장애, 세상을 다르게 바라보는 시선 / 모로

문탁
2023-12-31 10:03
115

 

 

혼자 걷고 있는 아이의 뒷모습을 본다. 나란히 걷고 있을 때는 다른 사람들과 그렇게 다르지 않다고 생각하다가도, 혼자서 저 멀리 걸어가는 아이의 모습을 보고 있자면, 다르다 싶다. 왼쪽이나 오른쪽, 한쪽으로 걸어가는 사람들과는 달리 아이는 갈지자로 왔다 갔다 걷는다. 갑자기 달려나갈 때도 있고, 갑자기 멈추기도 하며, 다른 사람들과 바짝 붙어서 걸어갈 때도 있다. 예측이 불가능하다. 더 어릴 때는 그 모습을 보면 꼭 차에 치일 것만 같아서 불안했다. 하지만 지금은 저러다 대충 서겠지 싶어서 놔둔다. 저만큼 앞서서 달려가다가도 건널목이나 갈림길 사이에서는 멈춰서 기다리니까. 옆을 보면서 걷고, 심지어 하늘을 보면서 걸어도 아직은 누군가와 크게 부딪히거나 어디에 빠진 적은 없다. 이쯤 하면 눈이 뒤통수에도, 옆통수에도 달린 건 아닐까 싶다. 아이의 장애를 알게 된 후로 나는 줄곧 되묻는다. 장애란 무엇일까? 다른 사람들과 뭔가가 다르단 의미일까. 그렇다면 기준은 어디에 있을까. 이러한 의문을 가지고 수나우라 테일러의 『짐을 끄는 짐승들』과 만났다. 이 책은 강렬하게 나의 의식을 때렸다.

 

“저기요. 장애는 예술이거든요? 삶을 사는 독창적인 방식이라고요!”

 

 

장애는 손상이 아니라, 사회가 구성하는 방식

 

장애인은 많다. 세계인구의 무려 15~20%나 차지한다. 하지만 우리는 일상에서 장애인들을 만나기가 어렵다. 장애인들은 격리된 시설에서 살아가는 경우가 많고, 고립되어있기 때문이다. 이는 장애를 개인적인 비극으로 생각하기 때문인데, 장애인들은 사회로 나가는 대신 고립되는 편을 택한다. 하지만 장애를 보이는 부분 만이 아니라 만성적인 질병, 장거리 보행이 어려운 경우, 체중의 부적합함의 문제 등까지 포함한다면 어떨까. 장애는 각종 기관의 내부 규정에 따라 달라짐으로 사회적 요인에 따라 계속 변한다. 그러므로 장애는 의료문제가 아니라 사회문제이며, 손상이 아니라 사회가 구성되는 방식에서 비롯된다. 건물을 출입하거나 거리의 낮은 보도블럭을 넘지 못하는 사소한 문제들이 장애를 만든다. 사회의 많은 부분이 비장애중심주의로 설계되어 장애인들을 돌봄이 필요한 존재로 만들기 때문이다.

 

비장애중심주의적 관점은 우리가 동물을 대할 때 명확하게 드러난다. 동물은 인간의 필요에 의해 개량되고, 효용성이 없어졌다고 생각되면 도축된다. 성장 위주의 사회에서 쓸모가 없다고 생각되는 것들은 폐기되고, 인간의 필요에 따라 변형되어도 좋다고 생각하는 인간중심주의의 생각에서 나온 결과다. 특히 지능은 인간이 만든 지표다. 하지만 이를 이용해 동물을 인간보다 열등한 존재로 만든다. 동물은 말하고 싶은 것을 ‘언어’로 말하지 않을 뿐 다른 방식으로 자신의 의사를 표현한다. 이는 장애의 경우에서도 비슷하다. 언어를 이해하지 못하는 사람이라고 해도, 다른 방식으로 자신을 돌보거나 변호할 수 있다. 그러므로 장애는 고통이며, 자연스럽지 않은 것이라고 구분하는 것은 옳지 않다. 우리 너머에는 다양한 세상이 있는데, 인간중심적인 세계관 탓에 그 너머의 것들을 놓친다. 저자는 계속해서 타자의 삶을 이해하고 무언가를 배우려는 시도를 멈춰서는 안 된다고 말한다.

