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영화대로42길] 35회 우리가 흔들릴 차례 / <아들>(2002)
청량리
2024-04-14 16:01
184
언제 어디서나 영화를 볼 수 있지만,
정작 영화에 대해 묻지 않는 시대.
우리는 영화와 삶의 사이길,
영화대로 사는 길에 대한 질문으로,
산업과 자본의 도구가 아닌
영화로서의 영화를 보고 읽습니다.
*본 리뷰에 사용된 이미지에 대한 저작권은 해당 영화에 있습니다.
• 이번 '영화대로42길'로 가는 법은 '같은 영화 다른 이야기' 컨셉입니다.
그 세 번째 영화는 <아들>(2002)입니다.
우리가 흔들릴 차례
아들 Le Fils | 드라마/미스터리 | 벨기에, 프랑스 | 102분 | 2002
※ 일부 스포일러가 포함되어 있습니다.
영화의 시작인 ‘인트로’는 그 영화의 첫인상이자 분위기를 보여준다. 다르덴 형제의 <아들>(2002)은 음악도 없이 흔들리는 어떤 ‘형상’을 보여줄 뿐이다. 그 위로 건조하게 제작자, 주연배우, 감독의 이름 등이 보였다 사라진다. 마치 <히로시마 내 사랑>(1959)이 생각나는 ‘인트로’를 보고 있으니 ‘아, 이번 영화도 뭔가 쉽지는 않겠구나’는 느낌이 팍팍 든다.
다르덴 형제의 이름과 영화의 원어제목 ‘Le Fils’이 사라지면, 카메라는 천천히 움직이며 그 흔들리는 ‘형상’이 바로 ‘올리비에’(올리비에 구르메, 배우의 이름을 그대로 등장인물 이름으로 사용했다)의 ‘등’이었음을 보여준다. 그렇다. ‘인트로’처럼 영화는 대부분 올리비에의 ‘등과 뒷모습’을 시종일관 따라다닐 거라고 미리 알려주고 있다.
이제는 많은 사람들이 알고 있는 사실이지만, 다르덴 형제는 혹독한 수준의 리허설로 유명하다. 이유는 영화가 배우들의 ‘몸’을 통해 관객과 소통하길 원하기 때문이다. 여러 번 동선을 구성해보고, 몇 가지 다른 버전으로 바꿔보기도 한다. 대사가 들어가는 건 배우의 움직임과 디테일들이 살아난 이후다. 그래서 다르덴 형제 영화의 ‘리얼리즘’은 배우들의 ‘몸’을 통해 드러난다. 카메라는 올리비에의 사소한 동작을, 예를 들어 도시락 통을 행주로 닦아내거나 담배를 신발에 비벼 끄는 모습들을 일부러 쫓으며 보여준다.
올리비에 구르메, 극중 이름도 '올리비에'를 사용한다. 다르덴 형제의 페르소나 올리비에의 뒷모습으로 영화는 시작한다.
한 줄의 줄거리나 포스터라도 본 관객들은 올리비에가 ‘5년 전, 아들을 죽인 그 아이를 훈련센터에서 만난다’는 사실을 이미 알고 있다. 그렇다면 질문은 올리비에가 어떤 ‘선택’을 할 것인가로 모아진다. 그래서인지 영화 초반, 빵을 자르기 위해 칼을 집어든 올리비에가 알 수 없는 눈빛으로 건너편의 그 아이를 쫓는 장면을 ‘살인의 충동’으로 해석하는 경우가 많다. 원래 올리비에의 설정은 ‘목수’가 아니라 ‘요리사’였다. 하지만 칼을 집을 때마다 ‘복수’의 행위가 연상되는 걸 피하기 위해 목수로 바꿨다고 한다. 즉 다르덴 형제는 선택의 ‘결과’가 아니라 그 ‘과정’, 끊임없이 불안한 자신을 마주하는 올리비에에 좀 더 집중하고 있는 것이다.
그래서 이번에는 다르덴 형제의 연출방식처럼 배우의 사소한 ‘몸짓’을, 그 중에서도 의도적으로 보여주고 있는 올리비에의 ‘흡연 장면’을 따라가 보기로 한다. 첫 번째 장면은 올리비에가 명단에서 아들을 죽인 ‘그 아이’의 이름을 발견한 순간이다. “아니요, 저는 벌써 네 명이나 가르치고 있다고요. 그 아이를 맡을 수 없어요.” 소년원에서 나온 새로운 아이를 목공반에서 맡아 볼 생각이 있냐는 질문에 올리비에는 거절한다.
