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2021양생에세이⑤] 그 많던 일베는 어디로 갔을까

명식
2021-07-13 11:23
341

 

그 많던 일베는 어디로 갔을까

 

차명식

 

 

  몇 번째 시간이었나, 세미나가 끝나갈 무렵 문탁 선생님은 오늘날 우리 사회 페미니즘의 양상을 말씀하시면서 그중 우리가 생각해볼만한 문제로 ‘그 많던 메갈은 어디로 갔을까’를 꼽으셨다. 소위 ‘페미니즘 리부트’의 기점으로 여겨지던 메갈리아 웹사이트가 동력을 상실한 지금 한국 사회의 페미니즘 운동은 어떠한 형태로 수행되고 있는가를 고민해봐야 한다는 의미였다고 생각한다. 그런데 나는 그 질문을 듣는 순간 또 다른 질문을 하나 떠올렸다. ‘그렇다면, 그 많던 일베는 어디로 갔을까?’

  이러한 질문의 변환은 급작스러운 발상이라기보다는 이번 양생 프로젝트를 수강하며 내가 가지고 있었던 특정한 문제의식에 기인한다. 그것은 이른바 ‘대문자 남성’의 문제다. 내가 생각하기에 페미니즘은 타자화된 여성에 대한 통찰에서 시작하여 여성 주체를 재구성하여 세계를 마주하는 과정이며 해러웨이, 브라이도티, 버틀러는 그 과정에서 각기 다른 방향성을 제시하였다. 따라서 우리는 그들을 공부하는 과정에서 기존의 여성 개념을 해체하고 보다 다양한 각도에서 다양한 상으로서의 여성을 살필 수 있었다. 헌데 우리가 그러한 공부를 토대로 현실의 문제를 논하면서 남성에 대하여 말할 때는 대개 단일한 주체이자 동일자로서만 호명한다는 생각이 들었다. 물론 근대적 인간주체가 백인-성인-남성의 형상을 가졌으며 수 세기 동안 남성적 주체가 사회의 주류로 군림하면서 동일자의 법을 집행해 왔음은 분명하다. 하지만 그것을 현재 우리의 상황, 특히 젊은 세대에서 젠더 갈등이 격화되고 있는 우리 현실에 가져와 적용하려 할 때 나는 어떠한 위화감을 느낀다.
  그 위화감의 정체를, 나는 특정한 남성 계층 - 이른바 ‘잉여 남성 그룹’에 대한 통찰의 부재로 해석한다. 이들 젊은 남성 그룹은 앞서 일본에서 화두로 떠올랐던 이른바 ‘초식남’들과 일정 부분 유사성을 갖는다. 동시에 그들 중 일부는 ‘일베’라 불리며 한국 사회의 혐오자 집단을 상징하고 있다. ‘초식남’과 ‘일베’라고 하면 얼핏 상반되어 보이나 그들 계층의 정체성은 근본적으로 그 사이 어딘가에 있다. 이번 글에서는 그들 그룹을 계보학적으로 이해하고 그를 기반으로 하여 버틀러의 수행성·패러디 개념을 적용함으로써 현재 격화되고 있는 젠더 갈등에 대한 새로운 관점을 구축해보고자 한다.

 

 

  잉여에서 일베로

 

  페미니즘 리부트 이전까지 일베의 출현은 한국 사회에서 가장 핫한 아젠다 중 하나였으며 자연히 일베라는 집단을 분석하기 위한 시도도 수없이 많았다. 하지만 그러한 분석들 중 대부분은 일베가 사용하는 자극적인 혐오의 언어들과 기괴한 문화코드 등의 스펙타클에 집중하면서 일베를 21세기 대한민국의 혐오자 집단으로 정의하는데 그쳤다. 그러나 나는 그것이 지나치게 얕은 분석이라고 생각하는데, 그 분석들에는 일베를 포함한 ‘잉여 남성’ 그룹에 대한 고찰이 부재하기 때문이다.

 

 

  잉여 남성들에 대한 몇 안 되는 분석인 『잉여사회』의 저자 최태원은 이들 잉여인간, 젊은 루저 그룹을 과거 20세기 중반의 비트 세대Beat Generation와의 대조를 통해 규정한다. 비트 세대가 물질적 풍요로움 속에서 쇠퇴한 정신적 가치를 한탄하며 스스로를 파괴하면서 사회에 경종을 울리고자 했다면 현대 한국사회의 잉여인간들은 그보다도 훨씬 수동적으로, 자신의 의지와 상관없이 세상으로부터 내버려진 존재임이 강조된다. 이미 낡은 단어가 되어버린 사포 세대 - 취업, 연애, 결혼, 출산의 포기. 현실의 가장자리로 내몰린 이들은 경계의 너머, 가상공간에서 자신들의 놀이를 찾는다.

