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6회) 아니 에르노와 글쓰기
먼불빛
2023-08-24 21:19
300
내가 아니 에르노의 책과 만난 건 작년 2022년이었다. 그즈음 공교롭게도 아니 에르노가 노벨문학상 수상자로 선정되었고, 그녀의 모든 책이 다시 주목받았다. 아니 에르노의 자전적-사회학적 글쓰기 방식은 독특했다. 자신의 경험을 부끄러울 정도로 고스란히 글로서 드러내는 행위 자체가 결국 그 사회의 젠더 문제, 계급 문제를 예리하게 파헤쳐 고발하는 결과로 나타났다. 누구도 부정할 수 없을 만큼 솔직하게. 정면으로. 나는 그녀의 이름도 생경했고, 글도 낯설었고, 문장도, 읽는 것도 불편했다. 그러나 그 안에서 뜻밖에도 아니 에르노와 닮기도 한, 다르기도 한 내가 보였다.
요즘은 누구나 자기 이야기를 자유롭게 쓰고, 게시하고, 함께 공감하는 시대다. 그렇지만, 자기 이야기를 왜, 어떻게 써야 하는지에 대해서 나는 늘 부정적이었고, 조심스러웠다. 더구나 그것이 내밀한 이야기라면 더욱더 분명한 목적과 자기 사명이 있지 않은 다음에야 쓸 수 있는 용기가 쉽지 않을 것으로 생각했다. 그러나 아니 에르노의 글에서는 ‘있는 그대로의 사실을 드러내는 것’만으로도 그것이 사회적 해석과 만나 더 많은 보편의 공감을 불러일으킬 수 있다는 사실을 알게 했다. 결국 모든 글쓰기는 정치적이 될 수밖에 없다. 아니 에르노는 더 이상 ‘말할 수 없는 것’이 분명해질 때 그것은 정치적인 것이라고 말한다. 이미 너무나 관습화된 몸, 인식, 타인에 대한 의식 이런 모든 것들이 나의 경험을 글로 쓰는 것을 주저하게 만들거나, 적당히 타협하는 글을 만들게 한다. 아니 에르노의 글은 그렇지 않았다. 나는 그런 용기를 배우고 싶었다.
아니 에르노의 성장 배경
아니 에르노의 글을 이해하기 위해서는 그녀 삶의 배경에 깔린 <<계급 전향자>> 라는 사회적 위치성에 대한 이해가 필요하다. 그녀의 부모는 프랑스 노르망디 이브토라는 하층민이 사는 지역에서 식료품점이자 카페를 운영하는 농민, 노동자 출신의 소상공인이다. 극성스러운 엄마 덕에 부르주아 자녀들이 다니는 사립학교에 입학하게 되면서부터 그녀는 에토스가 다른 두 세계를 폭력적으로 체험하게 된다. 부르주아 자녀들과 사립 학교에서는 카페 겸 식료품점, 부모, 이웃들 속에서 체현된 자신의 그 모든 문화, 언어, 행동이 쓸모 없는 것, 상스럽고 수치스러운 것이라는 사실을 깨닫는다. 한편으로는 고급스럽고 우아한 부르주아 세계를 끊임없이 갈망하며 좋은 성적을 내지만, 이미 몸에 새겨진 자기 세계의 저급한 문화는 쉽게 지워질 수 없는 것임을 깨닫는다. 그녀는 대학에 진학하고, 마침내 현대 문학 교수가 되고, 부르주아 중산층으로 성공적인 안착을 하게 된다. 어느새 자신 또한 그러한 폭력적 구별법이 여전히 존재하는 사회 한가운데 어른으로 자리 잡고 있음을, 자기 계급을 무시하고 탈주한 데 대한 죄의식과, 한 편에 사회적 책임 또한 있음을 잊지 않기 위해 끊임없이 글을 쓰게 된다. 그녀는 22세 때 계급 탈주자로서 자신이 겪은 사회적 폭력성을 글로써 밝히겠다는 결심을 한다. ‘자신의 종(種)을 위해 글로써 복수하겠다’고 다짐한 문장이 그것이다. 아니 에르노의 독창적인 글쓰기는 이러한 <<계급 전향자>> 로서의 배경에서 탄생하게 되며, 그녀의 전 작품에 일관되게 흐르고 있다.
