이 모든 지리적 사실

현민
2024-04-17 22:55
221

이 모든 지리적 사실

 

네덜란드는 독일의 북쪽에 맞닿아있다. 세 명의 친구가 살고 있지만 한 번도 가본 적은 없었다. 지난 겨울 니키가 운전해서 네덜란드에 간다고 하길래, 그럼 가는 길에 친구가 사는 도시에 내려 달라고 부탁했다. 서경은 독일과 국경이 맞닿아있는 아른헴에서 공부한다. 모부님께 네덜란드 유학을 가고 싶다고 말했을 때 그들은 성매매와 마약 합법 때문에 꼭 그곳이어야겠냐고 물었다. 아이러니하게도 네덜란드에서는 정치적 혼란시기였던 19세기 마땅한 보수정당이 없어 동성결혼, 성매매와 마약 합법 등을 실행하게 되었다고 한다.

 

The History of Dutch Cannabis Coffeeshops | LeaflyWhy Amsterdam's oldest cannabis 'coffeeshop' has been forced to close

네덜란드의 흔한 커피샵

커피도 파는데 대마초도 판다. 일상적으로 사람들이 와서 대마초를 피우는 곳이다.

 

서경은 영어권 국가 중 네덜란드가 가장 물가가 싼 편이라 네덜란드 대학에 지원했다. 네덜란드에는 더치Dutch라고 불리는 고유어가 있음에도 영어권 국가라고 불릴 만큼 국민 90%는 영어를 능숙하게 구사한다. 독일인들은 네덜란드어가 독일어에서 파생한 괴상한 사투리라고 말하는데, 네덜란드에 와보니 더치는 생각보다 더 고유했다. 영국과 미국에 비교하면 굉장히 싼 유학비지만, 독일과 비교했을 땐 비싼 생활비 그리고 주거난 때문에 아직도 에어비엔비에서 산다는 서경의 학교 동기들의 이야기를 들으며 이 나라에 이주민 비율이 큰 이유가 궁금해졌다. 헤이그에서 공부하는 지연은 현재 네덜란드가 보수집권이지만 여성·퀴어 인권은 너무 당연해서 보수당도 건드리지 않는다고 말해주었다. 그 대신 보수당은 이주민을 규제하고 싶어한다고 했다.

 

일 년 만에 만난 서경과 새벽까지 조잘대며 회포를 풀고, 아침에 일어나 밥을 짓기 시작했다. 서경은 내 음식을 좋아한다. 그래서 집에서 마른 미역과 들깻가루, 된장과 코인육수를 챙겨왔다. 독립생활의 적적함을 OTT(스트리밍 플랫폼 총칭)로 달래는 서경은 내가 요리를 하는 동안 밥 먹으면서 볼 영화를 골랐다. 너 파친코 봤어? 아니, 근데 그거 보고 싶었어. 그럼 보자. 우리는 파친코를 보기 시작했다.

 

파친코와 재일 조선인

 

파친코는 소설 원작의 드라마로 주인공 선자를 통해 일제 강점기에 일본으로 이주한 재일조선인의 삶, 그리고 주인공 선자의 손자인 솔로몬의 삶을 통해 미국 이주민, 일본의 버블 경제 시대를 다룬다. 정확히는 1910년부터 1989년까지 선자의 부모, 선자, 선자의 아들과 손자까지 4세대의 이야기가 담겨있다.

 

파친코 독일판 표지

'Ein einfaches Leben' 가장 보통의  삶 이라고 번역할 수 있을 것 같다.

어린 선자(왼쪽), 젊은 선자(중간), 늙은 선자(오른쪽 끝)을 통해 시대의 흐름을 볼 수 있다.

