세미나 에세이 아카이브
유교, 새로운 인간학이 될 수 있을까 - 『문명들의 대화』 뚜웨이밍   뚜웨이밍(杜維明), 어디서 들었더라   학이당에서 한참 공부할 당시 유학의 흐름을 따라 주자를 거쳐 어찌어찌 왕양명의 『전습록』을 읽게 되었다. 그 때 문탁샘은 양명의 전기문으로 『한 젊은 유학자의 초상』이라는 책을 뽑으셨지만 아쉽게도 그 책이 절판인 고로 최재묵 교수님이 쓴 『내 마음이 등불이다』로 바꾸어 읽었다. 그런데 종종 왕양명이 등장하는 순간마다 문탁샘은 우리가 뚜웨이밍의 책을 읽었다고 기억하고 계신 듯하다.   “왜, 우리도 읽었잖아. 그 책 왕양명의 전기인데… 그 책 쓴 사람이잖아.” “……?”   그렇게 이름만 익숙한 뚜웨이밍, 아마도 그가 궁금은 한데, 그의 다른 책이 딱히 없어서 이 책, 『문명들의 대화』를 사지 않았나 싶다. 1940년생인 뚜웨이밍은 현대 신유가로 대표되는 지식인이다. 중국 윈난성(雲南省) 쿤밍시(昆明市)에서 태어나 타이완의 뚱하이(東海) 대학을 졸업하고 1968년 하버드에서 동아시아 역사 · 언어학으로 박사학위를 받았다. 하버드대 옌칭 연구소 소장을 역임했으며 현재는 중국 베이징대학교 고등인문연구원 원장을 맡고 있다. 『문명들의 대화』는 2000년 대 초 발행된 책으로 뚜웨이밍의 인터뷰, 강의록, 저널의 기고문 등을 모아서 만든 것이다. 따라서 ‘지은이의 말’에서도 밝히고 있듯이 이 글들은 중복되는 내용도 많고, 다소 산만하게 구성된 점도 없지 않다. 또 2000년 대 초에 쓰인 책이라 저자가 가지고 있는 문제의식이 이제는 철지난 것이 되어버린 면도 좀 있다. 더 최근 자료가 있을까 해서 인터넷을 찾아보니 “유학, 새로운 인간학이 될 수 있을까?”(2015년)라는 제목의 강연 영상을 볼...
유교, 새로운 인간학이 될 수 있을까 - 『문명들의 대화』 뚜웨이밍   뚜웨이밍(杜維明), 어디서 들었더라   학이당에서 한참 공부할 당시 유학의 흐름을 따라 주자를 거쳐 어찌어찌 왕양명의 『전습록』을 읽게 되었다. 그 때 문탁샘은 양명의 전기문으로 『한 젊은 유학자의 초상』이라는 책을 뽑으셨지만 아쉽게도 그 책이 절판인 고로 최재묵 교수님이 쓴 『내 마음이 등불이다』로 바꾸어 읽었다. 그런데 종종 왕양명이 등장하는 순간마다 문탁샘은 우리가 뚜웨이밍의 책을 읽었다고 기억하고 계신 듯하다.   “왜, 우리도 읽었잖아. 그 책 왕양명의 전기인데… 그 책 쓴 사람이잖아.” “……?”   그렇게 이름만 익숙한 뚜웨이밍, 아마도 그가 궁금은 한데, 그의 다른 책이 딱히 없어서 이 책, 『문명들의 대화』를 사지 않았나 싶다. 1940년생인 뚜웨이밍은 현대 신유가로 대표되는 지식인이다. 중국 윈난성(雲南省) 쿤밍시(昆明市)에서 태어나 타이완의 뚱하이(東海) 대학을 졸업하고 1968년 하버드에서 동아시아 역사 · 언어학으로 박사학위를 받았다. 하버드대 옌칭 연구소 소장을 역임했으며 현재는 중국 베이징대학교 고등인문연구원 원장을 맡고 있다. 『문명들의 대화』는 2000년 대 초 발행된 책으로 뚜웨이밍의 인터뷰, 강의록, 저널의 기고문 등을 모아서 만든 것이다. 따라서 ‘지은이의 말’에서도 밝히고 있듯이 이 글들은 중복되는 내용도 많고, 다소 산만하게 구성된 점도 없지 않다. 또 2000년 대 초에 쓰인 책이라 저자가 가지고 있는 문제의식이 이제는 철지난 것이 되어버린 면도 좀 있다. 더 최근 자료가 있을까 해서 인터넷을 찾아보니 “유학, 새로운 인간학이 될 수 있을까?”(2015년)라는 제목의 강연 영상을 볼...
