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12회> 입원기

현민
2024-03-16 00:38
257

글쓴이 현민

친구들과 함께 동천동의 책방 우주소년을 운영했습니다.

서점을 운영하며 스쿨미투집 <밀려오는 파도 막을수는 없다> 1권과 같은 이름의 공동체 탐구집 2권을 만들었습니다.

지금은 독일에 삽니다.

 

 

 

 

 

 

입원기

 

볼더링을 하다가 떨어졌다. 다음 날 응급실에서 하루종일 엑스레이를 몇 번 찍은 후 의사로부터 인대 파열과 발목 바깥쪽 뼈가 부러졌다는 말을 전해들었다. 뼈를 재위치하기 위해선 다리에 못을 박는 수술을 해야 했다. 살면서 병원에 가는 일이 잘 없는게 자랑이었는데, 갑작스럽게 입원을 하게 되었다.

가장 먼저 한 것은 보험 확인이었다. 모든 사람들이 내게 보험은 있냐고 물었다. 최근 나는 독일에서 새 비자를 받았는데, 그때 독일 사보험을 등록해놓았다. 지난 한 해 동안은 한국에서 가장 싼 여행보험을 들어놓았다. 그동안 한 번도 병원에 갈 일이 없었는데, 독일 보험을 들어놓고 사고를 당해서 다행이었다.

 

입원하면 금방 수술을 받을 수 있을 줄 알았는데, 발목이 너무 부으면 수술 후 봉합이 어려워 붓기가 가라 앉을 때까지 기다려야 했다. 병원에서 아침 점심 저녁 밤으로 진통제를 받았는데, 살면서 그렇게 많은 약을 먹어본 적이 없었다. 빈속에 약을 먹어 배가 쓰리면, 그것을 방지하는 약을 먹는 식이었다. 서양 의학이란 이런 것이구나 체감하며 먹으라는 약을 먹었다. 팔에 주사바늘을 꽂고 이름 모르는 주사들을 여러 번 맞으니 몸에 멍 자국이 금방 늘었다. 매일 아침 집단으로 의사 무리가 찾아와 오늘도 수술은 못 할 것 같다고 전했다.

 

예상보다 병원에서 지내는 기간이 길어지자 나의 나약한 정신력과 타지에서의 한정된 돌봄 자원이 체감됐다. 병원에서 하루를 지내니 집에 너무나 가고 싶어졌다. 가만히 있어야 붓기가 가라 앉는데, 기회만 되면 밖에 나가 담배 한대를 피려고 애를 썼다. 아빠가 입원했을 때가 떠올랐다. 모부의 집은 한 대학병원 근처에 있는데, 사고로 그 병원에 입원했던 아빠가 낮마다 아픈 몸을 이끌고 집에 와 있었다. 그때 나는 아빠가 간호사들을 고생시킨다고 생각했는데 아파보니 그 마음을 알 것 같았다.

나와 한집에 같이 사는 플랫메이트이자 남자친구인 니키는 사고가 났을 때도 나와 같이 볼더링을 하고 있었다. 다리가 부러진 줄도 모르고 집에 돌아가서 퉁퉁 붓는 발을 보며 피자를 시켜 먹고, 다음날 차를 빌려 같이 응급실에 갔다. 응급실에는 직계 가족이 아니면 함께 들어올 수 없어서 니키는 대기실에서 기다려야 했다. 내가 ‘의사가 나 뼈 부러졌대 ㅋㅋ..’ 라고 문자를 보냈을 때 그 애는 간호사들이 주는 서류에 무작정 사인하지 말라고 답장했다. 하라는 대는 이유가 있겠지 라고 생각하는 편인 나와 반대로 그 애는 모든 게 믿을만한 정보인지 꼼꼼히 확인했다.

니키는 주로 홈 오피스를 한다. 낮에는 나와 함께 있어주기 위해서 병실에서 일했고, 내가 끔찍한 병원 밥을 먹지 않도록 매 끼니마다 밖에서 밥을 사왔다. 내가 먹는 약의 성분이 허튼 것은 아닐지 인터넷에 하나하나 검색했고, 간호사로부터 마땅한 돌봄을 받지 못했을 때는 대신 화를 냈다.

