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 번호 | 제목 | 작성자 | 작성일 | 조회 |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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피에르 아도를 따라 꼼꼼히 읽는 <명상록>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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자작나무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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2026.09.14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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815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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자작나무 | 2026.09.14 | 815 | |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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N
피에르 아도를 따라 꼼꼼히 읽는 <명상록>- 3회차 메모/질문
(4)
가마솥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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2026.10.13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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조회 20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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가마솥 | 2026.10.13 | 20 |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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피에르 아도를 따라 꼼꼼히 읽는 <명상록>- 2회차 메모/질문
(4)
가마솥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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2026.10.07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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조회 73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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가마솥 | 2026.10.07 | 73 |
| 246 |
피에르 아도를 따라 꼼꼼히 읽는 <명상록>- 1회차 메모/질문
(4)
가마솥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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2026.09.30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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조회 105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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가마솥 | 2026.09.30 | 105 |
| 245 |
삶의 양식으로서의 철학] 명상록을 읽고 <후기>
(1)
새은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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2026.09.18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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조회 133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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새은 | 2026.09.18 | 133 |
| 244 |
[삶의 양식으로서의 철학] 명상록 마지막회차 메모
(5)
가마솥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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2026.09.15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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조회 118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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가마솥 | 2026.09.15 | 118 |
| 243 |
[삶의 양식으로서의 철학] 명상록 1회차 메모
(4)
가마솥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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2026.09.08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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조회 120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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가마솥 | 2026.09.08 | 120 |
| 242 |
[삶의 양식으로서의 철학]세네카의 편지글을 읽고 <후기>
(3)
가마솥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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2026.09.04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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조회 138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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가마솥 | 2026.09.04 | 138 |
| 241 |
[삶의 양식으로서의 철학]세네카의 편지글 19~22권 메모
(5)
가마솥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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2026.09.01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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조회 94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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가마솥 | 2026.09.01 | 94 |
| 240 |
[삶의 양식으로서의 철학]세네카의 편지글 15,16,17~18권 메모
(6)
가마솥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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2026.08.26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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조회 123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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가마솥 | 2026.08.26 | 123 |
| 239 |
[삶의 양식으로서의 철학]세네카의 편지글 9, 10, 14권 메모
(4)
자작나무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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2026.08.18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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조회 114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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자작나무 | 2026.08.18 | 114 |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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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삶의 양식으로서의 철학]세네카의 편지글 7, 8, 9편 메모
(5)
자작나무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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2026.08.12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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조회 134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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자작나무 | 2026.08.12 | 134 |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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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삶의 양식으로서의 철학]세네카의 편지글 4, 5, 6편 메모
(4)
자작나무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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2026.08.04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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조회 159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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자작나무 | 2026.08.04 | 159 |

메모1)
p.183. "우리는 현재의 일 혹은 오래전에 이미 일어난 일이 앞으로 불러올 결과를 두고 안달복달하기도 하고, 앞으로 무슨 일이 있을까 봐 두려워하기도 한다."
p.183."현재만 우리의 능력에 달렸다. 우리는 현재만 산다는 단순한 이유에서다. 현재를 의식한다는 것은 우리의 자유를 의식한다는 것이다."
과거·미래와 구분해 우리가 '통제할 수 있는' 현재의 경계를 설정하는 수련은 우리에게 닥친 시련을 견딜만한 작은 크기로 줄이는 효과를 가져다준다고 한다. 이 책의 저자 피에르 아도는 마르쿠스의 3가지 수련 주제가 '현재'와 관련 있음을 강조한다는 점에서 에픽테토스와 차별화된다'고 하는데, 아우렐리우스의 진전된 부분이라고 볼 수 있나요? 왜냐하면, 현재만을 '우리에게 달린 것'으로 인식하게 하려는 에픽테토스의 생각과 유사한 듯 합니다.
메모2)
p.188. "스토아철학이 정의하는 현재는 베르그송이 <사유와 운동>에서 정의하는 현재와 상당히 비슷하다. 베르그송은 완전히 추상에 지나지 않는 수학적 순간으로서의 현재와 어느 정도 두께를 가진, 우리의 주의를 다소간 한정하는 지속시간으로서의 현재를 대립적으로 파악했다."
비슷하지만 다른 듯하다. AI에게 자세히 물었다.
A. 스토아 철학의 현재: "한계 지어진 찰나 (The Liminal Instant)"
스토아 철학, 특히 크리시포스에서 마르쿠스 아우렐리우스로 이어지는 후기 스토아 철학에서 현재는 과거와 미래라는 거대한 시간 사이에서 무한히 분할되는 '점(point)'이자 '칼날' 같은 순간입니다. 이들은 현재를 두 가지 성격으로 정의합니다.
• 객관적·우주적 관점 (무한 분할성): 스토아주의자들은 객관적 시간 속에서 '현재'를 고정된 덩어리로 잡을 수 없다고 봅니다. 현재를 아무리 잘게 쪼개도 그 안에는 이미 지나간 과거와 다가올 미래가 섞여 있기 때문입니다. 따라서 우주적 차원에서 현재는 끊임없이 소멸하는 '무한히 얇은 단면'에 가깝습니다.
• 실존적·실천적 관점 (의식적 한정): 하지만 실천을 중시하는 스토아 철학은 이 찰나를 인간이 '유일하게 소유하고 통제할 수 있는 실존적 도구'로 재정의합니다. 과거는 이미 지나가서 바꿀 수 없고, 미래는 아직 오지 않아 내 손에 없습니다. 오직 지금 이 순간(hic et nunc)만이 내가 이성적으로 판단하고 행동할 수 있는 유일한 시간입니다.
