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9회> Heimat

현민
2023-09-19 09:38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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글쓴이 현민

친구들과 함께 동천동의 책방 우주소년을 운영했습니다.

서점을 운영하며 스쿨미투집 <밀려오는 파도 막을수는 없다> 1권과 같은 이름의 공동체 탐구집 2권을 만들었습니다.

지금은 독일에 삽니다.

 

 

 

 

 

 

Heimat

 

정민

 

최근엔 정민이 왔다 갔다. 그 애는 나의 바로 밑 동생이다. 세자매 중 나와 정민은 극도로 상극의 삶을 산다. 그 애는 중학생 때부터 독서실에서 공부를 하느라 12시 이전에 집에 들어온 적이 없다면 나는 친구들과 노느라 12시 전에 집에 들어간 적이 없던 것 같다. 그 애는 꿈이 없는 게 불안해서 공부를 했다면 나는 꿈 같은 거 생길 수 있는 사회냐고 화를 내는 편이었다. 우리가 삶을 사는 모습은 너무나도 다르지만 그 애는 내 인생에서 가장 웃긴 사람 중 하나다. 우리는 서로에게 인생 최고의 개그맨이다. 나의 지겨운 가정사를 가장 잘 아는 사람, 그것으로 극도의 유머를 만들 수 있는 사람은 그 애가 유일하다.

 

한 달이 지나고 공항에 그 애를 데려다주는 길에는 기분이 싱숭생숭했다. 독일에서 만나는 외국인들 중에서도 먼 나라에서 온 편인 나는 그 거리감을 대체로 즐겼다. 하지만 비행기에 앉아서 하루쯤 지나면 도착하는 게 한국이라니 문득 너무 가깝게 느껴졌다. 그래서 아무 소리나 시작했다. 나 만약에 한국에 돌아가야 되면 어떡하지? 진짜 돌아가야 되면 거기서 뭘 할 수 있지?

정민은 말했다.

왜 자꾸 한국에 돌아갈 생각을 해? 언니 어차피 한국 못살아. 거기서 못 살겠어서 여기 온 거잖아. 그럼 이거 아니면 안된다 생각하면서 될 때까지 해야지.

그 애나 나에게 할 법한 말이었다.

 

공항에 도착해 정신없이 짐을 부친 뒤 출국장에 들어가며 그 애는 눈물을 흘렸다. 나는 당황해서 웃기다며 그 애가 우는 사진을 찍어서 엄마한테 보냈다. 하지만 집에 돌아오는 길에는 굉장히 슬픈 사람처럼 울음이 났다. 덩그러니 남겨진 기분이었다. 어떤 사람은 그래도 12명과 함께 살면 외롭지 않겠다고 하지만 각자에게 벌어지는 사건들을 같이 산다고 다 알 수는 없는 법이겠지 종종 생각한다. 정민은 출발하지 않는 비행기 안에서 내게 긴 문자를 보냈다. 오지에 언니를 두고 가는 기분이라 눈물이 났다고.

그 애는 한국에 도착하자마자 있었던 가족과의 헤프닝들을 말해주었다. 갑자기 독일에 살 동기부여가 확 됐다. 그래, 나는 왜 한국을 자꾸 돌아갈 곳으로 생각할까? 떠나온 곳이 다시 돌아갈 수도 있는 곳이었으면 좋겠는 마음이 나를 괴롭게 하는지도 모른다는 생각을 했다.

 

다니

 

다니는 나와 함께 사는 귀여운 여자다. 그는 나의 또 다른 플랫메이트 필리페의 누나인데 긴 여행 중 이곳에 도달해 독일에 살기로 마음을 먹었고, 그 시기에 방이 나 새로운 플랫메이트가 되었다. 우리는 일곱 살의 나이 차가 있지만 다니 앞에서는 무엇이라도 편히 말할 수 있는 마음이 주어진다. 그 애 앞에서는 입을 열면 문장이 나온다. 그건 내가 긴장하지 않는다는 증거다.