그 아이가 정말 맞을까? 그냥 이름이 같은 다른 녀석일까? 올리비에는 생각이 복잡해진다.
그러나 #1.담배를 피우며 머뭇거리는 올리비에. 잠깐만, 이름만 같지 그 아이가 아닐 수도 있잖아? 우선 얼굴을 확인해 봐야겠어. 그는 급하게 사무실로 올라간다. 카메라는 관객이 올리비에의 시선을 좀 더 느낄 수 있도록 바짝 그의 뒤를 쫓는다. 그러나 창문에 가려서, 출입구를 지나쳐 버려서 올리비에는 계속 그 아이를 놓친다.
아들을 잃은 슬픔으로 올리비에 부부는 이혼까지 하게 된다. 올리비에가 명단에서 ‘그 아이’의 이름을 발견했던 날, 헤어진 아내 마갈리(이사벨라 소우파르트)가 찾아온다. “나, 재혼하려고. 진작 말하려고 했는데, 나 임신했어.” 조심스럽게 아이가 생겼음을 올리비에에게 전한다. 그 아이를 본 거 같아 안 그래도 혼란스러운데, 전처는 아이가 생겼다는 이야기를 하니 올리비에는 폭발한다. “도대체, 뭐 하러, 왜 하필 오늘 왔냐고!!!” 지금 누구한테 성질을 내는 거지? 올리비에는 #2.담배에 불을 붙이면서 센터 사무실로 전화한다. “그 아이 용접반에 적응 잘 해요? 혹시 제가 맡아도 될까요?”
다르덴 형제는 올리비에가 그 아이, ‘프란시스’(모르강 마린)와 처음으로 만나는 장면을 서두르지 않고 조심스럽게 보여준다. 영화 시작 후 20 여분이 지난 후에야 올리비에는 용접반 탈의실 의자에 쭈그려 잠들어 있는 ‘프란시스’를 마주한다. 그 아이가 확실하다. 복수가 목적이라면 지금이 기회였을 것이다. 하지만 올리비에는 프란시스를 깨운다. 똑,똑,똑 “일어나, 짐 챙겨. 오늘부터 목공반에서 수업하기로 됐다.”
아무래도 안 되겠어. 내가 일단 그 아이를 만날 방법은 목공수업을 듣게 하는 것 밖에는 없다.
드디어 두 사람이 만났다. 그러나 영화 <아들>에는 죽은 아들에 대한 ‘회상’이나 ‘프레퐁’에서 일어난 사건장면의 ‘재현’ 같은 건 없다. 흐름이나 배경에 대한 ‘설명’도 전혀 없다. 그러니 관객들은 영화가 진행되면서 하나씩 하나씩 양파 까듯이 계속 새로운 사실을 마주할 수밖에 없다. 자, 아직까지 우리는 프란시스와 올리비에의 관계를 전혀 알 수가 없다. 게다가 프란시스가 올리비에의 아들을 죽였는지 아닌지도 여전히 불확실하다. 이러한 접근방식은 다르덴형제의 영화를 다큐멘터리보다 더 다큐처럼 보이도록 한다.
시인은 우리에게 익숙한 단어들을 전혀 다르게, 낯설게 사용하여 시를 쓴다. 예를 들면 이런 식이다. “여름 한낮에 그 오랜 기다림/ 아버지의 얼굴 같은 오래된 골목/ 수줍어 돌아앉은 외로운 들국화 까지도 내가 얼마나 사랑했는지/ 당신의 작은 노랫소리에 얼마나 가슴 뛰었는지”(영화 <시>(2010) 중 ‘아네스의 노래’에서) 다르덴 형제도 찍고 있는 어떤 ‘대상’에 대한 접근방법으로, 모든 것을 보여주거나 혹은 전혀 보여주지 않는 방식을 선택적으로 취한다. 이를 ‘시적 표현’이라 해도 무방할 듯하다.
올리비에의 허리벨트가 끊어진 것을 고치는 장면이나, 바게뜨 빵을 한입씩 베어 먹는 장면, 일부러 자물쇠가 없는 사물함을 프란시스에게 주는 장면 등 올리비에의 사소한 행동이나 디테일들을 천천히 보여준다. 하지만 관객은 올리비에가 어떤 내면의 상태인지, 무엇으로 혹은 어떻게 변화가 생기고 있는지 언뜻 알기는 어렵다. 클로즈업을 통해 관객은 그의 얼굴을 계속 보고 있으나, 돋보기 너머 그의 눈빛은 그저 스쳐 지나가기만 한다. 그래서 곱씹어 봐야 알 수 있다.
