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한문이 예술 7회] 한자에서 느껴지는 모든 것

동은
2024-01-11 13:18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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한자에서 느껴지는 모든 것

 

동은

 

 

 

1. 한자의 느낌적인 느낌

  알려진 바와 같이 우리 말 단어의 상당수는 한자어로 이루어져 있다. 그런데 1948년 정부수립 이후 서서히 한자어를 한글로 표기하게 되면서 이른바 우리나라 고유어와 한자어의 구분이 어려워졌다. 그래서 오늘날에는 우리가 일상적으로 사용하는 단어에 어떤 한자가 사용되었는지 알아차리기가 어려워졌다. 예를 들면 ‘유람’과 ‘유랑’은 ‘여유롭게 돌아다닌다’는 어감이 비슷해보이지만 각각 놀 유遊와 흐를 류流로 다른 한자가 사용되어 ‘놀면서 돌아다니다’와 ‘목적없이 물 흐르듯 다닌다’는 차이가 있다. 이런 경우도 있다. ‘사전’은 ‘단어들을 모아 그 의미를 밝혀놓은 책’으로 말씀 사辭와 책 전典을 쓰는데, ‘백과사전’은 ‘여러 분야의 지식을 압축해 분류하고 모아 현상과 상태 자체를 모아 설명해 놓은 것’이라 이 때는 일 사事자를 사용한다. 이 事는 원래 ‘어떤 사람’을 지칭하는 한자였는데 오늘날에는 어떤 사건이나 일 자체를 의미하기도 해서 ‘일事’이 포괄하는 용례를 살펴보면 한자 하나로 얼마나 다층적인 의미로 쓰이고 있는지 알 수 있다.

 

  아시아의 근대화와 함께 중국 철학은 서구에서 성립된 근대 학문 체계로 편입되었다. 이런 분위기 속에서 중국 철학을 중국 자체의 시선으로 바라보려 했던 마르셀 그라네는 『중국 사유』에서 한자에 대해 이렇게 얘기했다.

 

“중국의 단어는 하나의 개념에 부응하지 않는다. 마찬가지로 하나의 단순한 기호도 아니며, 문법이나 통사의 기교를 통해서 생명을 부여받은 추상적 기호도 아니다. 그것은 불변의 단음절 형식과 중성적 양상 속에 작용을 미치는 데 필요한 모든 힘을 지니고 있다. 단어는 작용력의 소리로 된 조응물이며, 또한 작용력의 표상이다.”

 

  한자의 개수가 많은 이유는 글자마다 상응하는 구체적인 개념을 가지고 있기 때문이다. 그러나 그 수많은 글자들이 표현하는 의미나 개념들은 서로 겹치면서 모호한 의미의 경계를 넘나들기도 한다. 또 ‘끊다’는 의미를 가진 한자만 해도 다섯 개(切, 絕, 截, 絶, 撧)가 넘어가는 것처럼 하나의 같은 개념을 표현하는 여러 개의 글자가 있는 경우도 있다. 물론 이 한자들도 같은 뜻을 가졌음에도 그 세세한 결을 살피면 모두 다른 의미를 가지고 다르게 사용된다. 그렇다면 이렇게 흐를 류流, 놀 유遊, 말씀 사辭와 일 사事, ‘끊다’의 여러개의 한자를 아는 게 우리에게 왜 중요할까? 한자를 많이 아는 것도 중요하지만 비슷한 듯 서로 다른 한자들 사이에서 빚어지는 차이들을 살피는 것이 더 중요한 것일지도 모른다. 왜냐하면 우리가 그 단어를 어떻게 사용하고 있는지, 그것이 어떤 의미가 있는지, 그것들이 어떤 차이가 있는지 알아차릴 때 느껴지는 그 ‘느낌’이 우리가 세상을 대하는 감각을 보여주기 때문이다. 그렇게 우리는 ‘한자’와 관련해서 느끼는 만큼 세상을 알 수 있다. 그러니 우리의 언어가 다른 글자가 아닌 그 글자가 꼭 사용된 이유, 어떤 단어를 이루는 요소들로서 한자들이 각각이 어떤 의미연관 속에 있는지 살펴볼 필요가 있다.

