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한문이 예술 7회] 한자에서 느껴지는 모든 것

동은
2024-01-11 13:18
259

 

한자에서 느껴지는 모든 것

 

동은

 

 

 

1. 한자의 느낌적인 느낌

  알려진 바와 같이 우리 말 단어의 상당수는 한자어로 이루어져 있다. 그런데 1948년 정부수립 이후 서서히 한자어를 한글로 표기하게 되면서 이른바 우리나라 고유어와 한자어의 구분이 어려워졌다. 그래서 오늘날에는 우리가 일상적으로 사용하는 단어에 어떤 한자가 사용되었는지 알아차리기가 어려워졌다. 예를 들면 ‘유람’과 ‘유랑’은 ‘여유롭게 돌아다닌다’는 어감이 비슷해보이지만 각각 놀 유遊와 흐를 류流로 다른 한자가 사용되어 ‘놀면서 돌아다니다’와 ‘목적없이 물 흐르듯 다닌다’는 차이가 있다. 이런 경우도 있다. ‘사전’은 ‘단어들을 모아 그 의미를 밝혀놓은 책’으로 말씀 사辭와 책 전典을 쓰는데, ‘백과사전’은 ‘여러 분야의 지식을 압축해 분류하고 모아 현상과 상태 자체를 모아 설명해 놓은 것’이라 이 때는 일 사事자를 사용한다. 이 事는 원래 ‘어떤 사람’을 지칭하는 한자였는데 오늘날에는 어떤 사건이나 일 자체를 의미하기도 해서 ‘일事’이 포괄하는 용례를 살펴보면 한자 하나로 얼마나 다층적인 의미로 쓰이고 있는지 알 수 있다.

 

  아시아의 근대화와 함께 중국 철학은 서구에서 성립된 근대 학문 체계로 편입되었다. 이런 분위기 속에서 중국 철학을 중국 자체의 시선으로 바라보려 했던 마르셀 그라네는 『중국 사유』에서 한자에 대해 이렇게 얘기했다.

 

“중국의 단어는 하나의 개념에 부응하지 않는다. 마찬가지로 하나의 단순한 기호도 아니며, 문법이나 통사의 기교를 통해서 생명을 부여받은 추상적 기호도 아니다. 그것은 불변의 단음절 형식과 중성적 양상 속에 작용을 미치는 데 필요한 모든 힘을 지니고 있다. 단어는 작용력의 소리로 된 조응물이며, 또한 작용력의 표상이다.”

 

  한자의 개수가 많은 이유는 글자마다 상응하는 구체적인 개념을 가지고 있기 때문이다. 그러나 그 수많은 글자들이 표현하는 의미나 개념들은 서로 겹치면서 모호한 의미의 경계를 넘나들기도 한다. 또 ‘끊다’는 의미를 가진 한자만 해도 다섯 개(切, 絕, 截, 絶, 撧)가 넘어가는 것처럼 하나의 같은 개념을 표현하는 여러 개의 글자가 있는 경우도 있다. 물론 이 한자들도 같은 뜻을 가졌음에도 그 세세한 결을 살피면 모두 다른 의미를 가지고 다르게 사용된다. 그렇다면 이렇게 흐를 류流, 놀 유遊, 말씀 사辭와 일 사事, ‘끊다’의 여러개의 한자를 아는 게 우리에게 왜 중요할까? 한자를 많이 아는 것도 중요하지만 비슷한 듯 서로 다른 한자들 사이에서 빚어지는 차이들을 살피는 것이 더 중요한 것일지도 모른다. 왜냐하면 우리가 그 단어를 어떻게 사용하고 있는지, 그것이 어떤 의미가 있는지, 그것들이 어떤 차이가 있는지 알아차릴 때 느껴지는 그 ‘느낌’이 우리가 세상을 대하는 감각을 보여주기 때문이다. 그렇게 우리는 ‘한자’와 관련해서 느끼는 만큼 세상을 알 수 있다. 그러니 우리의 언어가 다른 글자가 아닌 그 글자가 꼭 사용된 이유, 어떤 단어를 이루는 요소들로서 한자들이 각각이 어떤 의미연관 속에 있는지 살펴볼 필요가 있다.

 

 

 

2. 느낌感을 알아차리기覺

 

  ‘느낌’은 우리 신체의 다섯가지의 눈, 귀, 코, 입, 피부와 관련이 있다. 매일 이 신체기관을 창구로 많은 것을 느낀다. 물론 일상에서는 이 다섯가지 창구로 들어오는 느낌 중에서 크게 두드러지는 것이 없다면 뭔가를 느끼고 있다고 생각하지 않는다. 그래서 코가 매번 들이쉬는 숨, 주변에 들리는 모든 소리, 피부에 닿아있는 모든 촉감을 느끼려면 그 느낌에 깊이 집중해야 한다. 요컨데 오감은 신체의 영역에서 이루어진다. 