 

 

 

 

장애를 바라보는 두 가지 시선

 

불구의 시간(crip time)이란 많은 사람들에게 많은 것을 의미하는데, 우리가 서로 다른 속도로 살고 있고 우리의 시간 감각이 경험과 능력에 의해 만들어진다는 점을 인정하는 것이다. 시간은 상대적이다. (중략) 옷을 입거나, 식사를 준비하거나, 이야기하는 것과 같은 일상적인 과업을 수행하는데 더 많은 시간이 걸리는 우리에게 시간이 온전히 달라질 수 있다면, 극심한 지적 차이를 가진 사람들이나 매우 다양한 동물들의 시간은 어떻게 다시 개념화될 수 있을까? (중략) 싱어의 시간 개념은 진보와 미래 지향적인 목적이라는 서구의 통념에 기초하는 반면, 불구의 시간이라는 개념은 우리로 하여금 시간이란 가변적이며 실제로 우리의 신체 형태와 함께 바뀌고 있다고 문제제기 하도록 한다. (『짐을 끄는 짐승들』, 232p)

 

피터 싱어는 공리주의 철학자로 그의 대표적인 저서는 『동물 해방』이다. 그는 동물 권리문제를 철학의 주요 담론으로 만들었다. 하지만 그는 장애를 가지고 사는 것을 ‘문제적인 방식’으로 판단했기 때문에 많은 장애인의 비판도 받는다. 장애를 부정적인 것으로, 비극으로, 결여로 생각한다. 이는 미국은 물론 다른 많은 곳의 지배적인 생각이기도 하다. 그러므로 공리주의 관점에서 왜 장애가 바람직하지 않고 피해야 할 것으로 간주하는지 이해하기란 어렵지 않을 것이다.

 

테일러는 2012년 버클리를 방문했을 때 피터 싱어를 직접 만났다. 둘은 서로 만나 장애가 사회와 개인에게 미치는 영향에 관한 이야기를 나누지만, 소통의 한계에 부딪힌다. 테일러는 이렇게 묻는다. “당신이 보기에는 우리가 그저 자기 자신을 속이고 있는 건가요? 우리는 좋지 않은 상황에서 그저 최선을 다하고 있는 건가요?” 싱어는 이렇게 답한다. “저는 사람들이 제게 그런 이야기를 하면 이렇게 물어요. 모든 장애를 치유할 수 있고, 그 비용도 겨우 2달러에 부작용도 전혀 없는 알약을 준다면, 그 알약을 사용하지 않겠다는 말인가요? 저는 거의 대부분의 사람들이 그 알약을 사용할 거라고 생각합니다.” 테일러는 대부분의 장애인은 그렇지 않을 거라고 대답한다. 그것에 대한 답변으로 자기가 가진 창조성에 대해 언급한다. “장애는 이 세계와 소통하는 완전히 새로운 방법을 알려줍니다.” 장애가 단순히 결핍이 아니라는 것, 반드시 효율성, 진보, 자립. 이성을 중심에 두지 않는 삶의 방식들에서 가치를 찾도록 추구한다고. 장애는 해방적일 수도, 신나는 일일 수도, ‘정상적이기’를 요구하는 사회에서 벗어나는 자유의 장소일 수도 있다고 답한다. 대게 장애는 장애인들의 삶에 스며들어 그 일부가 된다. 이것이 장애를 항상 꼭 즐긴다는 뜻은 아니다. 장애는 삶의 가장 결정적인 요소가 아니며, 단지 함께 살아가고 있다는 뜻이다.

 

익숙한 세계를 다르게 바라보는 방법

 

나는 내 형상 속에서 동물을 느낀다. 이 느낌은 교감의 일종이지 수치심이 아니다. 나의 동물성을 인식한다는 것은 내 몸이나 다른 비규범적이고 상처 입기 쉬운 몸들이 자신의 주변 세계를 움직이고, 보고, 경험하는 방식으로 존엄성을 주장하는 것이었다. 그것은 나의 동물화된 부위와 움직임에 대한 주장이고, 내 동물성이 내 인간성에 필수적이라는 주장이다. 비유적으로 말하려는 게 아니다. 이는 우리가 동물 같다거나 동물이라는 관념이 “우리가 누구인지”를 정의하기 위한 필수 요소라는 뜻이 아니다. 물론 두 주장 모두 맞지만 말이다. 내가 말하고자 하는 바는 우리가 바로 동물이라는 것이다. 이것은 지루할 정도로 당연하지만 우리가 끊임없이 잊어버리는 사실이다. (『짐을 끄는 짐승들』, 208p)

