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1회> - 걷다 보면 알게 된다

기린
2023-01-05 07:23
538

  해가 바뀌었다. 작년에는 일요일에 세미나를 하느라 둘레길 걷기를 거의 못했다. 약국 휴무인 월요일에 걸으면 되지 않냐 묻는 친구가 있었다. 경험에 비추어보면 대부분의 둘레길은 북적이는 등산로 등과 연결된 지점을 지나면 일요일에도 한산한 편이다. 월요일이면 드물 것이다. 그래서 혼자 둘레길을 걷는다면 휴일이 그나마 안전할 것이라 생각했다. 둘레길 안전 수칙에도 나와 있다. 가급적 2인 이상 동행하시오. 나는 가급적, 일요일에 걷기로 나만의 수칙을 정했다. 1월 1일은 마침 일요일이었고, 며칠 전부터 다시 둘레길을 걸을 수 있도록 몸 상태를 보살폈다.

 

 

 

 공동체에 온 후 걸어서 출근하게 되면서 탄천을 내내 걸었다. 그러다 휴일이면 집 주변에 연결된 탄천을 걷다가 ‘영남길’이라는 표지판을 보게 되었다. 검색을 해보니, 조선 시대 한양에서 시작해서 전국으로 총 6개의 간선 도로망이 갖추어져 있었다고 한다. 그 길을 다시 복원해 ‘경기 옛길’이라 지정했고, 영남길은 한양에서 용인을 거쳐 부산까지 이어진 영남대로의 일부를 복원했다고 한다. 조선시대에도 나있던 길이라고? 십 세기 후반에서 이십 세기 초반이 단번에 연결되었다. 계절의 변화 정도밖에 보이지 않던 탄천 길에 낯선 이가 걷고 있었다. 괴나리봇짐에 패랭이를 쓴 모습이었다. 저 이는 어디를 향해 무슨 일을 보러 갈까, 나는 하릴없이 휴일을 어슬렁대는 중인데. 물론 상상이다. 하지만 그런 상상은 시간을 거스르고 공간을 전환시키면서 나와 세계를 연결시켰다. 더 찾아보니 경기도에만도 옛길을 넘어 둘레길로 숲을, 갯가를, 물길을 연결시켜 조성되어 있었다. 그 길들에는 또 어떤 상상이 잠재해 있을까. 내 발로 그 길들을 걷고 싶어졌다.

 

 

 

 

  2021년에 그렇게 둘레길을 찾아 걷고 또 걸었다. 주중에 검색을 통해 출발점까지 가기 위한 교통수단을 알아놓았다. 내가 살고 있는 용인의 둘레길은 물론 수원 팔색길이나 서울 둘레길의 코스별 출발점은 지하철역에서 시외버스 터미널, 낯선 마을 입구일 때도 있었다. 집을 나서서 버스나 지하철을 탔다. 출발지점까지 적게는 한 시간 많게는 두 시간이 넘게 걸렸다. 둘레길 종점에서 집으로 돌아오는 시간은 더 걸리기도 했다. 그렇게 대중교통을 갈아타며 둘레길 출발점에 서면, 몸은 저절로 여행객 모드로 전환되었다. 낯선 길에서 어떤 우연과 맞닥뜨리게 될지 기대감이 부풀었다. 내딛는 발과 보는 눈 사이로 쉴 새 없이 낯선 것들이 출현해서 익숙했던 것들을 마구 헤집었다. 그렇게 걷다 보면 출발점에서 품고 있었던 어떤 것들은 지나갔고, 또 어떤 것들은 변형되었다. 동시에 몸에는 나른한 피로감이 감돌고 돌아갈 집이 있다는 안심에 휩싸인다. 이 코스를 완주했다는 성취감은 덤이다. 기분 전환이나 새로운 결심 등을 위해 멀리 떠나지 않아도 되는 여행, 둘레걷기는 그렇게 나에게 당일치기 여행이 되었다.

