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읽고쓰기1234] 행복 꼭 필요할까요

스르륵
2023-11-21 10:53
309

행복 꼭 필요할까요

『해피크라시』, 에바 일루즈 · 에드가르 카바나스 지음

 

 

 

나는 ‘나는 솔로(solo)’를 즐겨본다. 이번 기수 ‘영수’는 자기소개에서 자신의 가치관에서 ‘행복’이 얼마나 중요한 개념인지를 어필했다. 꾸준히 운동을 하고, 자신의 꿈을 위해 자기계발을 게을리하지 않는다는 인상을 준 ‘영수’는 이제껏 그런 느낌을 주었던 다른 출연자들처럼 큰 이변이 없는 한 틀림없이 매력적으로 어필 될 터였다.  ‘정숙’역시 “평소에 긍정적이세요?”라는 ‘광수’의 질문에 “긍정적으로 생각하는 것이 부정적으로 생각하는 것 보다 당연히 좋은 것아니냐?”고 화답했다. 행복을 위해 긍정의 자세를 잃지 않는다는 우리 시대의 이런 이야기는 딱히 특별할 것도 없다.

그러나 에바 일루즈와 에드가르 카바나스의 『해피크라시』를 읽고 나면 무심히 들어오던 ‘행복’과 ‘긍정’이라는 평범한 단어에 갑자기 버퍼링이 걸릴지 모른다. 후기 자본주의 소비사회 특히 미국 사회에서의 감정의 위상에 주목하는 일루즈는 『감정 자본주의(2007)』와 『사랑은 왜 아픈가』(2011) 등을 통해 감정의 영역과 경제 영역의 상호 침투 양상을 날카롭게 분석해온 것으로 유명한데, 이 책 『해피크라시』(2018)에서는 신자유주의 소비 사회 속의 거대한 ‘행복 추구의 물결’을 강력하게 비판하고 있기에 말이다.

실은 ‘행복’이라는 단어는 딱히 특별할 것이 없다. 아리스토텔레스가 ‘행복(좋음, good)’을 최고선이라 규정하며 지난하게 우리를 설득한 것을 제외한다면 대체로 ‘행복(happiness)’은 그저 복된 운수, 즐겁고 기쁜 상태로 통상적으로 사용되는 주관적인 만족과 안녕감을 의미하기에 말이다. 하여 객관적으로 명확히 파악되기 어려운 개념임에도 불구하고, ‘행복’은 전 세계가 문화적, 도덕적, 인류학적 편견이나 전제 없이 해맑게(?) 사용하는 ‘무해한’ 언어 중의 하나임에 틀림없을 것이다. 그래서 우리는 그토록 지겹게도 해시태그를 달았는지 모르겠다. #모두모두 행복하세요! 라고 말이다.

 

 

 

 

긍정하라, 행복할지니

 

긍정심리학의 관점을 더 많은 사람들이 공유하기를, 혁명적이고 참으로 유익한 이 작업을 지지하는 프로그램을 더 많은 재단과 정부가 만들어 주기를 간절히 바랍니다.”

 

무해한 ‘행복’이 『해피크라시』에서 비판적으로 전유되는 과정의 선두에는 무엇보다 ‘긍정심리학’이 있다. 일루즈의 설명에 따르면, ‘긍정심리학’이란 ‘인간의 긍정적 특징을 잘 이끌고 잠재력을 최대한 키울 수 있도록 도와 개인의 행복에 일조하게 한다는, 즉 긍정적 태도와 행복에 관련된 주제로 20세기 말 미국 심리학회(APA, 마틴 셀리그먼)에서 강력하게 부흥한 새로운 심리학 사조다. 긍정심리학이 기존의 심리학과 다른 점은, 전통적인 심리학이 불안과 우울, 스트레스 같은 인간의 ‘약점’에 집중했다면, 긍정심리학은 개인의 ‘강점’, 즉 지극히 긍정적인 심리와 감정 상태에만 초점을 맞춘다. 즉 고통치료 전략에 만족해선 안되고 개인의 잠재력을 극대화하기 위해서는 ‘상황을 긍정적으로 보라’는 메시지를 강조하고 있는 것이다.

이는 우리에게도 제법 귀에 익은 1950년대와 1960년대 ‘인본주의심리학’, 1980년대와 1990년대의 ‘자존감 운동’, 그리고 21세기 ‘자조문화(self-help)’와 ‘심리 치유’를 생각나게 한다. 하여 긍정심리학은 이 연장선상에서 무엇보다도 특히 인간 마음의 밝은 면인 주관적 안녕감, 긍정적 감정, 진정성, 낙관주의, 회복 탄력성 등 우리를 행복하게 만들어주는 긍정적인 측면들이 ‘과학적’으로 규명될 수 있다고 주장하면서 진취적이고, 자기 주도적이고, 기분좋은 아우라를 우리에게 선물한다.

