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6회> 바램이 삶이 되려면

현민
2023-06-17 09:23
444

 

 

 

 

 

글쓴이 현민

친구들과 함께 동천동의 책방 우주소년을 운영했습니다.

서점을 운영하며 스쿨미투집 <밀려오는 파도 막을수는 없다> 1권과 같은 이름의 공동체 탐구집 2권을 만들었습니다.

지금은 독일에 삽니다.

 

 

 

 

바램이 삶이 되려면

 

 

 

최근에는 집 재계약과 전기세, 정원 가꾸기로 매일매일 그룹채팅방이 시끄러웠다. 급한 문제가 있을 때 우리는 임의적으로 회의를 만들지만 회의 시간을 잡기란 굉장히 어렵다. 생각보다도 더 12명이 한집에 머무르는 때는 드물기 때문이다. 사는 사람도 금방 바뀌고, 매일 다른 일들이 일어나는, 4년이 된 이 셰어하우스에 현재로 가장 오래 산 사람은 알론소다. 중앙 아메리카의 작은 나라, 한국보다 더 적은 인구가 사는 코스타리카에서 온 그는 이 도시에서 현대무용 학교를 다닌다. 그는 댄서다.

 

최근 그의 학교에서는 한 학년을 마무리하고 졸업하는 학년을 위한 공연을 열었다. 알론소는 셰어하우스 톡방에 공연 정보를 공유해줬는데, 티켓 값이 생각보다 비싸 못 가겠군 하던 차였다. 공연 오냐고 묻는 그에게 표 비싸더라 궁시렁대니 무료 티켓으로 초대를 받게 되었다. 나는 알론소가 댄서라는 사실을 굉장히 좋아했지만, 한 번도 그가 제대로 춤을 추는 걸 본 적이 없었다.

입구를 못 찾아 공연 시작 10분 전에 이리저리 뛰어다니다가, 머리가 아름답게 센 할머니를 만났다. 굉장히 우아한 분위기를 풍겼던 그 할머니도 입구를 못 찾는 중이었다. 같이 입구를 찾고 우여곡절 끝에 입장을 하다보니 어느 순간 할머니는 시야에서 없어졌다. 부랴부랴 좌석에 앉아 놓여있던 공연 순서표를 눈으로 읽다 보니 불빛이 어두워졌다. 공연이 시작한다는 뜻이었다.

 

첫 번째 공연은 1학년의 ‘imagine’ 이었다. 연습복을 입은 사람들이 차례로 입장했다. 음악 없이, 사람들은 몸을 움직이기 시작했다. 그러던 중 어떤 음성이 시작되었다. 그건 영어도 아니고 독일어도 아니고 짐작하기론 이탈리아어 같았다. 그 소리를 시작으로 목소리에 목소리가 겹치며 여러 음성이 쏟아져 나왔다. 같은 의미의 텍스트가 여러 개의 언어로 말해지고 있는 것 같았는데, 태어난 곳을 떠나 춤을 추러 온 이 댄서들의 목소리였을 것 같다. 한국어도 나와 들어보니 다양성의 대한 권리를 읊고 있었다. 소리가 끝난 뒤 어느 지점에서 노래가 나오기 시작했다. 존 레논의 ‘imagine’ 이었다. 그들은 노래에 맞춰 춤을 추기 시작했다. 지금보다 조금 더 어릴 적에 그 노래에 가슴이 웅장해지던 시절이 있었던 것 같은데, 전주가 나오며 이 노래가 ‘imagine’이라는 걸 알아채자마자 얼굴을 구겨버렸다. 너무 지루한 결말이었기 때문이다.

 

Imagine에는 이런 가사들이 나온다.

천국이 없다고 생각해보세요. 발 아래 지옥도 없고, 그래서 모든 사람들이 오늘을 위해서 살아가고 있다면. 국가가 존재하지 않고, 살인도, 희생도, 종교조차 없는 곳이 있다면. 그래서 모든 이들이 평화 속에서 살아가고 있다면.