다니는 하루에 몇백 명은 오는 것 같은 큰 자라에서 일한다. 그 애에게 장 보러 갈 시간도, 금요일 밤에 같이 파티에 갈 수도 없게 만드는 자라는 드물게 다니에게 긴 휴가를 주었다. 다니는 그 휴가로부터 막 돌아왔다. 집에 여유롭게 앉아있는 다니는 오랜만이었다. 나와 다니는 산책을 가기로 했다.

다니와 함께 강 쪽으로 걸으며 우리는 이야기를 시작했다. 그 애가 요즘 만나는 애는 어떤지, 새로 들어온 플랫메이트는 어떤지, 코스타리카에 잠시 돌아간 필리페는 어떻게 지내고 있는지. 다니는 자신도 겨울쯤에 코스타리카에 잠시 다녀올까 생각 중이라고 했다. 하지만 조금은 겁이 난다고도. 왜 겁이 나? 물으니 다니는 자신의 친구들은 자기가 독일에 정착해 일하며 사는 걸 아예 모른다고 했다. 내가 다시 왜냐고 묻자 다니는 말했다. 이미 너도 눈치챘을지도 몰라. 나랑 필리페 사이에 남동생이 하나 더 있거든. 근데 그 애가 일년 반 전에 죽었어. 그게 내가 여기 온 이유야.

 

그걸 어떻게 알았겠냐고 놀라서 반문하는 나에게 다니는 가끔 자신이 Brother가 아니라 Brothers라고 말한 적이 있다고 했다. 그런 디테일을 잡기엔 내 영어가 부족한지도 모른다. 다니와 필리페는 9살의 나이 차가 있어 이전에 필리페에게 물은 적이 있었다. 너네 혹시 다른 형제도 있어? 필리페는 없다고 했다. 만약 내 동생 둘 중 하나가 죽는다면 나는 두 명의 동생이 있다고 말할까, 한 명의 동생이 있다고 말할까? 분명 그들에게도 이런 혼란의 시간이 있었을 것이다. 그 시간을 통과해 다니는 있다고 말하고 필리페는 없다고 말하는 그 지점에서 그들이 어떤 사람인지가 읽혔다.

 

다니는 그 애가 죽었던 작년의 시간들이 하나도 기억나지 않는다고 말했다. 그래서 코스타리카를 떠났다고. 고향에서는 모두가 그 사건을 알기 때문에 힘들었다고 했다. 그러면서 길게 여행을 떠났고, 필리페가 대학을 다니는 이 도시에 오게 되었다고. 함께 산지 반년이 다 되가는데 다니가 말해주지 않았다면 알 수 없었을 이야기였다. 이 사건이 다른 가족 구성원들에겐 어떤 일이었는지, 지금 네 마음은 어떤지 들으며 우리는 같이 눈물을 흘렸다. 다니에게 고생했다고 말해주고 싶었는데, 영어로 어떻게 직역해야 될 지 모르겠어서 그저 한국어로 그 애를 안고 고생했다고 말했다. 다니는 너에게 이걸 말해주고 싶었다고 덧붙였다.

 

강물을 보며 나는 한국에서의 내 삶이 어땠는지도 다니에게 말하고 있었다. 영어로 말하니 한국어와는 다른 문장이 나왔다. 한국에서 일어나는 사회적 비극들이 내게 어떻게 느껴지는지, 왜 그렇게 죽음에 대해 자주 생각했는지. 나와 아빠의 관계가 어떠했는지. 이 상처들이 덧나지 않기 위해선 한국과 독일만큼의 거리가 필요했다고 말했다. 다니는 잘 들어주었다. 이야기가 끝나고 나는 타인에게 이 정도를 설명할 수 있게 되었다는 사실에 놀랐다. 왜 한국을 떠났는지 설명하기란 이전에는 엄두도 낼 수 없는 일이었기 때문이다. 이야기가 된다는 건 멀어지는 것이구나, 라는 작가 이슬아의 책 속 문장이 떠올랐다. 그때의 마음들과 멀어지고 있다는 사실이 기쁘고도 슬펐다.

