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문학처방전>5회 워킹맘의 만성피로편

겸목
2020-08-17 12:44
534

장르를 바꿔보자

-정세랑의 장편소설 『보건교사 안은영』(민음사, 2015년)을 처방합니다

 

 

  워킹맘의 만성피로, SF 판타지 아니면 답이 없다

  만성피로와 어깨 결림에 대한 처방전을 의뢰한 곰도리(닉네임)는 대안학교 과학교사이고, 아직은 엄마의 손이 많이 가는 초등학생 남매를 기르고 있다. 하루가 24시간이 아니라 48시간이거나, 육아도우미 AI가 개발되어 상용화되거나, 슈퍼 히어로급 초능력을 장착하지 않는다면, 이러한 조건에 놓인 사람이 만성피로를 호소하는 것은 너무나 당연한 일이다. SF 판타지가 아니면 현실에서는 답이 없다. 그래서일까? 곰도리와의 만남은 주객이 전도되어 그의 고충에 대한 의논보다 내 흑역사에 대한 하소연으로 더 많은 시간을 보냈다. 곰도리는 학생들에게 인기 많은 선생님이라는 소문대로 내 이야기를 잘 들어주었다.

 

  그날 나는 아이 둘을 낳고 뒤늦게 대학원에 진학했던 삼십대의 날들이 떠올랐다. 말 그대로 석사과정생은 ‘과정’에 있는 사람이니, 용빼는 재주가 있지 않고는 자료검토든 글쓰기든 잘해낼 수가 없다. 그런데 교수님들은 가르쳐주는 것 없이 야단만 쳤고, 강의시간은 단체로 기합을 받는 시간 같았다. 석사과정 동안에는 아무리 정신을 바짝 차리고 준비해도, 공부에 대한 안목과 요령이 없기 때문에 ‘뻘짓’을 할 수밖에 없다. 그 무수한 헛발질을 거쳐 공부하는 사람이 되어가는 것인데, 나는 자책과 자학 없이 이 과정을 통과하는 사람을 보지 못했다. 당시 유치원에 다니던 아이들은 엄마가 바쁜 때를 귀신 같이 알고 다치거나 아팠다. 그 시절 나는 조금만 삐끗해도 와르르 무너질 것 같은, 긴장감 넘치는 일상을 감당하지 못해 허덕였다. 지금도 그때를 생각하면 어깨가 뭉치는 것 같다.

 

  곰도리는 자신을 ‘평가’로부터 자유롭지 못한 사람이라고 설명했다. 학생들을 평가할 때마다 자신이 그러한 자격이 있는 사람인지, 평가의 기준은 합당 한지 스스로를 되돌아볼 수밖에 없다고. 그리고 자신이 생각하는 자아상으로부터도 마음을 내려놓기 어렵다고 말하며 멋쩍어했다. 그건 아마도 곰도리가 그동안 자신에게 요구되는 책무에 대해 좋은 성과를 내왔기 때문에 그렇다고 나는 생각한다. 그런 점에서 곰도리는 ‘능력 있는’ 사람이다. 좋은 성과를 내는 사람이야말로 성과나 평가로부터 자유롭기는 어렵다. 몸이 고될지라도 조금만 애를 쓰면 더 나은 결과가 나온다는 것을 알고 있는데, 그걸 하지 않기는 힘들다. 그 일이 자신이 좋아하는 일이라고 한다면 더 그렇다. 곰도리는 과학교사로서 학생들과 만나는 일을 좋아한다. 대안학교답게 좀 더 창의적으로 학생들과 만나는 방법을 실험해보고 싶은 ‘당찬 꿈’도 있다. 자신이 조금만 애를 쓰면 그 일이 될 것도 같다. 그런데 어떻게 무리하지 않을 수 있을까? 문제는 곰도리의 ‘몸’이 하나라는 사실이다! 곰도리는 아침이면 커피로 잠을 깨우고, 일을 마치면 습관적으로 맥주를 마시는 것을 문제라고 봤지만, 나는 커피와 맥주가 있어 그나마 다행이라고 생각한다. 커피와 맥주가 ‘하드캐리’하고 있는 현실에서, 워킹맘의 만성피로는 SF 판타지가 아니면 답이 없다.