 

 

 

2. 느낌感을 알아차리기覺

 

  ‘느낌’은 우리 신체의 다섯가지의 눈, 귀, 코, 입, 피부와 관련이 있다. 매일 이 신체기관을 창구로 많은 것을 느낀다. 물론 일상에서는 이 다섯가지 창구로 들어오는 느낌 중에서 크게 두드러지는 것이 없다면 뭔가를 느끼고 있다고 생각하지 않는다. 그래서 코가 매번 들이쉬는 숨, 주변에 들리는 모든 소리, 피부에 닿아있는 모든 촉감을 느끼려면 그 느낌에 깊이 집중해야 한다. 요컨데 오감은 신체의 영역에서 이루어진다. 

 

 ‘느낌’은 한자로 느낄 감感이다. 한자는 느낌을 어떻게 바라보고 있을까? 感에는 咸과 心이 함께 있다. 咸은 무기를 든 병사들이 긴 창을 바닥으로 내리 꽂고 소리를 내면서 기합을 넣는 모습이다. 어릴 때 태권도 학원에 가면 사범님은 발차기를 할 때, 주먹을 뻗을 때 기합을 넣으라고 하셨다. 그러면 나는 온 기운을 손 끝과 발 끝으로 모아 불꽃을 날리듯 뻗으며 “하!”하고 소리를 냈다. 그 경험을 돌이켜보면 기합을 넣는다는 것은 내가 가진 기운을 하나로 모으는 일이었다. 그렇다면 느낄 감感은 내가 가지고 있는 느낌을 마음心으로 모은다는 의미라고 생각해볼 수 있다.

 

 

   고대 사람들은 ‘느낌‘을 이렇게 마음心과 연관지었는데, 心 자체가 심장의 형태를 본따 만들어진 한자라는 점에서 사람의 마음이 신체와 떨어질 수 없다는 것을 생각해볼 수 있다. 가끔 내가 어떤 ‘느낌’을 가지고 있는지 표현하는게 어려울 때가 있다. 그럴때면 그것을 알아차리기도 전에 신체적인 반응이 일어나기도 한다. 얼굴이 빨개지거나, 숨이 가파오르거나, 침을 삼키게 되거나... 아니면 그 느낌의 주변을 탐색한다. 부대낀다거나, 슬프다거나, 껄끄럽다거나, 뿌듯하다거나. 이렇게 느낌이 어떻게 작용하고 있는지를 살피다보면 그 정체를 찾을 수 있다. 느낌이라는게 워낙 보이지도 않고 불문명하기 때문에 그 정체를 분명히 밝혀내긴 힘들지만 고대사람들은 그 정체가 마음과 연관되었다고 생각했다. 기합으로 기운을 하나로 모으는 것처럼, 신체의 느낌을 마음으로 모아 그 정체를 깨달을覺 때, 그것을 감각이라고 한다. 느낌의 정체를 찾기 위해 집중하며 마음을 알아차리는 일이 ‘감각한다’는 것이다. 그러지 않으면 느낌은 일상적인 신체의 감각처럼 쉽게 흘러가버린다. 그렇다면 오감은 수많은 느낌들 중에서도 가장 알아차리기覺 쉬운 대표적인 느낌이 아닐까 한다.

 

 

 

3. 아픔痛에는 ‘울림’이 있다 

 

  아이들과 감각을 주제로 수업을 할 때 처음으로 다룬 감각은 촉각이었다. 촉각은 피부에 닿는 느낌을 뜻한다. 피부는 우리 신체의 가장 많은 면적을 차지하고 있어서 그런지 수많은 층위의 느낌을 겪는다. 매끈함, 끈적함, 까슬함, 따가움, 욱신거림… 피부에게 가장 중요한 일이 있다면 그 수많은 느낌들 중에서도 ‘아픔‘을 잘 느끼는 것이다. ‘아픔’은 가장 즉각적으로 알아차릴 수 있는 위협이기 때문이다. 이 ’아픔‘을 통痛이라고 하는데 이 한자를 살펴보면 ‘아픔’의 성질에 대해 생각해볼 수 있다.

