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2회> 버려진 자두밭

남어진
2023-07-10 13:29
368

 

 

 

 

 

글쓴이 남어진​

밀양에서 작은 목공소를 합니다.

밀양에서 765kV 초고압 송전탑 반대 운동도 하고 있습니다.

먹고 사는 일도, 마음이 사는 일도 어렵고 괴롭다는 생각을 자주 하며 지냅니다.

 

 

1.

 

인문계 고등학교를 다녔지만 대학 가는 수업에 흥미를 잃은 상태로 지냈다. 어느 날 뉴스에서 할머니들이 포크레인 바가지 안에 들어가서 쇠사슬을 목에 감고 있는 모습을 보았다. 약간의 궁금증과 더불어 미안한 마음이 생겼다. 저 사람들은 왜 저러고 있을까. 그러던 중 하루 종일 밀양과 송전탑이 뉴스에 나오길래 한번은 가 봐야겠다 하는 마음이 들었다.

 

가을이 한창이던 10월 첫 날, 해가 지기 두어 시간 전 밀양역에 도착했다. 누군가 ‘저 차에 타면 된다’고 해서 난생 처음 보는 조끼를 입은 사람들과 함께 차를 타고 골짜기로 들어갔다. 조끼를 입은 사람들은 인권 침해 감시단으로 활동하는 인권 활동가들이었다.

 

▲ 논 한가운데 솟은 송전탑

아래에 있는 사람이 점처럼 보인다.

2

그렇게 아주 경사가 가파른 산길에 도착하면서 지난한 ‘밀양 라이프’가 시작되었다. 후회는 거의 없다. 하지만 가끔은 ‘아 밀양은 참 마음 아픈 곳이구나. 그러니까 더욱 열심히 공부해서 능력 있는 사람이 되어 세상을 바꿔야겠다.’라고 생각했으면 지금보다는 아주 조금은 몸과 마음이 편했을 것 같다는 생각을 조금은 한다.

고등학교를 다닐 때는 학교가 제일 고통스러운 곳인 줄 알았는데, 근사한 명분이 생겨 학교를 자퇴를 하고 나서야 여기나 저기나 마찬가지이구나 하는 걸 깨달았다. 갑자기 경찰들이 방패로 밀고 들어와 먹던 밥그릇이 날아가고, 겨울비 오는 날 깔개 하나 못 펴게 해서 우산 아래 쪼그려 앉아 잠을 잤다. 그 와중에도 매일매일 밥을 얻어먹어 버렸고, 얻어먹은 밥만큼만 밥값을 해 보려고 애쓰다가 10년이 흘렀다. 그렇게 나는 밀양 송전탑 반대 운동을 하는 사람이 되었다.

2023년 현재 시점에서 ‘밀양 송전탑 반대 운동’ 이라는 문장을 이해하기는 어려울 것 같다. 제법 시간이 지났고, 다 끝난 일이니까. 게다가 인류는 지구에 존재한 이래 가장 큰 위기라고 불리는 기후 위기를 마주하고 있다. 탄소 발생량을 줄이기 위해 모든 것을 빠른 속도로 전력화해도 온도 1.5도 상승을 막는 일이 간당간당한(거의 불가능한) 지금 상황에서 전기를 보내는 송전탑을 반대한다니 이 무슨 미친 소리인가. 비록 밀양 송전탑 반대 투쟁이 10년 전 즈음에는 세상을 떠들석하게 만들었던 사건이었다 해도 말이다.

 

 

▲ 송전탑 부지 위에 농성장을 만들어 먹고 자며 싸웠던 할머니

 

3

70세가 넘은 노인이 스스로의 몸에 불을 붙혀 죽었다. 한전이 고용한 용역들에게 온갖 물리적, 언어적 폭력에 시달리다가 “내가 죽어야 이 문제가 해결되겠다”는 말을 남기고 분신했다.