💡 스토아의 핵심: 스토아 철학은 고통과 불안에서 벗어나기 위해 과거의 후회와 미래의 불안을 의도적으로 잘라내고 현재를 '고립'시킵니다. 현재는 오직 지금 당장의 표상, 지금 당장의 행동만을 담는 '제한된 공간'입니다.
B. 앙리 베르그송의 현재: "과거를 살아내는 지속 (Le Durée)"
앙리 베르그송은 시간을 시계 바늘처럼 불연속적인 점들의 나열로 보는 수학적·과학적 시간관을 비판합니다. 그는 실제 우리가 경험하는 진짜 시간인 '지속(durée)'의 개념을 통해 현재를 완전히 다르게 정의합니다. 베르그송에게 현재는 고립된 점이 아니라 두께를 가진 멜로디와 같습니다.
• 과거의 보존으로서의 현재: 베르그송은 현재를 과거와 단절된 찰나로 보지 않습니다. 그에게 과거는 사라지는 것이 아니라 의식 속에 고스란히 저장(기억)되어 현재로 굴러 내려옵니다. 눈사람을 굴릴 때 눈덩이가 커지듯, 현재는 지금까지 살아온 모든 과거의 무게를 축적하고 있는 상태입니다. 즉, "현재는 과거가 연장된 것"입니다.
• 미래를 향해 열린 창조적 행동: 그렇다면 현재는 무엇일까요? 베르그송은 현재를 "과거가 미래를 향해 전진하며 물질과 부딪히는 '행동의 꼭짓점'"으로 정의합니다. 우리의 몸과 감각은 현재에 위치하며, 기억 속에 저장된 과거를 끊임없이 끄집어내어 '지금 당장 신체적으로 어떻게 행동할 것인가'를 결정합니다.
💡 베르그송의 핵심: 베르그송에게 현재는 칼로 자른 듯한 단면이 아닙니다. 음악의 한 음이 앞의 음을 품고 뒤의 음으로 이어지듯, 과거의 기억이 미래의 창조적 행동으로 이행하는 유기적인 흐름의 연속체입니다.
결론적으로, 두 철학 모두 인간의 '행동'을 위해 현재를 강조했다는 공통점이 있습니다. 하지만 스토아 철학은 삶의 거센 파도에 휩쓸리지 않기 위해 현재라는 '단단한 디딤돌 하나' 위에 우뚝 서기를 권했다면, 베르그송은 삶이란 본래 멈출 수 없는 파도이므로 현재라는 '지속의 흐름' 속에 온몸을 맡기고 창조적으로 헤엄치기를 권했다고 볼 수 있습니다.
메모 3)
p.201. “사실 니체의 시각과 스토아주의의 시각 사이에는 깊은 골이 있다. 스토아주의의 '긍정'은 세계에 대한 합리적 동의인 반면, 니체가 말하는 디오니소스적 '긍정'은 생의 비합리성, 생의 맹목적인 가혹함, 선악을 넘어서는 힘의 의지까지도 긍정하는 것이다."
스토아주의에서는 인간이 느끼기에 혐오적일 수 있는 것도 '자연학적'인 세계의 자연스러운 일부(부수적인)라고 이야기합니다. - 섭리로써 정해진 필연적이고 파생적인 방식이거나/우연도 아니고 섭리가 직접 작용한 것도 아님(3).
니체가 말하는 디오니소스적 '긍정'은 무엇인가요? AI의 대답은
스토아 철학의 '자연 섭리에 대한 긍정(Amor Fati)'과 프리드리히 니체(Friedrich Nietzsche)의 '디오니소스적 긍정'은 둘에게 닥쳐오는 삶의 모든 운명을 회피하지 않고 전적으로 수용한다는 점에서 겉보기에 매우 유사해 보인다. 하지만, 니체는 세계를 지배하는 합리적인 이성이나 신의 섭리 따위는 존재하지 않는다고 봅니다. 니체에게 우주는 목적도 의미도 없는 '권력의지(Wille zur Macht)'의 무한한 충돌이자 혼돈(Chaos)입니다.
• 긍정의 대상: 어떤 초월적인 이성이나 의미가 없기 때문에 발생하는 삶의 잔인함, 허무함, 모순, 그리고 고통 그 자체입니다.
• 긍정의 방식 (창조와 예술적 축제): 니체의 '디오니소스적 긍정'은 단순히 운명을 받아들이는 수동적 태도가 아닙니다. 삶이 아무리 파괴적이고 고통스러울지라도, 심지어 동일한 고통이 영원히 반복된다 할지라도(영원회귀), "그것이 삶이었던가? 좋다! 그렇다면 다시 한번!"이라고 외치며 삶을 예술적으로 찬양하고 파괴 속에서 새로운 가치를 창조하는 '공격적이고 축제 같은 긍정'입니다.
• 궁극적 목적: 고통을 피해 도망치는 평온함이 아니라, 고통을 성장의 자양분으로 삼아 인간의 한계를 뛰어넘는 위버멘시(Übermensch, 초인)가 되는 것입니다.
메모 4)
P.243. ‘높은 곳에서 바라보기’를 통해서, “‘인간사는 크게 보면 아무것도 아니라고, 추하고 보잘 것 없으며 질리도록 반복된다’고 하는 (아우렐리우스의) 진술은 본인의 부정적 경험을 말하는 것이 아니다. 수련, 문학적 훈련에 해당한다”고 아도는 아우렐리우스의 명상록을 해석한다. 아도는 “이러한 진술은 고대 철학의 전통적인 주제를 그대로 가져온(표현한) 것인데, 이 모든 것에 아우렐리우스는 하나의 영감, 유일한 가치를 불어 넣는다”고 말하며, ‘인생에서 정의,진리,절제,용기보다 더 가치있는 것이 있는가?’(Ⅲ,6,1)라는 문장을 가져온다.