 

 

 초능력자도 충전이 필요하다, 보건교사 안은영

 

이 학교에는 아무래도 뭔가가 있다. 출근 첫날부터 느낄 수 있었다. 안은영은 유감스럽게도 평범한 보건교사가 아니었다. 은영의 핸드백 속에는 항상 비비탄 총과, 무지개 색 늘어나는 깔대기형 장난감 칼이 들어 있다. 어째서 멀쩡한 30대 여성이 이런 걸 매일 가지고 다녀야 하나 속이 상하지 않은 건 아니지만 어쩔 수 없다. 사실은 멀쩡하지 않아서겠지. 안은영, 친구들에게는 늘 ‘아는 형’이라고 놀림받는 소탈한 성격의 사립 M고 보건교사, 그녀에겐 이른바 보이지 않는 것들을 보고 그것들과 싸울 수 있는 능력이 있다.

언제부터였냐면, 원래부터라고 할까. 은영은 아주 일찍 자신의 세계가 다른 사람의 세계와 다르다는 걸 깨달았다. 명료하게 인식하기 시작한 것은 열 살 무렵이었다. 엄마가 시세보다 훨씬 싼값에 산 집을 리모델링한다고 좋아라 부엌 벽을 깨부수려 할 때, 힘껏 만류한 적이 있다. 이 구조 이대로가 좋으니 벽지나 바르자고, 괜히 번거롭게 여기저기 헐고 리모델링을 하면 아빠 집에 가서 살겠다고 협박을 했다. 벽 속에는 얼굴은 좀 상했지만 친절한 아줌마가 있었다. 엄마가 알아서 좋을 것은 하나도 없었다. 열 살의 은영이 식탁에 앉아 시리얼을 말아 먹을 때면, 벽 속의 아줌마는 조용히 웃으며 내려다보곤 했다. 그 눈길에 적의가 없었으므로 괜찮았다. 적의와 적의 아닌 것을 구분하는 감각은 은영 같은 사람에게 일찍 발달할 수밖에 없다.   (보건교사 안은영』,12~13쪽)

 

 

  정세랑의 장편소설 『보건교사 안은영』에는 격무에 시달리는 보건교사가 나온다. ‘보이지 않는 것들’을 볼 수 있는 신비한 능력을 갖고 있는 은영은 그 능력 때문에 일상이 고되다. 전문 퇴마사로 살지 않기 때문에 먹고 살기 위해서는 직업이 필요하고, 근무와 함께 악귀도 물리쳐야 한다. 그녀의 핸드백에 들어가 있는 비비탄 총과 플라스틱 칼은 장난감처럼 보이지만, 그녀의 기운을 받게 되면 강력한 무기가 된다. 그러나 무기가 있다고 만사형통인 것은 아니다. 비비탄 총은 하루에 스물두 발, 플라스틱 칼은 15분 정도 쓸 수 있다. 터키의 이블 아이, 바티칸의 묵주, 부석사의 염주 같은 신령스런 물건을 갖고 있으면 그 기운으로 무기의 사용시간을 좀 더 연장할 수 있지만, 근본적인 대책이 되지 못한다. 그래서 은영은 휴무일마다 명승지를 유람한다. 사람들이 많이 가는 절을 찾아가 석탑에 손을 대고 ‘영빨’을 재충전한다. 남산공원에 연인들이 자물쇠를 채워든 철망을 순례하기도 한다. 이렇게 다른 사람들의 간절한 소원이나 사랑이 은영에게는 휴대폰 ‘보조 배터리’와 같이 사용된다.

 

두 사람이 놀토 오후마다 하는 일은 쉽게 말하면 명승지 관광이었다. 인표를 만나기 전에는 은영 혼자 하던 일이다. 주로 오래된 절, 사람이 많이 다니는 절에 가서 탑에다가 살짝 손가락을 댄 다음 충전을 한다. 푹 자고 일어나도 충전이 되고 인표의 손을 잡을 때마다도 충전이 되지만 명승지에서의 충전은 정말이지 질이 달랐다. 일상의 충전이 휘발유 급유라면 고급 엔진오일 교체 같은 것이랄까. 유통기한이 지난 티백과 다도 장인이 정성을 다해 우려낸 차의 차이랄까. 격무에 시달리고 나면 독이 자주 오르는 은영은 늘 구석구석을 맑은 것으로 가득 채울 필요가 있었다. 특히 탑돌이 행사라도 하고 난 다음이면, 탑마다 번개를 저장한 것만큼 순도 높은 에너지가 넘쳐서 은영은 열심히 훔칠 수 있다. 남의 소원을 훔쳐서 살다니, 얼마나 이상한 인생인가. 은영은 자주 자조적이 되었다. (50쪽)

