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읽고쓰기 1234] 감정을 어떻게 다룰 것인가?
자작나무
2023-08-28 21:10
205
감정을 어떻게 다룰 것인가?
후기 스토아학파 에픽테토스Epiktetos의 《강의Discourses》
죽음은 전혀 두려운 것이 아니다
내가 스토아학파 그중에서도 에픽테토스의 글을 읽고 꽂힌 부분은 가령 이런 구절이다.
사람들을 심란하게 하는 것은 그 사안 자체가 아니라, 그 사안에 대한 그들의 판단이다. 예를 들어 죽음은 전혀 두려운 것이 아니다. 그렇지 않다면 소크라테스에게도 역시 그렇게 여겨졌을 것이지만, 죽음에 관한 믿음, 즉 두렵다는 것, 바로 이것이 두렵기 때문이다. 그렇기 때문에 우리가 방해를 받거나 심란하거나 슬픔을 당할 때에도 결코 다른 사람을 탓하지 말고, 나 자신을, 즉 나 자신의 판단을 탓해야만 한다.(<앵케이리디온Encheiridion>, 제5장)
*헬라스어로 ‘획득된’이라는 의미인 에픽테토스(AD.55?~135?)는 노예 출신으로 한쪽 다리가 불구였다고 한다.
후기 스토아학파의 대표 주자인 그의 작품으로 남아 있는 《강의/담화록》(4권)과 《앵케이리디온(핸드북)》(52개의 짧은 장)은
제자인 아리아누스Arrianus가 그의 강의를 들으며 필기한 것을 출판한 것이다.
여기서 인용한 책은 《에픽테토스 강의 1.2/ 3.4/ 엥케이리디온》(김재홍 옮김, 그린비, 2023)이다.
에픽테토스의 《강의》는 대개 대화의 형식을 띠는데, 제자의 질문에 에픽테토스가 답을 한다. 제자의 질문은 가족, 직업, 가난, 명성에서 병이나 죽음에 관한 질문에까지 다양하다. 잘 짜여진 대화록은 아니지만 어쨌든 이런 형식으로 이뤄진 강의에서, 결국 에픽테토스가 말하고자 하는 바는 그 일을 하기로 결심하고 실행에 옮기는 것이 내게 달려 있는가 그렇지 않으면 내가 통제할 수 없는 것에서 비롯되었음을 아는가 였다.
나는 책을 읽으면서 대부분 내가 갱년기를 보내면서 내 고민 리스트에 올렸던 단어들, 가령 부, 노후, 건강, 병, 죽음과 불안, 외로움, 분노, 자책 등과 같은 내용이 나오는 곳에 주목했다. 물론 이걸 에픽테토스가 어떤 방식으로 다루고 해결하라고 하는지 삼빡하게 알진 못한다. 그래도 나는 내가 위의 언급처럼 사안과 그 사안에 대한 감정(혹은 가치판단)을 잘 구분하지 못하고 있다는 사실을 알게 되었다. 그는 죽음과 죽음에 대한 두려움을 구분한다. ‘나는 죽는다’와 ‘나는 죽는 것을 두려워한다’는 표상(에픽테토스왈 인상)을 구분한다. 그러면 나는 어떠한가. 나는 노후에 불안을 느끼는데, 이는 노후 그 자체가 불안한 것인가, 그렇지 않으면 노후에 대한 나의 판단(생각이나 망상) 때문에 나는 불안해 하는 것일까. 전자는 죽음처럼 노후도 객관 사실에 대한 진술일 따름이다. 내가 아둥바둥한다고 해서 죽음을 피하거나 노후를 피할 순 없다. 자연학의 시선에서 보자면 그렇다. 에픽테토스처럼 자연학을 배운다면 세상을 다르게 볼 수 있을지도 모르겠다.