40년 전 발매된 이 노래는 오래됐지만, 아직도 나는 의미 있다고 느낀다. 왜냐하면 아직도 우리는 이 가사가 뜻하는 장소를 상상해야만 하기 때문이다. 우리는 천국과 지옥이 없는 것보다 있는 걸 더 잘 상상할 수 있다. 천국에 가고 지옥에 가지 않기 위해 그곳이 어떤 모습인지 수없이 전해 들어왔기 때문이다. 국가가 없는 세상을, 종교와 살인이 없는 세상은 무엇으로 채워져 있을까? 지금 내겐 아무것도 떠오르지 않는다. 1971년에 발매된 이 노래가 아직까지 인권운동 레파토리로 쓰인다는 건 무슨 의미일까? 나는 그때와 지금이 별로 달라진 게 없기 때문이라는 생각이 들었다. 이 땅에서 색깔 놀이를 자처한 이들이 자신들이 가진 것을 전혀 포기하지 않은 채로, 그래서 세상이 별로 달라진 게 없는 채로 이런 감성을 소비하는 방식에 진절머리가 났다.

 

이어지는 공연을 보며, 나는 눈으로 계속 흑인이나 동양인들을 찾았다. 이주민이 많다는 독일의 이 국제 무용학교에 흑인 한 명 없던 것은 우연일까? 아니면 어떻게 해석해봐도 되는 걸까? 나에게는 우연처럼 보이지 않았던 것 같다. 하지만 그와 같이 자기검열도 시작되었다. 어차피 백인 나라에 백인 많은 건 당연한 게 아닌가. 피부가 하얀 그들 중에도 누군가는 퀴어거나 한번도 들어보지 못한 나라에서 왔을 수도 있고, 난민일 수도 있으며 가정폭력 당사자, 성폭력 당사자 일수도 있고, 자살을 시도해본 사람일 수도 있으니 말이다. 내가 상상할 수 없을 만큼의 이야기가 저 몸들에게 담겨 있을텐데, 이런 생각하는 내가 나쁜걸까 번뇌에 빠지던 중 쉬는 시간이 되었다.

 

공연 전체가 마냥 답답한 것은 아니었다.

그들이 다루는 주제는 다양했다.

몸으로 이렇게까지 전해질 수 있구나 점점 깨달아지며 현대무용의 장점을 이해하게 되는 시간이었다.

 

무작정 밖으로 나왔고 북적한 사람들 틈에서 어색하게 담배를 물었다. 그때 입구에서 만난 우아한 할머니가 내가 있던 곳으로 와서 담배를 꺼냈다. 그분도 혼자 오신 모양이었다. 담뱃불을 빌려드리며 대화가 시작이 되었다. 어떻게 오셨냐고 물으니 플랫메이트들이 오늘 공연을 한다고 했다. 나도 내 플랫메이트가 초대를 해줬다고 하며 우리는 그들이 같은 반이라는 걸 알게 되었다. 할머니는 그 플랫메이트들이 이탈리아에서 왔다고 했다. 그럼 당신도 이탈리아에서 오셨냐 물으니 본인은 미국인이며 독일에서 30년을 살며 의사로 일하신다고 했다. 그는 내게 첫 번째 공연이 정말 아름다웠다고 말했다. 나에게는 가장 불편한 공연이었는데 말이다. 나와 우아한 할머니의 차이는 무엇일까? 어째서 나는 가슴이 답답해졌고, 어째서 그는 커다란 아름다움을 느낀 걸까? 할머니의 인생을 자세히 들여다보지 않고서는 영영 모르는 일이다. 하지만 나는 내가 느낀 불편함의 기원을 헤아려볼 수는 있다.

