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2회> 우여곡절 무릎소동

기린
2023-02-05 09:37
438

 

 

 

기린

고전 분야에서 덕업일치를 이루지 못하고 고민하던 차,

양생을 위한 담론을 생산하고 생업도 마련하는 기회를 잡아 소속을 인문약방 팀으로 옮겨 일리치 약국 정규직이 되었다.

 양생과 관련한 공부에 박차를 가하며 또 한 번의 덕업일치에 도전중이다.

 

 

 

우여곡절 무릎소동

 

 

무릎이 부어도

 

 언제부턴가 한약 포장 기계 앞에 쪼그리고 앉아 말끔하게 포장되어 나오는 쌍화탕을 한 팩씩 정렬하는 일을 즐겼다. 푸짐한 뱃살 때문에 쪼그리고 앉는 자세 자체가 불가능했던 시절을 지나, 어쨌든 앉아지는 가능성이 좋았기 때문이다. 그렇다고 그 뱃살들이 다 사라진 것은 물론 아니고 아주 약간 얇아졌을 뿐이지만. 그런데 언제부턴가 오른쪽 무릎이 좀 더 삐걱댄 달까 했던 것도 같다. 그러다 어느 아침, 샤워를 하다가 왼쪽 무릎과 비교해서 현저히 부어있는 오른쪽 무릎을 발견했다. 당장 검색부터 했다. 무릎에 물이 찼다는 신호란다. 무릎의 염증이라는 진단과 물이 찼다는 표현 차이가 이해가 잘 안 되어 몇 번을 읽었다. 병원을 가야했다.

 

 

 출근해서 오전 일과를 마무리 짓고 나니 12시쯤 되었다. 잠깐 나갔다 오겠다는 말만 남기고 슬그머니 약국을 나섰다. 침을 잘 놓는다는 말을 들은 적은 있는 동네 한의원에 갔다. 정형외과를 가면 시간이 더 많이 걸릴 것 같고 침이 더 빨리 붓기를 뺄 수 있을 것도 같았다. 한의사는 무릎 상태를 진단한 후 검색으로 읽었던 내용을 좀 더 자세히 친절하게 설명해 주었다. 퇴행성이냐고 물었더니 진단으로 봐서는 그것보다는 앉는 자세나 무릎에 무리가 가는 활동의 영향이라고 했다. 걷는 것도 포함된다고 했다. 나는 한의사에게 1월 1일에 좀 많이 걸을 계획이 있는데, 압박붕대 같은 걸 하고 걸으면 어떠냐고 물었다. 부은 것 빼고는 별다른 통증이 없기도 했다. 한의사는 굳이 하겠다면 압박 테이프도 도움이 될 거라며, 테이프로 부은 무릎을 지지해주는 처치도 함께 해 주었다. 약국으로 돌아오니 점심시간이 지나 있었다. 점심도 안 먹고 어디 갔다 왔냐는 물음에 그냥 저기로 얼버무렸다.

 

내 의지를 꺽기 싫다

 

 무릎이 부었다는 말을 꺼내는 순간, 친구들한테 걷기부터 미루라는 소리를 들을 것이 뻔했다. 일요일마다 걷겠다는 의지를 간섭받을 것이 싫었다. 아프다는 말은 삼켰고, 응급처지는 했으니 괜찮겠지 싶기도 해서 새해 첫 날 계획대로 둘레길을 걸었다. 오른쪽 무릎에 충격이 가지 않도록 신경 쓰면서 걸었더니 견딜 만 했다. 하지만 그날 밤 잠자리에서 몸을 뒤척일 때마다 무릎에 통증이 느껴졌다. 예상은 했지만 통증이 제대로 느껴지니 마음이 점점 쪼그라 들었다. 출근해서 무릎이 아파서 한의원에 간다고 했다. 갔다 오니 친구들은 언제부터냐, 일요일에 너무 많이 걸은 거 아니냐며 걱정들을 했다. 무릎 통증과 관련한 온갖 정보들 끝에 다들 당분간 걷지 마라 했다. 나는 걷기 전부터 부었다고 억울한 표정을 지었다.