하여 문제는 긍정심리학의 이러한 빅픽쳐가 (일루즈가 보는 것처럼) 꼭 그렇게 나쁜 그림 같아 보이지 않는다는데 있다. 비루한 현실 속에서 더 기분좋게 살아가도록 도와주는 것을 나쁘다고 할 수 있나? 무엇보다 행복은 오르지 못할 나무가 아니라 개인이 노력하기 나름이라는데? 어차피 이데올로기란 것이 모순들 속에서 행복하게 살아갈 수 있는 판타지를 생산해주는 것이라고 본다면 긍정심리학의 이런 의도는 오히려 권장할 만하게 보인다. 너라면 할 수 있어, 이거 좋은거 아닌가.

 

 

 

 

새로운 이데올로기의 탄생

일루즈에 의하면 긍정심리학의 ‘행복 프로젝트’는 창시 불과 몇 년 만에 대박을 터뜨렸다. ‘라이프스타일을 형성하고, 자아와 영성, 그리고 자기 개선 능력과 정신에 관련된 문제들에 도움을 줍니다’, ‘행복의 양은 측정 될 수 있습니다(공리주의는 실패했지만)’ 이 홍보에 이끌려 세계 곳곳의 학회가 신설되고, 국제적 네트워크가 구성되었다. 뿐만 아니라 이 유행에 부응하려는 전 세계 언론의 열광적인 지지를 바탕으로 대중은 물론 자신만의 꿍꿍이를 가슴에 품은 정치, 경제, 교육 등의 각 분야 주체들이 긍정심리학의 우산 아래로 모여들었다.

 

심리적 행복의 복음은 인종적 분열, 사회적, 성적 격차로 피폐해진 사회에서 사회적 유대를 대체했다.

 

수 많은 사설기관과 공공기관들이 긍정심리학의 너그러운 돈줄과 주요 고객이 되어주었다. 코카콜라, 구글, 인텔, 포드, 아메리칸 익스프레스, 제너럴 밀스 같은 다국적 기업들은 자기 내면을 탐험하며 심리적 실마리와 의지를 찾아내려는 노동자를 격려해주는 동시에 ‘생산성’ 향상의 기대를 품은 채 행복학과 손을 잡았다. 정계도 예외는 아니어서 세계 여러 나라들은 화폐단위로 측정되던 비용과 효율의 딱딱한 지표들을 ‘행복’이라는 유연한 지표 즉, ‘행복지수’, ‘웰빙지수’로 대체했다. 2008년 금융위기 이후 세계 경제가 무너지고, 국민 생활의 지속적인 하락과 불평등의 심화에도 불구하고 여전히 국민의 ‘행복’을 말할 수 있기 위해, 혹은 국민이 주관적으로 행복하다고만 하면 걱정할 게 없다고 생각했던 세계 여러 나라들은 서둘러 ‘GNH(Gross National Happiness, 국민총행복)’의 시대를 열었고, ‘행복부’를 신설했다.

누이 좋고 매부 좋은 윈윈의 흐름은 의료계와 교육계에도 영향을 미쳤다. 인간의 다양한 질병과 부정적인 측면을 분류하고 평가하는 기존 의료 매뉴얼에 대응해, 인간의 덕성과 강점만을 강조하고 분류하는 긍정심리학의 ‘정신건강메뉴얼’은 관련 업계는 물론 여러 방면으로 그 영향력이 퍼져나갔고, 교육계에서는 행복 개념에 기초한 학습프로그램들이 (예를 들어 영국 초등학교의 90%, 중등 교육 기관의 70%) 역량 증진과 감정관리라는 이름으로 실시되었다. 신자유주의 교육문화에서는 ‘비판’이나 ‘추론’보다 인맥과 경영에 더 치우치는 ‘기업가 정신’이 에 더 환영을 받았고, 17개국 수 천개의 학교가 국제긍정교육네트워크와 연결되어 긍정교육에 귀의했다.

‘긍정적인 정신 건강'에 기초한 자기 계발의 '코칭' 기법들은 스포츠과학, 디자인, 신경과학, 동물 복지, 인문학 등등 우리 일상의 전반을 아우르며 퍼져나갔다. 세계 각국의 행복지수에 의거하여 유엔은 '세계 행복의 날(3월20일)'을 정했고, OECD는 각국의 공공정책에서 '웰빙지수' 선택을 강력히 권고했다. 행복과 웰빙은 전 세계의 보편적인 열망이자 목표가 되었다. 이제 행복은 자명하고 측정가능한 ‘선’이 되어 우리 모두가 다다르고 힘써야 할 지고한 어떤 것이 되어버렸다고 일루즈는 강조한다. 이는 우리가 행복을 부정해야 하는 것은 아니지만 반드시 추구해나가야 할 하나의 당위가 됨으로써 어떤 ‘특정한’ 좋은 삶을 행복으로 환원하여 읽어나갈 위험성이 더 커졌다는 것을 의미하기도 한다. 행복은 ‘행복 이데올로기’가 되었다.