 

 

 

  2023년 1월 1일의 여행은 서울 둘레길 2코스 용마-아차산 코스였다. 지하철 6호선 화랑대역에서 출발해서 5호선 광나루역이 종점인 코스다. 지도를 펼쳐놓고 보니 역시 가보지 않는 동네였다. 화랑대역에서 출발하여 도심을 한 시간 정도 걸었다. 망우 역사 공원이라는 표지판이 눈앞에 나타났다. 말로만 들었던 망우리공동묘지가 역사공원으로 재단장 했단다. 일제 강점기인 1933년에 조성된 공동묘지에는 애국지사를 비롯 널리 알려진 인사들이 많이 안장되어 있었다고 한다. 그 중에는 안창호 선생도 있었고(현재는 국립묘지로 이장했다고 함), 방정환, 이중섭 등의 묘소를 가리키는 표지판이 눈에 띄었다. 지난해에 내린 눈이 녹지 않아 무덤들이 즐비하게 압도하는 공동묘지의 기운은 감춰진 채, 애국지사들의 사진이 프린트된 깃발들만이 역사 공원의 분위기를 풍겼다.

 

 새해 첫날인데도 공원길을 걷는 무리가 꽤 되었다. 등산차림의 두 노인이 어떤 묘지석 앞에서 나누는 이야기들이 들려왔다. 아는 이름인지 그 양반이 어디 출신인데 어쩌구 하는 말이었다. 참배는 아닌 듯했는데, 말의 본새로는 연륜이 느껴졌다. 그분들을 지나쳐 경사가 있는 공원길을 좀 더 오르는데 젊은이 둘이 지나갔다. 레깅스에 잘록한 허리까지 오는 등산복 윗도리 차림이었다. 영하의 날씨에 저렇게 몸을 차게 내놓다니 철딱서니가 없어 보였다. 헉, 내가 상관할 바가 아니지 않은가. 걷다 보면 우연히 마주치는 타인들을 향해서도 이렇게 평가질이 작렬한다. 말로 뱉지 않았을 뿐, 이미 떠올라버린 생각이다. 생각을 단속하는 일이 이렇게 어렵다, 쩝.

 

 또 걸어 걸어 깔딱고개 쉼터를 지나고 아차산 능선에서 정상에 이르는 사이 고구려 시대 유적으로 추정되는 군사시설인 보루가 있던 유적지라는 표지판들을 지나치게 되었다. 이 코스는 서울 둘레길 중에서도 전망이 가장 뛰어난 코스라고 하더니, 보루가 있었다는 능선을 따라 곳곳에 전망대가 설치되어 있었다. 한 전망대에 서 보니 미세먼지 사이로 한강 줄기가 보였다. 그 옆으로 서울 동부와 잠실 쪽으로 빽빽하게 도심이 형성되어 있었다. 고구려의 병사도 바라보았을 한강이겠지만, 그때와 지금의 차이는 도저히 가늠할 수 없을 만큼 아득하겠지. 이번 둘레길을 걷는데 유난히 뻔한 잡생각들이 끼어드는 걸 보니, 인문약방 홈피 자기배려코너에 ‘기린의 걷다 보면’을 연재하기로 한 결정이 영향을 미친 게 분명하다, 헐~.

 

 

  푸코에 의하면 “‘자기 자신을 알아야 한다’는 계율은 사실 고대 문화에서 항상 자기 배려의 계율과 연관되어 있었고 또 더 나아가 자기 자신을 인식하는 것은 자기 자신을 돌보는 하나의 수단으로 간주되었다.” 고 한다. 자기를 배려하는 하나의 수단으로서 나의 둘레길 걷기는 내 ‘꼬라지’를 점검하게 되는 과정이다. 지속해서 ‘낯선’ 길로 여행하면서 출현되는 또 다른 나를 인식할 수도 있을 것이다. 그렇게 길에서 만난 수많은 타자들(경치를 포함)을 통해 변형에 변형을 거듭하기를 기원하는 마음으로 첫 글을 맺는다.

