두려움의 연대기 #4- 엄마와 샌프란시스코
문탁
2023-10-20 14:57
335
해야
자유롭게 살고 싶어 한국을 탈주한 퀴어다.
판에 박힌 일상과 화폐 증식의 압력에서 자유로워지고 싶어 공부를 시작했다.
새 밀레니엄의 시작인 2000년대는 다른 세상이 열릴 거라 기대했다. 누구나 갖게 된 휴대 전화와 전국 구석구석까지 뻗친 인터넷 덕택에 동성애자들에 대한 편견이 줄 수 있을 것 같았다. 그러면 난 세상 밖으로 천천히 한 걸음씩 나오게 될 수 있지 않을까. 하지만 그 기대는 그리 오래가지 못했다. 디지털 세상이 오자 수십만의 동성애자들이 익명에 기대어 온라인 공간에 모여들었다. 거기서 정보를 주고 받고 낯선 이들과 연결을 시도했다. 비록 맨얼굴을 내밀 수 없었지만 말이다. 이들의 존재감이 드러나게 되자 거센 역풍이 불었다. 동성애자들의 온라인 거점었던 웹사이트들이 청소년 유해사이트로 지정되는 소위 ‘엑스존사태’가 일어났다. 성소수자를 지칭하는 ‘이반’이나 ‘게이’ 등의 단어도 인터넷 검색 금지어로 지정되었다. 동성애자들이 양지로 나오지 못하도록 정부와 보수세력이 적극적으로 나서기 시작한 것이다. 그들은 내가 음란, 반인륜, AIDS그 자체라고 우겼다. 새 밀레니엄 시대에 동성애자들이 존재가 아닌 사회악이나 질병으로 공식화 되리라고는 꿈에도 생각하지 못했다. 이 일로 인해 난 많이 낙담했다. 권력과 보수 세력들을 더욱 혐오하게 되었다. 당시 한국 사회는 내게 노답 그 자체였다.
2015년 소위 엑스존 사태
https://www.mediaus.co.kr/news/articleView.html?idxno=47627
이들에게 대항할 힘은 미약했다. 성소수자 인권 운동은 초기 단계였고 소규모 조직에 머물렀다. 참여자를 모으기 어려웠다. 당시 커밍아웃을 한다는 것은 가족과 직장을 잃는 결심을 하지 않는 이상 어려운 일이었다. 취미 활동을 같이 하는 동호회 모임들이 그나마 양지로 나온 축에 속했다. 나를 포함한 대다수 성소수자들은 싸우기보다는 세상과 단절된 상태로 사는 쪽을 선택했다. 극장이나 지하술집에서의 만남 대신 온라인을 통해 쉽게 만나는 번개팅이 대세를 이루었다. 세상과 분리시켜 밖으로 나오지 못하게 하려는 권력의 의도가 효과적으로 실현되었던 셈이다.
서른을 넘기게 되자 나에겐 노총각이란 사회적 이름이 주어졌다. 가정을 꾸린 친구들과는 거리감이 느껴졌고 회사에선 인적 관리와 성과에 대한 부담이 가중되고 있었다. 총각 팀장이라 불릴 때마다 자의식이 발동했다. 조직생활을 언제까지 해야 할지 고민되었다. 뚜렷한 방향 없이 관성대로 살던 중 황망한 일이 닥쳤다. 엄마가 시한부 암진단을 받은 것이다. 엄마는 시골집을 정리한 후 나와 같이 살면서 치료를 받게 되었다. 입원과 퇴원을 반복하였다. 엄마는 예상보다 몇 년을 더 버틴 후 세상을 떠났다. 엄마와 영원히 헤어진 것은 내 인생에서 가장 슬픈 일이었다. 엄마가 하루 아침에 존재하지 않게 된 사건 앞에서 내가 바라던 많은 것들이 몹시 허망하게 느껴졌다. 긴 애도의 기간을거쳐야 했다. 가장 친밀한 관계망이 끊어지자 누군가를 만나고 싶은 욕망이 강해졌다. 나를 품어줄 관계 안으로 꼭 들어가고 싶었다. 좋아하는 사람과 맘껏 연애하고 정착하는 그런 삶을 살고 싶었다. 한국에선 그게 실현되기 힘들어 보였다. 한국을 떠날 수 있는 방법을 구체적으로 알아보기 시작했다.
