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걸 헤이 유교걸 4회] 공자님은 자기계발이 좋다고 하셨어

고은
2020-12-26 11:50
571

 

*[걸 헤이 유교걸]은 길드다 김고은의 북&톡 연재글입니다.

한때 유교를 사회악이라고 생각했던 20대 청년이 <논어>를 읽으며 유교걸로 거듭나는 과정을 담습니다.

 

 

 

 

공자님은

자기계발이

좋다고 하셨어

 

 

 

 

 

 

 

전공에 대한 거부감

 

   2017년 겨울, 4명의 청년과 문탁 네트워크의 선생님들이 평창에 모였다. 인문학 공동체에서 오래 공부한 청년들이 가진 욕망을 확인하고 앞으로의 일을 도모하기 위해서였다. (그로부터 길드다가 탄생했으니, 길드다는 시작부터 많은 사람에게 빚을 지고 있는 셈이다.) 나는 그 자리에서 특출난 사람이 되고 싶은 마음은 없다고, 내가 잘 모르는 세계의 사람들과 함께 잘 살고 싶다고 말했다.

 

 

2017년 평창에 모인 4명의 청년과 문탁 네트워크의 선생님들

 

   길드다가 시작된 뒤로는 길드다 일에 허덕였다. 퀴어나 장애인을 만나지는 못했지만, 내게 길드다의 멤버들은 그들만큼이나 다른 세계 사람이었다. 한 멤버는 쓰고 싶은 글이 명확했다. 그가 글 쓸 시간을 확보하길 바라며 내가 길드다 운영 일을 좀 더 맡았고, 그에게 도움이 될만한 주제의 책과 이슈를 백업했다. 다른 멤버는 노는 것을 중요하게 생각했다. 그가 있는 술자리에 끼거나, 술 먹기를 썩 즐기지 않는 다른 친구들의 눈치를 살피며 술자리를 만들었다.

 

   그러나 길드다에서 프로젝트를 진행할 때 중요하게 여겨진 건 전공에 대한 개개인의 역량이었다. 그간의 행적으로 미루어보면 내 전공은 동양고전이나 다름없었으나, 나는 전공을 전면에 잘 내세우지 않았다. 전공, 그러니까 나의 일을 앞세우는 건 이기적이라 생각했다. 자신을 낮추고 관계를 면밀하게 살피라는 『논어』의 이야기에 크게 감명받았던 시기였으므로 전공에 집중하는 건 경쟁을 위한 자기계발과 다를 바 없어 보이기도 했다.

 

 

 

 

 

忠과 恕

 

   올해 2020년 길드다 공동 세미나에는 두 시즌 연달아 감당하기 어려울 정도로 많은 인원이 몰렸다. 시간과 에너지는 언제나 부족했다. 『논어』 강의와 세미나를 듣고 글을 연재하는 시간을 줄여서 공동 세미나를 준비했다. 어떤 일이 위태로워 보일 때면 나는 그것을 수습하는 데 집중했다. 시작된 일을 갈무리하지 못하면 호흡을 맞추는데 막힘이 생기리라 생각했고, 서로 부족한 부분을 채워주는 것이 함께 잘 사는 일이라고 생각했다. 내 『논어』 공부의 부족함은 길드다에서 프로젝트를 진행할 때 드러났다. 나는 길드다가 인문학 ‘스타트업’이기 때문에, 그러니까 공동체가 아니라 회사이기 때문에 개인의 역량이 문제가 되는 것이라고 생각했다.

 

   그러던 찰나, 『논어』를 읽는데 전에는 특별해 보이지 않았던 문장이 불현듯 눈에 들어왔다.