 

사람이 죽고 나서야 수많은 언론과 시민들이 국가 공권력에 맞서 저항하는 노인들을 주목하기 시작했지만, 사람들이 주목한 만큼이나 국가도 사활을 걸었다. 38만 명의 경찰을 동원해 동네의 모든 산길을 틀어막고 한전의 건설 공사를 비호했다. 정부는 765킬로볼트(㎸) 송전 선로 건설 사업*을 처음 계획한 지 14년 만에 기어코 송전탑을 완공시켰고, 지금은 전세계에서 가장 밀집된 핵발전 단지에서 생산된 전기가 세계에서 가장 전압이 높은 송전탑을 통해 송전되고 있다. 하지만 그렇다 하더라도 끝난 일이지 않는가.

한때는, 전기 없이는 돌아갈 수 없는 세상에 밀양이 많은 질문을 던졌다고 생각했다. 밀양이 산업과 대도시로 집중되는 이 전기의 생산·수송 방식에 대한 근본적인 문제제기를 했고, 핵발전의 위험성을 고발했다고 생각했다. 누군가를 짓밟고 착취해야만 유지되는 구조까지 드러낸, 끈질기고 대단한 싸움이라고 생각했다.

 

하지만 요즘은 ‘스스로’의 착각일 수도 있다는 생각이 든다. 이 운동에 이렇게 의미를 부여해야만 ‘나 자신’의 지난 10년의 시간을 부정당하지 않는다고 생각하는 것일지도 모른다.

 

송전탑은 밤낮으로, 일터에서도, 집에서도, 그 어디에서도 존재감을 지울 수 없다. 높이 100m가 넘는 철탑이 그 아래에 있는 모든 것들을 조롱하듯 쳐다보고 있는 것 같은 기분이 드는데, 세월이 흐르며 달라진 것은 이 싸움을 했던 이들이 늙고 병들어 세상을 떠난다는 것뿐이다.

 

그래서 이제는 스스로를 소개할 때 반대 운동을 하는 사람이 아니라, 운동 끝에 소멸하는 사람이라고 하는 것이 더 정확하지 않을까 생각한다. 자조적으로 들릴 수도 있지만 그래도 할 수 있는 일을 조금씩 하는 것이 마음이 조금은 편하기에 그렇게 살아가며 소멸 중이다.

* 765㎸(킬로볼트)는 765,500V의 송전탑을 말한다. 현존하는 송전탑 중 전압이 가장 높다. 해외에서는 초장거리 송전에만 사용된다. 평균 높이는 100m 정도이다. 한 번에 많은 전기를 실어나르는 만큼 대규모 정전의 위험이 높다. 더 많은 내용은 밀양·청도 송전탑 반대 투쟁 온라인 기록관을 참조.

4.

 

2023년 3월 16일~17일, 밀양송전탑반대대책위에서 밀양 송전탑 인근 전자파 조사를 진행했다. 2016년 이후 7년 만에 밀양에서 이뤄진 조사이다.

한국에서 전자파는 위험한 물질이 아니다. 정부가 833밀리가우스(mG)*라는 말도 안 되는 수치를 안전하다고 판단되는 기준으로 정했기 때문이다. 이를 근거로 송전선로 인근에서 생활하는 주민들의 건강에 대한 정부 차원의 조사는 전혀 진행하지 않고 있다. 활동가와 연구자들이 정확한 측정을 할 수 있는 여력(측정기)이 생겼을 때 조사하고 있을 뿐이다.

 

 

 

이틀 간 전자파 측정기를 들고 송전탑 선하지(線下地 ), 주민들의 집, 논밭을 쏘다녔다. 2016년 조사보다 많게는 2배의 전자파가 측정되었다. 이 수치들이 지금 당장 사용할 수 있는 증거도 아니고 문제의 시발점으로 이어질 수 없다는 것을 알면서도, 언젠가 그런 쓰임이 있을 때를 생각하며 데이터를 모은다. 종일 주민들이 호소하는 소음 피해, 경관 피해 호소를 들으며 다녔더니 이야기가 소화가 안 되는지 머리가 지끈거리며 아팠다.

그렇게 측정을 하던 와중 버려진 자두밭을 만났다. 7년 전만 해도 자두 농사를 짓던 곳이었다. 평생 농사를 짓던 농부가 밭을 버린 것이다. 농부는 머리에서 30m도 떨어지지 않은 곳에 초고압 전선이 지나가는 것이 무섭고, 불안해서 농사를 지을 수가 없다고 했다. 열매를 얻기 위해서는 매년 봄마다 해야 할 가지치기를 하지 않아 나뭇가지가 전선에 닿을 것처럼 솟구친다.