아도는 더 나아가, “이 유일한 초월적 가치 앞에서 인간사는 미미하기 짝이 없다. 그런 것은 광대한 우주 속의 점과 같다. 그 가치 앞에서도 위대할 수 있는 것은 도덕적 의도의 순수성뿐이다. 파스칼의 사상에서도 그러하듯이, 도덕적 선은 물리적 위대함을 무한히 초월한다”(P.244)고 말한다.
우주의 티끌같은 인간이 ‘자연의 섭리’대로 살 수 있으면, 우주와 버금가는 삶이라는 말인 듯 하다.
182.
"우리는 욕망의 규율을 통해 우주로 이루어진 '전체(All)'에 유익한 것만을 욕망해야 하는데, 그것이 바로 보편적 이성(Reason)이 원하는 바이기 때문이다. 또한, 의지와 충동의 규율을 통해 우리는 인류의 도시로 이루어진 '전체(Whole)'에 봉사하는 것만을 원해야 하는데, 그것이 바로 모든 인류에게 공통된 올바른 이성(right reason)이 원하는 바이기 때문이다"
여기서 첫째, 전체 우주에 유익한 것: 스토아 철학에서 우주는 살아있는 하나의 거대한 유기체이며, 완벽한 질서(보편적 이성)에 의해 움직인다. 따라서 '우주 전체에 유익한 것'은 자연의 섭리와 우주의 질서 그 자체를 뜻한다.
인간의 관점에서; 나에게 일어나는 일들(생로병사)은 내가 통제할 수 없는 우주의 필연적인 흐름이다. 이를 원망하거나 거부하지 않고, 우주라는 거대한 톱니바퀴가 돌아가기 위해 '꼭 필요한 일'로 수용하는 자세. 대자연의 법칙에 저항하지 않고 조화를 이루며 사는 것이다.
둘째, 도시 전체에 봉사하는것:
여기서 '도시(City)'는 단순히 서울 같은 행정구역이 아니라, '이성을 가진 모든 인류 공동체'를 뜻한다. 따라서 '도시 전체에 봉사하는 것'은 공동체의 안녕과 정의를 위해 내가 해야 할 사회적 의무를 의미한다.
내가 만나는 타인과 사회를 향해 '능동적'으로 정의와 선을 행하는 것이다.
183
"우리는 미래에 일어날 어떤 사건을 두려워한다.
우리는 바로 지금 여기에서 일어나고 있는 일에만 온전히 머무는 대신, 우리의 마음속 인상을 끊임없이 과거와 미래로 넘쳐흐르게 만든다. 다시 말해, 우리에게 달려 있지 않으며 따라서 (선악과 무관하여) '무분별한 것'을 향해 생각을 넘쳐흐르게 만드는 것이다."
우리는 '지금 이 순간'에 머무는 데 대신에, 자꾸 우리생각은 과거(후회)와 미래(걱정)로 넘쳐흐른다. 과거와 미래는 '우리에게 달려 있지 않은 것'이다. 과거와 미래를 잘라내고 현재만 남기면, 우리가 짊어져야 할 삶의 무게는 가벼워진다.
187.
"우리가 죽음의 관점에서 사물을 바라볼 때, 삶의 단 한 순간도 가볍게 흘려보내는 것은 불가능해진다. 만약 우리가 마르쿠스와 스토아주의자들처럼 도덕적 행동만이 유일한 선(Good)이라고 믿는다면, 우리는 바로 이 순간 우리의 사고방식과 행동 방식을 변화시켜야만 한다.
죽음에 대한 생각은 삶의 모든 현재 순간에 진지함, 무한한 가치을 부여한다. '삶의 모든 행동을 마치 마지막 행동인 것처럼 수행하라'는 말은, 어떤 의미에서는 그 순간 속에 일생 전체가 담기고 완성될 만큼, 커다란 강렬함과 사랑으로 현재의 순간을 살아가는 것을 의미한다.
대부분의 사람은 진정으로 살아있는 것이 아니다. 왜냐하면 그들은 현재에 살지 않고, 늘 자기 자신 바깥에 머물며, 소외된 채 과거와 미래에 의해 앞뒤로 끌려다니기 때문이다.
사람들은 현재야말로 자신이 진정으로 자기 자신일 수 있고 자유로울 수 있는 유일한 지점이라는 사실을 알지 못한다. 현재는 우리의 행동과 의식 덕분에, 우리에게 세계 전체(우주 전체)로 나아가는 길을 열어주는 유일한 지점이다."
죽음의 렌즈를 통해 삶의 재평가하고, 순간 속에 담기는 영원을 볼수있다.
우리는 육체적으로 숨을 쉰다고 해서 다 살아있는 것은 아니다. 우리의 마음이 지나간 일에 대한 후회와 미련(과거), 혹은 아직 오지 않은 일에 대한 불안과 기대(미래)에 가 있을 때, 우리는 정작 '지금 이 순간'의 삶을 놓치게 된다. 하지만 마음을 '지금, 여기'로 가져오는 순간, 내면의 자유를 얻을수 있고 깨어있을 수 있게 된다.
188. 베르그송의 지속 개념;스토아 철학에서 말하는 '현재'가 수학적인 0초의 찰나가 아니라 우리의 의식과 행동이 일어나는 '확장된 현재'임을 논증.
"엄밀한 의미에서의 '현재 시간'이란 존재하지 않는다. 오히려 그것은 확장된 의미의 시간(kata platos)로 일컬어지는 것이다...크리시포스는 오직 현재만이 [주체에게] '실제로 속해 있다'(히파르케인, hyparchein)고 말한다. 반면에 과거와 미래는 실현은 되어 있지만(히페스타나이, hyphestanai), '[주체에게] 전혀 실제로 속해 있는 것은 아니다.' 이는 오직 실제로 일어나는 서술어(속성)들만이 '실제로 속해 있다'고 말하는 것과 같다."
