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영화대로42길 31회] 죽은 시인의 시간(hours)/ <디 아워스>(2002)

청량리
2024-02-19 01:24
195

 

언제 어디서나 영화를 볼 수 있지만,

정작 영화에 대해 묻지 않는 시대. 

우리는 영화와 삶의 사이길,

영화대로 사는 길에 대한 질문으로, 

산업과 자본의 도구가 아닌

영화로서의 영화를 보고 읽습니다.

 

*본 리뷰에 사용된 이미지에 대한 저작권은 해당 영화에 있습니다.

 

 

 

• 이번에 '영화대로42길'로 가는 법은 '같은 영화 다른 이야기' 컨셉입니다. 그 첫 번째 영화는 <디 아워스>(2002)입니다. 

 

 

 

 

죽은 시인의 시간(hours)

<디 아워스>(2002) | 감독 : 스티븐 달드리, 주연 : 니콜 키드만, 메릴 스트립, 줄리앤 무어 | 114분

 

 

 

영화 <디 아워스, The Hours>(2003)는 버지니아 울프(니콜 키드먼), 로라 브라운(줄리앤 무어), 클라리사 본(매릴 스트립) 세 명의 여성이 보내는 하루의 시간을 중첩해서 보여준다. 영화는 시간 순으로 1923년 ‘버지니아’로 시작해서 1951년 ‘로라’와 2001년 ‘클라리사’로 이어진다. 이때 버지니아 울프의 소설 ‘댈러웨이 부인’은 세 명을 관통하는 매개 역할을 한다. ‘댈러웨이 부인’은 버지니아가 집필 중인 소설이며, 로라는 ‘댈러웨이 부인’을 읽으며 삶의 위안을 얻고, 클라리사는 ‘댈러웨이 부인’이라는 별명으로 살아간다.

 

 

그런데 영화의 첫 장면, 강물 속으로 걸어 들어가는 버지니아의 모습은 영화의 엔딩과 서로 맞닿아 있다. 단지 동일하게 반복되는 게 아니라, 리처드의 죽음 이후 이어지는 그 장면은 어떤 질문을 던지고 있는 듯하다. 어쩌면 영화에서 직접적으로 메시지를 전달하는 인물은 리처드(에드 해리슨)가 아닐까. 왜냐하면 그는 로라의 아들이자, 클라리사의 옛 연인이면서, 영화 속에서 버지니아처럼 자살에 이르는 인물이기 때문이다. 그래서 리처드를 중심으로 영화를 읽어나가면 영화의 제목이 ‘댈러웨이 부인’이 아니라 왜 ‘디 아워스(hours)’인지 알게 된다.

그렇다면 이 영화의 흐름을 바꿔 읽어보면 어떨까? 시간 순서대로 흐르는 ‘버지니아 – 로라 – 클라리사 – 버지니아’의 구조에서, 앞부분을 연결되는 맨 뒤로 배치하면 로라 클라리사 버지니아의 흐름이 된다.

 

 

01 로라 × 리처드

신해철의 노래가사처럼 로라는 ‘돈, 큰 집, 빠른 차, 여자, 명성, 사회적 지위 그런 것들(나에게 쓰는 편지, 1991)’을 모두 갖춘 미국 중산층 집안의 아내이다. ‘남편들은 그런 것들을 누릴 자격이 있다’고 생각하는 사회 속에 대해서 불만이 있으나, 그녀는 밖으로 드러내기보다는 혼자 속으로 삭인다.

누군가와의 어떤 관계 속에서 ‘착하다’는 것이 꼭 ‘좋음’을 의미하진 않는다. 몸이 안 좋은 로라 대신 아들의 아침을 챙기는 ‘착한’ 남편 댄은 그런 의미에서 ‘악하진’ 않지만, 로라에게는 ‘나쁜’ 사람인지도 모른다. 댄은 로라가 읽는 소설 ‘댈러웨이 부인’에 대해서 공감하지 않거나 못한다. 화목한 가정이 목표인 댄은 ‘악한’ 사람이 아니지만, 그것이 왜 로라의 숨통을 조이는지, 그래서 자살이나 가출로 이어지는지 이해하지 못한다. 그런 의미에서 ‘착함’은 의도와 상관없이 누군가에게 ‘나쁨’이 되기도 한다.

