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읽고쓰기1234] 정상을 벗어난 관계

우현
2023-09-11 15:23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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정상을 벗어난 관계

- 브래디 미카코, 『아이들의 계급투쟁』 리뷰 

 

 

 

   『아이들의 계급투쟁』. 나는 이 제목을 보고 아프리카 아이들이 직접 투쟁을 벌이는 이야기일 것이라고 생각했다. 계급 불평등에 분노하는 어른들, 그리고 그에 동화된 아이들의 이야기가 아닐까 걱정했지만, 책에선 전혀 다른 내용들이 펼쳐졌다. 이 책의 저자는 일본계 영국인 브래디 미카코로, 책은 미카코가 오랫동안 보육교사로 활동해온 이야기를 담고 있다. 2부는 그녀가 처음 보육 봉사를 시작했던 영국 저변에 위치한 탁아소의 이야기이다. 미카코는 저변 탁아소의 활동을 인정받아 정식 보육교사가 되었으며, 민간 어린이집 교사로 채용된다. 1부는 그녀가 일하던 민간 어린이집이 문을 닫으면서 과거에 자원봉사자로 활동했던 저변 탁아소로 돌아오는 것으로 시작된다. 집권당이 노동당에서 보수당으로 바뀌면서 민간 보육 기관으로 향하던 복지예산의 상당 부분이 축소되었기 때문이다. 그런 점에서 『아이들의 계급투쟁』은 단순한 ‘보육일지’라기 보다는 보육 현장 최전선에서 기록한 ‘투쟁일지’에 가깝다. 그녀가 돌아간 탁아소는 영국 브라이턴에 소재한 하층계급 주민들을 돕는 기관에 소속되어 있다. 탁아소는 스스로를 영국 생활수준의 최하위권이라고 명시히고 있으며, 그렇기에 흔히들 ‘저변 탁아소’라고 부른다. 책에선 1부와 2부의 내용을 구분하기 위해 보육기관으로 향하는 예산이 긴축된 시점의 1부를 ‘긴축 탁아소’라 부르고, 노동당이 집권하던 시기이자 미카코가 보육 봉사를 하던 시기의 2부를 ‘저변 탁아소’라고 부른다.

   평소 슬프거나 감동적인 작품을 봐도 잘 울지 않는 나지만, 이 책을 읽으면서는 수시로 눈가가 촉촉해졌다. 저자는 저변의 이야기를 다루며 감정적인 호소를 하기 보다는, 보육과 가족, 인종, 복지, 국가에 대한 문제들을 다각도로 보여주면서 그 어떤 것도 ‘정답’이나 ‘정의’처럼 보이지 않게 만들기 때문이다. 이런 저자의 이야기는 마치 영화감독 켄 로치의 영화를 떠올리게 한다. 켄 로치는 자신의 영화들에서 ‘희망’을 제거하고 적나라한 ‘현실’을 드러내는 것에 집중하는데, 그러한 방식에서 오는 현실의 답답함이 나에겐 훨씬 감정적인 동요를 만들어 낸다. 미카코는 최하층 계급 아이들과 그들의 보호자들의 삶에 깃들어 있는 불안정성을 담담하게 드러낸다. 어떤 것이 정의인지, 누구의 잘못인지, 결코 쉽게 판가름 할 수 없다.

 

 

 

 

                           

브래디 미카코와 『아이들의 계급투쟁』

 

 

'좋은 환경'에서 자랄 권리?

   내가 책을 읽으면서 가장 익숙하지 않았던 부분은 ‘아이는 사회가 키운다’는 슬로건으로 대표되는 영국의 아동복지제도였다. 아이에게 폭력을 가한다던가(방치, 음식 미제공, 물리적 폭력 등), 부모의 생활상이 부적절하다고 판단되면 사회복지사가 아이를 데려가 다른 수양부모에게 연결하는 구조다. 이는 문제 가정에서 아이를 구출하는 일이면서, 동시에 ‘영국 사회에서 살아갈 능력’이라는 ‘정상성’을 만들어내는 일이기도 하다. 부모가 명백하게 폭력을 저지르고 있다면 당연히 아이를 구출해야 하겠지만, 아이를 방치하는 것인지 아이의 독립성을 기르는 과정인지 애매하다면 어떻게 해야 할까? 아이에게 가하는 폭력의 범주는 어디까지이며, 사회적 삶이 불가능하다고, 부모에게 개선의 여지가 없다고, 국가는 그것을 어떻게 판단할 수 있을까? 미카코는 튀니지에서 온 이민자와 그녀의 두 아이를 이야기한다. 튀니지 어머니는 두 아이를 아주 엄격하게 길렀다. 아이에게 체벌이나 차별적 발언을 서슴지 않았기에, 큰아이는 반항심이 세고, 작은 아이는 정서 발달이 살짝 느리게 보였다. 하지만 미카코가 보기에는 꼭 학대받고 있다고 보이지도 않았다.

