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양생과 장자> 3회 포정해우 그리고 에세이 쓰기
기린
2023-08-17 21:03
289
1.포정해우
처음 소를 잡을 때는 소가 통째로만 보였습니다. 삼 년이 지나자 소의 갈라야 할 부분이 보였습니다. 지금은 소를 눈으로 보지 않고 신묘한 기운으로 대합니다. 감각기관은 활동을 멈추고 신묘한 기운이 움직이는 것이지요. 다시 말해 소의 자연스러운 결에 따라, 살과 뼈 사이의 빈틈에 칼을 넣어 움직이며, 원래 나 있는 길을 따라 나아가는 것입니다. (.....) 지금 제 칼은 십구 년이 되었습니다. 그동안 소를 수천 마리나 잡았지만 이 칼은 막 숫돌에서 갈아낸 듯 예리합니다. 소의 뼈마디에는 틈이 있고 칼날은 더없이 얇아 두께가 없습니다. 두께 없는 것이 틈새로 들어가니 넓은 공간에서 칼이 자유자재로 놀고도 남는 것입니다. 이 때문에 십구 년이 지났어도 이 칼은 막 숫돌에서 갈아낸 듯 예리합니다. <낭송장자> 84쪽
「양생주」 2장은 소를 잡는 백정 포정의 이야기다. 포정은 자신이 소를 잡는 일에 대해 기술로 한 것이 아니라 도(道)로 했다고 했다. 처음 보았을 때 통째로 보였던 소가 삼 년이 지나자 갈라야 할 부분이 보이는 변화였다. 포정은 그 시간동안 덩어리째 보이는 소를 분해하는 기술부터 습득하면서 기술에 그치지 않고 소를 이해하기에까지 나아갔다. 즉, 소의 생김새라든가 섭생, 생명의 주기 등이었다. 이를 통해 소로 태어난 생명이 살아가는 이치를 통해 도의 운행을 깨우치게 되었다. 이렇게 깨우친 도로 십구 년이나 이어진 포정의 일은 여느 백정의 일과는 다른 길(道)을 낸 것이다.
포정이 수천 마리의 소를 잡으면서 이룩한 도는 십구 년이 지나도 예리함을 유지하고 있는 포정의 칼에서도 드러난다. 다른 백정들이 소의 살을 베거나 뼈를 쳐서 칼날을 무뎌지게 한다면, 그는 소의 뼈마디 틈새로 칼날의 길을 만든다고 한다. 포정은 이렇게 할 수 있었던 과정에 대해 “감각기관은 활동을 멈추고 신묘한 기운이 움직이는 것”이었다고 밝히고 있다. 감각기관이 활동을 멈춘다는 것은 실제로 보지 않거나 듣지 않는 것이 아니다. 그보다는 보고 듣는 순간의 모든 감각이 오로지 포정 앞에 있는 소에게 집중한 상태이다. 이 상태는 포정이 소와 자신의 몸과 칼이 함께 움직였던 수많은 시간을 통해 도달된다. 그 시간이 응집되면 포정의 움직임은 신묘해져서 보이지 않아도 보이는 단계에 이른다. 칼은 신묘한 기운에 실려서 소의 결을 따라가노라면, 뼈를 치거나 살을 베는 억지 없이 자연스럽게 나아간다. 여전히 예리한 칼과 포정의 몸과 한 마리 소가 서로에게 영향을 미쳐 가능해진 일이다. 이러한 가능성은 기술의 단련에 머무르지 않고 기운까지 신묘하게 연마했기에 이룩한 경지이다.
포정은 연이어 이 경지에 이르러서도 여전히 긴장을 늦출 수 없는 순간을 고백한다. “뼈와 살이 엉겨있는 곳”에 닿은 칼날의 움직임은 더욱 미묘해지는데, 엉김이 복잡할수록 기운을 집중하는 강도를 높여야 할 것이다. 그러다 보면 어느 순간 소가 해체되어 버리는 결과와 마주치게 된다고 했다. 포정은 이 순간을 어리둥절하다고 했는데, 그것은 소와 포정과 칼날이 더 이상 경계가 없어지는 지점에 이르러 분별이 사라지고 도의 운행에 합체되었기 때문일 것이다. 그리고 그것은 누가 가르쳐 줄 수 있는 것이 아니라, 그저 반복에 반복을 지속했을 때에야 스스로 도달하게 되는 순간이다. 여느 백정과 달리 포정의 소 잡기가 도의 경지에 이를 수 있었던 것은 매번 이러한 긴장에서도 예리하게 집중하는 기운을 부단히 연마했기 때문이다.