 

 

끔찍했던 병원 밥

 

아파서 화장실에서 혼자 팬티도 못 내리는 상황에 도움받을 곳이 있다는 건 정말 감사한 일이었다. 내 주변 여자들은 모두 내게 위로를 전하는 동시에 니키에게 고마움을 표현했다. 하루는 내가 한국식 죽을 먹고 싶다고 하자 니키가 집에서 죽을 만들어왔는데, 먹으면서 고마움에 눈물이 줄줄 났다. 하지만 동시에 정말 아찔한 기분도 들었다. 얘가 없었다면 이 타지에서 입원 생활을 어떻게 했을지. 애인이 독일인이 아니었다면 외국인으로써 얼마나 또 헤맸을지. 입원 후 독일의 친구들은 내게 위로 문자를 보내주고 병문안을 왔지만(그것만으로도 정말 고마운 일이지만), 하루종일 환자 옆에 붙어 그를 돌보는 일과는 차원이 다르다. 한국에 있는 엄마도, 독일에 있는 이모도 못 오는데 나의 사고로 인해 니키는 돈도 체력도 많이 썼다. 나는 일주일 후 퇴원했지만, 만약 더 큰 사고를 당해서 그보다 오래 입원을 해야 했다면 니키도 벅찰 일이었다.

 

수술 후

 

기다림 끝에 수술을 받았다. 수술 전 긴장되는 마음에 누군가 옆에 있어 주길 바랬는데, 니키는 집에서 일을 해야 했다. 그래서 용감한 척 할 수 밖에 없었다. 침대째로 옮겨져 수술 대기실 천장을 보며 묻는 말들에 답을 했다. 나를 수술할 의사들이 내게 돌아가면서 자기소개를 했고, 산소호흡기를 씌웠다. 숨을 몇번 들이 내쉬면서 마취제 냄새가 역겹다는 생각을 하다가 수술 후 눈을 떴다. 수술실 밖에 있었고, 몇 사람들이 내 생일을 물었다. 침대째로 자꾸 어딘가로 옮겨지는 게 짜증 난다는 생각을 하다 보니 내 병실에 돌아와 있었다. 그곳엔 니키가 있었다.

 

마취가 깨고 난 후, 절단됐다가 봉합된 신체를 느끼기 시작했다. 고통을 느낄 땐 얼굴을 마구 구기며 흐느꼈다. 잠시 고통이 가라앉으면 마취 후유증으로 메스꺼움을 견뎌야 했다. 내가 여러 번 진통제를 요구하자 간호사가 주사를 놓아주며 말한다. Nur vier mal am Tag kann man spritzen. 하루에 네 번만 진통제 줄 수 있어. 이번이 마지막이야. 그 말을 듣자 이 고통을 맨몸으로 견뎌야 한다는 사실에 막막해졌다. 몇 시간 뒤 아파서 엉엉 우는 나를 보다 못한 니키가 의사를 직접 찾아가서 진통제가 더 필요하다고 말했다. 그는 하루에 네 번이 무슨 소리냐며 수술 끝난 후니 가장 쎈 걸로 네가 원하는 만큼 줄 수 있다고 했다. 그 간호사는 내가 그날 수술을 받았는지 몰랐던 것 같다. 자주 이런 일이 반복되자, 의료인의 직업적 스트레스가 엄청나다는 걸 알면서도 환자로서 간호사들의 무관심과 불찰에 화가 자주 났다. 간호사들은 자주 내 존재를 잊어버렸고, 내가 무언가를 물어보기 전에 이미 화가 나 있었고, 내가 무언가에 대해 물어보면 다들 잘 모른다고만 답했다.

 

가끔은 병실에 혼자 오랫동안 남겨지면 적막함에 돌아버릴 것 같았다. 가만히 앉아서 책이나 영상을 보는 데도 한계가 있었다. 병실 안과 문 밖 복도 소리까지만이 내 세상이 된 것 같았다. 병실에서 괴팍해지는 노인들의 마음도 이해가 갔다. 이유 없이 눈물이 줄줄 났고, 오지 않는 니키가 미워졌다. 사실 니키가 그저 집에서 일한 뒤 내게 가져올 저녁밥을 만들고 있다는 걸 알고 있었음에도 혼자 그 애를 한참 미워하다가, 이건 뭔가 위험하다는 생각이 들었다. 고작 일주일이었지만 아픈 몸과 함께 나는 금방 위태로워졌다. 니키만이 내 기분과 이 상황에 대한 불만족을 표현 할 수 있는 유일한 공간이었다. 한계가 다가오는 기분이었다.