시간을 무한히 쪼개다 보면, 수학적인 '지금 이 순간'은 두께가 없는 선 (0초)과 같아서 , 순식간에 과거로 사라져 버린다. 그렇기에 크리시포스는 엄밀한 의미(수학적 찰나)의 현재는 존재하지 않는다고 보았다.
우리가 경험하는 현재는 항상 약간의 과거와 약간의 미래를 포함하여 덩어리져 있는 '확장된 현재(broad present)'이다. 피에르 아도가 앞서 말한 "현재 순간을 강렬하게 살아라"라고 할 때의 현재는, 바로 이 행동과 의식이 지속되는 주관적이고 두터운(두께가 있는) 현재를 말한다.
197.
" 욕망의 규율은 각각의 사건을 '전체(우주)'의 관점 안에 재배치하는 것으로 이루어지며, 이것이 바로 그 규율이 철학의 물리학 부분에 상응하는 이유이다. 각각의 사건을 전체의 관점 안에 재배치한다는 것은 두 가지를 동시에 이해하는 것을 의미한다. 즉, 내가 그 사건을 마주하고 있는것,( 그 사건이 나에게 존재함), 그 이유는 그 사건이 자연에 의해 나에게 운명 지어졌기 때문이다, 동시에 전체(우주)가 그 사건 안에 존재한다는 사실이다."
물리학'은 단순히 자연과학이 아니라, 세계와 우주가 어떻게 연결되어 작동하는지 이해하는 학문이다. 살면서 겪는 슬픔, 불운 등의 사건을 내 개인의 불행으로만 보면 괴롭다. 그러나, 전체가 그 사건 안에 존재한다"는 표현에서, 내가 겪는 아주 작은 일조차도 거대한 우주의 필연적인 인과관계 속에서 태어난 결과물임을 알면, 우리는 그 사건에 초연할 수 있다.
199. 니체의 글
"인간이 도달할 수 있는 위대함에 대한 나의 공식은 바로 '아모르 파티(운명애)'다. 이는 과거로든, 미래로든, 영원에 이르러서든, 지금 있는 것 외에 다른 어떤 것도 바라지 않는 것이다. 필연적인 것을 그저 견뎌내는 데 그치지 않고, 하물며 그것을 자신으로부터 숨기지 않는 것—왜냐하면 모든 이상주의는 필연적인 것 앞에서 자신을 속이는 거짓말이기 때문—을 넘어, 그 필연을 온전히 사랑하는 것이다."
"높은 곳에서(더 넓은 시야에서), 그리고 전체라는 거대한 유기적 구조의 관점에서 바라보면, 삶에서 일어나는 모든 필연적인 일들은 그 자체로 다 저마다의 쓸모와 가치가 있다. 우리는 그것(필연적인 운명)을 단순히 참고 버텨내는 것을 넘어, 적극적으로 사랑해야(love) 한다. 우리는 그것(필연적인 운명)을 단순히 참고 버텨내는 것을 넘어, 적극적으로 사랑해야(love) 한다."
200. 니체의 글
"핵심은 단순히 '내가 나에게 만족하는가'라는 좁은 질문이 아니다. 내 삶을 통틀어, 혹은 이 우주 전체에서 내가 진심으로 감탄하고 만족했던 순간이 단 한 순간이라도 있었는가가 진짜 중요하다.
만약 당신이 삶의 어떤 한 순간(찰나의 기쁨, 사랑, 성취 등)에 완전히 매료되어 "그래, 바로 이거야! 너무 좋다!"라고 외쳤다면, 그것은 그 순간만을 긍정한 것이 아니다. 그 순간을 존재하게 만든 당신의 과거, 상처, 그리고 '온 세상의 모든 인연과 필연'을 한꺼번에 긍정한 것이다.
팽팽하게 당겨 긴장된 현악기 줄이 아름다운 소리를 내며 떨리듯, 내 영혼이 엄청난 행복으로 전율했던 그 한 번의 순간을 만들기 위해, 우주 전체의 역사와 영원한 시간이 움직여왔다는 뜻이다. 내 행복한 찰나는 우주적 필연의 결과물이다. 따라서 내가 '내 삶의 가장 아름다웠던 한순간'에 찬사를 보내고 수용(Yes)하는 바로 그 찰나에, 그 순간을 위해 존재했던 그 이전의 모든 고통과 눈물, 그리고 '우주의 영원한 시간 전체'가 함께 구원받고 정당화되며 긍정을 얻게 된다."
삶이 아무리 고통스럽고 비극적일지라도, 단 한 번의 진정한 행복이나 의미 있는 순간이 있다면 그 삶 전체를 사랑할 가치가 있다. 아모르 파티. 니체는 삶 전체가 완벽해야만 삶을 사랑할 수 있는 것은 아니라고 말한다. 고통과 상처로 가득한 삶일지라도, 내 가슴을 뛰게 한 '단 한 번의 눈부신 순간'이 있다면 우리는 그 순간 덕분에 삶을 살아낼 힘을 얻는다. 내가 오늘 경험한 단 하나의 작은 행복은, 과거의 수많은 우연, 고통, 슬픔, 그리고 타인과의 만남이 축적되어 비로소 필연적으로 탄생한 결과물이다. 따라서 그 한 순간을 진심으로 사랑한다는 것은, 그 순간을 가능하게 만든 과거의 모든 비극과 고통까지도 전부 포용하고 긍정하는 것과 같다.