 

다니와의 대화 속 어느 이야기도 슬프지 않은 것은 없었는데 이야기를 할수록 나는 이 곳에서 살아갈 용기가 났다. 마음 속 비극에 대한 이야기는 이 곳에서 만난 친구들과 나눌 수 없을 거라 생각해왔다. 설명할 자신도 이해받을 자신도 없었다. 그것이 내가 12명과 함께 살면서도 종종 외로웠던 이유였다. 하지만 슬픔이라는 것은 이상하다. 그 이야기를 들으면 어느새 눈물이 흐르고, 겪어보지 못한 일을 생생하게 경험한다. 그 힘으로부터 나는 생생한 생명력을 느낀다. 나는 다니를 전보다 알게 된 기분이 들었다.

이야기가 끝나갈 쯤 다니에게 물었다. 그 동생의 이름이 뭐야?

 

Marco

마르코 베가

 

한 번도 만난 적 없는 사람이지만 그가 어딘가에서 생생히 살아가고 있는 것처럼 느껴졌다.

 

Heimat

 

나에게는 고향이라는 단어의 모양이나 어감이 아름답게 들리지 않는다. 모든 사람들에게 있는 것 같은데 나는 그걸 어디라고 말해야 하는지 모르겠어서 오는 이질감일 수도 있다.

학원에서 고향에 대해 써오라는 숙제를 받았다. 독일어로 고향은 ‘Heimat’이라 쓰고 ‘하이맛’이라 읽는다. 한국어로 읽었다면 금방 고루하게 느낄 말을, 독일어로 읽으니 그것이 무엇인지 골똘히 생각하게 됐다. 결국은 고향이 무엇인지 모르겠어서 구글에 검색해 보니 태어나서 자라고 살아온 곳, 혹은 마음 속 깊이 간직한 그립고 정든 장소가 고향이라 한다. 나는 독일에서 태어나서 한동안 자랐지만 너무 어린 시절이라 기억이 나지 않는다. 기억이 있을 때부터 살았던 미금역 언저리는 익숙하지만 그립지는 않다. 정체성을 형성했던 고등학생 시절은 늘 항상 괴로웠던 것 같아 또 그립다고 말하고 싶지 않았다. 나에게는 어떤 땅이 나의 구체적인 고향의 장소가 되지 않는다. 하지만 분명히 기억나는 감각이란 있다. 나는 그것에 대해 쓰기 시작했다.

 

Als ich dieses Wort 'Heimat' gehört habe, habe ich an Situationen von vergangener Zeit gedacht. Es geht nicht nur um ein Land. Ich erinnere mich an einige bestimmte Szenen. Beispielsweise habe ich eine kleine Buchhandlung mit meinen Freunden in Korea betrieben. Sie war nicht nur unsere Geschäft, sondern auch ein Treffpunkt von lokalen Menschen und unseren Freunden. Wenn man sich allein fühlt, konnte man immer zur Buchhandlung kommen. Wir haben gemeinsam viel Zeit verbraucht. Wenn jemand traurig war, haben wir Geschichte von einander ohne Urteile zugehört und konnten für uns weinen. Ich möchte sagen, dass ich mich das Moment als Heimat fühle.

 

직역하자면 이런 말이다.

 

고향이라는 단어를 들으면 지나간 시간들에 대해 생각한다. 그것은 하나의 나라에 대한 것만이 아니다. 나는 어떤 특정한 장면들을 기억한다. 예를 들면 나는 한국에서 친구들과 함께 작은 서점을 운영했다. 그것은 우리의 사업이기도 했지만, 지역 사람들과 우리의 친구들에게 만남의 장소이기도 했다. 누군가 혼자라고 느끼면, 언제나 서점에 올 수 있었다. 우리는 함께 많은 시간을 보냈다. 누군가가 슬프다면 우리는 판단 없이 서로의 이야기를 들어주었고, 서로를 위해 울 수 있었다. 나는 이 순간을 고향이라고 느낀다고 말하고 싶다.

 

공간은 시간을 거치며 변화한다. 내가 서점에서의 시간들을 그리워하더라도 현재의 우리는 그 시절을 재현하지 못할 가능성이 높을 것이다. 나는 그 사실에 금새 슬퍼지기 마련일 테다. 문득 주연과의 대화가 생각이 났다. 내가 사랑하는 안주연과 나는 몇 년 전 함께 살았다. 그때 난 집에서 쫓겨났고, 그 애는 몸은 집에 있지만 마음이 쫓겨났다. 막 스무 살이었던 나는 주연에게 어떤 타투를 받고 싶냐고 물었다. 주연은 몸 어딘가에 문을 새기고 싶다고 했다. 우리는 언제나 집을 필요로 하지만 우리의 몸과 마음은 집을 잃기 마련이니까. 목 뒤에 문을 새겨서 몸을 하나의 집으로 명명하겠다는 의도였다.