 

 

 

행복이라는 역습

이제 행복은 아리스토텔레스가 말하는 덕스러움 그 자체도, 순박한 영혼에게 주어지는 위로도 아니며, 운명, 상황, 혹은 생의 무탈함과 관련되어 있는 어떤 것이 아니라, 의지로써 이루어지는 심리 상태들의 전체를 의미한다. 하여 ‘해피크라시‘란, 행복의 강박적 추구라는 흐름 속에서 새롭게 등장한 '시민권'의 개념이자, 새로운 ‘지배적 전략’이자, 새로운 ‘정치적 의사결정’, 그리고 새로운 ‘경영방식’을 의미한다. 이렇게 본다면 이제 우리는 ‘행복’이라는 어떤 ‘공격‘을 받으며 살게 된 건 아닐까?

자본주의와 긍정 이데올로기의 콜라보는 ‘노력하면 행복 할 수 있어’를 외친다. 이 말의 진짜 의미는 무얼까? ‘건강을 위해 운동을 하고, 자기 계발을 게을리하지 않으며, 평소 긍정적인 측면만을 보라’는 윤리적 금언들은 실은 알고 보면 국가와 기업들이 자신들이 책임져야 할 신자유주의 경제의 불확실성과 공공 정책의 결함을 노동자 개인의 ‘긍정적인’ 내면에 떠넘기고 있는 것은 아닐까. 즉, 실업률, 불평등과 차별, 소득의 재분배, 빈곤과 교육 등의 사회 구조적 문제는 쉴새없이 자신을 진단하고 만들어 나가는 ‘자기주도적이고 자율적이고 유연한’ 영수들의 어깨에 각자 도생의 책임으로 변주되고 있는 것은 아닌지 일루즈는 묻고 있는 것이다.

개인의 의지가 모든 상황에 앞선다는 말, 환경보다 자아에 더 관심을 기울이라는 말, 시대가 어떻든 열쇠는 늘 우리 안에 있다는 그 기분 좋았던 ‘아우라’는 어쩌면 노동을 ‘개인의 프로젝트’로 떠넘기고, 교육을 ‘개인의 재능과 자질’의 문제로 해석하고, 건강을 ‘라이프스타일’의 문제로 변모시키면서, ‘사회적 진보’ 조차 함께 참여하는 우리 모두의 어떤 문제라기보다 그저 ‘개인적 번영’의 문제로 환원시킨 자기 개선의 강박과 행복염려증의 주범이 아닐까.

하여 알고 보면 ‘긍정하라, 행복할지니’의 진정한 속내는 ‘노력하지 않는 너는 문제가 있어’다. ‘자기 개선’의 노력을 하지 않는 사람은 해피크라시에서는 ‘비정상인’이다. 그런데 자기 개선에 열심인 사람역시 고달프긴 마찬가지다. 자기 계발이라는 의미속에 내재되어있는 자아의 불완전성이라는 환영에 끊임없이 시달리기에 말이다. 그리고 우리 시대 영수들이 느낄 바로 이 ‘자아의 불완전성’은 기업들의 완벽한 챤스인 ‘셀링포인트’가 된다. 그러하기에 시장이 우리에게 원하는 건 ‘완벽해지라’는 요구가 아니다. 긍정을 강조하는 행복학의 사도들이 우리에게 원하는 건 ‘강박의 정상화’, 즉 최선의 자기 만들기에 끊임없이 도전하라는 ‘명령’이다.

하여 『해피크라시』를 읽으며. 왜 그토록 많은 기업들이 ‘긍정적 태도’를 중시했는지, 왜 교육 현장에서 수년전부터 ‘기업가 정신’ 프로젝트가 성황이었는지, 나는 솔로의 솔로들은 왜 행복과 긍정을 이야기할 수 밖에 없는지 뒤늦게 이해가 되었다. 그러나 긍정심리학이 일루즈의 설명처럼, 진화론, 심리학, 신경과학, 철학의 개념들을 끌어와 급조한 ‘지극히 미국적인 신념’을 가짜 과학의 어법으로 다시 쓴 것일 뿐이라 해도, 또 긍정심리학이 말하는 행복학이 행복산업에 포획되어버린 ‘강박적’ 자기 계발의 명령이라 할지라도, 나는 잠옷을 입고 출근하건 말건 상관하지 않는다는 구글의 ‘긍정기업문화’가 여전히 멋있고, 매사에 긍정적으로 성실하게 노력한다는 우리 시대 ‘영수들’이 여전히 눈물겹다. 어렵다, 도대체 행복이 뭐길래.

 

행복은 좀 더 큰 행복을 필요로 하기 전의 그 순간이다

 

그러나 ‘행복이 무엇인가’라는 질문을 ‘행복은 무엇을 하는가’로 바꿔 본다면 답이 좀 쉽지 않을까. 그리고 일루즈가 강조하는 것처럼, 행복의 ‘참다운’ 이미지라는 것은 결코 존재하지 않기에 ‘최고의 자아’에 도달해야 할 의무같은 것도 결코 존재하지 않는다는 것을 우리가 잊지 않는다면, 행복 이데올로기에서도 조금은 자유로울 수 있지 않을까. 동시에, 우리의 삶이라는 것이 고통과 고난이라는 부정값없이 긍정값으로만 홀로 구성될 수 없음도 상기한다면, ‘언제나 더 큰 행복이 필요하다’는 해피크라시의 거대한 유혹에서 조금은 자유로울 수 있을 것이다.