 

드라마를 보며 나는 은은하게 젖어 들었다. 역사 책에는 가장 잔인한 폭력의 희생자나 가장 영웅적인 서사가 기록되기 마련이지만, 사연 없는 사람이 없는 시절이었다. 가장 평범한 사람들의 이야기를 따라가며 시대의 불행함을 보았다. 숨이 약간 막힌 채로 물 안에서 숨을 쉬는 기분이었다. 나라를 빼앗기고, 집과 먹을 것을 빼앗기고, 언어와 이름을 빼앗기고, 존엄을 빼앗겼다. 그들에게는 가족을 지키고 배를 채우는 일이 가장 중요한 일이었다. 살아남으려면 가족애와 애국심이 필요했을 것이다. 종종 한국인의 가족애와 공동체적 특성, 애국심이 터무니없다고 생각했지만 역사 속에 그 기원이 있었다.

 

재일조선인(재일한국인, 재일교포, 재일동포)은 역사의 이 틈에 있다. 한국전쟁 시기, 나라가 찢어지게 가난할 시절, 살아남기 위해 일본으로 이주했다가 해방 후 한반도의 어지러운 정치 상황과 경제 혼란 등의 이유로 돌아가지 못한 혹은 않은 사람들이다. 아직까지도 일본에는 30만명의 재일조선인이 있으며, 특별 영주권자로 분류된다. 그마저도 어느 일본인들은 특혜라고 그들의 생존권을 박해한다. 그들이 한국에 입국하려면, 대사관에서 매번 임시 비자를 발급받아야 한다. 일본에서는 한국인이라고 멸시 받고, 한국에서는 일본인이라고 욕 먹는 존재. 어느 나라도 나 몰라라 하는 사람들. 재일조선인의 존재를 알고 난 후 나는 세상이 조금은 다르게 보였다. 우리나라에 재일조선인 작가로 알려진 서경식은 <디아스포라의 눈>에 이렇게 썼다.

 

‘디아스포라’라는 말은 요즘 한국에서도 꽤 일반적으로 쓰고 있는 듯하다. 원래 이산 유대인을 가리키는 이 말은 현대에는 좀 더 폭넓게, 어떤 외부의 힘에 의해 고향을 떠나 이리저리 흩어져 살아가는 사람들을 가리키는 말로 쓰이고 있다. 나와 같은 재일 조선인도 식민 지배와 민족 분단이라는 외적인 힘에 의해 이산당한 백성이라 할 수 있을 것이다. 디아스포라는 그가 살아가는 공간에서 언제나 마이너리티(소수·비주류)이다. 당연히 디아스포라로 살아가는 건 즐겁지 않다. 하지만 디아스포라에겐 이점도 있다. 그것은 머조리티(다수·주류)에겐 잘 보지이지 않는 것을 볼 수 있다는 점이다. 바꿔 말하면 국민 국가 시대의 머조리티란 ‘국민’이기 때문에, 디아스포라는 ‘국민’에게 잘 보이지 않는 것을 볼 수 있는 존재이다.’

 

재일조선인은 역사에서 지워져 있다. 그러나 그들의 이야기를 조금만 들어보면 그들의 존재가 한국 근현대사를 관통한다는 걸 알 수 있다. 마이저리티의 눈으로 세상을 감각해보면 세상은 얼마나 부당한가. 그들이 느끼는 부당함은 세상의 어떤 면을 보여주는가. 서경식은 많은 사람들이 국가 단위로 세상을 인식하는 데 익숙해져 있다고 말한다.

 

한국은 삼면이 바다고 북쪽은 막혀있어 고립되기 쉬운 지리적 요건을 가지고 있다. 나는 한국이 외국인 친화적이라거나, 문화적 다양성을 성숙하게 받아들이는 나라라고 생각하지 않는다. 독일만 예를 들어도, 덴마크, 폴란드, 체코, 오스트리아, 프랑스, 스위스, 벨기에, 네덜란드와 붙어있다.  적어도 이곳에서 내가 외국인이라는 사실은 그렇게 유난하지 않다. 독일에서는 외국인을 뜻하는 단어 아우스랜더Ausländer를 누군가를 차별할 때 쓰는 말이라는 인식 때문에 잘 쓰지 않는다. 한국에서는 한국적인 것, 두루뭉술한 혈연 공동체인 ‘우리’를 강조할 때 더 힘을 부여 받는다. 그렇기 때문에 나는 내가 한국인이라는 사실을 의심해 본 적이 없다. 사회가 국민성과 애국심을 강조할 때, 누가 배제되었는가. 나와 당신은 어떤 이점을 누렸는가. 마이너리티의 시선으로 내가 속한 사회를 볼 때마다, 우리가 이미 도태됐을지도 모른다고 말하고 싶을 때가 잦다.