 

  “현실에서 단 1cm의 전진도 어려운 수많은 이들에게 가상세계는 거의 유일하게 열린 도피처다. 그 자신의 존재까지도 가상으로 내몰린 이들은 수많은 신조어, 만화, 음악, 합성사진, 동영상을 만들어내고 이 작품들 속에서 아무짝에도 쓸모없어 보이는 것들과 현실에 대한 비판적 인식이 마구 뒤섞인다. (...) 이루어질 수 없는 욕망과 결여에 대한 열패감이 스쳐 지나가는가 하면 언제 그랬냐는 듯 초월의 메시지가 등장한다.” 1)

 

  일베의 경우에 노무현 전 대통령의 희화화를 놀이의 핵심 코드로 삼았다. 그의 괴이한 합성사진, 그의 생전 음성을 편집해 만든 괴이한 음악, 그가 생전에 사용하던 경상도 사투리를 비튼 그들만의 괴악한 어투. 사실 일베가 아닌 다른 잉여 남성 그룹들 역시 비슷한 일들을 벌였다. 단지 그 소재가 일베처럼 자극적이지 않았기에 문제적으로 조명되지 않았을 뿐이다.
  여기서 우리가 가장 주목해야 할 것은 그 그로테스크한 생산물들이 아니라 이러한 활동들의 본질이 집단적인 ‘놀이’라는 점이다. 이는 일베라는 집단을 이해하는데 있어 가장 중요한 지점이다. 일베는 노무현 전 대통령, 광주 518, 세월호 희생자 등등을 ‘진심으로 혐오’하지 않는다. 타깃을 ‘증오’하고, ‘파괴’하는 것은 그들의 관심사가 아니다. 그들의 진정한 관심사는 그것들을 ‘모독’하는 것이다. 가장 극렬한 형태의, 평범한 사람이라면 천인공노할 수준의 사르카즘. 그것이야말로 일베의 본질에 가깝다. 소재와 정도의 차이가 있을 뿐 잉여 남성 그룹은 그러한 활동의 본질을 전반적으로 공유한다. 모든 것은 놀이다. 결코 진지해져서는 안 되는 놀이.

 

 

  일베에서 메갈로

 

  우리는 보통 ‘풍자’라는 단어에서 긍정적인 뉘앙스를 읽어낸다. 그것은 권위에 항거하기 위한 약자의 수단이며 익살과 웃음을 무기로 삼는 우아한 공격이다. 하지만 사회의 도덕적 합의나 최소한의 예절 등도 권위에 해당할 수 있다. 예를 들면 518은 민주주의를 위한 숭고한 희생이라는 해석이 갖는 권위, 죽은 자들에 대해서는 마땅히 애도를 표해야 한다는 도덕적 상식과 그것이 조성하는 분위기가 갖는 권위. 일베는 감히 상상조차 하기 힘든 ‘사악한’ 조롱과 풍자로 그런 권위들을 - 그러한 권위들이 자리한 현실을 모독하려 들었다.2)
  그리고 일베는 자기 스스로를 소수자로 위치시킴으로서 그런 풍자에 정당성을 부여한다. (이는 일베 정도로 금기적인 소재를 건드리지는 않았지만 그 외 다양한 소재들을 조롱과 풍자의 대상으로 삼은 여타의 잉여 남성 그룹들도 마찬가지다.) 어떻게 그러한 소수자로서의 셀프 포지셔닝이 이루어지는가? 바로 자체적인 욕망의 거세를 통해서다. 이들은 스스로의 결핍된 존재로 규정하고, 그 결핍에 대하여 수동적이고 자조적인 태도를 취하고, 그러한 태도들의 공유를 통해 공동의 정체성과 동류의식을 형성한다. 이때 가장 먼저 잘려나가는 욕망 중 하나가 성적인 욕망이며, 이것이 소위 ‘남초 사이트’가 남성 유저를 디폴트로 잡고 여성들을 배척하는 이유이다.