 

  痛은 병들어 침대에 누워 있는 모습을 뜻하는 녁疒과 댕댕 울리는 종甬이 함께 있다. 종소리는 청각으로 느끼는 것인데 왜 ‘아픔’에 쓰이는 걸까? 그것은 아픔이 가지고 있는 ‘울림’의 성질 때문이다. 우리는 ‘아픔’을 느끼면 아무리 작은 부위더라도 온 몸으로 전해진다. 순간적인 자극이 온 몸으로 마치 종이 울려 퍼지듯 전해지는 것이다. 아픔은 그 ‘울림’이 가장 빠른 감각이다. 그래서 촉각을 구분 할 때 우선 우리는 아픈지 안아픈지를 가장 빠르게 구분할 수 있다. 그런데 이 울려퍼지는 아픔의 성질을 신체기관이 아니라 마음의 영역으로 바라본다면 훨씬 더 넓은 규모로 그 울림을 생각해볼 수 있다. 바로 신체 내부의 울림에서 외부로 퍼지는 울림이다. 수업에서 가장 먼저 촉각에 대해서 다룬 이유는 한자가 보여주는 이런 아픔의 성질 때문이었다.

 

  언젠가 누군가를 이해하는 일이란 없다는 걸 알게 됐다. 어떤 일을 직접 겪지 않는 이상, 누군가의 생각이나 감각을 온전히 이해한다고 여기는 것은 오만이었다. 설령 직접 겪었다고 하더라도 그 일이 다른 사람과 같다고 얘기할 수도 없다. 특히나 누군가의 고통스러운 상황을 이해한다는 것은 더욱 힘든 일이었다. 아픔은 하나로 정리되지 않는 여러 감정을 불러 일으킨다. 이때, 감정은 감각과 다르다. 당혹감, 불안감, 불쾌감 등등... 이런 감정들은 앞서 얘기한 ‘느낌의 작용’의 결과들이다. 누군가의 이런 느낌의 작용을 도대체 어떻게 이해할 수 있을까. 극단적이긴 하지만 이런 생각은 일종의 포기였다. 

 

 

  아픔이 가지고 있는 울림의 성질이 외부의 다른 이에게도 전해진다면 무엇이 전해질까? 분명한 것은 전달되는 것이 ’통증‘은 아니라는 점이다. 통증은 ‘내가’ 느낀 것이기 때문이다. 통증이 전해지지 않는다면 통증이 불러 일으키는 감정이 전해지는 것일까? 아니다. 감정 또한 느낌이 ’나‘에게 어떤 영향을 끼치는지 이해하는 것이기 때문에 다른 사람에게 전달되는 종류의 것은 아니다. 그보다 전, 감정을 이해하기 이전에 감정을 이해하기 위한 여러 요소가 있다. 그 요소가 바로 정서情緖다. 감각과 감정, 정서는 모두 다른 것을 의미하는데 그 중에서도 정서는 실마리 서緖를 사용해 느낌의 실마리를 의미한다. 나는 아픔이 가지고 있는 울림의 성질이 이 실마리를 외부로 전달한다고 생각한다. 누군가의 것을 느낄 수 없더라도 우리가 ‘느끼는 일’은 순간마다 계속해서 일어난다. 내가 아픔을 느낄 수 있고, 아픔 자체가 외부로 자꾸만 퍼져나가는 성질을 가지고 있다고 한다면, 누군가의 아픔을 지레짐작하거나 그 정서를 통해 어떤 감정을 갖는 것은 자연스러운 일이 된다. 나는 痛을 통해 느낌 자체가 다른 이에게 전달되는 것이며, 그래서 우리가 누군가를 이해할 수 있다, 없다보다도 나에게 전달된 느낌에 대해 생각해보는 것이 자연스럽다는 걸 알았다. 통이 보여주는 아픔의 성질을 생각해보며 누군가를 절대로 이해할 수 없다는 희의적인 생각으로부터 벗어날 수 있었다.

 

 

4. 정신운동을 통한 이해

 

  마르셀 그라네는 중국어가 감정을 일으키고 마음을 감동시키는 데 놀라운 힘이 있다고도 했는데, 사실   한자의 발전 과정을 살펴보면 중국 고대 사람들이 처음부터 마음에 대해 고민한건 아니었다. 마르셀 그라네가 말하는 힘은 한자로 할 수있는 다채로운 정신운동에서 일어나는게 아닐까 한다. 이번 글에서 살펴본 ‘느낌’과 관련된 다양한 한자들만 보아도 눈에 보이지 않는 느낌과 그것을 알아차리는 일을 구분하고, 그 모든 과정이 ‘실마리’를 찾아내는 일이라고 한 것과, 아픔이라는 문자에 종모양을 담아 추상적이지만 ‘울림’에 대한 구체적인 의미를 생각해보게 만드는 이 일련의 ‘정신운동’이 감정을 다루는 능력을 길러주지 않았을까?