어쨌든 에픽테토스가 말한 많은 것들, 자연학과 윤리학, 논리학 등등 방대하고 어렵다. 다른 것은 몰라도, 그의 책은 내가 느끼는 것들의 실체에 대해서, 무엇보다도 그것들에 대한 나의 감정에 대해서 구체적으로 생각할 기회를 주었다. 이 점에서 나는 스토아학파에 대해서 얼마간 우호(^^:)적이다. 그리고 에픽테토스는 가령 죽음에 대해서 미리 그것과 그것에 대한 두려움을 구분하는 연습을 하라고 말하는데, 그것이 그에게는 ‘철학’이었다. 삶의 기술과 훈련으로서의 ‘철학’. 에픽테토스는 말한다. “이 두려움에 대해서 너 자신을 훈련해야 하는 것이다. 그리고 너의 모든 논의, 연습, 독서가 이것을 향하면 되는 것이다. 그렇게 해야만 인간은 자유로워진다는 것을 너는 알게 될 것이다.”(《강의》, 제3권 제26장) 나는 아직 그의 말처럼 하진 못하지만, 그가 말한 ‘철학’이 나의 번뇌를 없애는 데 도움이 되리라는 생각을 했다. 한 번 해봐, 이놈의 ‘철학’?!
나 자신을 훈련하기
그러면 나 자신을 훈련해야 한다는데, 어디서 어떻게 시작하는가? 다른 초기/중기 스토아학파가 삼분하는 것과 달리 에픽테토스는 존재하는 것을 둘로 나누는 데서 시작한다.
존재하는 것들 가운데 어떤 것은 우리에게 달려 있는 것들이고, 다른 어떤 것은 우리에게 달려 있는 것들이 아니다. 우리에게 달려 있는 것들은 판단, 충동, 욕구, 회피(혐오), 한마디로 말해서 우리 자신이 행하는 그러한 모든 일이다. 반면에 우리에게 달려 있지 않은 것들은 육체, 재산, 평판, 관직과 같은, 한마디로 말해서 우리 자신이 행하지 않는 우리에게 달려 있지 않은 일이다.(《앵케이리디온》, 제1장)
위에서 ‘우리에게 달려 있는 것들’로 말해지는 판단, 충동, 욕구, 회피는 영혼의 힘으로도 말해지는 이성의 능동적인 능력이다. 이게 왜 영혼이냐 이성이냐고 묻지 말라. 그냥 몇 몇의 것들에 대해서는 그냥 외기로 했는데, 이성이 영혼의 힘이고 덕이고 그게 앎이라는 거, 그냥 이 시기 사람들에게는 상식이다. 이성은 “자신과 다른 모든 것을 탐구의 대상으로 삼는 능력”으로, 이 능력만이 이것이 무엇인지, 무엇을 할 수 있는지, 또 어떤 가치에 기여할 수 있는지를 이해할 수 있다. 에픽테토스는 여기에 프로하이레시스prohairesis를 덧붙인다. “신들은 단지 모든 것 중에서 가장 뛰어난 것, 다른 모든 것들을 지배하는 것, 즉 인상을 올바르게 사용할 수 있는 능력[프로하이레시스]만을 우리에게 달려 있는 것[판단/충동/욕구/회피]에 놓아두었던 것”(《강의》, 제1권 제1장)이다. 여기서 프로하이레시스는 ‘선택 능력, 혹은 의지’로 번역되는데, 선택이나 의지라고 해서 자의적인 것이라고 보면 곤란하다. 이것도 우리가 갖고 있는 이성의 능력이라고 할 수 있다.
이전의 스토아학파는 존재하는 것들을 좋은 것과 나쁜 것 및 무관한 것으로 구분하였으나, 에픽테토스에게 있어서 좋은 것과 나쁜 것은 전적으로 자신에게 달린 것이 된다. “좋음은 어디에? ‘의지 안에.’ 나쁨은 어디에? ‘의지 안에.’ 좋음도 나쁨도 아닌 것은? ‘의지의 영역 밖에 있는 것들 안에.”(《강의》, 제2권 제16장) 그에게 좋음은 프로하이레시스를 좋게 사용한 것이다. 이게 좋은지 그렇지 않은지를 어떻게 아는가? 이것은 신이 명령한 것이고 우리 이성에 이미 탑재되어 있다. 무지하거나 나태하거나 해서 잘못된 선택을 하기도 하는데, 그게 나쁨인 것이다.