 

여러개의 고향

 

<파친코>의 원작 소설 작가 이민진의 아버지는 북한, 어머니는 남한 출신으로 한국전쟁 후 그가 3살 때 미국으로 이민을 갔다. 그녀의 다큐멘터리에서 그녀는 ‘당신은 재미교포인데 왜 재일조선인에 대한 이야기를 쓰냐’는 질문을 받는다고 말했다. 그녀는 대학 시절 어느 나라에도 온전히 속하지 못한 채 살아가는 재일교포들에 대해 알게 되었다. 어떤 한국인도 그 사람들의 이야기에 관심 갖지 않을 때, 그녀는 일본인인 남편을 따라 일본에서 재일조선인의 삶을 연구하며 11년 동안 책을 썼다. 한국인이냐 미국인이냐 따지면 미국인에 가까운 사람이, 한국어를 완벽히 구사할 줄 모르는 사람이 쓰는 한국 이야기. 나는 글을 쓸 때 내가 이 글을 쓸 자격이 있는 지에 대해 자주 의심하는데, 그녀의 이야기를 들은 후 이야기할 자격이란 이러한 끈질김에서 온다고 생각했다. 그녀의 다큐멘터리에서 그녀는 이렇게 말한다. ‘이 모든 지리적 사실이 저를 만들었고, 저는 그것을 거부하지 않습니다.’

 

어딘가 딱 들어맞지 않는 비정상적 존재, 경계의 사람들로부터 우리는 무엇을 배우는가. <디아스포라의 눈>에서 서경식은 또 이런 문장을 남긴다. '나는 타자로서의 ’조국‘, 그리고 ’조국’의 타자로서의 자신을 발견했다. 하지만 그것이 꼭 슬퍼하거나 한탄할 일은 아니었다. 그 지점에서 나는 다수의 ‘국민’들이 공유하고 있는 듯한 애매한 혈연공동체적 정서의 의거하는 것이 아니라 사람과 사람의 공공적인 연계로서의 ‘조국’이라는 가능성에 대해 사색하기 시작했기 때문이다. 서로의 차이를 인정하면서 대화를 계속해감으로 새로 만들어가는 사회, 그것이 나에게는 바람직한 ‘조국’이다.'

 

독일에서 사는 게 막막할 때마다 독일이냐 한국이냐를 고민한다. 한국에 돌아가는 나를 상상하면 숨이 막히지만, 타지에서 지독하게 살아남는 모습을 상상해봐도 기쁘지 않다. 그러다 보면 독일이나 한국 중에 하나를 선택하는 것만이 내 삶인 것처럼 느껴지기도 한다. 하지만 내가 어떻게든 삶을 이어간다면 아주 먼 미래에는 내게 여러 고향이 생길 것이다. 이주민의 삶을 살면서 내 정체성이 아슬아슬하게 느껴질 때가 많지만, 이민진과 서경석 같이 먼저 세대의, 다정한 어른들의 글을 읽을 수 있어서 다행이다. 나는 '나의 집은 어디인가'라는 질문을 오래 붙잡고 있다. 그 질문에 대한 답은 결코 어느 한 이름이 되지 않을 것 같다.

 

 

인도에서는 요맘때 쯤 봄이 오는 것을 축하하며 홀리Holi 페스티벌을 한다.

인도인 플랫메이트 쿠쉬가 다양한 사람들을 불러모아 우리집 마당에서 홀리 페스티벌을 진행했다.

홀리에서는 네가 누구든지 간에 상관없이, 색 가루와 물 풍선을 서로에게 던지며 논다.