 

 

우리는 모두 그 자체로 존중받아야 한다는 말에 반대하는 사람이 얼마나 될까? 하지만 그렇다고 해서 차별이 세상에 없는 것은 아니다. 차별주의자들은 자신이 차별한다고 생각하지 않으니까 말이다. 다양성이 좋은 말처럼은 보이지만 어떻게 다양함을 존중하는지 모르는 시대에 종종 이 문장의 효력이 약해졌다는 느낌이 들 때가 있다. 사람들이 이 문장만으로 그들의 삶을 바꾸기에는 너무 무뎌졌다는 느낌 말이다. 내가 아끼는 사람 중 가장 극단적 차별주의자인 나의 할머니가 생각이 난다. 그는 목사 사모님으로서 종교에 어긋나는 이들을 열심히 배척하시지만, 내가 당신께 모든 사람들을 사랑해야 한다고 말한다면 그것이 주님의 뜻이라고 하실 테다. 하지만 할머니와 나의 결과적 행동은 다르다. 그는 추석날 쇼파 위에 동성애 반대 플랜카드를 올려놓지만 나는 동성결혼 합법화 플랜카드를 들고 거리로 나간다. 그것은 그와 나의 당연함에 대한 기준이 다르기 때문이다. 할머니가 생각하는 ‘모두’에는 동성애 하는 사람들이 없고, 내가 ‘모두’를 말할 때는 동성애 하는 사람들이 있기 때문이다.

 

잘 알고도 미워할 수 있을까? 잘 알아서 미워할 수도 있다. 하지만 잘 모른 채로 미워하는 건 항상 더 쉽고, 세상에 많은 혐오들이 그런 식으로 만들어졌다는 걸 안다.

최근에 콩고에서 온 사람과 길게 시간을 보낸 적이 있었다. 그 시간 동안 나는 내가 그 사람의 말을 너무 못 알아들어서 어서 헤어지고 싶었다. 그도 대화 중간 나에게 왜 자꾸 농담을 진지하게 받아들이냐고 해서 당황스러웠다. 지난 뒤 생각해보니, 가장 큰 이유는 흑인 영어가 내게 익숙하지가 않아서였다. 그의 말하기 방식이 나에게는 너무 낯설었다. 그보다 더 영어를 못해도 유럽인들과 이야기하는 게 더 이해하기가 쉬웠던 걸 생각해보면 그랬다. 모르는 새에 나에게 익숙한 어느 지역 사람들의 생활 방식과 언어, 돌이켜보면 무섭기도 하다. 어느 날은 살날이 너무 많이 남은 것 같다가도, 이런 순간을 마주하면 살날이 남아서 다행이었다. 배울 수 있는 시간처럼 보이니까 말이다.

우리에게는 이미 알고 있는 이야기보다 알려지지 않은 이야기를 나누는 시간이 더 자주 생겨야 한다. 우리는 예쁘지 않은 몸을 더 많이 접해야 하고, 비슷하게 생기지 않은 사람들도 만나보아야 하고, 마냥 귀엽지만 않은 동물과의 관계도 경험해 보아야 한다. 흘깃 보았을 때 눈살이 찌푸려지는 것들이 더 자연스러워져서 아무렇지 않아질 때까지. 지금 기괴해 보이는 것들이 아름다워 보일 수 있다면, 그 순간은 얼마나 기쁠까? 기대된다.

 

마지막으로, 존중이 신체화가 되려면 내가 스스로에게도 더 너그러울 줄 알아야 된다고 쓰고 싶다. 나를 무의식의 틀에 가두는 것이 다른 사람을 대할 때와 연결된다는 걸 발견할 때마다 소름이 돋는다. 글 쓸 때마다 내가 뭐라고 이런 글을 쓰냐며 자격을 의심하는 것도, 한국을 떠나 전범 국가였던 부자 백인 나라 온 것에 종종 죄책감 가지는 것도. 사람이 갈등하지 않고 고민하지 않는다면 그야말로 슬픈 일일 테지만, 사람이 늘 갈등하고, 고민하며 사는 것도 너무 괴로우니 말이다. 나에게만 하는 말은 아니다. 내 친구들에게도 해주고 싶은 이야기다. 나를 조금 더 용서해야겠다고 말하는 게 내가 다른 이를 사랑해 보이겠다는 최선의 마음이다. 누구 또 좋은 생각 있으면 내게 꼭 말해줬으면 좋겠다.