 

 

여하튼 로라 역시 남편의 생일파티에 아무런 관심이 없다. 구색을 갖추려고 그저 생일 케이크를 굽는 것뿐이다. 눈치가 빤한 아들 리처드도 이미 알고 있다. 사실 엄마에게는 아무런 관심도 계획도 없다는 걸. 그리고 둘째를 임신 중이지만, 엄마는 이웃집에 사는 부인 ‘키티’에게 마음이 있다는 것도 리처드는 알고 있다. 남편이 출근 후, 키티가 로라를 찾아온다. 로라, 우리집 개 밥 좀 줘. 그 말 하려고 왔어? 음....사실 자궁에서 뭔가 자라고 있대. 로라는 걱정마라며, 괜찮다고 키티를 안아주며 그녀에게 키스를 한다.

키티가 병원으로 떠나고, 리처드는 거실에서 불안한 엄마를 바라보고 있다. 뭐, 왜? 어쩌라고?? 로라는 리처드와 눈이 마주치자 괜히 쏘아붙이고는 방으로 들어간다. 한참을 누워 있던 로라는 불현듯 일어나 수면제를 모두 챙기고는 리처드에게 말한다. 우리 다시 케이크 만들자. 그리고 밖으로 나가는 거야. 아빠가 오기 전에 할 일이 생겼어. 리처드는 엄마의 변덕을 이해할 순 없지만, 로라가 하고 싶은 걸 같이 하기 위해 식탁으로 온다.

케이크를 다 만들고 나서, 잠깐 있다 올 것처럼 옆집 아줌마에게 리처드를 맡기고 떠나는 로라. 그런데 엄마가 흐느끼는 모습에 리처드는 뭔가 이상함을 느낀다. 엄마!!!! 엄마!!!! 뒤늦게 리처드는 엄마를 애타게 부르며 쫓아가지만 로라의 차는 그대로 멀어진다. 리처드는 엄마에게 버림받았음을 직감한다.

 

 

영화는 로라의 모습을 버지니아 혹은 소설 속 댈러웨이 부인으로 이어지도록 여러 장면들을 의도적으로 ‘오버랩’시키면서 보여준다. 버지니아가 자신의 세계 혹은 자신의 소설 속에서 살아가는 것처럼, 로라 역시 버지니아와 댈러웨이 부인에게 자신을 투영하며 그들과 ‘공명’한다.

로라는 급하게 차를 몰고 어느 호텔방으로 들어간다. 약을 꺼내놓고 ‘댈러웨이 부인’을 읽다가 로라는 침대에 눕는다. 영화의 첫 장면, 버지니아의 몸이 강물에 잠겨 흘러가듯, 로라가 누운 침대 주변으로 순식간에 (강)물이 차오르며 로라를 집어 삼킨다.

바로 다음 장면, 버지니아는 소설을 구상하며 혼자 중얼거린다. 그래, 그녀가 죽을 필요는 없겠어. 대신 다른 사람이 죽어야 할 것 같아. 그러자 로라는 마치 소설의 주인공처럼 침대에서 벌떡 일어나 울부짖는다. “안 돼, 도저히 못 하겠어!!” 결국 로라는 집으로 돌아간다. 둘째가 태어나면 집을 나가겠다고 다짐하면서.

 

 

02 클라리사 × 리처드

리처드는 엄마가 자신을 버리고 차로 떠났던 그 시간에 갇혀 살고있다. 게다가 리처드의 동성애적 성향 역시 엄마로부터 영향 받은 건지도 모른다. 하지만 리처드는 에이즈에 걸렸고, 그의 남자친구는 떠난 지 오래다. 뉴욕의 허름한 건물 꼭대기 자신의 방에 갇혀 사는 리처드를 방문하는 유일한 사람은 옛 연인 클라리사다. 허나 클라리사도 이제는 자신의 여자친구와 동거 중이다.

