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5회> 어젯밤의 이야기

현민
2023-05-17 07:36
509

 

 

 

 

 

글쓴이 현민

친구들과 함께 동천동의 책방 우주소년을 운영했습니다.

서점을 운영하며 스쿨미투집 <밀려오는 파도 막을수는 없다> 1권과 같은 이름의 공동체 탐구집 2권을 만들었습니다.

지금은 독일에 삽니다.

 

 

 

 

어젯밤의 이야기

 

어제는 밤 늦게까지 글을 쓰다가 스스로에게 약간 실망하면서 초콜렛을 찾으러 부엌에 들어갔다. 부엌에는 레오가 있었다. 레오는 두 달 전쯤 이사 온 이탈리안이자 독일인이다. 내 윗방에 사는데 내가 늦게 자기 때문에 레오가 얼마나 늦게까지 안 자는지 그의 발소리로 확인할 수 있다. 레오는 늦은 밤에 꼭 담배를 한 대씩 피러 나온다. 문을 열어 인사를 하자마자 그가 쇼파 위에서 자고 있는, 우리 집에 자주 오는 고양이를 가리켰다. 레오는 그 고양이와 같이 찍은 셀카를 보여주었다.

 

나와 레오가 같은 물건을 산다면 나는 설명서를 아예 읽지도 않고 무작정 끼워보는 편인 반면에 레오는 침착하게 읽은 뒤 하나씩 맞춰보는 사람이라고 설명하겠다. 레오는 그런 식으로 나에게 물리적인 평안도, 마음의 평안도 주는 사람이다. 마주친 김에 담배나 한 대 피우고 들어가야겠다 싶었다. 나는 레오와 둘이 이야기하는 것을 좋아한다. 그는 잘 경청하는 사람이다.

레오는 약간 피곤하다며 마지막 담배를 피우고 들어가겠다고 했다. 담배를 피우는 동안 나는 요새 나의 화두에 대해 이야기하기 시작했다. 독일에 어떻게 해야 더 머무를 수 있을지. 아니 정말 내가 독일에 머무르고 싶긴 한 건지. 나는 누가 묻지 않으면 나에 대해 말하기를 어려워하는데, 레오에게 말할 때는 그가 귀 기울여 줄 걸 알았다. 독일에서 사는 외국인으로서 내 편인 독일인(이자 이탈리아인이기도 하지만)이 있는 게 얼마나 마음 편한 일인지, 나는 레오를 만나고 나서 알았다.

 

그렇게 담배가 다 타가던 중 갑자기 베이자가 부엌 문을 벌컥 들어왔다. 베이자는 우리 집의 엄마 같은 사람이다. 그러나 요리를 한다거나 청소를 하는 전형적인 너그러운 엄마의 모습을 표방하지는 않는다. 오히려 그 애는 다른 애들의 음식을 빌려 먹고, 누가 청소를 안 하면 박박 화를 내지만 자기만의 방식으로 이곳을 강하게 사랑한다. 가장 꼭대기 방에 사는데도, 요리를 하지 않는데도 사람들이 모이기 때문에 부엌에 제일 오래 머무르는 사람. 나는 무언가 불편할 때 무엇이 불편한지, 그것이 정말 불편할 일이 맞는지 대해 몇일 숙고하며 앓는 편이라면, 그 애는 몇 마디 말로 상대에게 자기 기분을 또렷하게 말할 줄 아는 애다.

 

베이자는 최근 남자친구가 생겼는데 방금 처음으로 크게 싸웠다고 했다. 그때 한 개비만 피고 들어가려 했던 나와 레오는 주저 없이 두 번째 담배를 꺼내 들었다. 부엌에 나오면 나는 항상 이런 식이다. 내 마음은 내가 좋아하는 사람들에게 활짝 열린다. 부엌에서의 시간은 예측할 수 없이 흘러간다. 우리는 와인을 한 병 땄고, 서로가 경험한 연애 이야기를 시작했다. 그러면서 며칠 전 있었던 파티에서 한 여자애의 구남친과 현남친이 싸우려고 했던 이야기도 꺼냈다. 독일 사람들은 질투를 덜 느끼지 않냐는 질문에 레오는 전혀 그렇지 않다며, 클럽에 가거나 취한 그들을 보면 진짜 얼굴을 볼 수 있을 거라고 했고, 한국인들은 대체로 침착하고 평온해 보이는데 이런 문제 없지 않냐는 말에 나는 너희가 나만 봐서 그런 거라고 답했다. 우리의 최종 결론은 모든 인간사회가 돌아가는 방식은 똑같다로 귀결됐다.

