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함께라면2]<조지 오웰 뒤에서> 후기

겸목
2026-10-30 19:03
47

 

경화샘의 후기에서 그날 나눈 이야기들이 정리되어 있어, 나는 책을 읽는 동안 머릿속에 오래 남았던 내 친구 이야기를 해보려 한다. 아멜리아의 글에 나왔던 '평강공주' 또는 '무수리'인 내 친구. 나는 스물다섯에, 친구는 서른에 결혼을 했다. 우리는 대학시절 룸메이트였고, 일찍 결혼한 나와 달리 꽤 오래 짧은 연애를 하며 혼자 있는 친구의 모습이 걱정스러웠다. 지금 생각하면 '걱정도 팔자'인데, 내 결혼생활이 좋았던 것도 아닌데, 서른 가까이 혼자인 친구의 앞날을 나는 걱정했다. 그리고 서른쯤 친구는 "내가 해야 할 숙제를 미루고 있는 것 같아. 대입시험 같은 걸 봐야 하는데 미루고 있는 것 같아서, 이번에 해치우려 한다"고 말하며, 결혼했다. 사랑해서, 행복하려고.....이런 이유가 아니라 '해치워야 할 생애주기별 과제'를 더는 미루지 않겠다는 심정으로 친구는 결혼을 결심했다. 결혼식을 앞두고 친구 몇몇과 신랑감과 인사를 나누는 자리에서 우리는 그 남자가 내 친구의 결혼상대자로 적절한지, 성격과 능력을 요리조리 살펴봤다. 여기에도 두 사람 가운데 누가 더 좋아하는지, 이들의 연애는 어떠한지는 중요하지 않았다.

 

결혼 후 25년 동안 친구 부부는 아이 없이 산다. 남편이 자식을 갖길 원하지 않아, 친구도 받아들이기로 했다고 했다. 자식이 없어서인지 친구의 남편은 사업을 하고 공부를 하며 자신의 '지향/가치관/욕망/성취감'을 추구하고 있고, 친구는 그 뒷바라지인지, 그 배우자로서 해야 할 일인지 25년 내내 일을 하며 돈을 벌고 있다. 남편에 비해 친구는 '하고 싶은 것을 말하지 않는다'. 그애라고 왜 그런 게 없겠냐마는, 누울 자리를 보고 다리를 뻗으라고, 한 사람이 자신의 욕망을 드러내고 있으니 한 사람은 생활을 이어가야 하고, 그러다 보면 자신의 욕망은 뒤로 물러나 있다. 이걸 친구는 아일린처럼 잘 해내고 있다. 신세 한탄을 하거나, 남편을 미워하지 않고, 자상하고 사려 깊은 배우자로서 해내고 있다. 그 애의 오지랖은 남편뿐 아니라 남동생, 조카, 직장 동료, 그리고 친구인 나에게까지 다정하게 영향을 미치고 있다. 무얼 하겠다고 나서지 않지만, 늘 뭔가를 하고 있고, 모두가 고마워하는 일을 해준다. 보기 드물게 '고상한' 사람이다. 이런 친구의 삶의 태도를 삐딱하게 봐왔던 시기도 있었고, 연민의 마음을 가졌던 적도 있고, '좋은 삶'이라는 생각했던 적도 있다. 이걸 단순히 '수동/능동'으로 칼같이 자를 수 없는 상황이다.