“억압된 기억이라는 말할 수 없는 것 속으로 빠져들고, 내 종족이 살아온 방식을 밝히겠다는 욕망이었으니까요. 내가 나의 기원에서 멀어졌던 이유, 그 내적이고 외적인 이유를 이해하기 위해 나는 쓰고자 했습니다.” (노벨문학상 수상 연설문/레모.11쪽)
그래서 그녀는 펜을 든다. 칼 같은 펜. 그렇게 쓰인 책이 『빈옷장』, 『얼어붙은 여자』, 『사건』, 『부끄러움』 등에 고스란히 녹여져 있다.
나는 왜 글을 쓰려고 하는 걸까? 어쩌면 그것은 현재와 맞닿는 문제이다. 왜 나는 이렇게 생겨 먹은 거지? 왜 나는 이렇게 살고 있는 거지? 왜 나는 이런 행동을 했을까? 자신에 대한 끊임없는 의문들은 자신의 현재적 의미를 찾으려는 눈물겨운 노력일지도 모른다. 그런 의미에서 자신의 개인적‧사회적 위치성에 대해 안다는 것은 자기를 해석할 수 있는 하나의 지표이자 언어를 갖게 한다. 나는 이 점을 아니 에르노를 통해 발견했다.
‘칼 같은 글쓰기’
<계급 전향자>가 되기까지의 놀라움, 충격, 증오, 원망과 분노, 저항까지 다양한 개인사적 변화를 잘 담은 작품은 아니 에르노의 초기작인 『빈옷장』 이다. 그 책의 문장들은 그래서 더 날 것처럼 느껴진다. 『빈옷장』에서 그녀는 일어난 일 그대로를, 당시의 자신이 보고 듣고 느꼈던 감각 그대로를 살려 여과 없이 기록했다. 하층민으로서 느꼈던 수치심, 학교라는 지식의 세계에서 보여주었던 폭력적인 구별법에 의해 수치로 기억된 자신의 소녀 시절을 노르망디 사투리로 재현한다. 거기에는 단순히 수치심이 아니라, 부르주아 세계를 욕망하며 스스로 그 구별법에 편승해 가는 자기의 위선과 이중성 또한 그대로 드러낸다. 집요하게 칼로 파헤치듯. 내가 아니 에르노의 다른 어느 작품보다 초기작에 더 매료된 점이다.
만약 나 역시, 언젠가는..... 이름이란, 내일, 내일모레, 바칼로레아를 통과하고, 하루 그리고 이틀, 한 달이 지나도 아무 일도 없었던 것처럼 그럴 것이다. 모든 것을 다시 해야 할 것이다. 내가 아무리 학위를 쌓아 놓아도 절대 숨기고 싶은 것, 내 가족의 추함, 주정뱅이들의 바보 같은 웃음, 내가 얼마나 천박한 말투와 몸짓으로 채워진 멍청한 년이었는지를 감출 만큼 충분하지는 않을 것이다........................................
간격을 더 벌려야 한다. 카페 겸 식료품점을, 촌년으로 살았던 어린 시절을, 풀리지 않는 곱슬머리를 가진 친구들을 완전히 떨쳐 버려야 한다.....대학에 들어가는 것,토요일에 기차에서 내리는 분주하고 쌀쌀맞은 여자애들처럼 대학생이 되는 것. .........................................그들이 아래층에서 저녁을 먹기 위해 나를 기다린다. 나는 이제 곧 그들을 두고 떠날 것이다.(『빈옷장』 189쪽)
나는 수치심과 올라가고 싶은 욕망으로 가득한 그저 가난한 여자애일 뿐이고, 이 모든 것은 에너지 낭비다. <<너는 진짜 문제를 보지 못하네>>라고 그가 말한다. 꼼짝할 수 없게 됐다. 내 상황과 그, 나는 절대 빠져나가지 못할 것이다. 바로 그것, 그 테이블 구석에서 일어나는 파괴가 나를 그에게 집착하게 만든다. 나는 잠자코 속아 넘어간다. 그의 부모님이 너무 똑똑하고, 그 사실을 불편해한다. ...........내게 불쾌감을 주는 이야기들 그는 상상도 할 수 없는 삶의 방식, 그만하면 충분하다. 나는 그에게 이렇게 말했다. <<나는 서민가정 출신이야>> 그는 많은 것들을 좋아하고, 수많은 쾌락을 즐긴다............................................모두 배워야 할 것들이다. 나는, 나는 아마도 문학만을 좋아하는 것 같다. 그조차도 내 상황에서는 수상쩍다. .........나는 나 자신에게 증오만을 먹였다. 모든 것을 등지고 버텼다. 내 문화는 싸구려다. .........문학, 그것조차도 빈곤을 나타내는 하나의 증상이다. 자신이 속한 세계에서 벗어나기 위한 고전적인 방법, 머리끝에서부터 발끝까지 가짜다. 내 진짜 본성은 어디에 있는가? 그가 꼭 내 이야기를 한 것은 아니다. 그는 일반적인 것을 말한 것인데 나는 자신의 무가치함을, 하찮음을 느낀다.(『빈옷장』 199-200쪽)