 

레오가 베이자에게 터키 정치인에 대해 물으면서, 대화의 흐름은 터키와 독일의 관계로 나아갔다. 2차 대전이 끝난 이후 독일의 도시 재건에 많은 터키인들이 동원되면서, 터키인 커뮤니티는 지금까지도 단연 독일에서 가장 큰 외국인 커뮤니티다. 독일에서 가장 유명한 음식이 되너(터키식 케밥에서 기원한 음식)인만큼 독일 사회 속 터키의 영향력은 크다. 그러나 베이자는 터키인으로서 이야기를 시작하며 아직도 터키인들은 차별받는 위치에 있다고 했다. (나중에 좀 더 찾아보니 독일의 네오나치(나치의 후손이라고 생각하는 사람들)이 가장 싫어하는 민족이 터키인들이라고 한다.) 베이자는 또 한 가게에서 어떤 독일인이 자기에게 아랍어로 말을 걸었다면서 불쾌했다는 이야기를 했다. 나는 이 이야기를 백인들이 아시안만 보면 니하오를 하는 것과 비슷하게 이해했다. 터키인을 아랍인과 똑같다고 생각하는 게 그들에겐 꽤나 불쾌한 지점인 것 같았다. 그리고 베이자는 독일인 남자친구가 조부모님께 터키인 여자친구가 생겼다고 했는데 느닷없이 ‘나는 터키인이라고 신경 쓰지 않는다.’다는 말을 들었다고 했다. 그 말은 곧이어 조금은 신경 쓰인다는 거 아니냐고 하면서 우리는 깔깔 웃었다. 쿨해보이고 싶었지만 결국 쿨하지 못했던 오래된 사람들이 웃겼다.

 

이어서 레오도 독일인과 이탈리안 정체성을 가진 자신의 이야기를 했다. 그는 세계에 제일 나쁜 영향을 끼쳤던 나라는 분명 독일일 거라고 말했다. 자기 조상이 벌였던 일들에 섬세한 책임을 느끼는 레오를 보며 그가 좋은 사람이어서 저런 말을 하는 걸까 아니면 좋은 교육을 받아서일까 궁금했다. 나에게는 레오의 태도가 많이 생소했다. 한국인으로서 접했던 일본이라는 또 다른 전범 국가에서는 볼 수 없는 모습이었기 때문이다. 독일이 젊은 세대에게 스스로의 잘못을 인정하는 역사교육을 하는 것이 윤리적으로는 너무나 당연한 일이지만, 세상에는 잘못을 하고 인정하지 않는 사람들이 너무 많기에 특별해 보였다. 독일이 스스로의 잘못을 뉘우치는 맥락은 무엇일까 궁금해졌다. (물론 누가 봐도 큰 잘못을 했기에 숨을 곳이 없었는지도 모른다. 혹은 잘못을 뉘우치는 척이라도 안 하면 세상에서 배척될까봐 그랬을지도 모른다.)

레오에겐 폴란드계 독일인 여자친구가 있는데, 폴란드는 독일과 1000년 동안이나 피 터지게 싸운 역사가 있고 무려 독일에 의해 국가가 2번이나 멸망한 적이 있다고 한다. 그래서 레오가 폴란드인인 여자친구 부모님께 자신을 독일과 이탈리아 혼혈이라 소개했을 때, ‘그렇구나, 너는 이탈리아인이구나.’ 하며 독일인 정체성은 지우고 이탈리아인으로만 이해하고 싶어 하셨다고 했다. 얼마나 그 나라에 대한 기억이 고통스러우면 그럴까? 이런 것 또한 들어본 적 없는 이야기라 생각했다.