그런데 행복은 우리에게 꼭 필요한 걸까? 만약 필요하다면 어떤 행복이 필요한 걸까. 행복 프로젝트가 주장하는 것처럼 행복을 ‘자명하게’ 정의하고, 측정하고, 증명하고, 수치화 할 수는 없지만 우리가 언제나 ‘어떤’ 희망같은 것을 필요로 한다는 건 사실일 것이다. 그러나 이때의 희망은 만들어지고 처방되어지는 것이 아닌 어떤 ‘비판적인 분석’에 기초한 희망이다. 그리고 ‘사회 정의’에 기초한 희망인 동시에 ‘가부장적이지 않은 정치’에 기초한 희망일 것이다. 하여, 행복이란 것이 일루즈가 말하는 것처럼 이러한 ‘정의’와 ‘앎’에 기초한 희망으로서의 행복을 말하는 것이라면 우리는 더 큰 ‘행복’을 필요로 하는 것이 맞다.

댓글 4
  • 2023-11-22 08:09

    아주 흥미롭게 읽었습니다.

    그놈의 행복, 긍정, 힐링 타령...이주 지긋지긋하다싶었는데...제가 삐딱해서 그런것 만은 아니었군요. 헤헤

    • 2023-11-23 09:42

      오호...토토로의 댓글이 더 흥미롭군요. ㅎㅎ

      전...나카자와 신이치가 행복에 대해 설명한 게 늘 맘에 남아요. 자기도 모르는 사이에 신(=순수증여)가 내 인생에 난입(?! = happen) 순간,
      다시 말해 접신하는 순간!!

  • 2023-11-24 18:38

    최근에는 청년 토론 모임에 참여하고 있어요.
    지난 시간 주제는 '자유'였는데, '자유는 주인의식이다', '자유는 (마음의) 평화다', '자유는 하고 싶은 것을 하는 것이다' 등 의견이 나왔어요. 그런데 저는 토론이 진행되는 내내 어떤 위화감을 지울 수가 없었어요. 행복과 마찬가지로 자유는 어떤 당위로서 마땅히 추구해야 하는 것이란 전제 위에서 논의가 되었기 때문일까요? '애초에 자유는 추구해야하는 무엇인걸까?'라는 질문이 작게 마음 속에서 피어났지만 그 말을 꺼내지는 못했어요. 마땅히 자유로우면 좋은 거 아닌가? 라는 결론 밖에 안 나올 것 같아서요. 주제는 다르지만 맞닿는 부분이 있는 것 같아서 생각이 깊어지네요...
    아직도 어떤 부분 때문에 턱턱 걸렸는지는 잘 모르겠어요.