쿠쉬는 그것이 서로를 축복해주는 일이라고 말해주었다.

 

 

 

 

 

 

글쓴이 현민

친구들과 함께 동천동의 책방 우주소년을 운영했습니다.

서점을 운영하며 스쿨미투집 <밀려오는 파도 막을수는 없다> 1권과 같은 이름의 공동체 탐구집 2권을 만들었습니다.

지금은 독일에 삽니다.

 

 

댓글 4
  • 2024-04-18 08:24

    너의 글을 읽을때마다 생각하지
    나의 20대와 참 다르구나...(라는 지당한 것을.)

    나는 이제야 "이 모든 지리적 사실"에 대해 생각하기 시작했는데
    너희 세대는 삶 자체가 "이 모든 지리적 사실"과 연관되어 있다는 생각도 들고.

    언젠가, 내가, 니가 있는 곳, 그 때 그곳이 어디든, 그곳에 가서 같이 걷고 밥 먹고 이야기할 수 있기를!

  • 2024-04-18 08:27

    <파친코> 못 봤는데, 이주민의 정체성으로 이 영화를 본 현민의 소감이 담담히 읽히는 걸 보니, 영화가 좋았나봐요. 언젠가 나도 봐야쥐~~

  • 2024-04-18 09:22

    앞으로 여러 개의 고향이 생길 현민과는 또 다른 의미에서 '나의 집은 어디일까' 생각해보게 됩니다.