   

“상형문자가 원래의 의미를 지니고 있는지 여부는 중요하지 않다. 즉 어원적 재구성이 상상적인 것인지 정확한 것인지는 그리 중요하지 않다. 본질적인 것은 문자가 주는 느낌 그 자체, 즉 개념들이 진정한 표상과 결부되어 있다는 느낌 그 자체다.”

 

  한자마다 담겨있는 개념이나, 개념을 옮겨놓은 한자의 자형을 들여다보면 그 시를 읽을 때나 떠오르는 은유적인 비유나 아득하게 현학적으로 느껴지는 표현들을 볼 때가 있다. 그것이 정말 무엇이었는지, 원래는 무엇이었는지는 절대 알 수 없을 것이다. 다만 그것이 우리와 관계되어 있을 것이라는 ‘느낌’이 우리의 마음을 움직인다. 그 복잡하고 분명하게 구분되지 않는, 기원을 명확히 찾을 수 없는 한자 속에서 우리는 사유의 상상력을 펼칠 수 있다. 그러고 보면 한자는 굉장히 감각적인, ‘느낌적인 느낌’의 문자다. 눈으로 읽고, 그 형상을 이해하고, 그 형상의 실제를 떠올리고, 그 실제를 통해 다시 한번 한자의 의미를 생각해보게 만든다. 그리고 나는 이 정신운동이 우리의 ‘느낌’을 사유하는 일과도 멀지 않다고 ‘느낀다.’ 그렇다면 내가 아이들과 하는 수업은 내가 원하는 방식으로 전달되지 않더라도, 포기하지 않는 자세로 정신운동을 시작할 수 있는 다양한 실마리를 만들어내는 일일 것이다.

 

댓글 4
  • 2024-01-12 08:57

    재미있네요. 한자가 정동과 감응을 불러일으키는 것은 문자 그 자체가 이미지여서 그런 것일까요?
    생각해보면 우리말의 경우는 글자를 볼 때가 아니라 음성으로 전환될 때 정동이 일어나는 것 같아요.
    한자는 시각적으로 감응이 일어나고 우리말은 청각적인 감응이 더 강한 것 같은데.. 표음문자와 표의문자의 차이일까요?
    아무튼 한자의 특이성과 다른 문자와의 차이에 대한 이야기인 것처럼 읽히는데, 맞나요?
    그런데 정신운동이라는 말이 쏙 들어오질 않네요. 감응? 정신활동이 포함하는 모든 것? 뭐라고 하면 좋을까요?

    • 2024-01-13 18:24

      ㅋㅋㅋㅋㅋ 요요쌤이 이렇게 물음표 가득한 댓글을 처음 보는 것 같은데요? ㅋㅋㅋㅋ
      이번 글은... 한자의 특이성에 조금 더 중점을 두고 싶었어요.
      한자 자체가 지금까지 쓰이는 언어중에서는 유일한 표의문자여서 그냥 한자 자체가 다른 문자와 차이가 있는 것 같아요.

      저도 정신운동이 참 애매한 표현이라는 생각이 드는데... 감응도 가까운 말일 수도 있고 그냥 언어와 사용하는 문자가 우리의 다양한 인지에 영향을 미치는데 제 언어로는 그게 ‘느낌‘정도로밖에 표현할 수 없었던 것 같아요. 연상작용? 인지반응? 고민하다가 그냥 정신운동... 이렇게...

  • 2024-02-19 01:06

    지난 번 한문이 예술 시간에 아이들이 먹을 갈고
    붓으로 자신의 글자들을 쓰는 걸 보면서 뭔가 찌릿찌릿 했습니다.
    뭔가 느낌적인 느낌??
    한자한자 한자로 풀어가는 이야기에
    점점 노하우가 쌓이는 느낌을 받았습니다~^^

  • 2024-03-17 23:55

    다음 글도 기다려지네요!