 

 ‘느낌’은 한자로 느낄 감感이다. 한자는 느낌을 어떻게 바라보고 있을까? 感에는 咸과 心이 함께 있다. 咸은 무기를 든 병사들이 긴 창을 바닥으로 내리 꽂고 소리를 내면서 기합을 넣는 모습이다. 어릴 때 태권도 학원에 가면 사범님은 발차기를 할 때, 주먹을 뻗을 때 기합을 넣으라고 하셨다. 그러면 나는 온 기운을 손 끝과 발 끝으로 모아 불꽃을 날리듯 뻗으며 “하!”하고 소리를 냈다. 그 경험을 돌이켜보면 기합을 넣는다는 것은 내가 가진 기운을 하나로 모으는 일이었다. 그렇다면 느낄 감感은 내가 가지고 있는 느낌을 마음心으로 모은다는 의미라고 생각해볼 수 있다.

 

 

   고대 사람들은 ‘느낌‘을 이렇게 마음心과 연관지었는데, 心 자체가 심장의 형태를 본따 만들어진 한자라는 점에서 사람의 마음이 신체와 떨어질 수 없다는 것을 생각해볼 수 있다. 가끔 내가 어떤 ‘느낌’을 가지고 있는지 표현하는게 어려울 때가 있다. 그럴때면 그것을 알아차리기도 전에 신체적인 반응이 일어나기도 한다. 얼굴이 빨개지거나, 숨이 가파오르거나, 침을 삼키게 되거나... 아니면 그 느낌의 주변을 탐색한다. 부대낀다거나, 슬프다거나, 껄끄럽다거나, 뿌듯하다거나. 이렇게 느낌이 어떻게 작용하고 있는지를 살피다보면 그 정체를 찾을 수 있다. 느낌이라는게 워낙 보이지도 않고 불문명하기 때문에 그 정체를 분명히 밝혀내긴 힘들지만 고대사람들은 그 정체가 마음과 연관되었다고 생각했다. 기합으로 기운을 하나로 모으는 것처럼, 신체의 느낌을 마음으로 모아 그 정체를 깨달을覺 때, 그것을 감각이라고 한다. 느낌의 정체를 찾기 위해 집중하며 마음을 알아차리는 일이 ‘감각한다’는 것이다. 그러지 않으면 느낌은 일상적인 신체의 감각처럼 쉽게 흘러가버린다. 그렇다면 오감은 수많은 느낌들 중에서도 가장 알아차리기覺 쉬운 대표적인 느낌이 아닐까 한다.

 

 

 

3. 아픔痛에는 ‘울림’이 있다 

 

  아이들과 감각을 주제로 수업을 할 때 처음으로 다룬 감각은 촉각이었다. 촉각은 피부에 닿는 느낌을 뜻한다. 피부는 우리 신체의 가장 많은 면적을 차지하고 있어서 그런지 수많은 층위의 느낌을 겪는다. 매끈함, 끈적함, 까슬함, 따가움, 욱신거림… 피부에게 가장 중요한 일이 있다면 그 수많은 느낌들 중에서도 ‘아픔‘을 잘 느끼는 것이다. ‘아픔’은 가장 즉각적으로 알아차릴 수 있는 위협이기 때문이다. 이 ’아픔‘을 통痛이라고 하는데 이 한자를 살펴보면 ‘아픔’의 성질에 대해 생각해볼 수 있다.

 

  痛은 병들어 침대에 누워 있는 모습을 뜻하는 녁疒과 댕댕 울리는 종甬이 함께 있다. 종소리는 청각으로 느끼는 것인데 왜 ‘아픔’에 쓰이는 걸까? 그것은 아픔이 가지고 있는 ‘울림’의 성질 때문이다. 우리는 ‘아픔’을 느끼면 아무리 작은 부위더라도 온 몸으로 전해진다. 순간적인 자극이 온 몸으로 마치 종이 울려 퍼지듯 전해지는 것이다. 아픔은 그 ‘울림’이 가장 빠른 감각이다. 그래서 촉각을 구분 할 때 우선 우리는 아픈지 안아픈지를 가장 빠르게 구분할 수 있다. 그런데 이 울려퍼지는 아픔의 성질을 신체기관이 아니라 마음의 영역으로 바라본다면 훨씬 더 넓은 규모로 그 울림을 생각해볼 수 있다. 바로 신체 내부의 울림에서 외부로 퍼지는 울림이다. 수업에서 가장 먼저 촉각에 대해서 다룬 이유는 한자가 보여주는 이런 아픔의 성질 때문이었다.

