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나의 개’ 이야기 / 스프링

문탁
2023-12-18 09:00
230

 

 

1. 나에겐 너무나 무서운 개

 

아파트 엘리베이터 문이 열리니 이번에도 여느 때와 다름 없이 정면에 몇 종의 안내문이 붙어 있었다. 무심히 훑어보다 담배 냄새가 불쾌하니 실내 흡연을 삼가달라는 내용의 경고문에 눈길이 멎었다. 같은 종이에 누군가 갈겨쓴 손글씨 때문이었다. ‘개 짖는 소리도’. 종이를 가로질러 대각선으로 급하게 흘려 쓴 글씨에서 짜증이 묻어난다. 시끄러우니 조용히 시키라는 거겠지. 근데, 살아있는 개의 입을 막아버리란 말인가? 성대 수술을 시키라는 것일까? 아무리 자기가 기르는 개가 아니라고 해도 그건 좀 아니지 않나? 도대체 얼마나 시끄러우면 저런 걸 썼을까? 여러 생각이 들었다.

 

개 짖는 소리를 자제시켜 달라는 항의에 어이없어하긴 했지만, 사실 나는 개를 무서워한다. 세상에 무섭지 않은 게 별로 없다고 할 정도로 나는 쫄보다. 유전자의 힘도 있고 안전한 길로만 걸어온 나의 삶의 행로도 겁 많은 나를 형성하는 데 큰 역할을 했다. 일단 유전자부터 살펴보자. 엄마와 동생들 모두 개를 무서워한다. 동생들과 함께 외출하러 밖으로 나와 몇 발짝 떼었을 때 어느 집에선가 나온 개를 보고 우리는 단 한 마디의 말도 없이 거의 동시에 돌아서서 다시 집으로 들어갔다. 마치 군인들이 사열할 때 일제히 ‘뒤로 돌아’ 자세를 취하듯. 저놈의 개새끼가 우리 뒤를 쫓아와 물어버릴 지도 모른다는 공포가 만들어낸, 언어 없이도 통하는 마법적 합일의 순간이었다.

 

개를 무서워하는 가장 큰 이유는 이빨 때문이다. 사납게 짖고 으르렁대면 나에게 위해를 가할 것만 같다. 그래서 가급적 개를 만날 가능성이 적은 곳으로 다닌다. 동물이 자유롭게 다닐 수 있는 카페와 같은 곳은 아예 안 가고, 관리되지 않은 개들이 출몰할 만한 숲길이나 산길도 여간해서는 혼자 가지 않는다. 무서우니 피하는 건데, 개를 피하기가 점점 어려워진다. 개나 고양이를 키우는 사람들이 늘어나면서 생활하는 곳곳에서 개들을 만나게 된다. 저녁 무렵 공원이라도 갈라치면 개와 산책을 하는 사람들을 심심치 않게 본다. 개와 만나는 접점이 늘어나니 개에게 사람이 물리는 사고도 종종 보도가 된다. 사고가 일어나면 대체로 견주에게 개 관리 소홀의 책임을 묻고 더 철저한 관리를 촉구한다. 개줄을 튼튼하게 매고, 크거나 사나운 개는 입마개를 하도록 해서 최대한 사람들에게 피해를 주지 않도록 하자는 것이다. 이런 대책들에는 “개가 감히 사람을 물다니, 개는 절대 사람을 물어서는 안된다”는 불문율이 전제되어 있다.

 

그렇지만 이는 지킬 수 없는 규칙이다. 이빨이 있는 동물들이 그것을 사용하는 것은 당연한 일이다. 개와 가장 지근거리에 있는 사람을 무는 일은 언제든 일어날 수밖에 없다. 공간을 함께 점유하는 동물로서 인간은 사고 방지를 위해 개를 단속하기 이전에 개가 안전함을 느낄 수 있도록 해야 하지 않을까? 무서움은 나의 감정일 뿐이지, 개가 갖고 있는 본성은 아니다. 개 자체가 두려움인 것은 아니라는 말이다. 왜 개만 나의 습성을 이해하고 거기에 일방적으로 맞춰야 하는 것일까? 개가 사람을 물었을 때는 개의 사정이 있었을 것이다. 내가 안전을 추구하는 행위를 하듯이 개 역시 안전을 추구하는 행위로 사람을 공격했을 것이다. 나의 무서움이 스스로를 언제든지 개나 고양이에게 공격받을 수 있는 수동적인 존재로만 포지셔닝한 데서 오는 감정이라면, 개의 무는 행위 역시 인간에게서 느끼는 위협으로 인한 방어일 가능성이 높다.

