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읽고 쓰기 1234] 수행을 실천하는 21세기형 생태보살

도라지
2023-09-04 08:48
159

 

수행을 실천하는 21세기형 생태보살

데이비드 로이, 『과학이 우리를 구원하지 못할 때 불교가 할 수 있는 것』을 읽고

 

 

한 때 인류가 멸종이 된다고 해도 그게 무슨 문제일까? 라는 생각을 한 적이 있었다. 지구에서 인간 종이 사라져도 지구는 태양 주위를 돌며 ‘스스로 그러하게’ 존재할 테니 말이다. 인간 종이 지구에 행해왔던 일들을 생각하면 인류가 생태적 재난으로 생존을 위협받는 것은 업보일 뿐. 하지만 인간이 지구의 다른 생명들과 분리되지 않았음을 알고 느끼게 된 후로 자주 마음이 아프다. 영화 ‘수라’에서 봤던 아기 쇠제비갈매기의 안부가 궁금한 이유다. 정확히 언제부터인지 잘 모르겠지만 불교 공부 이후부터였던 것은 확실하다.

 

 

영화 '수라'에서 어미 쇠제비갈매기와 아기 쇠제비갈매기

 

 

불교에서 ‘연기법’과 ‘공성(空)’에 대한 이해는 우리가 다른 이들이나 지구의 뭇 생명들과 분리되지 않았다는 깨달음을 준다. 선수행자이자 사회적 참여불교 활동가인 데이비드 로이가 우리에게 당면한 생태-사회적 위기에 ‘에코다르마’를 들고나온 이유도 불교적 깨달음의 생태적 시사점에서 찾을 수 있다.  ‘에코다르마’는 불교 전통이 최근 전개하는 새로운 용어로, 생태적인 관심(eco)에 불교의 가르침과 그에 연관된 영적 전통(dharma)을 결합한 것이다. ‘생태 불교’라고도 할 수 있는 ‘에코다르마’에서는 궁극의 깨달음을 ‘사회적 실천’이라고 본다. 그리고 이를 실천하는 이들이 ‘생태 보살’이다.

 

 

불교의 위기인가? 아니면 불교의 기회인가?

 

환경 위기가 최근에 생겨난 것은 아니다. 하지만 (저자의 말에 의하면) 불교 수행자들과 불교단체들은 2010년 후반까지 (적어도 미국에서는) 생태위기에 대한 관심이 별로 없었다고 한다. 2009년 『기후위기에 대한 불교적 응답(A Buddhist Reponse to the Clomate Emergency)』이라는 책을 저자가 공동 편집했는데 무려 달라이 라마, 틱낫한, 비구 보디, 조애너 메이시, 조셉 골드스타인 등이 기고한 좋은 글들이 실렸음에도 이 책은 불교계로부터 놀라울 정도로 관심을 끌지 못했으며, 최근 몇 년 ‘에코다르마’에 대한 관심의 증가에도 불구하고 사회적 참여를 중심으로 하는 불교 강연은 참가자 수가 너무 적어 취소된 경우도 많았다고 한다.

 

 

한편 저자는 일부 다른 불교기관들은 재정적으로 번창하고 있다는 점을 이야기하는데, 이들은 주로 개인들이 쉬면서 수행할 수 있는 인기 높은 명상센터들이다. 물론 저자가 이러한 예를 사회적 참여불교의 실패로 보고 있지는 않다. 이것은 현재 미국 불교의 양상일 뿐, 오히려 저자가 주목하는 점은 교도소 활동, 호스피스 케어, 노숙자 식당 운영 등, 불교인들의 사회적 봉사다. 우리는 고통받는 노숙자를 만났을 때 자비롭게 대응하지만 이 많은 노숙자를 양산하는 사회시스템에 대해서도 너무 자비롭다는 것이다.  

 

 

기후 위기에 대응할 개인적 행동은 많다. 하이브리드나 전기 자동차를 구입한다든지 태양광 패널을 설치하거나 채식을 하는 등 개인의 생활방식을 바꾸는 것 말이다. 이러한 ‘녹색소비’도 물론 중요하다. 그러나 개인의 변화 그 자체만으로는 충분할 수 없다. 저자는 이제 이렇게 노력하는 개인들이 개인적 실천 후 사회 시스템을 바꾸기 위해 총력을 기울이도록 하는 방법에 대한 고민을 우리가 함께 해야 할 때라고 말한다.