 

  언젠가 누군가를 이해하는 일이란 없다는 걸 알게 됐다. 어떤 일을 직접 겪지 않는 이상, 누군가의 생각이나 감각을 온전히 이해한다고 여기는 것은 오만이었다. 설령 직접 겪었다고 하더라도 그 일이 다른 사람과 같다고 얘기할 수도 없다. 특히나 누군가의 고통스러운 상황을 이해한다는 것은 더욱 힘든 일이었다. 아픔은 하나로 정리되지 않는 여러 감정을 불러 일으킨다. 이때, 감정은 감각과 다르다. 당혹감, 불안감, 불쾌감 등등... 이런 감정들은 앞서 얘기한 ‘느낌의 작용’의 결과들이다. 누군가의 이런 느낌의 작용을 도대체 어떻게 이해할 수 있을까. 극단적이긴 하지만 이런 생각은 일종의 포기였다. 

 

 

  아픔이 가지고 있는 울림의 성질이 외부의 다른 이에게도 전해진다면 무엇이 전해질까? 분명한 것은 전달되는 것이 ’통증‘은 아니라는 점이다. 통증은 ‘내가’ 느낀 것이기 때문이다. 통증이 전해지지 않는다면 통증이 불러 일으키는 감정이 전해지는 것일까? 아니다. 감정 또한 느낌이 ’나‘에게 어떤 영향을 끼치는지 이해하는 것이기 때문에 다른 사람에게 전달되는 종류의 것은 아니다. 그보다 전, 감정을 이해하기 이전에 감정을 이해하기 위한 여러 요소가 있다. 그 요소가 바로 정서情緖다. 감각과 감정, 정서는 모두 다른 것을 의미하는데 그 중에서도 정서는 실마리 서緖를 사용해 느낌의 실마리를 의미한다. 나는 아픔이 가지고 있는 울림의 성질이 이 실마리를 외부로 전달한다고 생각한다. 누군가의 것을 느낄 수 없더라도 우리가 ‘느끼는 일’은 순간마다 계속해서 일어난다. 내가 아픔을 느낄 수 있고, 아픔 자체가 외부로 자꾸만 퍼져나가는 성질을 가지고 있다고 한다면, 누군가의 아픔을 지레짐작하거나 그 정서를 통해 어떤 감정을 갖는 것은 자연스러운 일이 된다. 나는 痛을 통해 느낌 자체가 다른 이에게 전달되는 것이며, 그래서 우리가 누군가를 이해할 수 있다, 없다보다도 나에게 전달된 느낌에 대해 생각해보는 것이 자연스럽다는 걸 알았다. 통이 보여주는 아픔의 성질을 생각해보며 누군가를 절대로 이해할 수 없다는 희의적인 생각으로부터 벗어날 수 있었다.

 

 

4. 정신운동을 통한 이해

 

  마르셀 그라네는 중국어가 감정을 일으키고 마음을 감동시키는 데 놀라운 힘이 있다고도 했는데, 사실   한자의 발전 과정을 살펴보면 중국 고대 사람들이 처음부터 마음에 대해 고민한건 아니었다. 마르셀 그라네가 말하는 힘은 한자로 할 수있는 다채로운 정신운동에서 일어나는게 아닐까 한다. 이번 글에서 살펴본 ‘느낌’과 관련된 다양한 한자들만 보아도 눈에 보이지 않는 느낌과 그것을 알아차리는 일을 구분하고, 그 모든 과정이 ‘실마리’를 찾아내는 일이라고 한 것과, 아픔이라는 문자에 종모양을 담아 추상적이지만 ‘울림’에 대한 구체적인 의미를 생각해보게 만드는 이 일련의 ‘정신운동’이 감정을 다루는 능력을 길러주지 않았을까?

   

“상형문자가 원래의 의미를 지니고 있는지 여부는 중요하지 않다. 즉 어원적 재구성이 상상적인 것인지 정확한 것인지는 그리 중요하지 않다. 본질적인 것은 문자가 주는 느낌 그 자체, 즉 개념들이 진정한 표상과 결부되어 있다는 느낌 그 자체다.”

 

  한자마다 담겨있는 개념이나, 개념을 옮겨놓은 한자의 자형을 들여다보면 그 시를 읽을 때나 떠오르는 은유적인 비유나 아득하게 현학적으로 느껴지는 표현들을 볼 때가 있다. 그것이 정말 무엇이었는지, 원래는 무엇이었는지는 절대 알 수 없을 것이다. 다만 그것이 우리와 관계되어 있을 것이라는 ‘느낌’이 우리의 마음을 움직인다. 그 복잡하고 분명하게 구분되지 않는, 기원을 명확히 찾을 수 없는 한자 속에서 우리는 사유의 상상력을 펼칠 수 있다. 그러고 보면 한자는 굉장히 감각적인, ‘느낌적인 느낌’의 문자다. 눈으로 읽고, 그 형상을 이해하고, 그 형상의 실제를 떠올리고, 그 실제를 통해 다시 한번 한자의 의미를 생각해보게 만든다. 그리고 나는 이 정신운동이 우리의 ‘느낌’을 사유하는 일과도 멀지 않다고 ‘느낀다.’ 그렇다면 내가 아이들과 하는 수업은 내가 원하는 방식으로 전달되지 않더라도, 포기하지 않는 자세로 정신운동을 시작할 수 있는 다양한 실마리를 만들어내는 일일 것이다.