 

나름 지내는 동안 집처럼 편히 지내라고 T가 벽에 붙여준 부채와 스카프

 

할머니

 

나는 운이 좋게도 거의 혼자 2인실을 쓰고 있었다. 하루는 새벽에 내 방에 중환자실에서 돌아온 한 할머니가 들어왔다. 할머니는 통증 때문인지 반쯤 넋이 나간 상태로 새벽 내내 울었다. 귀마개와 안대를 쓰고 자던 나는 거세지는 할머니의 울음소리에 깨 간호사들을 호출했다. 간호사들은 할머니에게 더 쎈 진통제를 투약했다. 나는 그들에게 상황은 이해하지만, 나도 자야한다고 혹시 남는 다른 방이나 집에 가도 되냐고 물었다. 그들은 남는 방도 없고 새벽엔 모든 환자가 병원에 머물러야 한다고 말했다. 이곳에서 마음대로 이탈하지도 못한다는 사실을 듣고 짜증이 제대로 난 나는 할머니의 살짝 작아진 신음소리를 들으며 어떻게 여기를 탈출할지 시나리오를 짜다가 잠들었다. 간호사가 점심을 가져다줄 때 즈음, 잠에서 깨 옆을 확인하니 그 할머니는 또 수술을 받으러 사라져 있었다.

 

퇴원하는 날 아침, 할머니는 병실로 돌아왔다. 할머니는 잠들어 있었다. 나는 책을 읽다가 가끔 움직임을 멈추고 할머니의 숨 쉬는 소리를 확인했다. 어느 순간 잠에서 깬 할머니는 부시럭 거리더니 몸 곳곳에 붙은 바늘과 줄들을 손으로 빼 던졌다. 피를 뚝뚝 흘리는 할머니를 보며 불안해진 나는 간호사를 호출했다. 늦게 등장한 간호사들은 할머니에게 줄들의 용도를 설명하며 다시 줄과 바늘을 삽입했다. 내가 하지 마시라고 했을 땐 무시하던 할머니는 갑자기 예의 바른 아이처럼 으응 그렇구나 하며 그걸 마치 몰랐던 마냥 다소곳해졌다. 그리고는 간호사들이 없어지자 같은 짓을 반복했다. 간호사들이 피에 젖은 환자복을 다 교체한 한참 후에야 그녀와 나는 둘이 남았다. 할머니는 힘이 있는 목소리로 내게 자꾸 무언가를 물었지만, 그녀의 독일어를 알아듣지 못해 답할 수가 없었다. 그는 내 핸드폰을 본 후 딸에게 전화를 걸고 싶어 했는데, 딸의 전화번호를 끝까지 기억하지 못했다. 어느새 나는 퇴원을 도우러 온 T와 나갈 채비를 했다. 내 가방은 친구들이 가져다 준 꽃으로 가득 차 있었다. 떠나기 전, 할머니를 위해 튤립 한송이를 그의 자리에 두고 왔다.

 

병원에서 나서 입구 벤치에 앉아 T와 니키의 차를 기다렸다. 그리곤 그 할머니가 거의 죽음에 가까워보였다는 얘기를 나눴다. 문득 소설 <가재가 노래하는 곳>에 적힌 시 한 구절이 떠올랐다.

 

날개 달린 영혼아, 너는 하늘을 춤추었고

새된 비명으로 새벽을 놀래켰지

닻들을 좇고 용감히 바다에 맞서고

다시 바람을 타고 내게 돌아왔지

 

날개를 부러뜨렸구나. 그 날개가 땅에 끌려

모래 위에 너의 흔적을 새겼구나

깃털이 부러지면 너는 날 수가 없지

하지만 죽을 때를 누가 결정한단 말이니?

 

(후략)

 

- 브랜든 비치의 상처받은 갈매기, 소설 가재가 노래하는 곳 중.