우현의 독서가 테크트리
  “아 테스형!” 삶의 지혜를 소크라테스에게 묻는 것은 합당할까? : <철학 입문> 세미나를 들어야 하는 이유       ‘깨달은 자’의 대명사 소크라테스  “아 테스형!” ‘까’와 ‘빠’를 모두 미치게 만드는 ‘슈퍼스타’ 나훈아는 3년 전 자신의 신곡에서 이렇게 외쳤다. 살아가기 힘겨운 세상을 어떻게 견뎌낼 수 있냐는 질문을 소크라테스 ‘형’에게 물은 것이다. 오랜만에 컴백한 나훈아이기도 했지만, 재미있는 가사로 더욱 이슈가 됐었다. 특히 가사가 ‘철학적’이라는 반응과 함께, 힘든 세상에 대해 한탄하는 내용이 많은 공감을 불러일으킨 것 같다. 그렇다고 이 곡에 ‘소크라테스’의 철학이라던가, <독서가 테크트리>에서 다룰만한 ‘철학적’인 내용이 있는 건 아니다. 그저 소크라테스는 ‘철학자’의 전형으로, 머나먼 인생의 선배이자 ‘진리를 깨달은 자’의 의미의 ‘테스형’으로 쓰였을 뿐이다.  ‘소크라테스’의 이런 사용법은 흔한 편이다. 나도 온라인 대전 게임을 하다보면, 드물게 ‘소크라테스 컨셉’을 잡고 행동하는 유저를 만나곤 한다. 닉네임을 ‘Socrates’로 짓고, 칭호를 ‘철학가’나 ‘깨달은 자’로 달고, 게임 내내 채팅으로 ‘너 자신을 알라’고만 하는 식이다. 이처럼 소크라테스는 세상 만사를 깨달은 ‘철학자’의 아이콘이며, 근엄하고 흔들리지 않는 캐릭터로 인식되는 듯하다. 하지만 정말 소크라테스는 그러한 일반적 이미지와 같은 사람이었을까? 철학사에서 다뤄지는 ‘소크라테스’는 우리가 아는 소크라테스와 어떤 점이 다를까?     나훈아의 <테스형!> 무대. 배경 이미지로 올림푸스 신전과 소크라테스의 그래픽이 나타나는 게 나의 '웃음벨'이었다.     ‘철학의 아버지’, 그리고 ‘슈퍼스타’  우선 소크라테스가 ‘철학자’의 아이콘이라는 것에 대해 반론할 사람은 거의 없을 것이다. 실제로 소크라테스 이전의 철학은 ‘자연...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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우현
2024.02.05 | 조회 332
한문이예술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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동은
2024.01.11 | 조회 267
봄날의 주역이야기
우리 사무실은 한 사람의 후원자 A씨가 거액의 전세 보증금을 빌려준 덕에 월세 없이 5년여를 버텨왔다. 그런데 그 후원자가 그것을 돌려받고 싶어했다. 실은 이런 뉘앙스의 말을 일년 전부터 들어왔다. 하지만 월세가 얼마가 되었건 새로운 고정지출을 만드는 건 회사 운영에 큰 위협이 된다는 점에서, 나는 듣고도 모른 체 해왔다. 할 수 없는 일이었다. 그러던 어느 날, ‘작은 동네서점’을 지향하며 청년 중심으로 운영되는 서점의 관리자 B씨로부터 연락이 왔다. “우리 서점이 0월말로 전세기간이 만료돼요. 조금 더 공간이 크고, 학교와 가까운 곳으로 옮길 생각인데...혹시 함께 공간을 얻을 생각이 있으신지요?”   한번도 이 문제에 대해 입밖에 낸 적도, B씨와 논의한 적도 없었는데, 나는 이상하게 그 제안에 끌렸다. 늘 마음 한 구석에 남아있던 A씨에 대한 부채를 해결하고픈 생각이 불쑥 고개를 내밀었다. 공간을 함께 나누면 월세의 부담도 덜고, 초기 위험부담도 적어질 거라는 생각에 이르렀다. 나는 덜컥 동의를 해버렸고, 하루 이틀 사이에 신축건물 2층 공간을 발견하고, 며칠 사이에 월세계약까지 해치워버렸다. 누가 떠민 것도 아닌데, ‘이렇게 하는 것이 당연하다’는 듯이, 정해진 수순처럼 나의 결정은 거침 없었다.   택천괘(澤天夬)는 바로 이런 결정의 순간을 가리킨다. ‘결단하다’, ‘결정하다’의 뜻을 가진 쾌(夬)라는 글자는 활시위를 당길 때 엄지에 끼는 깍지나, 깍지를 낀 손의 형상에서 나왔다. 활은 쏘아 맞히는 도구이고, 시위를 당긴 화살은 언젠가는 쏘아야 한다. 쾌괘는 목표를 겨누었다가 깍지를 풀어놓는 그 순간의 상황이다. 겨눌 만큼...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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봄날