 

  판타지 소설 『보건교사 안은영』을 읽으며 내가 놀란 것은, 초능력이 있어도 에너지 재충전은 필수라는 점이다. 소설 속에는 능력 있는 의사가 나오는 에피소드도 있다. 살고 싶은 사람들의 마음이 의사의 등에 탑처럼 쌓여 디스크가 왔다. 좋다는 시술을 가리지 않고 받아도 재발해서 고생하던 때에 은영이 의사를 도와주었다. 병원 복도에서 마주친 은영이 플라스틱 칼로 미친 듯이 등을 때렸더니 허리가 나았다. 놀라워하는 의사에게 은영은 충고한다. “일을 열심히 하는 건 좋지만 거절도 할 줄 아셔야 해요. 과도한 업무도 번거로운 마음도 거절할 줄 모르면 제가 아무리 털어 봤자 또 쌓일 거예요. 노, 하고 단호하게 속으로라도 해 보세요.”(213쪽) 이쯤 되면 『보건교사 안은영』은 판타지 소설이라기보다 건강생활 매뉴얼처럼 느껴진다. 악귀든 원한이든 스트레스든 떨어내야 할 것들을 제때 떨어내지 않으면 다 병이 된다. 어쩌면 은영에게 진짜 필요한 능력은 보이지 않는 것들을 보고 그것들과 싸우는 초능력이 아니라 방전된 에너지를 재충전하는 방법을 찾는 능력인지 모른다. 그리고 이건 은영뿐 아니라 우리 모두에게 해당되는 이야기이다.

 

 

  장르를 바꿔봐, 호러에서 소년만화로

 

“너는 말이야, 캐릭터 문제야.”

“뭐라고?”

“장르를 잘못 택했단 말야. 칙칙한 호러물이 아니라 마구 달리는 소년 만화여야 했다고. 그랬으면 애들이 싫어하지 않았을 거야. 그 꼴로 다치지도 않았을 거고.”

“만화가 아니야.”

“그렇게 다르지 않아. 그래서 내가 한 번 그려 봤지.”

강선이 스케치 한 장을 내밀었다. 거기엔 교복을 입은 은영이 5등신 정도 되는 비율로, 치마는 좀 짧아진 채 그려져 있었다. 5등신이 기분 나쁜지 멋대로 치마를 잘라 먹은 게 기분 나쁜지 얼떨떨했다. 그 그림 속 은영의 한 손에는 무지개 깔때기 칼이, 다른 손에는 총이 들려 있었다. 은영이 뭐라 반응하기 전에 강선이 의자에 걸려 있던 커다란 가방에서 정말로 깔때기 칼과 비비탄 총을 꺼냈다. 낡고 흠집이 있는 게 분명 강선이 어릴 때 가지고 놀던 물건인 것 같았다.

“도구를 쓰라고, 멍청아.”

“하.”

“코믹 섹시 발랄? 아무래도 섹시는 무리겠지만.”

그렇게 말하면서 강선이 은영의 납작한 가슴을 삐딱하게 쳐다보았으므로 은영은 기운을 차리고 지우개를 던졌다.

캐릭터를 바꿀 수 있을 것 같았다. 장르를 바꿀 수 있을 것 같았다. 지우개가 명중하는 순간 은영은 예감했다. (185~187쪽)

 

 

 

  『지구에서 한아뿐』, 『피프티피플』, 『옥상에서 만나요』로 이어지는 작가 정세랑의 시그니처는 판타지의 형식을 빌어 자신의 정치적 올바름을 담아내는 ‘믹스매치’에 있다. 정세랑은 코믹하고 황당한 설정이 가져오는 장르적 재미로 사회적 정의와 연대와 같은 공공의 가치를 포장한다. 그의 작품은 B급으로 제작된 공익광고와 같은 신선함이 있다. 문학의 ‘엄숙함’을 덜어낸 그의 발걸음은 가볍고 경쾌하다.