 

  결국은 정형외과를 가서 엑스레이도 찍었고, 일리치 약국에서 약도 지어 먹고, 한의원에서 침도 계속 맞았다. 그 사이 인문약방 캠프로 정선의 운탄고도를 걷는 일정이 있었다. 모든 치료에도 불구하고 붓기가 완전히 가라앉지는 않았지만, 차도는 있어서 운탄고도를 걸을 마음을 먹었다. 캠프 전날 밤에 눈에 와서 걷기는 무산되었다. 이제는 날씨까지 걷겠다는 내 의지를 꺽는구나 싶었다. 그래도 설 명절을 끼고 인문약방 친구들과 제주 여행이 있으니 드디어 제주 올레길을 걸어보겠지 기대를 했다. 여행 날짜가 점점 다가오면서 일기예보를 챙겨봤는데, 여행 기간에 제주도에 폭설이 온단다. 설마 했다. 3박 4일 여행 기간 중 올레길을 걷기로 했던 이틀째 날, 새벽부터 바람에 눈발까지 날렸는데 초속 13미터의 바람이 불었다. 제주에서 뜨는 비행기 전체가 운항 취소되어 4만 여명의 인원이 공항에 발이 묶였다는 소식도 떴다. 새해부터 걷기 계획에 연달아 차질이 생기다니 어이가 없었다.

 

영등할망의 변덕스런 바람을 맞으며

 

  오전 열한시쯤 비옷까지 단단히 챙겨 입고 숙소를 나섰다. 제주 한림읍 귀덕리에 있는 숙소라서 곽지 해수욕장 해변으로 걸어가 볼 참이었다. 바람이 비옷을 사정없이 펄럭여서 걸음을 내딛자니 몸이 휘청거렸다. 차가운 눈발까지 몰아쳐서 손도 시렸다. 길옆 집들을 둘러싸고 있는 낮은 돌담의 재료가 구멍이 숭숭 뚫린 현무암인 까닭을 실감했다. 안 그러면 이 바람살을 견디기 어려울 것 같았다. 겨우 차도가 있는 데까지 나와서 건너 바닷가 쪽으로 갔다. 바람이 워낙 거세서 주변 상점들도 대부분 문을 닫았다. 골목 사이로 바다가 보였다. 가까이 걸어가 보니 안내 표지판이 보였다. 영등할망의 착한 며느리 석상이 거센 파도를 맞으며 서 있었다. 뭔가 맥락이 있는 설치물 같았는데 바람 때문에 감상할 엄두가 나지 않았다.

 

<초속 13미터의 바람이 부는 제주 한림 해안도로의 영등할망 착한며느리 석상>

 

  돌아와서 찾아보니 귀덕 1리와 한림 해안도로를 잇는 제주 올레 15B길로 현무암해변으로 걸을 수 있는 길이었다. 영등할망은 바람의 신으로 음력 2월 제주에 변덕스럽고 사나운 바람으로 땅에는 오곡의 씨를 바다에는 해초의 씨를 뿌려주면 진짜 봄이 온다고 여겼단다. 영등할망 신화와 관련된 석상들이 바닷길을 따라 세워져 있다는데, 내가 본 것이 그 중에 하나인 영등할망의 착한 며느리 석상이었다. 바람 여자 돌이 많다는 제주에 가서 제대로 바람을 맞으며 애꿎은 석상에게 하소연했다. 새해 초반부터 무릎 이상에 궂은 날씨까지 이러니 올해 걷기는 망할 조짐일까요? 흑.

 

<맑은 날의 석상 모습>

 

돌봄을 떠올리다

 

 이렇게 우여곡절을 겪는 동안 무릎의 붓기는 다 가라앉았다. 노화의 시작이다 약국 일이 무릎에 무리를 주는 거 아니냐 코로나의 후유증이다 까지 온갖 원인을 주워들었다. 노화가 시작될 나이긴 하다. 예전에는 몰랐던 통증들이 불쑥불쑥 느껴진다. 이제는 쌍화탕 포장 기계 옆에 의자가 항시 비치되어 있다. 계획한 것들이 매번 어긋나는 사태 앞에서 속이 상했다. 그러면서 오로지 내 의지로 성취했다고 여겼던 일들이, 얼마나 많은 것들에 영향을 받아 이루어졌는지 헤아려 보게 되었다. 계속 무릎의 차도를 챙기는 친구들에 둘러 싸여 있다 보니, 당분간 걷기를 자중하라는 말도 더 이상 간섭으로 들리지 않았다. 몸의 변화에 섬세해지라는 조언이었다. 나의 곤란이 친구들의 염려를 타고 다시 돌아오니 훨씬 견딜만해지는 것, 돌봄이 이런 게 아닐까 짐작해 보게 되었다. 입춘이 지났다. 무릎을 아끼느라 쉬었던 걷기에 시동을 걸어 봄을 맞으러 가고 싶다.