 

  “즉 이런 종류의 ‘남성적’ 커뮤니티들은 ‘성애(연애) 가능성’의 제거와 그에 따른 동성 간의 연대로 이루어진 가상의 공간이다. 때문에 이 공간에서 벌어지는 의사소통에는 ‘잘 보여야 하는 사람’이 존재하지 않는다. 적어도 이곳에서만큼은 현실의 법칙들, 특히 ‘연애’에 대한 강박과 곤경은 물론이고, 관계 유지에 대한 부담으로부터 벗어나 마음껏 행동할 수 있는 것이다. 때문에 더 짓궂게 굴고, 더 막나가고, 더 위험한 행동을 하는 것이 이 공간에서의 룰이자 주도권을 잡는 방법이다.”3)

 

  따라서 이들에게 여성 유저는 가상공간의 자조적 연대를 깨뜨릴 가능성이 있는 골치 아픈 위협에 지나지 않는다. 여성 유저로 인한 혹시 모를 치정 상황의 발생, 여성 유저의 등장으로 인해 자조가 아닌 다른 방식으로(외부적으로) 자신들의 결핍을 상기함으로써 오는 긴장 등등은 그들의 연대를 파괴할 가능성이 있는 대표적인 위험요소다.

 

 

  이에 이들에게 여성 유저들은, 나아가 여성 자체는 남자들을 등쳐먹는 ‘여왕벌’ 혹은 자기밖에 모르는 ‘김치녀’로 표상되며 적대시된다. 이런 면에서 이들의 여성혐오는 남성들의 소위 전통적인 여성혐오와 그 양상을 공유하면서도 그 발생의 맥락은 달리한다고 볼 수 있다.
  그런데 흥미로운 것은 ‘메갈’의 발생이 바로 이러한 남성적 커뮤니티에서 일어났으며 이들 잉여 남성 그룹의 ‘유희’ 방식을 모사했다는 점이다. 이 새로운 급진 페미니스트들은 가장 가까운 곳에서 자신들이 활용할 수 있는 ‘소수자들의 무기’를 찾아냈고 잉여 남성 그룹들이 그러했던 것처럼 신조어, 합성 이미지, 동영상 따위를 만들어내면서 심지어 일베의 괴이한 말투까지도 카피해 가져왔다. 다만 그들은 잉여 남성 그룹이 그랬던 것처럼 ‘자조의 연대’를 구축하지는 않았는데, 왜냐하면 그들은 굳이 자조하지 않더라도 여성이라는 소수자 정체성 아래 연대를 구축할 수 있었기 때문이다. 또한 잉여 남성 그룹이 자기 스스로를 포함한 불특정 다수의 대상들을 풍자와 조롱의 대상으로 삼았던 것과는 달리 메갈들은 오직 남성들과 그들이 만들어내는 질서를 타깃으로 삼았다.
  이것은 잉여 남성들에게 일찍이 경험하지 못한 충격을 안겼다. 이전까지 그들은 늘 소수자로서 자조하면서도 주류 사회를 비꼬고 조롱하는 쪽이었는데, 메갈은 바로 그들이 사용하던 유희의 수단들을 써가며 그들 역시 비꼬고 조롱당해야 하는 대상, 주류라고 호명했기 때문이다. 충격은 곧 박탈감이 되었고, 박탈감은 곧 분노가 되었다. ‘취업도 연애도 다 포기하고 여기 가상공간에서 빌빌대는 우리가 주류란 말이냐? 소수자의 자리까지 우리에게서 빼앗겠단 말이냐?’ 이 분노는 곧 그들이 가장 중대한 규칙 - “모든 것은 놀이이며, 놀이에는 진지해져서는 안 된다” - 을 위반하게 만든다.
  어떤 점에서 일베는 소수자로서 주류 사회를 조롱하기 위해 특정한 혐오자를 연기해왔다. 하지만 그들과 같은 방식은 택한 메갈의 출현은 페미니즘을 상대하는 한해서는 그들로 하여금 그 롤플레잉마저 그만두게 만들었다. 그리고 페미니즘에 한해 더 이상 그것이 놀이가 아니게 되자 무대(연기의 공간)와 무대 아닌 곳을 나누던 경계 역시 붕괴하였다. 최초 발생의 맥락은 달랐을지 몰라도, 바야흐로 페미니즘에 대한 적대감(혹은 회의감)은 젊은 남성들 전반이 온라인과 오프라인을 가리지 않고 공유하는 공통의 성향이 되었다.

 

 

  놀이는 끝났소. 모두 집으로 돌아가시오.