 

퇴원하는 길, T가 메고 있는 나의 퇴원가방

 

그리하여 나는 집에 돌아왔다. 돌아온 날에는 인도인 플랫메이트 난디니가 커리를 만들었다. 병원에 있는 동안 음식 먹는 즐거움을 잊고 지냈는데, 매운 커리가 혀에 착 감기면서 몸에 열을 냈다. 먹으며 식탁에 둘러앉아 사람들과 이야기하니 살아있는 것 같았다.

 

그러나 3층 집에서 목발 짚고 살기란 쉽지 않았다. 목발과 함께 계단을 오를 때면 조마조마했다. 한번 이동할 때 두고 온 것은 없는지, 뭐가 필요할지 미래의 욕구를 미리 계산해야 몸이 고생하지 않았다. 나는 살면서 아파본 적이 별로 없다. 감기에 걸려도 하루 이틀이면 낫고, 하룻밤 정도 새도 다음날 별 문제가 없다. 다리가 부러지니 혼자서 할 수 있는 게 너무 적었고, 혹은 시간이 너무 오래 걸렸고, 누군가의 도움을 자꾸 받아야만 했다. 신체적 한계가 낯선 나는 자주 내가 마음대로 못 움직인다는 사실에 화가 났다.

 

볼더링을 하다 떨어지던 순간에 대해, 그때 안될 걸 알면서 시도한 것에 대해 아무리 생각해도 달라지는 게 없었다. 자유롭지 않은 신체를 경험하며 내 성질에 대해서 배우는 기분이었다. 그래도 어려서 그런가 회복력이 좋았다. 병원에서 돌아온 후로 진통제를 끊었다. 물리치료사부터 부러진 발을 앞뒤로 움직이는 걸 연습하는 숙제를 받았는데, 간신히 까딱거리는 걸 친구들에게 선보이면 돌아오는 칭찬이 가득한 저녁을 보내며 지낸다. 독일은 병원에서 퇴원하면 하우스 아츠트Hausarzt라고 불리는 종합의원에서 상태를 체크해야 한다. 어제는 하우스아츠트에 가서 실밥도 뽑았다. 잘려있던 피부가 붙어있었다 . 4월 초에는 발목의 철심을 제거하는 수술을 받는다. 철심을 제거하는 수술을 받으면 바로 걸을 수 있다고 한다. 지금은 부러진 왼발에 힘을 실으면 발 전체가 저릿한 통증을 겪는다. 다시 걸음을 연습할 때는 어떤 기분이 들지 궁금하다.

 

댓글 6
  • 2024-03-16 07:37

    아이고 워째....ㅠㅠㅠㅠㅠㅠ

    볼더링이 뭔지 몰라 검색했어. 암벽타기 같은 거더라구...
    떨어질 수도 있고 사고날 수도 있지만, 엄청 놀라고 힘들었겠다.

    이럴 땐 뜨끈한 국밥 같은 걸 먹어야 하는디... 빵과 햄이라니.... 속상혀...
    버뜨, 남친도 있고, 매운 커리도 있고, 친구도 있으니까....재활 잘하면 되지 않을까?

    잘 먹읍시다!

  • 2024-03-16 08:05

    볼더링 모르는 1인 추가 ㅋ, 병원 생활 과정에서 오르락내리락하는 기분 상태에 저절로 공감이 가네, 재활 잘 해서 뼈가 잘 붙고 나면 다 지나간 일이 될거네. 몸 조심 하고 마음도 잘 보살피길~

  • 2024-03-16 11:31

    아이고.. 얼마나 힘들었을까? 고생많았어, 현민아!!
    게다가 햄과 빵이라니! 보기만 해도 한숨이 나오는구먼.
    그래도 회복이 빠르다니 얼마나 다행인지! 맛난 것 챙겨먹으며 몸도 마음도 잘 추스렸으면 좋겠구나.

  • 2024-03-17 06:45

    나도 볼더링 찾아봤는데 ㅋㅋ
    고생했네 현민 ㅜ
    병원밥은 정말 ㅠㅠ
    그래도 운이 좋았네. 보험도 들고 남친도 있고 친구들도 있고 ㅎ
    씩씩한 현민얼굴 떠오르는데 4월에 철심제거하고 재활 잘 해서 다시 날아다니길 바래요~~^^

  • 2024-03-17 07:10

    입원얘기를 읽을 줄 몰랐네!! 많이 아팠겠다! 우여곡절이 많네.