허리의 통증 때문에 보호대를 착용하는 올리비에. 얼핏 극 흐름과 상관없어 보이는 장면들을 꼼꼼히 보여준다.
목공수업이 끝나고 올리비에는 프란시스의 뒤를 쫓는다. 어디에 사는 지 알아내고 나서 전처인 마갈리가 일하고 있는 주유소로 향한다. 차 안에서 #3.담배 한 대를 피면서 정리 좀 해보자. 이제 모든 게 분명하고 확실해 졌다. 마갈리한테는 뭐라고 이야기하지? “아들을 죽인 프란시스, 기억나? 오늘 센터에서 만났어. 목공반에 오려고 했는데, 되돌려 보냈지.” 거짓말을 했다. 하지만 며칠 지나지 않아 결국 그녀에게 프란시스와 함께 있는 걸 들킨 올리비에. “미쳤어? 누구도 당신처럼은 안 해!!” “나도 알아” “근데 왜?” “나도 모르겠어”
이제 확실해졌다. 마갈리에겐 무어라 말하는 게 좋을까? 어쩌면 마갈리의 태도를 보고 결정하자고 마음 먹었는지도 모른다.
올리비에는 프란시스에게 목재를 가지러 도심 외각에 있는 ‘제재소’에 같이 가자고 요청하는데, 관객은 이유 없이 불안해 진다. 다음 날, 올리비에는 팔뚝에 밧줄을 천천히 감아 정리하고, 트렁크에는 비닐 방수포를 챙긴다. 잠시 들른 식당 화장실에서 올리비에는 천천히 손을 닦으며 거울에 비친 자신의 얼굴을 바라본다. 무슨 생각을 하는 걸까?
밖으로 나와 모퉁이에서 #4.담배에 불을 붙이고 돌아서는 올리비에에게 프란시스는 말한다. “저도 한 대만 주실래요? 월요일에 갚을게요.” 올리비에는 제재소로 가는 차 안에서 프란시스에게 11살 때 저지른 살인을 말하도록 윽박지른다. “네가 그런 짓을 하지 않았다면 그 꼬마아이는 죽지 않았어!!!”
이제 제재소에 거의 다 와 간다. 프란시스를 바라보는 올리비에의 마음은 복잡하다.
관객은 시작 후 1시간20분이 지나서야 프란시스가 올리비에의 아들을 죽였고, 5년이 지나 소년원 출소 후 올리비에의 목공반에 들어오게 된 ‘퍼즐’을 명확하게 맞추게 된다. 그러나 영화는 올리비에가 과연 ‘방아쇠’를 당길 것이냐가 아니라 그 ‘방아쇠’ 뒤에 서 있는 올리비에의 흔들리는 ‘형상’을 그리고 있다. 때문에 숲 속으로 도망치는 프란시스를 붙잡아 목을 조르던 올리비에의 손이 풀렸다고 해서, 그것을 ‘용서’로 읽는 것은 너무 성급하다.
목에 아직도 손가락 자국이 남아 있는 프란시스가 목재를 운반하는 올리비에 옆으로 다가온다. 프란시스를 어떻게 대할 수 있을까? 영화가 끝나면 올리비에 대신 이제는 우리가 흔들릴 차례다.
영화대로 42길
띠우
2024.04.28 |
조회
126
영화대로 42길
청량리
2024.04.14 |
조회
184
영화대로 42길
띠우
2024.03.31 |
조회
226
영화대로 42길
청량리
2024.03.20 |
조회
295
영화대로 42길
띠우
2024.02.19 |
조회
320
용서가 아닌 무엇이었을까 궁금하니 영화가 보고싶어네여 ..!
불안을 부르는 청량리의 영화이야기군요.
전 <살아남은 아이>를 봤을 때, 다르덴의 이 영화가 많이 떠올랐었어요.
올리비에가 목수인 것처럼, 최무성은 도배사인 것도,
가해자를 데리고 가르친다는 것도,
비슷한 설정이 많잖아요?
물론 <살아남은 아이>는 포스트세월호 이야기라고 불리지만 (진실, 용기 등)....
어쨌든, 가해 아이를 상대로 피해 부모가 복수도, 용서도 하기 쉽지 않은 현실을
올리비에 뒷모습 표정으로만으로도 잡아내는 다르덴의 카메라는, 물론 최고라고 생각합니다.