 

 

 

 

 

2. 너에겐 너무나 사랑스러운 개

 

개를 키우는 사람들 입장에서는 자신의 개가 다른 사람을 문다는 것은 상상만 해도 끔찍한 일일 것이다. 하지만, 그런 일들은 계속 일어난다. 주인에게 순한 동물도 위협을 느끼면 공격하는 게 당연하다. 가축 파수견의 브리더인 린다 와이저는 공격적인 구조견이나 아이를 문 적이 있는 개는 죽여야 한다고 주장한다. 이것이 인간 아이는 물론이고 다른 개들의 목숨도 구할 수 있다고 생각하기 때문이다. 그녀에게 개 전체란 종류임과 동시에 개체다. 종이 지속돼야 개체도 살 수 있다는 것이다. 이 대목에서 나는 마음이 불편해진다. 종의 존속을 위해 말썽꾸러기는 해치워 버리자는 것 아닌가? 아무도 죽이면 안 된다. 자유를 억압하면 안 된다는 보편적 윤리에 위배되는 것 같다. 그러나 누구의 죽음, 누구의 자유인가? 절멸을 피하기 위해 현실에서는 인간과 개의 목숨, 자유 중에서 선택할 수밖에 없다. 지구에서 누군가와 함께 산다는 것은, 누구에게나 최선은 아니지만 현실적으로 감당할 수 있는 방안을 선택하는, 일종의 소화불량을 안고 살아가는 것이다.

 

현대 소비문화 속에서 개는 단순히 하나의 생명체가 아니다. 개의 탄생부터 죽음까지 자본주의의 세심한 그물망 속에서 관리된다. 품종 개량 및 번식, 개 사료, 미용, 놀이, 훈련, 유전병·감염 등을 포함한 각종 질병 관리, 장례에 이르기까지 모든 과정에 돈이 든다. 그 비용 부담을 줄이기 위해 펫보험에 가입한다. 사람이 살면서 겪는 자연적인 생노병사와 불의의 사고를 보험으로 관리하듯 개 역시 이 산업의 하나의 그물코로 엮여 들어왔다. 개와 함께 사는 데는 끊임없이 돌보는 손길이 필요하고 비용이 들어간다. 우리나라에서도 반려동물을 기르는 사람들이 천오백만 명을 넘어섰다고 한다. 가축이었던 동물들의 도축장이 도시 외곽으로 옮겨지면서 도시에는 작은 동물들만 남았다. 눈앞에서 사라진 가축들은 식탁에 고기로 올랐다.

 

도시에 남은 개들은 주로 애완동물로 기능한다. 개가 너무나 사랑스러워서 물고 빨고, 추울까봐 옷을 입히고 양말을 신기고 각종 악세서리로 치장해주는 사람들을 보면 한편으로는 신기하고 한편으로는 눈살이 찌푸려진다. 왜 동물로서 개의 야생성을 존중하지 않고 사람의 아기처럼 대하는 거지? 아기로 만들며 차이의 존중을 거부하는 것이 거슬린다. 하나의 생명체로 존중하는 게 아니라, 나의 욕구를 투사하는 대상으로만 대하는 것처럼 느껴지기 때문이다. 외로운데, 사람보다는 덜 피곤하고 말을 잘 들으니까 개를 데려다가 인형놀이를 하는 것 같다. 인간의 욕구와 편의 중심인 이런 관계에서는 애정이 식거나 돌보는 게 여의치 않아지면 버려질 위험이 커진다.

 

그런데 어쩌면 이것도 나의 편견일 수 있다. 인간의 애정은 왜 우선적으로 인간에게 향해야 하나? 애정의 대상이 인간이 아니면 다 외로움의 투사 대상인가? 인간 역시 그렇지 않은가? 실제 동물과 함께 살며 그들을 가족처럼, 아니 그 이상으로 여기는 사람들의 마음을 나의 편협한 시선으로 재단하고 있는 것은 아닌가? 문제는 누구에게 애정을 쏟느냐, 누구와 살지를 선택하느냐가 아니다. 함께 살고 있는 이들과 어떻게 살 것인가이다.