 

 

2500년의 불교 역사는 다양한 문화적 형태를 취하면서 아시아 대부분의 지역으로 전파됐다. 그 과정에서 역사적 지리적으로 진화한 불교의 다양성을 고려하면 각각 강조하는 가르침과 수행 전통이 다름은 피해 갈 수 없다. 저자는 그 과정에서 생겨난 다양한 견해들 가운데 서로 가장 당연시하는 것들에 대해 우리가 물을 때, 불교적 전통에서 생태위기를 극복할 최상의 방법을 찾을 수 있다고 보고 있다.

 

 

전통적인 아시아 불교, 특히 테라바다(상좌부)의 가르침과 수행의 목적은 고통스러운 윤회를 벗어나는 것. 이와는 대조적으로 현대 불교, 특히 불교 심리치료와 대다수의 마음챙김(mindfulness) 운동에서는 자신의 마음을 변화시킴으로써 이 세계와 조화롭게 되는 것을 강조한다. 개인의 마음이 문제이지 세계가 문제가 아니라는 것이다. 이생을 벗어나는 데 목표를 둔 내세적 불교와 우리를 이 세계에 적응하여 더 잘 살도록 돕는 현대 불교는 정반대의 것처럼 보인다. 하지만 둘 다 현세의 문제에 관해 무관심하기 때문에 현세를 더 나은 곳으로 만드는 데 큰 관심을 두지 않는다는 점에서는 비슷하다. 하지만 저자는 여기에서 생태위기에 대한 불교의 ‘해결책’을 찾는다. 내면(명상)과 외형(행동주의)의 두 가지 수행이 조화롭게 일어나게 하는 방법을 두 불교의 전통에서 찾으면 된다는 것이다.

 

 

명상은 자아의식을 해체하여 자아를 구성하는 생각, 느낌, 행위 등 습관적인 패턴에 변화를 주고 일상을 재구성하도록 돕는다. 이것은 타인과 관계 맺는 것뿐만 아니라 세계를 인식하는 태도에 영향을 줄 수 있다. 또한 테라바다 전통에서는 최종적으로 육체가 소멸할 때의 ‘반열반’보다 붓다가 보리수 아래서 성취한 ‘열반’의 토대가 되는 ‘연기법’을 가져올 수 있다. 우주의 모든 것들이 상호 의존하며 존재한다는 ‘연기법’에 대한 이해는 우리가 지구의 다른 생명들과 분리되지 않았음을 알아차리게 하여 지구와 관계 맺는 행동 방식에 전환점이 될 수 있다.

 

 

그런데 저자의 고민은 초기불교의 가르침과 수행 전통, 그리고 대승의 ‘보살(보디사트바)’이라는 말로 불교 역사에서 이미 구현된 것이 아닐까? ‘보살’이란 ‘보리(보디)’와 ‘살타(사트바)’의 합성어. 이때 ‘보리’란 연기적 존재(空)를 이해하는 관점 곧 깨달음이고, ‘살타’는 중생을 뜻한다. ‘보살’이란 구체적인 시간과 장소에서 어떤 상황을 만나더라도 ‘보리’ 즉 깨달음에 근거한 행동양식을 실천하는 이들이라 할 수 있다. 물론 사회적 참여불교 활동가인 저자도 이를 모르지는 않았을 것이다. 짐작하건대 (자세히는 모르겠지만) 미국 불교의 개인주의적인 성향을 해결하고 현시점에서 참여불교가 가져야 할 생태위기의 중요성을 알리기 위해, 그들에게 친숙한 명상수행과 테라바다 전통에서, ‘에코다르마’와 ‘생태 보살’의 개념을 설명하려고 시도한 것 같다. 저자는 보살의 길에 대한 현대적인 재검토를 요구하며 사회제도나 구조로 인해 쌓여버린 집단적 고통에 적합한 21세기형 보살을 질문한 것이다.

 

 

저자는 불교의 가르침은 이제 새로운 보살도로 확장되어 사회적으로 참여적인 독특한 특징을 갖게 될 것이라고 이야기한다. 연기법의 상호의존성과 비폭력을 강조하는 불교는 분노가 아닌 사랑과 자비에 의한 정치를 의미하기에, 불교적 관점에서 보면 사회의 기본적인 문제는 부유하고 힘있는 ‘나쁜’ 사람들이 아니라 변화되어야 할 집단적인 탐욕과 분노와 무지로 제도화된 구조이다. 불교의 가르침은 지금껏 많은 진보적 운동을 약화시킨 이념적 다툼을 극복하는 데 도움이 될 수 있을 것이며 역사적 맥락에 따라 방편을 만들어온 대승의 지혜는 지속가능한 사회운동에 필요한 창의적 상상력의 필요성을 추동할 수 있다. 