 

“작은 아이는 언어 발달은 좀 느리지만 손끝이 야무지고 표적이나 몸으로 감정을 잘 표현하고 있어요. 학대받는 유아라면 그렇게 자라지 못해요. 지금 신세지고 있는 친척집이 경제적으로 힘든 모양이라 세끼 식사가 불가능할 수는 있는데…. 그런데 이 센터는 그런 가족을 돕는 곳이잖아요. 그리고 엄격한 부모 밑에서 자란 아이들이 반항하는 건 보편적이라고 생각하는데.”    

브레디 미카코, 노수경 역, 『아이들의 계급투쟁』, 사계절, 81쪽.

 

미카코는 ‘복지’에 신고해서 아이들을 구출하는 대신 어머니가 잘 키워나갈 수 있도록 도울 수 있을 거라고 판단했다. 과거의 탁아소와 탁아소가 속해있는 주민 센터 멤버들이었으면 분명 그렇게 했을 것이라면서. 하지만 입사한지 얼마 안 된 센터 직원은 딱 잘라 답한다.

 

“그 엄격함에 체벌이 포함된다면 그건 학대입니다.”    같은 책, 81쪽.

 

   ‘이민 가정’이 가진 다양한 문화적 배경에 대한 고려 없이, 법이 규정하는 ‘정상성’에 따라 특정한 양육 방식을 규정하는 것만이 정당한 것일까? 모든 아동이 좋은 환경에서 자랄 권리를 갖는다는 것에는 백번 천번 동의할 수 있다. 그런데, ‘좋은 환경’은 도대체 어떤 환경일까? 영국과 같은 서구 선진국의 법규에서 규정하고 있는 환경만이 ‘좋은 환경’일까? 튀니지의 이민자는 아직 서구화가 ‘덜’ 되었기 때문에 ‘좋은 환경’을 아이에게 제공할 수 없는 걸까? 서구 선진국과 그 외의 문화권 사이의 줄 세우기를 피하면서 공통의 기준을 생각해 내는 일은 어렵다. ‘정의’란 도대체 무엇일까?

   저자도 할 수 있는 최선을 다하지만, 실제로 일이 잘 풀리는 경우는 드물다. 튀니지 어머니와 아이들은 그 뒤로 센터에 모습을 비추지 않았고, 미카코의 역량으로 더 이상 할 수 있는 일은 없었다.

 

“당연하게도 아이에게든 어른에게든 가장 가르치기 어려운 것은 언어가 아니라 그 나라에서의 ‘정상성’이다.             같은 책, 76쪽

 

 

정상을 벗어라

   현실이 아무리 어려운 문제들을 재기한다하더라도, 그녀는 그곳을 떠나지 않고, 떠날 수도 없다. 미카코는 아이들과 함께 보내는 매일매일 속에서 그때그때 문제를 고민하고, 최선의 답을 내려 애쓴다. 그녀는 저변 탁아소를 회상하며 그 때의 아이들이 더 변칙적이고 폭력적이었다고 말하지만, 그래도 그 시절을 그리워한다. 이건 단순히 과거여서, 그 당시 정권이 노동당이어서는 아닐 것이다. 그 당시 같이 일하던 사람들의 성향을 포함한 전반적인 사회적 분위기가 더 공동체적이었기 때문이다. 2부에 나오는 저변 탁아소에는 ‘정상’은 아니더라도 회생 가능성이 보이는 가정을 상대로 눈을 감아주는 사회복지사들, 아이뿐만 아니라 학부모들과도 적극적으로 관계를 맺으며 문제를 해결하려고 노력하던 주민 센터와 탁아소 직원들이 존재했다. 그때에 비하면 긴축 탁아소는 칼같이 자르는 주민 센터 직원과 복지사들, 불안정한 삶 속에 고립되어 관계를 맺지 못하고 더욱 예민해진 부모들의 이야기가 주를 이룬다. 그것은 아이들이 자라야할 ‘좋은 환경’이 비단 ‘법’을 정확하게 적용해야만 하는 문제가 아니라는 점을 보여준다. ‘저변 시절’과 ‘긴축 시절’의 차이가 거기서 드러난다. 저변 시절에는 ‘하층계급’으로써의 공동체성을 가지고 있었다면, 긴축 시기에는 그 안에서도 인종, 계급, 장애와 비장애 등으로 서로를 분리시키는 경향이 더욱 강해진 것이다. 그렇기에 저자는 저변 탁아소가 가졌던 공동체성에 더 가치를 두려는 것으로 보인다. 나는 그런 저자의 의견에 동의한다. 나 또한 공동육아 출신인데, 이를 통해 새로운 가족 공동체의 가능성을 보았기 때문이다.