 

子曰 : “參乎! 吾道一以貫之.” 曾子曰 : “唯.” 子出.
공자께서 말씀하셨다. “삼아! 나의 도는 하나의 이치로 모든 것을 꿰뚫는다.” 증자가 “네”하고 대답했다. (4:15)

 

   여러 제자와 있는 자리에서 공자가 증자의 이름을 친근하게 부르며 말했다. “얘 (증)삼아, 세상은 만물이지만 나는 그것들을 꿰어서 하나로 이해할 수 있단다.” 증자는 별다른 질문 없이 곧바로 알겠다고 대답한다. 그러나 같은 자리에 있었던 다른 제자들은 공자의 말을 이해하지 못했던 모양이다. 공자가 나간 뒤 고개를 갸웃하며 증자에게 그 뜻을 묻는다.

 

門人問曰 : “何謂也?” 曾子曰 : “夫子之道, 忠恕而已矣.”
공자께서 나가시자 문인들이 물었다. “무슨 말씀이십니까?” 증자가 말했다. “선생님의 도는 충과 서일 뿐이다.”(4:15)

 

 

 

 

   유신체제의 잔재 덕분인지 忠(충)이라 하면 권력자를 향한 맹목적인 충성을 떠올리기 쉽다. 그러나 『논어』에서 忠은 권력을 향하는 것도 맹목적인 것도 아니다. 忠을 쪼개보면 中(중)과 心(심)으로 나뉜다. 忠은 자신의 마음(心)에 집중한다(中), 최선을 다한다는 의미다. 보이는 곳에서든 보이지 않는 곳에서든 최선을 다하려면 스스로를 속이지 않는 것이 중요하다. 그러므로 한 톨의 자기 합리화도 용인해서는 안 되며, 어디에 비춰보아도 부끄럽지 않을 정도로 스스로에게 떳떳해야 한다. 즉 忠은 힘에 대한 승복보단 자기 충실성과 가깝다.

 

   恕(서)는 忠과 마찬가지로 心을 부수로 가지고 있다. 자기의 마음(心)을 접어서 다른 사람 위로 포개어 같게 한다(如)는 말이다. 그러니까 자신의 마음으로 다른 사람의 마음을 헤아린다, 자신을 타인의 자리에, 즉 관계 위에 위치시킨다는 뜻이다.

 

 

 

 

 

자기 충실성과 상호성은 짝꿍

 

   타인이 나를 이해해주지 않는다며 서운해하기는 쉽지만, 내가 타인의 입장에 서서 이해하기는 어렵다. 공자도 이것이 어려운 일이라는 것을 잘 알고 있었던 것 같다. 공자의 또 다른 제자 자공이 평생 행할 만한 한마디가 있냐고 묻자 공자는 이렇게 대답했다.

 

子曰 : “其恕乎! 己所不欲, 勿施于人.”
공자께서 말씀하셨다. “그것은 ‘서’일 것이다! 자기가 원하지 않는 일을 남에게 시키지 않는 것이다.” (15:23)

 

   얼핏 보기엔 남에게 피해가 가지 않는다면 내 멋대로 해도 좋다는 오늘날 풍조와 비슷해 보인다. 그러나 恕는 나의 입장을 고수하며 관계를 소극적으로 생각하는 개인주의와는 거리가 멀다. 恕는 이로운 상황이든 불리한 상황이든, 나의 마음을 상대의 입장에 위치시키는 적극적인 태도이다. 忠이 자기 충실성을 의미했다면 恕는 다른 존재와의 상호성을 의미한다.

 

   그러나 忠, 恕 각각의 의미보다 중요한 것은 이 둘이 서로를 필요로 하는 떼려야 뗄 수 없는 사이라는 점이다. 자기 충실성은 상호성을 동반한다. 시장 경쟁에서 살아남기 위해 자기계발하는 사람과 忠을 지키는 사람의 가장 큰 차이는 恕에 있다. 아무리 하루 24시간을 부족하게 살아도 자신을 관계 위에 위치시키지 못한다면 다른 존재들로부터 고립되는 것과 마찬가지다. 공자의 忠은 경쟁을 위한 자기계발과 달랐다. 공자의 공부는 출세하기 위한 것도, 명예나 재산을 얻기 위한 것도 아니었다.