 

 

 

 

 

생태보살의 길

 

사회참여의 시대적 중요성을 인정하는 것은 보통 자기 마음의 평화에 집중하라는 가르침을 받은 불교인들에게는 큰 진전일 것이다. 한편 사회적 문제 해결을 위해 헌신한 사람들은 그 결과에 따른 좌절, 분노, 우울, 피로감 등에 시달리는 경향이 있어 왔다. 여기에 참여적 보살, 생태보살의 길은 서로에게 필요한 것을 제공한다. 명상은 평정심을 지탱하는 내적 통찰을 길러주기 때문에 목표지향적인 사회적 활동가들이 자신의 심리상황에 빠지지 않고 깨달음의 방향으로 나가도록 도와줄 것이다. 이제 세상의 문제에 관한 참여는 개인의 영적 수행을 방해하는 것이 아니라 우리 자신의 변화에서 핵심으로 이해될 수 있다. 통찰력과 평정심을 기르는 것으로 행동의 결과에 집착하지 않고 행동하는 보살의 길을 갈수 있게 된다.

 

 

대승의 보살은 네 가지 큰 서원을 한다. 사홍서원이라고 하는데 그중에는 “중생의 수가 셀 수 없이 많더라도 나는 그들을 모두 해탈시키기를 서원합니다.” 라는 내용을 담은 ‘중생무변서원도(衆生無邊誓願度)’가 있다.  서원에 필요한 실천과 성취가 실제 가능한지를 생각하기도 전에 서원의 스케일에 먼저 압도당한다. 대체 이러한 서원의 성취가 가능하다는 말인가? 그렇지 않다면 이것은 성취하기 불가능한 것을 맹세하는 것이다. 하지만 서원이 실현될 수 없다는 것. 이것은 문제가 아니라 핵심이기도 하다.

 

 

어떠한 보살도 자신의 서원을 완벽하게 수행할 수 없다. 그래도 괜찮다. 그의 임무는 완벽해지는 것이 아니라 가능한 최선을 다하는 것. 성취될 수 없기에 서원이 진정으로 요구하는 것은 삶의 방향을 새롭게 조정하는 것이다. 자아에 집착하던 일상이 모든 존재의 행복을 위한 관심으로 향하게 된다. 하지만 결과에 집착하지 않고 행동하는 것은 어려운 일. 그래서 더욱 명상을 통해 영적인 바탕으로 수행하는 보살이 요구된다.

 

 

깨달음으로 인한 사회적 참여와 명상 수행을 통한 영적인 변모, 이 두 가지 수행을 조화롭게 실천하는 것이 저자가 말하는 ‘에코다르마’이며 그들이 ‘생태 보살’이다. 현세에 대한 관심과 함께 생태적 사회적으로 참여하는 방식을 고민하고, 제도적인 구조의 문제까지 해결하려 노력하는 생태 보살! 크게 새롭게 느껴지는 보살의 정의는 아니었지만 정확히 지금 당면한 사회적 문제들을 해결하는 데 필요한 영적 패러다임이라는 것은 부정할 수 없겠다.

 

 

‘에코다르마’나 ‘생태 보살’이 어떤 특별한 개념에 한정되는 말은 아닌 것 같다. 또한 반드시 불교적 언어만으로 표현될 필요도 없을 것 같다. 도래한 생태-사회적 위기에 예견된 미래를 모르지 않지만 그럼에도 최선을 다하는 행동이 ‘에코다르마’이며 그들이 ‘생태 보살’이 아닐까.  최근에 나는 그들을 전장연에서 보았고, 영화 ‘수라’에서 보았다. 그리고 종종 문탁 안에서도 본다.

 

 

문득 친구들과 함께 책만 읽을 것이 아니라 명상을 하는 기회도 종종 생겼으면 좋겠다는 생각을 한다. 언젠가 어느 길 위에서 함께 손잡을 친구들이 많아질 것만 같다.

댓글 2
  • 2023-09-04 17:51

    결과에 집착하지 않고 내가 하고 싶은 일 하기, 우리 모두 연결되어 있음을 알고 지구를 위한 일을 하기, 결국 지구를 위한 일도 꼭 잘 되어야 한다는 집착없이 할 수 있는 만큼 기쁘게 하기~ 왠지 마음 가볍게 만드는 도라지님의 보살글이네요.

  • 2023-09-29 11:50

    뒤늦게 잘 읽고 갑니다.
    불알못이라 다 알아듣기는 어렵지만, 무슨 메세지를 전하는지는 이해했어요.