진달래
2023.11.13 | 조회 245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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박세당의 장자 읽기 『남화경주해산보』   지난 번 <읽고쓰기 1234>에서 나는, 절대자유라는 키워드를 중심으로 도가철학의 관점에서 장자철학을 살펴보았다. 시즌4에서는 조선 유학자 박세당의 “장자 읽기”를 통해 유학자들이 어떻게 금서였던 “장자”에 접근하고 해석했는지 “장자의 도”를 중심으로 도가철학과 비교해보고자 한다.   박세당은 누구인가   내가 박세당에 대해 관심을 둔 이유는 요즘 한창 재미있게 보는 사극 <연인> 때문이다. 남우조연으로 나오는 남연준은 박세당과 비슷한 시기의 인물로서 “수찬”이라는 관직을 수행했다는 점까지 닮아있다. 그러나 이후 이 둘의 행보는 전혀 달랐다. 수찬은 경연을 담당하고 왕을 자문하는 역할과 더불어, 국가의 모든 편찬을 주관한다. 특히 <조선왕조실록>과 같은 역사서 편찬에도 참여한다. 드라마에서 남연준은 명과 주자학의 신봉자이자 의리와 지조를 중시하는 선비정신의 대표주자이다. 그러하기에 병자호란 당시 사절단(서장관)으로 청에 문안인사를 다녀오라는 인조의 명을 거절하고 투옥된다. 그렇다면 박세당은 어떠한가. 그는 32세에 등용되어 8년 여 간 관직생활을 지냈으며, 이때 수찬에 오르기도 한 인물이다. 그러나 당쟁으로 자식을 잃자 수락산 자락으로 들어가 수차례 벼슬을 내리는 왕명에도 불구하고 은둔 생활을 이어나갔다. 이때 『대학』, 『중용』, 『논어』, 『맹자』, 『상서』 등 각각의 해설서 『사변록』을 지었으며, 특히 『도덕경』과 『장자』의 해설서를 둘 다 지은 최초의 조선시대 유학자이다. 그의 아버지는 인조반정의 공신이었고, 그의 할아버지는 정2품을 지냈다. 비록 그는 이른 나이(4세)에 아버지를 잃고 가세가 기울어 등용이 늦어졌으나 대대로 명망가의 자손이라고 할 수 있다. 은둔생활 도중 그가 (1668년 혹은 1669년이라는 기록도 있다) 한 달여간 서장관의 자격으로 청의 수도...
박세당의 장자 읽기 『남화경주해산보』   지난 번 <읽고쓰기 1234>에서 나는, 절대자유라는 키워드를 중심으로 도가철학의 관점에서 장자철학을 살펴보았다. 시즌4에서는 조선 유학자 박세당의 “장자 읽기”를 통해 유학자들이 어떻게 금서였던 “장자”에 접근하고 해석했는지 “장자의 도”를 중심으로 도가철학과 비교해보고자 한다.   박세당은 누구인가   내가 박세당에 대해 관심을 둔 이유는 요즘 한창 재미있게 보는 사극 <연인> 때문이다. 남우조연으로 나오는 남연준은 박세당과 비슷한 시기의 인물로서 “수찬”이라는 관직을 수행했다는 점까지 닮아있다. 그러나 이후 이 둘의 행보는 전혀 달랐다. 수찬은 경연을 담당하고 왕을 자문하는 역할과 더불어, 국가의 모든 편찬을 주관한다. 특히 <조선왕조실록>과 같은 역사서 편찬에도 참여한다. 드라마에서 남연준은 명과 주자학의 신봉자이자 의리와 지조를 중시하는 선비정신의 대표주자이다. 그러하기에 병자호란 당시 사절단(서장관)으로 청에 문안인사를 다녀오라는 인조의 명을 거절하고 투옥된다. 그렇다면 박세당은 어떠한가. 그는 32세에 등용되어 8년 여 간 관직생활을 지냈으며, 이때 수찬에 오르기도 한 인물이다. 그러나 당쟁으로 자식을 잃자 수락산 자락으로 들어가 수차례 벼슬을 내리는 왕명에도 불구하고 은둔 생활을 이어나갔다. 이때 『대학』, 『중용』, 『논어』, 『맹자』, 『상서』 등 각각의 해설서 『사변록』을 지었으며, 특히 『도덕경』과 『장자』의 해설서를 둘 다 지은 최초의 조선시대 유학자이다. 그의 아버지는 인조반정의 공신이었고, 그의 할아버지는 정2품을 지냈다. 비록 그는 이른 나이(4세)에 아버지를 잃고 가세가 기울어 등용이 늦어졌으나 대대로 명망가의 자손이라고 할 수 있다. 은둔생활 도중 그가 (1668년 혹은 1669년이라는 기록도 있다) 한 달여간 서장관의 자격으로 청의 수도...