 

 

중국 곡부에는 공자의 직계 후손들이 공자사당을 관리하고 제사를 주관하기 위한 저택이 있다.

그중 충서당(忠恕堂)은 공자 가문의 종손이 손님을 접견하는 공간이었다.

 

   공자는 공부에 뜻을 두고, 15년간 열심히 공부해서 30살에 자립했다고 한다. 10대와 20대 시절 공부에 매진한 공자는 그 뒤로 자신이 공부했던 것처럼 제자들이 잠재된 성품을 충분히 발휘할 수 있도록 도왔으며, 사람들과 조화롭게 살 수 있는 방법을 찾기 위해 노력했다. 다른 존재와 함께 잘 살아가기 위해 충실했던 공자의 공부야말로 진짜 자기계발(自己啓發)*, 즉 스스로의 능력을 열어 발현시키는 것이라 할 수 있지 않을까?

 

   공자식 자기계발에 恕가 필요충분조건이라면, 다른 존재와 함께 살아가는 일에는 공자식 자기계발이 필요충분조건이다. 자신에게 중심을 두지 못한 채 타인을 살피려 한다면 포커스를 타인에게 맞추게 되고, 타인을 기준으로 생각하면 스스로를 돌아보지 못하게 되는 악순환에 빠진다. 설령 남의 마음을 헤아리려 했더라도 결과적으로는 불통을 야기할 수 있는 것이다. 어쩌면 내가 가진 바람이 다른 사람과 함께 잘 살고 싶다는 것이었다고 해서 그것을 곧장 恕라고 부를 수 없을지도 모른다.

 

* ‘자기계발’의 어원을 『논어』에서 찾기도 한다. “공자께서 말씀하셨다. ‘분발하지 않으면 열어주지 않고 애태우지 않으면 말해주지 않는다. 한 귀퉁이를 들어 주었는데 남은 세 귀퉁이를 헤아리지 않으면 다시 일러주지 않는다.’”(子曰 : "不憤不啓, 不悱不發, 擧一隅不以三隅反, 則不復也.", 7:8)

 

 

 

 

 

공자는 자기계발광

 

   길드다에서 역량이 문제가 되었을 때 나는 혼란에 빠졌다. 길드다 일과 나의 공부가 분리되어 보였다. ‘길드다 일을 덜 살피고, 거기서 아낀 시간과 에너지를 동양고전 공부하는 데 사용해야 하는 건가…?’ 길드다 일에 집중하면 나의 공부는 뒷전으로 밀리고, 나의 공부에 힘을 쓰면 길드다 일을 할 여력이 남지 않았으므로 아무런 선택도 할 수 없었다.

 

   그러나 공자에 따르면 시간과 에너지가 한정된 자원이 되고 내 고민이 분배의 문제가 되었던 건 공자식 자기계발에 소홀했기 때문이다. 나는 『논어』를 읽으며 가끔이나마 반성할 줄 아는 사람이 되어서 다행이라 여길 뿐이었다. 동양의 고전 사유에 감명을 받으며 감탄할 뿐이었다. 동양고전 공부에 더 집중해야겠다는 생각은 하지 않았다. 공부가 부족하니 길드다에서 이에 대해 이야기 나누거나 함께 동양고전을 읽어볼 시간을 만들지 못했다. 길드다를 함께 하는 공동체가 아니라 개인의 역량이 중요한 회사로 만든 건 나였다.