세미나 에세이 아카이브
아론 베나바브, 『자동화 사회와 노동의 미래』1) ― 미래에, 구두는 누가 닦을 것인가?   사소하지 않은 문제 프랜시스 윈의 맑스 전기에는 이런 일화가 나온다. 맑스가 머물던 루트비히 쿠겔만의 집에 찾아온 손님이 맑스에게 ‘공산주의 사회에서 구두는 누가 닦나요?’라고 묻는다. 이에 모욕감을 느낀 맑스는 ‘당신이 닦으시오!’라고 쏘아붙였다2). 그렇다. 세상이 어떻게 바뀌더라도 누군가는 구두를 닦아야 하고, 거리를 청소해야하며, 음식물 쓰레기도 누군가는 수거해야 한다. 물론 ‘중요한 것은 체제의 변환이지 그런 사소한 것은 문제가 아니’라고 생각할 수 있다. 나 역시 그렇게 생각한 적이 있다. 게다가 맑스주의 담론 안에는 그런 ‘사소한 문제제기’에 대한 충실한 방어 논리도 있다. 그것은 ‘사회적 관계가 개체의 의식을 결정한다는 명제’다. 사적소유가 철폐된 세계에서 그런 일들은 더 이상 하기 싫은 일이 아니게 될 테고, 누가되었든, 그게 누구든 그것을 하기만 하면 된다! 그러니까 자본주의 하에서 빈번한, 직업의 귀천에 따른 사회적 차별은 그곳이 ‘자본주의’가 지배하는 세계이기 때문에 일어난다는 것, 따라서 그것은 자본주의적 차별일 뿐이다. 그런데 정말 그런가? 많은 사람들이 그런 일들을 꺼리는 것이 다만 ‘자본주의적 심성’에서 비롯된 문제일까? 그러면 사회적 관계가 전체가 전변했던 현실 사회주의 시스템에서 그런 일들은 누구의 몫이었을까? 모르긴 몰라도 이른바 ‘고급 당원’의 일은 아니었을 것이다. 다시 말해 사회주의 시스템은 결국 자신의 목표였던 계급의 철폐를 달성하는 데 실패했다. 이전의 계급을 새로운 계급으로 대체했을 뿐. 심지어 ‘출신성분’을 따져가며 계급을 분할한다는 점에서 현실 사회주의는 계급 철폐...
아론 베나바브, 『자동화 사회와 노동의 미래』1) ― 미래에, 구두는 누가 닦을 것인가?   사소하지 않은 문제 프랜시스 윈의 맑스 전기에는 이런 일화가 나온다. 맑스가 머물던 루트비히 쿠겔만의 집에 찾아온 손님이 맑스에게 ‘공산주의 사회에서 구두는 누가 닦나요?’라고 묻는다. 이에 모욕감을 느낀 맑스는 ‘당신이 닦으시오!’라고 쏘아붙였다2). 그렇다. 세상이 어떻게 바뀌더라도 누군가는 구두를 닦아야 하고, 거리를 청소해야하며, 음식물 쓰레기도 누군가는 수거해야 한다. 물론 ‘중요한 것은 체제의 변환이지 그런 사소한 것은 문제가 아니’라고 생각할 수 있다. 나 역시 그렇게 생각한 적이 있다. 게다가 맑스주의 담론 안에는 그런 ‘사소한 문제제기’에 대한 충실한 방어 논리도 있다. 그것은 ‘사회적 관계가 개체의 의식을 결정한다는 명제’다. 사적소유가 철폐된 세계에서 그런 일들은 더 이상 하기 싫은 일이 아니게 될 테고, 누가되었든, 그게 누구든 그것을 하기만 하면 된다! 그러니까 자본주의 하에서 빈번한, 직업의 귀천에 따른 사회적 차별은 그곳이 ‘자본주의’가 지배하는 세계이기 때문에 일어난다는 것, 따라서 그것은 자본주의적 차별일 뿐이다. 그런데 정말 그런가? 많은 사람들이 그런 일들을 꺼리는 것이 다만 ‘자본주의적 심성’에서 비롯된 문제일까? 그러면 사회적 관계가 전체가 전변했던 현실 사회주의 시스템에서 그런 일들은 누구의 몫이었을까? 모르긴 몰라도 이른바 ‘고급 당원’의 일은 아니었을 것이다. 다시 말해 사회주의 시스템은 결국 자신의 목표였던 계급의 철폐를 달성하는 데 실패했다. 이전의 계급을 새로운 계급으로 대체했을 뿐. 심지어 ‘출신성분’을 따져가며 계급을 분할한다는 점에서 현실 사회주의는 계급 철폐...
정군
2023.09.11 | 조회 229
세미나 에세이 아카이브