 

 

비-정상 가족

   내가 나온 공동육아는 협동조합으로 학부모 조합원들이 운영에 참여하여 아이들을 함께 키우는 형태의 어린이집이었다. 내가 한창 어린이집을 다니던 시절, ADHD가 의심되는 한 아이에 대해 갑론을박이 터졌다. 그 아이가 다른 아이들에게 안 좋은 영향을 끼치지 않겠냐며 그 아이를 내보내자고 주장하는 조합원이 나타난 것이다. 우리 어머니는 설령 그렇다 하더라도 공동육아에서 쫓겨난 아이는 어디를 갈 수 있겠냐며 맞서다가 결국 둘 다 조합을 나오게 된다. 그 덕에 어린이집을 1년 조기 졸업한 나는 별일 없이 학교에 진학했고, 그 이후 내가 그 어린이집과 다시 얽히게 되리라고는 생각지도 못했다.

   하지만 고등학교를 갈 때쯤 ‘터전살이’라는 행사에 초대받는다. 터전살이는 어린이집을 졸업한 친구들이 모여 하룻밤을 지내는 연말 행사였다. 1기 졸업생이었던 내 또래 친구들부터 갓 졸업한 초등학생 1학년까지 모이는 이 행사가 나는 정말 인상 깊었다. 지금은 춘천에 남아있는 친구들도 적고, 각자 하는 일도 정말 다르지만 매년 같은 ‘터전’에서 추억을 나누다 보면 정말 가족 같은 느낌이 난다. 동기 친구들과는 아주 각별한 사이가 되고, 잘 몰랐던 한두 살 터울의 동생들, 심지어 갓 졸업한 초등학생들과도 긴밀한 관계가 된다.

 

 

나들이 미션 중 하나였던 '조 별로 셀카 찍기'를 수행 중인 모습
연예인이 될 거라던 도영이(오른쪽 키 큰 친구)는 정말 단역 배우로 데뷔를 했다.

 

 

   이런 관계를 뭐라고 불러야 할까? 친한 친구들? 고향 친구들? 아무래도 내가 느끼는 정서로는 ‘가족’만한 것이 없다. 만약 지금과 같은 제도로서의 가족, 정상성의 범주로서의 ‘가족’이 문제라면, 아예 이렇게 어떤 정서상태를 공유하는 집단을 이르는 말로 ‘가족’이라는 말을 마구 써보면 어떨까? 처음엔 학부모들을 중심으로 이루어졌던 관계에서, ‘터전살이’를 통해 학부모들 없이도 특이한 관계성이 만들어진 것처럼 말이다. 공간이 없어진 올해는 또 어떤 형태가 될지 모르겠지만, 전처럼 밥을 해 먹고, 나들이를 가고, 수건을 돌릴 수 있었으면 좋겠다.

   미카코가 겪은 이야기들 속에서도 그와 같이 어떤 공통성을 새롭게 만들 가능성을 엿볼 수 있는 에피소드가 많다. 탁아소를 졸업할 시기에 부모가 교도소에 들어가 갈 곳이 없어진 로자리는 탁아소 원장과 함께 살면서 새로운 형태의 가족이 되었다. 언더클래스의 전형인 10대 불량아 비키는 탁아소에서 자신의 동생을 돌봐주는 미카코의 모습에 감동해 탁아소에서 자원봉사를 신청했고, 보육교사 자격증을 취득했다. 이렇게 놓고 생각해 보면 ‘공동체’의 ‘공동’을 막고 있는 것은 ‘가정된 정상성’일지도 모르겠다는 생각이 들었다.