 

 

 

 

 

테일러의 작품 중 ‘해우로서의 자화상’이 있다. 뭉툭한 두 손과 굽은 관절을 가진 여성이 바다 동물과 함께 허공에 떠 있다. 무게가 느껴지지 않는 듯한 두 생명체는 모습이 서로 닮았다. 바다인 듯 보이나 물결도 거품도 없이 잔잔하다. 불편하기보다는 편안한 모습이다. 테일러에게 있어 ‘불구’란 부정적인 단어가 아니다. 자신을 동물로 표현함으로써 그림에 상상력을 부여한다. 또 다른 작품을 보면 굽은 손이 그려져 있다. 아주 익숙하면서도 어디인지가 낯선 이 손은 이상하기보다는 단단해 보인다. 테일러의 작품은 익숙한 우리들의 사고에 균열을 낸다. 그리고 묻는다. “당신은 언제 어디쯤에서 스스로를 인간이라 부를 수 있는가. 언제나 인간으로만 식별되고 싶은가.”라고.

 

생각해본다. 나는 아이에게 모든 장애를 치료할 수 있는 알약을 먹일 것인가. 아이의 장애가 긍정적인 효과가 있었을까. 수도 없이 학교 적응에 문제가 있었던 나날들, 익숙한 발달 단계에서 벗어난 아이를 키우는 일, 아직도 친구와의 생활이 매끄럽지 않은 아이다. 하지만 종종, 아니 자주 나는 아이의 번뜩임과 사랑스러움에 빠졌다. 늘 ‘왜’라고 묻는 말 속에서는 세상을 다르게 바라보는 시선이 있었고, 내가 당연하게 생각하던 일상들에 틈을 내고 잠시 생각하게 했다. 여행을 가더라도 아이는 풍경 대신 그 나라의 신호등이나 표지판의 차이점부터 본다. 각기 다른 언어와 문자, 기호체계를 신기해하고 관찰한다. 새로운 가전제품이나 장난감을 사더라도 설정을 가장 먼저 살펴본다. 그리곤 만든 사람 빼고 아무도 모를 거 같은 정말로 낯선 기능들을 찾아낸다. 또한 언어가 가진 미묘한 차이를 발견하는 것도 좋아한다. 어제는 뉴스에서 폐렴이 유행이라는 기사가 나왔는데 그걸 보더니 아이가 말했다. “엄마, 폐렴은 왜 폐염이 아니고 폐렴이에요? 다른 건 다 간염, 피부염 다 ‘염’인데요. 두음법칙의 파괴라면 폐암도 폐람이 되어야 하지 않나요?” 폐렴이라는 단어를 40년간 들으면서 한 번도 해보지 못했던 생각이었다.

 

 

하지만 자폐 스펙트럼이 가진 가장 큰 문제인, 사회성을 생각해본다. 이 아이들은 다른 사람들과 관계를 맺고 싶지 않은 것이 아니다. 다만 소통하는 방식이 매우 다르므로 아이의 케이스마다 개개별로 다른 소통의 창구를 찾아내야 한다. 장애를 다른 시선으로 보기에는 어마어마한 돈이 들어간다. 엄마들을 아이의 장애를 인지한 순간부터 ‘정상’으로 만들기 위해서 시간과 돈을 투자한다. 하지만 이것은 정말 아이를 위한 것이었을까. 내가 생각하는 ‘정상’의 범위로 아이를 만들고 싶어 했던 욕망 아니었을까. 이렇게 많은 시간을 들여서 겨우 다른 아이들이 평범하게 해 나가는 것 (젓가락질하기, 학교 책상에 잘 앉아있기, 질문하고 대답하기)를 습득하는 것은 비장애중심주의인가. 아니다. 이건 아이를 이해하고, 함께 살기 위한 나의 노력이었다. 그렇게라도 타인과의 소통을 배우지 않는다면 어떻게 다른 사람들과 함께 살아갈 수 있을까에 대한 고민이었다. 테일러의 말대로 우리가 문제시해야 하는 것은 장애를 치료하나 마냐의 문제가 아니다. 장애가 객관적으로 바람직하지 않으며, 그게 합리적이라고 생각하는 뿌리 깊고 만연한 전제 자체다.