나도 이야기를 꺼냈다. 백인들은 니하오가 왜 인종차별인지 모르는 거 같다는 이야기. 내가 한국인이라고 나를 소개하면 사람들은 항상 그저 김정은을 헐뜯고 비웃고 싶어 한다는 이야기. 이제는 아무도 통일에 대해 이야기하는 사람이 없어서 통일이 안 될것 같다는 이야기. 그들은 내 이야기들을 잘 들어주었다.

 

이 대화를 하며, 나는 이 이야기를 써야겠다고 생각했다. 아시안 여성의 정체성을 가지고 유럽에 산다는 건 자주 편견과 오해 또는 무례함에 익숙해져야 하는 일이기도 하다. 사람은 자기가 아는 만큼 보인다는데, 줄곧 내가 받은 차별 혹은 나와 비슷한 형태의 이야기에만 익숙해져 있었다. 처음 듣는 차별의 형태가, 세상이 얼마나 굴곡지고 엮여있는지 다시 인식하게 했다. 독일에 오면 독일인들만 만날 줄 알았는데 정작 와보니 세상에 얼마나 혼혈이 많은지, Where are you from이라는 질문에 깔끔하게 대답할 수 없는 사람이 얼마나 많은지 보았던 것처럼. 세상에 수많은 순혈 싸움이 얼마나 의미 없는지 느꼈던 것처럼. 내가 살고 있는 땅이 어떤 이야기들로 겹쳐 있는지 조금이나마 들여다 본 것 같았다. 결국은 모든 사람들이 타인에 의해 제대로 이해받고 싶어한다는 생각도 들었다.

 

우리는 서로에게 물어봤다. 만약 너가 나라를 고를 수 있다면 어디를 고를 것 같아? 베이자는 날씨 좋은 호주, 레오는 이민자에게 개방적이고 아름다운 자연이 있는 캐나다, 나는 유럽의 강대국이자 복지 좋은 독일을 말했다. 우리가 현재 무엇을 바라는지 얼핏 보이기도 했다. 세상 사람들이 스스로 나라를 정할 수 있으면 무슨 일이 일어날까? 재밌는 질문이었다.

 

우리 셋은 모두 다음날 일찍 일어나야 하는 사람들이었다. 와인 한병이 끝난 기점으로 우리는 겨우 이야기를 멈춰보기로 했다. 이제는 잠에 들어야 했다. 부엌의 불을 끄고 나오며 베이자가 Thanks for listening(들어줘서 고마워)를 나지막히 말했다. 레오는 Thanks for sharing(나눠줘서 고마워)로 답했다. 나도 곧이어 Thanks for being here(여기 있어줘서 고마워)를 말하며 1층의 내방으로, 레오는 2층의 그의 방으로, 베이자는 3층의 자기 방으로 돌아갔다.

다음날 아침, 나는 숙취와 피곤함에 기꺼이 학원에 가길 포기하고 푹 잤다. 그러고 오후쯤 부엌에서 셋이 다시 만났는데 레오도 학교에 가지 않았고, 베이자도 직장에 아프다고 하고 안갔다고 했다. 셋이 껄껄 웃으면서 담배를 피웠다.

 

 

 

 

 

 

 

 

 

 

 

 

 

 

 

 

 

부엌에서 스도쿠 하고, 노래 부르고, 주인 없는 고양이를 안아주면 시간이 금방 흐른다

언젠가 꼭 부엌의 입장으로 소설을 써보고 싶다는 생각을 했다

 

 

 

 

가끔 날씨가 좋으면 밖에 나가 앉아 있는다

댓글 7
  • 2023-05-17 09:24

    와~ 너무 재밌어요^^세계사가 꼬꼬무로 이어지는 이야기라니ㅎㅎ 현민의 독국유학기만의 매력!!

    ‘결국 쿨하지 못했던 오래된 사람’은 되지 말아야겠다는 다짐을 해봅니다ㅎㅎ

    다양성들이 모여 쏟아내는 이야기를, 그 숙소의 부엌은 다 듣고 있겠군요. 부엌의 시점으로 그려낸 소설이라니ㅎㅎ 응원합니다!!

