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읽고 쓰기 1234] 수행을 실천하는 21세기형 생태보살

도라지
2023-09-04 08:48
154

 

수행을 실천하는 21세기형 생태보살

데이비드 로이, 『과학이 우리를 구원하지 못할 때 불교가 할 수 있는 것』을 읽고

 

 

한 때 인류가 멸종이 된다고 해도 그게 무슨 문제일까? 라는 생각을 한 적이 있었다. 지구에서 인간 종이 사라져도 지구는 태양 주위를 돌며 ‘스스로 그러하게’ 존재할 테니 말이다. 인간 종이 지구에 행해왔던 일들을 생각하면 인류가 생태적 재난으로 생존을 위협받는 것은 업보일 뿐. 하지만 인간이 지구의 다른 생명들과 분리되지 않았음을 알고 느끼게 된 후로 자주 마음이 아프다. 영화 ‘수라’에서 봤던 아기 쇠제비갈매기의 안부가 궁금한 이유다. 정확히 언제부터인지 잘 모르겠지만 불교 공부 이후부터였던 것은 확실하다.

 

 

영화 '수라'에서 어미 쇠제비갈매기와 아기 쇠제비갈매기

 

 

불교에서 ‘연기법’과 ‘공성(空)’에 대한 이해는 우리가 다른 이들이나 지구의 뭇 생명들과 분리되지 않았다는 깨달음을 준다. 선수행자이자 사회적 참여불교 활동가인 데이비드 로이가 우리에게 당면한 생태-사회적 위기에 ‘에코다르마’를 들고나온 이유도 불교적 깨달음의 생태적 시사점에서 찾을 수 있다.  ‘에코다르마’는 불교 전통이 최근 전개하는 새로운 용어로, 생태적인 관심(eco)에 불교의 가르침과 그에 연관된 영적 전통(dharma)을 결합한 것이다. ‘생태 불교’라고도 할 수 있는 ‘에코다르마’에서는 궁극의 깨달음을 ‘사회적 실천’이라고 본다. 그리고 이를 실천하는 이들이 ‘생태 보살’이다.

 

 

불교의 위기인가? 아니면 불교의 기회인가?

 

환경 위기가 최근에 생겨난 것은 아니다. 하지만 (저자의 말에 의하면) 불교 수행자들과 불교단체들은 2010년 후반까지 (적어도 미국에서는) 생태위기에 대한 관심이 별로 없었다고 한다. 2009년 『기후위기에 대한 불교적 응답(A Buddhist Reponse to the Clomate Emergency)』이라는 책을 저자가 공동 편집했는데 무려 달라이 라마, 틱낫한, 비구 보디, 조애너 메이시, 조셉 골드스타인 등이 기고한 좋은 글들이 실렸음에도 이 책은 불교계로부터 놀라울 정도로 관심을 끌지 못했으며, 최근 몇 년 ‘에코다르마’에 대한 관심의 증가에도 불구하고 사회적 참여를 중심으로 하는 불교 강연은 참가자 수가 너무 적어 취소된 경우도 많았다고 한다.

 

 

한편 저자는 일부 다른 불교기관들은 재정적으로 번창하고 있다는 점을 이야기하는데, 이들은 주로 개인들이 쉬면서 수행할 수 있는 인기 높은 명상센터들이다. 물론 저자가 이러한 예를 사회적 참여불교의 실패로 보고 있지는 않다. 이것은 현재 미국 불교의 양상일 뿐, 오히려 저자가 주목하는 점은 교도소 활동, 호스피스 케어, 노숙자 식당 운영 등, 불교인들의 사회적 봉사다. 우리는 고통받는 노숙자를 만났을 때 자비롭게 대응하지만 이 많은 노숙자를 양산하는 사회시스템에 대해서도 너무 자비롭다는 것이다.  

 

 

기후 위기에 대응할 개인적 행동은 많다. 하이브리드나 전기 자동차를 구입한다든지 태양광 패널을 설치하거나 채식을 하는 등 개인의 생활방식을 바꾸는 것 말이다. 이러한 ‘녹색소비’도 물론 중요하다. 그러나 개인의 변화 그 자체만으로는 충분할 수 없다. 저자는 이제 이렇게 노력하는 개인들이 개인적 실천 후 사회 시스템을 바꾸기 위해 총력을 기울이도록 하는 방법에 대한 고민을 우리가 함께 해야 할 때라고 말한다.