2024.01.08 | 조회 362
기린의 공동체가 양생이다
  1. 양생에 대한 오해       양생이라는 낱말을 국어사전에서 찾아보면 “병에 걸리지 않도록 건강관리를 잘 하여 오래 살기를 꾀함”이라는 뜻이 첫 번째로 실려 있다. 즉 양생은 오래 살기 위한 방편이라는 것이다. 내가 속해 있는 공동체에서도 양생과 관련한 공부를 하자고 했더니, 건강 챙기는 것도 공부해야 하느냐고 반문한 친구도 있었다. 하지만 양생(養生)의 출전으로 알려진 「양생주」에서는 병이라거나 건강, 장수에 대한 언급이 거의 없다. 다만 첫 장에 “시비선악을 넘어 중도의 도를 지키면 자기 자신을 지킬 수 있고, 삶을 온전히 할 수 있고, 부모님을 잘 모실 수 있고, 천수를 누릴 수 있습니다.”는 내용이 있다. 이 또한 오래 사는 것보다는 어떻게 살 것인가에 초점이 맞춰져 있다. 양생이 장수를 뜻하게 된 데는 진시황의 일화가 한 몫을 했다고 볼 수 있다.    「진시황본기」에는 불로장생에 꽂힌 진시황의 이야기가 나온다. 진시황이 천하통일을 이룬 후 천하를 순행하기 시작했는데, 제나라에 들렀을 때 서불 등의 방사들을 만나 신선에 대해 알게 되었다. 이후로 진시황은 방사들을 가까이 하며 죽지 않는 신선이 될 수 있는 약을 구하려고 막대한 비용을 댔다. 그 중의 노생이라는 방사는 진인(眞人)을 소개하며 “물에 들어가도 젖지 않으며 불에 들어가도 타지 않고(....) 천지와 더불어 영원합니다.” 라고 했다. 「대종사」편에 나오는 진인을 가리키는 내용과 같다. 하지만 진시황은 불사약을 얻지 못했고 순행 도중에 병을 얻어 객사하고 말았다. 이후에도 한무제 역시 말년에 불로장생에 몰두하였다는 등 진인이...
  1. 양생에 대한 오해       양생이라는 낱말을 국어사전에서 찾아보면 “병에 걸리지 않도록 건강관리를 잘 하여 오래 살기를 꾀함”이라는 뜻이 첫 번째로 실려 있다. 즉 양생은 오래 살기 위한 방편이라는 것이다. 내가 속해 있는 공동체에서도 양생과 관련한 공부를 하자고 했더니, 건강 챙기는 것도 공부해야 하느냐고 반문한 친구도 있었다. 하지만 양생(養生)의 출전으로 알려진 「양생주」에서는 병이라거나 건강, 장수에 대한 언급이 거의 없다. 다만 첫 장에 “시비선악을 넘어 중도의 도를 지키면 자기 자신을 지킬 수 있고, 삶을 온전히 할 수 있고, 부모님을 잘 모실 수 있고, 천수를 누릴 수 있습니다.”는 내용이 있다. 이 또한 오래 사는 것보다는 어떻게 살 것인가에 초점이 맞춰져 있다. 양생이 장수를 뜻하게 된 데는 진시황의 일화가 한 몫을 했다고 볼 수 있다.    「진시황본기」에는 불로장생에 꽂힌 진시황의 이야기가 나온다. 진시황이 천하통일을 이룬 후 천하를 순행하기 시작했는데, 제나라에 들렀을 때 서불 등의 방사들을 만나 신선에 대해 알게 되었다. 이후로 진시황은 방사들을 가까이 하며 죽지 않는 신선이 될 수 있는 약을 구하려고 막대한 비용을 댔다. 그 중의 노생이라는 방사는 진인(眞人)을 소개하며 “물에 들어가도 젖지 않으며 불에 들어가도 타지 않고(....) 천지와 더불어 영원합니다.” 라고 했다. 「대종사」편에 나오는 진인을 가리키는 내용과 같다. 하지만 진시황은 불사약을 얻지 못했고 순행 도중에 병을 얻어 객사하고 말았다. 이후에도 한무제 역시 말년에 불로장생에 몰두하였다는 등 진인이...