댓글 12
  • 2023-01-05 10:16

    오! 작년 한해 일요일마다 프로그램 하느라 뜸했던 포레스트 기린의 부활인가요?^^
    새해 첫날, 낯선 길 위에서 씩씩하게 발걸음을 옮겼을 기린을 떠올리며 읽었습니다.
    2023년을 멋지게 시작했군요!!ㅎ
    (저의 일출 사진이 사랑받는 것도 즐겁습니다.ㅋㅋ)

  • 2023-01-05 10:17

    괴나리 봇짐을 메고 패랭이를 쓴 기린샘을 잠시 상상해보았습니다^^(넘 어울려!!) 저도 폐허 덕후인 편인데, 폐허가 된 공간들, 폐허로 만든 시간들이 서로 중첩되면서 막 상상력을 자극시키기 때문입니다. 앞으로 <기린의 걷다 보면>의 열렬한 독자가 될 것 같은 느낌적인 느낌!! 곧 백수인 저로서는 기린샘과 곧 함께 걷게 될 것 같기도요.^^

  • 2023-01-05 11:23

    아차산 정상에서 바라보는 풍경이 정말 멋집니다~~
    포레스트 기린을 응원합니다~~~ 곧 함께할 친구들도요!!

  • 2023-01-05 16:09

    와, 새 해, 첫 날부터! 저도 등산보다 둘레길을 좋아해서 가끔 걷는데 용마-아차산 코스는 저도 몇 번 가봤어요! 아차산은 산도 나지막해서 가볍게 걷기 좋더라고요ㅎㅎ 올 한 해 기린샘의 발자취를 지도로 만들어도 재밌을 것 같아요~~ 기린샘의 자기배려의 걷기를 응원합니다:)

  • 2023-01-05 17:23

    기린의 첫날은 걷기로 시작되었군요
    사진과 글로 그 첫길을 짐작해봅니다
    올 한해 기린의 걷기에 함께 할 기회가 오기를 기대해보면서요
    포레스트 기린 멋져부러!!!

  • 2023-01-05 20:31

    '나는 공동체로 출근한다'에 이은 '나는 일요일에 걷는다' 나오는 건가요?^^
    기린쌤의 '걷는 길'에
    물심양면 응원을 아끼지 아끼지 않겠습니다~~~ 멋지다!!!

  • 2023-01-09 10:11

    그 유명한 사람들의 맛집지도며, 빵지순례 지도며~ 그런거 있잖아요~
    기린의 둘레길 추천지도도 기대해볼게요~~^^
    새해 첫 출발을 걷기와 함께~~글만 봐도 기운찹니다(이거 어제 차사업 네이밍으로 제안하려했는데~ㅎㅎ 기운차)

    • 2023-01-10 21:03

      오~ '기운차' 좋은데요^^

      • 2023-01-11 08:39

        ㅋㅋㅋㅋ스피노차
        누가 답글단지 알겠네요 ㅋㅋ
        기승전 스피노자~ 그분~!!ㅎㅎ

  • 2023-01-14 21:20

    와~용마-아차산코스 속 저희 동네 망우역사공원도 다녀가셨군요! 저도 작년 가을에 매일 다녔던 망우산. 봄되면 다시 거닐어봐야겠어요~!
    함께 거니는 기분 느끼다 익숙한 코스와 장소 나와서 더 반갑게 읽었습니다!
    올해 기린님이 '길에서 만난 수많은 타자들(경치를 포함)을 통해 변형에 변형을 거듭하기를' 저도 응원합니다!

  • 2023-01-24 22:44

    기린샘의 책을 읽고 이 글을 보니 더 반갑네요^^ 이 글을 읽으면서 저도 올해는 '좀 많이 걸어보자'라는 생각이 훅 들었어요. 걷다보면 알게되는 그 무언가가 기대되어서 그런걸까요? ^^

  • 2023-01-30 17:50

    와~ 옛길걷기를 시작했군요!
    그길도 걷는 이들이 아주 드물게 있더라구요^^
    기린의 걷는 길 이야기...기대됩니다~♡
    언젠가 같이 걷고 싶기도 하구요.