몸에 문을 그리자. 몸이야말로 쫓겨나지 않을 집이 될 수 있을 것이다.

나는 내가 그리워하는 시간들도 그렇게 여겨보고 싶어졌다.

기억을 고향으로 삼자. 그렇다면 나는 조금 덜 두려워하며 더 멀리 갈 수도 있을 것이다.

학원에서 수업을 같이 듣는 어떤 여자의 말도 기억이 났다. 그 여자는 네가 살고 있는 이 곳도 너의 Heimat이 될 수도 있다고 했다.

 

 

 

 

 

그런데 너무 멀리 왔다.

원래는 자신의 고향에 대해 짧은 텍스트 10문장을 써오는 거였는데... 

댓글 3
  • 2023-09-19 11:30

    현민의 하이맛 이야기는 이제 만들어지고 있는 중인가? 나의 하이맛의 이야기는 어떤 것일까? 문득 궁금해지네. 이번 글도 잘 읽었습니다^^

  • 2023-10-02 09:33

    추석에 형제들 모여서 우리가 어린 시절을 보낸 고향 이야기를 하는데.. 현민의 글이 생각났단다.
    어린 시절 기억과 추억이 담긴 곳이긴 하지만.. 그 뒤로 더 오랜 시간을 새로운 장소에서 새로운 인연들을 맺으며 살다보니..
    이젠 나도 어디가 고향인가 싶네.^^

