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영화대로42길 11회] 우울의 시대, 더욱 필요한 웃음/장 피에르 주네, 마르크 카로 <델리카트슨 사람들(1991)>

띠우
2022-02-14 00:38
317

 

 

언제 어디서나 영화를 볼 수 있지만,

정작 영화에 대해 묻지 않는 시대. 

우리는 영화와 삶의 사이길,

영화대로 사는 길에 대한 질문으로, 

산업과 자본의 도구가 아닌

영화로서의 영화를 보고 읽습니다.

 

*본 리뷰에 사용된 이미지에 대한 저작권은 해당 영화에 있습니다.

 

우울의 시대, 더욱 필요한 웃음

<델리카트슨 사람들(1991)> 장 피에르 주네, 마르크 카로 감독

 

 

웃음은 강장제이고, 안정제이며, 진통제이다.

Laughter is the tonic, the relief, the surcease for pain - 찰리 채플린

 

만화적 상상력을 스크린에 담다

1974년, 장 피에르 주네는 한 애니메이션 페스티벌에서 감각적이고 기괴한 분위기를 연출하는 마르크 카로와 처음 만났다. 둘은 함께 독특한 CF촬영과 단편을 찍으며 영화적 감각을 익혀나갔고, 촬영감독 다리우스 콘지를 만나면서 그 만화적 상상력을 더욱 발휘할 수 있게 된다. 이들이 힘을 합쳐 만든 첫 작품이 바로 <델리카트슨 사람들>이다. 이 영화는 1990년 도쿄영화제 영시네마상을 받으면서 우리나라 영화계의 관심을 불러일으켰다(일본만화원작). 그런데 실제 내용은 전혀 알려지지 않은 채 포스터만 보고 당시 유행하던 컬트영화로 소개되었다고 한다. 컬트영화는 금기에 도전하고 논리를 파괴하면서 기성세대를 비웃고 관객의 기대도 위반하는 것이다. 물론 이 영화가 기존의 표현방식과 다르긴 하지만, 컬트로 보기에는 영상이나 인물들의 표현이 너무나 아름답고 몽환적이며 거기에 감독의 독특한 유머코드까지 들어있다.

 

제목에 등장하는 ‘델리카트슨’은 햄이나 소세지, 치즈 등을 파는 가게를 말하는데, 영화에서는 인육을 파는 정육점 건물의 이름이다. 세상은 핵전쟁 이후에 심각한 식량난으로 인육까지 먹고 있다. 전직 서커스단 출신의 뤼종(도미니크 피뇽)은 자신의 파트너였던 원숭이 리빙스턴이 사람들에게 잡아먹히자 슬퍼서 일을 그만두었다. 그는 델리카트슨 주인인 클라베가 낸 구인광고를 보고 이곳으로 찾아와 잡역부가 된다. 물론 그 광고는 이곳 사람들이 필요로 하는 고기를 얻기 위한 미끼다. 실질적으로 클라베는 식량(고기와 옥수수)을 통해 이 건물 사람들을 지배하는데, 이제까지 클라베의 손에서 벗어난 미끼는 없었다. 그러나 뤼종은 만만치가 않다. 게다가 그가 죽음에서 매번 빗겨나는 이유는 힘세고 영악해서가 아니라 착하고 순수한 행동들 때문이다. 클라베의 딸 줄리는 그런 뤼종에게 호감을 느끼고 둘은 사랑에 빠진다. 이로 인해 클라베는 뤼종을 더욱 죽이고 싶어져 모든 수단을 동원하게 된다.

 

 

어려운 경제상황이나 환경과 계층에 대한 표현들은 1990년대 사회적 분위기에서 비롯되었겠지만 현재로도 이어지는 문제다. 전 세계가 자본주의를 가속화하는 분위기는 치열한 경쟁 속에 개인을 밀어넣고, 누군가를 밟지 않으면 밝히는 세상을 당연시한다. 스타일 면에서 헐리웃의 팀 버튼과 비교되는 장 피에르 주네인 만큼 이런 내용을 담는 그의 독특한 영화표현방식에 주목할 필요가 있다. 이 영화는 단 한 번의 로케이션도 없이 100퍼센트 세트에서 촬영되었다. 그만큼 세트가 전달하는 효과가 두드러진다. 하늘을 향해 뻗은 건물 안의 모습은 계층화된 인간관계를 상징화했다. 클라베는 건물 위아래를 관통하는 파이프의 소리를 들으며 사람들의 생각을 파악하고 통제한다. 한편, 지하세계에는 인육을 먹지 않는 사람들이 숨어 살고 있다. 이들의 불안과 우울함을 드러낸 화면의 색감은 ‘블리치 바이 패스’라는 실험적인 현상기법을 통해 완성되었다. 이는 잿빛을 살려 어두운 장면에서 거친 느낌을 살리는 효과가 있었다. 즉, 모든 장면은 감독의 상상력을 통해 표현된 것이다.