 

 

<여행 마지막 날 맑은 제주, 멀리 눈 덮힌 한라산까지 보인다>

댓글 9
  • 2023-02-05 12:01

    사진을 보니 영등할망한테 빌었던 소원이 생각나네! 1월 1일 빌고, 구정에 빌고, 입춘에 빌고....내내 마음을 다지며 사는구나~ 3.1일엔 꼭 같이 걸읍시다^^

  • 2023-02-05 13:02

    걷기 구비구비 배움이 서려있네요!
    포레스트 기린님~ 다시 천천히 걸어봐요~~

  • 2023-02-06 08:46

    포레스트 기린에게 생각도 못했던 우환이 닥쳤군요.
    무릎 아프다고 안 걸을 수 없고, 어깨 아프다고 팔 안 쓸 수 없지요. 살살 달래가며 살아 봐요. ㅎㅎ
    아픈 몸과 함께 살 방법을 찾는 대열에 합류한 것을 환영합니다.^^

  • 2023-02-06 10:57

    드뎌 기린샘께도, 아픈 몸을 살살 달래며 살아온 20여 년(뭐만 했다하면 20년이래;;)의 노하우를 공유할 기회가 왔네요ㅎㅎ 웰컴^^

    앞으로는 거리와 속도, 시간을 조절하며 잘 걸어봐요. 우리~

  • 2023-02-06 11:07

    골프가 원인이 아닌 '골프 엘보우'로 1년 넘게 고생중입니다.
    '딱딱딱딱'하는 초음파 치료기의 아픔을 참아가며 한 달을 병원을 들락거렸지만 안 낫더라고요.
    보다못한 간호사가 '가급적 팔을 쓰지 말고 좌우로 돌리는 간단한 스트레칭밖에 답이 없다'고 해서
    생각날 때마다 그런 운동을 한 지, 일년이 지나니 견딜만 합니다.

    이제 아무 생각없이 망치질하지는 못합니다.
    될수 있으면 안할려고 합니다. 하더라도 몇번 하고 팔을 풀어 주고......
    나의 왼팔이 점점 변해 닭이 된다면 새벽을 알리겠다는 '자여'의 수준은 못되니,
    어쩝니까? 살살 달래며 대불고 살아 야지. ㅎㅎㅎ

  • 2023-02-06 12:32

    쉬엄 쉬엄 걸어요~

  • 2023-02-06 19:59

    헐 몸 안팍으로 물난리가…..ㅠ 느린 걸음의 기린샘 응원합니다!

  • 2023-02-07 07:58

    지난달 함백산장갔을때 무릎이 부으셨다길레 기린샘도 임자, 계축월을 힘들게 보내셨겠구나 했거든요. 저도 그 무렵 자꾸 비위쪽에 물기가 가득찼는지 소화도 잘 안되고 몸도 무겁고했거든요. 물론 나이들어감에 원인도 있겠지만 그런 연유였을수도~^^
    저도 그때 이후로 밥먹고 걷기, 과자안먹기 등등을 하고있어요. 살살 달래봐요, 우리~!!

  • 2023-03-01 09:05

    예상치 못한 부상에도 깨달음과 받아들임이 있어 인상깊게 읽었습니다. 지금은 좀 어떠신지도 궁금하네요.