 

  ‘발랄함과 굳건함, 코믹함과 용감함’은 작가 정세랑의 이미지이기도 하고, 소설 속 캐릭터 은영의 이미지이기도 하다. 그러나 은영이 처음부터 귀엽고 사랑스러운 여전사형 퇴마사였던 것은 아니다. 다른 사람들의 눈에는 보이지 않는 것들을 보고, 알아들을 수 없는 말을 중얼거리는 아이는 ‘홈드라마’보다는 ‘호러물’에 어울린다. 호러물의 ‘여주’답게 왕따로 청소년기를 보내던 은영에게 한 친구가 조언한다. 네 인생의 장르를 호러가 아니라 소년만화로 바꿔보라고. 음산하고 칙칙한 소녀가 아니라 악당을 물리치는 여전사가 되라고. 소년만화가 갖는 장르적 쾌감과 가벼움이 은영이 짊어지고 갈 인생의 무게를 덜어냈다.

 

  우리도 은영처럼 해보면 어떨까? ‘퇴마사’라는 비운의 운명까지는 아니더라도, 우리 모두에게는 어깨를 짓누르는 각자의 짐이 있다. 비장하게 내 운명과 맞서 싸우겠다는 정도(正道)만이 길인 것은 아니다. 정도로는 길이 보이지 않을 때, 정도로 대결하기에는 힘이 부칠 때, 우리에게는 사도(邪道)가 있다. 삼십육계 줄행랑이 절체절명의 순간 목숨을 구하는 최고의 전술이 될 수 있듯이, 이제껏 써보지 못한 방책을 구사하는 것도 구제책이 될 수 있다. 그것이 ‘스타일 구기는’ 방식일지라도.

 

  워킹맘 곰도리의 만성피로도 ‘불량교사’ ‘불량주부’라는 캐릭터가 살아있는 코믹 장르로 풀어보면 어떨까? 학생들의 고민을 함께 해결해주는 교사가 아니라, 학생들에게 고민상담을 일삼는 교사로. 엄마라기보다는 룸메이트에 가까운 가족의 일원으로. 자신의 새로운 캐릭터를 설정하고 세계관을 구축해간다면, 이제까지와는 다른 ‘곰도리월드’가 만들어지리라 짐작된다. 요즘 유행하는 미스터리 장르를 선택하는 것도 나쁘지 않다. 도대체 곰도리의 정체는 무엇인지 양파 껍질처럼 파헤쳐가는 스토리도 주위사람들의 관심을 불러올 수 있다. 물론 쉽지 않다. 그래도 이런 ‘헛소리’에 어이없어 하며 실소를 터뜨리게 된다면, 피식 웃게 되는 그 순간이 내가 곰도리에게 주고 싶은 ‘휴식’이었다는 것을 이해해줬으면 좋겠다. 피로엔 휴식이 답이다. 곰도리 쉬어야 해! 일도 살살 하고!

 

댓글 4
  • 2020-08-17 17:52

    아, 곰도리의 상황이 120% 이해가 됩니다.
    지금처럼 하면 곧 번아웃이 예상되니(혹은 이미 번아웃?) 지속가능한 삶을 위해
    지금 당장 완전한 장르전환이 어렵다면 간헐적 장르전환이라도 시급하다는 생각이 듭니다.^^
    새털의 회상 장면에 이어 저의 회상도 마음속에서 실시간으로 버퍼링이 됩니다.ㅋㅋㅋ

  • 2020-08-21 16:52

    보건교사 안은영... 저와 이름이 같아서 더 재밌었던 책 ㅋ
    곰도리님의 사연과 새털의 처방을 함께 읽으니 상상이 마구마구 되는 ㅋㅋㅋ
    장르 전환을 처방받은 곰도리 화이팅~~~~ 처방전 내느라 열일하는 새털도 화이팅~~

  • 2020-08-24 02:56

    역쉬!!! 명의네요~~
    종종 곁에서 보는 곰돌이는 모범생이구요, 좋은 엄마구요, 멋진 선생님이예요~
    근데 며칠 전에 날탱이처럼(?)ㅋㅋ 살았던 옛이야기를 풀어놔서 정신놓고 들었구먼요~ ㅋㅋ
    전 그런 나사빠진 곰돌이가 차~~~암 좋았는데... 요새 바깥양반이 바쁘다는 소식에 어찌 지내시는지 ...
    모드 전환에 좌절하고 계시지는 않는지 걱정이구먼요! ㅋㅋ
    막걸리 한병들고 갈테니 언제나 여유 있게 모드 전환 버튼을 켜두시길 ㅋㅋ

