7회차 후기-‘세간은 보고, 듣고, 맛보고, 냄새 맡고, 접촉하는 우리의 한길 몸속에 있다.’
열반에 이르는 길
‘보고 듣고 생각하고 분별한/사랑스러운 형색에 대한/욕망과 탐욕을 없애면/그것이 영원한 열반이다/ 그것을 아는 참사람들은/지금 여기에서 열반에 든다/세간에 대한 욕망을 극복한/그들은 언제나 평화롭다.’ <숫다니빠따 제5장 피안으로 가는 길>
이번 회차는 내용이 좀 많았다. 불교공부 초보자인 나는 처음 읽는 새로운 내용이 아니었음에도 한없이 깊게 들어가고 반복되다 보니 마지막에 가서는 머릿속이 온통 뒤죽박죽되어 메모도 쓰지 못했다. 게다가 37조도품, 9차제정까지 다 나오니 ‘명지’가 머리를 쪼갠 것이 아니라 그야말로 ‘무명’으로 머리가 쪼개질 것 같았다.
그래도 강의를 듣고 함께 이야기를 나누고 후기를 쓴다고 강의록을 다시 읽고 나니 열반과 해탈, 선정수행이 뭔지 이론적으로는 정리가 좀 되었다. 거기에다 모든 것이 사성제에 포함되고 연기로 읽어야 한다고 정리를 하고 나니 좀 더 명확해졌다.
붓다는 ‘즐기는 존재가 사라지고/생각과 분별의식이 소멸하고/느낌이 소멸하면 평온하다오/나는 이와 같이 안다오/이것이 중생의 해탈, 해방, 멀리함이라오’라며 청정한 수행은 ‘열반에 들어가기 위하여, 열반을 목표로, 열반을 종착지로 영위된다’라고 했다.
그러나 해탈과 열반은 선정의 모든 단계를 거쳐야 해탈하는 것은 아니다. 탐진치를 소멸하면 ‘지금 여기, 이 순간’에도 열반에 들 수 있다. 그러기 위해서는 일상에서 탐진치를 알아차리고 소멸해가도록 노력해야 한다. ‘지금, 여기에서’ 이 순간에도 일어나고 있는 탐진치를 어떻게 끊어낼 것인가? 붓다는 명확하게 말씀하신다. ‘나는 머물지 않고, 애쓰지 않고 생사의 폭류를 건넜다’ “비구들이여, 불이 붙은 옷이나 머리는 주시하지 않고 주의하지 않더라도, 이해하지 못한 네 가지 거룩한 진리를(사성제) 있는 그대로 이해하기 위해서 지극한 의지와 노력과 힘을 기울여 불퇴전의 정진과 주의집중과 알아차림을 행해야 한다오.”<상윳따니까야. 싱사빠>
다음은 강의안을 요약해보았다. (좀 길다. 순전히 내 정리를 위하여)
- 열반이란.
윤회는 시작을 알 수 없다. 그러나 윤회는 끝날 수 있다. 윤회의 끝이 바로 열반이다. 수행의 최종상태를 말한다. 니까야에는 열반, 해탈, 구경지, 피안, 생사의 폭류를 건넘, 거센 강을 건넘, 세간의 끝, 무위, 불사, 번뇌의 소멸, 괴로움의 종식, 유가안온, 평온의 경지, 적정, 적멸 등, 윤회에서 벗어나는 것을 뜻하는 다양한 표현이 나온다.
① 열반과 해탈
열반(nibbāna/nirvāṇa)은 괴로움에서 완전히 벗어난 상태를, 해탈(vimutti, moksa)은 괴로움에서 벗어나는 과정의 역동성을 나타나게 하는 말이다. <니까야>에서 명시적으로 말해지는 열반의 가장 간명한 정의는 탐진치의 소멸, 번뇌의 소멸, 괴로움의 소멸이다. 사리뿟따는 열반을 ‘행복’이라고 설명한다. 그것은 즐거움과 괴로움에 대한 집착을 떠났다는 의미에서 ‘느낌이 없는 행복’이다. (<열반>AN9.34)
② 열반을 ‘무위’라고도 한다.