 

이런 상황을 마주할 때마다 마음이 무너진다. 밭을 가꿔 본 적이 없는 사람들이 아주 쉽게 말한다. 거기서 농사 안 지으면 되지. 거기서 안 살면 되지. 당신이 자두밭에 와서 한번 보시라. 평생 가꿔 온 삶이 무너져도 그렇게 쉽게 말할 수 있을까.

* 가우스(G)란 독일 물리학자 가우스의 이름을 따 자기력선속의 밀도를 나타낸 단위이다. 우리나라는 안전 기준을 833밀리가우스(mG)로 정했는데, 이 수치는 스위스의 기준보다 약 414배가 많다. 해외 연구에 따르면 3mG에 노출된 어린이는 백혈병 발병률이 2~3.8배 증가한다고 한다.

5

아직까지 마을에는 밀양 765 송전탑 공사를 인정하지 않고 버티는 100여 가구의 사람들이 있다. 그 주민들 중 한 명이 이렇게 말했다.

“말없이 싸워도, 싸우는 건 싸우는기지.”

이제 이 싸움은 실체가 없다. 대적할 상대도 없다. 한전이 무분별하게 살포한 돈 때문에 마을 공동체가 산산조각 났다. 그래서 버티는 사람들은 마을 회관도 사용하지 못하는 채 살아간다. 하지만 그렇다고 송전탑을 찬성했던 주민들이 적은 아니다. 결국에는 마을에서 함께 살아야 하기 때문에 적으로 삼을 수 없다. 눈에 보이지 않는 송전 소음, 전자파와 싸우는 것도 아니다. 그래서 무어라 설명하기 어렵다. 한전도, 정부도, 경찰도 송전탑만 남겨둔 채 흔적도 없이 사라졌다.

이제는 스스로의 존엄을 지키는 싸움이 되었다. 삶을 걸고 최선을 다해 싸웠던 투쟁을, 그리고 그것이 가능하게 했던 마음을 지키는 것이다. 이는 지금 마을에 남아 있는 이들의 유일한 싸움이자, 가장 많은 힘이 들어가는 투쟁이다.

비록 자두밭만 보면 천불이 나더라도, 속이 쓰리더라도, 아직 감밭에서는 농사를 짓는다. 많은 이들이 올 가을에는 밀양으로 감 따러 오면 좋겠다. 밥값은 안 받을 테니 걱정하지 마시라. 갚으라고도 안 할테니 그 걱정도 하지 말고 그렇게 오면 좋겠다. 사진에는 담기지 않는 소멸의 투쟁에도 연대가 간절히 필요하다.

▲ 버려진 자두밭, 높이 솟은 가지

 

 

 

*2화에 실린 사진은 모두 최형락 사진가님이 기록해 주신 사진입니다. 사진 사용을 허락해 주신 사진가님께 감사의 인사를 드립니다.

댓글 6
  • 2023-07-10 14:03

    소멸의 투쟁에도 연대가 필요하다, 마음에 오래도록 새기고 싶은 어진의 문장입니다.

  • 2023-07-10 17:53

    필요하다
    간절히
    소멸의 투쟁에도
    연대가

    감사합니다. 잘 읽었습니다.
    뜨거운 햇살에 감은 잘 익어가겠죠?

  • 2023-07-12 08:50

    어진의 글이 예전과 사뭇 달라졌다는 느낌! 가을에 감 따러 가야겠네....

  • 2023-07-12 19:47

    소멸의 투쟁에도 연대가 필요하다..
    느리게 읽고 갑니다.. 글 고맙습니다

  • 2023-07-17 19:28

    그러네요
    삶을 걸고 최선을 다해 싸웠던 투쟁, 그리고 그것이 가능하게 했던 마음을 지키는 소멸의 투쟁
    거기에도 연대는 필요하네요.