2. 에세이 쓰기
여느 해처럼 올해도 기획세미나를 하게 되었고, 두 학기로 구성된 세미나는 한 학기가 끝나고 에세이 기간이 되었다. 세미나 기간 내내 의식 무의식할 것 없이 이번 에세이 주제는 무엇으로 할 것인지 염두에 두게 될 수밖에 없다. 거의 십여 년을 반복해 온 과정이 내 몸에 새긴 감각 때문이다. 그렇다고 에세이가 수월하게 써지는 것은 아니다. 매주 정해진 범위의 책을 읽고 차례가 돌아오는 발제를 하지만, 저자의 주장은 제대로 파악되기 어렵고 문제의식은 좀처럼 벼려지지 못했다. 그래서 에세이 쓰기는 아무리 반복해도 매번 처음 경험하는 일처럼 느껴지기 일쑤였다. 나의 에세이 쓰기는 어떤 반복을 거치고 있는 것일까?
포정이 소를 처음 보았을 때 덩어리째 보였던 것처럼, 나 역시 낯선 개념들로 꽉 찬 책은 통째로 보였다. 저자의 주장을 구체적으로 파악할 수 있는 맥락을 찾기는 어렵고, 세미나 시간에 오가는 말들은 책의 내용과 연결되지 못하고 흩어졌다. 그렇게 세미나 시간이 지나고 나면, 뭘 아는지 뭘 모르는지 분간도 안 된 시간이 뭉텅 지나간 것을 느끼게 된다. 포정은 소를 이해하는 과정을 통과했을 때에야 갈라야 할 부분이 보였다. 그 과정은 소를 눈으로 보지 않고 기운으로 볼 수 있을 때 터득되었다. 그렇다면 텍스트 역시 눈으로 보는 것이 아니라 기운으로 읽는 감각을 터득해 볼 수 있을 것이다. 그런데 이게 쉬이 터득되는 경지가 아니다. 술술 넘어가지 않는 텍스트를 읽다보면 우선 아는 내용에 눈이 가게 마련이다. 모르는 단어는 일단 건너뛰면서, 저자가 무슨 말을 하고 있는가는 내가 아는 대로 좇아간다. 하지만 문장의 어려움이 내가 아는 것들을 통해 속도를 못 낼만큼 느려지면 읽기를 위한 집중력은 현저히 떨어진다. 저자의 사유가 내는 길에 집중하는 순간은 쪼개지고 시간은 속절없이 간다. 이런 시간이 반복되다 보면 읽기를 위한 기운 자체가 피곤에 휩싸이게 된다.
포정의 기운이 덩어리진 소의 부분의 길을 내기까지 점점 예리해져서 칼처럼 되기에 이른 것은, 소를 해체하는 몸의 동작을 끊임없이 반복했기 때문이다. 하지만 이 반복에는 멈춤이 포함되어 있다. 즉 포정은 어느 지점에서 감각기관의 작용을 멈춘다고 했다. 소를 잡을 때 마다 새로운 소라는 사실을 환기하기 위해, 바로 앞에 잡았던 소의 부분을 해체했던 감각을 멈추는 것이다. 그렇다면 내가 저자의 사유를 읽는 행위를 함에도 끊임없이 반복해서 읽는 과정을 통과해야 한다. 그럴 때 모르는 부분을 괄호 치는 것이 아니라 일단 멈추어야 한다. 모르는 부분에서 멈추고 다시 읽기, 알고 있다고 지나쳐온 부분으로 다시 돌아가 또 읽기의 반복이다. 그렇게 몇 번이고 반복하는 과정을 거치기 위해서는, 이미 알고 있다고 확신하는 나의 인식을 끊임없이 해체해야 한다. 그 과정에서 기존의 인식부터 작동하는 습관에서 벗어나서야, 저자의 사유를 받아들일 수 있는 상태가 되기에 이른다. 포정의 반복은 이 과정을 거쳤다면, 나는 그렇지 못했기 때문에 저자의 사유를 이해하는 길을 내지 못했던 것이다.