여울아
2023.11.13 | 조회 201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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  엄마를 돌보는 중이다 『어머니를 돌보다』(린 틸먼 지음, 방진이 옮김. 돌베개)를 읽고   일어나보니 5시 40분. 여느 때와 마찬가지로 30분쯤 명상을 하고 아래층으로 내려왔다. 엄마는 아직 주무시고 계신다. 살펴보니 오른쪽 손이 많이 부어 고무장갑 손가락처럼 팽팽하다. 손가락을 주무른 후 주무시고 있는 엄마 몸을 왼쪽으로 돌려본다. 혹시나 좀 나을까 하고. 엄마 식사준비를 해놓고 가보니 일어나시려는 중이다. 요즘 들어 일어나고 걷는 게 더 힘들어지셨다. 가능하면 혼자 하실 수 있게 기다리는데, 이제는 거의 혼자 하기는 힘들다. 부축을 해서 몸을 일으켜 세워도 제대로 앉아있지를 못하신다. 한 팔로 등을 받치고 다른 팔로 다리를 침대에서 내린다. 엄마 팔 아래에 내 팔을 넣고 부축해 일어나게 한 후 보행기에 의지해 화장실로 간다. 화장실 입구에서 보행기를 치우고 여기저기 부착해놓은 손잡이를 잡고 변기까지 가서 겨우 앉으신다. 그 모든 과정에 내가 손을 놓으면 안 된다. 화장실에서 나와 보행기를 잡으려는 순간 엄마가 주저 않으셨다. 내가 한 팔을 붙잡고 있어서 다행히 넘어지지는 않았는데 내 허리에 충격이 왔다. 나도 주저앉았다. 엄마가 뒤로 넘어지지 않게 붙잡고 앉아서 잠시 쉬었다가 뒤에서 껴안고 다시 일으켜 세웠다. 내 몸을 벽에 기대야 가능한 일이다. 뒤에서 엄마를 붙잡고 종종걸음으로 식탁까지 왔다.   엄마랑 함께 산지 4년째고, 파킨슨과 치매 진단을 받은 건 2년이 좀 지났다. 처음에는 엄마와의 관계에서 이런 저런 이유로 감정처리 때문에 힘들었고 병에 대한 이해, 엄마와 나에 대한 이해를...
  엄마를 돌보는 중이다 『어머니를 돌보다』(린 틸먼 지음, 방진이 옮김. 돌베개)를 읽고   일어나보니 5시 40분. 여느 때와 마찬가지로 30분쯤 명상을 하고 아래층으로 내려왔다. 엄마는 아직 주무시고 계신다. 살펴보니 오른쪽 손이 많이 부어 고무장갑 손가락처럼 팽팽하다. 손가락을 주무른 후 주무시고 있는 엄마 몸을 왼쪽으로 돌려본다. 혹시나 좀 나을까 하고. 엄마 식사준비를 해놓고 가보니 일어나시려는 중이다. 요즘 들어 일어나고 걷는 게 더 힘들어지셨다. 가능하면 혼자 하실 수 있게 기다리는데, 이제는 거의 혼자 하기는 힘들다. 부축을 해서 몸을 일으켜 세워도 제대로 앉아있지를 못하신다. 한 팔로 등을 받치고 다른 팔로 다리를 침대에서 내린다. 엄마 팔 아래에 내 팔을 넣고 부축해 일어나게 한 후 보행기에 의지해 화장실로 간다. 화장실 입구에서 보행기를 치우고 여기저기 부착해놓은 손잡이를 잡고 변기까지 가서 겨우 앉으신다. 그 모든 과정에 내가 손을 놓으면 안 된다. 화장실에서 나와 보행기를 잡으려는 순간 엄마가 주저 않으셨다. 내가 한 팔을 붙잡고 있어서 다행히 넘어지지는 않았는데 내 허리에 충격이 왔다. 나도 주저앉았다. 엄마가 뒤로 넘어지지 않게 붙잡고 앉아서 잠시 쉬었다가 뒤에서 껴안고 다시 일으켜 세웠다. 내 몸을 벽에 기대야 가능한 일이다. 뒤에서 엄마를 붙잡고 종종걸음으로 식탁까지 왔다.   엄마랑 함께 산지 4년째고, 파킨슨과 치매 진단을 받은 건 2년이 좀 지났다. 처음에는 엄마와의 관계에서 이런 저런 이유로 감정처리 때문에 힘들었고 병에 대한 이해, 엄마와 나에 대한 이해를...