 

댓글 4
  • 2024-01-12 08:57

    재미있네요. 한자가 정동과 감응을 불러일으키는 것은 문자 그 자체가 이미지여서 그런 것일까요?
    생각해보면 우리말의 경우는 글자를 볼 때가 아니라 음성으로 전환될 때 정동이 일어나는 것 같아요.
    한자는 시각적으로 감응이 일어나고 우리말은 청각적인 감응이 더 강한 것 같은데.. 표음문자와 표의문자의 차이일까요?
    아무튼 한자의 특이성과 다른 문자와의 차이에 대한 이야기인 것처럼 읽히는데, 맞나요?
    그런데 정신운동이라는 말이 쏙 들어오질 않네요. 감응? 정신활동이 포함하는 모든 것? 뭐라고 하면 좋을까요?

    • 2024-01-13 18:24

      ㅋㅋㅋㅋㅋ 요요쌤이 이렇게 물음표 가득한 댓글을 처음 보는 것 같은데요? ㅋㅋㅋㅋ
      이번 글은... 한자의 특이성에 조금 더 중점을 두고 싶었어요.
      한자 자체가 지금까지 쓰이는 언어중에서는 유일한 표의문자여서 그냥 한자 자체가 다른 문자와 차이가 있는 것 같아요.

      저도 정신운동이 참 애매한 표현이라는 생각이 드는데... 감응도 가까운 말일 수도 있고 그냥 언어와 사용하는 문자가 우리의 다양한 인지에 영향을 미치는데 제 언어로는 그게 ‘느낌‘정도로밖에 표현할 수 없었던 것 같아요. 연상작용? 인지반응? 고민하다가 그냥 정신운동... 이렇게...

  • 2024-02-19 01:06

    지난 번 한문이 예술 시간에 아이들이 먹을 갈고
    붓으로 자신의 글자들을 쓰는 걸 보면서 뭔가 찌릿찌릿 했습니다.
    뭔가 느낌적인 느낌??
    한자한자 한자로 풀어가는 이야기에
    점점 노하우가 쌓이는 느낌을 받았습니다~^^

  • 2024-03-17 23:55

    다음 글도 기다려지네요!