바이올린 줄이 팽팽하게 긴장되어 있어야만 아름다운 소리를 내듯, 인간의 삶도 고뇌와 시련이라는 긴장 상태를 통과할 때, 비로소 진정한 행복의 울림을 만들어낸다. 니체는 고통을 피해야 할 악이 아니라, 행복을 자아내는 필수적인 과정으로 보았다.
스토아 철학이 '운명에 순응하고 초연'해지는 '소극적 수용'이라면, 니체의 아모르 파티는 "이 삶이 영원히 반복된다 할지라도 나는 이 단 하나의 빛나는 순간을 위해 나의 운명을 기꺼이 다시 살겠다"고 외치는 '적극적인 창조와 구원'의 태도이다.
201. 니체는 고통을 삶의 '어쩔 수 없는 부산물'로 취급하는 소극적 태도를 넘어, 고통 그 자체가 삶의 본질이자 강력한 생명력의 원천임을 선언.
"철학자가 도달할 수 있는 가장 높은 상태는, 존재에 대해 '디오니소스적 태도'를 취하는 것이다. 이에 대한 나의 공식이 바로 '아모르 파티(amor fati, 운명애)'이다. . . .
이를 위해 우리는 지금까지 부정되어 온 '존재의 측면들'(고통, 추함, 죽음 등)을 단지 '필요한 것'으로만 생각해서는 안 되며, '갈망할 만한 것'으로 여겨야 한다. 그리고 그것들을 지금까지 승인되어 온 측면들(선, 아름다움, 기쁨 등)과의 관계 속에서만—예를 들어 그것들의 보완물이나 전제 조건으로서만—갈망할 만하다고 여겨서도 안 된다. 그 어두운 측면들 그 자체로, 존재의 더 강력하고, 더 비옥하며, 더 진실한 측면으로서, 즉 존재의 의지가 스스로를 가장 명백하게 표현하는 측면으로서 갈망해야 하는 것이다."
니체가 말하는 디오니소스적 태도란 삶의 모순, 혼돈, 파괴, 고통까지도 피하지 않고 온몸으로 껴안으며 축제처럼 즐기는 격렬한 생명의 긍정을 뜻한다.
니체는 이 고통, 슬픔을 단순히 "좋은 일이 생기려면 고통도 참아야지"라는 식으로 인내하는 것을 거부한다. 고통과 시련 그 자체를 적극적으로 원하고 환영해야 한다, 니체는 고통이 기쁨을 돋보이게 하는 '조연'이 아니라고 말하고, 고통은 그 자체로 주연이라고 한다. 고통을 겪고 극복하는 과정이야말로 인간을 정신적으로 가장 풍요롭고 단단하게 만들기 때문에, 삶의 어두운 면이 훨씬 더 진실한 생명의 본질이다.
정리하면,
첫 번째 스토아 문장: 나에게 닥친 비극을 거대한 우주의 섭리로 받아들이며 '담담함과 초연함'을 유지하라. 스토아의 긍정은 세계에 대한 이성적인 동의.
두 번째 니체 문장: 단 한 번의 아름다운 순간이 있다면, 그 순간을 위해 과거의 모든 고통을 긍정할 수 있다.
세 번째 문장(디오니소스적 긍정): 한 단계 더 나아가, 이제는 좋은 순간을 위한 전제 조건으로서의 고통이 아니라, 나를 성장시키고 생동하게 만드는 고통(불행) 그 자체를 아모르 파티(운명애)의 대상으로서 뜨겁게 사랑하라고 촉구한다.
7장 <명상록>의 스토아주의-욕망의 규율 혹은 운명애
180/181쪽)보편 자연과 인간 본성의 관계. "욕망의 규율과 충동의 규율에 존재론적 토대를 마련. 전자의 대상은 ....자연의 흐름, 그리고 끊임없이 일어나는 사건과 맺는 관계다....욕망의 규율은 만물의 자연이 원하는 것말고는 아무것도 바라지 않는다. 후자의 대상은 나 자신의 미미한 인과성이 세계의 인과성에 편입되는 방식이다. 이 규율은 나의 본성이 내게 행하기를 원하는 바를 하는 것이다.....동의의 규율은 다른 두 규율에 포함되기 때문에 철학적 삶의 연습은 욕망과 적극적인 의지의 두 규율로 요약." "너에게 일어나는 일을 통해 만물의 자연이 인도하고, 네가 해야 하는 일을 통해 너 자신의 본성이 인도하는 바..."
183쪽)현재의 경계 설정은 두 가지 측면. "일단 환란과 시련을 짧은 순간의 연속으로 환원..다른 한편으로 우리가 맞닥뜨리는 사건에 대한 동의 혹은 행동에 좀더 주의를 쏟는 것," 이는 하나의 태도로 수렴되니 그것은 "사물을 바라보는 방식과 시간과의 관계를 변화시키는 태도"이다. 전자의 방식은 자연학의 정의, 즉 "처음의 객관적 표상과 다른 것을 개입시키지 않고 사물을 적절하게 정의하는 것"(184) 후자는 지금의 경험에 주의를 쏟는 것(186). 그리하여 "현재를 경건과 정의에 따라 살아간다면" 여기서 경건은 전자의 것으로 "현재 일어나는 일에서 드러나는 신의 의지에 경건히 동의하게 하는 욕망의 규율....정의는 인류 공동체를 위해서 움직이게 하는 행동의 규율에 해당한다."(186) "이러한 태도는 어떤 긴박함을 드러낸다. 죽음이 언제 어느 때 닥칠지 모르기 때문이다.(187)"
189)"현재는 항상 이 지속적인 현재, 일종의 두께를 가진 현재다. 지금 이 순간 나의 표상, 내가 느끼는 욕망, 내가 하는 행동은 분명히 이 현재에 위치한다."