 

   공자의 공부가 그러했듯 내 공부 역시 나 자신만을 위한 일이 아닐 수 있다. 내 공부를 충실히 한다는 것은 나의 고민과 질문을 함께 나누는 것이다. 전공인 동양고전을 공부하며 생긴 질문이든, 낯선 존재들과 잘사는 일에 대한 나의 오래된 질문이든 함께 할 수 있을 때 우리는 뜻을 함께 하는 친구(友)가 될 수 있다. 이 글을 쓰면서 내년에는 친구들을 감화시킬 수 있도록 동양고전 공부에 더욱 충실해야겠다는 생각을 했다. 뜻을 함께 한다면 마음은 기쁘게 움직이고 배치는 자연히 변할 것이므로 나는 양자택일의 딜레마에서 벗어날 수 있을 터이다.

 

   어쩌면 공자를 자기계발 광이라고 불러야 할지도 모르겠다. 다른 존재를 자신의 맥락 위에 적극적으로 위치시킬 때야 자기계발이 가능하고, 자기계발을 할 때야 비로소 다른 존재들과 함께 살아갈 수 있다. 우리는 모두 공자식 자기계발 광이 되어야 할지도 모른다.

 

 

 

 

 

댓글 2
  • 2020-12-26 15:08

    충을 구시대적 억압이라고만 생각했는데 자신에게 솔직하고 충실한 것이었군요.
    새롭습니다.

  • 2020-12-27 14:35

    맞아요. 좋아요...

