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아무튼감정3]당신은 누구입니까
김언희
2022-07-04 10:02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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나는 **에 살고 있습니다 : 계란 노른자 vs 계란 흰자
그들(서울 사람들)은 서울 외 모든 도시를 시골이라 불렀다. 그리고, (그들의 관점에서) 시골 출신들이니 당연히 부모님이 농사를 지을거라 생각했다. 딱 <나의 해방일지>의 미정이네 같은 모습을 상상했던 것 같다. 그들은 해맑은 얼굴로 대구에서 온 내게 “너네 아버지 사과 농사 짓니?”라거나, 부산 출신 친구에게는 “(고기 잡으려면) 배 있겠네.”라는 질문을 던졌다. 나와 친구 모두 도심 한가운데서 살았지만, 그들 눈에는 그냥 시골 사람일 뿐이었다.
학기 초 대학 상담실에는 지방에서 올라온 학생들의 상담문의가 제법 있다. 부모라는 울타리를 벗어나 새로운 곳에 적응하는 과정이 힘들기도 하고, 이질적인 문화 경험을 가진 사람들 간의 조화와 조율로 힘들어하는 경우도 많다. 그 중, 아직까지도 선명하게 생각나는 학생이 있다. 1학기 중반을 지날 무렵, 얌전하게 생긴 남학생이 상담실을 찾았다. 상담받고 싶은 내용이 무엇인지 살펴보니 사람들과 대화를 할 수 없어 학교적응이 힘들다고 했다. 내성적인 성향 탓도 있지만 경상도 출신인 자신의 말투와 억양 때문에 사람들이 자꾸 웃는 것 같아 말문이 닫혀버렸다고 했다. 이후, 조금씩 상황이 나아지긴 했지만, 경상도 특유의 말투와 억양이 그 학생에게는 자신을 있는 그대로 드러내는데 장애 요소로 작동했던 듯하다.
드라마 <나의 해방일지> 속 삼남매도 서울 사람은 아니다. 그러나, 그들은 최소한 서울말을 쓰고, 서울에 직장을 가진 사람들이다. 그럼에도 그들은 자신이 거주하고 있는 경기도를 계란 흰자에 비유하며, 계란 노른자로의 입성을 간절히 바란다. 드라마 내내 서울로 대변되는 도시의 팍팍한 삶과 치열한 경쟁, 조금만 실수해도 미끄러져 버리는 현실 속에서 매 순간 감정노동을 하며 버티고 있지만, 그럼에도 그들이 서울을 벗어나 경기도 시골에 머무르진 않는다. 드라마 말미 그들의 해방도 서울이라는 공간 속에서 이루어지는걸 보면, 현대 한국 사회는 ‘서울’, ‘특별시민’으로의 강렬한 욕망에서 벗어나기 힘들다.
나는 **학교 출신입니다 : 인서울 vs 아웃서울
서울 입성에 대한 열망은 직장인에게만 해당되진 않는다. 자녀를 키우는 많은 학부모와 학생들도 그들의 교육적 성과가 일단락되는 수능 앞에서 ‘인서울’로의 강렬한 열망을 드러낸다. 그러나, 안타깝게도 ‘인서울’의 주요 대학은 전체 수험생의 백분위 90%에 들어야 안정적 진입이 가능하며, 경쟁률은 지방 지역 대학 경쟁률보다 세 배 이상 높다. 누구나 욕망하지만 누구나 가질 수 없고, 그러다보니 서울을 기점으로 대학의 위계가 자연스럽게 재편되기에 이르렀다.