  • 2023-05-17 09:45

    마지막에 빵 터졌음. 맞아, 그래야 하쥐, 피곤하면 땡땡이!!

  • 2023-05-17 09:59

    부엌의 입장에서 쓰는 소설 재밌겠다 ㅎ
    나는 고양이로소이다 처럼^^
    쿨해보이고 싶었지만 결국 쿨하지못한 오래된 사람
    우리딸이 나한테 하는 말 같음 ㅋㅋ

  • 2023-05-17 10:52

    부엌에서의 사진들이 평온하네요~ 부엌이 가지고 있는 뭔가가 있어요! ^^
    예전에 본의 역사박물관 가서 놀랐었는데.. 기억은 희미하지만 첫 시작이 가스실이었던 것 같아요. 이전의 화려했던 역사는 없더라고요. 그들이 홀로코스트에 대해 반성하는 태도는 당연하지만 옆 나라를 보면 쉬운 일도 아닌 것 같아요.
    현민의 다음 글 벌써부터 기다려진다는…ㅋ

  • 2023-05-17 11:43

    "Thanks for listening(들어줘서 고마워)" 여러 친구들의 어려움에 대한 호소를 들으며 해 줄 말이 없고, 뾰족한 수도 없어 답답했는데, '들어주는' 것이 최선의 방법이 아닐까 싶네! 이런 글 나눠줘서 고맙고^^

  • 2023-05-17 13:39

    ㅎㅎㅎ 역사책으로 읽던 아니 잘 몰랐던 이야기도 부엌의 수다로 이어지니 너무 재미있네요~
    부엌이 각종 다양한 일들이 마구 발생하는 현장이네요~ㅎㅎㅎ