달관주의와 신비주의 자여가 병에 걸렸습니다. 자사가 문병을 가서 자여를 보고 말했습니다. “위대하구나, 조물자! 그대를 이렇게 곱사등이로 만들었구나!” 그의 창자는 위쪽으로 올라붙었으며, 턱은 배꼽에 파묻혔고, 어깨는 정수리보다 높았으며, 상투만 달랑 하늘을 향해 있었습니다. 음양의 기가 흐트러져 많이 아파보였으나 마음은 평온해 보였습니다. 자여는 비틀거리며 우물로 가서 자신을 비춰보고 말했습니다. “위대하구나, 조물자! 나를 이렇게 곱사등이로 만들었구나!” 자사가 물었습니다. “자네는 그 모습이 싫은가?” 자여가 말했습니다. “아니네, 그럴 리가 있는가? 내 왼팔이 점점 변해 닭이 된다면 나는 새벽을 알리겠네. 내 오른팔이 점점 변해 활이 된다면 나는 올빼미를 잡아 구워먹겠네. 내 꼬리뼈가 점점 변해 수레바퀴가 되고 내 마음이 말이 된다면, 그것을 탈 테니 따로 수레가 필요하겠는가? 삶을 얻는 것도 때를 만났기 때문이고 그것을 잃는 것도 때를 따르는 것일 뿐이네. 생사를 편안히 때의 추이에 맡기면 슬픔과 기쁨이 끼어들 여지가 없다네. 옛사람은 이를 일러 ‘하늘이 내린 형벌에서 풀려나는 것’이라 하였네. 그런데 스스로 풀려나지 못하는 것은 사물에 얽매여 있기 때문이지. 하지만 사물이 자연의 이치를 이기지 못한다는 것은 오래된 진실! 내가 무엇을 싫어하겠는가?”(『장자』내편, <대종사(大宗師)>)   이 책의 제목 『장자, 닭이 되어 때를 알려라』가 연유한 부분이다. 『장자』 <대종사>편에 나오는 이 이야기는 ‘장자가 나비가 되고 나비가 장자가 되는’ 호접몽(胡蝶夢)의 구절 못지않게 해석이 분분하다. 중국의 근대철학자 호적(胡適)은 이 부분을 한 마디로 ‘낙천입명(樂天立命)’이라고 비판했다. 낙천입명은 하늘의 명을 따라 즐기고 이에 순응한다는 뜻의 ‘낙천지명(樂天之命)’과 같은...
달관주의와 신비주의 자여가 병에 걸렸습니다. 자사가 문병을 가서 자여를 보고 말했습니다. “위대하구나, 조물자! 그대를 이렇게 곱사등이로 만들었구나!” 그의 창자는 위쪽으로 올라붙었으며, 턱은 배꼽에 파묻혔고, 어깨는 정수리보다 높았으며, 상투만 달랑 하늘을 향해 있었습니다. 음양의 기가 흐트러져 많이 아파보였으나 마음은 평온해 보였습니다. 자여는 비틀거리며 우물로 가서 자신을 비춰보고 말했습니다. “위대하구나, 조물자! 나를 이렇게 곱사등이로 만들었구나!” 자사가 물었습니다. “자네는 그 모습이 싫은가?” 자여가 말했습니다. “아니네, 그럴 리가 있는가? 내 왼팔이 점점 변해 닭이 된다면 나는 새벽을 알리겠네. 내 오른팔이 점점 변해 활이 된다면 나는 올빼미를 잡아 구워먹겠네. 내 꼬리뼈가 점점 변해 수레바퀴가 되고 내 마음이 말이 된다면, 그것을 탈 테니 따로 수레가 필요하겠는가? 삶을 얻는 것도 때를 만났기 때문이고 그것을 잃는 것도 때를 따르는 것일 뿐이네. 생사를 편안히 때의 추이에 맡기면 슬픔과 기쁨이 끼어들 여지가 없다네. 옛사람은 이를 일러 ‘하늘이 내린 형벌에서 풀려나는 것’이라 하였네. 그런데 스스로 풀려나지 못하는 것은 사물에 얽매여 있기 때문이지. 하지만 사물이 자연의 이치를 이기지 못한다는 것은 오래된 진실! 내가 무엇을 싫어하겠는가?”(『장자』내편, <대종사(大宗師)>)   이 책의 제목 『장자, 닭이 되어 때를 알려라』가 연유한 부분이다. 『장자』 <대종사>편에 나오는 이 이야기는 ‘장자가 나비가 되고 나비가 장자가 되는’ 호접몽(胡蝶夢)의 구절 못지않게 해석이 분분하다. 중국의 근대철학자 호적(胡適)은 이 부분을 한 마디로 ‘낙천입명(樂天立命)’이라고 비판했다. 낙천입명은 하늘의 명을 따라 즐기고 이에 순응한다는 뜻의 ‘낙천지명(樂天之命)’과 같은...