3. 에세이 쓰기가 양생이 될 수 있을까
포정이 소에게 몸을 밀착하여 해체하는 몸놀림이 춤사위 같았고, 칼이 내는 소리는 음악 같음에 감탄한 문혜군은 기술이 어찌 이런 경지에 이를 수 있었느냐 물었다. 포정은 기술을 넘어선 도를 중요하게 여긴다고 했고, 포정이 밝힌 소를 잡는 도를 들은 그는 양생(養生)을 터득했노라고 했다. 그렇다면 포정에게 소를 잡는 일은 자신의 삶을 가꾸는 기예를 연마해서 도를 터득할 수 있는 장이었다. 내가 일 년을 공부하는 기획세미나를 하고 에세이로 마무리하는 일도 나의 삶을 가꾸는 장으로 삼을 수 있을까?
매년 기획 세미나를 하고 마무리로 에세이를 쓰는 반복이 매번 괴로운 상황에 대해 질문해 보고 나니, 포정의 반복이 다르게 읽혔다. 뼈와 살이 엉겨있는 복잡한 지점에서는 여전히 멈추어 기운을 예리하게 다듬는 포정이 보였다. 그에 비해 텍스트를 읽는 내내 기존의 인식을 작동시켜 아는 것만 읽느라 기운을 다 쓰고 마는 내가 보였다. 이러한 읽기의 반복은 결과적으로 문제의식을 예리하게 벼릴 수 없기 때문에, 쓸 수 있는 내용이 없는데 쥐어짜는 괴로움만 반복할 수밖에 없다.
우선 읽기의 습관을 바꾸려면, 모르는 내용을 건너뛰어 읽고 있는 나를 발견하는 순간 내가 하고 있는 행동을 깨달을 수 있어야 한다. 그리고 지나쳐서 읽어가려는 기운과 멈추려는 기운이 서로 겨루어서 다시 읽는 기운을 익혀야 한다. 이러한 과정이 곧 포정이 몸을 놀려 거듭거듭 소를 잡는 과정이기도 하다. 그렇게 반복되어진 읽기를 통해 텍스트에 대한 이해의 폭이 쌓여도 쓰기에서는 또다시 괴로움에 봉착한다. 텍스트에 대한 이해가 기존의 나의 인식을 해체하고 재조립해야 해서 써내야 하는 일은 여전히 시간이 부족할 수 있기 때문이다. 포정의 십 구년은 그런 점에도 양과 질이 담보되는 절대적인 시간의 양이기도 할 것이다.
세미나에서 채택된 텍스트를 읽고 또 읽는 반복으로 나의 인식을 해체하는 일 자체가 몸의 기운을 써야 한다. 그래서 이해된 저자의 사유들이 나의 어떤 경험과 연결되어 제대로 설명되어지기까지 수없이 쓰고 고치기를 반복하는 작업 또한 몸으로 통과해야 한다. 그렇게 온 몸으로 읽기와 쓰기를 통과하는 일, 오롯이 집중하는 경험을 몸에 새기는 일이 곧 에세이 쓰기일 것이다. 포정이 그렇게 소를 잡았듯이, 나도 그렇게 에세이를 쓸 수 있다면 그 자체로 삶을 가꾸는 기예가 되어 좋은 삶을 지속하는 동력이 될 수 있을 것이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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포정해우-에세이쓰기-양생의 연결이네요
기린의 다양한 글쓰기를 응원합니다^^
그렇다면 내가 저자의 사유를 읽는 행위를 함에도 끊임없이 반복해서 읽는 과정을 통과해야 한다.
다시 읽기를 무지 싫어하는 나를 뜨끔하게 만드는 문장!이넴......
그럼유 그럼유 읽고 글쓰기는 ‘양생’이 되지유~~
이제 에세이 쓸때마다 해우하는 심정으루다가ᆢ