오늘은 리처드의 문학상 수상을 기념하는 파티가 있는 날이다. 소설 ‘댈러웨이 부인’의 첫 문장처럼 “직접 꽃을 사와야겠어”라고 클라리사는 말했다. 소설의 주인공 ‘클라리사 댈러웨이’와 이름이 같은 클라리사 본의 별명은 그래서 ‘댈러웨이 부인’이다.

오래 전 리처드와 하룻밤을 보낸 해변의 어느 아침, 리처드가 클라리사의 어깨에 손을 얹으며 인사한다. “안녕, 댈러웨이 부인” 클라리사는 고백한다. 그때 이후로 리처드에게 갇혀 있었다고. 리처드는 엄마가 떠났던 시간에 붙잡혀 있고, 클라리사는 리처드와 함께 했던 어느 아침으로부터 벗어나질 못한다. 나에게 커다란 고통(리처드) 또는 행복의 전부인 시간(클라리사) 속에 그들은 멈춰 있다. ‘시계는 아침부터 똑딱’이지만, 실상 우리의 시간은 째깍째깍 초침을 따라 흐르지 않는다.

 

 

리처드가 자살하기 전 흘리는 눈물은 엄마 로라에게 갇혀 지낸 자신에 대한 연민이었을까, 아니면 누군가를 떠나야만 했던 엄마를 뒤늦게 이해하게 된 어리석음에 대한 후회였을까? 클라리사가 자신에게 묶여있지 않기를 바라는 리처드는 결국 창문 밖으로 몸을 던지려고 한다. “당신은 늘 자부심과 용기를 가장하며, 침묵을 덮으려고 항상 파티를 열지. 내가 죽으면 당신은 행복해 할까?" 리처드는 클라리사에게 묻는다.

“글도 제대로 못 쓰는 내 꼴 좀 봐요. 그동안 내 삶과 행복을 지켜주느라 그댄 얼마나 힘들었을까. 그래도 한결같은 마음으로 참아내며 모두가 날 떠나도 끝까지 내 곁을 지켜준 당신. 이제 당신을 놔줘야 할 것 같군요. 그래도 우리 두 사람, 세상에서 가장 행복했잖아요.” 이건 극 중 버지니아가 남편 레너드에게 쓴 편지 내용 중 일부다. 그러나 리처드가 클라리사에게 남기는 글이라 해도 전혀 이상할 게 없어 보인다.

 

 

03 버지니아 × 리처드

영화 속에서 리처드는 버지니아와 함께 결국 자살에 이르는 인물로 등장한다. “나도 알아요. 내가 당신 삶을 망치고 있다는 걸. 내 인생의 행복은 당신 덕분이지만, 살아가며 더 이상 당신 삶을 망칠 수 없어요.” 당신 덕분에 나는 살아가지만, 나의 존재로 당신이 계속 불행해진다면, 나는 어떤 선택을 할 수 있을까? 버지니아와 리처드를 보면 결국 삶의 부조리는 외부적 조건들이 아니라, 자신의 내면에서 마주하게 되는 걸까?

 

 

버지니아의 남편 레너드가 어느 날 묻는다. 왜 당신의 소설에서는 누군가 꼭 죽어야 하냐고. 그러자 버지니아는 그래야 나머지 사람들이 삶의 소중함을 깨닫게 된다고, 그래서 시인이 먼저 죽는다고 말한다. 1941년 남편과 언니 앞으로 유서를 남기고 버지니아는 우즈 강에서 투신자살을 한다. 유서에서 버지니아는 이렇게 고백한다. “추행과 폭력이 없는 세상, 성차별이 없는 세상에 대한 꿈을 간직한 채 저는 지금 저 강물을 바라보고 있습니다.”

삶의 부조리와 더 이상 견디지 못한 시인은 죽음을 선택한다. 그러나 시인의 시간(hours)은 죽음으로 소멸되지 않고 남아 있는 이들에게 질문으로 남는다. 때문에 누구라 할 것도 없이 불현듯 자신도 모르게 솟아오르는 부조리의 감정과 마주하게 된다. 그런 차원에서 알베르 카뮈의 말처럼 “자살은 단 하나의 철학적 문제”인지도 모른다.