상윳따니까야의 무위상윳따에서 무위는 열반을 가리킨다.
아비달마에 이르면 법을 유위법과 무위법으로 구분하면서 무위=열반이라는 도식이 확실히 굳어진다. ‘의도된 것, 조건적인 것, 만들어진 것’이 유위이다. 무위( (asaṅkhata/asaṃskṛta)는 유위의 반대이다. 즉 의도되지 않은 것, 조건에 의해 만들어지지 않은 것이다. 유위는 일체의 세간적인 현상이면서 윤회적 생존을 뜻한다. <니까야>에서 무위는 ‘세간을 벗어난 것, 조건을 벗어난 것’이란 뜻으로 열반을 가리킨다. 열반은 윤회의 메커니즘이 있다는 것을 전제로 한다. 열반이란 윤회적 메커니즘의 중단이기 때문이다.
붓다는 괴로움을 종식한 열반은 지수화풍 4대도 없고, 공무변처, 식무변처, 무소유처, 비상비비상처도 없고 생사도 없다고 설한다. 그렇다고 열반을 황홀한 신비경이라거나 아무것도 없는 상태라고 보면 안 된다. 사성제의 멸성제가 열반을 가리킨다.
③ 열반을 피안이라고도 한다.
피안은 차안과 상대되는 개념이다. 차안(此岸), 이 언덕이 윤회적 생존의 세계라면, 피안(彼岸), 저 언덕은 윤회적 생존이 없는 세계이다. 붓다는 “세간에서 거센 강물은/주의집중이 그것을 막아준다./ 거센 강물 막는 것을 알려주겠다. /통찰지로 그것을 막을 수 있다” “차안에서 피안으로 가려면/최상의 길을 수행해야 한다/그 길은 피안에 이르게 한다. /그래서 ‘피안으로 가는 길’이다.”라고 한다.
④ 열반을 세간의 끝이라고도 한다.
세간은 윤회적 생존의 세계이고, 유위의 세계이다. 붓다는 세간의 끝은 공간적으로 멀리 간다고 해도, 아무리 오랜 시간이 걸린다 해도 도달할 수 없다고 답한다. 그 이유는 세간의 끝이 의미하는 바가 윤회의 끝이기 때문이다. 윤회의 끝에 이르는 길은 우리의 몸과 마음을 닦아 통찰지로 번뇌를 종식하는 것 외는 방법이 없다. 그런 의미에서 ‘세간은 보고, 듣고, 맛보고, 냄새 맡고, 접촉하는 우리의 한길 몸속에 있다.’ 붓다는 감각적 욕망이 세간일 뿐만 아니라 색계 초선정에서 무색계 비상비비상처정의 선정 역시 세간에서 벗어난 것이 아니라고 단언한다. (<바라문경>AN9.38) 세간의 끝은 번뇌를 남김없이 소멸한 것이기 때문이다.
⑤ 열반을 불사(amata/amṛta)라고도 한다.
열반을 불사라고 할 때는 죽음이 없이 영원히 사는 영생불사와는 의미가 전혀 다르다. 붓다의 불사는 수명에 대한 집착을 내려놓은 것, 자기 존재에 대한 집착을 내려놓은 것을 의미한다.
⑥ 열반의 상태는 평온하고 고요하다.
그것을 표현한 말이 유가안온(瑜伽安穩), 평온, 적정, 적멸 등이다. ‘유가안온’은 번뇌의 속박에서 풀려나 편안해진 상태를 가리키는 말이다. 선정상태의 평온과는 다르다. 선정상태의 평온은 유위적, 조건적으로 일어나는 의도되고 만들어진 일시적 평온이기 때문이다. 이와 달리 번뇌로부터 완전히 벗어난 무위의 평온상태가 적멸이고 유가안온이다. 그래서 열반을 ‘구경의 해탈’이라고도 한다.