    • 2023-11-26 11:51

      그러게요. 이런 자유 저도 궁금하네요~

한문이예술
  한자에서 느껴지는 모든 것   동은       1. 한자의 느낌적인 느낌   알려진 바와 같이 우리 말 단어의 상당수는 한자어로 이루어져 있다. 그런데 1948년 정부수립 이후 서서히 한자어를 한글로 표기하게 되면서 이른바 우리나라 고유어와 한자어의 구분이 어려워졌다. 그래서 오늘날에는 우리가 일상적으로 사용하는 단어에 어떤 한자가 사용되었는지 알아차리기가 어려워졌다. 예를 들면 ‘유람’과 ‘유랑’은 ‘여유롭게 돌아다닌다’는 어감이 비슷해보이지만 각각 놀 유遊와 흐를 류流로 다른 한자가 사용되어 ‘놀면서 돌아다니다’와 ‘목적없이 물 흐르듯 다닌다’는 차이가 있다. 이런 경우도 있다. ‘사전’은 ‘단어들을 모아 그 의미를 밝혀놓은 책’으로 말씀 사辭와 책 전典을 쓰는데, ‘백과사전’은 ‘여러 분야의 지식을 압축해 분류하고 모아 현상과 상태 자체를 모아 설명해 놓은 것’이라 이 때는 일 사事자를 사용한다. 이 事는 원래 ‘어떤 사람’을 지칭하는 한자였는데 오늘날에는 어떤 사건이나 일 자체를 의미하기도 해서 ‘일事’이 포괄하는 용례를 살펴보면 한자 하나로 얼마나 다층적인 의미로 쓰이고 있는지 알 수 있다.     아시아의 근대화와 함께 중국 철학은 서구에서 성립된 근대 학문 체계로 편입되었다. 이런 분위기 속에서 중국 철학을 중국 자체의 시선으로 바라보려 했던 마르셀 그라네는 『중국 사유』에서 한자에 대해 이렇게 얘기했다.   “중국의 단어는 하나의 개념에 부응하지 않는다. 마찬가지로 하나의 단순한 기호도 아니며, 문법이나 통사의 기교를 통해서 생명을 부여받은 추상적 기호도 아니다. 그것은 불변의 단음절 형식과 중성적 양상 속에 작용을 미치는 데 필요한...
  한자에서 느껴지는 모든 것   동은       1. 한자의 느낌적인 느낌   알려진 바와 같이 우리 말 단어의 상당수는 한자어로 이루어져 있다. 그런데 1948년 정부수립 이후 서서히 한자어를 한글로 표기하게 되면서 이른바 우리나라 고유어와 한자어의 구분이 어려워졌다. 그래서 오늘날에는 우리가 일상적으로 사용하는 단어에 어떤 한자가 사용되었는지 알아차리기가 어려워졌다. 예를 들면 ‘유람’과 ‘유랑’은 ‘여유롭게 돌아다닌다’는 어감이 비슷해보이지만 각각 놀 유遊와 흐를 류流로 다른 한자가 사용되어 ‘놀면서 돌아다니다’와 ‘목적없이 물 흐르듯 다닌다’는 차이가 있다. 이런 경우도 있다. ‘사전’은 ‘단어들을 모아 그 의미를 밝혀놓은 책’으로 말씀 사辭와 책 전典을 쓰는데, ‘백과사전’은 ‘여러 분야의 지식을 압축해 분류하고 모아 현상과 상태 자체를 모아 설명해 놓은 것’이라 이 때는 일 사事자를 사용한다. 이 事는 원래 ‘어떤 사람’을 지칭하는 한자였는데 오늘날에는 어떤 사건이나 일 자체를 의미하기도 해서 ‘일事’이 포괄하는 용례를 살펴보면 한자 하나로 얼마나 다층적인 의미로 쓰이고 있는지 알 수 있다.     아시아의 근대화와 함께 중국 철학은 서구에서 성립된 근대 학문 체계로 편입되었다. 이런 분위기 속에서 중국 철학을 중국 자체의 시선으로 바라보려 했던 마르셀 그라네는 『중국 사유』에서 한자에 대해 이렇게 얘기했다.   “중국의 단어는 하나의 개념에 부응하지 않는다. 마찬가지로 하나의 단순한 기호도 아니며, 문법이나 통사의 기교를 통해서 생명을 부여받은 추상적 기호도 아니다. 그것은 불변의 단음절 형식과 중성적 양상 속에 작용을 미치는 데 필요한...
동은
2024.01.11 | 조회 255
봄날의 주역이야기
우리 사무실은 한 사람의 후원자 A씨가 거액의 전세 보증금을 빌려준 덕에 월세 없이 5년여를 버텨왔다. 그런데 그 후원자가 그것을 돌려받고 싶어했다. 실은 이런 뉘앙스의 말을 일년 전부터 들어왔다. 하지만 월세가 얼마가 되었건 새로운 고정지출을 만드는 건 회사 운영에 큰 위협이 된다는 점에서, 나는 듣고도 모른 체 해왔다. 할 수 없는 일이었다. 그러던 어느 날, ‘작은 동네서점’을 지향하며 청년 중심으로 운영되는 서점의 관리자 B씨로부터 연락이 왔다. “우리 서점이 0월말로 전세기간이 만료돼요. 조금 더 공간이 크고, 학교와 가까운 곳으로 옮길 생각인데...혹시 함께 공간을 얻을 생각이 있으신지요?”   