 

우리는 서로에게 얽혀있는 존재

 

테일러는 활동 보조견이자 반려견으로 보호소의 개를 입양한다. 입양한 개 베일리는 사람들이 생각하는 전형적인 보조견이 아니다. 신체를 보조하는데 전혀 도움이 되지 않기 때문이다. 하지만 베일리는 함께 세상 속을 헤쳐갈 때 사회적 윤활 작용을 해준다. 불편하고 어찌해야 할지 모르는 시선을 부드럽게 만든다. 하지만 베일리는 곧 짧은 다리와 긴 몸통 탓에 신체적 장애를 가지게 된다. 베일리는 소중한 존재지만 동시에 아이러니함을 함께 가지고 있다. 처음에는 삶을 편안하게 해줄 개를 원했지만 결국에는 장애견과 함께 있게 된 것이다. 테일러 역시 가끔은 베일리의 척추 몇 마디를 제거해버릴 수 있다면 좋겠다고 생각한다. ‘치료하고’ 싶어 하는 자신을 깨닫는다. 하지만 대부분의 경우 비효율적이고 능력 없는 인간이 비효율적이고 불구인 개를 돕고 서로 도움을 받는다는 사실이 아름답다고 느낀다.

 

 

 

우리 가족도 반려묘와 함께 산다. 아름답고도 비싼 품종묘인 이 고양이는 러시아에서 배를 타고 한국으로 왔다. 그리고는 오랜 시간 동안 펫샵에 전시돼 있었다고 한다. 첫 번째 주인에게 팔린 뒤 새끼를 낳아 팔고자 했던 욕망이 좌절되자 버려졌다. 그 뒤로 두 번째, 세 번째 주인을 거쳐 우리 가족이 되었다. 고양이와 함께 사는 일은 ‘쓸모’가 있는 일일까. 반짝이는 금빛 눈과 풍성한 털을 가진 이 고양이도 내년에는 10살이 된다. 이제는 아름다운 시절이 지나가고 늙고 병드는 일만 남았을지도 모른다. 그렇기 때문에 무의미한가. 고양이에게는 과거도, 미래의 관념도 없다고 한다. 단지 현재만을 사는 동물. 나는 고양이의 나른한 그루밍을 보고 있으면 편안함을 느낀다. 산책을 하지도, 새로운 곳을 가고 싶어 하지 않으면서도 매일매일 똑같은 일상을 즐긴다. 그리곤 집의 이곳저곳을 누비면서 바쁜 남편과 아스퍼거 아들 사이에 다리를 놓는다. 집에 돌아오면 가장 반갑게 뒤집어져서 반기고, 털을 뿜으며 존재를 각인시키고, 잠자는 내 옆구리를 파고들기 위해 번번이 잠을 깨운다. 늦게 일어나면 ‘앙앙’거리면서 잔소리하고, 화장실이 더러우면 똥 한 덩이를 내가 다니는 길목에 놓아둔다. 우리가 키우는 것이 아니라, 고양이도 우리를 길들였다. 함께 지내면서 천천히 ‘언어’가 아니라 다른 방법으로 소통하는 방법을 배웠다. 서로 다른 우리 가족이 어울려서 살아가는 데는 무엇이 가장 필요했을까. 그건 서로 다른 방식으로라도 소통하고 싶어하는 관심이 아닐까 싶다.