한문이예술
    하나의 귀와 두 개의 입 한자가 보여주는 듣기의 방법론   동은     1. 실용實用적인 한자   책을 읽다보면 모르는 단어가 등장할 때가 있다. 그러면 눈을 부릅뜨고 앞뒤의 맥락을 살펴 단어의 의미를 짐작하곤 한다. 하지만 그 단어가 짐작만으로는 넘기기 어려운 위치에 있거나 도무지 감도 오지 않는 경우에는 사전에서 찾아봐야 한다. 그런데 사전에는 같은 발음을 가진 다른 의미의 단어들이 여러게 있을 때가 있다. 이럴 땐 하나하나 문장 속 단어에 의미를 적용시키며 여러 개의 단어 중에서 무엇인지를 찾아야 한다. 한자를 많이 알면 이 과정이 상당히 빨라진다. 단어의 상당수가 한자어에서 유래한 우리말의 특성상, 한자를 많이 알수록 이렇게 문해력과 어휘력이 좋아진다. 그런 점에서 한자는 분명 살아가는데 실용적이다. 실용實用적이라는 건 실제로 쓰일만한 가치가 있다는 뜻인데, 이런 문해력과 어휘력 외에도 한자의 실용성이 발휘되는 부분이 있다.     한글과 다르게 한자는 문자 하나에 ‘의미’가 담겨있다. 당연하게도 ‘의미’가 문자에 담기기까지는 여러 과정을 거치게 된다. 그 과정은 때로 우연히 일어나기도 하지만 대부분 상당한 고심을 거쳤다는 것을 알 수 있다. 그러니 문자 하나가 가지고 있는 의미의 맥락이 경우에 따라서는 대단히 복잡해지기도 한다. 이건 문자 하나일 뿐일지라도 거기에 담긴 ‘이야기’는 여러가지 일수 있다는 말이다. 그렇게 중층적으로 구성된 이야기들은 문자가 사용되는 오늘날과도 긴밀하게 연관된다. 처음 문자가 만들어진 시기를 구체적으로 알 수 있는 방법이 없으니 갑골문에 대한 해석은 오늘날에도 고정되어 있지...
    하나의 귀와 두 개의 입 한자가 보여주는 듣기의 방법론   동은     1. 실용實用적인 한자   책을 읽다보면 모르는 단어가 등장할 때가 있다. 그러면 눈을 부릅뜨고 앞뒤의 맥락을 살펴 단어의 의미를 짐작하곤 한다. 하지만 그 단어가 짐작만으로는 넘기기 어려운 위치에 있거나 도무지 감도 오지 않는 경우에는 사전에서 찾아봐야 한다. 그런데 사전에는 같은 발음을 가진 다른 의미의 단어들이 여러게 있을 때가 있다. 이럴 땐 하나하나 문장 속 단어에 의미를 적용시키며 여러 개의 단어 중에서 무엇인지를 찾아야 한다. 한자를 많이 알면 이 과정이 상당히 빨라진다. 단어의 상당수가 한자어에서 유래한 우리말의 특성상, 한자를 많이 알수록 이렇게 문해력과 어휘력이 좋아진다. 그런 점에서 한자는 분명 살아가는데 실용적이다. 실용實用적이라는 건 실제로 쓰일만한 가치가 있다는 뜻인데, 이런 문해력과 어휘력 외에도 한자의 실용성이 발휘되는 부분이 있다.     한글과 다르게 한자는 문자 하나에 ‘의미’가 담겨있다. 당연하게도 ‘의미’가 문자에 담기기까지는 여러 과정을 거치게 된다. 그 과정은 때로 우연히 일어나기도 하지만 대부분 상당한 고심을 거쳤다는 것을 알 수 있다. 그러니 문자 하나가 가지고 있는 의미의 맥락이 경우에 따라서는 대단히 복잡해지기도 한다. 이건 문자 하나일 뿐일지라도 거기에 담긴 ‘이야기’는 여러가지 일수 있다는 말이다. 그렇게 중층적으로 구성된 이야기들은 문자가 사용되는 오늘날과도 긴밀하게 연관된다. 처음 문자가 만들어진 시기를 구체적으로 알 수 있는 방법이 없으니 갑골문에 대한 해석은 오늘날에도 고정되어 있지...
동은
2024.03.26 | 조회 222
한문이예술
  한자에서 느껴지는 모든 것   동은       1. 한자의 느낌적인 느낌   알려진 바와 같이 우리 말 단어의 상당수는 한자어로 이루어져 있다. 그런데 1948년 정부수립 이후 서서히 한자어를 한글로 표기하게 되면서 이른바 우리나라 고유어와 한자어의 구분이 어려워졌다. 그래서 오늘날에는 우리가 일상적으로 사용하는 단어에 어떤 한자가 사용되었는지 알아차리기가 어려워졌다. 예를 들면 ‘유람’과 ‘유랑’은 ‘여유롭게 돌아다닌다’는 어감이 비슷해보이지만 각각 놀 유遊와 흐를 류流로 다른 한자가 사용되어 ‘놀면서 돌아다니다’와 ‘목적없이 물 흐르듯 다닌다’는 차이가 있다. 이런 경우도 있다. ‘사전’은 ‘단어들을 모아 그 의미를 밝혀놓은 책’으로 말씀 사辭와 책 전典을 쓰는데, ‘백과사전’은 ‘여러 분야의 지식을 압축해 분류하고 모아 현상과 상태 자체를 모아 설명해 놓은 것’이라 이 때는 일 사事자를 사용한다. 