써 두 번째 화살의 고통으로부터 자유로워질 수 있다_라는 요요샘의 글이 허둥되는 저에게 와서 두들겨 주셨습니다~^^ 글이 너무 좋아요^^

  • 2021-09-09 20:36

    샘^^ 잘 읽었습니다^^ 

  • 2021-09-09 22:09

    저도 잘 읽었습니다

    총알에 화살에 정신없는하루입니다

  • 2021-09-30 13:18

    어찌 이리 글을 맛깔나게 잘쓰시는지..감동 ㅠㅠ

요요와 불교산책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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초기 불교의 흑역사, 여성 차별적인 팔경법     깔라마들이여, 소문이나 전승이나 여론에 끄달리지 말고, 성전의 권위나 논리나 추론에도 끄달리지 말고, 상태에 대한 분석이나 견해에 대한 이해에도 끄달리지 말고 그럴듯한 개인적인 인상이나 ‘이 수행자가 나의 스승이다’라는 생각에도 끄달리지 마십시오. … 이러한 것들은 실천하여 받아들이면 유익하지 못하고 괴로움을 야기하는 것이라고 스스로 알게 되면 깔라마인들이여, 그 때에 그것들을 버리십시오. (『앙굿따라니까야』 「깔라마의 경」)   붓다가 가르침을 펴기 시작한 초기에 붓다를 따르는 출가수행자들은 모두 남자들 뿐이었다. 여성은 다만 재가 신자로만 붓다와 관계를 맺었다. 아마 당시로서는 마을에서 떨어진 한적한 숲에서 명상하고, 집도 절도 없이 걸식하는 길 위의 삶을 사는 여성의 존재는 생각할 수도 없었기 때문일 것이다. 고대 인도 사회에서 가족의 보호 밖에 있는 여성은 손쉽게 취할 수 있는 성적인 대상이자 남성을 유혹하는 위험한 존재로 인식되었다. 그러므로 여성이 집을 떠나 출가자가 된다는 것은 위험을 무릅쓰는 일이었다. 그러나 붓다의 설법을 듣고 구도의 삶을 살겠다고 결심을 한 남자들이 나온 것처럼 출가하여 수행자로 살겠다는 용감한 여자들이 나오는 것도 시간문제일 뿐이었다. 게다가 붓다가 이끄는 비구 승가는 세속에서의 신분과 나이에 의한 차별을 뛰어넘어 오직 출가한 햇수에 따라 예를 표하는 평등한 공동체의 이상을 보여주고 있었다. 대안적 공동체로서의 승가의 현존은 여성들에게도 ‘바람에 걸리지 않는 그물처럼, 진흙에 더러워지지 않는 연꽃처럼’ 살 수 있다는 희망을 갖게 했을 터. 과연 누가 출가한 여성 수행자로 첫발을 뗄 것인가,...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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2023.08.17 | 조회 291
요요와 불교산책
허스토리, 고대 인도의 여성 수행자들      마음이 잘 집중되어, 최상의 진리를 보는 자에게, 지혜가 항상 나타난다면, 여성의 존재가 무슨 상관이랴. (『테리가타』 3장 「쏘마 장로니의 시」)     고대 인도의 여성철학자들   기원전 4세기, 헬레니즘문명과 인도문명의 만남이 이루어졌다. 전쟁을 통해서였다. 당시 평화조약 체결을 위해 인도에 온 메가스테네스는 『인도견문록』에 ‘인도에는 여성 철학자들이 있어서 남성들과 난해한 것을 당당하게 논의한다’는 기록을 남겼다. 고대 그리스의 민주주의는 남성 시민들의 민주주의였고 철학도 남성들의 전유물이었다. 고대 인도에서도 여성들은 결코 존중받는 존재가 아니었다. 여성은 바라문교의 성전 『베다』를 학습할 수도 없었으므로 지식에 가까이 갈 수조차 없었다. 