봄날
2023.09.05 | 조회 180
      페미니즘과 나는 애증의 관계다. 아마도 내가 일방적으로 느끼는 애증일 테지만, 나는 한때 주위에 페미니즘을 강매하는(?) 열성도였고, 또 어떤 때는 그 한계를 느끼며 버리고자 했다. 지금은 죽지 않고 다시 또 살아 돌아온 심지어 확장되어 나부끼고 있는 페미니즘의 깃발을 보며 겸손하게 그 부름에 응답하기로 마음먹었다. 페미니즘은 내가 갖거나 버릴 수 있는 이론이 아니라, 내 친구들이 구체적인 현실에서 절실한 필요를 느끼며 부여잡고 일종의 인식론, 실천론에 가깝다. 유교를 공부하고 있는 젊은 여성인 나는 오늘날의 페미니즘적 맥락을 피해 갈 수 없을 것이며, 오히려 꺾이지 않는 페미니즘에 유교만의 방식으로 응답해야 한다고 느낀다. 유교와 페미니즘이 결합하는 것은 가능할까?       1. 유교를 구원하던 페미니즘     유교와 페미니즘이라니, 조합이 매우 낯설게 느껴진다. 나의 또래 페미니스트들 중에 유교가 우리 문화에 깊숙이 자리 잡고 있으며, 그것이 한국 여성의 삶에 악영향을 끼친 원흉이자 여태껏 끈질기게 살아남은 악령이라는 주장에 동의하지 않을 이는 거의 없을 것이다. 내가 읽어온 페미니즘 책에서는 고대부터 여성들은 차별당해 왔다는 이야기를 했다. 특히 고대 동양 여성들의 삶에 대한 안쓰러운 시각은 오래전부터 기정사실화되어 왔다.      초기 프랑스 페미니스트인 쥘리아 크리스테바는 1974년 <중국 여성에 관하여>에서 한 장의 제목을 ‘공자-여자를 잡아먹는 자’라고 붙이기도 했다. 1990년대 중반까지도 유교는 서구적 삶의 방식보다 뒤떨어지는 가부장적 이데올로기를 상징했다. 마저리 울프에게 유교란 여성 혐오와 동의어였다. “상하이의 젊은이들이 스탠포드대학교 MBA를 취득하고 다국적...
      페미니즘과 나는 애증의 관계다. 아마도 내가 일방적으로 느끼는 애증일 테지만, 나는 한때 주위에 페미니즘을 강매하는(?) 열성도였고, 또 어떤 때는 그 한계를 느끼며 버리고자 했다. 지금은 죽지 않고 다시 또 살아 돌아온 심지어 확장되어 나부끼고 있는 페미니즘의 깃발을 보며 겸손하게 그 부름에 응답하기로 마음먹었다. 페미니즘은 내가 갖거나 버릴 수 있는 이론이 아니라, 내 친구들이 구체적인 현실에서 절실한 필요를 느끼며 부여잡고 일종의 인식론, 실천론에 가깝다. 유교를 공부하고 있는 젊은 여성인 나는 오늘날의 페미니즘적 맥락을 피해 갈 수 없을 것이며, 오히려 꺾이지 않는 페미니즘에 유교만의 방식으로 응답해야 한다고 느낀다. 유교와 페미니즘이 결합하는 것은 가능할까?       1. 유교를 구원하던 페미니즘     유교와 페미니즘이라니, 조합이 매우 낯설게 느껴진다. 나의 또래 페미니스트들 중에 유교가 우리 문화에 깊숙이 자리 잡고 있으며, 그것이 한국 여성의 삶에 악영향을 끼친 원흉이자 여태껏 끈질기게 살아남은 악령이라는 주장에 동의하지 않을 이는 거의 없을 것이다. 내가 읽어온 페미니즘 책에서는 고대부터 여성들은 차별당해 왔다는 이야기를 했다. 특히 고대 동양 여성들의 삶에 대한 안쓰러운 시각은 오래전부터 기정사실화되어 왔다.      초기 프랑스 페미니스트인 쥘리아 크리스테바는 1974년 <중국 여성에 관하여>에서 한 장의 제목을 ‘공자-여자를 잡아먹는 자’라고 붙이기도 했다. 1990년대 중반까지도 유교는 서구적 삶의 방식보다 뒤떨어지는 가부장적 이데올로기를 상징했다. 마저리 울프에게 유교란 여성 혐오와 동의어였다. “상하이의 젊은이들이 스탠포드대학교 MBA를 취득하고 다국적...
고은
2023.09.04 | 조회 138