 

 

2500년의 불교 역사는 다양한 문화적 형태를 취하면서 아시아 대부분의 지역으로 전파됐다. 그 과정에서 역사적 지리적으로 진화한 불교의 다양성을 고려하면 각각 강조하는 가르침과 수행 전통이 다름은 피해 갈 수 없다. 저자는 그 과정에서 생겨난 다양한 견해들 가운데 서로 가장 당연시하는 것들에 대해 우리가 물을 때, 불교적 전통에서 생태위기를 극복할 최상의 방법을 찾을 수 있다고 보고 있다.

 

 

전통적인 아시아 불교, 특히 테라바다(상좌부)의 가르침과 수행의 목적은 고통스러운 윤회를 벗어나는 것. 이와는 대조적으로 현대 불교, 특히 불교 심리치료와 대다수의 마음챙김(mindfulness) 운동에서는 자신의 마음을 변화시킴으로써 이 세계와 조화롭게 되는 것을 강조한다. 개인의 마음이 문제이지 세계가 문제가 아니라는 것이다. 이생을 벗어나는 데 목표를 둔 내세적 불교와 우리를 이 세계에 적응하여 더 잘 살도록 돕는 현대 불교는 정반대의 것처럼 보인다. 하지만 둘 다 현세의 문제에 관해 무관심하기 때문에 현세를 더 나은 곳으로 만드는 데 큰 관심을 두지 않는다는 점에서는 비슷하다. 하지만 저자는 여기에서 생태위기에 대한 불교의 ‘해결책’을 찾는다. 내면(명상)과 외형(행동주의)의 두 가지 수행이 조화롭게 일어나게 하는 방법을 두 불교의 전통에서 찾으면 된다는 것이다.

 

 

명상은 자아의식을 해체하여 자아를 구성하는 생각, 느낌, 행위 등 습관적인 패턴에 변화를 주고 일상을 재구성하도록 돕는다. 이것은 타인과 관계 맺는 것뿐만 아니라 세계를 인식하는 태도에 영향을 줄 수 있다. 또한 테라바다 전통에서는 최종적으로 육체가 소멸할 때의 ‘반열반’보다 붓다가 보리수 아래서 성취한 ‘열반’의 토대가 되는 ‘연기법’을 가져올 수 있다. 우주의 모든 것들이 상호 의존하며 존재한다는 ‘연기법’에 대한 이해는 우리가 지구의 다른 생명들과 분리되지 않았음을 알아차리게 하여 지구와 관계 맺는 행동 방식에 전환점이 될 수 있다.

 

 

그런데 저자의 고민은 초기불교의 가르침과 수행 전통, 그리고 대승의 ‘보살(보디사트바)’이라는 말로 불교 역사에서 이미 구현된 것이 아닐까? ‘보살’이란 ‘보리(보디)’와 ‘살타(사트바)’의 합성어. 이때 ‘보리’란 연기적 존재(空)를 이해하는 관점 곧 깨달음이고, ‘살타’는 중생을 뜻한다. ‘보살’이란 구체적인 시간과 장소에서 어떤 상황을 만나더라도 ‘보리’ 즉 깨달음에 근거한 행동양식을 실천하는 이들이라 할 수 있다. 물론 사회적 참여불교 활동가인 저자도 이를 모르지는 않았을 것이다. 짐작하건대 (자세히는 모르겠지만) 미국 불교의 개인주의적인 성향을 해결하고 현시점에서 참여불교가 가져야 할 생태위기의 중요성을 알리기 위해, 그들에게 친숙한 명상수행과 테라바다 전통에서, ‘에코다르마’와 ‘생태 보살’의 개념을 설명하려고 시도한 것 같다. 저자는 보살의 길에 대한 현대적인 재검토를 요구하며 사회제도나 구조로 인해 쌓여버린 집단적 고통에 적합한 21세기형 보살을 질문한 것이다.

 

 

저자는 불교의 가르침은 이제 새로운 보살도로 확장되어 사회적으로 참여적인 독특한 특징을 갖게 될 것이라고 이야기한다. 연기법의 상호의존성과 비폭력을 강조하는 불교는 분노가 아닌 사랑과 자비에 의한 정치를 의미하기에, 불교적 관점에서 보면 사회의 기본적인 문제는 부유하고 힘있는 ‘나쁜’ 사람들이 아니라 변화되어야 할 집단적인 탐욕과 분노와 무지로 제도화된 구조이다. 불교의 가르침은 지금껏 많은 진보적 운동을 약화시킨 이념적 다툼을 극복하는 데 도움이 될 수 있을 것이며 역사적 맥락에 따라 방편을 만들어온 대승의 지혜는 지속가능한 사회운동에 필요한 창의적 상상력의 필요성을 추동할 수 있다. 