여성은 남성을 유혹하는 위험한 존재로 취급받았다. 여성들은 월경 전인 어린 나이에 조혼을 강요당했고, 자식을 낳지 못하면 비난 받았으며, 남자의 소유물이나 다를 바 없었다. 남편과 아들의 보호를 받지 못하는 여성은 폭력에 노출되어 있었다. 개인으로서의 여성이 독자적인 목소리를 낸다는 것은 상상하기도 어려운 사회였다. 그런데 메가스테네스가 본, 남성들과 난해한 것을 당당하게 논의하던 고대의 여성들, 그녀들은 누구였을까?   그녀들은 불교 승가로 출가한 비구니들이었다. 기원전 6~5세기, 붓다 재세시부터 최고의 깨달음을 얻은 다수의 비구니들이 존재했다. 그녀들은 여성에게 강요되는 사회적 의무에서 자유로운 존재로서 명상적 삶에 헌신하였고, 붓다의 가르침을 연구하고 토론하며, 제자들을 길러냈다. 다행히 우리는 그녀들의 삶을 『테리가타』를 통해 확인할 수 있다. 『테리가타』는 2,500년 전에 살았던 깨달은 여성들의 성취와 해탈의 기쁨을 노래한 시집이다. 여기에는 모두 73개의 시가 실려있다. 시 중에서 두...
허스토리, 고대 인도의 여성 수행자들      마음이 잘 집중되어, 최상의 진리를 보는 자에게, 지혜가 항상 나타난다면, 여성의 존재가 무슨 상관이랴. (『테리가타』 3장 「쏘마 장로니의 시」)     고대 인도의 여성철학자들   기원전 4세기, 헬레니즘문명과 인도문명의 만남이 이루어졌다. 전쟁을 통해서였다. 당시 평화조약 체결을 위해 인도에 온 메가스테네스는 『인도견문록』에 ‘인도에는 여성 철학자들이 있어서 남성들과 난해한 것을 당당하게 논의한다’는 기록을 남겼다. 고대 그리스의 민주주의는 남성 시민들의 민주주의였고 철학도 남성들의 전유물이었다. 고대 인도에서도 여성들은 결코 존중받는 존재가 아니었다. 여성은 바라문교의 성전 『베다』를 학습할 수도 없었으므로 지식에 가까이 갈 수조차 없었다. 여성은 남성을 유혹하는 위험한 존재로 취급받았다. 여성들은 월경 전인 어린 나이에 조혼을 강요당했고, 자식을 낳지 못하면 비난 받았으며, 남자의 소유물이나 다를 바 없었다. 남편과 아들의 보호를 받지 못하는 여성은 폭력에 노출되어 있었다. 개인으로서의 여성이 독자적인 목소리를 낸다는 것은 상상하기도 어려운 사회였다. 그런데 메가스테네스가 본, 남성들과 난해한 것을 당당하게 논의하던 고대의 여성들, 그녀들은 누구였을까?   그녀들은 불교 승가로 출가한 비구니들이었다. 기원전 6~5세기, 붓다 재세시부터 최고의 깨달음을 얻은 다수의 비구니들이 존재했다. 그녀들은 여성에게 강요되는 사회적 의무에서 자유로운 존재로서 명상적 삶에 헌신하였고, 붓다의 가르침을 연구하고 토론하며, 제자들을 길러냈다. 다행히 우리는 그녀들의 삶을 『테리가타』를 통해 확인할 수 있다. 『테리가타』는 2,500년 전에 살았던 깨달은 여성들의 성취와 해탈의 기쁨을 노래한 시집이다. 여기에는 모두 73개의 시가 실려있다. 시 중에서 두...
요요
2023.07.20 | 조회 463
요요와 불교산책
부처님의 죽음, 완전한 열반     “아난다여, 그대는 나를 위해 쌀라 쌍수 사이에 머리를 북쪽으로 한 침상을 만들어라, 아난다여, 나는 피곤하니 누워야겠다.”(『디가니까야』 「대반열반경」)   아난다는 두 그루 나무 사이에 머리를 북쪽으로 침상을 마련했다. 부처님은 오른쪽 옆구리를 밑으로 하여 사자의 형상을 취한 채, 한 발을 다른 발에 포개고, 새김을 확립하고 올바른 알아차림을 갖추며 누웠다. 