 

리처드는 말한다. “클라리사, 당신 삶의 의미를 나한테서 찾진 말아요.” 버지니아의 죽음이 로라에게 흐르듯, 클라리사는 리처드의 죽음을 통해 스스로에게 질문하는 일종의 ‘의식의 시간(hours)’을 갖게 된다. 그것은 버지니아가 말하는 “삶을 회피하지 않고 과감하게 맞서 싸우면서” 알게 되는 삶의 의미를 찾는 시간인지도 모른다. 죽은 시인의 ‘해방일지’는 지금도 계속 써지고 있다.

 

댓글 5
  • 2024-02-19 09:59

    '죽은 시인'이 들어가면 명작이 되나봐요
    띠우샘과 읽었을 때는 자신을 마주하라고,
    청량리샘의 글을 함께 읽으니 마주하고서 과감이 싸워가라
    처럼 느껴지네용

  • 2024-02-19 15:31

    삶의 부조리를 견디지 못하고 선택하는 죽음에 대해 생각해보게 됨요, 둘이 한 영화에 대해 쓰는데 다른 문장들로 엮이네요~~ 신박한 기획^^ 연재 재개를 응원~~

  • 2024-02-19 15:47

    머무르는 시간으로
    알게되는 것이 있는거 같네요.
    오늘은 ‘하나의 영화, 두개의 시선’에
    잠시 머물러볼께요. 고맙습니다.

  • 2024-02-20 15:31

    the hours, the years
    모두 자막에서는 '세월'로 번역되었을거에요.
    원소설이 처음 우리나라에 번역되었을때도 <세월>이었대요.

    누군가는 버티고, 누군가는 사랑하고, 누군가는 삶대신 죽음을 택하고, 누군가는 죽음 속에서 삶을 택하고....
    결국엔 그 시간들이 세월이 우리를 삼키겠죠. 별 수 없어요. 최선을 다해 존재의 그 아가리를, 심연을 뚫어지게 쳐다보는 수밖에^^