기린의 걷다보면
      기린 고전 분야에서 덕업일치를 이루지 못하고 고민하던 차, 양생을 위한 담론을 생산하고 생업도 마련하는 기회를 잡아 소속을 인문약방 팀으로 옮겨 일리치 약국 정규직이 되었다.  양생과 관련한 공부에 박차를 가하며 또 한 번의 덕업일치에 도전중이다.       우여곡절 무릎소동     무릎이 부어도    언제부턴가 한약 포장 기계 앞에 쪼그리고 앉아 말끔하게 포장되어 나오는 쌍화탕을 한 팩씩 정렬하는 일을 즐겼다. 푸짐한 뱃살 때문에 쪼그리고 앉는 자세 자체가 불가능했던 시절을 지나, 어쨌든 앉아지는 가능성이 좋았기 때문이다. 그렇다고 그 뱃살들이 다 사라진 것은 물론 아니고 아주 약간 얇아졌을 뿐이지만. 그런데 언제부턴가 오른쪽 무릎이 좀 더 삐걱댄 달까 했던 것도 같다. 그러다 어느 아침, 샤워를 하다가 왼쪽 무릎과 비교해서 현저히 부어있는 오른쪽 무릎을 발견했다. 당장 검색부터 했다. 무릎에 물이 찼다는 신호란다. 무릎의 염증이라는 진단과 물이 찼다는 표현 차이가 이해가 잘 안 되어 몇 번을 읽었다. 병원을 가야했다.      출근해서 오전 일과를 마무리 짓고 나니 12시쯤 되었다. 잠깐 나갔다 오겠다는 말만 남기고 슬그머니 약국을 나섰다. 침을 잘 놓는다는 말을 들은 적은 있는 동네 한의원에 갔다. 정형외과를 가면 시간이 더 많이 걸릴 것 같고 침이 더 빨리 붓기를 뺄 수 있을 것도 같았다. 한의사는 무릎 상태를 진단한 후 검색으로 읽었던 내용을 좀 더 자세히 친절하게 설명해 주었다. 퇴행성이냐고 물었더니 진단으로 봐서는...
      기린 고전 분야에서 덕업일치를 이루지 못하고 고민하던 차, 양생을 위한 담론을 생산하고 생업도 마련하는 기회를 잡아 소속을 인문약방 팀으로 옮겨 일리치 약국 정규직이 되었다.  양생과 관련한 공부에 박차를 가하며 또 한 번의 덕업일치에 도전중이다.       우여곡절 무릎소동     무릎이 부어도    언제부턴가 한약 포장 기계 앞에 쪼그리고 앉아 말끔하게 포장되어 나오는 쌍화탕을 한 팩씩 정렬하는 일을 즐겼다. 푸짐한 뱃살 때문에 쪼그리고 앉는 자세 자체가 불가능했던 시절을 지나, 어쨌든 앉아지는 가능성이 좋았기 때문이다. 그렇다고 그 뱃살들이 다 사라진 것은 물론 아니고 아주 약간 얇아졌을 뿐이지만. 그런데 언제부턴가 오른쪽 무릎이 좀 더 삐걱댄 달까 했던 것도 같다. 그러다 어느 아침, 샤워를 하다가 왼쪽 무릎과 비교해서 현저히 부어있는 오른쪽 무릎을 발견했다. 당장 검색부터 했다. 무릎에 물이 찼다는 신호란다. 무릎의 염증이라는 진단과 물이 찼다는 표현 차이가 이해가 잘 안 되어 몇 번을 읽었다. 병원을 가야했다.      출근해서 오전 일과를 마무리 짓고 나니 12시쯤 되었다. 잠깐 나갔다 오겠다는 말만 남기고 슬그머니 약국을 나섰다. 침을 잘 놓는다는 말을 들은 적은 있는 동네 한의원에 갔다. 정형외과를 가면 시간이 더 많이 걸릴 것 같고 침이 더 빨리 붓기를 뺄 수 있을 것도 같았다. 한의사는 무릎 상태를 진단한 후 검색으로 읽었던 내용을 좀 더 자세히 친절하게 설명해 주었다. 퇴행성이냐고 물었더니 진단으로 봐서는...
기린
2023.02.05 | 조회 469
기린의 걷다보면