기린의 걷다보면
      기린 고전 분야에서 덕업일치를 이루지 못하고 고민하던 차, 양생을 위한 담론을 생산하고 생업도 마련하는 기회를 잡아 소속을 인문약방 팀으로 옮겨 일리치 약국 정규직이 되었다.  양생과 관련한 공부에 박차를 가하며 또 한 번의 덕업일치에 도전중이다.       우여곡절 무릎소동     무릎이 부어도    언제부턴가 한약 포장 기계 앞에 쪼그리고 앉아 말끔하게 포장되어 나오는 쌍화탕을 한 팩씩 정렬하는 일을 즐겼다. 푸짐한 뱃살 때문에 쪼그리고 앉는 자세 자체가 불가능했던 시절을 지나, 어쨌든 앉아지는 가능성이 좋았기 때문이다. 그렇다고 그 뱃살들이 다 사라진 것은 물론 아니고 아주 약간 얇아졌을 뿐이지만. 그런데 언제부턴가 오른쪽 무릎이 좀 더 삐걱댄 달까 했던 것도 같다. 그러다 어느 아침, 샤워를 하다가 왼쪽 무릎과 비교해서 현저히 부어있는 오른쪽 무릎을 발견했다. 당장 검색부터 했다. 무릎에 물이 찼다는 신호란다. 무릎의 염증이라는 진단과 물이 찼다는 표현 차이가 이해가 잘 안 되어 몇 번을 읽었다. 병원을 가야했다.      출근해서 오전 일과를 마무리 짓고 나니 12시쯤 되었다. 잠깐 나갔다 오겠다는 말만 남기고 슬그머니 약국을 나섰다. 침을 잘 놓는다는 말을 들은 적은 있는 동네 한의원에 갔다. 정형외과를 가면 시간이 더 많이 걸릴 것 같고 침이 더 빨리 붓기를 뺄 수 있을 것도 같았다. 한의사는 무릎 상태를 진단한 후 검색으로 읽었던 내용을 좀 더 자세히 친절하게 설명해 주었다. 퇴행성이냐고 물었더니 진단으로 봐서는...
      기린 고전 분야에서 덕업일치를 이루지 못하고 고민하던 차, 양생을 위한 담론을 생산하고 생업도 마련하는 기회를 잡아 소속을 인문약방 팀으로 옮겨 일리치 약국 정규직이 되었다.  양생과 관련한 공부에 박차를 가하며 또 한 번의 덕업일치에 도전중이다.       우여곡절 무릎소동     무릎이 부어도    언제부턴가 한약 포장 기계 앞에 쪼그리고 앉아 말끔하게 포장되어 나오는 쌍화탕을 한 팩씩 정렬하는 일을 즐겼다. 푸짐한 뱃살 때문에 쪼그리고 앉는 자세 자체가 불가능했던 시절을 지나, 어쨌든 앉아지는 가능성이 좋았기 때문이다. 그렇다고 그 뱃살들이 다 사라진 것은 물론 아니고 아주 약간 얇아졌을 뿐이지만. 그런데 언제부턴가 오른쪽 무릎이 좀 더 삐걱댄 달까 했던 것도 같다. 그러다 어느 아침, 샤워를 하다가 왼쪽 무릎과 비교해서 현저히 부어있는 오른쪽 무릎을 발견했다. 당장 검색부터 했다. 무릎에 물이 찼다는 신호란다. 무릎의 염증이라는 진단과 물이 찼다는 표현 차이가 이해가 잘 안 되어 몇 번을 읽었다. 병원을 가야했다.      출근해서 오전 일과를 마무리 짓고 나니 12시쯤 되었다. 잠깐 나갔다 오겠다는 말만 남기고 슬그머니 약국을 나섰다. 침을 잘 놓는다는 말을 들은 적은 있는 동네 한의원에 갔다. 정형외과를 가면 시간이 더 많이 걸릴 것 같고 침이 더 빨리 붓기를 뺄 수 있을 것도 같았다. 한의사는 무릎 상태를 진단한 후 검색으로 읽었던 내용을 좀 더 자세히 친절하게 설명해 주었다. 퇴행성이냐고 물었더니 진단으로 봐서는...
기린
2023.02.05 | 조회 438
기린의 걷다보면