세미나 에세이 아카이브
    진고응의 『장자』읽기     지난 번 <읽고쓰기 1234>에서 나는, 유소감이 장자의 도를 절대 자유로 풀이하고 있다고 소개했다. 그에게 장자의 도는 옴짝달싹 할 수 없는 각박한 현실과 별개인 “정신적 자유”이다. 정신적 자유가 절대 자유로 풀이되는 이유는 바깥 현실로부터 어떠한 영향도 받지 않기 때문이다. 도의 절대성이란 무조건성, 즉 일개 사물과 달리 도는 어디에도 의존하지 않는다는 의미이다. 이를 통해 나는 <읽고쓰기 1234> 시즌1에서 저자 정용선의 해체전략이나 시즌2 유소감의 도의 성질에 대한 풀이까지 모두 장자의 도를 “도가철학”의 흐름 속에서 파악한 것임을 알게 되었다. 따라서 도가철학의 입장에서 장자의 도가 어떻게 절대 자유라고 불리게 되었는지를, 노장철학의 대가인 진고응의 『노장신론』을 통해 구체적으로 살펴볼 계획이다. 먼저 『사기』를 통해 노자와 장자의 연관성을 알아보자.   노자와 장자는 어떻게 연결되었나   “태사공은 말한다. 노자가 귀하게 여긴 것은 도로(,) 허무를 추구하였고 변화에 따라 무위로 화하였으므로 지은 책의 말이 미묘하고도 알기 어렵다. 장자는 (유가의) 도덕을 흩어 논조가 방자한데 요점은 또한 자연으로 귀의하였다.” 『사기열전』 연암서가, <노자·한비열전>   장자는 어째서 도가철학으로 분류되었을까. 노자와 장자가 함께 묶인 그 기원을 찾아보자. 사마천은 <노자·한비열전>에서 장자를 노자의 계승자로 소개한다. 이에 대한 근거는 두 가지이다. 첫째 노자와 장자 둘 다 은둔자로 살았다. 노자는 공자가 주나라로 가서 예를 물을 정도로 도덕과 학문에 뛰어났지만, 은둔자로 살았기 때문에 지금도 생몰연대가 확실치 않다. 장자 역시 현인이라고 유명세를 떨쳤지만 입신양명의 기회가 있을 때마다...
    진고응의 『장자』읽기     지난 번 <읽고쓰기 1234>에서 나는, 유소감이 장자의 도를 절대 자유로 풀이하고 있다고 소개했다. 그에게 장자의 도는 옴짝달싹 할 수 없는 각박한 현실과 별개인 “정신적 자유”이다. 정신적 자유가 절대 자유로 풀이되는 이유는 바깥 현실로부터 어떠한 영향도 받지 않기 때문이다. 도의 절대성이란 무조건성, 즉 일개 사물과 달리 도는 어디에도 의존하지 않는다는 의미이다. 이를 통해 나는 <읽고쓰기 1234> 시즌1에서 저자 정용선의 해체전략이나 시즌2 유소감의 도의 성질에 대한 풀이까지 모두 장자의 도를 “도가철학”의 흐름 속에서 파악한 것임을 알게 되었다. 따라서 도가철학의 입장에서 장자의 도가 어떻게 절대 자유라고 불리게 되었는지를, 노장철학의 대가인 진고응의 『노장신론』을 통해 구체적으로 살펴볼 계획이다. 먼저 『사기』를 통해 노자와 장자의 연관성을 알아보자.   노자와 장자는 어떻게 연결되었나   “태사공은 말한다. 노자가 귀하게 여긴 것은 도로(,) 허무를 추구하였고 변화에 따라 무위로 화하였으므로 지은 책의 말이 미묘하고도 알기 어렵다. 장자는 (유가의) 도덕을 흩어 논조가 방자한데 요점은 또한 자연으로 귀의하였다.” 『사기열전』 연암서가, <노자·한비열전>   장자는 어째서 도가철학으로 분류되었을까. 노자와 장자가 함께 묶인 그 기원을 찾아보자. 사마천은 <노자·한비열전>에서 장자를 노자의 계승자로 소개한다. 이에 대한 근거는 두 가지이다. 첫째 노자와 장자 둘 다 은둔자로 살았다. 노자는 공자가 주나라로 가서 예를 물을 정도로 도덕과 학문에 뛰어났지만, 은둔자로 살았기 때문에 지금도 생몰연대가 확실치 않다. 장자 역시 현인이라고 유명세를 떨쳤지만 입신양명의 기회가 있을 때마다...
여울아
2023.09.04 | 조회 176