 

우울함을 웃음으로 풀다

무겁고 암울하기까지 한 영화의 상황들을 가볍고 밝은 분위기로 전환시켜주는 것은 과감한 카메라 기술과 감독들 특유의 유머코드 때문이었다. 뮤직비디오를 연상케 하는 도입부부터 시작해 뤼종을 죽이기 위한 장면들에 이르기까지 교차 편집은 효과적으로 이루어진다. 많은 이들이 기억하는 장면으로 인육값을 대신한 클라베와 플뤼스의 섹스 장면이 있다. 삐걱대는 침대 스프링 소리의 빠르기에 따라 줄리의 첼로 소리, 카펫터는 행동, 메트로놈의 속도, 자전거 바퀴에 바람넣는 따비오까의 펌프질, 깡통구멍을 뚫는 로제의 움직임, 깡통에 기계를 대고 소리를 듣는 로베르의 행동, 할머니의 뜨개질 속도, 뤼종의 페인트질 속도 등을 적절하게 배치시켜 긴장감을 조절한다. 권력을 가진 클라베의 행동이 모두에게 어떻게 영향을 끼치고 있는지를 율동감 있는 박자를 통해 재미있게 보여준다.

 

 

개구리가 여기저기 뛰어다니고 달팽이 껍질이 산처럼 쌓인 지하에 등장한 기괴한 인물로 인해 솟아오른 긴장감은 한 마리의 파리를 잡는 그의 엉뚱한 모습으로 인해 사그러든다. 또 비장한 지하사람들의 등장도 뭔가 큰 역할을 할 것 같지만 결국 실수투성이로 웃음만 던져준다. 이들은 지하 깊숙히 숨어살며 식량인 옥수수를 훔칠 뿐이지 세상을 전복하는 어떤 역할도 하지 못한다. 지상에서 클라베의 고기를 기다리는 사람들이나 숨어서 옥수수를 훔치는 사람들의 모습은 다르지 않다. 체제에 순응하여 살아간다. 그때문에 우리는 단지 뤼종과 줄리만이 지상에서 살고 있으면서도 인육을 먹지 않는 존재들이라는 사실을 알게 된다. 어쩌면 이 세계의 정상인은 인육을 먹는 사람들일지 모른다. 왜냐하면 그들의 모습은 지극히 평범한데 반해 뤼종과 줄리의 모습은 독특하게 표현되기 때문이다. 그러고 보면 우리가 갖고 있는 정상과 비정상의 경계는 살아가는 매순간에 달라질 수 있다는 의미인 것도 같다.

 

장 피에르 주네의 영화 속에서 웃음은 정성들여 만든 가상공간의 세계와 인물들의 행동모습이 어긋나기 때문에 발생한다. 이는 우리들의 일반적인 상식에서 벗어난 만화적 설정이다. 비현실적이기 때문인지 몰라도 그의 영화에서 박장대소는 터지지 않는다. 우선 미소짓다가, 다시 생각하게 되고, 마음을 움직이게 한다. 삶이 지루한 오로르가 계속해서 벌이는 기발한 자살 시도와 실패는 다음 장면을 기대하게 만들고, 뤼종이 아이들과 만날 때 보여주는 묘기장면은 성장동화같은 아름다움으로 연결된다. 그것들 안에는 삶에 필요한 쓰디쓴 웃음이 있다. 이러한 웃음은 우리가 예상하지 못하고 방심하는 순간에 기습적으로 찾아오는 것이다. 그리하여 오래되고 익숙해져버린 사고패턴의 틈이 잠시 벌어지기도 한다. 특히 어려운 시기에 웃음이 필요한 이유는 바로 이런 것 때문이기도 하다. 다른 생각을 하지 못할 정도로 긴박한 순간에 툭 터져버리는 웃음은 깊은 우울함과 긴장에서 풀려나게 만든다.