  • 2023-05-17 16:57

    와우~그 부엌 가보고 싶네~ 더구나 영어로 이 모든 이야기를? 와 영알못애게는 상상초월의 현장~~ㅋㅋㅋㅋ

현민의 독국유학기
이 모든 지리적 사실   네덜란드는 독일의 북쪽에 맞닿아있다. 세 명의 친구가 살고 있지만 한 번도 가본 적은 없었다. 지난 겨울 니키가 운전해서 네덜란드에 간다고 하길래, 그럼 가는 길에 친구가 사는 도시에 내려 달라고 부탁했다. 서경은 독일과 국경이 맞닿아있는 아른헴에서 공부한다. 모부님께 네덜란드 유학을 가고 싶다고 말했을 때 그들은 성매매와 마약 합법 때문에 꼭 그곳이어야겠냐고 물었다. 아이러니하게도 네덜란드에서는 정치적 혼란시기였던 19세기 마땅한 보수정당이 없어 동성결혼, 성매매와 마약 합법 등을 실행하게 되었다고 한다.   네덜란드의 흔한 커피샵 커피도 파는데 대마초도 판다. 일상적으로 사람들이 와서 대마초를 피우는 곳이다.   서경은 영어권 국가 중 네덜란드가 가장 물가가 싼 편이라 네덜란드 대학에 지원했다. 네덜란드에는 더치Dutch라고 불리는 고유어가 있음에도 영어권 국가라고 불릴 만큼 국민 90%는 영어를 능숙하게 구사한다. 독일인들은 네덜란드어가 독일어에서 파생한 괴상한 사투리라고 말하는데, 네덜란드에 와보니 더치는 생각보다 더 고유했다. 영국과 미국에 비교하면 굉장히 싼 유학비지만, 독일과 비교했을 땐 비싼 생활비 그리고 주거난 때문에 아직도 에어비엔비에서 산다는 서경의 학교 동기들의 이야기를 들으며 이 나라에 이주민 비율이 큰 이유가 궁금해졌다. 헤이그에서 공부하는 지연은 현재 네덜란드가 보수집권이지만 여성·퀴어 인권은 너무 당연해서 보수당도 건드리지 않는다고 말해주었다. 그 대신 보수당은 이주민을 규제하고 싶어한다고 했다.   일 년 만에 만난 서경과 새벽까지 조잘대며 회포를 풀고, 아침에 일어나 밥을 짓기 시작했다. 서경은 내 음식을 좋아한다. 그래서 집에서 마른 미역과 들깻가루,...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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현민
2024.04.17 | 조회 203
현민의 독국유학기
글쓴이 현민 친구들과 함께 동천동의 책방 우주소년을 운영했습니다. 서점을 운영하며 스쿨미투집 <밀려오는 파도 막을수는 없다> 1권과 같은 이름의 공동체 탐구집 2권을 만들었습니다. 지금은 독일에 삽니다.             입원기   볼더링을 하다가 떨어졌다. 다음 날 응급실에서 하루종일 엑스레이를 몇 번 찍은 후 의사로부터 인대 파열과 발목 바깥쪽 뼈가 부러졌다는 말을 전해들었다. 뼈를 재위치하기 위해선 다리에 못을 박는 수술을 해야 했다. 살면서 병원에 가는 일이 잘 없는게 자랑이었는데, 갑작스럽게 입원을 하게 되었다. 가장 먼저 한 것은 보험 확인이었다. 모든 사람들이 내게 보험은 있냐고 물었다. 최근 나는 독일에서 새 비자를 받았는데, 그때 독일 사보험을 등록해놓았다. 지난 한 해 동안은 한국에서 가장 싼 여행보험을 들어놓았다. 그동안 한 번도 병원에 갈 일이 없었는데, 독일 보험을 들어놓고 사고를 당해서 다행이었다.   입원하면 금방 수술을 받을 수 있을 줄 알았는데, 발목이 너무 부으면 수술 후 봉합이 어려워 붓기가 가라 앉을 때까지 기다려야 했다. 병원에서 아침 점심 저녁 밤으로 진통제를 받았는데, 살면서 그렇게 많은 약을 먹어본 적이 없었다. 빈속에 약을 먹어 배가 쓰리면, 그것을 방지하는 약을 먹는 식이었다. 서양 의학이란 이런 것이구나 체감하며 먹으라는 약을 먹었다. 팔에 주사바늘을 꽂고 이름 모르는 주사들을 여러 번 맞으니 몸에 멍 자국이 금방 늘었다. 매일 아침 집단으로 의사 무리가 찾아와 오늘도 수술은 못 할 것 같다고 전했다.   예상보다...