입시라는 ‘공정한’ 경쟁에서 시험 성적이 높으면 ‘인서울’ 대학에 진학하고 그렇지 않으면 ‘지방 대학’에 진학한다는 사회적 인식 아래에서, 지방 대학생들은 사회적 관계를 맺으며 자신이 지방 대학생임을 밝히는 과정에서 배제의 경험이나 상대의 기대에 부합하지 못하여 난처해지는 사회적 순간을 맞이하게 된다고 토로한다. “**에 **대 말고 다른 학교가 있었냐?”라거나 “**대는 어디에 붙어 있냐?”, “짭대, 그것도 학교냐? 등록금 아깝다”, “거기 갈 바엔 공무원 공부한다”는 비하와 멸시 발언이 있을 때 그 말을 듣는 당사자는 그 발언에 반박하기보다 자신이 다니는 대학이 ‘지잡대’의 범주에 들어가는지 자기평가를 하게 된다.
고프만은 현대사회에서 도구적 능력(경쟁력)을 갖추지 못한 무능력과 게으름도 여타의 신체적, 정신적 결함과 마찬가지로 낙인의 요소가 된다고 지적했다. ‘인서울’이라는 실체적 공간은 ‘서울’ 내에 위치하지 못한 많은 학생들에게 온전한 자기 존중을 형성할 사회적 경험을 빼앗아 위축과 무기력이라는 감정과 더불어 실패자라는 낙인을 새긴다.
현실은 제가 그런 위치에 갈 수 없는 상황이기 때문인 것 같아요. 국회의원 같은 사람들은 대부분 연고대 출신이고 스펙도 좋고 한 일도 많은데...저는 일단 고등학교 때부터 그런 자리랑 상관이 없어진 것 같아요.
그런데, 한 가지 놀라운 점은 낙인으로 인한 심리적 자기 검열을 지방대 학생이나 경기도 소재의 대학생만큼 계란 노른자의 최중앙에 위치한 S대 학생들도 느낀다고 한다.
**고등학교의 이름을 빛낸 대가로 나는 또 다른 이름을 얻었다. 그 이름은 서울대였다. (중략) 나는 새로 만난 사람들에게 나를 소개할 때마다 “저는 서울대 국어교육과 신**입니다”라고 소개하였다. 그런데 이 소개를 들은 사람들은 나를 이름이 아니라 학교로 기억하였다. 심지어 아예 나를 “서울대”라고 부르는 사람들도 있었다.
나는 서울대생을 많이 만나보지 않은 사람들 앞에서는 서울대를 대표하는 사람이 되는데, 이것은 매우 부담스럽다. 내 행동 하나하나가 서울대인의 전형이라고 생각하니 이는 내가 그 사람에게 다가가기 힘든 이유가 된다.
다만, 학벌주의가 갖는 민낯을 대면했을 때 계란 흰자의 학생들이 모든 것의 책임을 개인에게 귀속시켜 ‘스스로를 무능력하거나 노력을 게을리하는’ 것으로 정당화한다면, S대 학생들은 문제의 근원을 자신에만 귀속시키진 않는다.
불공정함에 화가 나고 억울한 것이 아니라 그저 불편한 이유는, 내가 그 불공정함으로 인한 특혜를 받아온 사람이기 때문이다. 사회가 아닌 사람에 책임을 돌리는 사회, 나는 그 사회의 세뇌 속에 살고 있었다. (중략) 나는 나도 할 수 없는 일을 다른 이들에게 강요하며 왜 더 노력하지 않느냐고 왜 자기 발전에 열정을 쏟아붓지 않느냐고 사람 탓을 했다. (중략) 내가 이룬 것들이 내 노력, 내 능력에 의한 것이라 여기고 노력하지 않은 사람들, 불평만 하는 사람들을 무시했다.
누구나 온전히 자신으로 살고 싶다. 그러나, 실제 우리는 수많은 낙인, 혹은 가치판단 속에 존재한다. 양자가 느끼는 힘듦의 무게가 똑같지 않은 것은 분명하지만, 그럼에도 그들 모두 ‘나’로 살지 못한다고 느낀다. 그래서, 그토록 (있는지 없는지도 모르는) ‘진짜 나’를 갈망하는지 모르겠다. 누가 더 ‘진짜 나’를 갈망하는지 모르지만, 확실한 건 그들을 규정하는 온갖 타이틀을 먼저 내려놓을 수 있는 자가 ‘나’를 좀 더 있는 그대로 볼 확률이 높다는 것이다. 삶의 해방이 ‘인서울’부터 위계적으로 이루어지지 않는 것이 참으로 다행이다.
