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아무튼감정4]나의 돌봄일지
스르륵
2022-07-04 10:11
230
올 초부터 피곤하다는 말을 입에 달고 살고 있다. 이유를 말해보라면 딱히 특별할 건 없다. 오랫동안 계획했던 집을 지었고, 부모님들이 좀 아프시고, 그럴 나이가 되어서 그런지 몸도 여기저기서 노화의 징후를 보인다. 한마디로 돌보고 관리할 것들이 늘어난 것이다. 아이들 수능 뒷바라지를 끝으로 돌봄 노동에서 해방인 줄 알았는데 오산이었다.
지루한 이야기
요즘은 어딜 가나 <나의 해방일지> 이야기다. 내가 한 줄 한 입 더 보태지 않아도 이미 해방과 추앙과 구씨에 대한 밀도 있는 분석과 찬사가 끊이지 않는다. 나 역시 허전은 하지만 황량하지는 않은 산포시라는 배경이 좋았고, 구씨의 극한의 대사 없음이 신선했다. 극중 미정의 대사처럼 ‘말로 사람을 홀리려는 의지를 보이지 않는’ 드라마 같아 좋았고, 동시에 젊은 청년들의 대사 하나하나에 눈을 뗄 수 없었다. 그러면서도 나는 산포씽크의 안주인인 혜숙엄마가 거슬렸다.
때 되면 어김없이 차려지는 그 정확한 밥상이 거슬렸고, 가짓수 많은 반찬들과 김치통 안 그득한 김장김치가 거슬렸고, 커피와 미숫가루 속 어김없이 들어간 시원한 얼음 조각들이 거슬렸다. 또, 무릎 위 선명한 수술 자국과 무엇보다도 남편과 자식들 사이에서 눈치 보며 찡그리다 결국 할 말을 삼키고 마는 그녀의 한숨이 거슬렸다. 그러나 “아이고 염병! 논두렁에 꼴아 박히고 나서도 밥을 안쳐야 하다니...” 처음으로 정확한 신세 한탄을 하고 며칠 뒤 밥을 안쳐놓은 채로 방안에서 돌아누워 말없이 세상을 떠난 것에 비하면 이건 아무것도 아니다.
짜기라도 했을까. 같은 시기 방영된 <우리들의 블루스>에서 옥동 엄마 역시 아들 동석과의 오랜 불화를 해결한 후 암으로 얼마 남지 않은 마지막 생명의 기운을 아들의 된장찌개를 정성스레 끓이는데 쏟아붓고는 그걸 먹는 아들의 모습은 채 지켜보지도 못하고 밥상머리 앞에서 숨을 거두었다. 이쯤 되면 대한민국 엄마의 해방은 역시 별 뾰족한 대안이 없음을 두 작가가 함께 공동선언이라도 한 것일까. 아니면 작금의 현대인들에게 이런 ‘말도 안되는’ 과거의 향수 어린 서사를 통해 어떤 무언의 반어법을 쓴 것인지...모르겠다.
그 수많은 애씀에 기대어 한 인간의 ‘인간됨’이 가까스로 유지된다.
( 『새벽 세시의 몸들에게』, 104쪽)
일개 일꾼 구씨도 자기 일이 끝나면 차려주는 밥상을 먹고 술 마시고 쉰다. 가족 모두 일터에서 돌아오면 엄마의 밥상과 빨래와 청소를 당연스레 받아들고 다시 일터로 향하고, ‘해방’과 ‘사랑’과 ‘추앙’과 ‘자아’를 지키려 애쓰고 꿈꾼다. 기정과 창희와 미정의 해방일지, 그리고 제호아빠의 가부장적 권위는 혜숙엄마의 돌봄에 기대어 있지만 누구나 다 ‘아는’ 그 사실을 새삼스레 호명하고 사회적으로 드러내는 일은, 21세기에는 너무 지루하고 뻔한 이야기가 될 뿐이다.
피곤한 이야기
‘돌봄 노동’을 정의하자면, 다른 사람에게 의존을 해야 하는 환자나 노인, 어린이와 같은 사람을 돌보는 모든 활동을 이른다. 그러니 엄밀히 따지고 보면 혜숙엄마가 시원한 커피를 위해 얼음을 띄우고, 김장을 위해 시장을 봐오고, 가족의 밥상을 쉴 새 없이 차리는 일과 내가 집을 관리하고, 노화된 내 몸을 돌보고, 수능 뒷바라지를 하는 것은 경제학적인 의미에서 돌봄 노동이라 부를 수 없다. 하여 이는 그저 돌봄에 관련된 이야기라 하면 되겠다.