  • 2024-05-02 16:01

    한국이 여러 개의 고향 중 하나가 되었을 때 또 어떤 이야기를 할 수 있을지 기대되어요. 그 과정 계속 써주세요^^

현민의 독국유학기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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2024.04.17 | 조회 221
현민의 독국유학기
글쓴이 현민 친구들과 함께 동천동의 책방 우주소년을 운영했습니다. 서점을 운영하며 스쿨미투집 <밀려오는 파도 막을수는 없다> 1권과 같은 이름의 공동체 탐구집 2권을 만들었습니다. 지금은 독일에 삽니다.             입원기   볼더링을 하다가 떨어졌다. 다음 날 응급실에서 하루종일 엑스레이를 몇 번 찍은 후 의사로부터 인대 파열과 발목 바깥쪽 뼈가 부러졌다는 말을 전해들었다. 뼈를 재위치하기 위해선 다리에 못을 박는 수술을 해야 했다. 살면서 병원에 가는 일이 잘 없는게 자랑이었는데, 갑작스럽게 입원을 하게 되었다. 가장 먼저 한 것은 보험 확인이었다. 모든 사람들이 내게 보험은 있냐고 물었다. 최근 나는 독일에서 새 비자를 받았는데, 그때 독일 사보험을 등록해놓았다. 지난 한 해 동안은 한국에서 가장 싼 여행보험을 들어놓았다. 그동안 한 번도 병원에 갈 일이 없었는데, 독일 보험을 들어놓고 사고를 당해서 다행이었다.   입원하면 금방 수술을 받을 수 있을 줄 알았는데, 발목이 너무 부으면 수술 후 봉합이 어려워 붓기가 가라 앉을 때까지 기다려야 했다. 병원에서 아침 점심 저녁 밤으로 진통제를 받았는데, 살면서 그렇게 많은 약을 먹어본 적이 없었다. 빈속에 약을 먹어 배가 쓰리면, 그것을 방지하는 약을 먹는 식이었다. 서양 의학이란 이런 것이구나 체감하며 먹으라는 약을 먹었다. 팔에 주사바늘을 꽂고 이름 모르는 주사들을 여러 번 맞으니 몸에 멍 자국이 금방 늘었다. 매일 아침 집단으로 의사 무리가 찾아와 오늘도 수술은 못 할 것 같다고 전했다.   예상보다...
글쓴이 현민 친구들과 함께 동천동의 책방 우주소년을 운영했습니다. 서점을 운영하며 스쿨미투집 <밀려오는 파도 막을수는 없다> 1권과 같은 이름의 공동체 탐구집 2권을 만들었습니다. 지금은 독일에 삽니다.             입원기   볼더링을 하다가 떨어졌다. 다음 날 응급실에서 하루종일 엑스레이를 몇 번 찍은 후 의사로부터 인대 파열과 발목 바깥쪽 뼈가 부러졌다는 말을 전해들었다. 뼈를 재위치하기 위해선 다리에 못을 박는 수술을 해야 했다. 살면서 병원에 가는 일이 잘 없는게 자랑이었는데, 갑작스럽게 입원을 하게 되었다. 가장 먼저 한 것은 보험 확인이었다. 모든 사람들이 내게 보험은 있냐고 물었다. 최근 나는 독일에서 새 비자를 받았는데, 그때 독일 사보험을 등록해놓았다. 지난 한 해 동안은 한국에서 가장 싼 여행보험을 들어놓았다. 그동안 한 번도 병원에 갈 일이 없었는데, 독일 보험을 들어놓고 사고를 당해서 다행이었다.   입원하면 금방 수술을 받을 수 있을 줄 알았는데, 발목이 너무 부으면 수술 후 봉합이 어려워 붓기가 가라 앉을 때까지 기다려야 했다. 병원에서 아침 점심 저녁 밤으로 진통제를 받았는데, 살면서 그렇게 많은 약을 먹어본 적이 없었다. 빈속에 약을 먹어 배가 쓰리면, 그것을 방지하는 약을 먹는 식이었다. 서양 의학이란 이런 것이구나 체감하며 먹으라는 약을 먹었다. 팔에 주사바늘을 꽂고 이름 모르는 주사들을 여러 번 맞으니 몸에 멍 자국이 금방 늘었다. 매일 아침 집단으로 의사 무리가 찾아와 오늘도 수술은 못 할 것 같다고 전했다.   예상보다...
현민
2024.03.16 | 조회 274
현민의 독국유학기