⑦ 열반을 얻은 사람은 “생은 끝났다. 이제 다음의 생은 없다”라고 구경지(究竟智)를 선언한다. 구경지는 궁극의 지혜이다. 그것은 머리로 아는 지식, 지식으로서의 지식과 구별하여 체험적 지식, 수승한 지식, 승리의 지식이라 불린다. <구경지검증경>(MN112)이 말하는 구경지 검증의 방식은 구경지를 얻은 사람이 스스로 의식이 또렷한 상태에서 감각적 욕망의 대상에 대해, 오온에 대해, 육입처에 대해 집착하지 않고 흔들리지 않는 마음의 해탈을 얻었다고 기술하는 것이다. 구경지는 구경지를 얻은 사람이 스스로 확신하는 것이다.
2. 열반에 이르는 길
'4념처, 4정단,4여의족, 5근, 5력, 7각지, 팔정도, 이것을 무위에 이르는 길이라고 한다. 이들이 나무아래고 이들이 한적한 것이오.'
괴로움의 소멸이 열반이고, 괴로움의 소멸에 이르는 길이 열반에 이르는 길이다.사성제 중에 도성제에 대한 가르침은 팔정도다. 무위에 이르는 길로 설해진 4념처, 4정단, 4여의족, 5근, 5력, 7각지 모두 팔정도와 관계하고 있다는 점에서 37조도품 역시 사성제에 포함된다고 말할 수 있다.
나무 아래나 한적한 곳은 반드시 숲속이나 외부의 자극이 차단된, 일상에서 멀리 떨어진 명상처만을 의미하는 것은 아니었다. 몸과 마음을 닦는 곳이면 그곳이 어디든 수행처이고 나무 아래고, 한적한 곳이다.
3. 선정과 열반
<부동도경>(MN106)은 취(取)가 있는 선정과 취가 없는 선정으로 구별한다. 취가 있는 선정은 선정에서 얻는 즐거움에 집착하는 선정을 말한다. 사리뿟따 <차제경>(MN111)에서 자신은 9차제정으로 나아가면서, 각각의 선정에서 일어나는 마음의 요소들을 관찰하고, ‘선정을 구성하는 마음의 요소들 역시 일어나고 사라지는 것임을 자세하게 관찰했다’라는 것을 말해준다. <열반경>(AN9.34)에서는 각각의 선정에 들 때 선정을 구성하는 마음의 요소들에 생각과 관심이 일어나는 것이 질병이라고 한다. 선정에서 느끼는 욕망, 사유와 숙고, 행복, 평정심, 공, 식, 무소유, 비상비비상처에 집착하는 것이 선정의 질병이다.
깨닫기 전의 붓다는 선정의 즐거움을 재앙으로 보지 않았고, 그런 이유로 그것에서 벗어날 것을 강하게 의욕하지 않았다. 그 결과 번뇌가 멸하는 적정에 이를 수 없었다. 무소유처와 비상비비상처라는 높은 선정의 경지에 이른다 해서 해탈할 수 있는 것이 아니다. 초선정의 낮은 단계라 해도 감각적 욕망을 떠나고 불선법을 멀리하며, 선정의 희열에 집착하지 않는다면 구경지를 얻고 열반에 이를 수 있다. 구차제정은 삼매의 단계일 뿐, 해탈의 높고 낮은 단계가 아니다. 수행의 목표는 번뇌의 소멸이다. ‘모든 행위들의 그침·모든 집착의 버림·갈애의 소멸·욕탐을 멀리함·번뇌의 소멸·열반, 이것이 평온한 것이며, 이것이 수승한 것이다’
4. 법주지와 열반지
모든 현상(법)이 무상하고 무아이고 괴로움이라는 것과 연기를 통찰하는 것이 법주지이다. 열반지는 스스로 열반을 체득하여 체득했음을 아는 것이다. 통찰지로 현상을 있는 그대로 알고 보게 되면 색·수·상·행·식에 대해 싫증내고(염리), 탐욕을 버리고(이욕), 해탈하게 된다(해탈). 해탈했을 때 ‘나는 해탈했다고 안다.(해탈지견)’ 해탈하여 자신이 해탈했음을 아는 것이 열반지다. 열반지를 얻은 수행자는 ‘생은 소멸했다. 청정한 수행을 완성했으며, 해야 할 일을 끝마쳤다. 다시는 이와 같은 상태로 되지 않는다’라고 통찰하며 구경지를 선언한다.