 

결말은 열려 있다

영화는 한바탕 소동이 벌어지고 마무리된다. 잔혹한 결말에 이어진 마지막 장면에서는 뤼종과 줄리가 이 건물의 가장 높은 지붕 꼭대기에 앉아 톱과 첼로로 함께 연주를 한다. 푸른 하늘을 배경으로 몽환적이고 아름답게 울려퍼지는 음악은 해피엔딩을 의미하는 것일까. 생각해 보면, 이들이 지붕 아래로 내려가면 마주하게 될 현실은 크게 바뀌지 않아 보인다. 한 사람의 적이 사라진 것일 뿐이니까. 특히 지하사람들의 등장은 옥수수를 둘러싼 경쟁이 더욱 치열해질 것을 예상하게 한다. 그럼에도 불구하고 한편으로는 뤼종과 줄리라면 그러한 현실 속에서도 어떻게든 다시 살아갈 것이란 생각이 든다.

 

 

<델리카트슨 사람들>은 찰리 채플린을 떠올리게 만든다. 그가 했던 ‘당신이 그저 미소를 짓는다면 인생은 여전히 살 가치가 있다는 것을 알게 될 것(You'll find that life is still worthwhile, if you just smile)이라는 말은 이 영화에서도 연결되기 때문이다. 오래전 영화지만 먹고 사는 문제부터 환경이나 기후문제 그리고 육식에 이르기까지, 결국 현재를 살아가는 우리에게 남겨진 문제이기도 하다. 무거운 주제를 다루고 있음에도 미소를 잃지 않게 만드는 영화, 그리고 그로 인해 우리에게 그 삶의 문제를 생각하게 만든다. 아무리 각박한 삶이라도 웃음은 그 안에 생동감을 불러일으키는 효과가 있다. 그래서인지 요즘 같은 시기에 더욱 볼만한 영화가 아닐까 싶다.

 

 

 

 