 

 

 

 

 

생태보살의 길

 

사회참여의 시대적 중요성을 인정하는 것은 보통 자기 마음의 평화에 집중하라는 가르침을 받은 불교인들에게는 큰 진전일 것이다. 한편 사회적 문제 해결을 위해 헌신한 사람들은 그 결과에 따른 좌절, 분노, 우울, 피로감 등에 시달리는 경향이 있어 왔다. 여기에 참여적 보살, 생태보살의 길은 서로에게 필요한 것을 제공한다. 명상은 평정심을 지탱하는 내적 통찰을 길러주기 때문에 목표지향적인 사회적 활동가들이 자신의 심리상황에 빠지지 않고 깨달음의 방향으로 나가도록 도와줄 것이다. 이제 세상의 문제에 관한 참여는 개인의 영적 수행을 방해하는 것이 아니라 우리 자신의 변화에서 핵심으로 이해될 수 있다. 통찰력과 평정심을 기르는 것으로 행동의 결과에 집착하지 않고 행동하는 보살의 길을 갈수 있게 된다.

 

 

대승의 보살은 네 가지 큰 서원을 한다. 사홍서원이라고 하는데 그중에는 “중생의 수가 셀 수 없이 많더라도 나는 그들을 모두 해탈시키기를 서원합니다.” 라는 내용을 담은 ‘중생무변서원도(衆生無邊誓願度)’가 있다.  서원에 필요한 실천과 성취가 실제 가능한지를 생각하기도 전에 서원의 스케일에 먼저 압도당한다. 대체 이러한 서원의 성취가 가능하다는 말인가? 그렇지 않다면 이것은 성취하기 불가능한 것을 맹세하는 것이다. 하지만 서원이 실현될 수 없다는 것. 이것은 문제가 아니라 핵심이기도 하다.

 

 

어떠한 보살도 자신의 서원을 완벽하게 수행할 수 없다. 그래도 괜찮다. 그의 임무는 완벽해지는 것이 아니라 가능한 최선을 다하는 것. 성취될 수 없기에 서원이 진정으로 요구하는 것은 삶의 방향을 새롭게 조정하는 것이다. 자아에 집착하던 일상이 모든 존재의 행복을 위한 관심으로 향하게 된다. 하지만 결과에 집착하지 않고 행동하는 것은 어려운 일. 그래서 더욱 명상을 통해 영적인 바탕으로 수행하는 보살이 요구된다.

 

 

깨달음으로 인한 사회적 참여와 명상 수행을 통한 영적인 변모, 이 두 가지 수행을 조화롭게 실천하는 것이 저자가 말하는 ‘에코다르마’이며 그들이 ‘생태 보살’이다. 현세에 대한 관심과 함께 생태적 사회적으로 참여하는 방식을 고민하고, 제도적인 구조의 문제까지 해결하려 노력하는 생태 보살! 크게 새롭게 느껴지는 보살의 정의는 아니었지만 정확히 지금 당면한 사회적 문제들을 해결하는 데 필요한 영적 패러다임이라는 것은 부정할 수 없겠다.

 

 

‘에코다르마’나 ‘생태 보살’이 어떤 특별한 개념에 한정되는 말은 아닌 것 같다. 또한 반드시 불교적 언어만으로 표현될 필요도 없을 것 같다. 도래한 생태-사회적 위기에 예견된 미래를 모르지 않지만 그럼에도 최선을 다하는 행동이 ‘에코다르마’이며 그들이 ‘생태 보살’이 아닐까.  최근에 나는 그들을 전장연에서 보았고, 영화 ‘수라’에서 보았다. 그리고 종종 문탁 안에서도 본다.

 

 

문득 친구들과 함께 책만 읽을 것이 아니라 명상을 하는 기회도 종종 생겼으면 좋겠다는 생각을 한다. 언젠가 어느 길 위에서 함께 손잡을 친구들이 많아질 것만 같다.

댓글 2
  • 2023-09-04 17:51

    결과에 집착하지 않고 내가 하고 싶은 일 하기, 우리 모두 연결되어 있음을 알고 지구를 위한 일을 하기, 결국 지구를 위한 일도 꼭 잘 되어야 한다는 집착없이 할 수 있는 만큼 기쁘게 하기~ 왠지 마음 가볍게 만드는 도라지님의 보살글이네요.

  • 2023-09-29 11:50

    뒤늦게 잘 읽고 갑니다.
    불알못이라 다 알아듣기는 어렵지만, 무슨 메세지를 전하는지는 이해했어요.