 

바램이 바램으로 남아있지 않는 삶을 살아보고 싶다

바라던 일이 일어나는 세상에 살고싶다

댓글 5
  • 2023-06-18 09:46

    오늘 아침에 어제 신문을 펼쳐서 읽은 것 중의 하나가 '김남희의 걷다보면' 코스타리카 편.
    그 글을 읽으면서 코스타리카, 음.. 코스타리카, 뭔가 친숙한데.. 라고 생각했는데, 알론소의 고향이었어요!!
    스쳐지나가듯 현민의 글에 단 한 번 등장한 그 나라의 이름이 일으키는 진동과 그 효과가 멋지네요.
    이렇게 이야기들이 연결될 때 뭔가 짜릿한 느낌이 있어요.
    "푸라 비다(Pura vida, 순수한 삶)!" 코스타리카 사람들이 일상에서 자주 쓰는 말이래요.
    지금 현민이에게 그 말을 해야 할 때인 것 같아요. 푸라 비다!!

  • 2023-06-19 09:43

    헐...나도 이 글을 읽으면서 코스타리카...김남희의 코스타리카?! 신기하군...이랫었는데....이번엔 콩고를 찾아봤어요. 아프리카 콩고가 어디쯤에 있었지? 하면서요.

    이매진...맞아요. 한 때는 전주만 나와도 가슴 뛰었는데
    어느새 클리세가 된 듯한 느낌도.

    이방인으로서, 1세대 백인나라에 잠시 머무는 이방인으로써
    현민은 '차이'와 '정의'에 대해 더 예리한 질문들을 만들어나가고 있는 것 같네요.

    부럽습니다. 하하

  • 2023-06-19 10:05

    바라던 일이 일어나는 세상 진짜 기쁘겠네요 ㅎ
    모두 라고 하면서도 모두가 아닌
    다양성이라지만 별로 다양하지않은
    좁고좁은 세상에 갇혀사는 느낌인 나로서는
    현민의 경험들이 참 의미있어 보이네요
    이제 부러워하는건 안할라는데 ㅋㅋ

  • 2023-06-19 18:52

    남을 차별하는 마음이 나를 차별하는 마음이기도 하더라구요.
    나에게 너그러워지는 것을 고민하는 현민의 마음이 지금 나의 마음과 비슷하다는 생각이 드네요. ^^

  • 2023-06-22 09:29

    저는 나와 다르게 생긴 생명체에 대해서 유달리 신체가 반응할때가 있는데요, 현민의 글을 보니 "지금 기괴해 보이는 것들이 아름다워 보일 수 있다면, 그 순간은 얼마나 기쁠까? " 저도 그 순간이 기대되네요. 피하지말고 계속 봐야겠네요~~