  • 2023-07-18 20:08

    무지하고 답답하고 헛헛한 마음에 감이라도 따러 가야겠어요

남어진의 현장분투기
                  심장병은 응급실 1순위 ​ 두해 전 즈음, 2020년 12월 초 겨울이었다. 11월부터 바깥에서 데크를 만드는 작업을 했다. 손도 얼고 드릴도 어는 추위가 찾아왔지만 마감 날이 정해져 있었기 때문에 그 날도 종일 열심히 일했다. 겨울에 종일 바깥에서 일하다가 집으로 들어오면 몸이 녹진녹진해지면서 모든 의욕이 다 사라진다.   겨울에 바깥에 오래 나가 있으면 몸이 퉁퉁 붓는데, 부었던 몸이 녹을 때까지, 씻지도 않고 방바닥에 들러붙어 있다가 자기 직전에 어쩔 수 없이 씻었다. 씻고 나오는데 식은땀이 나면서 어질어질하길래 ‘어 몸이 이상하네?’라고 생각하며 물을 마셨다. 물을 마시던 중에 쓰러졌다. 일어나 보니 2ℓ짜리 생수가 거실 바닥에 다 쏟아져 있었다. 내가 정신을 잃었던 것인지, 잤던 것인지 모르겠다. 시간이 얼마나 흘렀는지도 알 수 없었다. 빨래 바구니에 들어있는 수건을 가져와 방바닥을 닦고 나니, 그제서야 무서웠다.   “아…… 나 죽을 뻔했네?”   나는 보통 심각하다고 판단되는 외상이 없으면 병원은 쳐다보지도 않고 사는 사람이다. 그런데 그 날은 느낀 적 없던 공포가 찾아왔다. ‘혼자 사는 내가 의식을 잃고 쓰러졌는데, 쓰러지다가 재수없게 머리를 박았거나 심장이 멈췄더라면 죽었겠구나’ 하는 생각이 들었다. ​ 다음날 동네 병원에 가서 이런저런 검사를 받고, 부정맥이 의심된다며 대학 병원에 가보라는 의뢰서를 받았다. 뭘 대학 병원까지 가냐, 하는 생각에 집으로 갔다. 그런데 다시 식은땀이 흐르기 시작했다. 완전 쫄아 버린 나는 결국 응급실로...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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문탁
2023.11.13 | 조회 282
남어진의 현장분투기
          남어진 밀양에서 작은 목공소를 합니다. 밀양에서 765kV 초고압 송전탑 반대 운동도 하고 있습니다. 먹고 사는 일도, 마음이 사는 일도 어렵고 괴롭다는 생각을 자주 하며 지냅니다.           노동자가 아닌 사장이 되다 ​ 나에게는 함께 일하는 좋은 동료 직원이 있다. 직원은 작년 봄, 목수 일을 배우고 싶다며 대구에서 밀양까지 나를 찾아왔다. 첫 만남 후에 그는 일이 있으면 불러 달라는 연락을 종종 하곤 했다. 나는 그럴 때마다 “생각보다 돈이 안 된다”, “보기처럼 멋있지 않고, 위험하고 힘든 일이다”, “서울에 한 달 다녀와야 할 일이 있다” 등의 핑계를 대며 함께 일하기를 피했다. 일의 규모는 점점 커지고, 맡은 일들도 많아지는 상황이었지만 누군가를 고용하여 안정적인 고용을 책임진다는 것에 대한 두려움이 있었기 때문이다. 이미 친동생이나, 동생의 친구들을 잠깐씩 알바로 쓰고 있었지만 그것과는 또 다른 느낌이었다. ​ 그러다가 그를 불렀다. 전시용 가벽을 만드는 작업이 있었는데, ‘그렇게 해 보고 싶다니 하루 같이 해 보자’ 하는 마음이었다. 여태껏 같이 일해 본 초보자들 중에 가장 이해도 빠르고, 손재주도 좋았다. 나는 책임감 있게 일을 잘 해내는 것이 어떤 것보다 중요하다고 생각하면서 산다. 일 중독자인 나에게 ‘좋은 동료’의 기준은 열심히 하는 것보다 ‘일을 잘 하는 것’이다. 나를 쏙 빼닮은 사람이 나타났다. 눈치가 빠르고, 성실하고, 끈기도 있고, 악도 있고, 게다가 손재주도 좋은 사람이다. ​ 어느덧 그와...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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문탁