  해가 바뀌었다. 작년에는 일요일에 세미나를 하느라 둘레길 걷기를 거의 못했다. 약국 휴무인 월요일에 걸으면 되지 않냐 묻는 친구가 있었다. 경험에 비추어보면 대부분의 둘레길은 북적이는 등산로 등과 연결된 지점을 지나면 일요일에도 한산한 편이다. 월요일이면 드물 것이다. 그래서 혼자 둘레길을 걷는다면 휴일이 그나마 안전할 것이라 생각했다. 둘레길 안전 수칙에도 나와 있다. 가급적 2인 이상 동행하시오. 나는 가급적, 일요일에 걷기로 나만의 수칙을 정했다. 1월 1일은 마침 일요일이었고, 며칠 전부터 다시 둘레길을 걸을 수 있도록 몸 상태를 보살폈다.        공동체에 온 후 걸어서 출근하게 되면서 탄천을 내내 걸었다. 그러다 휴일이면 집 주변에 연결된 탄천을 걷다가 ‘영남길’이라는 표지판을 보게 되었다. 검색을 해보니, 조선 시대 한양에서 시작해서 전국으로 총 6개의 간선 도로망이 갖추어져 있었다고 한다. 그 길을 다시 복원해 ‘경기 옛길’이라 지정했고, 영남길은 한양에서 용인을 거쳐 부산까지 이어진 영남대로의 일부를 복원했다고 한다. 조선시대에도 나있던 길이라고? 십 세기 후반에서 이십 세기 초반이 단번에 연결되었다. 계절의 변화 정도밖에 보이지 않던 탄천 길에 낯선 이가 걷고 있었다. 괴나리봇짐에 패랭이를 쓴 모습이었다. 저 이는 어디를 향해 무슨 일을 보러 갈까, 나는 하릴없이 휴일을 어슬렁대는 중인데. 물론 상상이다. 하지만 그런 상상은 시간을 거스르고 공간을 전환시키면서 나와 세계를 연결시켰다. 더 찾아보니 경기도에만도 옛길을 넘어 둘레길로 숲을, 갯가를, 물길을 연결시켜 조성되어 있었다. 그 길들에는 또 어떤 상상이 잠재해 있을까. 내...
  해가 바뀌었다. 작년에는 일요일에 세미나를 하느라 둘레길 걷기를 거의 못했다. 약국 휴무인 월요일에 걸으면 되지 않냐 묻는 친구가 있었다. 경험에 비추어보면 대부분의 둘레길은 북적이는 등산로 등과 연결된 지점을 지나면 일요일에도 한산한 편이다. 월요일이면 드물 것이다. 그래서 혼자 둘레길을 걷는다면 휴일이 그나마 안전할 것이라 생각했다. 둘레길 안전 수칙에도 나와 있다. 가급적 2인 이상 동행하시오. 나는 가급적, 일요일에 걷기로 나만의 수칙을 정했다. 1월 1일은 마침 일요일이었고, 며칠 전부터 다시 둘레길을 걸을 수 있도록 몸 상태를 보살폈다.        공동체에 온 후 걸어서 출근하게 되면서 탄천을 내내 걸었다. 그러다 휴일이면 집 주변에 연결된 탄천을 걷다가 ‘영남길’이라는 표지판을 보게 되었다. 검색을 해보니, 조선 시대 한양에서 시작해서 전국으로 총 6개의 간선 도로망이 갖추어져 있었다고 한다. 그 길을 다시 복원해 ‘경기 옛길’이라 지정했고, 영남길은 한양에서 용인을 거쳐 부산까지 이어진 영남대로의 일부를 복원했다고 한다. 조선시대에도 나있던 길이라고? 십 세기 후반에서 이십 세기 초반이 단번에 연결되었다. 계절의 변화 정도밖에 보이지 않던 탄천 길에 낯선 이가 걷고 있었다. 괴나리봇짐에 패랭이를 쓴 모습이었다. 저 이는 어디를 향해 무슨 일을 보러 갈까, 나는 하릴없이 휴일을 어슬렁대는 중인데. 물론 상상이다. 하지만 그런 상상은 시간을 거스르고 공간을 전환시키면서 나와 세계를 연결시켰다. 더 찾아보니 경기도에만도 옛길을 넘어 둘레길로 숲을, 갯가를, 물길을 연결시켜 조성되어 있었다. 그 길들에는 또 어떤 상상이 잠재해 있을까. 내...
기린
2023.01.05 | 조회 534
기린의 걷다보면