현민의 독국유학기
이 모든 지리적 사실   네덜란드는 독일의 북쪽에 맞닿아있다. 세 명의 친구가 살고 있지만 한 번도 가본 적은 없었다. 지난 겨울 니키가 운전해서 네덜란드에 간다고 하길래, 그럼 가는 길에 친구가 사는 도시에 내려 달라고 부탁했다. 서경은 독일과 국경이 맞닿아있는 아른헴에서 공부한다. 모부님께 네덜란드 유학을 가고 싶다고 말했을 때 그들은 성매매와 마약 합법 때문에 꼭 그곳이어야겠냐고 물었다. 아이러니하게도 네덜란드에서는 정치적 혼란시기였던 19세기 마땅한 보수정당이 없어 동성결혼, 성매매와 마약 합법 등을 실행하게 되었다고 한다.   네덜란드의 흔한 커피샵 커피도 파는데 대마초도 판다. 일상적으로 사람들이 와서 대마초를 피우는 곳이다.   서경은 영어권 국가 중 네덜란드가 가장 물가가 싼 편이라 네덜란드 대학에 지원했다. 네덜란드에는 더치Dutch라고 불리는 고유어가 있음에도 영어권 국가라고 불릴 만큼 국민 90%는 영어를 능숙하게 구사한다. 독일인들은 네덜란드어가 독일어에서 파생한 괴상한 사투리라고 말하는데, 네덜란드에 와보니 더치는 생각보다 더 고유했다. 영국과 미국에 비교하면 굉장히 싼 유학비지만, 독일과 비교했을 땐 비싼 생활비 그리고 주거난 때문에 아직도 에어비엔비에서 산다는 서경의 학교 동기들의 이야기를 들으며 이 나라에 이주민 비율이 큰 이유가 궁금해졌다. 헤이그에서 공부하는 지연은 현재 네덜란드가 보수집권이지만 여성·퀴어 인권은 너무 당연해서 보수당도 건드리지 않는다고 말해주었다. 그 대신 보수당은 이주민을 규제하고 싶어한다고 했다.   일 년 만에 만난 서경과 새벽까지 조잘대며 회포를 풀고, 아침에 일어나 밥을 짓기 시작했다. 서경은 내 음식을 좋아한다. 그래서 집에서 마른 미역과 들깻가루,...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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현민
2024.04.17 | 조회 205
현민의 독국유학기
글쓴이 현민 친구들과 함께 동천동의 책방 우주소년을 운영했습니다. 서점을 운영하며 스쿨미투집 <밀려오는 파도 막을수는 없다> 1권과 같은 이름의 공동체 탐구집 2권을 만들었습니다. 지금은 독일에 삽니다.             입원기   볼더링을 하다가 떨어졌다. 다음 날 응급실에서 하루종일 엑스레이를 몇 번 찍은 후 의사로부터 인대 파열과 발목 바깥쪽 뼈가 부러졌다는 말을 전해들었다. 뼈를 재위치하기 위해선 다리에 못을 박는 수술을 해야 했다. 살면서 병원에 가는 일이 잘 없는게 자랑이었는데, 갑작스럽게 입원을 하게 되었다. 가장 먼저 한 것은 보험 확인이었다. 모든 사람들이 내게 보험은 있냐고 물었다. 최근 나는 독일에서 새 비자를 받았는데, 그때 독일 사보험을 등록해놓았다. 지난 한 해 동안은 한국에서 가장 싼 여행보험을 들어놓았다. 그동안 한 번도 병원에 갈 일이 없었는데, 독일 보험을 들어놓고 사고를 당해서 다행이었다.   입원하면 금방 수술을 받을 수 있을 줄 알았는데, 발목이 너무 부으면 수술 후 봉합이 어려워 붓기가 가라 앉을 때까지 기다려야 했다. 병원에서 아침 점심 저녁 밤으로 진통제를 받았는데, 살면서 그렇게 많은 약을 먹어본 적이 없었다. 빈속에 약을 먹어 배가 쓰리면, 그것을 방지하는 약을 먹는 식이었다. 서양 의학이란 이런 것이구나 체감하며 먹으라는 약을 먹었다. 팔에 주사바늘을 꽂고 이름 모르는 주사들을 여러 번 맞으니 몸에 멍 자국이 금방 늘었다. 매일 아침 집단으로 의사 무리가 찾아와 오늘도 수술은 못 할 것 같다고 전했다.   예상보다...