 

 

  메갈은 잉여 남성들의 그러한 변화까지도 미러링Mirroring한 것일까? 잉여 남성들이 놀이의 규칙을 위반하고 ‘진지’해진 것처럼 풍자의 수단이었던 메갈의 미러링 전략 역시도 점차 ‘진지’해졌다. 이제 남자와 여자라는 이름은 블랙홀처럼 다른 모든 맥락들을 빨아들인다. 그것들은 가장 근본적이고 본질적인 정체성으로서 무언가를 심판하거나 정당화하는 최우선의 기준이 된다. 역할극과 패러디는 잊혀졌고 그 자리에는 서로의 목을 치지 못해 안달하는 두 쌍둥이만이 남았다. 누구보다도 서로를 증오하지만 동시에 서로를 닮아있는 그러한 쌍둥이. 서로의 차이를 부르짖으며 각기 뭉치려하지만 그럼으로써 뭉치는 자신들의 차이는 외면하는 쌍둥이. 다른 언어를 사용할지언정 동일하게 수행함으로써 그들은 닮아간다. 똑같은 방식으로 증오하고 똑같은 방식으로 다투며 똑같은 방식으로 말함으로써.
  나는 이것은 낭만적 레토릭 차원에서 발하는 탄식이 아님을 분명히 밝혀둔다.

 

  “젠더는 다양한 행위가 일어나는 작인의 장소나 안정된 정체성으로 구성되는 것이 아니다. 그보다는 양식화된 행위의 반복을 통해서 시간 속에 희미하게 구성되고, 외부공간에 제도화되는 어떤 정체성이다. (...) 이렇게 정형화된 젠더 개념은 본질적 정체성의 모델이라는 토대에서 빠져나와, 구성된 사회적 일시성으로서의 젠더 개념을 요구하는 토대로 이동하게 된다. 의미심장하게도, 만일 젠더가 내부적으로 불연속적인 행위들을 통해서 제도화되는 것이라면, 본질의 외관은 바로 그 구성된 정체성, 즉 수행적 성과물이 된다.”4)

 

  잉여 남성 그룹은 의사-거세를 행하고 잉여의 놀이를 구사함으로써, 메갈리안들은 미러링 전략을 구사함으로써 어떤 면에서 그들은 이미 전통적인 남성-여성 젠더가 아닌 다른 젠더 정체성으로 진입하였다. 하지만 그것이 놀이가 아니게 되었을 때 그들은 그 자리에 다시 정착하였고(집으로 삼았고) 남성과 여성의 이름은 재차 근원적이고 본질적인 무언가를 가리키게 되었다. 다만 제한된 파이를 두고 다투는 동일한 싸움꾼들이 서로를 적대하며 지은 진영의 이름으로서의 남성과 여성. 이것이 일베와 메갈이 만들어낸 젠더이며 전통적이고 일반적인 남성·여성 젠더와는 명백히 그 성격을 달리하는 젠더다.
  이러한 맥락을 고려치 않고 다만 남성 혹은 여성이란 이름으로, 성별 대립이란 이름으로 세대와 공간과 기타 수많은 변인들을 초월해 모든 맥락을 하나로 엮어 호명하는 것은 이 상황을 이해하는데 전혀 도움이 되지 않는다. 심지어 때때로 잉여 남성 그룹과 메갈들 자신들조차도 그와 같은 방식으로 문제를 뭉뚱그리려고 하나 그는 제지되어야만 한다. 일베와 메갈을 거쳤음에도 젠더는 다시 근원적이고 본질적인 무언가처럼 다루어지게 되었지만 거기에 이르게 된 경위와 그것이 불러일으키는 효과는 이전 시대와는 분명 상이하다. 때문에 지금 이 순간 우리에게 요구되는 것은 남성과 여성이란 이름 아래 어떤 배치 위에서 무엇이 수행되고 있는가를 보다 세밀히 살피는 것이다. 그 맥락은 아마도 숫자도 모양도 시작도 끝도 가늠할 수 없는 복잡한 잔뿌리의 모습을 하고 있지, 결코 단 두 갈래로 갈라져 있지는 않을 것이다.

 

 

 

 

 주:

 1) 최태섭, 『잉여사회』, 웅진지식하우스, 23p

 2) 오직 이러한 해석만이 왜 젊은 층이 주류인 일베가 뜬금없이 기성세대의 특정 지역 혐오 성향을 드러냈는지, 정작 ‘진지하게’ 특정 지역과 정파를 혐오하는 중년/노년 계층이 일베 사이트에 몰려들자 그들의 본진을 버리고 흩어졌는지를 설명할 수 있다.

 3) 앞의 책, 163p

 4) 주디스 버틀러, 『젠더 트러블』, 문학동네, 349p

 

댓글 1
  • 2021-07-16 14:34

    제가 메갈의 등장에 대해 무척 놀라고 당황했던 경험이 있는 사람이어서 그런지

    진지하지 않은 사르카즘적 놀이로 일베현상을 해석하며

    (그와 달리 진지했던) 메갈현상을 분석하는 시각이 흥미롭네요. 