세미나 에세이 아카이브
  수행을 실천하는 21세기형 생태보살 데이비드 로이, 『과학이 우리를 구원하지 못할 때 불교가 할 수 있는 것』을 읽고     한 때 인류가 멸종이 된다고 해도 그게 무슨 문제일까? 라는 생각을 한 적이 있었다. 지구에서 인간 종이 사라져도 지구는 태양 주위를 돌며 ‘스스로 그러하게’ 존재할 테니 말이다. 인간 종이 지구에 행해왔던 일들을 생각하면 인류가 생태적 재난으로 생존을 위협받는 것은 업보일 뿐. 하지만 인간이 지구의 다른 생명들과 분리되지 않았음을 알고 느끼게 된 후로 자주 마음이 아프다. 영화 ‘수라’에서 봤던 아기 쇠제비갈매기의 안부가 궁금한 이유다. 정확히 언제부터인지 잘 모르겠지만 불교 공부 이후부터였던 것은 확실하다.     영화 '수라'에서 어미 쇠제비갈매기와 아기 쇠제비갈매기     불교에서 ‘연기법’과 ‘공성(空)’에 대한 이해는 우리가 다른 이들이나 지구의 뭇 생명들과 분리되지 않았다는 깨달음을 준다. 선수행자이자 사회적 참여불교 활동가인 데이비드 로이가 우리에게 당면한 생태-사회적 위기에 ‘에코다르마’를 들고나온 이유도 불교적 깨달음의 생태적 시사점에서 찾을 수 있다.  ‘에코다르마’는 불교 전통이 최근 전개하는 새로운 용어로, 생태적인 관심(eco)에 불교의 가르침과 그에 연관된 영적 전통(dharma)을 결합한 것이다. ‘생태 불교’라고도 할 수 있는 ‘에코다르마’에서는 궁극의 깨달음을 ‘사회적 실천’이라고 본다. 그리고 이를 실천하는 이들이 ‘생태 보살’이다.     불교의 위기인가? 아니면 불교의 기회인가?   환경 위기가 최근에 생겨난 것은 아니다. 하지만 (저자의 말에 의하면) 불교 수행자들과 불교단체들은 2010년 후반까지 (적어도 미국에서는) 생태위기에 대한 관심이 별로...
  수행을 실천하는 21세기형 생태보살 데이비드 로이, 『과학이 우리를 구원하지 못할 때 불교가 할 수 있는 것』을 읽고     한 때 인류가 멸종이 된다고 해도 그게 무슨 문제일까? 라는 생각을 한 적이 있었다. 지구에서 인간 종이 사라져도 지구는 태양 주위를 돌며 ‘스스로 그러하게’ 존재할 테니 말이다. 인간 종이 지구에 행해왔던 일들을 생각하면 인류가 생태적 재난으로 생존을 위협받는 것은 업보일 뿐. 하지만 인간이 지구의 다른 생명들과 분리되지 않았음을 알고 느끼게 된 후로 자주 마음이 아프다. 영화 ‘수라’에서 봤던 아기 쇠제비갈매기의 안부가 궁금한 이유다. 정확히 언제부터인지 잘 모르겠지만 불교 공부 이후부터였던 것은 확실하다.     영화 '수라'에서 어미 쇠제비갈매기와 아기 쇠제비갈매기     불교에서 ‘연기법’과 ‘공성(空)’에 대한 이해는 우리가 다른 이들이나 지구의 뭇 생명들과 분리되지 않았다는 깨달음을 준다. 선수행자이자 사회적 참여불교 활동가인 데이비드 로이가 우리에게 당면한 생태-사회적 위기에 ‘에코다르마’를 들고나온 이유도 불교적 깨달음의 생태적 시사점에서 찾을 수 있다.  ‘에코다르마’는 불교 전통이 최근 전개하는 새로운 용어로, 생태적인 관심(eco)에 불교의 가르침과 그에 연관된 영적 전통(dharma)을 결합한 것이다. ‘생태 불교’라고도 할 수 있는 ‘에코다르마’에서는 궁극의 깨달음을 ‘사회적 실천’이라고 본다. 그리고 이를 실천하는 이들이 ‘생태 보살’이다.     불교의 위기인가? 아니면 불교의 기회인가?   환경 위기가 최근에 생겨난 것은 아니다. 하지만 (저자의 말에 의하면) 불교 수행자들과 불교단체들은 2010년 후반까지 (적어도 미국에서는) 생태위기에 대한 관심이 별로...
도라지
2023.09.04 | 조회 159
글쓰기