  • 2023-10-08 00:56

    우리는 보헤미안 처럼 살아가고 있는 것 같아요. 슬픔을 가슴에 안고서...^^

현민의 독국유학기
이 모든 지리적 사실   네덜란드는 독일의 북쪽에 맞닿아있다. 세 명의 친구가 살고 있지만 한 번도 가본 적은 없었다. 지난 겨울 니키가 운전해서 네덜란드에 간다고 하길래, 그럼 가는 길에 친구가 사는 도시에 내려 달라고 부탁했다. 서경은 독일과 국경이 맞닿아있는 아른헴에서 공부한다. 모부님께 네덜란드 유학을 가고 싶다고 말했을 때 그들은 성매매와 마약 합법 때문에 꼭 그곳이어야겠냐고 물었다. 아이러니하게도 네덜란드에서는 정치적 혼란시기였던 19세기 마땅한 보수정당이 없어 동성결혼, 성매매와 마약 합법 등을 실행하게 되었다고 한다.   네덜란드의 흔한 커피샵 커피도 파는데 대마초도 판다. 일상적으로 사람들이 와서 대마초를 피우는 곳이다.   서경은 영어권 국가 중 네덜란드가 가장 물가가 싼 편이라 네덜란드 대학에 지원했다. 네덜란드에는 더치Dutch라고 불리는 고유어가 있음에도 영어권 국가라고 불릴 만큼 국민 90%는 영어를 능숙하게 구사한다. 독일인들은 네덜란드어가 독일어에서 파생한 괴상한 사투리라고 말하는데, 네덜란드에 와보니 더치는 생각보다 더 고유했다. 영국과 미국에 비교하면 굉장히 싼 유학비지만, 독일과 비교했을 땐 비싼 생활비 그리고 주거난 때문에 아직도 에어비엔비에서 산다는 서경의 학교 동기들의 이야기를 들으며 이 나라에 이주민 비율이 큰 이유가 궁금해졌다. 헤이그에서 공부하는 지연은 현재 네덜란드가 보수집권이지만 여성·퀴어 인권은 너무 당연해서 보수당도 건드리지 않는다고 말해주었다. 그 대신 보수당은 이주민을 규제하고 싶어한다고 했다.   일 년 만에 만난 서경과 새벽까지 조잘대며 회포를 풀고, 아침에 일어나 밥을 짓기 시작했다. 서경은 내 음식을 좋아한다. 그래서 집에서 마른 미역과 들깻가루,...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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현민
2024.04.17 | 조회 203
현민의 독국유학기
글쓴이 현민 친구들과 함께 동천동의 책방 우주소년을 운영했습니다. 서점을 운영하며 스쿨미투집 <밀려오는 파도 막을수는 없다> 1권과 같은 이름의 공동체 탐구집 2권을 만들었습니다. 지금은 독일에 삽니다.             입원기   볼더링을 하다가 떨어졌다. 다음 날 응급실에서 하루종일 엑스레이를 몇 번 찍은 후 의사로부터 인대 파열과 발목 바깥쪽 뼈가 부러졌다는 말을 전해들었다. 뼈를 재위치하기 위해선 다리에 못을 박는 수술을 해야 했다. 살면서 병원에 가는 일이 잘 없는게 자랑이었는데, 갑작스럽게 입원을 하게 되었다. 가장 먼저 한 것은 보험 확인이었다. 모든 사람들이 내게 보험은 있냐고 물었다. 최근 나는 독일에서 새 비자를 받았는데, 그때 독일 사보험을 등록해놓았다. 지난 한 해 동안은 한국에서 가장 싼 여행보험을 들어놓았다. 그동안 한 번도 병원에 갈 일이 없었는데, 독일 보험을 들어놓고 사고를 당해서 다행이었다.   입원하면 금방 수술을 받을 수 있을 줄 알았는데, 발목이 너무 부으면 수술 후 봉합이 어려워 붓기가 가라 앉을 때까지 기다려야 했다. 병원에서 아침 점심 저녁 밤으로 진통제를 받았는데, 살면서 그렇게 많은 약을 먹어본 적이 없었다. 빈속에 약을 먹어 배가 쓰리면, 그것을 방지하는 약을 먹는 식이었다. 서양 의학이란 이런 것이구나 체감하며 먹으라는 약을 먹었다. 팔에 주사바늘을 꽂고 이름 모르는 주사들을 여러 번 맞으니 몸에 멍 자국이 금방 늘었다. 매일 아침 집단으로 의사 무리가 찾아와 오늘도 수술은 못 할 것 같다고 전했다.   예상보다...