한번도 이 문제에 대해 입밖에 낸 적도, B씨와 논의한 적도 없었는데, 나는 이상하게 그 제안에 끌렸다. 늘 마음 한 구석에 남아있던 A씨에 대한 부채를 해결하고픈 생각이 불쑥 고개를 내밀었다. 공간을 함께 나누면 월세의 부담도 덜고, 초기 위험부담도 적어질 거라는 생각에 이르렀다. 나는 덜컥 동의를 해버렸고, 하루 이틀 사이에 신축건물 2층 공간을 발견하고, 며칠 사이에 월세계약까지 해치워버렸다. 누가 떠민 것도 아닌데, ‘이렇게 하는 것이 당연하다’는 듯이, 정해진 수순처럼 나의 결정은 거침 없었다.   택천괘(澤天夬)는 바로 이런 결정의 순간을 가리킨다. ‘결단하다’, ‘결정하다’의 뜻을 가진 쾌(夬)라는 글자는 활시위를 당길 때 엄지에 끼는 깍지나, 깍지를 낀 손의 형상에서 나왔다. 활은 쏘아 맞히는 도구이고, 시위를 당긴 화살은 언젠가는 쏘아야 한다. 쾌괘는 목표를 겨누었다가 깍지를 풀어놓는 그 순간의 상황이다. 겨눌 만큼...
우리 사무실은 한 사람의 후원자 A씨가 거액의 전세 보증금을 빌려준 덕에 월세 없이 5년여를 버텨왔다. 그런데 그 후원자가 그것을 돌려받고 싶어했다. 실은 이런 뉘앙스의 말을 일년 전부터 들어왔다. 하지만 월세가 얼마가 되었건 새로운 고정지출을 만드는 건 회사 운영에 큰 위협이 된다는 점에서, 나는 듣고도 모른 체 해왔다. 할 수 없는 일이었다. 그러던 어느 날, ‘작은 동네서점’을 지향하며 청년 중심으로 운영되는 서점의 관리자 B씨로부터 연락이 왔다. “우리 서점이 0월말로 전세기간이 만료돼요. 조금 더 공간이 크고, 학교와 가까운 곳으로 옮길 생각인데...혹시 함께 공간을 얻을 생각이 있으신지요?”   한번도 이 문제에 대해 입밖에 낸 적도, B씨와 논의한 적도 없었는데, 나는 이상하게 그 제안에 끌렸다. 늘 마음 한 구석에 남아있던 A씨에 대한 부채를 해결하고픈 생각이 불쑥 고개를 내밀었다. 공간을 함께 나누면 월세의 부담도 덜고, 초기 위험부담도 적어질 거라는 생각에 이르렀다. 나는 덜컥 동의를 해버렸고, 하루 이틀 사이에 신축건물 2층 공간을 발견하고, 며칠 사이에 월세계약까지 해치워버렸다. 누가 떠민 것도 아닌데, ‘이렇게 하는 것이 당연하다’는 듯이, 정해진 수순처럼 나의 결정은 거침 없었다.   택천괘(澤天夬)는 바로 이런 결정의 순간을 가리킨다. ‘결단하다’, ‘결정하다’의 뜻을 가진 쾌(夬)라는 글자는 활시위를 당길 때 엄지에 끼는 깍지나, 깍지를 낀 손의 형상에서 나왔다. 활은 쏘아 맞히는 도구이고, 시위를 당긴 화살은 언젠가는 쏘아야 한다. 쾌괘는 목표를 겨누었다가 깍지를 풀어놓는 그 순간의 상황이다. 겨눌 만큼...
봄날
2024.01.08 | 조회 342
기린의 공동체가 양생이다
  1. 양생에 대한 오해       양생이라는 낱말을 국어사전에서 찾아보면 “병에 걸리지 않도록 건강관리를 잘 하여 오래 살기를 꾀함”이라는 뜻이 첫 번째로 실려 있다. 즉 양생은 오래 살기 위한 방편이라는 것이다. 내가 속해 있는 공동체에서도 양생과 관련한 공부를 하자고 했더니, 건강 챙기는 것도 공부해야 하느냐고 반문한 친구도 있었다. 하지만 양생(養生)의 출전으로 알려진 「양생주」에서는 병이라거나 건강, 장수에 대한 언급이 거의 없다. 다만 첫 장에 “시비선악을 넘어 중도의 도를 지키면 자기 자신을 지킬 수 있고, 삶을 온전히 할 수 있고, 부모님을 잘 모실 수 있고, 천수를 누릴 수 있습니다.”는 내용이 있다. 이 또한 오래 사는 것보다는 어떻게 살 것인가에 초점이 맞춰져 있다. 양생이 장수를 뜻하게 된 데는 진시황의 일화가 한 몫을 했다고 볼 수 있다.    「진시황본기」에는 불로장생에 꽂힌 진시황의 이야기가 나온다. 진시황이 천하통일을 이룬 후 천하를 순행하기 시작했는데, 제나라에 들렀을 때 서불 등의 방사들을 만나 신선에 대해 알게 되었다. 이후로 진시황은 방사들을 가까이 하며 죽지 않는 신선이 될 수 있는 약을 구하려고 막대한 비용을 댔다. 그 중의 노생이라는 방사는 진인(眞人)을 소개하며 “물에 들어가도 젖지 않으며 불에 들어가도 타지 않고(....) 천지와 더불어 영원합니다.” 라고 했다. 「대종사」편에 나오는 진인을 가리키는 내용과 같다. 하지만 진시황은 불사약을 얻지 못했고 순행 도중에 병을 얻어 객사하고 말았다. 이후에도 한무제 역시 말년에 불로장생에 몰두하였다는 등 진인이...
