10회차 텍스트 공지: 연기2

요요
2026-05-19 08:13
91

연기란 무엇일까,

연기의 관점에서 사유하고 수행한다는 건 어떤 것일까요.

 

올해 불교학교를 열면서 불교에 대한 지식을 쌓는 것이 아니라,

삶을 바꾸는 공부가 되려면 어떻게 해야할까라는 고민이 깊었습니다.

삶을 바꾸기 위해서는 인식의 전환이 필수적입니다.

저는 연기적 사유로의 전환이야말로 불교를 공부함으로써 배울 수 있는

가장 특별하고 탁월한 지점이 아닌가 생각해 왔습니다.

그런데 연기의 의미를 이해하는 것은 어렵지 않습니다만,

우리의 삶에서 연기적 사유를 녹여내는 지혜의 눈을 갖추는 것은 쉽지 않은 것 같습니다.

왜냐하면 우리는 뼛속깊이 실체론자로 살아왔고, 살고 있기 때문입니다.

그 실체론의 핵심에 '나'가 있지요.

나라고 할만한 것이 없다는 것을 깊이 깨닫고 그렇게 살아갈 수 있다면 그것은 곧 연기를 체화한 것이라 할 수 있겠습니다.

 

선어록에는 '도란 무엇입니까?' 혹은 '부처란 무엇입니까?'라는 제자의 질문에 대해

'뜰 앞의 젓나무'라고 대답하거나

'마른 똥막대기'라고 대답하는 이야기가 나옵니다.

이 뿐만 아닙니다.

아무 말없이 손가락 하나를 세우는 경우도 있고, '차나 한 잔 마시게'라고 응대하는 경우도 있습니다.

저는 이 모든 것이 형이상학적인 '도'가 아니라, 불교적 의미에서 연기를 가르치는 것이 아닐까 생각해봅니다.

연기가 어쩌고 저쩌고 할 때 우리가 빠지는 지식만으로서의 앎의 함정을 피하는 방법으로서 그렇다는 뜻입니다.

 

그렇지만 우리는 말과 개념과 지식을 동원해 연기를 이해하려 합니다.

그 지식이 지혜로 전환되기를 바라면서요.

선승들처럼 할 수 없다고 해서 우리가 연기를 이해할 수 있는 길이 없는 것은 아닐 거라 생각합니다.

지금 우리는 우리가 할 수 있는 힘을 다해 우리의 인식의 습관과 패턴을 성찰해봅시다.

연기에 대한 경전을 읽는 것이 바로 그런 성찰의 과정이 되기를 바라면서요.

 

 10회차 세미나에서는 디가니까야의 <대인연경>과 상윳따니까야의 <갈대다발경>을 같이 읽어 봅시다.

<대인연경>과 <갈대다발경>은 둘 모두 식과 명색의 상호의존관계를 강조하는 경전입니다.

무명-식-명색-육입처로 진행되는 설법과 식과 명색의 상호의존의 설법을 비교해서 읽어보면서

다시 연기란 무엇인가를 생각해보도록 하겠습니다.

더불어 가장 초기의 설법을 보여주는 숫타니파타를 통해 붓다의 가르침에서 연기의 원형적 형태를 상상해봅시다.

그리고 12지 연기의 각 항목에 대해서도 다시 한 번 생각해보면 좋겠습니다.

 

10회차 텍스트

디가니까야 <대인연경>(DN15)

상윳따니까야 <갈대다발경>(SN12.67)

숫타니파타 <두가지 관찰경>(Sn3.12)/<다툼과 논쟁경>(Sn4.11)

맛지마니까야 <큰 갈애소멸경>(MN38)/ <정견경>(MN9)

그리고 9회차에서 읽었던 상윳따니까야의 인연상윳따를 반복해서 읽으면 좋겠습니다.

 