글쓴이 현민 친구들과 함께 동천동의 책방 우주소년을 운영했습니다. 서점을 운영하며 스쿨미투집 <밀려오는 파도 막을수는 없다> 1권과 같은 이름의 공동체 탐구집 2권을 만들었습니다. 지금은 독일에 삽니다.             입원기   볼더링을 하다가 떨어졌다. 다음 날 응급실에서 하루종일 엑스레이를 몇 번 찍은 후 의사로부터 인대 파열과 발목 바깥쪽 뼈가 부러졌다는 말을 전해들었다. 뼈를 재위치하기 위해선 다리에 못을 박는 수술을 해야 했다. 살면서 병원에 가는 일이 잘 없는게 자랑이었는데, 갑작스럽게 입원을 하게 되었다. 가장 먼저 한 것은 보험 확인이었다. 모든 사람들이 내게 보험은 있냐고 물었다. 최근 나는 독일에서 새 비자를 받았는데, 그때 독일 사보험을 등록해놓았다. 지난 한 해 동안은 한국에서 가장 싼 여행보험을 들어놓았다. 그동안 한 번도 병원에 갈 일이 없었는데, 독일 보험을 들어놓고 사고를 당해서 다행이었다.   입원하면 금방 수술을 받을 수 있을 줄 알았는데, 발목이 너무 부으면 수술 후 봉합이 어려워 붓기가 가라 앉을 때까지 기다려야 했다. 병원에서 아침 점심 저녁 밤으로 진통제를 받았는데, 살면서 그렇게 많은 약을 먹어본 적이 없었다. 빈속에 약을 먹어 배가 쓰리면, 그것을 방지하는 약을 먹는 식이었다. 서양 의학이란 이런 것이구나 체감하며 먹으라는 약을 먹었다. 팔에 주사바늘을 꽂고 이름 모르는 주사들을 여러 번 맞으니 몸에 멍 자국이 금방 늘었다. 매일 아침 집단으로 의사 무리가 찾아와 오늘도 수술은 못 할 것 같다고 전했다.   예상보다...
현민
2024.03.16 | 조회 254
현민의 독국유학기
글쓴이 현민 친구들과 함께 동천동의 책방 우주소년을 운영했습니다. 서점을 운영하며 스쿨미투집 <밀려오는 파도 막을수는 없다> 1권과 같은 이름의 공동체 탐구집 2권을 만들었습니다. 지금은 독일에 삽니다.             유학점검기   독일에는 아우스빌둥(Ausbildung)이라는, 직장과 직업학교를 번갈아가며 배우는 제도가 있다. 영어로는 Apprenticeship이고 한국어로는 직업교육이라고 말할 수 있을 것 같다. 회사에서 실질적인 교육을 받고 직업학교에서 이론적인 것을 배운다. 고등학교 졸업 후 대학에 가지 않고 아우스빌둥을 하는 경우도 줄곧 있다. 독일의 오기 전 나의 계획은 일년 간 어학연수를 하고 출판사에서 아우스빌둥을 하는 것이었다. 최근 나는 출판사들에 이력서와 커버레터를 넣고 인터뷰를 다닌다. 자본주의의 빈틈에 껴서 살다가 제발 일 시켜달라고 스스로를 둘도 없는 인재처럼 소개하려니 어색하다. 독일에 와서 변한 것이 많다. 코코넛밀크로 맛있는 커리를 만들 수 있고, 알리오 올리오를 먹고, 핸드크림을 바르고, 외식은 잘 하지 않는다. 전에는 곁에 없으면 안 될 것 같았던 친구들과는 어쩌다 한번 연락한다. 그리고 새로운 친구들과 익숙한 공간들이 생겼다. 한 해 동안 어떻게 살았는지 돌아보는 마음으로 유학점검기를 쓴다. 나를 아시는 분들께는 그래서 얘가 지금 독일에서 뭐하며 사는건지 머릿속에 그림을 그려보실 수 있을 것 같다.   독일의 여름을 믿지 마세요   2022년 6월부터 9월 독일 지인 댁에서 아름다운 여름을 보냈다. 그즈음 나는 이러다간 익숙함에 속아 한국을 떠나지 못할 것 같다는 생각을 하고 있었다. 여름이 지난 뒤, 나는 독일에 와서 살아보겠다는 결심을...