당시 난 몇 번의 마우스 클릭으로 전세계의 동성애자들과 연결될 수 있었다. 온라인 미디어와 웹사이트를 통해 구미 선진국에서 동성애자들이 어떻게 받아들여지고 있는지, 이들의 권리가 어떻게 향상되고 있는지에 관심을 갖게 되었다. 게이 포털 사이트들에서 영어권 국가의 동성애자들과 실시간 채팅도 할 수 있어 변화를 쉽게 감지할 수 있었다. 네덜란드를 시작으로 선진국이라 불리는 유럽 국가들에서 동성혼이 법제화되기 시작했다. 전세계 게이들의 메카라 불리는 샌프란시스코에서도 동성 커플에게 결혼증명서를 발급하고 있었다. 이런 일이 내가 살아 있는 동안 한국에서 일어날 수 있을까. 그럴 가능성이 제로라고 생각했다. 오히려 반대로 모욕과 차별이 공식화되고 있었다.
샌프란시스코에 꼭 가고 싶었다. 비자가 나오지 않은 불확실한 상태에서 휴가를 내어 답사까지 갔다 왔다. 두 남성이 거리에서 키스를 하는 걸 보고 나는 입을 다물지 못했다. 익숙한 일상의 풍경이라 어느 누구도 신경쓰지 않는 듯했다. 각기 다른 피부색과 문화, 종교를 가진 사람들이 사는 곳, 다양한 스펙트럼의 성소수자들이 모여드는 그곳은 나를 환대해 줄 것 같았다. 엄마가 떠나고 일 년 뒤, 내 손엔 샌프란시스코행 항공권이 쥐어져 있었다. 한국에서 가져갈 것은 거의 없었다. 한 개만 마련한 이민 가방이 반도 차지 않을 정도였다. 별다른 아쉬움도 미련도 없었다. 낯선 곳에서의 삶을 생각하면 약간 긴장되기도 했지만 난 매우 들떠 있었다.
약간의 죄책감이 있었다. 만일 엄마가 떠나지 않았다면 어땠을까. 난 한국을 떠날 엄두를 내지 못했을 것이다. 내가 의도한 것은 아니었지만 엄마의 부재로 자유를 얻게 된 느낌이었다. 엄마에게 미안했다. 엄마는 눈감기 며칠 전에도 내가 짝을 만나 결혼하는 게 소원이라고 말했다. 엄마가 나의 마음을 알았더라면 샌프란시스코에 가길 잘했다고 응원해줄 거라고 믿고 싶었다. 다른 한편으로는 싸우는 게 무서워 도망치는 겁장이란 생각도 들었다. 20대 시절에 간접적으로 알았던 동성애자들이 스스로 생을 포기하는 일이 있었다.
그 중 한 사람은 인권운동을 하던 사람이었다. 그들이 경험했을 소외감과 절망이 이해되었지만 난 세상과 등지고 싶을만큼 괴로운 적이 없었다. 이런 자신을 보며 ‘내가 문제 의식이 부족하거나 공감 능력이 떨어지나’ 하는 생각을 가끔씩 하곤 했다. 두렵고 괴로운 가운데에서도 난 사는 게 좋았다. 내 자신이 마음에 들지 않을 때도, 괴로운 일을 겪고 나서도 시간이 조금 지나면 다시 살아갈 에너지가 스물스물 올라왔다. 이런 내 모습이 뭔가 잘못된 것 같았다. 난 지금도 가끔씩 ‘넌 독하고 영악한 놈이야’라고 스스로에게 말한다. 동성애자들의 현실에 대해’ 진지하고 깊이있게 고민하거나 타인의 고통에 민감하게 공명하는 사람이라면 나와 같은 결정을 쉽게 하지 못했을 것이다. 난 내가 우선이었다.
샌프란시스코는 미국 전역에서, 그리고 전 세계에서 이주한 성소수자들로 넘쳐났다. 무지개 깃발만큼이나 생김새, 출신지, 옷차림 등이 다채로웠다. 프라이드 거리 행진에는 부모들이 아이들의 손을 잡고 나와 무지개 깃발을 흔들어 주었다. 난 더이상 주말 밤을 기다리지 않아도 되었다. 캘리포니아 햇볕의 샤워를 받으며 카스토로의 책방이나 카페에서 시간을 보낼 수 있었다. 그게 믿기지 않았다. 이제부터 다른 나로 살 수 있을 거란 기대감과 함께 미국 생활이 시작되었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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샌프란시스코는 이 곳과 많이 달랐기를...다음 글에서 기다려봅니다. 요즘 게임업계의 사상검증이 다시 문제화된다는 기사를 보며 성적 정체성이 사상으로 대두되는 사회란걸 다시 실감했네요..
누구나 자신이 우선이고 우선이 되어야 한다고 생각합니다. 온갖 가치, 진리, 교육으로 생각이라는 환상을 주입 받아 벗어나기 쉽진 않지만 벗어나면 정말 맘이 편해져요. 자유롭게 해야님의 우주에서 행복하시길 응원할게요. 붓다가 알려주신 길이죠. 기회되면 바이런 케이티님의 책들도 한번 읽어보셔요.