꾸시나라의 말라족을 불러 작별인사를 나누고, 제자들과도 마지막 대화를 나누었다. “방일하지 말고 정진하라”는 말씀을 끝으로, 마음을 집중한 고요한 상태로 완전한 열반에 들었다. 부처님의 열반상이 옆으로 누운 모습을 하고 있는 까닭이다.       프롤로그: 부처님 없는 승가에 대한 암시   기원전 6~5세기, 부처님이 활동한 북인도 지역은 중앙집중적 왕권국가들이 벌이는 정복전쟁이 벌어지던 폭력의 시대이기도 했다. 이런 시대에 부처님은 자신을 따르는 수행자들의 조직을 사라져가는 부족 공화국들의 운영원리를 간직한 이름, 상가라고 불렀다. 승가란 상가(saṅgha)를 음차한 말로, 구성원들의 토론과 합의에 의해 운영되는 모임을 의미했다. 승가는 중앙집중적인 복종과 명령, 통제가 아니라 수행자들의 화합과 자율로 운영되는 조직이었다. 부처님은 승가의 조직자이자 지도자였지만, 자신이 승가를 이끈다거나 승가가 자신의 명령에 따라야 한다는 생각을 하지 않았다. 따라서 부처님에게는 승가의 열쇠를 건넬 후계구도도 의발의 전수도 없었다. 부처님의 마지막 가르침을 전하는 경전 『대반열반경』은 부처님이 제자들게 무엇을 남기고 싶어했는지 그 정수를 투명하게 보여준다.   『대반열반경』은 부처님에게 마가다국의 재상이 찾아와서 왕이 밧지족과의 전쟁을 계획하고 있는데 이길 수 있겠는지 질문하는 장면으로 시작한다. 평화와...
부처님의 죽음, 완전한 열반     “아난다여, 그대는 나를 위해 쌀라 쌍수 사이에 머리를 북쪽으로 한 침상을 만들어라, 아난다여, 나는 피곤하니 누워야겠다.”(『디가니까야』 「대반열반경」)   아난다는 두 그루 나무 사이에 머리를 북쪽으로 침상을 마련했다. 부처님은 오른쪽 옆구리를 밑으로 하여 사자의 형상을 취한 채, 한 발을 다른 발에 포개고, 새김을 확립하고 올바른 알아차림을 갖추며 누웠다. 꾸시나라의 말라족을 불러 작별인사를 나누고, 제자들과도 마지막 대화를 나누었다. “방일하지 말고 정진하라”는 말씀을 끝으로, 마음을 집중한 고요한 상태로 완전한 열반에 들었다. 부처님의 열반상이 옆으로 누운 모습을 하고 있는 까닭이다.       프롤로그: 부처님 없는 승가에 대한 암시   기원전 6~5세기, 부처님이 활동한 북인도 지역은 중앙집중적 왕권국가들이 벌이는 정복전쟁이 벌어지던 폭력의 시대이기도 했다. 이런 시대에 부처님은 자신을 따르는 수행자들의 조직을 사라져가는 부족 공화국들의 운영원리를 간직한 이름, 상가라고 불렀다. 승가란 상가(saṅgha)를 음차한 말로, 구성원들의 토론과 합의에 의해 운영되는 모임을 의미했다. 승가는 중앙집중적인 복종과 명령, 통제가 아니라 수행자들의 화합과 자율로 운영되는 조직이었다. 부처님은 승가의 조직자이자 지도자였지만, 자신이 승가를 이끈다거나 승가가 자신의 명령에 따라야 한다는 생각을 하지 않았다. 따라서 부처님에게는 승가의 열쇠를 건넬 후계구도도 의발의 전수도 없었다. 부처님의 마지막 가르침을 전하는 경전 『대반열반경』은 부처님이 제자들게 무엇을 남기고 싶어했는지 그 정수를 투명하게 보여준다.   『대반열반경』은 부처님에게 마가다국의 재상이 찾아와서 왕이 밧지족과의 전쟁을 계획하고 있는데 이길 수 있겠는지 질문하는 장면으로 시작한다. 평화와...
요요
2023.06.11 | 조회 371
요요와 불교산책