   현실은 사방으로 뻗어나가고, 다음 일이 어떻게 될지는 아무도 모른다. 춘천의 공동육아도 없어졌고, 영국 저변의 탁아소도 결국 없어졌다. 그런 와중에 우리가 믿을 수 있는 것은 다른 누군가와 연결되어 있다는 것, 언제든 연결될 수 있다는 것이 아닐까? 크게 보는 사회는 여전히 분열적이고 혼란스럽지만, 바닥까지 내려앉아서 본 저변 바닥에는 가능성들이 굴러다닐지도 모른다.

 

 

“분열된 영국 사회에 대한 분석은 학자나 평론가, 저널리스트에게 맡기면 된다. 땅 위에 발을 딛고 사는 우리가 해야 할 일은 이 단절을 조금씩이라도, 단 1밀리미터씩이라도 좁히는 것이다.”

같은 책, 168쪽

 

 

댓글 2
  • 2023-09-11 20:14

    이래저래 육아 환경이 점점 나빠지고 있는 것이 우리나라만이 아니라 영국도 그렇구나.......
    신자유주의의 첨병이었던 대체리즘만이 그 원인이 아니겠지만, 그 열차 의 선로를 따라가고 있는 지금의 자본주의 열차에서는......ㅠ

  • 2023-09-13 18:08

    단절을 좁히는 길은 우현처럼 질문을 던지는 것, 그 끈을 놓지 않는 것이 아닐까 싶네요. 잘 읽었어요. 춘천에 며칠 다녀온 듯한 느낌도 들었어요. 고맙습니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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치매 이후에도 삶이 있다 『내가 알던 그 사람』(2018), 웬디 미첼       지난번 1234에서 ‘유쾌한 치매관계를 위한 상상력 한 자밤’이 필요하다는 것을 알게 되었고 그 상상력 한 자밤을 얻어 볼까 하고 『내가 알던 그 사람』을 골랐다. 저자 웬디 미첼은 영국의 국민건강보험공단에서 20년간 근무하던 중이었다. 이혼 후 청소부를 하며 싱글맘으로 두 딸을 키우다가 이직을 하고, 뛰어난 기억력과 일처리 능력 덕분에 간호사의 근무일정을 작성하는 복잡한 업무처리 팀의 노련한 팀장이 되었다. ‘아니야, 그럴 리 없어’라고 생각했지만 58세에 알츠하이머 초기 진단을 받은 웬디. ‘내가 알던 그 사람’은 치매 이전의 자신을 말한다. 85세가 아니고 58세라니! 엄마의 상상의 세계만이 문제가 아닐 듯하다.                                                         감정의 책꽂이를 채우다   웬디는 이미 짐작하고 있었지만 의사가 ‘알츠하이머’와 ‘치매’라는 두 단어를 말하는 순간은 그냥 멍하다. 치매진단을 받을 준비가 되어있는 사람이 있을까. 내가 아는 인생을 훔쳐갈 단어. 치매는 이렇게 ‘들이닥치고’ 그 이유조차 모른다. ‘거대한 시꺼먼 블랙 홀’, 완전히 백지상태였다. 그리고 거기에는 ‘나’ 자신이 없었다. 즉 아무것도 할 수 없었다. 그동안 머릿속이 목화솜이 반쯤 차 있는 것처럼 뿌예지고, 조깅을 하다가 이유 없이 넘어지고, 포크를 떨어뜨리고, 생각한 것만큼 말할 수 없고, 밑도 끝도 없는 피로감이 느껴졌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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인디언