    그런데 잉여그룹남성이라는 용어 말인데요.  

    청년세대를 잉여그룹남성과 비잉여그룹남성으로 구분하는 것이 가능할까요?

    일베를 잉여그룹남성이라고 묶는 것이 가능한지도 반신반의하게 됩니다.

    일베가 했던 주장들, 예를 들어 여가부 폐지나 여성의 병역의무 등이 이젠 일베를 넘어 (진지하게) 유포되는 건 또 어떻게 봐야 할까요? 

    모르는 게 너무 많아..ㅠㅠ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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아버지와 나 사이에 가능성이 생겼다   “이 가을이 내 마지막 가을이겠네.” 엄마는 10월의 단풍을 보고 자신의 마지막을 예감했다. 그 후 엄마의 시간은 우리와 다르게 흘렀다. 엄마에게 건넨 말에 대한 응답이 한참 뒤에 돌아오는 일이 잦아졌고, 우리가 알지 못하는 곳에 엄마 혼자 가 있는 시간이 길어졌다. 엄마와 만날 수 있는 시간이 점점 줄어들고 있었다. 그 무렵 나는 매일 집안의 곳곳을 쓸고 닦았다. 가끔씩 우릴 만나러 오는 엄마를 조금이라도 깨끗한 공간에 머물게 하고 싶어서. 그게 막을 수 없는 운명 앞에서 내가 할 수 있는 유일한 일이었다. 아무렇게나 쌓인 그릇을 모두 꺼내 크기별로 종류별로 정리하고 있던 어느 날, 거실에서 엄마와 아버지가 나누는 대화가 들렸다.   “태희 엄마, 우리 죽어서도 꼭 다시 만나세.”   애써 눌러도 터져 나오는 울음을 막지 못해 아버지는 울먹이며 말했다. 엄마는 아버지의 말에 꼭 그러자고 대답했다. 뼈만 남은 몸으로 연신 고개를 끄덕이며 사력을 다해 약속했다. 저물어 가는 여자와 저물고 싶은 남자가 그렇게 다음 만남을 기약했다. 그 장면에 나는 딴지를 걸고 싶었다. 나는 잊지 못했다. 어릴 적 엄마에게 차마 입에 담지 못할 말을 내뱉던 아버지의 모습을. 엄마를 향해 고성과 욕설이 날아든 밤들을. 그리고 아주 가끔, 그런 밤이 지나고 나서 엄마의 팔뚝에 든 시퍼런 멍을. 나는 아직도 기억하고 있었다. 자존심 강한 엄마가 깜깜한 주방에서 남몰래 울던 모습을. 좋은 아빠였을진 몰라도 확실히 좋은...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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김현지
2021.12.06 | 조회 357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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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헛헛함’, 적절한 표현인지는 모르겠다. 언제부터인가 내 마음 속으로 자꾸 비집고 들어오는 감정이다. 쫓아내 보려 하지만 계속 마음 속에 머물러 있다. 지금까지 해왔던 일과 삶에 대한 회의감이 마음 한편에 자리를 튼 지 1년 가까이 되어간다. 끊었던 담배도 다시 부쩍 늘었다. 좋아하던 술도 거의 마시지 않는다. 술자리는 매번 비슷한 내용의 대화와 가십거리들로 채워져 있을 뿐이고 다음날 컨디션도 좋지 않아 마실 이유를 느끼지 못 한다. 친구들과 함께 있어도 즐겁지가 않다. 공통의 관심사도 많지 않고, 미숙하고 어리석은 것처럼 보일 때가 많다. 내가 필요로 할 때는 코빼기도 안 보이다 혼자 있고 싶을 때는 항상 눈앞에 얼쩡거린다. 간혹 한숨 쉬는 직원에게 ‘천장 꺼지겠다!’ 큰 소리로 농담을 하면서도 뒤에 가서 어깨를 지그시 잡으며 무언의 위로를 건넸던 내가… 한숨도 부쩍 늘었다. 나도 내 어께를 잡아줄 누군가가 필요한 건가? 