    올해 초 인문약방 활동의 확장으로 일리치 약국을 열었다. 상담을 주로 하는 약국에서 한약처방전일 경우 계량하고 달이고 포장하는 일 등을 내가 맡기로 했다. 약국 영업시간인 화요일부터 금요일까지는 매일 오전 열 시부터 저녁 일곱 시까지 근무시간도 정해졌다. 이십 대 초반에 정규직으로 일했던 이십 개월 이후 삼십 여년 만에 다시 사대보험이 되는 정규직에 취업을 한 셈이다. 약국을 개업하기 이전에도 대부분 열시 전에 공동체 안에 있는 공부방으로 출근했다. 밥벌이는 물론 공동체에서 벌이는 다종다양한 일에 연루되어 정신없이 보내다 보면 하루가 금방 지나갔다. 그러다보니 시간은 모자라고 세미나 준비는 미흡해서 전전긍긍하기 일쑤였다.     약국으로 출근하게 되면서 아홉 시간의 근무시간이 정해졌다. 약국의 일상과 인문약방의 활동, 세미나 공부 등으로 활용해야 했다. 출근해서 닥치는 일부터 해내다보면 책 한번 펼쳐보지 못하고 퇴근시간을 맞았다. 게다가 약국이 있는 파지사유는 에코와 관련 활동이 펼쳐지고 용기내 가게가 열려 있고 약국에 용무가 있는 사람들이 수시로 드나드는 공간이었다. 여기서 공부방에서처럼 책을 읽는 일은 그야말로 미션임파서블이었다. 공간을 함께 쓰는 친구들과 공부 좀 하자, 공부만 하는 공간이 아니다 등등 언쟁까지 붙으니 피곤이 점점 가중되었다. 환경이 바뀌었는데도 몸은 여전히 예전 공부방의 환경을 원했다. 더구나 그 시절에도 시간이 부족하다고 여겼는데, 지금도 마찬가지라고 생각하니 왜 이러고 사는지 나 자신한테 불쑥불쑥 짜증이 치솟기도 했다. 그렇게 정념에 휩싸이면 일상에서의 집중력은 더 떨어졌다.     예전이라면 해야 할 일을 끝내면 공부방에 자리...
    올해 초 인문약방 활동의 확장으로 일리치 약국을 열었다. 상담을 주로 하는 약국에서 한약처방전일 경우 계량하고 달이고 포장하는 일 등을 내가 맡기로 했다. 약국 영업시간인 화요일부터 금요일까지는 매일 오전 열 시부터 저녁 일곱 시까지 근무시간도 정해졌다. 이십 대 초반에 정규직으로 일했던 이십 개월 이후 삼십 여년 만에 다시 사대보험이 되는 정규직에 취업을 한 셈이다. 약국을 개업하기 이전에도 대부분 열시 전에 공동체 안에 있는 공부방으로 출근했다. 밥벌이는 물론 공동체에서 벌이는 다종다양한 일에 연루되어 정신없이 보내다 보면 하루가 금방 지나갔다. 그러다보니 시간은 모자라고 세미나 준비는 미흡해서 전전긍긍하기 일쑤였다.     약국으로 출근하게 되면서 아홉 시간의 근무시간이 정해졌다. 약국의 일상과 인문약방의 활동, 세미나 공부 등으로 활용해야 했다. 출근해서 닥치는 일부터 해내다보면 책 한번 펼쳐보지 못하고 퇴근시간을 맞았다. 게다가 약국이 있는 파지사유는 에코와 관련 활동이 펼쳐지고 용기내 가게가 열려 있고 약국에 용무가 있는 사람들이 수시로 드나드는 공간이었다. 여기서 공부방에서처럼 책을 읽는 일은 그야말로 미션임파서블이었다. 공간을 함께 쓰는 친구들과 공부 좀 하자, 공부만 하는 공간이 아니다 등등 언쟁까지 붙으니 피곤이 점점 가중되었다. 환경이 바뀌었는데도 몸은 여전히 예전 공부방의 환경을 원했다. 더구나 그 시절에도 시간이 부족하다고 여겼는데, 지금도 마찬가지라고 생각하니 왜 이러고 사는지 나 자신한테 불쑥불쑥 짜증이 치솟기도 했다. 그렇게 정념에 휩싸이면 일상에서의 집중력은 더 떨어졌다.     예전이라면 해야 할 일을 끝내면 공부방에 자리...
관리쟈
2022.12.28 | 조회 277
글쓰기