세미나 에세이 아카이브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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봄날
2023.09.05 | 조회 173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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여울아
2023.09.04 | 조회 160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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도라지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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세미나 에세이 아카이브
  우리의 풍경에서 새들이 사라진다면? 제니퍼 애커먼 『새들의 천재성』     까마귀와 물병   목마른 까마귀 두 마리가 물이 든 병을 발견했다. 부리가 물에 닿지 않았다. 한 마리는 포기하고 날아갔지만 다른 한 마리는 자갈을 물어오더니 병에 넣어서 물을 마셨다. 이솝우화에 나오는 이야기다. 그런데 이 이야기는 이솝의 상상력만으로 지어낸 이야기가 아닐 수도 있다.   2009년에 오클랜드 대학에서 이런 실험을 했다. 물병에 물을 조금 넣고, 까마귀가 좋아하는 애벌레를 띄워 놓았다. 이솝우화에서처럼 부리가 닿지 않았다. 자갈 몇 개를 주자 까마귀는 그것을 넣고 물의 수위를 높여 벌레를 먹었다. 두 번째로는 톱밥이 든 병과 물이 든 병을 주었다. 까마귀는 톱밥이 든 물병이 아니라 물이 든 물병에 자갈을 넣어 벌레를 꺼내 먹었다. 세 번째로는 크기가 다른 자갈을 주었다. 까마귀는 큰 자갈만을 골라 물병에 집어넣었다. 이 실험은 까마귀가 톱밥과 물의 성질을 구별하고, 큰 돌을 넣는 것이 더 효율적이라는 물리법칙을 안다는 것을 보여준다. 와우!!   이뿐만이 아니다. 뉴칼레도니아까마귀는 도구를 만들어 쓰는 것으로 유명하다. 나뭇가지를 다듬어서 갈고리를 만들어 나무 구멍 속에 들어있는 애벌레를 꺼내 먹는다. 재미있는 것은 뉴칼레도니아의 지역에 따라 갈고리의 모양이 다르다는 것이다. 마치 인간에게 지역마다 다른 문화가 있는 것과 같다. 갈고리 모양은 유전자에 각인된 본능이 아니라 세대 간 전승과 학습의 결과다.   캘리포니아 덤불어치는 견과류, 씨앗, 과일, 곤충, 애벌레 등 다양한 먹이를 숨긴다. 덤불어치는 언제 어디에 무엇을...
  우리의 풍경에서 새들이 사라진다면? 제니퍼 애커먼 『새들의 천재성』     까마귀와 물병   목마른 까마귀 두 마리가 물이 든 병을 발견했다. 부리가 물에 닿지 않았다. 한 마리는 포기하고 날아갔지만 다른 한 마리는 자갈을 물어오더니 병에 넣어서 물을 마셨다. 이솝우화에 나오는 이야기다. 그런데 이 이야기는 이솝의 상상력만으로 지어낸 이야기가 아닐 수도 있다.   2009년에 오클랜드 대학에서 이런 실험을 했다. 물병에 물을 조금 넣고, 까마귀가 좋아하는 애벌레를 띄워 놓았다. 이솝우화에서처럼 부리가 닿지 않았다. 자갈 몇 개를 주자 까마귀는 그것을 넣고 물의 수위를 높여 벌레를 먹었다. 두 번째로는 톱밥이 든 병과 물이 든 병을 주었다. 까마귀는 톱밥이 든 물병이 아니라 물이 든 물병에 자갈을 넣어 벌레를 꺼내 먹었다. 세 번째로는 크기가 다른 자갈을 주었다. 까마귀는 큰 자갈만을 골라 물병에 집어넣었다. 이 실험은 까마귀가 톱밥과 물의 성질을 구별하고, 큰 돌을 넣는 것이 더 효율적이라는 물리법칙을 안다는 것을 보여준다. 와우!!   이뿐만이 아니다. 뉴칼레도니아까마귀는 도구를 만들어 쓰는 것으로 유명하다. 나뭇가지를 다듬어서 갈고리를 만들어 나무 구멍 속에 들어있는 애벌레를 꺼내 먹는다. 재미있는 것은 뉴칼레도니아의 지역에 따라 갈고리의 모양이 다르다는 것이다. 마치 인간에게 지역마다 다른 문화가 있는 것과 같다. 갈고리 모양은 유전자에 각인된 본능이 아니라 세대 간 전승과 학습의 결과다.   캘리포니아 덤불어치는 견과류, 씨앗, 과일, 곤충, 애벌레 등 다양한 먹이를 숨긴다. 덤불어치는 언제 어디에 무엇을...