 

나는 동물과 함께 하는 삶을 선택하지 않았다. 1970년 이래로 야생동물은 절반으로 줄었지만, 인간과 함께 생활하는 가축은 늘었다. 10억 마리의 양, 10억 마리의 돼지, 10억 마리 이상의 소, 250억 마리 이상의 닭이 존재한다. 현재 전 세계 대형 동물의 90퍼센트 이상이 인간 아니면 가축이라고 한다. 인간은 이미 동물과 함께 살고 있는 것이다. 나는 개, 고양이를 좋아하지 않지만, 어느새 생활권을 공유하며 같이 살게 되었다. 이들과 어떤 자세로 함께 살 것인지 고민이 될 수밖에 없다.

 

 

 

 

 

3.개를 무서워하지만 잘 지내고 싶어

 

나는 종 안팎에서 맺어진 모든 윤리적 관계는 관계-속의-타자성에 대한 지속적 관심이라는 가늘고 섬세하며 질긴 실로 뜨개질한 편직물이라고 믿는다. 우리는 하나가 아니며, 함께 살아감으로써 존재한다. 누가 있으며 누가 생겨나고 있는지 묻는 것이 의무다. (도나 해러웨이, 해러웨이 선언문 中 반려종 선언, 178)

 

도나 해러웨이는 인간과 비인간으로 이루어진 다종의 생물들이 서로의 몸과 삶의 구성요소로서 함께 진화해왔다고 보고, 이들의 관계를 반려종이라고 부른다. 인간과 비인간의 몸과 삶은 다종의 생물이 모여 이루어나가는 일종의 배치이다(애나 칭, 세계 끝의 버섯, 해제, p.512). 해러웨이가 말하는 반려종은 반려동물보다는 범위가 더 넓고 다층적이다. 반려는 식사를 함께 하는 가까운 관계이자 성적인 파트너 즉 연인이나 배우자를 의미하는 용어로 많이 쓰였다. 둘도 없는 소중한 파트너, 중요한 타자를 의미한다. 해러웨이는 소중한 자가 동종이나 동류일 필요는 없다고 한다. ‘중요한 타자’는 서로 사랑하는 자들 사이의 윤리를 함축한다. 사랑한다는 것은 누구의 소유물도 될 수 없는 상대에 대한 인정과 존중을 기반으로 한다. 해러웨이에게 반려종이 소중한 타자라고 했을 때 여기에는 정서적인 친밀성이 깔려 있다. 나는 정서적으로 친밀하지 않아도 소중한 타자일 수 있다고 말하고 싶다. 그 상대 역시 인정과 존중을 기반으로 하지 않으면 소통하기 어렵다. 오히려 무서움의 거리만큼 발견과 소통의 기쁨은 배가 될 수 있다.

 

소중한 타자는 한쪽이 다른 한쪽을 일방적으로 길들여 복종시키는 관계에서는 만들어질 수 없다. 해러웨이는 ‘소중한 타자성’을 의도의 반영과는 다른 무엇으로 해석하고 싶어 한다. 사실 나는 이 글을 쓰면서, 사랑하는 구체적인 반려견이 없고 개 일반에 대한 두려움만 있는데 어떻게 ‘있음’이 아닌 ‘없음’으로부터 반려종과 함께 잘 살고 싶다는 글을 쓸 수 있을까 고민했었다. 개를 무서워하지만 개와 잘 지내고 싶은 나에게 개는 끊임없이 영향을 미치고 있다. 해러웨이의 ‘카옌’과 같은 구체적인 형상은 없지만, 그 작용력이 나에겐 존재감이다.