이 事는 원래 ‘어떤 사람’을 지칭하는 한자였는데 오늘날에는 어떤 사건이나 일 자체를 의미하기도 해서 ‘일事’이 포괄하는 용례를 살펴보면 한자 하나로 얼마나 다층적인 의미로 쓰이고 있는지 알 수 있다.     아시아의 근대화와 함께 중국 철학은 서구에서 성립된 근대 학문 체계로 편입되었다. 이런 분위기 속에서 중국 철학을 중국 자체의 시선으로 바라보려 했던 마르셀 그라네는 『중국 사유』에서 한자에 대해 이렇게 얘기했다.   “중국의 단어는 하나의 개념에 부응하지 않는다. 마찬가지로 하나의 단순한 기호도 아니며, 문법이나 통사의 기교를 통해서 생명을 부여받은 추상적 기호도 아니다. 그것은 불변의 단음절 형식과 중성적 양상 속에 작용을 미치는 데 필요한...
  한자에서 느껴지는 모든 것   동은       1. 한자의 느낌적인 느낌   알려진 바와 같이 우리 말 단어의 상당수는 한자어로 이루어져 있다. 그런데 1948년 정부수립 이후 서서히 한자어를 한글로 표기하게 되면서 이른바 우리나라 고유어와 한자어의 구분이 어려워졌다. 그래서 오늘날에는 우리가 일상적으로 사용하는 단어에 어떤 한자가 사용되었는지 알아차리기가 어려워졌다. 예를 들면 ‘유람’과 ‘유랑’은 ‘여유롭게 돌아다닌다’는 어감이 비슷해보이지만 각각 놀 유遊와 흐를 류流로 다른 한자가 사용되어 ‘놀면서 돌아다니다’와 ‘목적없이 물 흐르듯 다닌다’는 차이가 있다. 이런 경우도 있다. ‘사전’은 ‘단어들을 모아 그 의미를 밝혀놓은 책’으로 말씀 사辭와 책 전典을 쓰는데, ‘백과사전’은 ‘여러 분야의 지식을 압축해 분류하고 모아 현상과 상태 자체를 모아 설명해 놓은 것’이라 이 때는 일 사事자를 사용한다. 이 事는 원래 ‘어떤 사람’을 지칭하는 한자였는데 오늘날에는 어떤 사건이나 일 자체를 의미하기도 해서 ‘일事’이 포괄하는 용례를 살펴보면 한자 하나로 얼마나 다층적인 의미로 쓰이고 있는지 알 수 있다.     아시아의 근대화와 함께 중국 철학은 서구에서 성립된 근대 학문 체계로 편입되었다. 이런 분위기 속에서 중국 철학을 중국 자체의 시선으로 바라보려 했던 마르셀 그라네는 『중국 사유』에서 한자에 대해 이렇게 얘기했다.   “중국의 단어는 하나의 개념에 부응하지 않는다. 마찬가지로 하나의 단순한 기호도 아니며, 문법이나 통사의 기교를 통해서 생명을 부여받은 추상적 기호도 아니다. 그것은 불변의 단음절 형식과 중성적 양상 속에 작용을 미치는 데 필요한...
동은
2024.01.11 | 조회 259
한문이예술
    예술적(?) 동양고전 동은       1. 예술, 정체를 밝혀라!     아이들이 가끔 수업에 들어오며 질문을 한다. “선생님! 오늘은 뭐 만들어요?” <한문이 예술> 수업은 한문을 가르치지만 어떤 작품이나 발표 형식으로 결과물을 내기 때문에 아이들이 뭔가를 만드는 것이 익숙해진 것이다. 그래서인지 가끔 내가 미술 선생님으로 여겨지기도 하는데, 아무래도 ‘예술’이라는 이름으로 수업을 하다보니 그런 것 같기도 하다. 그런데 그럴 때마다 내 마음은 어딘가 콕콕 찔리는 느낌이다. 내가 하고 있는 것이 ‘예술’이라고 할 수 있을까? 아무리 한자와 예술수업의 경계에 있다고는 해도 예술은 나에게 너무나 고원하고 아득하고 ‘알 수 없는 것’이었다. 알수 없는 것…. 문제는 이 뿐만이 아니다. <한문이 예술>의 예술은 우리가 이미 알고 있는 ‘예술’의 의미만 있는 것이 아니기 때문이다. 과연 <한문이 예술>의 ‘예술’은 정체가 무엇일까?       2. 藝, 심고 기르고 생산해내는 능력     예술의 예藝는 재주 예埶에서 만들어진 문자로 埶의 초기 갑골문 형태를 보면 무언가를 쥐고 있는 사람의 모습을 하고 있다. 藝에 풀艹이 있고 갑골문에는 나무의 형상이 있는 걸로 보아 이 사람의 손에 있는 것이 식물이라는 것을 알 수 있다. 문자를 보자마자 나는 중국에서 유래된 분재가 떠올랐다. 분재는 작은 크기로 키워낸 나무를 의미하는데 뿌리의 영양을 제한시켜 일반적인 성장을 하지 못하게 해서 만들어 낸다. 원래는 절벽처럼 흙이 얼마 없는 곳에서 영양분이 없어 조그맣게 자란 나무를 화분으로 옮겨와...