혜숙엄마의 가사노동을 다른 방식으로 호명해보자. 저임금 노동도 아니고 실업이라고도 부를 수 없는 임금 노동의 필수적 보완물로서 일리히는 ‘그림자 노동’을 호명했다. 하여 혜숙엄마의 노동은 제호아빠의 노동과는 엄밀히 구분되는데, 이는 제호아빠나 그 집 삼형제가 임금 노동을 하려면 혜숙엄마의 그림자 노동이 없으면 불가능함을 의미한다. 또 다른 식으로 말하자면 산포씽크 가족의 노동 생산물은 공식적으로 국내 총생산에 합산되는 ‘보이는’ 노동이지만 혜숙엄마의 생산은 합산은커녕 집계 자체가 ‘불가능한’ 노동의 결과물이다.
경제 영역에서 비시장 노동이 제외된 이유는 계산에 기반된 교환이라기보다 도덕적 책임 영역으로 간주 되었기 때문이다. ( 『돌보지 않는 가슴』, 낸시 폴브레, 108쪽)
혜숙엄마처럼 집에서 가사노동만을 하는 엄마는 예전보다는 줄었다. 더이상 전통적인 규범에 덜 얽매이기도 하고, 또 시장과 가정의 경계가 흐려지면서 ‘엄마의 일’이 점점 시장이라는 무대 위로 아웃소싱되었으며, 무엇보다도 경쟁적 노동 시장이 커지면서 가부장적인 권력에도 균열이 일어났기 때문이다. 그러나 여성은 이렇게 변했지만 시장의 이기적인 ‘보이지 않는 손’들은 변하지 않았다. 여전히 돌봄의 윤리는 여성들에게 주입되고, 우리 문화는 끊임없이 돌봄을 여성에 관련된 용어로 정의한다. 하여 혜숙엄마를 과로사로 몰고 간 한숨과 참을성은 그녀의 타고난 감정적 기질이라기보다는 사회적·문화적 재생산물에 가깝다.
‘높은 참을성이란 결국 그런 상황에 더 많이 노출되는 것과 방어수단이 적은 것이 조합된 결과’일 뿐이다. ( 『감정노동』, 앨리 러셀 혹실드, 226쪽)
감정 사회학 세미나를 신청하면서 작은 실수를 하나 했었다. ‘감정’이라는 글자는 크게 보고 ‘사회학’이란 글자는 작게 보는 실수 말이다. 감정은 늘 그렇듯 심리학적 일거라 생각했고 사회학은 ‘사알못’이었기에 일어날 수밖에 없는 필연적인 결과였다. <감정 자본주의>에서 일루즈가 말하듯 감정은 심리단위이지만, 그 이상으로 사회관계와 문화의미들의 집약체이기에 말이다. 수많은 근대 사회학자들은 감정과 사회적 현상을 분리한 적이 없었다.
하여 사회적 배치는 많은 경우 감정적 배치와 결을 함께 해왔다. 예를 들어 전 세계 사회적 조직 중에서 가장 근본적인 구분인 남녀 구분 역시 감정 문화를 토대로 한다. 예를 들어 남자는 용기, 냉정함, 합리성과 훈련된 공격성을 주입받고, 여자는 친절과 동정심과 명랑함을 요구당하는데 이때 감정을 자제하는 듯 보이는 ‘객관성에 대한 이상’은 모종의 남성적 모델로, 보이지 않게 상대방의 안녕을 강화, 찬양, 고무시켜주는 ‘친절한 가슴’은 여성적 모델로 규정된다.
워싱턴 타임즈는 전국가족수발협회 등을 통한 연구(1992년)에서 가족이 공짜로 제공하는 돌봄 노동의 가치가 연간 1960억 달러라 추정했다. 우리나라는 요양보호사의 93.8%가 여성이다. 그리고 미국 전체 노동자의 3분의 1은 아주 높은 수준의 감정 노동에 종사하는데 이중 여성 노동자의 절반이 감정 노동에 종사한다. 보이거나(직장), 보이지 않는(가정) 곳곳에서 돌봄 노동과 감정 노동은 여전히 젠더 불평등과 감정과 돌봄의 불평등이라는 과로의 위험한 바퀴를 은밀히 돌리고 있다.
네버앤딩 스토리
남편들은 아이나 부모 돌보는 일을 대부분 아내에게 넘긴다. 아내들도 할 수만 있다면 이런 일들을 아이 돌보미나 노인 요양사에게 맡긴다. 결국 이민자 출신들이 이런 일을 맡게 되는데 이 사람들도 고향의 자기 아이를 돌볼 또 다른 돌보미를 고용한다. 이렇게 해서 서로 꼬리에 꼬리를 문 돌봄 사슬이 형성된다. 그렇게 돌봄은 마치 폭탄 돌리기처럼 성별, 계급, 국가 간으로 이동한다.