 

개에 대한 공포로 나의 마음이 쪼그라들고 활동 범위가 축소되는 것도 힘들고, 나의 공포로 개의 활동 반경이 좁아지는 것도 미안했다. 내가 개를 보고 흠칫 놀라거나 얼어버려 그 자리에 꼼짝 못하고 있으면 산책 나온 개 주인은 개의 목줄을 더 짧고 세게 쥐거나 개를 데리고 서둘러 그 자리를 떠난다. 나에게 개가 트러블이듯이 개에게는 내가 트러블이었다. 개를 편하게 해주고 싶은데 불편하게 해서 나도 마음이 불편하다. 집을 나서면 흔하게 일어나는 일들이다. 이렇게 개가 나의 심신에 계속적인 영향을 미치고 있다면 개는 나에게 중요한 타자인 셈이다. 중요한 타자와 소통을 잘 하는 것은 나에게 중요한 일이다. 따라서 무섭지만 개는 나에게 소중한 타자다.

 

스트래선은 다른 관념들을 사유하기 위해 어떤 관념들, 어떤 관계들을 관계시키는지가 중요하다고 했다. 그렇게 세계를 만들고 그런 세계를 이야기하기. 이렇게 ‘나의 이야기’들을 이야기하는 것이 세계를 만드는 것이다. 올해 돌봄을 주제로 공부하면서 동물, 장애, 비인간을 취약성, 트러블, 함께 살기, 애도, 오염, 번역, 공유지 등의 관념들로 만났다. 취약성이 연대의 가능성이 될 수 있다는 것을, 오염된 땅 폐허가 송이버섯이 자라날 수 있는 토양이 된다는 것도 알게 되었다. 그러나 이것 역시 하나의 이야기일 뿐이다. 하지만, 더 알고 싶은 이야기이다. 나도 삶을 통해 길어 올린 이야기를 이어 붙이면서 실뜨기를 이어가고 싶다.

 

 

 

 

 

‘나의 개’ 이야기는 무서움으로부터 시작한다. 상대에 대한 감정이 혐오나 두려움, 공포와 같은 부정적인 감정이라 하더라도 뭔가를 느낀다면 그것이 새로운 관계의 시작일 수 있다. 아무 것도 느끼지 못할 때는 그냥 지나가버리고 만다. 만남으로 인해 일어난 감응을 징검다리 삼아 상대에 대한 호기심을 갖고 탐구하고 접촉을 늘려 나가다보면 어느새 관계가 달라져 있을 때가 있다. 얼마 전 고양이를 키우는 친구 집에 놀러 가서 고양이를 가두지도 않고 한 공간에 같이 있는 놀라운 경험을 했다. 나에게 가까이 오지 않으니 안심하고 관찰할 수 있었다. 창가에서 햇볕을 쬐며 기지개를 켜는 고양이가 도도하고 우아하게 보였다. 징그럽게만 느껴지던 고양이 눈도 신비하고 아름답게 보였다. 두려움의 장막이 걷히니 감각도 달라져 있었다. 그렇게 자신감을 얻은 나는 고양이가 있는 다른 집을 방문하고 한순간에 자신감이 무너져 내리고 말았다. 사람을 무서워하지 않는, 너무나 활발한 고양이 세 마리가 뛰어다니는 그 집에서 나는 의연한 척 할 수 없었다. 다시 고양이들을 방 안에 가두었다.

 