  • 2024-03-18 18:29

    진짜 글을 읽는데 제 다리가 저릿하네요.. 타국에서 고생이 많아요 ㅠ 한동안 답답하겠지만 금방 뛰어다니길!!

현민의 독국유학기
이 모든 지리적 사실   네덜란드는 독일의 북쪽에 맞닿아있다. 세 명의 친구가 살고 있지만 한 번도 가본 적은 없었다. 지난 겨울 니키가 운전해서 네덜란드에 간다고 하길래, 그럼 가는 길에 친구가 사는 도시에 내려 달라고 부탁했다. 서경은 독일과 국경이 맞닿아있는 아른헴에서 공부한다. 모부님께 네덜란드 유학을 가고 싶다고 말했을 때 그들은 성매매와 마약 합법 때문에 꼭 그곳이어야겠냐고 물었다. 아이러니하게도 네덜란드에서는 정치적 혼란시기였던 19세기 마땅한 보수정당이 없어 동성결혼, 성매매와 마약 합법 등을 실행하게 되었다고 한다.   네덜란드의 흔한 커피샵 커피도 파는데 대마초도 판다. 일상적으로 사람들이 와서 대마초를 피우는 곳이다.   서경은 영어권 국가 중 네덜란드가 가장 물가가 싼 편이라 네덜란드 대학에 지원했다. 네덜란드에는 더치Dutch라고 불리는 고유어가 있음에도 영어권 국가라고 불릴 만큼 국민 90%는 영어를 능숙하게 구사한다. 독일인들은 네덜란드어가 독일어에서 파생한 괴상한 사투리라고 말하는데, 네덜란드에 와보니 더치는 생각보다 더 고유했다. 영국과 미국에 비교하면 굉장히 싼 유학비지만, 독일과 비교했을 땐 비싼 생활비 그리고 주거난 때문에 아직도 에어비엔비에서 산다는 서경의 학교 동기들의 이야기를 들으며 이 나라에 이주민 비율이 큰 이유가 궁금해졌다. 헤이그에서 공부하는 지연은 현재 네덜란드가 보수집권이지만 여성·퀴어 인권은 너무 당연해서 보수당도 건드리지 않는다고 말해주었다. 그 대신 보수당은 이주민을 규제하고 싶어한다고 했다.   일 년 만에 만난 서경과 새벽까지 조잘대며 회포를 풀고, 아침에 일어나 밥을 짓기 시작했다. 서경은 내 음식을 좋아한다. 그래서 집에서 마른 미역과 들깻가루,...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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현민
2024.04.17 | 조회 203
현민의 독국유학기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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현민의 독국유학기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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글쓴이 현민 친구들과 함께 동천동의 책방 우주소년을 운영했습니다. 서점을 운영하며 스쿨미투집 <밀려오는 파도 막을수는 없다> 1권과 같은 이름의 공동체 탐구집 2권을 만들었습니다. 지금은 독일에 삽니다.             유학점검기   독일에는 아우스빌둥(Ausbildung)이라는, 직장과 직업학교를 번갈아가며 배우는 제도가 있다. 영어로는 Apprenticeship이고 한국어로는 직업교육이라고 말할 수 있을 것 같다. 회사에서 실질적인 교육을 받고 직업학교에서 이론적인 것을 배운다. 고등학교 졸업 후 대학에 가지 않고 아우스빌둥을 하는 경우도 줄곧 있다. 독일의 오기 전 나의 계획은 일년 간 어학연수를 하고 출판사에서 아우스빌둥을 하는 것이었다. 최근 나는 출판사들에 이력서와 커버레터를 넣고 인터뷰를 다닌다. 자본주의의 빈틈에 껴서 살다가 제발 일 시켜달라고 스스로를 둘도 없는 인재처럼 소개하려니 어색하다. 독일에 와서 변한 것이 많다. 