  해가 바뀌었다. 작년에는 일요일에 세미나를 하느라 둘레길 걷기를 거의 못했다. 약국 휴무인 월요일에 걸으면 되지 않냐 묻는 친구가 있었다. 경험에 비추어보면 대부분의 둘레길은 북적이는 등산로 등과 연결된 지점을 지나면 일요일에도 한산한 편이다. 월요일이면 드물 것이다. 그래서 혼자 둘레길을 걷는다면 휴일이 그나마 안전할 것이라 생각했다. 둘레길 안전 수칙에도 나와 있다. 가급적 2인 이상 동행하시오. 나는 가급적, 일요일에 걷기로 나만의 수칙을 정했다. 1월 1일은 마침 일요일이었고, 며칠 전부터 다시 둘레길을 걸을 수 있도록 몸 상태를 보살폈다.        공동체에 온 후 걸어서 출근하게 되면서 탄천을 내내 걸었다. 그러다 휴일이면 집 주변에 연결된 탄천을 걷다가 ‘영남길’이라는 표지판을 보게 되었다. 검색을 해보니, 조선 시대 한양에서 시작해서 전국으로 총 6개의 간선 도로망이 갖추어져 있었다고 한다. 그 길을 다시 복원해 ‘경기 옛길’이라 지정했고, 영남길은 한양에서 용인을 거쳐 부산까지 이어진 영남대로의 일부를 복원했다고 한다. 조선시대에도 나있던 길이라고? 십 세기 후반에서 이십 세기 초반이 단번에 연결되었다. 계절의 변화 정도밖에 보이지 않던 탄천 길에 낯선 이가 걷고 있었다. 괴나리봇짐에 패랭이를 쓴 모습이었다. 저 이는 어디를 향해 무슨 일을 보러 갈까, 나는 하릴없이 휴일을 어슬렁대는 중인데. 물론 상상이다. 하지만 그런 상상은 시간을 거스르고 공간을 전환시키면서 나와 세계를 연결시켰다. 더 찾아보니 경기도에만도 옛길을 넘어 둘레길로 숲을, 갯가를, 물길을 연결시켜 조성되어 있었다. 그 길들에는 또 어떤 상상이 잠재해 있을까. 내...
  해가 바뀌었다. 작년에는 일요일에 세미나를 하느라 둘레길 걷기를 거의 못했다. 약국 휴무인 월요일에 걸으면 되지 않냐 묻는 친구가 있었다. 경험에 비추어보면 대부분의 둘레길은 북적이는 등산로 등과 연결된 지점을 지나면 일요일에도 한산한 편이다. 월요일이면 드물 것이다. 그래서 혼자 둘레길을 걷는다면 휴일이 그나마 안전할 것이라 생각했다. 둘레길 안전 수칙에도 나와 있다. 가급적 2인 이상 동행하시오. 나는 가급적, 일요일에 걷기로 나만의 수칙을 정했다. 1월 1일은 마침 일요일이었고, 며칠 전부터 다시 둘레길을 걸을 수 있도록 몸 상태를 보살폈다.        공동체에 온 후 걸어서 출근하게 되면서 탄천을 내내 걸었다. 그러다 휴일이면 집 주변에 연결된 탄천을 걷다가 ‘영남길’이라는 표지판을 보게 되었다. 검색을 해보니, 조선 시대 한양에서 시작해서 전국으로 총 6개의 간선 도로망이 갖추어져 있었다고 한다. 그 길을 다시 복원해 ‘경기 옛길’이라 지정했고, 영남길은 한양에서 용인을 거쳐 부산까지 이어진 영남대로의 일부를 복원했다고 한다. 조선시대에도 나있던 길이라고? 십 세기 후반에서 이십 세기 초반이 단번에 연결되었다. 계절의 변화 정도밖에 보이지 않던 탄천 길에 낯선 이가 걷고 있었다. 괴나리봇짐에 패랭이를 쓴 모습이었다. 저 이는 어디를 향해 무슨 일을 보러 갈까, 나는 하릴없이 휴일을 어슬렁대는 중인데. 물론 상상이다. 하지만 그런 상상은 시간을 거스르고 공간을 전환시키면서 나와 세계를 연결시켰다. 더 찾아보니 경기도에만도 옛길을 넘어 둘레길로 숲을, 갯가를, 물길을 연결시켜 조성되어 있었다. 그 길들에는 또 어떤 상상이 잠재해 있을까. 내...
기린
2023.01.05 | 조회 538
기린의 걷다보면