  1. 양생에 대한 오해       양생이라는 낱말을 국어사전에서 찾아보면 “병에 걸리지 않도록 건강관리를 잘 하여 오래 살기를 꾀함”이라는 뜻이 첫 번째로 실려 있다. 즉 양생은 오래 살기 위한 방편이라는 것이다. 내가 속해 있는 공동체에서도 양생과 관련한 공부를 하자고 했더니, 건강 챙기는 것도 공부해야 하느냐고 반문한 친구도 있었다. 하지만 양생(養生)의 출전으로 알려진 「양생주」에서는 병이라거나 건강, 장수에 대한 언급이 거의 없다. 다만 첫 장에 “시비선악을 넘어 중도의 도를 지키면 자기 자신을 지킬 수 있고, 삶을 온전히 할 수 있고, 부모님을 잘 모실 수 있고, 천수를 누릴 수 있습니다.”는 내용이 있다. 이 또한 오래 사는 것보다는 어떻게 살 것인가에 초점이 맞춰져 있다. 양생이 장수를 뜻하게 된 데는 진시황의 일화가 한 몫을 했다고 볼 수 있다.    「진시황본기」에는 불로장생에 꽂힌 진시황의 이야기가 나온다. 진시황이 천하통일을 이룬 후 천하를 순행하기 시작했는데, 제나라에 들렀을 때 서불 등의 방사들을 만나 신선에 대해 알게 되었다. 이후로 진시황은 방사들을 가까이 하며 죽지 않는 신선이 될 수 있는 약을 구하려고 막대한 비용을 댔다. 그 중의 노생이라는 방사는 진인(眞人)을 소개하며 “물에 들어가도 젖지 않으며 불에 들어가도 타지 않고(....) 천지와 더불어 영원합니다.” 라고 했다. 「대종사」편에 나오는 진인을 가리키는 내용과 같다. 하지만 진시황은 불사약을 얻지 못했고 순행 도중에 병을 얻어 객사하고 말았다. 이후에도 한무제 역시 말년에 불로장생에 몰두하였다는 등 진인이...
기린
2023.12.11 | 조회 386
논어 카메오 열전
제경공이 공자에게 정치에 대해 물었다. 공자께서 대답하셨다. “임금은 임금답고 신하는 신하다우며, 아버지는 아버지답고 아들은 아들다워야 합니다.” 제경공이 말했다. “훌륭하십니다! 진실로 임금이 임금답지 못하고 신하가 신하답지 못하며, 아버지가 아버지답지 못하고 아들이 아들답지 못하다면, 비록 곡식이 있더라도 제가 그것을 먹을 수 있겠습니까?”(齊景公問政於孔子 孔子對曰 君君 臣臣 父父 子子 公曰 善哉 信如君不君 臣不臣 父不父 子不子 雖有粟 吾得而食諸) 「안연,11」   공자가 만난 제 경공   제나라 26대 군주인 경공(景公/재위 기원전 548~기원전490)은 대부인 최저에게 시해된 장공(莊公)의 이복동생으로 장공이 시해된 후 최저에 의해 옹립되었다. 최저의 권력은 끝이 없을 것 같았지만 얼마 뒤 그는 그의 측근인 경봉에 의해 죽임을 당했다. 경봉 역시 얼마 못가 그의 수하에 의해 죽임을 당한다. 그 뒤에 제나라의 권력은 네 집안, 국(國)씨, 고(高)씨, 포(鮑)씨, 전(田)씨가 힘의 균형을 이루면서 안정되게 되었다. 공자와 같은 시기를 살았던 제 경공은 공자와 세 번 정도 만난 것으로 알려져 있다. 먼저 공자가 30대 초반일 때 노나라에 온 제 경공과 안자를 만났다고 한다. 다음에는 30대 중반의 공자가 제나라로 가 경공을 만났다. 마지막으로 50대에 이르러 대사구의 직책을 맡게 된 공자가 제 경공과 노 정공의 회담을 주관하면서 만나게 되었다. 『논어』에도 제 경공에 대한 기록이 세 차례 보인다. 그 중 두 개가 30대 중반의 공자가 제나라에 갔을 때, 경공을 만나는 장면이다. 공자를 만난 제 경공은 그에게 ‘정치’에 대해 물어본다. 이 때 공자는 “임금은 임금답고...
제경공이 공자에게 정치에 대해 물었다. 공자께서 대답하셨다. “임금은 임금답고 신하는 신하다우며, 아버지는 아버지답고 아들은 아들다워야 합니다.” 제경공이 말했다. “훌륭하십니다! 진실로 임금이 임금답지 못하고 신하가 신하답지 못하며, 아버지가 아버지답지 못하고 아들이 아들답지 못하다면, 비록 곡식이 있더라도 제가 그것을 먹을 수 있겠습니까?”(齊景公問政於孔子 孔子對曰 君君 臣臣 父父 子子 公曰 善哉 信如君不君 臣不臣 父不父 子不子 雖有粟 吾得而食諸) 「안연,11」   공자가 만난 제 경공   제나라 26대 군주인 경공(景公/재위 기원전 548~기원전490)은 대부인 최저에게 시해된 장공(莊公)의 이복동생으로 장공이 시해된 후 최저에 의해 옹립되었다. 최저의 권력은 끝이 없을 것 같았지만 얼마 뒤 그는 그의 측근인 경봉에 의해 죽임을 당했다. 경봉 역시 얼마 못가 그의 수하에 의해 죽임을 당한다. 