봄날의 주역이야기
주역은 점치는 책이다. 그런데 점치는 방법이 제대로 전해지지 않고 있다. 그런데도 주역이 많은 사람들에게 읽히는 것은, 주역은 점을 치는 책으로 인정받았지만, 한편으로는 그 내용과 의미를 꼼꼼히 원리와 뜻을 따져가며 해석해서 읽어도 충분한 가치를 지니고 있기 때문이다. 이렇게 원리를 따져가며 읽는 방식의 주역을 의리역(義理易)이라고 한다. 하지만 그러한 구분은 별로 의미가 없다. 점을 치면서도 그 해석을 의리적으로 하기도 하고 의리역으로서 주역을 읽으면서 수시로 점을 치기도 한다. 어쩌면 두 가지 방식을 적절하게 취하는 것이 지혜로운 태도일 수 있다. 가끔 혼자 혹은 함께 모여 시초점으로 괘를 뽑고 이것을 해석하는 재미가, 주역이 다른 텍스트와 구별되는 매력이 되기도 한다. 점을 쳐서 화수미제(火水未濟)괘를 얻었다고 치자. 그럼 나는 생각해본다. 나에게 왜 이 화수미제괘가 왔을까? 주역을 공부하기 시작한 초기에는 우선 이 괘가 길흉, 즉 좋은지 나쁜지를 먼저 따졌었다. 지금은 그것이 그다지 의미가 없다는 것을 잘 안다. 어떤 괘가 오든지 내내 좋기만 하든지, 내내 나쁘기만 한 괘는 없기 때문이다. 오히려 좋다고 환호하고 있을 때 막바지에 다가올 불운을 캐치해내지 못하는 것이, 나쁜 괘를 받아들고 심사숙고해서 해결책을 찾아내는 것보다 더욱 큰 낭패를 보는 일이 종종 있다.   정(正)도 없고 응(應)도 기댈 바 없고 화수미제괘는 주역 64괘의 순서에서 마지막에 위치한 괘이다. 하나의 괘를 이루는 여섯 효는 음양의 배치에 원칙이 있다. 이 원칙에 따르면 첫 번째부터 여섯 번째 효의 자릿값의 순서는 양-음-양-음-양-음이다. 63번째 괘인...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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2024.03.31 | 조회 196
한문이예술
    하나의 귀와 두 개의 입 한자가 보여주는 듣기의 방법론   동은     1. 실용實用적인 한자   책을 읽다보면 모르는 단어가 등장할 때가 있다. 그러면 눈을 부릅뜨고 앞뒤의 맥락을 살펴 단어의 의미를 짐작하곤 한다. 하지만 그 단어가 짐작만으로는 넘기기 어려운 위치에 있거나 도무지 감도 오지 않는 경우에는 사전에서 찾아봐야 한다. 그런데 사전에는 같은 발음을 가진 다른 의미의 단어들이 여러게 있을 때가 있다. 이럴 땐 하나하나 문장 속 단어에 의미를 적용시키며 여러 개의 단어 중에서 무엇인지를 찾아야 한다. 한자를 많이 알면 이 과정이 상당히 빨라진다. 단어의 상당수가 한자어에서 유래한 우리말의 특성상, 한자를 많이 알수록 이렇게 문해력과 어휘력이 좋아진다. 그런 점에서 한자는 분명 살아가는데 실용적이다. 실용實用적이라는 건 실제로 쓰일만한 가치가 있다는 뜻인데, 이런 문해력과 어휘력 외에도 한자의 실용성이 발휘되는 부분이 있다.     한글과 다르게 한자는 문자 하나에 ‘의미’가 담겨있다. 당연하게도 ‘의미’가 문자에 담기기까지는 여러 과정을 거치게 된다. 그 과정은 때로 우연히 일어나기도 하지만 대부분 상당한 고심을 거쳤다는 것을 알 수 있다. 그러니 문자 하나가 가지고 있는 의미의 맥락이 경우에 따라서는 대단히 복잡해지기도 한다. 이건 문자 하나일 뿐일지라도 거기에 담긴 ‘이야기’는 여러가지 일수 있다는 말이다. 그렇게 중층적으로 구성된 이야기들은 문자가 사용되는 오늘날과도 긴밀하게 연관된다. 처음 문자가 만들어진 시기를 구체적으로 알 수 있는 방법이 없으니 갑골문에 대한 해석은 오늘날에도 고정되어 있지...
    하나의 귀와 두 개의 입 한자가 보여주는 듣기의 방법론   동은     1. 실용實用적인 한자   책을 읽다보면 모르는 단어가 등장할 때가 있다. 그러면 눈을 부릅뜨고 앞뒤의 맥락을 살펴 단어의 의미를 짐작하곤 한다. 하지만 그 단어가 짐작만으로는 넘기기 어려운 위치에 있거나 도무지 감도 오지 않는 경우에는 사전에서 찾아봐야 한다. 그런데 사전에는 같은 발음을 가진 다른 의미의 단어들이 여러게 있을 때가 있다. 이럴 땐 하나하나 문장 속 단어에 의미를 적용시키며 여러 개의 단어 중에서 무엇인지를 찾아야 한다. 한자를 많이 알면 이 과정이 상당히 빨라진다. 단어의 상당수가 한자어에서 유래한 우리말의 특성상, 한자를 많이 알수록 이렇게 문해력과 어휘력이 좋아진다. 그런 점에서 한자는 분명 살아가는데 실용적이다. 실용實用적이라는 건 실제로 쓰일만한 가치가 있다는 뜻인데, 이런 문해력과 어휘력 외에도 한자의 실용성이 발휘되는 부분이 있다.     한글과 다르게 한자는 문자 하나에 ‘의미’가 담겨있다. 당연하게도 ‘의미’가 문자에 담기기까지는 여러 과정을 거치게 된다. 그 과정은 때로 우연히 일어나기도 하지만 대부분 상당한 고심을 거쳤다는 것을 알 수 있다. 그러니 문자 하나가 가지고 있는 의미의 맥락이 경우에 따라서는 대단히 복잡해지기도 한다. 이건 문자 하나일 뿐일지라도 거기에 담긴 ‘이야기’는 여러가지 일수 있다는 말이다. 그렇게 중층적으로 구성된 이야기들은 문자가 사용되는 오늘날과도 긴밀하게 연관된다. 처음 문자가 만들어진 시기를 구체적으로 알 수 있는 방법이 없으니 갑골문에 대한 해석은 오늘날에도 고정되어 있지...
동은
2024.03.26 | 조회 192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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