  • 2020-08-24 22:18

    이제야 그날 평소와는 다른 곰도리의 모습이 이해가 되네요!!!
    앞으로도 계속 코믹한 불량 곰도리와 함께했으면 좋겠네요

겸목의 문학처방전
‘별것 아닌 것 같지만, 도움이 되는’ 정군에게 레이몬드 카버의 소설집 『대성당』(문학동네, 2007년)을 처방합니다        “굳이 써야 할까요?”   지난 가을, 나는 정군(닉네임)을 만나러 광화문으로 갔다. 그와 이야기를 마치고, 우리는 평양냉면을 먹었다. 평양냉면의 슴슴한 맛을 그다지 좋아하지 않았던 나는, 정군이 가자고 한 식당에서 사람들이 왜 평양냉면을 좋아하는지 알게 되었다. 슴슴한 맛 특유의 감칠맛 같은 게 혀끝에서 느껴졌다. 그와 다음 약속을 잡고, 나는 걸어서 덕수궁으로 갔다. 하늘은 파랗고, 은행잎은 노랗고, 바람은 선선하고, 걷기에 좋은 가을날이었다. 덕수궁의 석조전과 돌담을 거닐며, 나는 계속 같은 생각을 했다. “굳이 써야 할까요?”라는 정군의 말을. 내가 정군을 만나러 오며 듣고 싶은 말은 “글이 잘 안써져요. 어떻게 할까요?”였다. 사십대 초반의 애아빠인 정군이 소설을 쓰고 싶어한다는 얘기를 지인들로부터 들었고, 나는 사십대에도 소설쓰기를 고민하는 사람을 만나보고 싶었다. 문학전공자인 내 주변에 이제 소설쓰기를 걱정하는 사람은 없다. 이십대 때, 내 주변에는 시와 소설이 안 써진다고 오만상을 찌푸리고 다니는 친구들이 대부분이었다. 이제 이들은 대부분 착실한 직장인으로 살아가고 있다. 교사, 공무원, 출판사 편집자 등 제 밥벌이는 하는 사람들로 살아가고 있다. 나도 여기에 포함된다. 소설쓰기를 포기한 인간의 부류에. 그래서 나는 정군을 만나보고 싶었다. 이십대가 아니라 사십대에도 소설을 쓰고 싶어 하는 사람의 애로사항은 무엇인지 들어보고 싶었다. 아이를 키우며 소설을 쓰는 일은 어떤 시너지효과를 가져오게 되는지도 궁금했다.     그런데 정군은 가뿐하게 말했다. “굳이 써야 할까요?”...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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겸목
2020.12.30 | 조회 589
겸목의 문학처방전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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겸목
2020.10.16 | 조회 526
겸목의 문학처방전
나의 '장인'에게 보내는 마음의 소리 -김초엽의 단편소설 <나의 우주 영웅에 관하여>를 처방합니다     ‘감정의 물성’을 읽다가   2002년에 개봉된 영화 <마이너리티 리포트>는 50년 후인 2054년의 미래를 보여준다. 50년이 지나지 않았지만, 개봉 당시 가히 판타스틱 했던 미래기술들이 오늘날에는 많이 상용화되었다. 생체인식기술, 멀티터치인터페이스, 홀로그램, 증강현실, AI안경, 자율주행차, 사물인터넷 등 영화적 재미를 가져왔던 미래기술들을 오늘날에는 일상에서 쉽게 접할 수 있다. 물론 일상이 된 첨단기술들은 영화 속에서만큼 매력적이지 않다.     2019년에 출판된 김초엽의 소설집 『우리가 빛의 속도로 갈 수 없다면』(허블, 2019년)에서도 조만간에 출시되거나 상용화될 것 같은 미래기술들을 엿볼 수 있다. 