글쓴이 현민 친구들과 함께 동천동의 책방 우주소년을 운영했습니다. 서점을 운영하며 스쿨미투집 <밀려오는 파도 막을수는 없다> 1권과 같은 이름의 공동체 탐구집 2권을 만들었습니다. 지금은 독일에 삽니다.             유학점검기   독일에는 아우스빌둥(Ausbildung)이라는, 직장과 직업학교를 번갈아가며 배우는 제도가 있다. 영어로는 Apprenticeship이고 한국어로는 직업교육이라고 말할 수 있을 것 같다. 회사에서 실질적인 교육을 받고 직업학교에서 이론적인 것을 배운다. 고등학교 졸업 후 대학에 가지 않고 아우스빌둥을 하는 경우도 줄곧 있다. 독일의 오기 전 나의 계획은 일년 간 어학연수를 하고 출판사에서 아우스빌둥을 하는 것이었다. 최근 나는 출판사들에 이력서와 커버레터를 넣고 인터뷰를 다닌다. 자본주의의 빈틈에 껴서 살다가 제발 일 시켜달라고 스스로를 둘도 없는 인재처럼 소개하려니 어색하다. 독일에 와서 변한 것이 많다. 코코넛밀크로 맛있는 커리를 만들 수 있고, 알리오 올리오를 먹고, 핸드크림을 바르고, 외식은 잘 하지 않는다. 전에는 곁에 없으면 안 될 것 같았던 친구들과는 어쩌다 한번 연락한다. 그리고 새로운 친구들과 익숙한 공간들이 생겼다. 한 해 동안 어떻게 살았는지 돌아보는 마음으로 유학점검기를 쓴다. 나를 아시는 분들께는 그래서 얘가 지금 독일에서 뭐하며 사는건지 머릿속에 그림을 그려보실 수 있을 것 같다.   독일의 여름을 믿지 마세요   2022년 6월부터 9월 독일 지인 댁에서 아름다운 여름을 보냈다. 그즈음 나는 이러다간 익숙함에 속아 한국을 떠나지 못할 것 같다는 생각을 하고 있었다. 여름이 지난 뒤, 나는 독일에 와서 살아보겠다는 결심을...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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현민의 독국유학기
    글쓴이 현민 친구들과 함께 동천동의 책방 우주소년을 운영했습니다. 서점을 운영하며 스쿨미투집 <밀려오는 파도 막을수는 없다> 1권과 같은 이름의 공동체 탐구집 2권을 만들었습니다. 지금은 독일에 삽니다.             미친 인간들의 안전한 파티   나의 셰어하우스에는 풀타임 직장인이 두 명 있다. 그들은 아침부터 오후 5시까지 일한다. 그들은 거의 홈 오피스를 해서 집에서 자주 보이지만 늘 지쳐있고, 하루만 사무실에 다녀오는 날에는 진을 다 빼고 온다. ‘일하기’는 중요하지만 앞으로 남은 모든 날을 이렇게 하루하루 진을 빼며 사는 것인가 가늠해 보기 시작하면 주 4일제 실현이 간절해진다. 이들이 일만큼 열심히 하는 것이 있다면 저녁에 부엌에 둘러앉아 담배를 물고 진토닉을 마시기 시작하다가, 주방에 있는 큰 스피커에 노래를 연결해 테크노 음악을 틀기 시작한 후 자정쯤 파티에 가거나, 지하실에 내려가 디제잉을 하며 파티를 벌이는 것이 있다. 매주 서너 병의 진을 사와 자신들이 다 마신 사실을 잊고 그 술들이 다 어디 갔냐고 묻는 사람들. 이들의 특징으로는 파티와 술과 담배 따위에 매우 후하다는 점이 있다. 자신이 마셔 마땅하다고 생각하는 이들, 함께 마실 사람이 항상 필요한 이들. 제안하면 거절하지 않는 사람으로서 나는 이들과 잦은 파티를 가진다. 우리는 종종 방탕히 노는 시간으로부터 삶의 아름다움을 본다. 그럴 때가 오면 가끔은 해야 할 일을 못 해도, 밥을 못 먹어도 즐겨 마땅했다는 확신이 든다.   독일 클럽에는 무엇이 있는가   나의...
    글쓴이 현민 친구들과 함께 동천동의 책방 우주소년을 운영했습니다. 서점을 운영하며 스쿨미투집 <밀려오는 파도 막을수는 없다> 1권과 같은 이름의 공동체 탐구집 2권을 만들었습니다. 지금은 독일에 삽니다.             미친 인간들의 안전한 파티   나의 셰어하우스에는 풀타임 직장인이 두 명 있다. 그들은 아침부터 오후 5시까지 일한다. 그들은 거의 홈 오피스를 해서 집에서 자주 보이지만 늘 지쳐있고, 하루만 사무실에 다녀오는 날에는 진을 다 빼고 온다. ‘일하기’는 중요하지만 앞으로 남은 모든 날을 이렇게 하루하루 진을 빼며 사는 것인가 가늠해 보기 시작하면 주 4일제 실현이 간절해진다. 이들이 일만큼 열심히 하는 것이 있다면 저녁에 부엌에 둘러앉아 담배를 물고 진토닉을 마시기 시작하다가, 주방에 있는 큰 스피커에 노래를 연결해 테크노 음악을 틀기 시작한 후 자정쯤 파티에 가거나, 지하실에 내려가 디제잉을 하며 파티를 벌이는 것이 있다. 