191)"욕망의 규율은 무엇보다 보편 자연의 일반 흐름에서 유래한 사건(외부 원인에서 빚어진 사건)을 받아들이는 방식과 관련." "인간의 본성에 할당된 것이 바로 인간에게 일어난 사건이다. '자기가 만나게 되는 일sumbainonta과 자신을 위하여 운명이 지은 것을 사랑하고 반기는 것이다.'(3-16-3)..현재 내가 하는 행동뿐만 아니라 현재 내가 맞닥뜨리는 사건을 말하는 것." 여기서 '상호연계, 상호연루, 얽히고 설킴'(195...은 우주도 하나의 의식과 의지를 지닌 하나의 생명체...)은 운명의 구조에서 클로트(실을 잣는 여신)와 관련해서 이야기. 즉 "내가 만나게 되는 일, 나에게 들어맞는 일은 운명 혹은 보편 이성을 상징하는 여신 클로토가 이미 마련한 것이다."(193) "어떻게 존재하는 만물이 생성되는 만물의 공동 원인인지, 그리고 그것이 어떻게 서로 얽히고 짜이는지 생각해보라.(명상록 4-40)" 이렇게 보편 이성과 관련해서 '근본적인 직관'에서 인한 것. 그리고 전체와 부분에 대한 사고이기도 함. "부분과 전체 사이에는 일종의 조화, 서로 화합하는 상호 호릅이 있다....그러므로 각각의 사건을 전체의 시각에 놓고 보는 것....그 사건 자체는 나에게 달려 있지 않으니 선하지도 악하지도 않다. 그렇다면 스토아주의자는 그 사건을 무심하게 아무 상관 없는 것처럼 받아들여야 할까, 아니다. 차이가 없음은 차가운 무관심이 아니다. 오히려 그 반대다. 그러한 사건은 전체가 그 자신을 사랑한다는 표현이요, 전체에 도움되는 일, 전체가 바란 일이기 때문에 우리도 그 일을 바라고 사랑해야 한다."(197)
198)"전체의 의지에 애정을 가진 동의, 신적 의지와의 일치를 아우렐리우스는 우리에게 일어나는 일을 기쁘게 받아들여야 한다, 사랑해야 한다.....세계와 조화를 이루기 때문만은 아니다. 더 중요한 이유는 그 사건이 다른 때가 아니라 바로 지금 일어나기 때문이다."
200)영원회귀설. 니체의 시각과 스토아주의의 시각 사이에는 깊은 골이 있다. 스토아주의의 긍정은 세계에 대한 합리적 동의, 니체가 말하는 디오니소스적 긍정은 생의 비합리성, 생의 맹목적인 가혹함, 선악을 넘어서는 힘의 의지까지도 긍정하는 것이다.
205)섭리인가, 원자인가?의 문제. 이는 우주관의 대립. 스토아주의 깔데기. 즉 "설령 자연학 분야에서 스토아주의와 정반대되는 가설을 지지하더라도 윤리학에서는 스토아주의의 도덕적 태도만이 유일하게 가능하다... 스토아주의 자연학 이론을 받아들인다면, 스토아주의의 도덕적 태도(욕망의 규율 즉 보편 이성이 일으키는 모든 일에 대한 이성적 동의)가 전혀 문제되지 않는다.....즉 "우연이 지배한다 해도 너까지 우연의 지배를 받지 마라.""지도자 없는 혼돈이 지배한다면, 그런 거센 파도 속에서도 네 안에 지배하는 지성이 있음을 다행스럽게 생각하라.(12-14-4)(205) "섭리 아니면 우연이라는 딜레마가 등장하는 이유는 스토아주의 자연학 이론을 포기하는 태도 혹은 에피쿠로스주의와 스토아주의 사이에서 선택을 거부하는 절충적 태도 때문이 아니다. ...그가 이미 스토아주의를 선택했음을 짐작할 수 있다.(207)....섭리라면 스토아주의자로 살아야 하고, 원자라고 해도 스토아주의자로 살아야 한다."(209) 이에 대한 설명으로 210쪽의 사물의 생성과 관련한 표를 참고.
211)가설3이 말하는 것 살피기. "또다른 것은 간접적으로 파생된다는 가설3." "만물은 저 공통된 지배원리에서 비롯되며, 거기에서 직접 유래하든가(2가설) 부수 현상으로 나타난다(3가설). 따라서 사자의 쩍 벌린 입, 독, 가시, 진흙탕처럼 유해한 것은 모두 저 장엄하고 신성한 것의 부수 한상이다. 그러니 그런 결과에 의한 현상(3)이 네가 공경하는 것과 무관하다고 여기지 말고 만물의 근원(2)을 생각하다.(6-36-2)"...."부수적 결과 이론은 우리에게 고통스럽거나 혐오스럽게 보이는 사물과 사건에 대한 사랑의 근거가 되므로 욕망의 규율에서 아주 중요한 역할을 한다....'나는 부수적 결과로서 나에게 일어난 모든 것을 기쁨으로 받아들이고 사랑해야 하다.'(6-44-3) 자연의 원래 의도에 따른 맹목적이고 부수적인 결과는 어떤 자연현상이 나에게, 특별히 나에게 떨어졌다는 사실이다....어떤 자연현상은 ...혐오스럽게 보인다...여기서 부수적 결과 개념이 주관성과 밀접하게 연결되어 있음을 알 수 있다. 그 일이 내게 일어났기 때문에, 내게 나타났기 때문에, 내가 지각했기 때문에, 그리고 내가 두렵거나 혐오스럽다는 표상을 떠올렸기 때문에 나는 그것이 선한 섭리에서 나왔을 리 없다고 생각.. 이성과 보편 자연을 비판하고 받아들이길 거부한다. 욕망의 규율은 그러한 사건도 자연이 직접 의도하지는 않았으나 결국 자연의 선한 의지에서 비롯됐음을 발견함으로써 잘못된 판단을 바로잡는 것이다.