댓글 2
  • 2026-05-25 14:45

    어제 <모자무싸>가 끝났다. 좋은 시간이었다. 드라마 속에서 펼쳐지던 저마다의 빛나는 이야기들은 일단 막을 내렸다. 드라마를 보는 동안 왜 좋았나 생각해보니 딱히 누구라고 할 것없이 너와 나, 우리 모두의 모습이 비춰져서 그랬나보다. 조금 부끄럽고 많이 공감되는(사랑스러운)...
    주인공의 입을 통해 ‘자신의 무가치함의 끝에서 빛나는 진실을 길어 올리겠노라’고 한 작가의 다짐은 어떻게 마무리될까 궁금했다. 그리고 어제 마지막 화를 보면서 그 ‘빛나는 진실’이란 곧 연기라는 생각을 했다.
    “비구들이여, 연기란 어떤 것인가? 비구들이여, 나라고 할만한 것이 없다는 사실을 알지 못하는 무명에 의지하여 내가 있다는 생각으로 행하는 행위들이, 그 행위들에 의지하여 나와 세계를 분별하는 분별의식이, .... 그 취에 의지하여 내가 있다는 생각이, 내가 있다는 생각에 의지하여(...) 내가 늙고 죽는다는 생각과 근심·슬픔·고통·우울· 고뇌가 생긴다오. 이와 같이 순전한 괴로움 덩어리가 쌓인다오. 비구들이여, 이것을 ‘함께 나타남’이라고 한다오.” (상윳다니까야 788)
    이어 깟짜야나에게 하신 말씀에서 붓다는 이 세상은 대체로 ‘있음’과 ‘없음’이라는 이원성에 의존하고 있다고 하셨다. 그러나 바른 통찰지로 있는 그대로 보면, ‘있음’이라고 할 것도, ‘없음’이라고 할 것도 없다고도 하셨다. 변화하는 흐름을 편의상 어느 시점에서 잘라내지 않고서는 있음과 없음이 따로 있을 수가 없기 때문일 것이다. 하여 붓다는 사성제가 연기이고 곧 중도라고 하셨다.
    “깟짜야나여, 이 세간은 대체로 방편이며, 취이며, 집착이며, 속박이라오. 방편과 취와 마음의 편견과 집착하는 습성에 빠져들지 않고 붙잡지 않고 바라지 않는 사람은 ‘그것은 나의 자아가 아니다. 일어나고 있는 것은 괴로움일 뿐이고, 사라지고 있는 것은 괴로움일 뿐이다’라고 불안해하지 않고 의심하지 않고, 그에 관해서 남에게 의존하지 않는 올바른 지식이 그에게 생긴다오, 깟짜야나여, 이런 방식으로 보는 것이 바른 견해라오.(796)”
    이 구절을 읽으며 작가의 의도 역시 이 말씀과 그리 다르지 않다는 생각을 했다면, 이 또한 지나친 비약일까? 작가는 왜 그 수많은 스토리를 쓰고 또 쓰느냐고 스스로 자문한다. 난 그 이유가 무가치함과 가치있음이라는 이분법으로 재단할 수 없는 것이 우리 모두의 삶이기 때문이라고 이해했다. 작가는 너무 열 내어 폭주하지 말라고, ‘싱겁게’ 살라고 주인공의 형을 통해 말하기도 하고, 그저 남들처럼 불안하지 않은 삶을 살고 싶어 날뛰는 주인공을 통해 수많은 실패와 좌절의 경험이 모두 고통이고 비극은 아니라고 말하기도 한다.
    마지막 회에서 주인공은 어떤 고난과 실패에도 ‘웃기게’ 대처할 거라고 말하며 결국 자신의 말처럼 위기를 넘기고 해낸다. 그와 함께 과거의 기억 속에 얽매여 있던 또 다른 주인공도 그 고통에서 벗어난다. 과거의 경험이 현재의 자신을 규정하지 못한다는 것을 깨달은 덕분이다.
    “비구들이여, 무명에 휩싸이고, 갈애에 속박된 현명한 사람에게 이 몸이 생기게 하는, 그 무명이 현명한 사람에게는 버려지고, 그 갈애가 흩어진다오.”(800)
    지난 주에는 무심히 읽었던 이 구절이 이번엔 새삼스럽게 다가왔다. 붓다는 청정한 수행을 실천하는 삶, 이것이 현명한 사람과 어리석은 사람이 구별되는 차이이고, 이것이 다른 점이라고 하셨다.
    언뜻 보기에 드라마의 내용은 청정한 수행과는 전혀 관계가 없을 것만 같다. 그들은 저마다의 욕망에 충실하며 때론 찌질하고 위선적인 속물로도 보인다. 하지만 그들 누구도 소위 좋은 사람, 나쁜 사람, 멋진 사람, 못난 사람이라는 고정된 본질을 갖고 있지 않다. 그저 각자 다른 조건 속에서 살아가며 디테일이 다른 각자의 삶의 조건 속에서 충실하려고 노력한다. 다만 그 방식이 다 지혜로운 것은 아닐 뿐이다.
    붓다는 현명한 사람과 어리석은 사람이라고 구별되는 차이에 대해 말씀하시지만 나는 그 말씀을 현명한 순간과 어리석은 순간의 차이가 있다는 말로 풀어보고 싶다.
    이른바 갈애와 집착을 조건으로 무명이 있고, 그 무명에 의해 어리석고 찌질한 행위가 일어날 때가 있다고. 인식의 전환이 중요한 지점이다. 연기는 그 인식의 전환을 가능하게 하는 바른 토대라고 이해한다.
    엉망진창, 다소 과장된 민폐 캐릭터로 그려진 주인공 황동만에 감정이입이 많이 되었던 이유는 뭘까? 남들 보기에 부끄러운 실수나 행동을 많이 하지만 그럴싸하게 포장하거나 꾸미지 않고 솔직하게 인정하는 태도 때문인 것 같다. 적어도 같은 실수를 되풀이하지 않으려고 노력하고 잘난 척하지 않는다.
    멋지고 잘난 ‘나’라고 하는 정체성에 얽매이지 않고 그저 ‘웃기게’ 살고 싶은 그 캐릭터야말로 ‘수행’이니 ‘해탈’이니 하는 말의 무거움에 매이지 않고 움켜쥔 손을 놓아버린 깨달은 사람이 아닐까 싶다. 어제의 나도 없고 내일의 나도 없다. 지금 여기 ‘나’로 존재하게 하는 조건이 있을 뿐이다. 그를 보며 붓다의 가르침은 그 가르침을 따르는 발걸음을 무겁게 하는 것이 아니라 날아가는 새처럼 가볍게 하는 것이라는 사실을 마음에 새겨보았다.