글쓴이 현민 친구들과 함께 동천동의 책방 우주소년을 운영했습니다. 서점을 운영하며 스쿨미투집 <밀려오는 파도 막을수는 없다> 1권과 같은 이름의 공동체 탐구집 2권을 만들었습니다. 지금은 독일에 삽니다.             유학점검기   독일에는 아우스빌둥(Ausbildung)이라는, 직장과 직업학교를 번갈아가며 배우는 제도가 있다. 영어로는 Apprenticeship이고 한국어로는 직업교육이라고 말할 수 있을 것 같다. 회사에서 실질적인 교육을 받고 직업학교에서 이론적인 것을 배운다. 고등학교 졸업 후 대학에 가지 않고 아우스빌둥을 하는 경우도 줄곧 있다. 독일의 오기 전 나의 계획은 일년 간 어학연수를 하고 출판사에서 아우스빌둥을 하는 것이었다. 최근 나는 출판사들에 이력서와 커버레터를 넣고 인터뷰를 다닌다. 자본주의의 빈틈에 껴서 살다가 제발 일 시켜달라고 스스로를 둘도 없는 인재처럼 소개하려니 어색하다. 독일에 와서 변한 것이 많다. 코코넛밀크로 맛있는 커리를 만들 수 있고, 알리오 올리오를 먹고, 핸드크림을 바르고, 외식은 잘 하지 않는다. 전에는 곁에 없으면 안 될 것 같았던 친구들과는 어쩌다 한번 연락한다. 그리고 새로운 친구들과 익숙한 공간들이 생겼다. 한 해 동안 어떻게 살았는지 돌아보는 마음으로 유학점검기를 쓴다. 나를 아시는 분들께는 그래서 얘가 지금 독일에서 뭐하며 사는건지 머릿속에 그림을 그려보실 수 있을 것 같다.   독일의 여름을 믿지 마세요   2022년 6월부터 9월 독일 지인 댁에서 아름다운 여름을 보냈다. 그즈음 나는 이러다간 익숙함에 속아 한국을 떠나지 못할 것 같다는 생각을 하고 있었다. 여름이 지난 뒤, 나는 독일에 와서 살아보겠다는 결심을...
현민
2024.02.16 | 조회 282
현민의 독국유학기
    글쓴이 현민 친구들과 함께 동천동의 책방 우주소년을 운영했습니다. 서점을 운영하며 스쿨미투집 <밀려오는 파도 막을수는 없다> 1권과 같은 이름의 공동체 탐구집 2권을 만들었습니다. 지금은 독일에 삽니다.             미친 인간들의 안전한 파티   나의 셰어하우스에는 풀타임 직장인이 두 명 있다. 그들은 아침부터 오후 5시까지 일한다. 그들은 거의 홈 오피스를 해서 집에서 자주 보이지만 늘 지쳐있고, 하루만 사무실에 다녀오는 날에는 진을 다 빼고 온다. ‘일하기’는 중요하지만 앞으로 남은 모든 날을 이렇게 하루하루 진을 빼며 사는 것인가 가늠해 보기 시작하면 주 4일제 실현이 간절해진다. 이들이 일만큼 열심히 하는 것이 있다면 저녁에 부엌에 둘러앉아 담배를 물고 진토닉을 마시기 시작하다가, 주방에 있는 큰 스피커에 노래를 연결해 테크노 음악을 틀기 시작한 후 자정쯤 파티에 가거나, 지하실에 내려가 디제잉을 하며 파티를 벌이는 것이 있다. 매주 서너 병의 진을 사와 자신들이 다 마신 사실을 잊고 그 술들이 다 어디 갔냐고 묻는 사람들. 이들의 특징으로는 파티와 술과 담배 따위에 매우 후하다는 점이 있다. 자신이 마셔 마땅하다고 생각하는 이들, 함께 마실 사람이 항상 필요한 이들. 제안하면 거절하지 않는 사람으로서 나는 이들과 잦은 파티를 가진다. 우리는 종종 방탕히 노는 시간으로부터 삶의 아름다움을 본다. 그럴 때가 오면 가끔은 해야 할 일을 못 해도, 밥을 못 먹어도 즐겨 마땅했다는 확신이 든다.   독일 클럽에는 무엇이 있는가   나의...
    글쓴이 현민 친구들과 함께 동천동의 책방 우주소년을 운영했습니다. 서점을 운영하며 스쿨미투집 <밀려오는 파도 막을수는 없다> 1권과 같은 이름의 공동체 탐구집 2권을 만들었습니다. 지금은 독일에 삽니다.             미친 인간들의 안전한 파티   나의 셰어하우스에는 풀타임 직장인이 두 명 있다. 그들은 아침부터 오후 5시까지 일한다. 그들은 거의 홈 오피스를 해서 집에서 자주 보이지만 늘 지쳐있고, 하루만 사무실에 다녀오는 날에는 진을 다 빼고 온다. ‘일하기’는 중요하지만 앞으로 남은 모든 날을 이렇게 하루하루 진을 빼며 사는 것인가 가늠해 보기 시작하면 주 4일제 실현이 간절해진다. 이들이 일만큼 열심히 하는 것이 있다면 저녁에 부엌에 둘러앉아 담배를 물고 진토닉을 마시기 시작하다가, 주방에 있는 큰 스피커에 노래를 연결해 테크노 음악을 틀기 시작한 후 자정쯤 파티에 가거나, 지하실에 내려가 디제잉을 하며 파티를 벌이는 것이 있다. 매주 서너 병의 진을 사와 자신들이 다 마신 사실을 잊고 그 술들이 다 어디 갔냐고 묻는 사람들. 이들의 특징으로는 파티와 술과 담배 따위에 매우 후하다는 점이 있다. 자신이 마셔 마땅하다고 생각하는 이들, 함께 마실 사람이 항상 필요한 이들. 제안하면 거절하지 않는 사람으로서 나는 이들과 잦은 파티를 가진다. 우리는 종종 방탕히 노는 시간으로부터 삶의 아름다움을 본다. 그럴 때가 오면 가끔은 해야 할 일을 못 해도, 밥을 못 먹어도 즐겨 마땅했다는 확신이 든다.   독일 클럽에는 무엇이 있는가   나의...