    하나의 영화, 두개의 시선. 기획 좋네요

  • 2024-02-25 13:44

    리처드를 중심에 놓고 보다니!! 생각해 본 적 없는 시선이라서 놀랐어요.ㅎ

토용의 서경리뷰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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토용
2024.02.29 | 조회 326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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띠우
2024.02.19 | 조회 323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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청량리
2024.02.19 | 조회 195
논어 카메오 열전
애공(노나라 임금)이 물었다. “어떻게 하면 백성이 복종합니까?” 공자께서 대답하셨다. “정직한 사람을 등용하고 모든 부정한 사람을 버려두면 백성이 복종합니다. 부정한 사람을 등용하고 모든 정직한 사람을 버려두면 백성이 복종하지 않습니다.” (哀公問曰 何爲則民服 孔子對曰 擧直錯諸枉 則民服 擧枉錯諸直 則民不服)「위정,19」   공자 말년의 군주   공자가 14년의 주유를 끝내고 노(魯)나라에 돌아왔다. 이제 막 약관의 나이를 지나고 있던 애공(哀公)은 68세의 공자를 보고 이렇게 물었다.   “선생님의 옷차림은 유자(儒者)들의 복장인가요?” 공자가 대답했다. “제가 어려서 노나라에 있어서 소매통이 넓은 노나라의 옷을 입었습니다. 커서는 송나라에 있어서 송나라의 장보관을 썼습니다. 제가 듣기에 군자는 널리 여러 곳을 다니며 배우지만 고향의 옷을 입는다고 하였습니다. 저는 유자들이 복장에 대해서는 알지 못합니다.”(魯哀公問於孔子曰 夫子之服 其儒服與 」孔子對曰 丘少居魯 衣逢掖之衣 長居宋 冠章甫之冠 丘聞之也 君子之學也博 其服也鄉 丘不知儒服)   이는 『예기(禮記)』 「유행(儒行)」의 첫 장면으로 이후, 애공이 유자들은 어떻게 사는지에 대해 묻고 공자가 이에 답하는 것으로 이어진다. 애공과 공자의 문답으로 이루어진, 이런 글의 형식은 일종의 글쓰기 스타일이라고 볼 수 있다. 따라서 애공과 공자가 만나 실제 이런 이야기를 나누었는지는 알 수 없다. 그러나 여기에 주를 단 정현(鄭玄,127년~200년)은 이때를 공자가 주유를 막 끝내고 노나라에 귀국한 직후라고 보았다. 당시 공자는 성공한 정치가는 아니었지만 명망 있는 인사였다. 그런데 공자를 만나자마자 애공이 처음 물은 것이 그의 옷차림이라니. 이를 통해 애공이 어떤 인물이었는지 나름 상상해 볼 여지가 있는 듯하다. 애공(哀公)의 이름은 장(將)이다. 혹 장(蔣)이라고도 한다. 정공(定公)의...
애공(노나라 임금)이 물었다. “어떻게 하면 백성이 복종합니까?” 공자께서 대답하셨다. “정직한 사람을 등용하고 모든 부정한 사람을 버려두면 백성이 복종합니다. 부정한 사람을 등용하고 모든 정직한 사람을 버려두면 백성이 복종하지 않습니다.” (哀公問曰 何爲則民服 孔子對曰 擧直錯諸枉 則民服 擧枉錯諸直 則民不服)「위정,19」   공자 말년의 군주   공자가 14년의 주유를 끝내고 노(魯)나라에 돌아왔다. 이제 막 약관의 나이를 지나고 있던 애공(哀公)은 68세의 공자를 보고 이렇게 물었다.   “선생님의 옷차림은 유자(儒者)들의 복장인가요?” 공자가 대답했다. “제가 어려서 노나라에 있어서 소매통이 넓은 노나라의 옷을 입었습니다. 커서는 송나라에 있어서 송나라의 장보관을 썼습니다. 제가 듣기에 군자는 널리 여러 곳을 다니며 배우지만 고향의 옷을 입는다고 하였습니다. 저는 유자들이 복장에 대해서는 알지 못합니다.”(魯哀公問於孔子曰 夫子之服 其儒服與 」孔子對曰 丘少居魯 衣逢掖之衣 長居宋 冠章甫之冠 丘聞之也 君子之學也博 其服也鄉 丘不知儒服)   이는 『예기(禮記)』 「유행(儒行)」의 첫 장면으로 이후, 애공이 유자들은 어떻게 사는지에 대해 묻고 공자가 이에 답하는 것으로 이어진다. 애공과 공자의 문답으로 이루어진, 이런 글의 형식은 일종의 글쓰기 스타일이라고 볼 수 있다. 따라서 애공과 공자가 만나 실제 이런 이야기를 나누었는지는 알 수 없다. 그러나 여기에 주를 단 정현(鄭玄,127년~200년)은 이때를 공자가 주유를 막 끝내고 노나라에 귀국한 직후라고 보았다. 당시 공자는 성공한 정치가는 아니었지만 명망 있는 인사였다. 그런데 공자를 만나자마자 애공이 처음 물은 것이 그의 옷차림이라니. 이를 통해 애공이 어떤 인물이었는지 나름 상상해 볼 여지가 있는 듯하다. 애공(哀公)의 이름은 장(將)이다. 혹 장(蔣)이라고도 한다. 정공(定公)의...