이전에는 무관한 것들로 이야기된 것, 가령 명성이나 죽음과 같은 것은 판단, 욕구, 회피, 충동을 위한 재료들에 불과하다. 명성이나 죽음을 앞에 두고 욕구할 것인가 그렇지 않을 것인가. 물론 스토아적 세계관에 선다면 명성에 욕구하지 않고 죽음에 회피하지 않는다. 명성은 갖고자 한다고 얻을 수 있는 것이 아니라 다른 사람들에 의해서 얻어지는 것이기 때문이다. 물론 명성을 얻기 위해서 최선을 다할 수 있다. 그렇다고 명성이 꼭 뒤따라오는 것이 아니다. 따라오면 감사하고, 따라오지 않아도 그것이 본질적으로 우리에게 달린 문제가 아님을 알기에 마음의 평정을 유지할 수 있다. 그렇게 되기까지 우리는 가령 건강과 부처럼 흔히 좋다고 여겨지는 것들이 항상 본질적으로 우리에게 이로운가, 그것은 행복에 필수적인가, 그것은 우리에게 달려 있는가, 우리의 이성적 본성과 조화되는가 등등을 질문해야 한다. 여기서 스토아학파가 중시하는 것이, “역경을 만나든 부와 번영을 만나든 모든 일에서 이성을 결정적 원리로 삼는 것임”(《어떻게 자유로워질 것인가?》, A.A. 롱, 31쪽)을 알 수 있다.
이렇게 목표와 목표의 달성을 분리하여 생각하면 감정적 동요를 일으키지 않는다. “감정이 생기는 것은 욕구하지만 그 목적을 달성하지 못하는 경우이거나 혹은 회피하지만 거기에 빠져 버리는 경우일 수밖에 없기 때문이다.”(《강의》, 제3권 제2장) 스토아학파가 바란 것은 행복(eudaimonia)인데, 이것은 평정심의 상태를 말한다. 흔히 스토아학파를 일러 금욕적이라고 말한다. 감정 자체가 아예 일어나지 않도록 할 것을 바랬다고 사람들은 봤던 것이다. 그런데 그들에게 감정이 생기지 않도록 하는 것도 중요하지만, 그럴 수 있는 사람이 얼마나 될까. 인간인 이상 감정이 없을 수는 없다. 이들은 감정이 일어나지 않도록 혹은 일어나더라도 곧장 평정심을 찾을 수 있도록 훈련하는 매뉴얼에 집중했다. 일상의 매뉴얼들.
스토아, 삶의 기술과 훈련으로서의 '철학'
스토아학파에게서 ‘철학’은 세 영역의 훈련이라고 할 수 있다. 자연학, 윤리학, 논리학. 이는 그들만의 특징이 아니라 고대 시기 철학자들이 주목했던 영역이다. 아리스토텔레스에게도 에피쿠로스에게도 보이는 영역. 이 세 영역에서 이성의 능력(욕구/회피, 충돌/반발, 승인)을 훈련하기를 에픽테토스는 제시한다. 그 구체적인 모습을 에픽테토스의 《엥케이리디온》에서 간단하게 살펴보자.