인간배아 디자인, 냉동수면기술, 웜홀 터널, ‘기쁨/슬픔/우울’ 같은 감정을 담고 있는 팬시상품, 죽은 사람들의 생애 정보를 데이터로 이식한 ‘마인드’ 도서관 등, 비교적 ‘현실적인’ SF판타지를 보여준다. 나는 그 중 가장 빨리 상용화 되는 것은 ‘마인드’ 도서관이라고 생각한다. 매장에서 화장으로 빠른 속도로 바뀌고 있는 우리의 장례문화를 떠올려볼 때, 곧 납골당과 추모공원은 사이버상의 홀로그램과 가상현실로 대체될 것 같다. 이것을 관리해주는 플랫폼이 등장하고 우리는 넷플릭스나 왓챠처럼 정액제로 사용요금을 결제하게 될 것이다.   “감정의 물성?” “그러니까 자기들 말로는 감정 자체를 조형화한 제품이래요. 종류도 꽤 많아요. 가장 기본적인 형태는 ‘공포체’, ‘우울체’ 하는 식으로 이름이 붙고, 파생되는 제품으로 비누나 향초, 손목에 붙이는 패치도 있고요. 지금 유진 씨가 구해 온 건 침착의 비누라는 건데, 진짜 비누처럼 써도 되지만 그냥 손으로 만지작거리는...
나의 '장인'에게 보내는 마음의 소리 -김초엽의 단편소설 <나의 우주 영웅에 관하여>를 처방합니다     ‘감정의 물성’을 읽다가   2002년에 개봉된 영화 <마이너리티 리포트>는 50년 후인 2054년의 미래를 보여준다. 50년이 지나지 않았지만, 개봉 당시 가히 판타스틱 했던 미래기술들이 오늘날에는 많이 상용화되었다. 생체인식기술, 멀티터치인터페이스, 홀로그램, 증강현실, AI안경, 자율주행차, 사물인터넷 등 영화적 재미를 가져왔던 미래기술들을 오늘날에는 일상에서 쉽게 접할 수 있다. 물론 일상이 된 첨단기술들은 영화 속에서만큼 매력적이지 않다.     2019년에 출판된 김초엽의 소설집 『우리가 빛의 속도로 갈 수 없다면』(허블, 2019년)에서도 조만간에 출시되거나 상용화될 것 같은 미래기술들을 엿볼 수 있다. 인간배아 디자인, 냉동수면기술, 웜홀 터널, ‘기쁨/슬픔/우울’ 같은 감정을 담고 있는 팬시상품, 죽은 사람들의 생애 정보를 데이터로 이식한 ‘마인드’ 도서관 등, 비교적 ‘현실적인’ SF판타지를 보여준다. 나는 그 중 가장 빨리 상용화 되는 것은 ‘마인드’ 도서관이라고 생각한다. 매장에서 화장으로 빠른 속도로 바뀌고 있는 우리의 장례문화를 떠올려볼 때, 곧 납골당과 추모공원은 사이버상의 홀로그램과 가상현실로 대체될 것 같다. 이것을 관리해주는 플랫폼이 등장하고 우리는 넷플릭스나 왓챠처럼 정액제로 사용요금을 결제하게 될 것이다.   “감정의 물성?” “그러니까 자기들 말로는 감정 자체를 조형화한 제품이래요. 종류도 꽤 많아요. 가장 기본적인 형태는 ‘공포체’, ‘우울체’ 하는 식으로 이름이 붙고, 파생되는 제품으로 비누나 향초, 손목에 붙이는 패치도 있고요. 지금 유진 씨가 구해 온 건 침착의 비누라는 건데, 진짜 비누처럼 써도 되지만 그냥 손으로 만지작거리는...
겸목
2020.09.13 | 조회 418
겸목의 문학처방전
장르를 바꿔보자 -정세랑의 장편소설 『보건교사 안은영』(민음사, 2015년)을 처방합니다       워킹맘의 만성피로, SF 판타지 아니면 답이 없다   만성피로와 어깨 결림에 대한 처방전을 의뢰한 곰도리(닉네임)는 대안학교 과학교사이고, 아직은 엄마의 손이 많이 가는 초등학생 남매를 기르고 있다. 하루가 24시간이 아니라 48시간이거나, 육아도우미 AI가 개발되어 상용화되거나, 슈퍼 히어로급 초능력을 장착하지 않는다면, 이러한 조건에 놓인 사람이 만성피로를 호소하는 것은 너무나 당연한 일이다. SF 판타지가 아니면 현실에서는 답이 없다. 