그래도 나는 기가 완전히 꺾이지는 않았다. 전에는 할 수 없었던 경험을 했기 때문이다. 잠시라도 개, 고양이와 함께 있었으므로 이전의 나로 돌아가지는 않는다. 나를 힘들게 하고 불편하게 하는 것들은 존재 자체의 본성이 그런 것은 아니다. 여러 가지의 조건이 작용한 결과겠지만, 덕분에 나는 무섭고 싫은 상대에 대해 알아 나가면서 나의 자유를 확장해가고 있다. 동물뿐 아니라 인간에 대해서도 마찬가지다. 두려움의 경계가 옅어지면서 내가 편해지면 그들을 편하게 대할 것이고 그들 역시 더 편하고 자유로워질 것이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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문탁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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2023.12.18 | 조회 230
인문약방 에세이
    1. “무언가 대단히 잘못된 일”   『짐을 끄는 짐승들』의 저자는 관절굽음증이라는 장애를 갖고 있는 예술가 수나우라 테일러이다. 수나우라와 형제들은 어린 시절 닭들을 층층이 쌓아 싣고 빠르게 지나가는 거대한 트럭을 바라보며 끔찍하다는 생각을 했다. 지독한 냄새를 피하기 위해 숨을 참으며 “무언가 대단히 잘못된 일이 일어나고 있음을” 느꼈다. 그 후 이 문제가 그를 사로잡은 것은 미술학 석사학위를 받기 위해 대학원에 진학하고 나서다. “무언가 대단히 잘못된 일”은 공장식 축산으로 동물들이 불구가 되고, 그 산업에 말도 안 되는 저임금을 받는 이주노동자들이 동물들과 같이 갇혀 일한다는 사실이었다. 축산과 도축 노동자들은 과로, 스트레스, 트라우마로 심신의 장애를 입거나 장애를 입은 채 해고된다. 그 자리는 또 다른 저임금노동자들에 의해 쉽게 대체된다. 수나우라는 장애인 당사자로서 전자레인지, 패스트푸드점, 조리 식품의 효율성이 장애인, 노인, 저소득층의 사람들에게 도움을 준다는 것을 실감한다. 동시에 산업화된 음식 시스템이 남용되는 현실과 그 부적절성에 대해 문제제기해야 한다는 사실도 의식하고 있다. 식사때마다 반복되는 수나우라의 딜레마는 우리의 일상에도 적용된다. 공장식 축산과 불안정한 노동과 건강불평등과 신자유주의는 촘촘히 연결되어 있다.   수나우라는 이 책에서 장애와 동물을 교차시킨다. 종종 장애와 동물은 서로의 알리바이로 악용되어 왔다. 장애에 대한 폄하의 표현으로 ‘동물 같다’, ‘동물만 못하다’는 수사가 관용적으로 사용되어 왔고, 일부 동물권 활동가들은 ‘언어/인지’ 능력이 떨어지는 장애인들보다 ‘쾌고감수능력’을 갖는 동물을 돌보는 일을 우선해야 한다는 위계를 세우기도 한다. 수나우라는 우선, 우리가 장애와 동물에 대해...
    1. “무언가 대단히 잘못된 일”   『짐을 끄는 짐승들』의 저자는 관절굽음증이라는 장애를 갖고 있는 예술가 수나우라 테일러이다. 수나우라와 형제들은 어린 시절 닭들을 층층이 쌓아 싣고 빠르게 지나가는 거대한 트럭을 바라보며 끔찍하다는 생각을 했다. 지독한 냄새를 피하기 위해 숨을 참으며 “무언가 대단히 잘못된 일이 일어나고 있음을” 느꼈다. 그 후 이 문제가 그를 사로잡은 것은 미술학 석사학위를 받기 위해 대학원에 진학하고 나서다. “무언가 대단히 잘못된 일”은 공장식 축산으로 동물들이 불구가 되고, 그 산업에 말도 안 되는 저임금을 받는 이주노동자들이 동물들과 같이 갇혀 일한다는 사실이었다. 축산과 도축 노동자들은 과로, 스트레스, 트라우마로 심신의 장애를 입거나 장애를 입은 채 해고된다. 그 자리는 또 다른 저임금노동자들에 의해 쉽게 대체된다. 수나우라는 장애인 당사자로서 전자레인지, 패스트푸드점, 조리 식품의 효율성이 장애인, 노인, 저소득층의 사람들에게 도움을 준다는 것을 실감한다. 동시에 산업화된 음식 시스템이 남용되는 현실과 그 부적절성에 대해 문제제기해야 한다는 사실도 의식하고 있다. 식사때마다 반복되는 수나우라의 딜레마는 우리의 일상에도 적용된다. 공장식 축산과 불안정한 노동과 건강불평등과 신자유주의는 촘촘히 연결되어 있다.   수나우라는 이 책에서 장애와 동물을 교차시킨다. 종종 장애와 동물은 서로의 알리바이로 악용되어 왔다. 장애에 대한 폄하의 표현으로 ‘동물 같다’, ‘동물만 못하다’는 수사가 관용적으로 사용되어 왔고, 일부 동물권 활동가들은 ‘언어/인지’ 능력이 떨어지는 장애인들보다 ‘쾌고감수능력’을 갖는 동물을 돌보는 일을 우선해야 한다는 위계를 세우기도 한다. 수나우라는 우선, 우리가 장애와 동물에 대해...