2023.10.10 | 조회 338
남어진의 현장분투기
          밀양에서 작은 목공소를 합니다. 밀양에서 765kV 초고압 송전탑 반대 운동도 하고 있습니다. 먹고 사는 일도, 마음이 사는 일도 어렵고 괴롭다는 생각을 자주 하며 지냅니다.         수도꼭지만 틀면 물이 나오는 도시에서는 가뭄이 상대적으로 덜 와닿는 일이다. 비가 올 때는 오감으로 느낄 수 있지만, 비가 오지 않을 때는 그저 화창한 날이 많은 것으로 쉽사리 여기니 말이다. 나에게도 비가 자주 오지 않는 건 그저 그런 일이었다. 아니, 오히려 편히 일할 수 있는 날이었다. 올해 봄은 정말 가물었다. ​ ​ ​ 접시 물에 망할 뻔 ​ 완도군에서는 주 1~2회만 물이 나오는 ‘제한 급수’가 1년 넘게 계속되었다. 위쪽 광주 광역시도 제한 급수 직전까지 가는 상황이었다. 놀기도 좋고 일하기도 좋은 봄날을 열심히 보내다 ‘아 이거 좀 비가 너무 안 오네?’ 하는 생각이 들 만큼, 가뭄이 코앞에 다가왔다. 문득 한 농부의 안위가 걱정되었다. 작년에 그 농부에게서 들었던 이야기가 떠올랐다. 그는 논에 물을 대기 위해서는 새벽부터 저녁까지 물길을 지키고 서 있어야 한다는 이야기였다. 잠깐이라도 다른 일을 보면 어느샌가 돌아가 있는 물꼬 때문에 미쳐 버리겠단다. 그는 ‘이대로라면 올해도 벼가 자라지도 않은 논에서 허수아비가 될 것 같다’고 생각했다. ​ 하지만 날이 가물다고 해서 당장 내 목을 비틀어 쥐는 일은 아니니, 나에게는 기우제를 지내기는 것보다 눈앞의 돈벌이에 충실한 편이 더 현명한 선택이었다. 그렇게...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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문탁
2023.09.11 | 조회 355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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      글쓴이 남어진​ 밀양에서 작은 목공소를 합니다. 밀양에서 765kV 초고압 송전탑 반대 운동도 하고 있습니다. 먹고사는 일도, 마음이 사는 일도 어렵고 괴롭다는 생각을 자주 하며 지냅니다.       1. 밀양에 작은 목공소를 차렸다.   지난 5년 간은 창고 하나 없이 여기저기 얹혀 살며 가구도 만들고 집도 지었다. 연장은 뿔뿔히 흩어져 매일 늦은 밤마다 다음 날 쓸 연장을 챙기러 돌아다녀야 했고, 사용 가능한 자재가 남았을 때에도 챙겨 둘 수 없었다. 현장에 짐을 둔다는 대가로 이런저런 눈탱이를 맞는 일도 잦았다. 임금을 떼이거나, 아주 잡스러운 심부름을 시켜도 마스크 속에서만 보이는 욕을 하며 버텨야만 했다. 쫒겨나면 갈 곳이 없으니까. 눈에도 사람의 감정이 드러난다지만, 몇 년간은 마스크가 참 고마웠다.   돈을 버는 건지 스트레스를 버는 건지 모르겠다는 생각이 아주 강하게 들었던 어느 날, ‘에라 모르겠다’ 하는 심정으로 집에서 가까운 곳에 위치한 허름한 창고를 얻었다. 드디어 나에게도 해방이 온다고 생각했다. ​ 작은 창고는 싱크 공장을 하던 곳이었다. 비록 비 오는 날에는 풍향에 따라서 바닥으로 물이 제법 스며들었고, 몇 명의 세입자가 뚫었을지 모르는 벽 곳곳의 연통 구멍 안으로는 냉기가 빨려 들어오는 곳이었지만, 이를 제외하면 그럭저럭 쓸 만한 공간이다. 목수 일로 먹고사는데 이 정도 문제가 별일인가 싶었다.   이렇게 지난 세월 끊임없이 머리 속으로 상상하고 또 상상했던 일이 시작되었다. 내 몸에 가장 알맞게 구성된 공간,...