  • 2026-05-25 15:08

    <대인연경 3.4 이름과 형색이라는 조건에 의지하여 분별의식이 있고, 분별의식이라는 조건에 의지하여 이름과 형색이 있다>
    그동안 연기를 무명에서 노사에 이르는 12지분을 순관과 역관으로 관찰하는 선형적인 구조로만 생각했는데, 이 경에서는 명색과 식의 상호의존성이 강조되고 있다. 하지만 12연기는 수행적인 측면에서 괴로움이 어떻게 형성되고 소멸되는지를 설명하다보니 선형적인 인과관계로만 보일뿐이지, 실제로는 순환적이라 할 수 있다. 즉, 느낌이 갈애를 낳지만 갈애는 다시 느낌을 왜곡하고, 무명이 행을 낳지만 반복된 행이 다시 무명을 강화하는 상호 피드백 구조인 것이다.
    그런데 명색과 식의 상호의존성이 강조된 이유는 무엇일까? 우리가 살아있다는 것은 매 순간 무언가를 '인식하며 경험한다.'는 뜻이고, 이 경험의 최소 단위가 바로 식과 명색의 상호 작용이다. 즉, 내 마음에 어떤 호기심이나 분별하려는 마음(식)이 일어나면, 눈앞의 물질적 자극들이 비로소 의미를 가진 대상(명색)으로 내 세상에 등장한다. <대인연경 20. 형색체계 속에서 명칭이 접촉하고, 개념체계 속에서 대상이 접촉한다.> 그렇게 대상(명색)이 뚜렷해지면, 내 마음(식)은 그 대상을 더 자세히 분석하고 분별하게 되고, 결과적으로 "마음이 대상을 만들고 -> 대상이 다시 마음을 자극하고 -> 자극된 마음이 대상을 더 강하게 규정하는" 무한한 피드백의 고리가 형성된다. 이 고리가 쉬지 않고 돌아가는 상태 자체를 바로 '살아있음(존재)'이자 '윤회'라고 부른다. 이를 바탕으로 인간의 구체적인 삶의 경험들이 잇달아 파생되고 확장되는데, 12연기의 뒷부분은 이 식과 명색의 상호의존의 고리 위에 세워진 건물과 같다고 할 수 있다. 즉, 식과 명색이 얽혀 돌아가기 위해 구체적인 통로가 필요한 데, 그것이 감각 창구(육입)이고 그것을 통해 접촉(촉)과 느낌(수)이 일어나며, 결과적으로 늙고 병들고 죽는다(노사)라는 거대한 괴로움의 덩어리가 생기게 되는 것이다(苦集). 즉, '식 ⇄ 명색'이라는 상호의존의 고리가 없다면 감각 접촉(촉)도, 즐겁고 괴로운 느낌(수)도, 그것에 대한 집착(애·취)도 애초에 발붙일 곳이 없다는 뜻이다. 부처께서도 <상윳따 니까야 2.41 성경>에서 '분별의식은 되돌아가서 이름과 형색에서 더 이상 가지 못한다.'고 하셨는데, 이것은 ‘무엇인가가 생멸한다는 인식은 이름과 형색에 의한 분별일 뿐’이라는 깨달음을 말씀하신 것이다.
    다시 말하면, 사람들은 보통 인식되는 세상(객관)과 인식하는 나(주관)를 구분하여 이 둘을 '실체'로 생각하지만, 대상(명색)과 그것을 알아보는 마음(식)은 매 순간 서로를 조건으로 하여 일어나므로 독립적인 실체라 할 수 없다. 그리고 이 두 개가 서로를 꼬리잡기 하듯 붙들고 돌고 있는 현상 자체가 삶의 전부라 할 수 있다. 그렇기에 이 윤회의 연결 고리를 끊어 내려면, 내 마음(식)이 대상(명색)을 '내 뜻대로 존재하는 실체'라고 착각하여 움켜쥐려는 그 무명을 해체해야 하는 것이다. 이런 이유로 식과 명색의 상호의존성이 강조된 것이 아닌가 생각된다.

('로봇이 아닙니다' 체크 필수)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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