213)"여기서도 욕망의 규율은 자연학의 정의에 기대고 있다. 너무나 인간적인 가치판단을 물리치고 사물의 객관적이고 적절한 표상만 생각할 것, 마치 인간은 있지도 않은 것처럼 실재를 바라볼 것."
216)인용문은 210쪽 표에 대한 설명인 셈. "운명의 필연과 벗어날 수 없는 질서가 지배하거나, 자비를 베풀 수 있는 섭리가 지배하거나, 지도자 없는 무의미한 혼돈이 지배한다. /벗어날 수 없는 필연이 지배한다?(2가설?) 그렇다면 왜 반항하는가?/ 자비를 베풀 수 있는 섭리가 지배한다?(5가설?) 너 자신이 신의 도움을 받을 자격을 갖춰라./ 지도자 없는 혼돈?(3가설?) 그런 거센 파도 속에서도 네 안에 지배하는 지성이 있음을 다행스럽게 생각하다."(12-14)
217)4가설=유일한 근원적 충동과 5가설=특수 섭리 가설 사이의 대립. 후자는 간단히 인간주의. "세계 및 자연과의 관계를 개별화하고 싶은 욕구, 신의 존재와 선의와 부성을 느끼고 싶은 욕구에 부응한다. 이 욕구는 스토아주의 초기부터 감지되었다." 이것은 거듭 등장하는 신, 인간중심주의로 이해할 수 있을듯. 이를 저자는 "종교적 욕구, 그 힘을 인격화하려는 욕구"로 신을 따르다 혹은 신에게 복종한다(219)는 표현으로 등장. 이와 더불어 "열등한 존재는 우월한 존재를 위해 존재한다"는 구절과도 연관. 즉 "섭리는 직접적으로 이성적 존재를 가장 우선시해 작용하고 결과를 통해 다른 존재에까지 영향을 미친다."(221) 관련된 언급, "만물의 본성은 질서정연한 세계를 만들고픈 충동을 느낀다(가설4). 그리고 지금 일어나는 것은 그 충동의 필연적 부수 현상이거나(가설3), 세계의 지배원리가 특수한 의지에 따라 추구하는(가설5) 아주 적은 수의 것이다."(221)
222)"섭리의 작용 양상이 다를 수 있다는 이 이론은,...결국 우리가 욕망의 규율을 실천하는 방식을 특정한다는 의의가 있다. 사실 사건은 근원적 충동의 관점에서 보느냐, 특수 섭리의 관점에서 보느냐에 따라 상이하지만, 하나로 수렴되는 두 방식으로 고려할 수 있다./ 보편 이성과 일반 섭리의 관점에서 ....충동의 부수적이고 필연적인 결과다.....그렇지만 특수 섭리의 관점에서 내게 일어나는 사건은 내게 특별히 운명 지어졌다. 클로토, 즉 시원적 충동에서 비롯된 우주의 흐름은 태초부터 그 사건을 나와 엮어놓았다....예정되었다. 온 우주가 특별히 나에게 정해놓은 나의 운명을 받아들일 수 있도록."(223)
225)"목욕할 때 나오는 기름, 땀, 대, 그리고 끈적거리는 물과 온갖 역겨운 것들처럼 인생의 모든 부분과 모든 대상이 그러한 느낌을 준다." 이런 식의 비유를 읽으면 흡사 비관론에 빠지는 듯한 느낌. 그건 아니라고 말하는 저자. 그러면 왜 아우렐리우스는 이런 비유를 쓰나? 226쪽을 보면, 기존 모델, 기존 수사학적 훈련을 따르는 것일 뿐. 또 다르게 보자면, "자연학의 정의 방법에의 인지" 즉 "인생의 모든 영역을 자연학의 관점에서 정확하게 고찰할" 것을 말하는 자연학적 수련. 즉 "사물을 벌거벗기기" "구분하기." "고로 거짓된 가치를 물리치고 사물을 벌거벗은 자연학적 실재 그대로 보는 것이 중요하다. 먹음직한 고기 요리는 동물의 사체에 불과하다." 이러한 자연학적 실재를 바라보는 것은 전체를 부분으로 나누는 방법이자 다양한 대상을 자연학적으로 정의하는 훈련.
230)"이 가차없는 시각이 삶의 사물들에게 우리의 판단이 덧씌운 거짓 가치를 벗겨낸다. 이 시각이 비관론처럼 보이는 진짜 이유는 모든 것이 도덕적 의도의 순수성, 덕의 광휘라는 유일한 가치에 비하면 추하고 보잘것없고 무가치하기 때문이다....동시에 우리는 더러움과 역겨운 것이라는 개념이 얼마나 주관적이고 상대적인 생각하게 된다. 정말로 역겨운 것은 물질의 어떤 측면이 아니라 정념과 악덕이다."
231)사자의 쩍 벌린 입과 빵 에피소드. 운동에 수반되는 부수적 현상은 자연의 의도, 자연이 맨 처음 가한 충동에서 벗어나는 듯....이 변칙성, 이 불규칙성....(232)
232)아리스토텔레스와 아우렐리우스와의 차이. 전자는 자연이 낳은 존재 자체에 관심을 둔다....반면 후자가 중시하는 것은 오히려 필연적이고 부수적인 결과다. 이상주의 미학 대신, "어쩌면 추한 모습 그대로도 가장 아름다운 모방보다 더 아름답다는 사실주의 미학."