문탁
2023.08.10 | 조회 299
남어진의 현장분투기
          글쓴이 남어진​ 밀양에서 작은 목공소를 합니다. 밀양에서 765kV 초고압 송전탑 반대 운동도 하고 있습니다. 먹고 사는 일도, 마음이 사는 일도 어렵고 괴롭다는 생각을 자주 하며 지냅니다.     1.   인문계 고등학교를 다녔지만 대학 가는 수업에 흥미를 잃은 상태로 지냈다. 어느 날 뉴스에서 할머니들이 포크레인 바가지 안에 들어가서 쇠사슬을 목에 감고 있는 모습을 보았다. 약간의 궁금증과 더불어 미안한 마음이 생겼다. 저 사람들은 왜 저러고 있을까. 그러던 중 하루 종일 밀양과 송전탑이 뉴스에 나오길래 한번은 가 봐야겠다 하는 마음이 들었다.   가을이 한창이던 10월 첫 날, 해가 지기 두어 시간 전 밀양역에 도착했다. 누군가 ‘저 차에 타면 된다’고 해서 난생 처음 보는 조끼를 입은 사람들과 함께 차를 타고 골짜기로 들어갔다. 조끼를 입은 사람들은 인권 침해 감시단으로 활동하는 인권 활동가들이었다.   ​ ▲ 논 한가운데 솟은 송전탑 아래에 있는 사람이 점처럼 보인다. ​ ​ 2 ​ 그렇게 아주 경사가 가파른 산길에 도착하면서 지난한 ‘밀양 라이프’가 시작되었다. 후회는 거의 없다. 하지만 가끔은 ‘아 밀양은 참 마음 아픈 곳이구나. 그러니까 더욱 열심히 공부해서 능력 있는 사람이 되어 세상을 바꿔야겠다.’라고 생각했으면 지금보다는 아주 조금은 몸과 마음이 편했을 것 같다는 생각을 조금은 한다. ​ 고등학교를 다닐 때는 학교가 제일 고통스러운 곳인 줄 알았는데, 근사한 명분이 생겨 학교를 자퇴를 하고 나서야 여기나...
          글쓴이 남어진​ 밀양에서 작은 목공소를 합니다. 밀양에서 765kV 초고압 송전탑 반대 운동도 하고 있습니다. 먹고 사는 일도, 마음이 사는 일도 어렵고 괴롭다는 생각을 자주 하며 지냅니다.     1.   인문계 고등학교를 다녔지만 대학 가는 수업에 흥미를 잃은 상태로 지냈다. 어느 날 뉴스에서 할머니들이 포크레인 바가지 안에 들어가서 쇠사슬을 목에 감고 있는 모습을 보았다. 약간의 궁금증과 더불어 미안한 마음이 생겼다. 저 사람들은 왜 저러고 있을까. 그러던 중 하루 종일 밀양과 송전탑이 뉴스에 나오길래 한번은 가 봐야겠다 하는 마음이 들었다.   가을이 한창이던 10월 첫 날, 해가 지기 두어 시간 전 밀양역에 도착했다. 누군가 ‘저 차에 타면 된다’고 해서 난생 처음 보는 조끼를 입은 사람들과 함께 차를 타고 골짜기로 들어갔다. 조끼를 입은 사람들은 인권 침해 감시단으로 활동하는 인권 활동가들이었다.   ​ ▲ 논 한가운데 솟은 송전탑 아래에 있는 사람이 점처럼 보인다. ​ ​ 2 ​ 그렇게 아주 경사가 가파른 산길에 도착하면서 지난한 ‘밀양 라이프’가 시작되었다. 후회는 거의 없다. 하지만 가끔은 ‘아 밀양은 참 마음 아픈 곳이구나. 그러니까 더욱 열심히 공부해서 능력 있는 사람이 되어 세상을 바꿔야겠다.’라고 생각했으면 지금보다는 아주 조금은 몸과 마음이 편했을 것 같다는 생각을 조금은 한다. ​ 고등학교를 다닐 때는 학교가 제일 고통스러운 곳인 줄 알았는데, 근사한 명분이 생겨 학교를 자퇴를 하고 나서야 여기나...
남어진
2023.07.10 | 조회 368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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