나는 **한 사람입니다 : 밀려나지 않으려는 자 vs 더 밀려나지 않으려는 자
대학은 3월이 되면 신입생을 대상으로 ‘대학생활적응도 검사’를 실시한다. 검사의 종류는 차이가 있으나, 기본적으로 학생들의 심리적 안정도를 기반으로 대학적응 유무를 검사를 통해 선별하고, 주의가 요하는 학생들에게는 정서, 학습, 생활 측면의 지원 시스템을 투입한다. 이와 같은 지원시스템의 본질적 의도는 학생들의 대학 만족도를 향상시켜, 학기초 타대학으로의 이탈을 막아내어 학교 운영의 효율성을 유지하게 한다. 그렇더라도 상담자들은 학교의 경제적 운용 측면이 아닌 학생들의 성공적인 자아 실현 내러티브를 일차적 목표로 그들과 만난다.
내가 강의와 상담을 주로 했던 대학은 ‘인서울’의 경계에 위치한 학교이다. 완전히 서울도 아니지만, 그렇다고 수도권 대학이라 불리면 엄청난 저항에 부딪히는 곳이다. 작년 모 정치인이 자신을 분교 출신이라 발언한 후 본교와 분교 개념도 이해 못하는 동문이라는 엄청난 반발에 부딪히기도 했다. 그럼에도, 현장에서 학생들과 상담을 하면 서울과의 구분이 있는 학과(특히, 인문사회계열) 학생들이 갖는 열등감과 ‘그럼에도 내가 이 정도는 했다’는 우월감이 묘하게 얽혀 있다. 그리고, 이 두 가지 감정 사이에서 더 우월한 방향으로 나아가려는 의지는 치열한 자기계발로 표출된다. 학점 관리, 스펙 관리, 관계망의 관리, 의지의 관리 등등 온갖 관리가 그들의 삶을 점령한다. 그러나, 조금 더 올라가면 계란 노른자의 핵심으로 진입할 수 있다는 희망 이면에는 언제든 계란 노른자 바깥으로 밀려날 수 있다는 불안이 자리하고 있다.
저는 고등학교까지 열심히 했고, 이 학교에 온 것에 대한 자부심도 있어요. 그런데, 제가 계속 이런 상태를 유지할 수 있을지 불안해요.
저희 부모님은 S대 출신이고 언니도 서울에 있는 대학을 다니는데, 저만 공부를 못해요. 그래도 가족들은 저를 위해주는데, 앞으로 부모님 없이 제가 부모님이 제게 해 준 것 만큼 살아갈 수 있을까요?
제가 정말 열심히 했는데, 그런데 저만큼 한 학생들이 많잖아요? 이 정도로도 괜찮을까요?
(경기도 소재 K대)
계란 노른자에 위치한 학생들이 불안이라는 정서를 기반으로 우월감을 향해 가고 있다면, 계란 흰자 위 학생들의 불안은 사회적 시선에 대한 두려움과 자신의 역량 자체에 대한 의구심을 증폭시킨다.
감각이 무뎌진 것 같아요. 사회의 자극을 ‘그러려니’라는 마음으로 받아들이게 되었다는게 아니라, 감각 자체가 없어진 것 같아요.
노력도 하고 열심히 하는데, 막상 해 놓고 보면 별 거 아닌 거 같아요.
특성화고에서 왔는데, 그 때는 저도 잘한다고 생각했는데, 사람들이 무시하는 것 같아요.