그 뒤에 제나라의 권력은 네 집안, 국(國)씨, 고(高)씨, 포(鮑)씨, 전(田)씨가 힘의 균형을 이루면서 안정되게 되었다. 공자와 같은 시기를 살았던 제 경공은 공자와 세 번 정도 만난 것으로 알려져 있다. 먼저 공자가 30대 초반일 때 노나라에 온 제 경공과 안자를 만났다고 한다. 다음에는 30대 중반의 공자가 제나라로 가 경공을 만났다. 마지막으로 50대에 이르러 대사구의 직책을 맡게 된 공자가 제 경공과 노 정공의 회담을 주관하면서 만나게 되었다. 『논어』에도 제 경공에 대한 기록이 세 차례 보인다. 그 중 두 개가 30대 중반의 공자가 제나라에 갔을 때, 경공을 만나는 장면이다. 공자를 만난 제 경공은 그에게 ‘정치’에 대해 물어본다. 이 때 공자는 “임금은 임금답고...
진달래
2023.12.05 | 조회 291
한문이예술
    예술적(?) 동양고전 동은       1. 예술, 정체를 밝혀라!     아이들이 가끔 수업에 들어오며 질문을 한다. “선생님! 오늘은 뭐 만들어요?” <한문이 예술> 수업은 한문을 가르치지만 어떤 작품이나 발표 형식으로 결과물을 내기 때문에 아이들이 뭔가를 만드는 것이 익숙해진 것이다. 그래서인지 가끔 내가 미술 선생님으로 여겨지기도 하는데, 아무래도 ‘예술’이라는 이름으로 수업을 하다보니 그런 것 같기도 하다. 그런데 그럴 때마다 내 마음은 어딘가 콕콕 찔리는 느낌이다. 내가 하고 있는 것이 ‘예술’이라고 할 수 있을까? 아무리 한자와 예술수업의 경계에 있다고는 해도 예술은 나에게 너무나 고원하고 아득하고 ‘알 수 없는 것’이었다. 알수 없는 것…. 문제는 이 뿐만이 아니다. <한문이 예술>의 예술은 우리가 이미 알고 있는 ‘예술’의 의미만 있는 것이 아니기 때문이다. 과연 <한문이 예술>의 ‘예술’은 정체가 무엇일까?       2. 藝, 심고 기르고 생산해내는 능력     예술의 예藝는 재주 예埶에서 만들어진 문자로 埶의 초기 갑골문 형태를 보면 무언가를 쥐고 있는 사람의 모습을 하고 있다. 藝에 풀艹이 있고 갑골문에는 나무의 형상이 있는 걸로 보아 이 사람의 손에 있는 것이 식물이라는 것을 알 수 있다. 문자를 보자마자 나는 중국에서 유래된 분재가 떠올랐다. 분재는 작은 크기로 키워낸 나무를 의미하는데 뿌리의 영양을 제한시켜 일반적인 성장을 하지 못하게 해서 만들어 낸다. 원래는 절벽처럼 흙이 얼마 없는 곳에서 영양분이 없어 조그맣게 자란 나무를 화분으로 옮겨와...
    예술적(?) 동양고전 동은       1. 예술, 정체를 밝혀라!     아이들이 가끔 수업에 들어오며 질문을 한다. “선생님! 오늘은 뭐 만들어요?” <한문이 예술> 수업은 한문을 가르치지만 어떤 작품이나 발표 형식으로 결과물을 내기 때문에 아이들이 뭔가를 만드는 것이 익숙해진 것이다. 그래서인지 가끔 내가 미술 선생님으로 여겨지기도 하는데, 아무래도 ‘예술’이라는 이름으로 수업을 하다보니 그런 것 같기도 하다. 그런데 그럴 때마다 내 마음은 어딘가 콕콕 찔리는 느낌이다. 내가 하고 있는 것이 ‘예술’이라고 할 수 있을까? 아무리 한자와 예술수업의 경계에 있다고는 해도 예술은 나에게 너무나 고원하고 아득하고 ‘알 수 없는 것’이었다. 알수 없는 것…. 문제는 이 뿐만이 아니다. <한문이 예술>의 예술은 우리가 이미 알고 있는 ‘예술’의 의미만 있는 것이 아니기 때문이다. 과연 <한문이 예술>의 ‘예술’은 정체가 무엇일까?       2. 藝, 심고 기르고 생산해내는 능력     예술의 예藝는 재주 예埶에서 만들어진 문자로 埶의 초기 갑골문 형태를 보면 무언가를 쥐고 있는 사람의 모습을 하고 있다. 藝에 풀艹이 있고 갑골문에는 나무의 형상이 있는 걸로 보아 이 사람의 손에 있는 것이 식물이라는 것을 알 수 있다. 문자를 보자마자 나는 중국에서 유래된 분재가 떠올랐다. 분재는 작은 크기로 키워낸 나무를 의미하는데 뿌리의 영양을 제한시켜 일반적인 성장을 하지 못하게 해서 만들어 낸다. 원래는 절벽처럼 흙이 얼마 없는 곳에서 영양분이 없어 조그맣게 자란 나무를 화분으로 옮겨와...
동은
2023.11.30 | 조회 373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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