그래서일까? 곰도리와의 만남은 주객이 전도되어 그의 고충에 대한 의논보다 내 흑역사에 대한 하소연으로 더 많은 시간을 보냈다. 곰도리는 학생들에게 인기 많은 선생님이라는 소문대로 내 이야기를 잘 들어주었다.     그날 나는 아이 둘을 낳고 뒤늦게 대학원에 진학했던 삼십대의 날들이 떠올랐다. 말 그대로 석사과정생은 ‘과정’에 있는 사람이니, 용빼는 재주가 있지 않고는 자료검토든 글쓰기든 잘해낼 수가 없다. 그런데 교수님들은 가르쳐주는 것 없이 야단만 쳤고, 강의시간은 단체로 기합을 받는 시간 같았다. 석사과정 동안에는 아무리 정신을 바짝 차리고 준비해도, 공부에 대한 안목과 요령이 없기 때문에 ‘뻘짓’을 할 수밖에 없다. 그 무수한 헛발질을 거쳐 공부하는 사람이 되어가는 것인데, 나는 자책과 자학 없이 이 과정을 통과하는 사람을 보지 못했다. 당시 유치원에 다니던 아이들은 엄마가 바쁜 때를 귀신 같이 알고 다치거나 아팠다. 그 시절 나는 조금만 삐끗해도 와르르 무너질 것 같은, 긴장감 넘치는 일상을 감당하지 못해 허덕였다. 지금도 그때를 생각하면 어깨가...
장르를 바꿔보자 -정세랑의 장편소설 『보건교사 안은영』(민음사, 2015년)을 처방합니다       워킹맘의 만성피로, SF 판타지 아니면 답이 없다   만성피로와 어깨 결림에 대한 처방전을 의뢰한 곰도리(닉네임)는 대안학교 과학교사이고, 아직은 엄마의 손이 많이 가는 초등학생 남매를 기르고 있다. 하루가 24시간이 아니라 48시간이거나, 육아도우미 AI가 개발되어 상용화되거나, 슈퍼 히어로급 초능력을 장착하지 않는다면, 이러한 조건에 놓인 사람이 만성피로를 호소하는 것은 너무나 당연한 일이다. SF 판타지가 아니면 현실에서는 답이 없다. 그래서일까? 곰도리와의 만남은 주객이 전도되어 그의 고충에 대한 의논보다 내 흑역사에 대한 하소연으로 더 많은 시간을 보냈다. 곰도리는 학생들에게 인기 많은 선생님이라는 소문대로 내 이야기를 잘 들어주었다.     그날 나는 아이 둘을 낳고 뒤늦게 대학원에 진학했던 삼십대의 날들이 떠올랐다. 말 그대로 석사과정생은 ‘과정’에 있는 사람이니, 용빼는 재주가 있지 않고는 자료검토든 글쓰기든 잘해낼 수가 없다. 그런데 교수님들은 가르쳐주는 것 없이 야단만 쳤고, 강의시간은 단체로 기합을 받는 시간 같았다. 석사과정 동안에는 아무리 정신을 바짝 차리고 준비해도, 공부에 대한 안목과 요령이 없기 때문에 ‘뻘짓’을 할 수밖에 없다. 그 무수한 헛발질을 거쳐 공부하는 사람이 되어가는 것인데, 나는 자책과 자학 없이 이 과정을 통과하는 사람을 보지 못했다. 당시 유치원에 다니던 아이들은 엄마가 바쁜 때를 귀신 같이 알고 다치거나 아팠다. 그 시절 나는 조금만 삐끗해도 와르르 무너질 것 같은, 긴장감 넘치는 일상을 감당하지 못해 허덕였다. 지금도 그때를 생각하면 어깨가...
겸목
2020.08.17 | 조회 534
겸목의 문학처방전