가을이 다가와 그런 건지 인생의 가을을 타는 것인지 도무지 갈피를 잡을 수 없다.     회사와 사장   ‘욱’하는 마음에 사직서를 냈다. 사유는 뻔한 ‘일신상의 이유’다. 생각 없이 쓴 이유가 정말 이유가 된 것 같다. 내 몸에 알 수 없는 변화가 생긴 건 분명하다. 바이오리듬처럼 주기적으로 찾아오던 것이 나도 모르게 터져버렸다. 평소 사소한 것에 짜증내는 일도 늘었다. 회사에 대한 불만과 불신을 갖게 되면서부터였다. 정확히 말하면 회사가 아니라 사장에 대한 불만이다. 조금의 암시도 없이 나의 사표를 받은 사장은 완전히 멍한 표정을...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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정진우
2021.12.06 | 조회 240
세미나 에세이 아카이브
  처음에는 잘 몰랐다. 집을 짓고 보니 풍광이 너무 좋다. 나지막한 산들에 둘러싸인 숲속, 조금만 걸어 나가면 숲길이다. 해발 450미터 높이에서 바라보는 산자락들, 그 사이사이로 평창강에서 올라오는 물안개. 날씨에 따라 조금씩 다르지만 아침 일찍은 물안개가 가득하다가, 해가 올라오는 시간에 따라 산자락들이 조금씩 보였다 사라졌다 하면서 마침내 안개가 걷히면 산들이 만드는 겹겹의 선들이 오롯이 그 모습을 드러낸다. 저녁녘에는 붉은 색과 노란 색 계열이 제멋대로 섞인 해 그림자가 산을 긴 타원형으로 물들이며 마치 주황색 호수가 산위에 있는 듯한 착각을 불러일으키기도 한다. 사방은 고요하고 주변에 불빛이 없어 밤에는 여러 별자리들이 보이고, 가끔은 별똥별도 볼 수 있다. 그냥 집에만 있어도 마음이 평안해진다. 아, 참 좋다!     계획대로 되지 않는다   생각만 해도 마음이 평안해지는 이 집은 평창집이다. 우리는 집을 두 번 지었다. 지금 사는 고기동집과 여기 평창집. 고기동집을 지을 무렵, 이전에 아이들 키우며 동네를 만들고 10여 년 간 함께 살았던 성산동 사람들 사이에서 귀촌 이야기가 나왔다. 이제 애들도 독립했으니 시골에 가서 같이 살면 좋지 않겠냐는 것. 그들과 함께 산 세월이 좋은 기억으로 남아있던 우리는 별 고민 없이 합류했다. 우리는 정기적으로 만나면서 어떤 마을을 만들면 좋을지, 각자가 하고 싶은 일도 적어보고 마을 배치도 그려보며 집터를 구하러 다녔다. 여기 저기 다녀보다가 거의 2년 만에 찾은 곳이 이곳 평창이었다. 처음 땅을 계약한 후 집을 짓기까지 거의...
  처음에는 잘 몰랐다. 집을 짓고 보니 풍광이 너무 좋다. 나지막한 산들에 둘러싸인 숲속, 조금만 걸어 나가면 숲길이다. 해발 450미터 높이에서 바라보는 산자락들, 그 사이사이로 평창강에서 올라오는 물안개. 날씨에 따라 조금씩 다르지만 아침 일찍은 물안개가 가득하다가, 해가 올라오는 시간에 따라 산자락들이 조금씩 보였다 사라졌다 하면서 마침내 안개가 걷히면 산들이 만드는 겹겹의 선들이 오롯이 그 모습을 드러낸다. 저녁녘에는 붉은 색과 노란 색 계열이 제멋대로 섞인 해 그림자가 산을 긴 타원형으로 물들이며 마치 주황색 호수가 산위에 있는 듯한 착각을 불러일으키기도 한다. 사방은 고요하고 주변에 불빛이 없어 밤에는 여러 별자리들이 보이고, 가끔은 별똥별도 볼 수 있다. 그냥 집에만 있어도 마음이 평안해진다. 아, 참 좋다!     계획대로 되지 않는다   생각만 해도 마음이 평안해지는 이 집은 평창집이다. 우리는 집을 두 번 지었다. 지금 사는 고기동집과 여기 평창집. 고기동집을 지을 무렵, 이전에 아이들 키우며 동네를 만들고 10여 년 간 함께 살았던 성산동 사람들 사이에서 귀촌 이야기가 나왔다. 이제 애들도 독립했으니 시골에 가서 같이 살면 좋지 않겠냐는 것. 그들과 함께 산 세월이 좋은 기억으로 남아있던 우리는 별 고민 없이 합류했다. 우리는 정기적으로 만나면서 어떤 마을을 만들면 좋을지, 각자가 하고 싶은 일도 적어보고 마을 배치도 그려보며 집터를 구하러 다녔다. 여기 저기 다녀보다가 거의 2년 만에 찾은 곳이 이곳 평창이었다. 처음 땅을 계약한 후 집을 짓기까지 거의...