대단한 과제! 웃기는 소리, 모두 꾸며낸 것이며 사람들에게 허풍 떨기 위한 것, 사다리로 이용하기 위한 것에 불과하다. 발표와 작문은 하자마자 쓰레기통에 던져 버린다. 절대 다시 쓸 일은 없다. 모두가 단지 성공의 추억일 뿐이다.(『빈옷장』 206쪽)
정희진은 『나를 알기 위해서 쓴다』(출판 교양인/2020.2.8)라는 책에서 ‘자기 연민과 나르시시즘은 최악의 인성이자 글쓰기 태도’라고 말하며, 글 쓰는 누구라도 ‘그 덫에 걸리기 쉽다’고 말한다. 그리고 이렇게 콕 집어 덧붙인다. ‘예술에서 권력자는 상처받은 사람, 피해자이기 때문’이라고. 이 말은 참 뼈아픈 말이다. 여성들이 자기 서사를 고백하면서 당연히 밟을 수 있는 함정이기 때문이다. 나 역시 예외가 아닐지도 모른다. 어쩌면 이런 점 때문에 내게는 아니 에르노의 글이 달라 보였는지도 모른다.
아니 에르노의 글이 자기 고백적 여성 서사와 다른 점은 바로 그런 것 아닐까? 단순하지 않은 한 세계의 복잡성, 혼종성이 자신의 몸을 통해 드러나게 하고, 누군가에게 잘 보이기 위해 포장하거나 독자를 위해 타협한 글이 아니며, 자기가 어떻게 보일까에 대한 검열이 없다. 낯설게 쓰기, 그래서 읽기 다소 불편하고 때로 이해 불가한 문장들이 있지만, 오히려 그런 낯섦이 그녀가 겪은 곤경을 더 극명하게 느끼게 해주는 것 같았다.
다시 정희진의 말을 빌리자면 “자기 이야기를 쓴다는 것은 경험을 쓰는 것이 아니다. 경험에 대한 해석, 생각과 고통에 대한 사유를 멈추지 않는 것이다.” (같은 책, 247쪽). 자신이 겪은 계급과 젠더의 문제를 평생 전 작품을 통해 집요하게 탐구하고 파헤치는 그녀의 글쓰기 자세는 경이롭다. 그러나 두렵기도 하다. 어떻게 이럴 수가 있지? 나는 이렇게 할 수 있을까? 이렇게 글을 써야 하는 것이라면 피하고 싶기도 하다는 생각까지 하게 만든다.
그러나 분명한 점은 자신을 끝까지 탐구하고 싶은, 자신의 존재 이유를 해석하지 않고서는 배길 수 없는 그런 질문들은 끊임없이 자신을 따라붙는다. 그것을 더 많이 드러내고 밝혀내는 더 많은 여성들의 글쓰기가 필요하다. 그 많은 질문에 답하는 일은 결국 여성의 정치적 글쓰기라는 지점과 맞닿아 있는 것 같다. 그러므로 나의 지극히 사적 개인사는 결코 사적이 될 수 없다는 생각이 아니 에르노를 통해 더욱 강해진다. 아니 에르노의 말처럼 ‘나는’으로 시작되는 말하기. 에두르거나, 포장이 아닌 자신이 가진 밑바닥 진실이 파헤쳐질 때까지 솔직한 용기로 자기의 글을 쓸 때만이 이야기의 보편성, 혹은 질문에 대한 새로운 응답을 만들어갈 수 있지 않을까?
“그 체험들이 당신의 것에서만 머무는 방식으로 글을 써서는 안돼요. 개인적인 것들을 넘어서야 하죠. 그래요. 그것이 스스로에게 질문을 던지게 하고 다르게 살게 하며, 또한 행복하게 해주죠. 문학으로 행복해질 수 있어요.”(『진정한 장소』. 135쪽)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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경험에 대한 해석과 생각과 고통에 대한 사유를 멈추지 않는 것과 자기연민과 나르시시즘은 그리 먼 이야기일까? 질문해보며. 일단 써보려 합니다~ 먼불빛님의 글도 기다려봅니다^^
디디에 에리봉과 부르디외, 그리고 아니에르노를 같이 읽어보고 싶다는 생각이 듭니다. 그런데 대체 그게 언제일까요?^^