통찰지(반야) 없는 열반은 없다. 그렇기 때문에 붓다는 무소유처와 비상비비상처를 성취했음에도 번뇌에서 벗어나지 못했기 때문에 스승을 떠나서 수행을 계속했다. 사성제에 대한 깨달음, 연기에 대한 깨달음이 바로 붓다의 통찰이다. 통찰지에 이르는 방법을 가르친 것이 사념처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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맹귀우목(盲龜遇木) 윤회의 세계에서 인간의 몸을 받는 것이 참으로 어렵다고 한다. 인간으로 태어난 것은 해탈 할 수있는 기회, 수행의 기회라고 한다.
‘열반에 이르는 수행을 하고자 하는 자는 무명과 갈애가 재앙이라는 것을 알게 되었다면 알게 된 것에 그치지 않고 의욕을 내어 자신의 근기에 맞게 어디서나 시작할 수 있다.’ 일단 시작하는 것이 중요하다고 하는데 일상이 수행이 되도록 ‘지금, 이 순간’ 열심히 정성을 다할 뿐이다. (그런 마음으로 살고자 노력할 뿐이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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송이샘, 후기 쓰시느라 애쓰셨습니다!
세미나에서 찾지 못한 경이 <옷경>(SN56.34)이었군요. 샘이 후기에 인용해 놓으셔서 저도 다시 찾아서 읽어보았습니다. 다시 읽어보니.. 이게 참, 공부에 힘쓰라는 걸 무시무시한 비유로 강조한 말씀이군요.
머리에 불이 붙으면 누구나 있는 힘껏 그 불을 끄려고 합니다. 누가 그러지 않을 수 있을까요? 그런데 부처님은 여기서 한 발 더 나갑니다. 누구나 동의할 수 있는 상식적 비유로 말한다면 머리에 붙은 불을 끄듯이 사성제를 이해하라고 해도 되었을 텐데.. 거기서 한 발 더 나가 일종의 반어법적인 비유를 쓰고 있군요. 머리의 불을 그냥 놔두면 이 생에서 생명을 잃는 것으로 끝나지만, 사성제를 있는 그대로 이해하지 못하면 세세생생 생노병사를 되풀이할 테니 머리에 붙은 불끄는 것(세간)보다 더 중요한 것(세간의 끝)에 집중하라시네요. 머리에 붙은 불을 끄는 것보다 더 급하고 중요한 것이 사성제를 제대로 깨치는 것이라는 말씀! 머리에 붙은 불을 끌 때보다 더 주의집중하고 알아차려야 한다는 것이겠지요? 와우!
이해하기 힘든 부분을 요요샘이 더 해석해주시니 알겠습니다
정진 노력을 이렇게까지 강조하시다니요
하긴 이렇게 하지않고 어떻게 탐진치를 벗어날수 있겠습니까 ㅠ
송이샘 공부 제대로 되셨겠어요
애쓰셨습니다^^
제가 지난 주 프린트를 공부방에 흘리고 가서 없는데... 덕분에!! ㅎㅎ 감사합니다. 오늘 읽은 부분에서 붓다가 나란다에서 사리뿟다를 만나는 장면에서법주지인가 열반지인가 이런 의문이 들었습니다. 다른 에피소드와 달리 붓다의 설법 없이 곧바로 사리뿟다가 "저는.... 확신합니다."라고 말하자 붓다는 어떻게 알았는가라고 묻고, 사리뿟다는 세 번 부정하고(그렇지 않습니다) "이치로 미루어 알았습니다"라고 답합니다. 그러면서 현명한 문지기 비유를 드는데, 비록 아라한 등정각의 세세한 경지나 미세한 부분까지 전부 다 헤아릴 수는 없더라도, 그 법의 커다란 이치와 방향만큼은 명확히 알 수 있다(법주지)는 대목이.... 인상깊었습니다...