댓글 1
  • 2024-01-19 10:08

    글이 너무 좋아요 모로샘 🙂
    삶을 대하는 독창적인 방식의 예술
    이라는 말이 참 와닿네요

인문약방 에세이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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2023.12.31 | 조회 115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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문탁
2023.12.18 | 조회 126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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2023.12.18 | 조회 231
인문약방 에세이
    1. “무언가 대단히 잘못된 일”   『짐을 끄는 짐승들』의 저자는 관절굽음증이라는 장애를 갖고 있는 예술가 수나우라 테일러이다. 수나우라와 형제들은 어린 시절 닭들을 층층이 쌓아 싣고 빠르게 지나가는 거대한 트럭을 바라보며 끔찍하다는 생각을 했다. 지독한 냄새를 피하기 위해 숨을 참으며 “무언가 대단히 잘못된 일이 일어나고 있음을” 느꼈다. 그 후 이 문제가 그를 사로잡은 것은 미술학 석사학위를 받기 위해 대학원에 진학하고 나서다. “무언가 대단히 잘못된 일”은 공장식 축산으로 동물들이 불구가 되고, 그 산업에 말도 안 되는 저임금을 받는 이주노동자들이 동물들과 같이 갇혀 일한다는 사실이었다. 축산과 도축 노동자들은 과로, 스트레스, 트라우마로 심신의 장애를 입거나 장애를 입은 채 해고된다. 그 자리는 또 다른 저임금노동자들에 의해 쉽게 대체된다. 수나우라는 장애인 당사자로서 전자레인지, 패스트푸드점, 조리 식품의 효율성이 장애인, 노인, 저소득층의 사람들에게 도움을 준다는 것을 실감한다. 동시에 산업화된 음식 시스템이 남용되는 현실과 그 부적절성에 대해 문제제기해야 한다는 사실도 의식하고 있다. 식사때마다 반복되는 수나우라의 딜레마는 우리의 일상에도 적용된다. 공장식 축산과 불안정한 노동과 건강불평등과 신자유주의는 촘촘히 연결되어 있다.   수나우라는 이 책에서 장애와 동물을 교차시킨다. 종종 장애와 동물은 서로의 알리바이로 악용되어 왔다. 장애에 대한 폄하의 표현으로 ‘동물 같다’, ‘동물만 못하다’는 수사가 관용적으로 사용되어 왔고, 일부 동물권 활동가들은 ‘언어/인지’ 능력이 떨어지는 장애인들보다 ‘쾌고감수능력’을 갖는 동물을 돌보는 일을 우선해야 한다는 위계를 세우기도 한다. 수나우라는 우선, 우리가 장애와 동물에 대해...
    1. “무언가 대단히 잘못된 일”   『짐을 끄는 짐승들』의 저자는 관절굽음증이라는 장애를 갖고 있는 예술가 수나우라 테일러이다. 수나우라와 형제들은 어린 시절 닭들을 층층이 쌓아 싣고 빠르게 지나가는 거대한 트럭을 바라보며 끔찍하다는 생각을 했다. 지독한 냄새를 피하기 위해 숨을 참으며 “무언가 대단히 잘못된 일이 일어나고 있음을” 느꼈다. 그 후 이 문제가 그를 사로잡은 것은 미술학 석사학위를 받기 위해 대학원에 진학하고 나서다. “무언가 대단히 잘못된 일”은 공장식 축산으로 동물들이 불구가 되고, 그 산업에 말도 안 되는 저임금을 받는 이주노동자들이 동물들과 같이 갇혀 일한다는 사실이었다. 축산과 도축 노동자들은 과로, 스트레스, 트라우마로 심신의 장애를 입거나 장애를 입은 채 해고된다. 그 자리는 또 다른 저임금노동자들에 의해 쉽게 대체된다. 수나우라는 장애인 당사자로서 전자레인지, 패스트푸드점, 조리 식품의 효율성이 장애인, 노인, 저소득층의 사람들에게 도움을 준다는 것을 실감한다. 동시에 산업화된 음식 시스템이 남용되는 현실과 그 부적절성에 대해 문제제기해야 한다는 사실도 의식하고 있다. 식사때마다 반복되는 수나우라의 딜레마는 우리의 일상에도 적용된다. 공장식 축산과 불안정한 노동과 건강불평등과 신자유주의는 촘촘히 연결되어 있다.   수나우라는 이 책에서 장애와 동물을 교차시킨다. 종종 장애와 동물은 서로의 알리바이로 악용되어 왔다. 장애에 대한 폄하의 표현으로 ‘동물 같다’, ‘동물만 못하다’는 수사가 관용적으로 사용되어 왔고, 일부 동물권 활동가들은 ‘언어/인지’ 능력이 떨어지는 장애인들보다 ‘쾌고감수능력’을 갖는 동물을 돌보는 일을 우선해야 한다는 위계를 세우기도 한다. 수나우라는 우선, 우리가 장애와 동물에 대해...