댓글 1
  • 2022-02-15 23:07

    델리카트슨.  91년에 보고 이해하기 힘들었던 ㅋㅋ 그런 영화였다. 이번참에 다시보고 왜 이해하지 못했었는지 알아봐야지

영화대로 42길
    언제 어디서나 영화를 볼 수 있지만, 정작 영화에 대해 묻지 않는 시대.  우리는 영화와 삶의 사이길, 영화대로 사는 길에 대한 질문으로,  산업과 자본의 도구가 아닌 영화로서의 영화를 보고 읽습니다.   *본 리뷰에 사용된 이미지에 대한 저작권은 해당 영화에 있습니다.   우리에게 ‘사과’가 필요할 때 시 Poetry(2010) | 감독 이창동 | 주연 윤정희 | 135분 | 15세 이상             영화는 개천에서 떠내려 오는 주검을 한 아이가 우연히 발견하는 것으로 시작한다. ‘이미’ 우리는 ‘누군가’ 죽었다는 사실을 알게 된다. 이럴 때 스토리는 ‘누가, 왜 죽였는지’ 밝혀나가는 방식으로 대부분 전개된다. 이는 어쩌면 우리의 관심 역시 대부분 그것에 초점이 맞춰져 있기 때문인지도 모른다. 가해자가 누구인지, 범행 동기는 무엇인지, 어떻게, 어디서, 왜!!! 그러나 이 영화의 질문은 애초부터 다른 곳을 향하고 있었다. 같은 마을에서 중학생 손자와 함께 낡은 아파트에 살고 있는 66세 미자(윤정희). 그녀가 '시'를 배우기 시작한 건 자신이 알츠하이머 초기임을 의심한 이후였다. 스스로 ‘시인 기질’이 있다고 생각했으나, 막상 해보니 잘 안 써진다. 그러나 그건 사물의 이름이나 적절한 단어가 잘 떠오르지 않는 그녀의 증상 때문만은 아니었다. 미자가 참가하는 문예교실에서 김용택 시인(극중 김용탁)은 이렇게 말한다. “지금까지 여러분은 사과를 진짜로 본 게 아니에요. 사과라는 것을 정말 알고 싶어서, 관심을 갖고, 이해하고 싶어서, 대화하고 싶어서 보는 것이 진짜로 보는 거예요.” 그럴 때 느껴지는 무언가를...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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청량리
2022.04.30 | 조회 350
영화대로 42길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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띠우
2022.04.17 | 조회 295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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청량리
2022.04.03 | 조회 274
영화대로 42길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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띠우
2022.03.14 | 조회 235
영화대로 42길
      언제 어디서나 영화를 볼 수 있지만, 정작 영화에 대해 묻지 않는 시대.  우리는 영화와 삶의 사이길, 영화대로 사는 길에 대한 질문으로,  산업과 자본의 도구가 아닌 영화로서의 영화를 보고 읽습니다.   *본 리뷰에 사용된 이미지에 대한 저작권은 해당 영화에 있습니다.   #살아있다 와드 알-카팁, 에드워드 와츠 감독, <사마에게, برای سماء, For Sama>(2019)             프랑스의 식민지배를 받았던 시리아는 1946년 독립한다. 하지만 이집트와 연합국가 형태를 띠고 있다가, 1960년대 초 연합을 탈퇴하면서 여러 번의 군사쿠데타가 일어나고 결국 정권을 잡은 ‘알아사드’정부가 40년 넘게 부자세습과 독재정치로 시리아를 지배한다. 영화에서도 잠깐 나왔는데, 2011년 알아사드 정권의 퇴진을 요구하는 학생들에 대한 무자비한 탄압은 시민들의 무장투쟁으로 이어진다. 여기에 독재 알아사드 정부를 타도하려는 군 출신들이 반군을 형성하여 대립하고, 주변의 아랍 국가들이 개입하면서 종파갈등으로까지 이어진다. 무슬림의 대부분은 수니파이고, 시아파는 10~15% 정도다. 그런데 시리아의 알아사드 정부는 대부분 시아파 출신들이다. 그래서 시아파 이란과 러시아는 알아사드 정부군을, 수니파 사우디아라비아와 미국은 반군을 지원한다. 2012년 상황은 더욱 나빠졌고, 이라크에서 발생한 수니파 무장단체 IS가 시리아 북부(알레포가 있는 지역)를 점령하면서 시리아는 거의 무정부 상태에 놓이게 된다. 내전으로 인해 시리아의 북부도시 알레포에는 매일같이 폭격이 쏟아지고 복구 역시 불가능해 보인다. 더구나 외부의 지원이나 뉴스보도가 거의 끊겨 고립된 상황. 시민들은 살아남기 위한 방법을 함께 찾아 나선다. 지극히 평범한 인물인 ‘와드’와 ‘함자’ 그리고 그들의 딸 ‘사마’...
      언제 어디서나 영화를 볼 수 있지만, 정작 영화에 대해 묻지 않는 시대.  우리는 영화와 삶의 사이길, 영화대로 사는 길에 대한 질문으로,  산업과 자본의 도구가 아닌 영화로서의 영화를 보고 읽습니다.   *본 리뷰에 사용된 이미지에 대한 저작권은 해당 영화에 있습니다.   #살아있다 와드 알-카팁, 에드워드 와츠 감독, <사마에게, برای سماء, For Sama>(2019)             프랑스의 식민지배를 받았던 시리아는 1946년 독립한다. 하지만 이집트와 연합국가 형태를 띠고 있다가, 1960년대 초 연합을 탈퇴하면서 여러 번의 군사쿠데타가 일어나고 결국 정권을 잡은 ‘알아사드’정부가 40년 넘게 부자세습과 독재정치로 시리아를 지배한다. 영화에서도 잠깐 나왔는데, 2011년 알아사드 정권의 퇴진을 요구하는 학생들에 대한 무자비한 탄압은 시민들의 무장투쟁으로 이어진다. 여기에 독재 알아사드 정부를 타도하려는 군 출신들이 반군을 형성하여 대립하고, 주변의 아랍 국가들이 개입하면서 종파갈등으로까지 이어진다. 무슬림의 대부분은 수니파이고, 시아파는 10~15% 정도다. 그런데 시리아의 알아사드 정부는 대부분 시아파 출신들이다. 그래서 시아파 이란과 러시아는 알아사드 정부군을, 수니파 사우디아라비아와 미국은 반군을 지원한다. 2012년 상황은 더욱 나빠졌고, 이라크에서 발생한 수니파 무장단체 IS가 시리아 북부(알레포가 있는 지역)를 점령하면서 시리아는 거의 무정부 상태에 놓이게 된다. 내전으로 인해 시리아의 북부도시 알레포에는 매일같이 폭격이 쏟아지고 복구 역시 불가능해 보인다. 더구나 외부의 지원이나 뉴스보도가 거의 끊겨 고립된 상황. 시민들은 살아남기 위한 방법을 함께 찾아 나선다. 지극히 평범한 인물인 ‘와드’와 ‘함자’ 그리고 그들의 딸 ‘사마’...
청량리
2022.02.27 | 조회 267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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