글쓴이 현민 친구들과 함께 동천동의 책방 우주소년을 운영했습니다. 서점을 운영하며 스쿨미투집 <밀려오는 파도 막을수는 없다> 1권과 같은 이름의 공동체 탐구집 2권을 만들었습니다. 지금은 독일에 삽니다.             입원기   볼더링을 하다가 떨어졌다. 다음 날 응급실에서 하루종일 엑스레이를 몇 번 찍은 후 의사로부터 인대 파열과 발목 바깥쪽 뼈가 부러졌다는 말을 전해들었다. 뼈를 재위치하기 위해선 다리에 못을 박는 수술을 해야 했다. 살면서 병원에 가는 일이 잘 없는게 자랑이었는데, 갑작스럽게 입원을 하게 되었다. 가장 먼저 한 것은 보험 확인이었다. 모든 사람들이 내게 보험은 있냐고 물었다. 최근 나는 독일에서 새 비자를 받았는데, 그때 독일 사보험을 등록해놓았다. 지난 한 해 동안은 한국에서 가장 싼 여행보험을 들어놓았다. 그동안 한 번도 병원에 갈 일이 없었는데, 독일 보험을 들어놓고 사고를 당해서 다행이었다.   입원하면 금방 수술을 받을 수 있을 줄 알았는데, 발목이 너무 부으면 수술 후 봉합이 어려워 붓기가 가라 앉을 때까지 기다려야 했다. 병원에서 아침 점심 저녁 밤으로 진통제를 받았는데, 살면서 그렇게 많은 약을 먹어본 적이 없었다. 빈속에 약을 먹어 배가 쓰리면, 그것을 방지하는 약을 먹는 식이었다. 서양 의학이란 이런 것이구나 체감하며 먹으라는 약을 먹었다. 팔에 주사바늘을 꽂고 이름 모르는 주사들을 여러 번 맞으니 몸에 멍 자국이 금방 늘었다. 매일 아침 집단으로 의사 무리가 찾아와 오늘도 수술은 못 할 것 같다고 전했다.   예상보다...
현민
2024.03.16 | 조회 257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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글쓴이 현민 친구들과 함께 동천동의 책방 우주소년을 운영했습니다. 서점을 운영하며 스쿨미투집 <밀려오는 파도 막을수는 없다> 1권과 같은 이름의 공동체 탐구집 2권을 만들었습니다. 지금은 독일에 삽니다.             유학점검기   독일에는 아우스빌둥(Ausbildung)이라는, 직장과 직업학교를 번갈아가며 배우는 제도가 있다. 영어로는 Apprenticeship이고 한국어로는 직업교육이라고 말할 수 있을 것 같다. 회사에서 실질적인 교육을 받고 직업학교에서 이론적인 것을 배운다. 고등학교 졸업 후 대학에 가지 않고 아우스빌둥을 하는 경우도 줄곧 있다. 독일의 오기 전 나의 계획은 일년 간 어학연수를 하고 출판사에서 아우스빌둥을 하는 것이었다. 최근 나는 출판사들에 이력서와 커버레터를 넣고 인터뷰를 다닌다. 자본주의의 빈틈에 껴서 살다가 제발 일 시켜달라고 스스로를 둘도 없는 인재처럼 소개하려니 어색하다. 독일에 와서 변한 것이 많다. 코코넛밀크로 맛있는 커리를 만들 수 있고, 알리오 올리오를 먹고, 핸드크림을 바르고, 외식은 잘 하지 않는다. 전에는 곁에 없으면 안 될 것 같았던 친구들과는 어쩌다 한번 연락한다. 그리고 새로운 친구들과 익숙한 공간들이 생겼다. 한 해 동안 어떻게 살았는지 돌아보는 마음으로 유학점검기를 쓴다. 나를 아시는 분들께는 그래서 얘가 지금 독일에서 뭐하며 사는건지 머릿속에 그림을 그려보실 수 있을 것 같다.   독일의 여름을 믿지 마세요   2022년 6월부터 9월 독일 지인 댁에서 아름다운 여름을 보냈다. 그즈음 나는 이러다간 익숙함에 속아 한국을 떠나지 못할 것 같다는 생각을 하고 있었다. 여름이 지난 뒤, 나는 독일에 와서 살아보겠다는 결심을...