글쓴이 현민 친구들과 함께 동천동의 책방 우주소년을 운영했습니다. 서점을 운영하며 스쿨미투집 <밀려오는 파도 막을수는 없다> 1권과 같은 이름의 공동체 탐구집 2권을 만들었습니다. 지금은 독일에 삽니다.             입원기   볼더링을 하다가 떨어졌다. 다음 날 응급실에서 하루종일 엑스레이를 몇 번 찍은 후 의사로부터 인대 파열과 발목 바깥쪽 뼈가 부러졌다는 말을 전해들었다. 뼈를 재위치하기 위해선 다리에 못을 박는 수술을 해야 했다. 살면서 병원에 가는 일이 잘 없는게 자랑이었는데, 갑작스럽게 입원을 하게 되었다. 가장 먼저 한 것은 보험 확인이었다. 모든 사람들이 내게 보험은 있냐고 물었다. 최근 나는 독일에서 새 비자를 받았는데, 그때 독일 사보험을 등록해놓았다. 지난 한 해 동안은 한국에서 가장 싼 여행보험을 들어놓았다. 그동안 한 번도 병원에 갈 일이 없었는데, 독일 보험을 들어놓고 사고를 당해서 다행이었다.   입원하면 금방 수술을 받을 수 있을 줄 알았는데, 발목이 너무 부으면 수술 후 봉합이 어려워 붓기가 가라 앉을 때까지 기다려야 했다. 병원에서 아침 점심 저녁 밤으로 진통제를 받았는데, 살면서 그렇게 많은 약을 먹어본 적이 없었다. 빈속에 약을 먹어 배가 쓰리면, 그것을 방지하는 약을 먹는 식이었다. 서양 의학이란 이런 것이구나 체감하며 먹으라는 약을 먹었다. 팔에 주사바늘을 꽂고 이름 모르는 주사들을 여러 번 맞으니 몸에 멍 자국이 금방 늘었다. 매일 아침 집단으로 의사 무리가 찾아와 오늘도 수술은 못 할 것 같다고 전했다.   예상보다...
현민
2024.03.16 | 조회 257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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글쓴이 현민 친구들과 함께 동천동의 책방 우주소년을 운영했습니다. 서점을 운영하며 스쿨미투집 <밀려오는 파도 막을수는 없다> 1권과 같은 이름의 공동체 탐구집 2권을 만들었습니다. 지금은 독일에 삽니다.             유학점검기   독일에는 아우스빌둥(Ausbildung)이라는, 직장과 직업학교를 번갈아가며 배우는 제도가 있다. 영어로는 Apprenticeship이고 한국어로는 직업교육이라고 말할 수 있을 것 같다. 회사에서 실질적인 교육을 받고 직업학교에서 이론적인 것을 배운다. 고등학교 졸업 후 대학에 가지 않고 아우스빌둥을 하는 경우도 줄곧 있다. 독일의 오기 전 나의 계획은 일년 간 어학연수를 하고 출판사에서 아우스빌둥을 하는 것이었다. 최근 나는 출판사들에 이력서와 커버레터를 넣고 인터뷰를 다닌다. 자본주의의 빈틈에 껴서 살다가 제발 일 시켜달라고 스스로를 둘도 없는 인재처럼 소개하려니 어색하다. 독일에 와서 변한 것이 많다. 코코넛밀크로 맛있는 커리를 만들 수 있고, 알리오 올리오를 먹고, 핸드크림을 바르고, 외식은 잘 하지 않는다. 전에는 곁에 없으면 안 될 것 같았던 친구들과는 어쩌다 한번 연락한다. 그리고 새로운 친구들과 익숙한 공간들이 생겼다. 한 해 동안 어떻게 살았는지 돌아보는 마음으로 유학점검기를 쓴다. 나를 아시는 분들께는 그래서 얘가 지금 독일에서 뭐하며 사는건지 머릿속에 그림을 그려보실 수 있을 것 같다.   독일의 여름을 믿지 마세요   2022년 6월부터 9월 독일 지인 댁에서 아름다운 여름을 보냈다. 그즈음 나는 이러다간 익숙함에 속아 한국을 떠나지 못할 것 같다는 생각을 하고 있었다. 여름이 지난 뒤, 나는 독일에 와서 살아보겠다는 결심을...