코코넛밀크로 맛있는 커리를 만들 수 있고, 알리오 올리오를 먹고, 핸드크림을 바르고, 외식은 잘 하지 않는다. 전에는 곁에 없으면 안 될 것 같았던 친구들과는 어쩌다 한번 연락한다. 그리고 새로운 친구들과 익숙한 공간들이 생겼다. 한 해 동안 어떻게 살았는지 돌아보는 마음으로 유학점검기를 쓴다. 나를 아시는 분들께는 그래서 얘가 지금 독일에서 뭐하며 사는건지 머릿속에 그림을 그려보실 수 있을 것 같다.   독일의 여름을 믿지 마세요   2022년 6월부터 9월 독일 지인 댁에서 아름다운 여름을 보냈다. 그즈음 나는 이러다간 익숙함에 속아 한국을 떠나지 못할 것 같다는 생각을 하고 있었다. 여름이 지난 뒤, 나는 독일에 와서 살아보겠다는 결심을...
현민
2024.02.16 | 조회 285
현민의 독국유학기
    글쓴이 현민 친구들과 함께 동천동의 책방 우주소년을 운영했습니다. 서점을 운영하며 스쿨미투집 <밀려오는 파도 막을수는 없다> 1권과 같은 이름의 공동체 탐구집 2권을 만들었습니다. 지금은 독일에 삽니다.             미친 인간들의 안전한 파티   나의 셰어하우스에는 풀타임 직장인이 두 명 있다. 그들은 아침부터 오후 5시까지 일한다. 그들은 거의 홈 오피스를 해서 집에서 자주 보이지만 늘 지쳐있고, 하루만 사무실에 다녀오는 날에는 진을 다 빼고 온다. ‘일하기’는 중요하지만 앞으로 남은 모든 날을 이렇게 하루하루 진을 빼며 사는 것인가 가늠해 보기 시작하면 주 4일제 실현이 간절해진다. 이들이 일만큼 열심히 하는 것이 있다면 저녁에 부엌에 둘러앉아 담배를 물고 진토닉을 마시기 시작하다가, 주방에 있는 큰 스피커에 노래를 연결해 테크노 음악을 틀기 시작한 후 자정쯤 파티에 가거나, 지하실에 내려가 디제잉을 하며 파티를 벌이는 것이 있다. 매주 서너 병의 진을 사와 자신들이 다 마신 사실을 잊고 그 술들이 다 어디 갔냐고 묻는 사람들. 이들의 특징으로는 파티와 술과 담배 따위에 매우 후하다는 점이 있다. 자신이 마셔 마땅하다고 생각하는 이들, 함께 마실 사람이 항상 필요한 이들. 제안하면 거절하지 않는 사람으로서 나는 이들과 잦은 파티를 가진다. 우리는 종종 방탕히 노는 시간으로부터 삶의 아름다움을 본다. 그럴 때가 오면 가끔은 해야 할 일을 못 해도, 밥을 못 먹어도 즐겨 마땅했다는 확신이 든다.   독일 클럽에는 무엇이 있는가   나의...
    글쓴이 현민 친구들과 함께 동천동의 책방 우주소년을 운영했습니다. 서점을 운영하며 스쿨미투집 <밀려오는 파도 막을수는 없다> 1권과 같은 이름의 공동체 탐구집 2권을 만들었습니다. 지금은 독일에 삽니다.             미친 인간들의 안전한 파티   나의 셰어하우스에는 풀타임 직장인이 두 명 있다. 그들은 아침부터 오후 5시까지 일한다. 그들은 거의 홈 오피스를 해서 집에서 자주 보이지만 늘 지쳐있고, 하루만 사무실에 다녀오는 날에는 진을 다 빼고 온다. ‘일하기’는 중요하지만 앞으로 남은 모든 날을 이렇게 하루하루 진을 빼며 사는 것인가 가늠해 보기 시작하면 주 4일제 실현이 간절해진다. 이들이 일만큼 열심히 하는 것이 있다면 저녁에 부엌에 둘러앉아 담배를 물고 진토닉을 마시기 시작하다가, 주방에 있는 큰 스피커에 노래를 연결해 테크노 음악을 틀기 시작한 후 자정쯤 파티에 가거나, 지하실에 내려가 디제잉을 하며 파티를 벌이는 것이 있다. 매주 서너 병의 진을 사와 자신들이 다 마신 사실을 잊고 그 술들이 다 어디 갔냐고 묻는 사람들. 이들의 특징으로는 파티와 술과 담배 따위에 매우 후하다는 점이 있다. 자신이 마셔 마땅하다고 생각하는 이들, 함께 마실 사람이 항상 필요한 이들. 제안하면 거절하지 않는 사람으로서 나는 이들과 잦은 파티를 가진다. 우리는 종종 방탕히 노는 시간으로부터 삶의 아름다움을 본다. 그럴 때가 오면 가끔은 해야 할 일을 못 해도, 밥을 못 먹어도 즐겨 마땅했다는 확신이 든다.   독일 클럽에는 무엇이 있는가   나의...