요요
2023.08.29 | 조회 212
세미나 에세이 아카이브
“Probably Approximately Correct - 기계학습을 다시 묻다” Leslie Valiant 2013 作, 이광근 2021 譯   도대체 컴퓨터는 어떻게 작동하나?      컴퓨터 프로그램을 짤 때 제일 난감한 경우가 내가 짠 프로그램이 ‘Looping 도는 경우이다(끝나지 않음)’. 운영자에게 killed된 프로그램을 들여다 보면, 논리적으로 이상이 없는데(반드시 이상이 있다!), 루핑이라는 것이다. 루핑됨을 미리 알 수 있으면 좋으련만 그럴 수 없다. 도대체 컴퓨터가 어떻게 작동되길래 그러는지 알고 싶어지는 순간이다.    S/W는 언어와 논리로 만들어 진다. 결과물을 내고 싶은 것을 언어로 표현하고, 그것을 논리적으로 프로그래밍하는 것이다. 개와 고양이를 구분하라는 문제를 생각해 보자. 먼저 언어(문장)로써 그것들을 구분하는 특징들을 적는다. 그런 뒤에 그 특징들을 입력값으로 하여 논리적인 추론을 만들어 프로그래밍한다. 그런데, 그 구분을 문장으로 만드는 것이 의외로 쉽지 않다. 소위 특징 설계(Feature Design)문제이다. 2000년대에도 해결되지 않았다. 그런데, 2014년 구글은 6.65%의 에러율로 고양이를 식별하였고(인간은 5.51% 에러), 2019년 MS사는 152개 층 구조로 천만건의 유투브를 학습시킨 결과 에러율을 3.56% 로 낮추었다. 그들은 기계학습(machine learning) 방법을 적용하였다고 말한다. 기계·학습? 먼저 기계적이란 어떤 것인가?   계산 가능함: 기계적 계산이란 무엇인가?     생명체들은 어떻게 정보를 처리하고 행동을 결정하는 걸까? 튜링이 1936년에 논문(*)을 내기 전까지는 인류는 이 문제에 대해서 정의조차 하지 못하였다. 1928년 수학자인 David Hilbert는 수학명제를 입력으로 받아서 참과 거짓을 기계적으로 판단하는 소위, ‘수리명제 자동생성 문제’를 낸다. 튜링은 그것은 ‘불가능하다’라는 결론을 손쉬운 구체적인...
“Probably Approximately Correct - 기계학습을 다시 묻다” Leslie Valiant 2013 作, 이광근 2021 譯   도대체 컴퓨터는 어떻게 작동하나?      컴퓨터 프로그램을 짤 때 제일 난감한 경우가 내가 짠 프로그램이 ‘Looping 도는 경우이다(끝나지 않음)’. 운영자에게 killed된 프로그램을 들여다 보면, 논리적으로 이상이 없는데(반드시 이상이 있다!), 루핑이라는 것이다. 루핑됨을 미리 알 수 있으면 좋으련만 그럴 수 없다. 도대체 컴퓨터가 어떻게 작동되길래 그러는지 알고 싶어지는 순간이다.    S/W는 언어와 논리로 만들어 진다. 결과물을 내고 싶은 것을 언어로 표현하고, 그것을 논리적으로 프로그래밍하는 것이다. 개와 고양이를 구분하라는 문제를 생각해 보자. 먼저 언어(문장)로써 그것들을 구분하는 특징들을 적는다. 그런 뒤에 그 특징들을 입력값으로 하여 논리적인 추론을 만들어 프로그래밍한다. 그런데, 그 구분을 문장으로 만드는 것이 의외로 쉽지 않다. 소위 특징 설계(Feature Design)문제이다. 2000년대에도 해결되지 않았다. 그런데, 2014년 구글은 6.65%의 에러율로 고양이를 식별하였고(인간은 5.51% 에러), 2019년 MS사는 152개 층 구조로 천만건의 유투브를 학습시킨 결과 에러율을 3.56% 로 낮추었다. 그들은 기계학습(machine learning) 방법을 적용하였다고 말한다. 기계·학습? 먼저 기계적이란 어떤 것인가?   계산 가능함: 기계적 계산이란 무엇인가?     생명체들은 어떻게 정보를 처리하고 행동을 결정하는 걸까? 튜링이 1936년에 논문(*)을 내기 전까지는 인류는 이 문제에 대해서 정의조차 하지 못하였다. 1928년 수학자인 David Hilbert는 수학명제를 입력으로 받아서 참과 거짓을 기계적으로 판단하는 소위, ‘수리명제 자동생성 문제’를 낸다. 튜링은 그것은 ‘불가능하다’라는 결론을 손쉬운 구체적인...
가마솥
2023.08.29 | 조회 134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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