2023.09.18 | 조회 459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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차별은 없다, 정말입니까?             『차별하는 구조 차별받는 감정』(2023), 이주희     감정사회학을 접하면서 제일 먼저 왔던 현타는 ‘지금 내 감정이 내 것이 아닐 수 있다’는 것이었다. 감정은 자발적이고 은밀한 나만의 본질같은 것이라기보다 구조적으로 만들어지고, 관리되고, 연출된다는 것. 『차별하는 구조 차별받는 감정』은 바로 그런 ‘감정’과 ‘구조’의 은밀한 콜라보에 ‘차별’이라는 다소 버거운 주제를 함께 이야기 한다.         처음엔 ‘차별’이라는 주제에 오히려 좀 식상한 느낌이 들었다. 그러나 ‘나는 차별받으며 혹은 차별하며 살아온 사람일까?’라는 물음에 이내 답이 떠오르지 않는 것을 보며, 차별이 식상한 주제가 아니라 그만큼 우리가 이미 ‘차별’에 너무 익숙해져서 버린 것은 아닐까하는 생각이 들었다. 차별받지 않고 평생을 살아갈 수 있는 사람은 없을 테니 말이다. 혹은 식상하다는 이 느낌은 아마 차별을 없애기 위한 여러 가지 시도들이 더뎌지고 희미해지고 무산되는 과정에서 번번이 느꼈던 익숙한 실망감이거나, 그도 아니면 너무 어마한 주제에 대한 무기력감의 다른 이름일지도 모르겠다. 어쨌든 한마디로 언급하기엔 좀 불가능하지만 ‘감정’, ‘구조’, ‘차별’ 이라는 어마무시한 삼총사를 1234를 통해 ‘아무튼’ 만나 보았다.     차별은 ‘구조’와 맞물려 있다 『차별하는 구조 차별받는 감정』에서 저자는 우리가 차별에 둔감한 이유는 우리 각자가 서로 다른 성향인 이유도 있겠지만 무엇보다도 구조 속에 숨어 들어간 차별을 식별해내기가 쉽지 않기 때문이라고 강조한다. 차별은 차별하는 이나 차별당하는 사람의 문제가 아니다. 오히려 조직과 국가, 그리고 여러 신념체계가 복합적으로...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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스르륵
2023.09.17 | 조회 405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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현실이 상상으로, 상상이 다시 현실로 동은       1. 빛나는 정지된 순간    몇 년 전 여울아쌤과 탕누어의 <한자의 탄생>을 읽으면서 받았던 여운은 지금까지도 남아있다. 탕누어가 다양한 주제로 소개하는 한자들을 경험하며 한자에 담겨있는 고대의 시대상을 느낄 수 있었고, 그때 느꼈던 영감과 자극 덕분에 한자로 어떤 이야기를 해볼 수 있겠다고 생각하기 시작했다. 그 이후로 나는 입이 닳도록 한자는 재미있고, 흥미롭고, 나에게 깨달음을 준다고 말해왔다. 그런데 과연 그것을 얼마나 잘 전달하고 있을까? 최근 <한문이 예술> 글을 쓰면서 내가 느끼는 재미와 사람들에게 잘 전달하는 건 전혀 다른 문제라는 걸 서서히 실감하고 있다. 요즘에는 그 문제의 원인이 (당연한 말이지만 이제야) 알고 있는 지식과 배경이 너무 짧고 얕고 좁아서 그 한계가 드러나고 있는 것이 아닐까 하는 생각이 든다.     이번에 읽게 된 <한자의 풍경>은 탕누어와는 다른 방식으로 한자의 경이로움을 전달하고 있었다. 구체적인 고고학적 자료와 유물 조사의 기록, 시대적 배경과 흐름, 최근까지 계속 달라지고 있는 담론을 소개하면서 비교적 추상적이고 짐작되는 내용보다는 실재적이고 사실에 근거하는 한자를 설명하고 있기 때문이다. 굉장히 학술적인 책이라고 생각됐지만 저자는 동시에 한자가 갖고 있는 힘과 경이로움을 놓치지 않는다.   한자의 기원을 찾아가다 보면 빛나는 정지된 순간을 만나게 된다. (6)     저자는 형태에 의미가 남아있는 한자의 특성상 문자가 만들어진 순간을 파헤치다 보면 문자를 만들어 낸 사람이 세상을 바라본 경외심을 느낄 수...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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동은