인디언
2023.11.06 | 조회 390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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공동체에서 철학하기 『고대 철학이란 무엇인가』 피에르 아도   서양철학 공부와 1234 내가 서양철학을 공부하고 싶다는 생각이 든 것은 아주 우연한 계기였다. 작년 문탁2층 운영위원들이 공통감각을 키우고자 함께 했던 비전세미나 대신 철학학교 세미나에서 『차이와 반복』을 읽었다. 그 때 서양철학에 대한 어떤 지식도 없이, 고대와 중세의 철학도 전혀 모르면서 현대 철학을 읽자니 정말 죽을 맛이었다. 그동안 나는 어떤 공부를 하든지 크게 상관하지 않는 편이었다. 그저 문탁에 왔더니 많은 사람들이 동양고전을 공부하고 있었고, 따라서 하다 보니 어찌어찌 시간이 흘렀을 뿐이다. 그리고 사실 실천학문으로서 유가는 매우 훌륭하다고 생각했고, 이것도 제대로 못하면서 다른 공부까지 기웃대는 건 지식확장에 대한 욕망일 뿐이라고 여겼다. 그런데 들뢰즈를 읽으면서 이건 욕망의 문제가 아니라 아느냐 모르느냐의 문제였고, 내가 앞으로 계속 문탁에서 공부를 하려면 서양철학도 어느 정도는 공부해야겠다는 생각이 들었다. 언제 다시 들뢰즈 세미나를 했던 것처럼 날벼락이 떨어질지 모르니까, 유비무환!   마침 올해 철학입문 세미나가 생겨 서양철학사를 훑어볼 수 있었고 결론적으로 아주 잘한 선택이었다. 거기다가 공부방 회원들의 읽고 쓰기 프로그램인 1234를 통해 고대 철학 원전들을 같이 읽다보니 서양철학사를 공부하는데 도움이 되기도 했다. 원래 계획은 올해 1234에서 플라톤, 아리스토텔레스, 에피쿠로스, 스토아의 원전을 한 권씩 읽는 것이었다. 이번에는 스토아 철학을 읽을 차례였는데, 마지막이기도 해서 『고대 철학이란 무엇인가』를 읽고 일단 한 번 정리를 해보고 싶었다.   이 책의 저자 피에르 아도는 한마디로 고대 철학을 ‘생활양식’으로...
공동체에서 철학하기 『고대 철학이란 무엇인가』 피에르 아도   서양철학 공부와 1234 내가 서양철학을 공부하고 싶다는 생각이 든 것은 아주 우연한 계기였다. 작년 문탁2층 운영위원들이 공통감각을 키우고자 함께 했던 비전세미나 대신 철학학교 세미나에서 『차이와 반복』을 읽었다. 그 때 서양철학에 대한 어떤 지식도 없이, 고대와 중세의 철학도 전혀 모르면서 현대 철학을 읽자니 정말 죽을 맛이었다. 그동안 나는 어떤 공부를 하든지 크게 상관하지 않는 편이었다. 그저 문탁에 왔더니 많은 사람들이 동양고전을 공부하고 있었고, 따라서 하다 보니 어찌어찌 시간이 흘렀을 뿐이다. 그리고 사실 실천학문으로서 유가는 매우 훌륭하다고 생각했고, 이것도 제대로 못하면서 다른 공부까지 기웃대는 건 지식확장에 대한 욕망일 뿐이라고 여겼다. 그런데 들뢰즈를 읽으면서 이건 욕망의 문제가 아니라 아느냐 모르느냐의 문제였고, 내가 앞으로 계속 문탁에서 공부를 하려면 서양철학도 어느 정도는 공부해야겠다는 생각이 들었다. 언제 다시 들뢰즈 세미나를 했던 것처럼 날벼락이 떨어질지 모르니까, 유비무환!   마침 올해 철학입문 세미나가 생겨 서양철학사를 훑어볼 수 있었고 결론적으로 아주 잘한 선택이었다. 거기다가 공부방 회원들의 읽고 쓰기 프로그램인 1234를 통해 고대 철학 원전들을 같이 읽다보니 서양철학사를 공부하는데 도움이 되기도 했다. 원래 계획은 올해 1234에서 플라톤, 아리스토텔레스, 에피쿠로스, 스토아의 원전을 한 권씩 읽는 것이었다. 이번에는 스토아 철학을 읽을 차례였는데, 마지막이기도 해서 『고대 철학이란 무엇인가』를 읽고 일단 한 번 정리를 해보고 싶었다.   이 책의 저자 피에르 아도는 한마디로 고대 철학을 ‘생활양식’으로...