너의 혼을 끌어당기는 것들이나, 유용한 것들이나, 소중한 것들 각각에 대하여, 사소한 것들로부터 시작해서 그것이 어떤 종류의 것인지를 숙고해야 한다는 것을 기억하라. 만일 네가 항아리를 좋아한다면, ‘나는 항아리를 좋아해’라고 말하라. 설령 그것이 깨진다고 해도, 너는 심란해하지 않을 것이기 때문이다. 만일 네가 너의 자식이나 마누라에게 입을 맞춘다고 한다면, 너는 한 인간에게 입을 맞추고 있다고 너 자신에게 말하라. ‘그것’이 죽었을 때, 너는 심란해하지 않을테니까.(《엥케이리디온》, 제3장)
위에서 왜 심란해하지 않을 수 있을까. 그것은 그가 훈련을 했기 때문이다. 그것이 어떤 종류의 것인지 즉 그 본질이 어떤 것인지를 숙고했던 것(욕구와 회피를 훈련하는 자연학의 영역, 이를 통해서 용기와 절제를 훈련)이다. 항아리를 좋아한다고 했을 때, 이 항아리는 주전자 비슷한 물 담는 그릇으로 부주의하게 바닥에 떨구면 깨지고 그렇지 않더라도 영원한 것은 아니며, 물론 영원히 내 소유의 것이라고 말할 수도 없다. 이런 마음 상태로 있을 때, 항아리가 깨어지고 도둑맞더라도 감정은 평정 상태일 수 있다. 후자의 ‘나는 한 인간에게 입을 맞추고 있다’는 것은 인간의 본질은 ‘죽을 수밖에 없는 존재’(헬라스어 ‘인간’의 뜻)임을 항상 숙고한다는 의미다. 가족의 죽음을 각오하라memento mori. 이 말은 가족에 대한 감정에 대한 무감각을 말하는 것이 아니라 사랑하는 사람들이 있는 한 그들을 돌보라는 권유가 된다(A.A 롱). 여기서 타인과의 관계에서 어떻게 행동해야 하는지를 보여주는 윤리학(충동, 의무, 정의)적 훈련이기도 함을 보여준다.
신체를 자기에게 달려 있는 것이 아니라고 말하고 신체 고문에도 의연할 수 있었다던 에픽테토스. 처음 알았을 때 '헉' 소리가 절로 난다. 이성을 결정적 원리로 삼으라는 제언, 여전히 '헉' 소리가 절로 난다. 가벼운 마음으로 할 수 있다는 마음으로 시작했지만, 읽으면서 왠지 모르게 쉽지 않겠다는 생각이 든 것도 사실이다. 그럼에도 내가 그의 책을 쥐고 있는 이유는 무엇일까. 아마도 처음 그의 책을 읽었을 때 가졌던 '심플함' 때문이다. 모든 일들이 나 자신에게 달린 것인지 그렇지 않은지, 다른 말로 자신이 통제할 수 있는지 없는지를 먼저 생각해보라는 말, 그것에 대해서 사용할 수 있는 어떤 힘을 내가 가지고 있는지 없는지를 탐구하라는 말, 바로 그것 때문이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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자연학, 윤리학, 논리학의 훈련 방법이 궁금해집니다. 아무나 할 수는 없을 것 같은데 말입니다.
근데, 한켠 생각해보면 이 세 영역의 통합적 훈련이야말로 바로 피에이씨방법이 아닐까 싶은 생각도 듭니다. ㅎ
ㅎ 잘 읽었습니다~
피에이씨방법? ㅠㅠ 뭔지 잘 모르겠는....스토아학파의 철학은 요즘 '인지행동치료'에 깊은 영향을 주었다고 하네요. 심리학의 한 방법인 것 같은데.....
'얼추 거의 맞추는'(PAC) ㅋ
에픽테토스는 가령 죽음에 대해서 미리 그것과 그것에 대한 두려움을 구분하는 연습을 하라고 말하는데, 그것이 그에게는 ‘철학’이었다.
'죽음'과 '죽음에 대한 두려움'은 구분하는 연습을 하라....... 맞아요.
단어들을 바꾸어 넣으면 생각의 지평이 확 넓어지는 느낌입니다. 예를 들면,
'가난'과 '가난에 대한 두려움'은 구분하는 연습을 하라.......
'질병'과 '병듦에 대한 두려움'은 구분하는 연습을 하라.......