2023.09.11 | 조회 322
    정상을 벗어난 관계 - 브래디 미카코, 『아이들의 계급투쟁』 리뷰           『아이들의 계급투쟁』. 나는 이 제목을 보고 아프리카 아이들이 직접 투쟁을 벌이는 이야기일 것이라고 생각했다. 계급 불평등에 분노하는 어른들, 그리고 그에 동화된 아이들의 이야기가 아닐까 걱정했지만, 책에선 전혀 다른 내용들이 펼쳐졌다. 이 책의 저자는 일본계 영국인 브래디 미카코로, 책은 미카코가 오랫동안 보육교사로 활동해온 이야기를 담고 있다. 2부는 그녀가 처음 보육 봉사를 시작했던 영국 저변에 위치한 탁아소의 이야기이다. 미카코는 저변 탁아소의 활동을 인정받아 정식 보육교사가 되었으며, 민간 어린이집 교사로 채용된다. 1부는 그녀가 일하던 민간 어린이집이 문을 닫으면서 과거에 자원봉사자로 활동했던 저변 탁아소로 돌아오는 것으로 시작된다. 집권당이 노동당에서 보수당으로 바뀌면서 민간 보육 기관으로 향하던 복지예산의 상당 부분이 축소되었기 때문이다. 그런 점에서 『아이들의 계급투쟁』은 단순한 ‘보육일지’라기 보다는 보육 현장 최전선에서 기록한 ‘투쟁일지’에 가깝다. 그녀가 돌아간 탁아소는 영국 브라이턴에 소재한 하층계급 주민들을 돕는 기관에 소속되어 있다. 탁아소는 스스로를 영국 생활수준의 최하위권이라고 명시히고 있으며, 그렇기에 흔히들 ‘저변 탁아소’라고 부른다. 책에선 1부와 2부의 내용을 구분하기 위해 보육기관으로 향하는 예산이 긴축된 시점의 1부를 ‘긴축 탁아소’라 부르고, 노동당이 집권하던 시기이자 미카코가 보육 봉사를 하던 시기의 2부를 ‘저변 탁아소’라고 부른다.    평소 슬프거나 감동적인 작품을 봐도 잘 울지 않는 나지만, 이 책을 읽으면서는 수시로 눈가가 촉촉해졌다. 저자는 저변의 이야기를 다루며 감정적인 호소를 하기 보다는, 보육과...
    정상을 벗어난 관계 - 브래디 미카코, 『아이들의 계급투쟁』 리뷰           『아이들의 계급투쟁』. 나는 이 제목을 보고 아프리카 아이들이 직접 투쟁을 벌이는 이야기일 것이라고 생각했다. 계급 불평등에 분노하는 어른들, 그리고 그에 동화된 아이들의 이야기가 아닐까 걱정했지만, 책에선 전혀 다른 내용들이 펼쳐졌다. 이 책의 저자는 일본계 영국인 브래디 미카코로, 책은 미카코가 오랫동안 보육교사로 활동해온 이야기를 담고 있다. 2부는 그녀가 처음 보육 봉사를 시작했던 영국 저변에 위치한 탁아소의 이야기이다. 미카코는 저변 탁아소의 활동을 인정받아 정식 보육교사가 되었으며, 민간 어린이집 교사로 채용된다. 1부는 그녀가 일하던 민간 어린이집이 문을 닫으면서 과거에 자원봉사자로 활동했던 저변 탁아소로 돌아오는 것으로 시작된다. 집권당이 노동당에서 보수당으로 바뀌면서 민간 보육 기관으로 향하던 복지예산의 상당 부분이 축소되었기 때문이다. 그런 점에서 『아이들의 계급투쟁』은 단순한 ‘보육일지’라기 보다는 보육 현장 최전선에서 기록한 ‘투쟁일지’에 가깝다. 그녀가 돌아간 탁아소는 영국 브라이턴에 소재한 하층계급 주민들을 돕는 기관에 소속되어 있다. 탁아소는 스스로를 영국 생활수준의 최하위권이라고 명시히고 있으며, 그렇기에 흔히들 ‘저변 탁아소’라고 부른다. 책에선 1부와 2부의 내용을 구분하기 위해 보육기관으로 향하는 예산이 긴축된 시점의 1부를 ‘긴축 탁아소’라 부르고, 노동당이 집권하던 시기이자 미카코가 보육 봉사를 하던 시기의 2부를 ‘저변 탁아소’라고 부른다.    평소 슬프거나 감동적인 작품을 봐도 잘 울지 않는 나지만, 이 책을 읽으면서는 수시로 눈가가 촉촉해졌다. 저자는 저변의 이야기를 다루며 감정적인 호소를 하기 보다는, 보육과...
우현
2023.09.11 | 조회 165
세미나 에세이 아카이브