매주 서너 병의 진을 사와 자신들이 다 마신 사실을 잊고 그 술들이 다 어디 갔냐고 묻는 사람들. 이들의 특징으로는 파티와 술과 담배 따위에 매우 후하다는 점이 있다. 자신이 마셔 마땅하다고 생각하는 이들, 함께 마실 사람이 항상 필요한 이들. 제안하면 거절하지 않는 사람으로서 나는 이들과 잦은 파티를 가진다. 우리는 종종 방탕히 노는 시간으로부터 삶의 아름다움을 본다. 그럴 때가 오면 가끔은 해야 할 일을 못 해도, 밥을 못 먹어도 즐겨 마땅했다는 확신이 든다.   독일 클럽에는 무엇이 있는가   나의...
현민
2023.11.21 | 조회 357
현민의 독국유학기
          글쓴이 현민 친구들과 함께 동천동의 책방 우주소년을 운영했습니다. 서점을 운영하며 스쿨미투집 <밀려오는 파도 막을수는 없다> 1권과 같은 이름의 공동체 탐구집 2권을 만들었습니다. 지금은 독일에 삽니다.             Heimat   정민   최근엔 정민이 왔다 갔다. 그 애는 나의 바로 밑 동생이다. 세자매 중 나와 정민은 극도로 상극의 삶을 산다. 그 애는 중학생 때부터 독서실에서 공부를 하느라 12시 이전에 집에 들어온 적이 없다면 나는 친구들과 노느라 12시 전에 집에 들어간 적이 없던 것 같다. 그 애는 꿈이 없는 게 불안해서 공부를 했다면 나는 꿈 같은 거 생길 수 있는 사회냐고 화를 내는 편이었다. 우리가 삶을 사는 모습은 너무나도 다르지만 그 애는 내 인생에서 가장 웃긴 사람 중 하나다. 우리는 서로에게 인생 최고의 개그맨이다. 나의 지겨운 가정사를 가장 잘 아는 사람, 그것으로 극도의 유머를 만들 수 있는 사람은 그 애가 유일하다.   한 달이 지나고 공항에 그 애를 데려다주는 길에는 기분이 싱숭생숭했다. 독일에서 만나는 외국인들 중에서도 먼 나라에서 온 편인 나는 그 거리감을 대체로 즐겼다. 하지만 비행기에 앉아서 하루쯤 지나면 도착하는 게 한국이라니 문득 너무 가깝게 느껴졌다. 그래서 아무 소리나 시작했다. 나 만약에 한국에 돌아가야 되면 어떡하지? 진짜 돌아가야 되면 거기서 뭘 할 수 있지? 정민은 말했다. 왜 자꾸 한국에 돌아갈 생각을 해? 언니...
          글쓴이 현민 친구들과 함께 동천동의 책방 우주소년을 운영했습니다. 서점을 운영하며 스쿨미투집 <밀려오는 파도 막을수는 없다> 1권과 같은 이름의 공동체 탐구집 2권을 만들었습니다. 지금은 독일에 삽니다.             Heimat   정민   최근엔 정민이 왔다 갔다. 그 애는 나의 바로 밑 동생이다. 세자매 중 나와 정민은 극도로 상극의 삶을 산다. 그 애는 중학생 때부터 독서실에서 공부를 하느라 12시 이전에 집에 들어온 적이 없다면 나는 친구들과 노느라 12시 전에 집에 들어간 적이 없던 것 같다. 그 애는 꿈이 없는 게 불안해서 공부를 했다면 나는 꿈 같은 거 생길 수 있는 사회냐고 화를 내는 편이었다. 우리가 삶을 사는 모습은 너무나도 다르지만 그 애는 내 인생에서 가장 웃긴 사람 중 하나다. 우리는 서로에게 인생 최고의 개그맨이다. 나의 지겨운 가정사를 가장 잘 아는 사람, 그것으로 극도의 유머를 만들 수 있는 사람은 그 애가 유일하다.   한 달이 지나고 공항에 그 애를 데려다주는 길에는 기분이 싱숭생숭했다. 독일에서 만나는 외국인들 중에서도 먼 나라에서 온 편인 나는 그 거리감을 대체로 즐겼다. 하지만 비행기에 앉아서 하루쯤 지나면 도착하는 게 한국이라니 문득 너무 가깝게 느껴졌다. 그래서 아무 소리나 시작했다. 나 만약에 한국에 돌아가야 되면 어떡하지? 진짜 돌아가야 되면 거기서 뭘 할 수 있지? 정민은 말했다. 왜 자꾸 한국에 돌아갈 생각을 해? 언니...
현민
2023.09.19 | 조회 395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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