토용
2023.11.05 | 조회 385
세미나 에세이 아카이브
고라니의 얼굴을 본 적이 있나요? 문선희,「이름보다 오래된」을 읽고     알지도 못하면서   반촌(半村) 생활을 하면서 관계 맺게 된 비인간 동물들은 도처에 있다. 두더지, 너구리, 고양이, 쥐, 멧돼지, 고라니, 뱀, 계곡의 물살이, 그리고 각종 곤충들. 그들 중에 내가 특별히 관심을 두게 된 종이 있다면 그 이유는 틀림없이 우리 사이에 있는 불편하고 두려운 어떤 감정 때문일 것이다. 하지만 나는 그들에게 잘 지내보자는 화해의 마음을 내어본 적은 없다. 내가 시도하고 궁금했던 것은 그들을 피하거나 내쫓거나 없애는 방법. 그나마 피하는 정도면 평화롭다. 가끔은 생포하거나 죽이는 방법들도 궁리했다. 이들은 나의 건강을 위협하며 농사를 어렵게 하기에 어쩔 수 없었다.   뱀을 쫓기 위해 떠돌이 산속 고양이들을 사료로 유인하여 우리 집 근처에 살도록 하고, 집 둘레는 백반으로 결계를 쳤다. 불청객들이 실내로 들어오지 못하도록 살충제는 언제든 손이 닿기 쉬운 곳에 두었다. 그럼에도 불구하고 나와 남편이 해답을 찾지 못한 것은 멧돼지, 고라니, 두더지. 이 녀석들은 번갈아 가며 우리 살림과 밭작물과 과실수들에 큰 해를 끼쳤다. 특히 올해는 고라니가 그 역할을 단단히 했다.   고라니는 해마다 빌런이 아니었던 적이 거의 없다. 항상 잔잔하게 우리의 농사를 방해해왔다. 나보다 더 콩잎에 환장하는 고라니 때문에 콩 농사는 반촌 첫해부터 포기했다. 녀석들은 녹즙 해먹을 기대로 사다 심은 비싼 와송을 흔적 하나 남기지 않고 먹어 버리기도 했다. 고라니를 막기 위한 울타리를 쳐도 허술한 구석을 용케...
고라니의 얼굴을 본 적이 있나요? 문선희,「이름보다 오래된」을 읽고     알지도 못하면서   반촌(半村) 생활을 하면서 관계 맺게 된 비인간 동물들은 도처에 있다. 두더지, 너구리, 고양이, 쥐, 멧돼지, 고라니, 뱀, 계곡의 물살이, 그리고 각종 곤충들. 그들 중에 내가 특별히 관심을 두게 된 종이 있다면 그 이유는 틀림없이 우리 사이에 있는 불편하고 두려운 어떤 감정 때문일 것이다. 하지만 나는 그들에게 잘 지내보자는 화해의 마음을 내어본 적은 없다. 내가 시도하고 궁금했던 것은 그들을 피하거나 내쫓거나 없애는 방법. 그나마 피하는 정도면 평화롭다. 가끔은 생포하거나 죽이는 방법들도 궁리했다. 이들은 나의 건강을 위협하며 농사를 어렵게 하기에 어쩔 수 없었다.   뱀을 쫓기 위해 떠돌이 산속 고양이들을 사료로 유인하여 우리 집 근처에 살도록 하고, 집 둘레는 백반으로 결계를 쳤다. 불청객들이 실내로 들어오지 못하도록 살충제는 언제든 손이 닿기 쉬운 곳에 두었다. 그럼에도 불구하고 나와 남편이 해답을 찾지 못한 것은 멧돼지, 고라니, 두더지. 이 녀석들은 번갈아 가며 우리 살림과 밭작물과 과실수들에 큰 해를 끼쳤다. 특히 올해는 고라니가 그 역할을 단단히 했다.   고라니는 해마다 빌런이 아니었던 적이 거의 없다. 항상 잔잔하게 우리의 농사를 방해해왔다. 나보다 더 콩잎에 환장하는 고라니 때문에 콩 농사는 반촌 첫해부터 포기했다. 녀석들은 녹즙 해먹을 기대로 사다 심은 비싼 와송을 흔적 하나 남기지 않고 먹어 버리기도 했다. 고라니를 막기 위한 울타리를 쳐도 허술한 구석을 용케...
도라지
2023.11.05 | 조회 356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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