현민
2023.11.21 | 조회 348
현민의 독국유학기
          글쓴이 현민 친구들과 함께 동천동의 책방 우주소년을 운영했습니다. 서점을 운영하며 스쿨미투집 <밀려오는 파도 막을수는 없다> 1권과 같은 이름의 공동체 탐구집 2권을 만들었습니다. 지금은 독일에 삽니다.             Heimat   정민   최근엔 정민이 왔다 갔다. 그 애는 나의 바로 밑 동생이다. 세자매 중 나와 정민은 극도로 상극의 삶을 산다. 그 애는 중학생 때부터 독서실에서 공부를 하느라 12시 이전에 집에 들어온 적이 없다면 나는 친구들과 노느라 12시 전에 집에 들어간 적이 없던 것 같다. 그 애는 꿈이 없는 게 불안해서 공부를 했다면 나는 꿈 같은 거 생길 수 있는 사회냐고 화를 내는 편이었다. 우리가 삶을 사는 모습은 너무나도 다르지만 그 애는 내 인생에서 가장 웃긴 사람 중 하나다. 우리는 서로에게 인생 최고의 개그맨이다. 나의 지겨운 가정사를 가장 잘 아는 사람, 그것으로 극도의 유머를 만들 수 있는 사람은 그 애가 유일하다.   한 달이 지나고 공항에 그 애를 데려다주는 길에는 기분이 싱숭생숭했다. 독일에서 만나는 외국인들 중에서도 먼 나라에서 온 편인 나는 그 거리감을 대체로 즐겼다. 하지만 비행기에 앉아서 하루쯤 지나면 도착하는 게 한국이라니 문득 너무 가깝게 느껴졌다. 그래서 아무 소리나 시작했다. 나 만약에 한국에 돌아가야 되면 어떡하지? 진짜 돌아가야 되면 거기서 뭘 할 수 있지? 정민은 말했다. 왜 자꾸 한국에 돌아갈 생각을 해? 언니...
          글쓴이 현민 친구들과 함께 동천동의 책방 우주소년을 운영했습니다. 서점을 운영하며 스쿨미투집 <밀려오는 파도 막을수는 없다> 1권과 같은 이름의 공동체 탐구집 2권을 만들었습니다. 지금은 독일에 삽니다.             Heimat   정민   최근엔 정민이 왔다 갔다. 그 애는 나의 바로 밑 동생이다. 세자매 중 나와 정민은 극도로 상극의 삶을 산다. 그 애는 중학생 때부터 독서실에서 공부를 하느라 12시 이전에 집에 들어온 적이 없다면 나는 친구들과 노느라 12시 전에 집에 들어간 적이 없던 것 같다. 그 애는 꿈이 없는 게 불안해서 공부를 했다면 나는 꿈 같은 거 생길 수 있는 사회냐고 화를 내는 편이었다. 우리가 삶을 사는 모습은 너무나도 다르지만 그 애는 내 인생에서 가장 웃긴 사람 중 하나다. 우리는 서로에게 인생 최고의 개그맨이다. 나의 지겨운 가정사를 가장 잘 아는 사람, 그것으로 극도의 유머를 만들 수 있는 사람은 그 애가 유일하다.   한 달이 지나고 공항에 그 애를 데려다주는 길에는 기분이 싱숭생숭했다. 독일에서 만나는 외국인들 중에서도 먼 나라에서 온 편인 나는 그 거리감을 대체로 즐겼다. 하지만 비행기에 앉아서 하루쯤 지나면 도착하는 게 한국이라니 문득 너무 가깝게 느껴졌다. 그래서 아무 소리나 시작했다. 나 만약에 한국에 돌아가야 되면 어떡하지? 진짜 돌아가야 되면 거기서 뭘 할 수 있지? 정민은 말했다. 왜 자꾸 한국에 돌아갈 생각을 해? 언니...
현민
2023.09.19 | 조회 387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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