글쓴이 현민 친구들과 함께 동천동의 책방 우주소년을 운영했습니다. 서점을 운영하며 스쿨미투집 <밀려오는 파도 막을수는 없다> 1권과 같은 이름의 공동체 탐구집 2권을 만들었습니다. 지금은 독일에 삽니다.             유학점검기   독일에는 아우스빌둥(Ausbildung)이라는, 직장과 직업학교를 번갈아가며 배우는 제도가 있다. 영어로는 Apprenticeship이고 한국어로는 직업교육이라고 말할 수 있을 것 같다. 회사에서 실질적인 교육을 받고 직업학교에서 이론적인 것을 배운다. 고등학교 졸업 후 대학에 가지 않고 아우스빌둥을 하는 경우도 줄곧 있다. 독일의 오기 전 나의 계획은 일년 간 어학연수를 하고 출판사에서 아우스빌둥을 하는 것이었다. 최근 나는 출판사들에 이력서와 커버레터를 넣고 인터뷰를 다닌다. 자본주의의 빈틈에 껴서 살다가 제발 일 시켜달라고 스스로를 둘도 없는 인재처럼 소개하려니 어색하다. 독일에 와서 변한 것이 많다. 코코넛밀크로 맛있는 커리를 만들 수 있고, 알리오 올리오를 먹고, 핸드크림을 바르고, 외식은 잘 하지 않는다. 전에는 곁에 없으면 안 될 것 같았던 친구들과는 어쩌다 한번 연락한다. 그리고 새로운 친구들과 익숙한 공간들이 생겼다. 한 해 동안 어떻게 살았는지 돌아보는 마음으로 유학점검기를 쓴다. 나를 아시는 분들께는 그래서 얘가 지금 독일에서 뭐하며 사는건지 머릿속에 그림을 그려보실 수 있을 것 같다.   독일의 여름을 믿지 마세요   2022년 6월부터 9월 독일 지인 댁에서 아름다운 여름을 보냈다. 그즈음 나는 이러다간 익숙함에 속아 한국을 떠나지 못할 것 같다는 생각을 하고 있었다. 여름이 지난 뒤, 나는 독일에 와서 살아보겠다는 결심을...
현민
2024.02.16 | 조회 285
현민의 독국유학기
    글쓴이 현민 친구들과 함께 동천동의 책방 우주소년을 운영했습니다. 서점을 운영하며 스쿨미투집 <밀려오는 파도 막을수는 없다> 1권과 같은 이름의 공동체 탐구집 2권을 만들었습니다. 지금은 독일에 삽니다.             미친 인간들의 안전한 파티   나의 셰어하우스에는 풀타임 직장인이 두 명 있다. 그들은 아침부터 오후 5시까지 일한다. 그들은 거의 홈 오피스를 해서 집에서 자주 보이지만 늘 지쳐있고, 하루만 사무실에 다녀오는 날에는 진을 다 빼고 온다. ‘일하기’는 중요하지만 앞으로 남은 모든 날을 이렇게 하루하루 진을 빼며 사는 것인가 가늠해 보기 시작하면 주 4일제 실현이 간절해진다. 이들이 일만큼 열심히 하는 것이 있다면 저녁에 부엌에 둘러앉아 담배를 물고 진토닉을 마시기 시작하다가, 주방에 있는 큰 스피커에 노래를 연결해 테크노 음악을 틀기 시작한 후 자정쯤 파티에 가거나, 지하실에 내려가 디제잉을 하며 파티를 벌이는 것이 있다. 매주 서너 병의 진을 사와 자신들이 다 마신 사실을 잊고 그 술들이 다 어디 갔냐고 묻는 사람들. 이들의 특징으로는 파티와 술과 담배 따위에 매우 후하다는 점이 있다. 자신이 마셔 마땅하다고 생각하는 이들, 함께 마실 사람이 항상 필요한 이들. 제안하면 거절하지 않는 사람으로서 나는 이들과 잦은 파티를 가진다. 우리는 종종 방탕히 노는 시간으로부터 삶의 아름다움을 본다. 그럴 때가 오면 가끔은 해야 할 일을 못 해도, 밥을 못 먹어도 즐겨 마땅했다는 확신이 든다.   독일 클럽에는 무엇이 있는가   나의...
    글쓴이 현민 친구들과 함께 동천동의 책방 우주소년을 운영했습니다. 서점을 운영하며 스쿨미투집 <밀려오는 파도 막을수는 없다> 1권과 같은 이름의 공동체 탐구집 2권을 만들었습니다. 지금은 독일에 삽니다.             미친 인간들의 안전한 파티   나의 셰어하우스에는 풀타임 직장인이 두 명 있다. 그들은 아침부터 오후 5시까지 일한다. 그들은 거의 홈 오피스를 해서 집에서 자주 보이지만 늘 지쳐있고, 하루만 사무실에 다녀오는 날에는 진을 다 빼고 온다. ‘일하기’는 중요하지만 앞으로 남은 모든 날을 이렇게 하루하루 진을 빼며 사는 것인가 가늠해 보기 시작하면 주 4일제 실현이 간절해진다. 이들이 일만큼 열심히 하는 것이 있다면 저녁에 부엌에 둘러앉아 담배를 물고 진토닉을 마시기 시작하다가, 주방에 있는 큰 스피커에 노래를 연결해 테크노 음악을 틀기 시작한 후 자정쯤 파티에 가거나, 지하실에 내려가 디제잉을 하며 파티를 벌이는 것이 있다. 매주 서너 병의 진을 사와 자신들이 다 마신 사실을 잊고 그 술들이 다 어디 갔냐고 묻는 사람들. 이들의 특징으로는 파티와 술과 담배 따위에 매우 후하다는 점이 있다. 자신이 마셔 마땅하다고 생각하는 이들, 함께 마실 사람이 항상 필요한 이들. 제안하면 거절하지 않는 사람으로서 나는 이들과 잦은 파티를 가진다. 우리는 종종 방탕히 노는 시간으로부터 삶의 아름다움을 본다. 그럴 때가 오면 가끔은 해야 할 일을 못 해도, 밥을 못 먹어도 즐겨 마땅했다는 확신이 든다.   독일 클럽에는 무엇이 있는가   나의...