인디언
2021.12.06 | 조회 278
세미나 에세이 아카이브
백신과 포스트휴먼 정치학 둥글레       에세이 개요에 대해 조원들끼리 서로 코멘트를 해주는 자리에서 지원이는 백신에 대해 써보라며 자기 관심사를 내게 토스했다. 난 흔쾌히 그 주제를 받을 수가 없었다. 코로나19 백신에 대해 내 속에 여러 입장이 혼돈되어 있었기 때문에 백신이라는 주제가 무겁게 느껴졌다. 게다가 백신 관련해서 사람들 사이에서도 갑론을박이 있고 그런 와중에 ‘약사’라는 내 직업은 나에게 답을 요구했다. 그것은 사람들이 내게 하는 질문이기도 했고 나 스스로가 스스로에게 요구하는 의무이기도 했다. 더는 회피할 수는 없었다. 이 기회에 과학적으로도 좀 더 따져 봐야겠다는 생각도 들었다. 해서 아스트라제네카에도 화이자에도 문의를 했는데 상당히 모호한 답변만을 얻을 수 있었다.    이 문의 과정에서 나의 의문은 증폭되었다. 이 의문에 이어 이 사태가 단지 백신의 안전성에 대한 과학적 문제로 환원될 문제는 아니라는 생각이 들었다. 각국이 시행하고 있는 범세계적 백신 정책은 전체주의마냥 한결같고 백신의 개발과 도입과정도 이례적이다. 기존에 우리가 가지고 있던 윤리와 절차는 어디로 가버린 것일까? 브라이도티의 논의를 통해서 이 상황을 포스트휴먼적 시각을 가지고 비판적으로 분석해 보려 한다.       유전자 백신이 연 세상   사실 바이러스로 인한 팬데믹은 이미 예고되고 있었다. 작년에 팬데믹이 시작되고 나서 넷플릭스에서 본 <팬데믹>이라는 다큐에서는 조류독감의 유행을 염려하고 있었고, <<인수공통 모든 전염병의 열쇠>>라는 책에는 코로나 바이러스의 유행 가능성도 함께 언급되고 있었다. 그런데 며칠 전 약사연수교육을 받던 중에 WHO 보고서와 질병 X(1)에...
백신과 포스트휴먼 정치학 둥글레       에세이 개요에 대해 조원들끼리 서로 코멘트를 해주는 자리에서 지원이는 백신에 대해 써보라며 자기 관심사를 내게 토스했다. 난 흔쾌히 그 주제를 받을 수가 없었다. 코로나19 백신에 대해 내 속에 여러 입장이 혼돈되어 있었기 때문에 백신이라는 주제가 무겁게 느껴졌다. 게다가 백신 관련해서 사람들 사이에서도 갑론을박이 있고 그런 와중에 ‘약사’라는 내 직업은 나에게 답을 요구했다. 그것은 사람들이 내게 하는 질문이기도 했고 나 스스로가 스스로에게 요구하는 의무이기도 했다. 더는 회피할 수는 없었다. 이 기회에 과학적으로도 좀 더 따져 봐야겠다는 생각도 들었다. 해서 아스트라제네카에도 화이자에도 문의를 했는데 상당히 모호한 답변만을 얻을 수 있었다.    이 문의 과정에서 나의 의문은 증폭되었다. 이 의문에 이어 이 사태가 단지 백신의 안전성에 대한 과학적 문제로 환원될 문제는 아니라는 생각이 들었다. 각국이 시행하고 있는 범세계적 백신 정책은 전체주의마냥 한결같고 백신의 개발과 도입과정도 이례적이다. 기존에 우리가 가지고 있던 윤리와 절차는 어디로 가버린 것일까? 브라이도티의 논의를 통해서 이 상황을 포스트휴먼적 시각을 가지고 비판적으로 분석해 보려 한다.       유전자 백신이 연 세상   사실 바이러스로 인한 팬데믹은 이미 예고되고 있었다. 작년에 팬데믹이 시작되고 나서 넷플릭스에서 본 <팬데믹>이라는 다큐에서는 조류독감의 유행을 염려하고 있었고, <<인수공통 모든 전염병의 열쇠>>라는 책에는 코로나 바이러스의 유행 가능성도 함께 언급되고 있었다. 그런데 며칠 전 약사연수교육을 받던 중에 WHO 보고서와 질병 X(1)에...