견해의 결박에서 벗어나려면     사변적 견해는 견해의 정글이고 견해의 광야이고 견해의 왜곡이고 견해의 동요이고 견해의 결박입니다. 그것은 고통을 수반하고 파멸을 수반하고 번뇌를 수반하고 고뇌를 수반합니다.(『맛지마니까야』 「불의 비유와 밧차곳따의 경」)   설법 중에 붓다가 꽃 한 송이를 들어 올렸다. 대중들이 모두 무슨 뜻인지 몰라 어리둥절하고 있는데 오직 마하가섭만이 빙그레 미소를 띠었다. 꽃을 든 붓다의 뜻이 이심전심으로 전해진 것이다. 염화시중(拈花示衆), 꽃을 들어 대중에게 보인다는 뜻의 사자성어를 낳은 에피소드다. ‘염화미소(拈花微笑)’라고도 한다. 동아시아 선불교 전통은 이런 방식으로 마음에서 마음으로 법이 전해지는 것을 강조했다. 선불교가 말과 글자에 매이지 않는다는 의미의 불립문자(不立文字)를 강조할 때 근거로 삼는 중요한 에피소드다.   그러나 2,500년 전 붓다의 육성을 느낄 수 있는 『니까야』나 『아함경』에는 이 장면이 등장하지도 않는다. 초기경전에서 만나는 붓다는 선사들처럼 맥락을 짐작하기 힘든 함축적인 말 한마디를 툭 던진다거나 무언가를 암시하는 어떤 행동으로 자신의 뜻을 전달하지 않는다. 오히려 논리정연한 말로 설득하고, 무릎을 칠 수밖에 없는 적절한 비유로 마음을 움직이고, 의표를 찌르는 반문으로 질문자 스스로 자신의 허점을 시인하게 하는 변재의 달인, 수사학의 달인에 가깝다. 그러나 그렇게 논리와 비유, 반문 등 어느 것 하나 흠잡을 데 없는 자유자재한 변재의 능력을 가진 붓다가 묵묵부답, 침묵으로 응답한 특별한 경우가 있다. 그것을 십무기(十無記)라 한다.         붓다의 침묵   무기(無記)란 질문에 응답하지 않았다는 뜻이다. 질문이 열 가지였기 때문에 십무기라 한다. 대관절 어떤...
견해의 결박에서 벗어나려면     사변적 견해는 견해의 정글이고 견해의 광야이고 견해의 왜곡이고 견해의 동요이고 견해의 결박입니다. 그것은 고통을 수반하고 파멸을 수반하고 번뇌를 수반하고 고뇌를 수반합니다.(『맛지마니까야』 「불의 비유와 밧차곳따의 경」)   설법 중에 붓다가 꽃 한 송이를 들어 올렸다. 대중들이 모두 무슨 뜻인지 몰라 어리둥절하고 있는데 오직 마하가섭만이 빙그레 미소를 띠었다. 꽃을 든 붓다의 뜻이 이심전심으로 전해진 것이다. 염화시중(拈花示衆), 꽃을 들어 대중에게 보인다는 뜻의 사자성어를 낳은 에피소드다. ‘염화미소(拈花微笑)’라고도 한다. 동아시아 선불교 전통은 이런 방식으로 마음에서 마음으로 법이 전해지는 것을 강조했다. 선불교가 말과 글자에 매이지 않는다는 의미의 불립문자(不立文字)를 강조할 때 근거로 삼는 중요한 에피소드다.   그러나 2,500년 전 붓다의 육성을 느낄 수 있는 『니까야』나 『아함경』에는 이 장면이 등장하지도 않는다. 초기경전에서 만나는 붓다는 선사들처럼 맥락을 짐작하기 힘든 함축적인 말 한마디를 툭 던진다거나 무언가를 암시하는 어떤 행동으로 자신의 뜻을 전달하지 않는다. 오히려 논리정연한 말로 설득하고, 무릎을 칠 수밖에 없는 적절한 비유로 마음을 움직이고, 의표를 찌르는 반문으로 질문자 스스로 자신의 허점을 시인하게 하는 변재의 달인, 수사학의 달인에 가깝다. 그러나 그렇게 논리와 비유, 반문 등 어느 것 하나 흠잡을 데 없는 자유자재한 변재의 능력을 가진 붓다가 묵묵부답, 침묵으로 응답한 특별한 경우가 있다. 그것을 십무기(十無記)라 한다.         붓다의 침묵   무기(無記)란 질문에 응답하지 않았다는 뜻이다. 질문이 열 가지였기 때문에 십무기라 한다. 대관절 어떤...
요요
2023.03.20 | 조회 447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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