누군가를 돌보는 ‘뜨거운 감자’ 같은 그 일을 나 역시 몹시도 두려워했다. 전업주부가 되라 할까봐 아니 정확히는 쓸고 닦고 인내하고 양보해주어야 할 그 일들이 나에게 독박으로 떨어질까 두려워, 과거의 나는 어쩌면 기를 쓰고 직장으로 향했는지 모른다. 그러나 지금 생각해보면 그보다 더 두려웠던 것은 아무도 그 가치를 인정하고 알아봐 주지 않을 거라는 것에 대한 억울함이었다.
돌보는 대상들은 ‘연약’하고 ‘눈에 띄지 않는’다. 아니, 이 세상 돌봐야 될 모든 것들은 어느 정도 ‘보잘것없다’. 이런 이유로 돌봄은 빛이 나기는커녕, 돌보는 자 역시 돌봄의 대상자들과 함께 무채색의 배경으로 처리되기 일쑤다. 선천적 또는 후천적으로 돌봄에 재능과 재미와 보람을 느끼는 사람일지라도 이러한 사회적 낮은 시선과 그것의 연쇄적 작용의 결과인 허약한 시스템 앞에서는 무기력해질 수밖에 없다.
하여 나는 돌봄 이야기를 더이상 쓸 수가 없다. 두어 달 정도 힘들었던 내 간병 일지를, 1년도 채 안 된 새집 관리 이야기를, 그리고 듬성듬성했던 과거 나의 양육과 돌봄, 또 이제 막 시작된 오십견과 노화의 작은 신호들을 저 무수한 혜숙 엄마들과 새벽 세시에도 깨어있을 몸들의 무거운 돌봄에 연결할 재주는 없기 때문이다.
그러나 돌보는 이야기는 누구에게나 언제나 끝나지 않는 ‘스토리’다. 나의 대운과 세운의 천간과 지지는 원국(팔자)에는 없던 공적·사회적 관계와 관리의 기운인 ‘관성’운으로 이제 온통 번쩍이고 있다. 이제껏 정신적 육체적으로 듬성하고 무관심(무지)했던 나의 돌봄 일지는 팔자탓(덕분)으로 돌려보지만 앞으로 다가올 날들은 그렇게 녹록하지 않다. 나도 이제 돌봄 ’새싹등급’ 회원이 되었기 때문이다.
효도하자고 마음먹자 부모님들은 거짓말처럼 십 년은 더 늙어버리시며 병원으로 향하셨다. 말로만 듣던 오십견과 갱년기가 슬그머니 찾아왔고, 이사만 다니면 되었던 집이라는 물건은 울면 젖 주고 안아 줘야 하는 애증의 ‘자식’이 되었다. 공부도 안하며 눈치만 보지만 어쨌든 가슴 묵직한 공부방 회원이 되었고, 동시에 한 마을의 옆집, 앞집, 뒷집이라는 탄탄한 관계 속으로 들어갔다. 수거장에 얌전히 가져다 놓기만 하면 되었던 재활용과 음쓰 녀석들은 주택 살이 최고의 빌런으로 등극하며 ‘돈룩업’의 우주적 비극을 매일 체감 시키고, 자연계의 다양한 생명체(?)들은 일상의 손님으로 부지런히 경계를 넘어 나를 찾아오고 있다. etc.
하여 나는, 나의 육체와 감정을 매 순간 빅뱅의 시험에 들게 하는 이 ‘지루하고, 피곤한’ 돌봄들에서의 해방을 꿈꾼다. 그러나 그 해방이 불가능하리란 것도 안다. 만약 불가능하다면, 나에겐 우리에겐 어떤 ‘저항’이 가능할까? 이제 막 새싹회원에겐 아직은 너무 어려운 이야기이지만 그저 실망하기엔 아직 좀 이르다.
내 주변에는 가족 돌봄을 넘어 자기 돌봄과 타자 돌봄의 길잡이 ‘선수’들이 포진하고 있고, <간병블루스>나 <문학 처방전>, <양생 프로젝트>같은 개인적 경험을 넘어서려는 돌봄 내러티브들이 계속 끊이지 않을 것이며, 무엇보다도 ‘타인의 슬픔을 함께 공부하려는 심장’들이 곁에서 뛰고 있기에, 나는 아마 혜숙엄마처럼 안타깝게 과로사할 가능성은 매우 낮을 것이고, 새벽 세 시에 깨기는 할 것이나 무엇 때문에 깨게 될는지는 오직 모를 뿐, 아직 큰 걱정은 없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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