기린
2023.12.11 | 조회 392
논어 카메오 열전
제경공이 공자에게 정치에 대해 물었다. 공자께서 대답하셨다. “임금은 임금답고 신하는 신하다우며, 아버지는 아버지답고 아들은 아들다워야 합니다.” 제경공이 말했다. “훌륭하십니다! 진실로 임금이 임금답지 못하고 신하가 신하답지 못하며, 아버지가 아버지답지 못하고 아들이 아들답지 못하다면, 비록 곡식이 있더라도 제가 그것을 먹을 수 있겠습니까?”(齊景公問政於孔子 孔子對曰 君君 臣臣 父父 子子 公曰 善哉 信如君不君 臣不臣 父不父 子不子 雖有粟 吾得而食諸) 「안연,11」   공자가 만난 제 경공   제나라 26대 군주인 경공(景公/재위 기원전 548~기원전490)은 대부인 최저에게 시해된 장공(莊公)의 이복동생으로 장공이 시해된 후 최저에 의해 옹립되었다. 최저의 권력은 끝이 없을 것 같았지만 얼마 뒤 그는 그의 측근인 경봉에 의해 죽임을 당했다. 경봉 역시 얼마 못가 그의 수하에 의해 죽임을 당한다. 그 뒤에 제나라의 권력은 네 집안, 국(國)씨, 고(高)씨, 포(鮑)씨, 전(田)씨가 힘의 균형을 이루면서 안정되게 되었다. 공자와 같은 시기를 살았던 제 경공은 공자와 세 번 정도 만난 것으로 알려져 있다. 먼저 공자가 30대 초반일 때 노나라에 온 제 경공과 안자를 만났다고 한다. 다음에는 30대 중반의 공자가 제나라로 가 경공을 만났다. 마지막으로 50대에 이르러 대사구의 직책을 맡게 된 공자가 제 경공과 노 정공의 회담을 주관하면서 만나게 되었다. 『논어』에도 제 경공에 대한 기록이 세 차례 보인다. 그 중 두 개가 30대 중반의 공자가 제나라에 갔을 때, 경공을 만나는 장면이다. 공자를 만난 제 경공은 그에게 ‘정치’에 대해 물어본다. 이 때 공자는 “임금은 임금답고...
제경공이 공자에게 정치에 대해 물었다. 공자께서 대답하셨다. “임금은 임금답고 신하는 신하다우며, 아버지는 아버지답고 아들은 아들다워야 합니다.” 제경공이 말했다. “훌륭하십니다! 진실로 임금이 임금답지 못하고 신하가 신하답지 못하며, 아버지가 아버지답지 못하고 아들이 아들답지 못하다면, 비록 곡식이 있더라도 제가 그것을 먹을 수 있겠습니까?”(齊景公問政於孔子 孔子對曰 君君 臣臣 父父 子子 公曰 善哉 信如君不君 臣不臣 父不父 子不子 雖有粟 吾得而食諸) 「안연,11」   공자가 만난 제 경공   제나라 26대 군주인 경공(景公/재위 기원전 548~기원전490)은 대부인 최저에게 시해된 장공(莊公)의 이복동생으로 장공이 시해된 후 최저에 의해 옹립되었다. 최저의 권력은 끝이 없을 것 같았지만 얼마 뒤 그는 그의 측근인 경봉에 의해 죽임을 당했다. 경봉 역시 얼마 못가 그의 수하에 의해 죽임을 당한다. 그 뒤에 제나라의 권력은 네 집안, 국(國)씨, 고(高)씨, 포(鮑)씨, 전(田)씨가 힘의 균형을 이루면서 안정되게 되었다. 공자와 같은 시기를 살았던 제 경공은 공자와 세 번 정도 만난 것으로 알려져 있다. 먼저 공자가 30대 초반일 때 노나라에 온 제 경공과 안자를 만났다고 한다. 다음에는 30대 중반의 공자가 제나라로 가 경공을 만났다. 마지막으로 50대에 이르러 대사구의 직책을 맡게 된 공자가 제 경공과 노 정공의 회담을 주관하면서 만나게 되었다. 『논어』에도 제 경공에 대한 기록이 세 차례 보인다. 그 중 두 개가 30대 중반의 공자가 제나라에 갔을 때, 경공을 만나는 장면이다. 공자를 만난 제 경공은 그에게 ‘정치’에 대해 물어본다. 이 때 공자는 “임금은 임금답고...
진달래
2023.12.05 | 조회 305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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