루틴의 ‘힘’ -나수경의 단편소설 「구르기 클럽」을 처방합니다     바닥을 칠 때, 알레르기가 찾아왔다 알레르기성 피부 발진에 대한 처방을 의뢰한 ‘루틴’(닉네임)은 6년차 직장인으로, 식물학 박사이고 관련 업체에 근무하고 있다. 루틴은 삼십대 후반의 싱글이며 회사에서 도보로 30분 거리에 있는 투룸에 살고 있다. 아침 6시쯤 일어나 식사를 준비하고 걸어서 출근한다. 예전에는 회사 아래 음식점에서 저녁식사까지 마치고 귀가했으나, 자극적인 식당음식이 몸에 좋지 않은 것 같아 최근에는 집에서 저녁밥을 지어 먹는다고 한다. 퇴근 후 밥상을 차리고 치우고 정리하다보면, 노곤함이 밀려와 일찍 잠자리에 들게 된다. 그러니까 현재 루틴은 안정된 직장이 있고, 일찍 자고 일찍 일어나는 일상생활이 가능한, 비교적 ‘건강한’ 직장인이다. 루틴의 라이프스타일은 커리어의 면에서나 워라밸의 면에서나 나쁘지 않다.   그러나 학위를 마치고 처음 직장생활을 시작할 때는 지금과 달랐다. 1년차 직장인의 연봉은 높지 않았고, 학위를 따느라 보내는 기간 동안 모아둔 돈도 없어 집을 구하는 일부터 쉽지 않았다. 부동산 중개인과 함께 형편에 맞는 집(방?)을 보러 돌아다닐 때, 루틴의 눈에는 일찍 결혼해서 평수를 늘려가고 인테리어를 바꿔가는 친구들의 아파트가 아른거렸다. 학교에 있는 동안에는 개인공간으로 기숙사 방이면 충분했고, 일이 안 풀릴 때는 옆방의 친구들과 고민상담하며 동료의식과 연대감을 느낄 수 있었다. 그런데 학교 기숙사의 인프라와 커뮤니티가 빠진 루틴의 현실은 박봉의 일인가구였다. 결혼한 친구들은 각자 나이에 맞게 인생의 규모를 키워가는(남편이든 자식이든 아파트 평수든) 상향곡선을 그리고 있는데, 자신만 하향곡선을 타고 있는 것 같아...
루틴의 ‘힘’ -나수경의 단편소설 「구르기 클럽」을 처방합니다     바닥을 칠 때, 알레르기가 찾아왔다 알레르기성 피부 발진에 대한 처방을 의뢰한 ‘루틴’(닉네임)은 6년차 직장인으로, 식물학 박사이고 관련 업체에 근무하고 있다. 루틴은 삼십대 후반의 싱글이며 회사에서 도보로 30분 거리에 있는 투룸에 살고 있다. 아침 6시쯤 일어나 식사를 준비하고 걸어서 출근한다. 예전에는 회사 아래 음식점에서 저녁식사까지 마치고 귀가했으나, 자극적인 식당음식이 몸에 좋지 않은 것 같아 최근에는 집에서 저녁밥을 지어 먹는다고 한다. 퇴근 후 밥상을 차리고 치우고 정리하다보면, 노곤함이 밀려와 일찍 잠자리에 들게 된다. 그러니까 현재 루틴은 안정된 직장이 있고, 일찍 자고 일찍 일어나는 일상생활이 가능한, 비교적 ‘건강한’ 직장인이다. 루틴의 라이프스타일은 커리어의 면에서나 워라밸의 면에서나 나쁘지 않다.   그러나 학위를 마치고 처음 직장생활을 시작할 때는 지금과 달랐다. 1년차 직장인의 연봉은 높지 않았고, 학위를 따느라 보내는 기간 동안 모아둔 돈도 없어 집을 구하는 일부터 쉽지 않았다. 부동산 중개인과 함께 형편에 맞는 집(방?)을 보러 돌아다닐 때, 루틴의 눈에는 일찍 결혼해서 평수를 늘려가고 인테리어를 바꿔가는 친구들의 아파트가 아른거렸다. 학교에 있는 동안에는 개인공간으로 기숙사 방이면 충분했고, 일이 안 풀릴 때는 옆방의 친구들과 고민상담하며 동료의식과 연대감을 느낄 수 있었다. 그런데 학교 기숙사의 인프라와 커뮤니티가 빠진 루틴의 현실은 박봉의 일인가구였다. 결혼한 친구들은 각자 나이에 맞게 인생의 규모를 키워가는(남편이든 자식이든 아파트 평수든) 상향곡선을 그리고 있는데, 자신만 하향곡선을 타고 있는 것 같아...
겸목
2020.07.09 | 조회 455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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