문탁
2023.12.18 | 조회 109
인문약방 에세이
    그 어떤 죽음이 안타깝지 않을 수 있으랴. 하지만 죽은 자에게도 산 자에게도 가장 담담할 죽음은 없을까 생각해 본다. 내가 그 순간을 선택할 수 있다면 늘 하던 일을 하다가, 그냥 스르르 가는 것이겠다. 서재에서 책을 보다가, 침대에서 잠을 자다가, 노병이 겹쳤다면 딸, 아들에게 마지막 인사를 하다가 그렇게 가면 좋겠다. 마치 잠을 자듯, 꿈을 꾸듯. 사랑하는 사람들 곁에서 큰 소란 없이 가는 길. 그렇게 갈 수 있으면 좋겠다.     1. 폴: 용기 있는 죽음   『숨결이 바람 될 때』에서 폴 칼라니티는 자신이 암인 걸 알고도 삶의 방향을 급선회하거나 멈추지 않고, 암이 아니었으면 계속했을 그런 삶을 살 수 있음을 보여주었다. ‘죽음이 올 때까지 멈추지’(『숨결이 바람 될 때』, 폴 칼라니티, 흐름출판, 145쪽) 않고 신경 외과의로서, 작가로서, 아버지로서, 남편으로서의 삶을 살아내었다.   폴이 폐암 진단을 받았을 때 처음에는 아내 루시와 함께 울었다. 아내에게 재혼을 권하고, 담보대출을 이자가 적은 곳으로 바꾸라고 하고, 레지던트 근무 복귀 계획을 언급하는 동료의 말을 막았다. 의사로 일하는 동안 그에게 익숙했던 죽음은 막상 자신의 것이 되었을 때는 정체를 알 수 없는 것이 되었다. 누군들 그렇지 않으랴. 태어남과 동시에 죽음은 정해져 있지만 누구도 자신의 것이라고는 생각하지 못한다. 심지어 주변 사람의 죽음조차 받아들이는 데는 긴 시간이 걸린다. 죽음 앞에서는 자신이 가장 비극적인 사람이 된다. 하지만 폴은 남은 시간을 비극의 주인공으로 살지...
    그 어떤 죽음이 안타깝지 않을 수 있으랴. 하지만 죽은 자에게도 산 자에게도 가장 담담할 죽음은 없을까 생각해 본다. 내가 그 순간을 선택할 수 있다면 늘 하던 일을 하다가, 그냥 스르르 가는 것이겠다. 서재에서 책을 보다가, 침대에서 잠을 자다가, 노병이 겹쳤다면 딸, 아들에게 마지막 인사를 하다가 그렇게 가면 좋겠다. 마치 잠을 자듯, 꿈을 꾸듯. 사랑하는 사람들 곁에서 큰 소란 없이 가는 길. 그렇게 갈 수 있으면 좋겠다.     1. 폴: 용기 있는 죽음   『숨결이 바람 될 때』에서 폴 칼라니티는 자신이 암인 걸 알고도 삶의 방향을 급선회하거나 멈추지 않고, 암이 아니었으면 계속했을 그런 삶을 살 수 있음을 보여주었다. ‘죽음이 올 때까지 멈추지’(『숨결이 바람 될 때』, 폴 칼라니티, 흐름출판, 145쪽) 않고 신경 외과의로서, 작가로서, 아버지로서, 남편으로서의 삶을 살아내었다.   폴이 폐암 진단을 받았을 때 처음에는 아내 루시와 함께 울었다. 아내에게 재혼을 권하고, 담보대출을 이자가 적은 곳으로 바꾸라고 하고, 레지던트 근무 복귀 계획을 언급하는 동료의 말을 막았다. 의사로 일하는 동안 그에게 익숙했던 죽음은 막상 자신의 것이 되었을 때는 정체를 알 수 없는 것이 되었다. 누군들 그렇지 않으랴. 태어남과 동시에 죽음은 정해져 있지만 누구도 자신의 것이라고는 생각하지 못한다. 심지어 주변 사람의 죽음조차 받아들이는 데는 긴 시간이 걸린다. 죽음 앞에서는 자신이 가장 비극적인 사람이 된다. 하지만 폴은 남은 시간을 비극의 주인공으로 살지...
문탁
2023.12.11 | 조회 269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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