진달래
2024.02.08 | 조회 293
우현의 독서가 테크트리
  “아 테스형!” 삶의 지혜를 소크라테스에게 묻는 것은 합당할까? : <철학 입문> 세미나를 들어야 하는 이유       ‘깨달은 자’의 대명사 소크라테스  “아 테스형!” ‘까’와 ‘빠’를 모두 미치게 만드는 ‘슈퍼스타’ 나훈아는 3년 전 자신의 신곡에서 이렇게 외쳤다. 살아가기 힘겨운 세상을 어떻게 견뎌낼 수 있냐는 질문을 소크라테스 ‘형’에게 물은 것이다. 오랜만에 컴백한 나훈아이기도 했지만, 재미있는 가사로 더욱 이슈가 됐었다. 특히 가사가 ‘철학적’이라는 반응과 함께, 힘든 세상에 대해 한탄하는 내용이 많은 공감을 불러일으킨 것 같다. 그렇다고 이 곡에 ‘소크라테스’의 철학이라던가, <독서가 테크트리>에서 다룰만한 ‘철학적’인 내용이 있는 건 아니다. 그저 소크라테스는 ‘철학자’의 전형으로, 머나먼 인생의 선배이자 ‘진리를 깨달은 자’의 의미의 ‘테스형’으로 쓰였을 뿐이다.  ‘소크라테스’의 이런 사용법은 흔한 편이다. 나도 온라인 대전 게임을 하다보면, 드물게 ‘소크라테스 컨셉’을 잡고 행동하는 유저를 만나곤 한다. 닉네임을 ‘Socrates’로 짓고, 칭호를 ‘철학가’나 ‘깨달은 자’로 달고, 게임 내내 채팅으로 ‘너 자신을 알라’고만 하는 식이다. 이처럼 소크라테스는 세상 만사를 깨달은 ‘철학자’의 아이콘이며, 근엄하고 흔들리지 않는 캐릭터로 인식되는 듯하다. 하지만 정말 소크라테스는 그러한 일반적 이미지와 같은 사람이었을까? 철학사에서 다뤄지는 ‘소크라테스’는 우리가 아는 소크라테스와 어떤 점이 다를까?     나훈아의 <테스형!> 무대. 배경 이미지로 올림푸스 신전과 소크라테스의 그래픽이 나타나는 게 나의 '웃음벨'이었다.     ‘철학의 아버지’, 그리고 ‘슈퍼스타’  우선 소크라테스가 ‘철학자’의 아이콘이라는 것에 대해 반론할 사람은 거의 없을 것이다. 실제로 소크라테스 이전의 철학은 ‘자연...
  “아 테스형!” 삶의 지혜를 소크라테스에게 묻는 것은 합당할까? : <철학 입문> 세미나를 들어야 하는 이유       ‘깨달은 자’의 대명사 소크라테스  “아 테스형!” ‘까’와 ‘빠’를 모두 미치게 만드는 ‘슈퍼스타’ 나훈아는 3년 전 자신의 신곡에서 이렇게 외쳤다. 살아가기 힘겨운 세상을 어떻게 견뎌낼 수 있냐는 질문을 소크라테스 ‘형’에게 물은 것이다. 오랜만에 컴백한 나훈아이기도 했지만, 재미있는 가사로 더욱 이슈가 됐었다. 특히 가사가 ‘철학적’이라는 반응과 함께, 힘든 세상에 대해 한탄하는 내용이 많은 공감을 불러일으킨 것 같다. 그렇다고 이 곡에 ‘소크라테스’의 철학이라던가, <독서가 테크트리>에서 다룰만한 ‘철학적’인 내용이 있는 건 아니다. 그저 소크라테스는 ‘철학자’의 전형으로, 머나먼 인생의 선배이자 ‘진리를 깨달은 자’의 의미의 ‘테스형’으로 쓰였을 뿐이다.  ‘소크라테스’의 이런 사용법은 흔한 편이다. 나도 온라인 대전 게임을 하다보면, 드물게 ‘소크라테스 컨셉’을 잡고 행동하는 유저를 만나곤 한다. 닉네임을 ‘Socrates’로 짓고, 칭호를 ‘철학가’나 ‘깨달은 자’로 달고, 게임 내내 채팅으로 ‘너 자신을 알라’고만 하는 식이다. 이처럼 소크라테스는 세상 만사를 깨달은 ‘철학자’의 아이콘이며, 근엄하고 흔들리지 않는 캐릭터로 인식되는 듯하다. 하지만 정말 소크라테스는 그러한 일반적 이미지와 같은 사람이었을까? 철학사에서 다뤄지는 ‘소크라테스’는 우리가 아는 소크라테스와 어떤 점이 다를까?     나훈아의 <테스형!> 무대. 배경 이미지로 올림푸스 신전과 소크라테스의 그래픽이 나타나는 게 나의 '웃음벨'이었다.     ‘철학의 아버지’, 그리고 ‘슈퍼스타’  우선 소크라테스가 ‘철학자’의 아이콘이라는 것에 대해 반론할 사람은 거의 없을 것이다. 실제로 소크라테스 이전의 철학은 ‘자연...
우현
2024.02.05 | 조회 329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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