234)"자연과 친숙하다는 것은 사물과 사건을 우리와 같은 세계에 속해 있고 우리와 같은 기원에서 유래한 친숙한 것으로 본다는 뜻...요켠대 그것은 자연학을 하는 것, 우주의 통일성과 자기 정합성을 깨닫는 것이다.....그러한 우주적 시각....생의 모든 것은 단지 존재한다는 이유로 아름답지만, 그와 동시에 자유와 도덕의 영역에 속하지 않으므로 가치가 없다...주위의 사물과 사람에게서 이미 분해 과정이 일어나고 있음을 감지....그가 유일하게 귀히 여기는 것은 인생 자체가 아니라 도덕적 삶이라는 차이가 있을 뿐이다. 보편적 변모를 바라봄으로써 죽음을 두려워하지 않는 법을 배운다....또한 지나가는 것에 어떤 가치도 부여하지 않는 법을 배운다..그렇지만 영혼은 광대한 자연의 관조에 빠져들고, 자연은 만물을 끊임없이 변화시켜 우주가 영원히 새롭도록 한다."
240)homoeides, 즉 사물의 동일성 혹은 균일성. "이 개념은 애매하다. 광막한 우주를 바라보는 자에게는 이 개념이 모든 것이 모든 것 안에 있음을 의미할 수도 있다. 만물은 스스로 지탱하며 매 순간에 실재의 조각 하나 하나에 온 우주가 있다." 여기서 인간의 무상성, 역사의 무상성. "즉 인간사를 위에서 내려다보면 과거와 미래를 상상하게 된다. 개인은 사라질지언정 동일한 장면은 수세기에 걸쳐 반복된다.....고대인은 역사가 언제나 반복된다고 보았다...두키디데스...소펜하우어의 역사관...'동일하지만 다르게'(242)" 이런 식의 서술을 보자면 비관론으로 빠질 수 있으나, 아도는 "추하고 보잘것없으며 질리도록 반복된다고 하는 그의 진술은 본인의 부정적 경험을 말하는 것이 아니다. 이는 정신 수련, 문학적 훈련에 해당한다.....기교적인 느김마저 든다. 하지만 이 모든 것에 영감을 불어넣은 것은 아울렐리우스가 유일한 가치, 필연적인 단 하나에 대해 마음 깊이 느끼는 사랑이다."(243) 그리하여 "이 유일한 초월적 가치 앞에서 인간사는 미미하기 짝이 없다....유일한 기쁨ㅇ은 도덕적 의도의 순수성."(244)
(179-180) 사건 자체는 우리 외부의 원인에서 빚어진다. 반면, 어떤 행동을 하려고 하거나 하지 않으려고 하는 경향은 원인이 우리 내부에 있다.
외부 원인과 내부 원인, 보편 자연과 인간 본성을 대립.
욕망의 규율과 충동의 규율에 존재론적 토대 마련.
욕망의 규율은 만물의 자연이 원하는 것 말고는 아무것도 바라지 않는 것이다.
충동의 규율은 나의 본성이 내게 행하기를 원하는 바를 하는 것이다.
네가 네 자연에 적절한 것을 현재 행하고,
만물의 자연이 현재 너에게 적절하다고 여기는 것을 받아들인다면,
네가 무슨 불상사가 있겠느냐?
‘나의’ 자연은 개인의 성격이 아니라 인간으로서의 ‘본성’, 인류에게 공통된 이성이다. 이 자연은 우리가 동의의 규율을 다루면서 보았던 초월적 자아, 신성한 원칙, 우리 안의 다이몬에 해당한다.
다이몬 -> (220) 개인의 팔자에 관여하는 신 혹은 다이몬은 이성이나 운명을 좀더 생생하고 인간적인 모습으로 이미지화한 신비적 표현에 불과하다.
인간과 섞여 있는 신과 인간 내면의 다이몬에 대한 표상이 스토아주의의 이성적 요구를 바꾸지는 못한다.
(229-239) 사실주의 미학 - 신체 기능의 물리적이고 생리학적인 측면을 보는 훈련을 해야 한다. 이 현실적 시선이 생을 있는 그대로 직시하게 해준다. 아름다움의 고전적 규준에 들어맞지 않는 결과도 자연현상의 결과인 한 ‘아름답고 매력적인 그 무엇’을 지닌다. 혐오스럽고 역겹고 무서워 보이는 것이 자연과 친숙한 이의 눈에는 아름답게 보인다.
우리는 자연과 마찬가지로 차이가 없는 것, 우리에게 달려 있지 않고 보편 자연에 달려 있는 것을 차별하지 말아야 한다.
니체 – 전체의 광대한 범위에서 보면, 위에서 내려다보면 모든 것이 필연이고 그 자체로는 다 같이 유용하다. 그런 것을 단지 견딜 게 아니라 사랑해야 한다.
수련으로서 위에서 내려다보기 혹은 영혼의 우주적 비행
위에서 내려다본 인간사는 미미하고, 부질없고, 바랄 만하지 않다. 죽음조차도 두려워할 만한 것으로 보이지 않는다. 위에서 내려다보려는 노력은 인간 현실의 모든 사회적 지리적 정서적 측면을 전방위적으로 조망하고 광대한 우주 속에, 지상에서 북적대는 익명의 인류 속에 위치시킨다.
키니코스주의자 – 지상의 삶을 내려다보는 시각은 키니코스학파(견유학파)의 특징. 인간을 지켜보는 것, 그들의 과오를 감시하고 고발하는 것이 자기 역할이라고 생각했다. 필멸을 망각하고 어차피 버려야할 사치와 권력에 집착하는 인간의 광기를 고발한다.