흐름으로서의 세계  『운행과 창조』 프랑수와 줄리앙     예전에 어떤 다큐에서 서양 사람들과 동양 사람들의 사고가 얼마나 다른지에 대한 영상을 본 적이 있다. 물고기가 들어있는 수조를 보여주고 이후에 기억나는 것을 이야기하도록 하는데 서양 사람들은 주로 물고기의 움직임에 대해서 이야기를 했고, 동양 사람들은 수조 안에 수초나, 돌이 놓인 위치 등 물고기뿐 아니라 배경에 대한 묘사를 꼭 넣어서 이야기를 했다. 주체를 중시하는 서구인에 비해 배경을 고려하는 동양인에게는 ‘관계’가 중요하다는 것이 그 다큐의 마무리였다. 얼핏 보기에는 프랑수아 줄리앙의 책들도 그 다큐와 비슷해 보인다. 서구사상과 동양사상을 비교하는 것이 말이다. 『운행과 창조』 역시 동양의 ‘운행(運行)’을 서구의 ‘창조(創造)’와 비교하며 동양사상의 특징을 서술하고 있다. 다른 게 있다면 줄리앙의 책은 ‘어렵다’     왕부지의 『주역』   줄리앙의 책이 어렵다는 선입견을 갖게 된 것은 『맹자와 계몽철학자의 대화』를 읽은 뒤였다. 동양 철학을 공부한 지 얼마 되지 않아서 맹자도 잘 모르는데, 칸트까지. 어려움이 이중 삼중으로 느껴졌다. 그 뒤에 만나는 줄리앙의 책은 공부를 하는 만큼만 쉬워졌다. 그리고 이 책 『운행과 창조』는 제일 먼저 만났던 『맹자와 계몽철학자의 대화』만큼, 어렵다. 왜냐하면 맹자와 칸트가 낯설었던 만큼, ‘왕부지’가 낯설기 때문이다. 왕부지(王夫之:1619~1692)는 명말청조의 학자이다. 그가 과거에 막 합격했던 시기에 ‘이자성의 난’ 등 민란이 일어나 관직에 나가지 못했다. 명나라가 멸망하고 청나라가 세워지는 과정에서 그는 항청(抗靑) 투쟁을 했으나 그의 바람과 달리 청나라의 세력은 더욱 강고해졌다. 말년에 왕부지는 청에 대한...
흐름으로서의 세계  『운행과 창조』 프랑수와 줄리앙     예전에 어떤 다큐에서 서양 사람들과 동양 사람들의 사고가 얼마나 다른지에 대한 영상을 본 적이 있다. 물고기가 들어있는 수조를 보여주고 이후에 기억나는 것을 이야기하도록 하는데 서양 사람들은 주로 물고기의 움직임에 대해서 이야기를 했고, 동양 사람들은 수조 안에 수초나, 돌이 놓인 위치 등 물고기뿐 아니라 배경에 대한 묘사를 꼭 넣어서 이야기를 했다. 주체를 중시하는 서구인에 비해 배경을 고려하는 동양인에게는 ‘관계’가 중요하다는 것이 그 다큐의 마무리였다. 얼핏 보기에는 프랑수아 줄리앙의 책들도 그 다큐와 비슷해 보인다. 서구사상과 동양사상을 비교하는 것이 말이다. 『운행과 창조』 역시 동양의 ‘운행(運行)’을 서구의 ‘창조(創造)’와 비교하며 동양사상의 특징을 서술하고 있다. 다른 게 있다면 줄리앙의 책은 ‘어렵다’     왕부지의 『주역』   줄리앙의 책이 어렵다는 선입견을 갖게 된 것은 『맹자와 계몽철학자의 대화』를 읽은 뒤였다. 동양 철학을 공부한 지 얼마 되지 않아서 맹자도 잘 모르는데, 칸트까지. 어려움이 이중 삼중으로 느껴졌다. 그 뒤에 만나는 줄리앙의 책은 공부를 하는 만큼만 쉬워졌다. 그리고 이 책 『운행과 창조』는 제일 먼저 만났던 『맹자와 계몽철학자의 대화』만큼, 어렵다. 왜냐하면 맹자와 칸트가 낯설었던 만큼, ‘왕부지’가 낯설기 때문이다. 왕부지(王夫之:1619~1692)는 명말청조의 학자이다. 그가 과거에 막 합격했던 시기에 ‘이자성의 난’ 등 민란이 일어나 관직에 나가지 못했다. 명나라가 멸망하고 청나라가 세워지는 과정에서 그는 항청(抗靑) 투쟁을 했으나 그의 바람과 달리 청나라의 세력은 더욱 강고해졌다. 말년에 왕부지는 청에 대한...
진달래
2023.09.11 | 조회 201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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