    올해 초 인문약방 활동의 확장으로 일리치 약국을 열었다. 상담을 주로 하는 약국에서 한약처방전일 경우 계량하고 달이고 포장하는 일 등을 내가 맡기로 했다. 약국 영업시간인 화요일부터 금요일까지는 매일 오전 열 시부터 저녁 일곱 시까지 근무시간도 정해졌다. 이십 대 초반에 정규직으로 일했던 이십 개월 이후 삼십 여년 만에 다시 사대보험이 되는 정규직에 취업을 한 셈이다. 약국을 개업하기 이전에도 대부분 열시 전에 공동체 안에 있는 공부방으로 출근했다. 밥벌이는 물론 공동체에서 벌이는 다종다양한 일에 연루되어 정신없이 보내다 보면 하루가 금방 지나갔다. 그러다보니 시간은 모자라고 세미나 준비는 미흡해서 전전긍긍하기 일쑤였다.     약국으로 출근하게 되면서 아홉 시간의 근무시간이 정해졌다. 약국의 일상과 인문약방의 활동, 세미나 공부 등으로 활용해야 했다. 출근해서 닥치는 일부터 해내다보면 책 한번 펼쳐보지 못하고 퇴근시간을 맞았다. 게다가 약국이 있는 파지사유는 에코와 관련 활동이 펼쳐지고 용기내 가게가 열려 있고 약국에 용무가 있는 사람들이 수시로 드나드는 공간이었다. 여기서 공부방에서처럼 책을 읽는 일은 그야말로 미션임파서블이었다. 공간을 함께 쓰는 친구들과 공부 좀 하자, 공부만 하는 공간이 아니다 등등 언쟁까지 붙으니 피곤이 점점 가중되었다. 환경이 바뀌었는데도 몸은 여전히 예전 공부방의 환경을 원했다. 더구나 그 시절에도 시간이 부족하다고 여겼는데, 지금도 마찬가지라고 생각하니 왜 이러고 사는지 나 자신한테 불쑥불쑥 짜증이 치솟기도 했다. 그렇게 정념에 휩싸이면 일상에서의 집중력은 더 떨어졌다.     예전이라면 해야 할 일을 끝내면 공부방에 자리...
    올해 초 인문약방 활동의 확장으로 일리치 약국을 열었다. 상담을 주로 하는 약국에서 한약처방전일 경우 계량하고 달이고 포장하는 일 등을 내가 맡기로 했다. 약국 영업시간인 화요일부터 금요일까지는 매일 오전 열 시부터 저녁 일곱 시까지 근무시간도 정해졌다. 이십 대 초반에 정규직으로 일했던 이십 개월 이후 삼십 여년 만에 다시 사대보험이 되는 정규직에 취업을 한 셈이다. 약국을 개업하기 이전에도 대부분 열시 전에 공동체 안에 있는 공부방으로 출근했다. 밥벌이는 물론 공동체에서 벌이는 다종다양한 일에 연루되어 정신없이 보내다 보면 하루가 금방 지나갔다. 그러다보니 시간은 모자라고 세미나 준비는 미흡해서 전전긍긍하기 일쑤였다.     약국으로 출근하게 되면서 아홉 시간의 근무시간이 정해졌다. 약국의 일상과 인문약방의 활동, 세미나 공부 등으로 활용해야 했다. 출근해서 닥치는 일부터 해내다보면 책 한번 펼쳐보지 못하고 퇴근시간을 맞았다. 게다가 약국이 있는 파지사유는 에코와 관련 활동이 펼쳐지고 용기내 가게가 열려 있고 약국에 용무가 있는 사람들이 수시로 드나드는 공간이었다. 여기서 공부방에서처럼 책을 읽는 일은 그야말로 미션임파서블이었다. 공간을 함께 쓰는 친구들과 공부 좀 하자, 공부만 하는 공간이 아니다 등등 언쟁까지 붙으니 피곤이 점점 가중되었다. 환경이 바뀌었는데도 몸은 여전히 예전 공부방의 환경을 원했다. 더구나 그 시절에도 시간이 부족하다고 여겼는데, 지금도 마찬가지라고 생각하니 왜 이러고 사는지 나 자신한테 불쑥불쑥 짜증이 치솟기도 했다. 그렇게 정념에 휩싸이면 일상에서의 집중력은 더 떨어졌다.     예전이라면 해야 할 일을 끝내면 공부방에 자리...
관리쟈
2022.12.28 | 조회 283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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