    예술적(?) 동양고전 동은       1. 예술, 정체를 밝혀라!     아이들이 가끔 수업에 들어오며 질문을 한다. “선생님! 오늘은 뭐 만들어요?” <한문이 예술> 수업은 한문을 가르치지만 어떤 작품이나 발표 형식으로 결과물을 내기 때문에 아이들이 뭔가를 만드는 것이 익숙해진 것이다. 그래서인지 가끔 내가 미술 선생님으로 여겨지기도 하는데, 아무래도 ‘예술’이라는 이름으로 수업을 하다보니 그런 것 같기도 하다. 그런데 그럴 때마다 내 마음은 어딘가 콕콕 찔리는 느낌이다. 내가 하고 있는 것이 ‘예술’이라고 할 수 있을까? 아무리 한자와 예술수업의 경계에 있다고는 해도 예술은 나에게 너무나 고원하고 아득하고 ‘알 수 없는 것’이었다. 알수 없는 것…. 문제는 이 뿐만이 아니다. <한문이 예술>의 예술은 우리가 이미 알고 있는 ‘예술’의 의미만 있는 것이 아니기 때문이다. 과연 <한문이 예술>의 ‘예술’은 정체가 무엇일까?       2. 藝, 심고 기르고 생산해내는 능력     예술의 예藝는 재주 예埶에서 만들어진 문자로 埶의 초기 갑골문 형태를 보면 무언가를 쥐고 있는 사람의 모습을 하고 있다. 藝에 풀艹이 있고 갑골문에는 나무의 형상이 있는 걸로 보아 이 사람의 손에 있는 것이 식물이라는 것을 알 수 있다. 문자를 보자마자 나는 중국에서 유래된 분재가 떠올랐다. 분재는 작은 크기로 키워낸 나무를 의미하는데 뿌리의 영양을 제한시켜 일반적인 성장을 하지 못하게 해서 만들어 낸다. 원래는 절벽처럼 흙이 얼마 없는 곳에서 영양분이 없어 조그맣게 자란 나무를 화분으로 옮겨와...
동은
2023.11.30 | 조회 378
한문이예술
  거북의 그 ‘거대한 시간’에 대하여 동은       1. 거북이를 좋아하는 선생과 학생의 만남     나는 거북이를 좋아한다. 아마 나를 오랫동안 본 사람들은 이렇게 물어볼지도 모르겠다. “네가 싫어하는 동물이 있어?” 그 질문에 답하기는 힘들지만… 어쨌든 동물 중에서도 거북이를 좀 더 좋아한다. 무언가를 좋아할 때도 여러 유형이 있는데, 누군가는 거북이를 동물계 척삭동물문, 파충강의 거북목으로 세세하게 분류하면서 이해하고 싶어하거나 어떤 종류와 부위, 과거를 갖고 있는가를 줄줄 외우며 익히려는 사람들이 있는가 하면, 나의 경우에는 그냥 푹 빠져버리고 만다. 어느 날 정신 차리니 좋아하는걸 깨닫고 그 이후에 이유를 찾게 되는 식이다. 내가 깨달은 이유는 다음과 같다. 거북이의 등껍질의 지문같은 주름들, 매끈하면서도 나른한 눈의 모양, 꾹 다문 입의 곡선, 다양한 형태의 발톱과 느릿한 걸음걸이, 혹은 하늘을 나는 듯 바다를 헤엄치는 몸짓같은 것들… 더더더 많지만 지면상 생략하도록 하겠다. 잠깐! 그렇다고 해서 내가 거북이 미쳐있다거나 거북이를 위해 살고 싶은 건 아니니까 그냥 좋아한다고만 생각해달라. (한때 평생 남미의 거북이 봉사자로 사는 걸 꿈꾸기도했지만…….)     혹시 첫 글에서 비 우雨로 시작했던 첫 수업에 대해서 기억하는가? 굉장히 있어보이는 말들로 글을 마무리했지만 첫 수업때의 나는 극도의 긴장상태였다.(링크) 나는 긴장하면 오류난 기계처럼 굳어버리고 마는데, 열심히 준비한 수업을 망칠지도 모른다는 걱정에 갈수록 긴장은 배가 됐다. 그렇게 시작된 수업, 첫 시간이니 인사와 함께 서로 소개하는 시간을 가졌다. 소개 시간에는 아이들에게...
  거북의 그 ‘거대한 시간’에 대하여 동은       1. 거북이를 좋아하는 선생과 학생의 만남     나는 거북이를 좋아한다. 아마 나를 오랫동안 본 사람들은 이렇게 물어볼지도 모르겠다. “네가 싫어하는 동물이 있어?” 그 질문에 답하기는 힘들지만… 어쨌든 동물 중에서도 거북이를 좀 더 좋아한다. 무언가를 좋아할 때도 여러 유형이 있는데, 누군가는 거북이를 동물계 척삭동물문, 파충강의 거북목으로 세세하게 분류하면서 이해하고 싶어하거나 어떤 종류와 부위, 과거를 갖고 있는가를 줄줄 외우며 익히려는 사람들이 있는가 하면, 나의 경우에는 그냥 푹 빠져버리고 만다. 어느 날 정신 차리니 좋아하는걸 깨닫고 그 이후에 이유를 찾게 되는 식이다. 내가 깨달은 이유는 다음과 같다. 