현민
2024.02.16 | 조회 286
현민의 독국유학기
    글쓴이 현민 친구들과 함께 동천동의 책방 우주소년을 운영했습니다. 서점을 운영하며 스쿨미투집 <밀려오는 파도 막을수는 없다> 1권과 같은 이름의 공동체 탐구집 2권을 만들었습니다. 지금은 독일에 삽니다.             미친 인간들의 안전한 파티   나의 셰어하우스에는 풀타임 직장인이 두 명 있다. 그들은 아침부터 오후 5시까지 일한다. 그들은 거의 홈 오피스를 해서 집에서 자주 보이지만 늘 지쳐있고, 하루만 사무실에 다녀오는 날에는 진을 다 빼고 온다. ‘일하기’는 중요하지만 앞으로 남은 모든 날을 이렇게 하루하루 진을 빼며 사는 것인가 가늠해 보기 시작하면 주 4일제 실현이 간절해진다. 이들이 일만큼 열심히 하는 것이 있다면 저녁에 부엌에 둘러앉아 담배를 물고 진토닉을 마시기 시작하다가, 주방에 있는 큰 스피커에 노래를 연결해 테크노 음악을 틀기 시작한 후 자정쯤 파티에 가거나, 지하실에 내려가 디제잉을 하며 파티를 벌이는 것이 있다. 매주 서너 병의 진을 사와 자신들이 다 마신 사실을 잊고 그 술들이 다 어디 갔냐고 묻는 사람들. 이들의 특징으로는 파티와 술과 담배 따위에 매우 후하다는 점이 있다. 자신이 마셔 마땅하다고 생각하는 이들, 함께 마실 사람이 항상 필요한 이들. 제안하면 거절하지 않는 사람으로서 나는 이들과 잦은 파티를 가진다. 우리는 종종 방탕히 노는 시간으로부터 삶의 아름다움을 본다. 그럴 때가 오면 가끔은 해야 할 일을 못 해도, 밥을 못 먹어도 즐겨 마땅했다는 확신이 든다.   독일 클럽에는 무엇이 있는가   나의...
    글쓴이 현민 친구들과 함께 동천동의 책방 우주소년을 운영했습니다. 서점을 운영하며 스쿨미투집 <밀려오는 파도 막을수는 없다> 1권과 같은 이름의 공동체 탐구집 2권을 만들었습니다. 지금은 독일에 삽니다.             미친 인간들의 안전한 파티   나의 셰어하우스에는 풀타임 직장인이 두 명 있다. 그들은 아침부터 오후 5시까지 일한다. 그들은 거의 홈 오피스를 해서 집에서 자주 보이지만 늘 지쳐있고, 하루만 사무실에 다녀오는 날에는 진을 다 빼고 온다. ‘일하기’는 중요하지만 앞으로 남은 모든 날을 이렇게 하루하루 진을 빼며 사는 것인가 가늠해 보기 시작하면 주 4일제 실현이 간절해진다. 이들이 일만큼 열심히 하는 것이 있다면 저녁에 부엌에 둘러앉아 담배를 물고 진토닉을 마시기 시작하다가, 주방에 있는 큰 스피커에 노래를 연결해 테크노 음악을 틀기 시작한 후 자정쯤 파티에 가거나, 지하실에 내려가 디제잉을 하며 파티를 벌이는 것이 있다. 매주 서너 병의 진을 사와 자신들이 다 마신 사실을 잊고 그 술들이 다 어디 갔냐고 묻는 사람들. 이들의 특징으로는 파티와 술과 담배 따위에 매우 후하다는 점이 있다. 자신이 마셔 마땅하다고 생각하는 이들, 함께 마실 사람이 항상 필요한 이들. 제안하면 거절하지 않는 사람으로서 나는 이들과 잦은 파티를 가진다. 우리는 종종 방탕히 노는 시간으로부터 삶의 아름다움을 본다. 그럴 때가 오면 가끔은 해야 할 일을 못 해도, 밥을 못 먹어도 즐겨 마땅했다는 확신이 든다.   독일 클럽에는 무엇이 있는가   나의...