둥글레
2021.07.21 | 조회 368
세미나 에세이 아카이브
  그 많던 일베는 어디로 갔을까   차명식       몇 번째 시간이었나, 세미나가 끝나갈 무렵 문탁 선생님은 오늘날 우리 사회 페미니즘의 양상을 말씀하시면서 그중 우리가 생각해볼만한 문제로 ‘그 많던 메갈은 어디로 갔을까’를 꼽으셨다. 소위 ‘페미니즘 리부트’의 기점으로 여겨지던 메갈리아 웹사이트가 동력을 상실한 지금 한국 사회의 페미니즘 운동은 어떠한 형태로 수행되고 있는가를 고민해봐야 한다는 의미였다고 생각한다. 그런데 나는 그 질문을 듣는 순간 또 다른 질문을 하나 떠올렸다. ‘그렇다면, 그 많던 일베는 어디로 갔을까?’   이러한 질문의 변환은 급작스러운 발상이라기보다는 이번 양생 프로젝트를 수강하며 내가 가지고 있었던 특정한 문제의식에 기인한다. 그것은 이른바 ‘대문자 남성’의 문제다. 내가 생각하기에 페미니즘은 타자화된 여성에 대한 통찰에서 시작하여 여성 주체를 재구성하여 세계를 마주하는 과정이며 해러웨이, 브라이도티, 버틀러는 그 과정에서 각기 다른 방향성을 제시하였다. 따라서 우리는 그들을 공부하는 과정에서 기존의 여성 개념을 해체하고 보다 다양한 각도에서 다양한 상으로서의 여성을 살필 수 있었다. 헌데 우리가 그러한 공부를 토대로 현실의 문제를 논하면서 남성에 대하여 말할 때는 대개 단일한 주체이자 동일자로서만 호명한다는 생각이 들었다. 물론 근대적 인간주체가 백인-성인-남성의 형상을 가졌으며 수 세기 동안 남성적 주체가 사회의 주류로 군림하면서 동일자의 법을 집행해 왔음은 분명하다. 하지만 그것을 현재 우리의 상황, 특히 젊은 세대에서 젠더 갈등이 격화되고 있는 우리 현실에 가져와 적용하려 할 때 나는 어떠한 위화감을 느낀다.   그 위화감의 정체를,...
  그 많던 일베는 어디로 갔을까   차명식       몇 번째 시간이었나, 세미나가 끝나갈 무렵 문탁 선생님은 오늘날 우리 사회 페미니즘의 양상을 말씀하시면서 그중 우리가 생각해볼만한 문제로 ‘그 많던 메갈은 어디로 갔을까’를 꼽으셨다. 소위 ‘페미니즘 리부트’의 기점으로 여겨지던 메갈리아 웹사이트가 동력을 상실한 지금 한국 사회의 페미니즘 운동은 어떠한 형태로 수행되고 있는가를 고민해봐야 한다는 의미였다고 생각한다. 그런데 나는 그 질문을 듣는 순간 또 다른 질문을 하나 떠올렸다. ‘그렇다면, 그 많던 일베는 어디로 갔을까?’   이러한 질문의 변환은 급작스러운 발상이라기보다는 이번 양생 프로젝트를 수강하며 내가 가지고 있었던 특정한 문제의식에 기인한다. 그것은 이른바 ‘대문자 남성’의 문제다. 내가 생각하기에 페미니즘은 타자화된 여성에 대한 통찰에서 시작하여 여성 주체를 재구성하여 세계를 마주하는 과정이며 해러웨이, 브라이도티, 버틀러는 그 과정에서 각기 다른 방향성을 제시하였다. 따라서 우리는 그들을 공부하는 과정에서 기존의 여성 개념을 해체하고 보다 다양한 각도에서 다양한 상으로서의 여성을 살필 수 있었다. 헌데 우리가 그러한 공부를 토대로 현실의 문제를 논하면서 남성에 대하여 말할 때는 대개 단일한 주체이자 동일자로서만 호명한다는 생각이 들었다. 물론 근대적 인간주체가 백인-성인-남성의 형상을 가졌으며 수 세기 동안 남성적 주체가 사회의 주류로 군림하면서 동일자의 법을 집행해 왔음은 분명하다. 하지만 그것을 현재 우리의 상황, 특히 젊은 세대에서 젠더 갈등이 격화되고 있는 우리 현실에 가져와 적용하려 할 때 나는 어떠한 위화감을 느낀다.   그 위화감의 정체를,...
명식
2021.07.13 | 조회 341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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