거북이의 등껍질의 지문같은 주름들, 매끈하면서도 나른한 눈의 모양, 꾹 다문 입의 곡선, 다양한 형태의 발톱과 느릿한 걸음걸이, 혹은 하늘을 나는 듯 바다를 헤엄치는 몸짓같은 것들… 더더더 많지만 지면상 생략하도록 하겠다. 잠깐! 그렇다고 해서 내가 거북이 미쳐있다거나 거북이를 위해 살고 싶은 건 아니니까 그냥 좋아한다고만 생각해달라. (한때 평생 남미의 거북이 봉사자로 사는 걸 꿈꾸기도했지만…….)     혹시 첫 글에서 비 우雨로 시작했던 첫 수업에 대해서 기억하는가? 굉장히 있어보이는 말들로 글을 마무리했지만 첫 수업때의 나는 극도의 긴장상태였다.(링크) 나는 긴장하면 오류난 기계처럼 굳어버리고 마는데, 열심히 준비한 수업을 망칠지도 모른다는 걱정에 갈수록 긴장은 배가 됐다. 그렇게 시작된 수업, 첫 시간이니 인사와 함께 서로 소개하는 시간을 가졌다. 소개 시간에는 아이들에게...
동은
2023.09.21 | 조회 535
한문이예술
한자의 바다에서 작고小 약한 것弱을 길어올리기   동은     1. 수많은 한자들 중에서     오늘날 일상에서 사용되고 있는 한자는 2천자에서 5천자 정도 된다. 3천자 정도의 간극이 있긴 하지만 이미 30개 남짓 되는 한글이나 알파벳에 비하면 과하게 많다고 할 수 있다. 그런데 한자가 사용된 6000년이 넘는 시간동안 만들어졌다가 사라진 문자만 해도 5만자(!)가 넘고, 같은 뜻을 가졌지만 형태가 다른 한자들까지 더하면 8만자(!!)가 넘는다고 한다. 이쯤되면 한자를 만든 사람도 무슨 한자가 있는지 절대 모를 수준이다. 게다가 새로운 형태의 갑골문이 계속해서 발견되고 있다고 하니 한자의 갯수는 계속해서 늘어나고 있는 것이나 마찬가지다. 정말이지 한자에 대해서 알면 알수록 어떻게 지금까지 계속 사용되는지 신기할 따름이다.     그런데 내가 <한문이 예술>에서 아이들에게 수업을 하는 한자는 한 시즌에 겨우 10자 정도밖에 되지 않는다. 사실 10자도 많은 편이다. 하루에 하나씩 외워도 10년을 외워야 할 수준인데 이렇게 비효율적으로 수업을 해도 괜찮은지 가끔 걱정이 된다. 하지만 그럴 때마다 아무리 생각해도 괜찮다는 확신이 든다. 내가 아이들에게 전하고 싶은 이야기는 한자의 갯수와는 아무 상관 없으니 말이다.     그야말로 한자의 바다!       2.  수업을 하다보면     아이들과 함께 있다보면 ‘날것’이 드러나는 상황이 종종 펼쳐진다. <한문이 예술>에는 어릴 때부터 동네에서 자주 보며 가까워진 친구들이 함께 오는 경우가 많다. 같은 학교를 다니거나, 학원을 다니면서 자연스럽게 친해진 뒤에 <한문이 예술>에 오게...
한자의 바다에서 작고小 약한 것弱을 길어올리기   동은     1. 수많은 한자들 중에서     오늘날 일상에서 사용되고 있는 한자는 2천자에서 5천자 정도 된다. 3천자 정도의 간극이 있긴 하지만 이미 30개 남짓 되는 한글이나 알파벳에 비하면 과하게 많다고 할 수 있다. 그런데 한자가 사용된 6000년이 넘는 시간동안 만들어졌다가 사라진 문자만 해도 5만자(!)가 넘고, 같은 뜻을 가졌지만 형태가 다른 한자들까지 더하면 8만자(!!)가 넘는다고 한다. 이쯤되면 한자를 만든 사람도 무슨 한자가 있는지 절대 모를 수준이다. 게다가 새로운 형태의 갑골문이 계속해서 발견되고 있다고 하니 한자의 갯수는 계속해서 늘어나고 있는 것이나 마찬가지다. 정말이지 한자에 대해서 알면 알수록 어떻게 지금까지 계속 사용되는지 신기할 따름이다.     그런데 내가 <한문이 예술>에서 아이들에게 수업을 하는 한자는 한 시즌에 겨우 10자 정도밖에 되지 않는다. 사실 10자도 많은 편이다. 하루에 하나씩 외워도 10년을 외워야 할 수준인데 이렇게 비효율적으로 수업을 해도 괜찮은지 가끔 걱정이 된다. 하지만 그럴 때마다 아무리 생각해도 괜찮다는 확신이 든다. 내가 아이들에게 전하고 싶은 이야기는 한자의 갯수와는 아무 상관 없으니 말이다.     그야말로 한자의 바다!       2.  수업을 하다보면     아이들과 함께 있다보면 ‘날것’이 드러나는 상황이 종종 펼쳐진다. <한문이 예술>에는 어릴 때부터 동네에서 자주 보며 가까워진 친구들이 함께 오는 경우가 많다. 같은 학교를 다니거나, 학원을 다니면서 자연스럽게 친해진 뒤에 <한문이 예술>에 오게...
동은
2023.08.18 | 조회 556
글쓰기