현민
2023.11.21 | 조회 349
현민의 독국유학기
          글쓴이 현민 친구들과 함께 동천동의 책방 우주소년을 운영했습니다. 서점을 운영하며 스쿨미투집 <밀려오는 파도 막을수는 없다> 1권과 같은 이름의 공동체 탐구집 2권을 만들었습니다. 지금은 독일에 삽니다.             Heimat   정민   최근엔 정민이 왔다 갔다. 그 애는 나의 바로 밑 동생이다. 세자매 중 나와 정민은 극도로 상극의 삶을 산다. 그 애는 중학생 때부터 독서실에서 공부를 하느라 12시 이전에 집에 들어온 적이 없다면 나는 친구들과 노느라 12시 전에 집에 들어간 적이 없던 것 같다. 그 애는 꿈이 없는 게 불안해서 공부를 했다면 나는 꿈 같은 거 생길 수 있는 사회냐고 화를 내는 편이었다. 우리가 삶을 사는 모습은 너무나도 다르지만 그 애는 내 인생에서 가장 웃긴 사람 중 하나다. 우리는 서로에게 인생 최고의 개그맨이다. 나의 지겨운 가정사를 가장 잘 아는 사람, 그것으로 극도의 유머를 만들 수 있는 사람은 그 애가 유일하다.   한 달이 지나고 공항에 그 애를 데려다주는 길에는 기분이 싱숭생숭했다. 독일에서 만나는 외국인들 중에서도 먼 나라에서 온 편인 나는 그 거리감을 대체로 즐겼다. 하지만 비행기에 앉아서 하루쯤 지나면 도착하는 게 한국이라니 문득 너무 가깝게 느껴졌다. 그래서 아무 소리나 시작했다. 나 만약에 한국에 돌아가야 되면 어떡하지? 진짜 돌아가야 되면 거기서 뭘 할 수 있지? 정민은 말했다. 왜 자꾸 한국에 돌아갈 생각을 해? 언니...
          글쓴이 현민 친구들과 함께 동천동의 책방 우주소년을 운영했습니다. 서점을 운영하며 스쿨미투집 <밀려오는 파도 막을수는 없다> 1권과 같은 이름의 공동체 탐구집 2권을 만들었습니다. 지금은 독일에 삽니다.             Heimat   정민   최근엔 정민이 왔다 갔다. 그 애는 나의 바로 밑 동생이다. 세자매 중 나와 정민은 극도로 상극의 삶을 산다. 그 애는 중학생 때부터 독서실에서 공부를 하느라 12시 이전에 집에 들어온 적이 없다면 나는 친구들과 노느라 12시 전에 집에 들어간 적이 없던 것 같다. 그 애는 꿈이 없는 게 불안해서 공부를 했다면 나는 꿈 같은 거 생길 수 있는 사회냐고 화를 내는 편이었다. 우리가 삶을 사는 모습은 너무나도 다르지만 그 애는 내 인생에서 가장 웃긴 사람 중 하나다. 우리는 서로에게 인생 최고의 개그맨이다. 나의 지겨운 가정사를 가장 잘 아는 사람, 그것으로 극도의 유머를 만들 수 있는 사람은 그 애가 유일하다.   한 달이 지나고 공항에 그 애를 데려다주는 길에는 기분이 싱숭생숭했다. 독일에서 만나는 외국인들 중에서도 먼 나라에서 온 편인 나는 그 거리감을 대체로 즐겼다. 하지만 비행기에 앉아서 하루쯤 지나면 도착하는 게 한국이라니 문득 너무 가깝게 느껴졌다. 그래서 아무 소리나 시작했다. 나 만약에 한국에 돌아가야 되면 어떡하지? 진짜 돌아가야 되면 거기서 뭘 할 수 있지? 정민은 말했다. 왜 자꾸 한국에 돌아갈 생각을 해? 언니...
현민
2023.09.19 | 조회 388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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