문탁
2023.12.18 | 조회 110
인문약방 에세이
    그 어떤 죽음이 안타깝지 않을 수 있으랴. 하지만 죽은 자에게도 산 자에게도 가장 담담할 죽음은 없을까 생각해 본다. 내가 그 순간을 선택할 수 있다면 늘 하던 일을 하다가, 그냥 스르르 가는 것이겠다. 서재에서 책을 보다가, 침대에서 잠을 자다가, 노병이 겹쳤다면 딸, 아들에게 마지막 인사를 하다가 그렇게 가면 좋겠다. 마치 잠을 자듯, 꿈을 꾸듯. 사랑하는 사람들 곁에서 큰 소란 없이 가는 길. 그렇게 갈 수 있으면 좋겠다.     1. 폴: 용기 있는 죽음   『숨결이 바람 될 때』에서 폴 칼라니티는 자신이 암인 걸 알고도 삶의 방향을 급선회하거나 멈추지 않고, 암이 아니었으면 계속했을 그런 삶을 살 수 있음을 보여주었다. ‘죽음이 올 때까지 멈추지’(『숨결이 바람 될 때』, 폴 칼라니티, 흐름출판, 145쪽) 않고 신경 외과의로서, 작가로서, 아버지로서, 남편으로서의 삶을 살아내었다.   폴이 폐암 진단을 받았을 때 처음에는 아내 루시와 함께 울었다. 아내에게 재혼을 권하고, 담보대출을 이자가 적은 곳으로 바꾸라고 하고, 레지던트 근무 복귀 계획을 언급하는 동료의 말을 막았다. 의사로 일하는 동안 그에게 익숙했던 죽음은 막상 자신의 것이 되었을 때는 정체를 알 수 없는 것이 되었다. 누군들 그렇지 않으랴. 태어남과 동시에 죽음은 정해져 있지만 누구도 자신의 것이라고는 생각하지 못한다. 심지어 주변 사람의 죽음조차 받아들이는 데는 긴 시간이 걸린다. 죽음 앞에서는 자신이 가장 비극적인 사람이 된다. 하지만 폴은 남은 시간을 비극의 주인공으로 살지...
    그 어떤 죽음이 안타깝지 않을 수 있으랴. 하지만 죽은 자에게도 산 자에게도 가장 담담할 죽음은 없을까 생각해 본다. 내가 그 순간을 선택할 수 있다면 늘 하던 일을 하다가, 그냥 스르르 가는 것이겠다. 서재에서 책을 보다가, 침대에서 잠을 자다가, 노병이 겹쳤다면 딸, 아들에게 마지막 인사를 하다가 그렇게 가면 좋겠다. 마치 잠을 자듯, 꿈을 꾸듯. 사랑하는 사람들 곁에서 큰 소란 없이 가는 길. 그렇게 갈 수 있으면 좋겠다.     1. 폴: 용기 있는 죽음   『숨결이 바람 될 때』에서 폴 칼라니티는 자신이 암인 걸 알고도 삶의 방향을 급선회하거나 멈추지 않고, 암이 아니었으면 계속했을 그런 삶을 살 수 있음을 보여주었다. ‘죽음이 올 때까지 멈추지’(『숨결이 바람 될 때』, 폴 칼라니티, 흐름출판, 145쪽) 않고 신경 외과의로서, 작가로서, 아버지로서, 남편으로서의 삶을 살아내었다.   폴이 폐암 진단을 받았을 때 처음에는 아내 루시와 함께 울었다. 아내에게 재혼을 권하고, 담보대출을 이자가 적은 곳으로 바꾸라고 하고, 레지던트 근무 복귀 계획을 언급하는 동료의 말을 막았다. 의사로 일하는 동안 그에게 익숙했던 죽음은 막상 자신의 것이 되었을 때는 정체를 알 수 없는 것이 되었다. 누군들 그렇지 않으랴. 태어남과 동시에 죽음은 정해져 있지만 누구도 자신의 것이라고는 생각하지 못한다. 심지어 주변 사람의 죽음조차 받아들이는 데는 긴 시간이 걸린다. 죽음 앞에서는 자신이 가장 비극적인 사람이 된다. 하지만 폴은 남은 시간을 비극의 주인공으로 살지...
문탁
2023.12.11 | 조회 269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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