현민
2023.11.21 | 조회 346
현민의 독국유학기
          글쓴이 현민 친구들과 함께 동천동의 책방 우주소년을 운영했습니다. 서점을 운영하며 스쿨미투집 <밀려오는 파도 막을수는 없다> 1권과 같은 이름의 공동체 탐구집 2권을 만들었습니다. 지금은 독일에 삽니다.             Heimat   정민   최근엔 정민이 왔다 갔다. 그 애는 나의 바로 밑 동생이다. 세자매 중 나와 정민은 극도로 상극의 삶을 산다. 그 애는 중학생 때부터 독서실에서 공부를 하느라 12시 이전에 집에 들어온 적이 없다면 나는 친구들과 노느라 12시 전에 집에 들어간 적이 없던 것 같다. 그 애는 꿈이 없는 게 불안해서 공부를 했다면 나는 꿈 같은 거 생길 수 있는 사회냐고 화를 내는 편이었다. 우리가 삶을 사는 모습은 너무나도 다르지만 그 애는 내 인생에서 가장 웃긴 사람 중 하나다. 우리는 서로에게 인생 최고의 개그맨이다. 나의 지겨운 가정사를 가장 잘 아는 사람, 그것으로 극도의 유머를 만들 수 있는 사람은 그 애가 유일하다.   한 달이 지나고 공항에 그 애를 데려다주는 길에는 기분이 싱숭생숭했다. 독일에서 만나는 외국인들 중에서도 먼 나라에서 온 편인 나는 그 거리감을 대체로 즐겼다. 하지만 비행기에 앉아서 하루쯤 지나면 도착하는 게 한국이라니 문득 너무 가깝게 느껴졌다. 그래서 아무 소리나 시작했다. 나 만약에 한국에 돌아가야 되면 어떡하지? 진짜 돌아가야 되면 거기서 뭘 할 수 있지? 정민은 말했다. 왜 자꾸 한국에 돌아갈 생각을 해? 언니...
          글쓴이 현민 친구들과 함께 동천동의 책방 우주소년을 운영했습니다. 서점을 운영하며 스쿨미투집 <밀려오는 파도 막을수는 없다> 1권과 같은 이름의 공동체 탐구집 2권을 만들었습니다. 지금은 독일에 삽니다.             Heimat   정민   최근엔 정민이 왔다 갔다. 그 애는 나의 바로 밑 동생이다. 세자매 중 나와 정민은 극도로 상극의 삶을 산다. 그 애는 중학생 때부터 독서실에서 공부를 하느라 12시 이전에 집에 들어온 적이 없다면 나는 친구들과 노느라 12시 전에 집에 들어간 적이 없던 것 같다. 그 애는 꿈이 없는 게 불안해서 공부를 했다면 나는 꿈 같은 거 생길 수 있는 사회냐고 화를 내는 편이었다. 우리가 삶을 사는 모습은 너무나도 다르지만 그 애는 내 인생에서 가장 웃긴 사람 중 하나다. 우리는 서로에게 인생 최고의 개그맨이다. 나의 지겨운 가정사를 가장 잘 아는 사람, 그것으로 극도의 유머를 만들 수 있는 사람은 그 애가 유일하다.   한 달이 지나고 공항에 그 애를 데려다주는 길에는 기분이 싱숭생숭했다. 독일에서 만나는 외국인들 중에서도 먼 나라에서 온 편인 나는 그 거리감을 대체로 즐겼다. 하지만 비행기에 앉아서 하루쯤 지나면 도착하는 게 한국이라니 문득 너무 가깝게 느껴졌다. 그래서 아무 소리나 시작했다. 나 만약에 한국에 돌아가야 되면 어떡하지? 진짜 돌아가야 되면 거기서 뭘 할 수 있지? 정민은 말했다. 왜 자꾸 한국에 돌아갈 생각을 해? 언니...
현민
2023.09.19 | 조회 387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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