 

나의 결혼생활도 남편과의 관계에서 '의존/독립'과 '수동/능동' 사이를 오가고 있고, 가부장제에 대한 '불쾌함/분노/우울/공모'가 뒤섞여 있다. 서른 가까이 된 친구가 결혼을 해야 한다고 생각했던 것처럼 나에게도 생애주기별 '사회적 각본'이 작동하고 있었고, 10대와 20대를 통과하며 숱하게 봐왔던 로맨틱코미디 영화와 드라마에서 '연애'는 너무 달콤하게 그려졌다. 결혼을 할지는 모르겠지만, 알콩달콩하고 티격태격하는 사랑싸움을 해봐야 할 것 같은 동경을 가부장제의 강요라고만은 쓸 수 없을 것 같다. 그리고 결혼 이후엔 늘 바빴고, 해야 할 과제가 줄을 섰고, 어떤 일이 나에게 펼쳐지고 있는지 헤아리기 힘든 트랙에 올라탄 느낌이었다. '이런 게 인생인가?' 싶고, '이런 게 인생이지!' 싶은 날들이다. 

 

세미나에서 우리는 "도대체 왜 아일린은 그런 선택을?" 할 수밖에 없었을까? 안타까워하고 답답해하고 이해하고 싶어하고, 이해할 수 없어 미궁에 빠졌다. 아일린처럼 똑똑하고 매력적이며 열정적인 여자가 왜 남편의 구질구질한 연애사를 묵인하는 방식으로 방치했을까? 수치스럽고 모욕스러워서 침묵할 수밖에 없었음을. 그래서 말할 수 없는 많은 것들이 늘어나고, 불합리한 일들이 아무렇지 않게 자행되게 되는 원리. 시간이 많이 지났지만 이 원리에 나도 얽매어 있어 생각은 더 복잡해진다. 

 

10대와 20대에 다른 드라마와 영화가 유행했다면, 나는 조금은 다른 생각과 생애주기를 살아가게 되지 않았을까 하는 생각이 든다. 다른 모델이 너무 없었구나! 그래서 다른 선택을 해볼 엄두가 나지 않았구나 싶다. 지금은 좀 달라졌을까? 우리 집 딸들은 나와 같은 결혼과 출산을 하겠다고 하지 않는다. 딸들에게는 다른 모델이 있었나? 몇몇 드라마와 영화가 떠오르지만, 어느새 사랑이나 연애, 결혼이라는 주제는 '식상한 소재'가 되었고, 우리는 '회귀/빙의/판타지/호러/스릴러' 장르를 더 많이 소비한다. '다른 사랑/연애/결혼/가족/유사가족'의 사례들이 많아져야 한다는 생각을 해본다. 

 

능동/수동을 딱 잘라 말할 수 없는 모호함과 복잡함에 주목하는 건 중요하다. 페미니즘세미나에서 읽은 캐시 박 홍의 <마이너 필링스>가 그런 감정에 대해 서술하고 있다. 이민자 2세 여성이 말하는 '곤란함'. 언어가 부족해서 열등한 사람 취급을 당하고, 그런 취급을 받지 않기 위해 스스로를 더 검열하게 되고, 그래서 강박이 생기고, 그걸 해내지 못할 때는 자기혐오가 발동돼서 스스로를 미워하게 되는 '이상한 구조'. 이 구조 속에 빠지면 헤어 나올 길이 없다. 이걸 '소수자의 감정'이라 설명해준다. 이민자가 아니지만, 이걸 여성으로 바꾸어 놓아도 전혀 문제가 되지 않는다. 이런 구조에 빠지지 않기 위한 방법을 강구하는 것! 여기에 대한 단상을 주는 책이 오드리 로드다. 이렇게 책들은 연결되고, 삶들도 연결된다. 어떻게 풀어가야 할지 길이 보이지 않는 모호함과 막막함이 있지만, 이 모호함과 막막함이 내게 '최초'로 발생한 일이 아니라는 것! 이미 누군가는 이런 현실과 부딪쳐 다른 길을 내고 있다는 걸 기억해야겠다. 

 

 

 

 

댓글 1
  • 2026-10-31 11:39

    네, 책들이 이렇게 연결되네요.
    점점 더 구조에 종속되기보다 정신 차릴 수 있는 환경과 정보들이 많아지네요.
    30년만에 많이 달라졌다는 생각이 들고 어떻게 변해갈지 기대가 되네요.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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