현민
2023.11.21 | 조회 348
현민의 독국유학기
          글쓴이 현민 친구들과 함께 동천동의 책방 우주소년을 운영했습니다. 서점을 운영하며 스쿨미투집 <밀려오는 파도 막을수는 없다> 1권과 같은 이름의 공동체 탐구집 2권을 만들었습니다. 지금은 독일에 삽니다.             Heimat   정민   최근엔 정민이 왔다 갔다. 그 애는 나의 바로 밑 동생이다. 세자매 중 나와 정민은 극도로 상극의 삶을 산다. 그 애는 중학생 때부터 독서실에서 공부를 하느라 12시 이전에 집에 들어온 적이 없다면 나는 친구들과 노느라 12시 전에 집에 들어간 적이 없던 것 같다. 그 애는 꿈이 없는 게 불안해서 공부를 했다면 나는 꿈 같은 거 생길 수 있는 사회냐고 화를 내는 편이었다. 우리가 삶을 사는 모습은 너무나도 다르지만 그 애는 내 인생에서 가장 웃긴 사람 중 하나다. 우리는 서로에게 인생 최고의 개그맨이다. 나의 지겨운 가정사를 가장 잘 아는 사람, 그것으로 극도의 유머를 만들 수 있는 사람은 그 애가 유일하다.   한 달이 지나고 공항에 그 애를 데려다주는 길에는 기분이 싱숭생숭했다. 독일에서 만나는 외국인들 중에서도 먼 나라에서 온 편인 나는 그 거리감을 대체로 즐겼다. 하지만 비행기에 앉아서 하루쯤 지나면 도착하는 게 한국이라니 문득 너무 가깝게 느껴졌다. 그래서 아무 소리나 시작했다. 나 만약에 한국에 돌아가야 되면 어떡하지? 진짜 돌아가야 되면 거기서 뭘 할 수 있지? 정민은 말했다. 왜 자꾸 한국에 돌아갈 생각을 해? 언니...
          글쓴이 현민 친구들과 함께 동천동의 책방 우주소년을 운영했습니다. 서점을 운영하며 스쿨미투집 <밀려오는 파도 막을수는 없다> 1권과 같은 이름의 공동체 탐구집 2권을 만들었습니다. 지금은 독일에 삽니다.             Heimat   정민   최근엔 정민이 왔다 갔다. 그 애는 나의 바로 밑 동생이다. 세자매 중 나와 정민은 극도로 상극의 삶을 산다. 그 애는 중학생 때부터 독서실에서 공부를 하느라 12시 이전에 집에 들어온 적이 없다면 나는 친구들과 노느라 12시 전에 집에 들어간 적이 없던 것 같다. 그 애는 꿈이 없는 게 불안해서 공부를 했다면 나는 꿈 같은 거 생길 수 있는 사회냐고 화를 내는 편이었다. 우리가 삶을 사는 모습은 너무나도 다르지만 그 애는 내 인생에서 가장 웃긴 사람 중 하나다. 우리는 서로에게 인생 최고의 개그맨이다. 나의 지겨운 가정사를 가장 잘 아는 사람, 그것으로 극도의 유머를 만들 수 있는 사람은 그 애가 유일하다.   한 달이 지나고 공항에 그 애를 데려다주는 길에는 기분이 싱숭생숭했다. 독일에서 만나는 외국인들 중에서도 먼 나라에서 온 편인 나는 그 거리감을 대체로 즐겼다. 하지만 비행기에 앉아서 하루쯤 지나면 도착하는 게 한국이라니 문득 너무 가깝게 느껴졌다. 그래서 아무 소리나 시작했다. 나 만약에 한국에 돌아가야 되면 어떡하지? 진짜 돌아가야 되면 거기서 뭘 할 수 있지? 정민은 말했다. 왜 자꾸 한국에 돌아갈 생각을 해? 언니...
현민
2023.09.19 | 조회 387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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