(경기도 소재 S대)
<나의 해방일지> 속 창희는 거대한 자연이 선사하는 숭고함과 그에 대비되는 인간 존재의 미약함을 깨달음으로써 계란 흰자 위에 대한 열등감을 털어냈고, 미정은 ‘왜’라는 질문과 ‘어떻게’ 해야 한다는 방향성을 갖지 않음으로 자신을 해방시켰다. 그리고, 기정은 요구하지 않음으로 상대와 함께 하는 행복을 얻었다. 내가 만난 학생들 대다수도 <나의 해방일지> 속 깨달음을 교과서처럼 말할 줄 안다. 하지만, 현실 속 그들은 언제든 경계 바깥으로 밀려날 수 있다는 두려움과 더 이상 경계 안쪽으로는 갈 수 없을 거라는 막막함에 자주 압도당한다.
그냥 나입니다 : 추앙하는 자 vs 추앙받는 자
상담을 하다 보면 눈만 마주쳤는데, 울음부터 흘리는 학생들이 참 많다. 고통을 서사화하지 않아도 그들의 울음을 통해 그간 겪어냈을 힘듦이 고스란히 와닿는다. 그곳에선 밀려나지 않으려 애쓰는 자들의 불안이나 더 밀려날까 두려워하는 자들의 불안이나 차이가 없다. 그곳에서 나는 불안함을 이겨내고 살아내려 하는 사람들을 만날 뿐이다. 그리고, 나도 별반 다르지 않다. <나의 해방일지> 속 행복지원센터 소향기 팀장이 해방클럽에 온 것을 보면 알 수 있지 않나?
드라마 속에서는 고통받는 개인들을 해방시키기 위한 본질적 상호작용 방식을 ‘추앙‘이라는 단어로 정의한다. ‘추앙’은 로저스가 말하는 ‘무조건적 긍정적 존중’, ‘진실성’, ‘공감’의 모든 요소들을 포함하고 있다. 로저스는 이전 상담자들과 달리 내담자를 결핍된 존재가 아닌, 충분히 기능하는 존재로 보았다. 따라서, 어떤 개인이 외부 현실의 가치 조건에 따라 왜곡된 자아 인식을 하게 될 때, ‘무조건적 긍정적 존중’, ‘진실성’, ‘공감’의 자세로 상호작용하게 되면 그는 본래적 자아를 찾을 수 있다고 보았다.
중증의 알콜 중독자인 구씨에게 미정이는 술을 줄이라고 말하는 대신 그가 좋아하는 술을 먼저 사들고 가고, 그가 하는 이야기를 있는 그대로 들어준다. 그리고, 추위에 떠는 그를 위해 난로를 갖다 주고, 담요를 덮어준다. 그가 어떤 일을 하는지, 그의 말의 진위가 무엇인지 따지지도 묻지도 않고, 그냥 지금-현재 미정 앞에 있는 구씨 그 자체에 주목한다. 그렇게 순간순간에 집중함으로써 삶의 기운을 쌓아 갈 수 있도록 해 준다. 그리고, 미정의 구씨에 대한 추앙은 결국 추앙받음의 방식으로 돌아오고, 그들을 그들답게 해준다.
나 또한 상담실에서 다양한 내담자들을 만나, 그들과 함께 ‘지금-현재’에서부터 이야기를 구성해 간다. 그러나, 모든 이야기의 여정은 내가 아니라 그들이 가고자 하는 방향을 따라 이어진다. 나는 그들이 머무르고자 하는 그곳에서 그들의 현상학적 경험에 접촉하고 살아온 과정에 대한 타당화를 해 나간다. 그렇게 함께 추앙해 가는 과정에서 삶을 살아낸 것 자체에 대한 존경심이 저절로 우러나온다. 그러나, 이러한 마음의 울림이 동시다발로 경험되는건 아니다.
진짜 나를 찾고 싶어요. 지금 내가 하루하루 살아가는 이 모습이 진짜 나라고 생각하면 저는 더 이상 못 버틸 것 같아요.
며칠 전에도 열심히 추앙했지만 상담이 끝날 무렵 학생이 이 말을 내뱉으며 눈물을 흘릴 때, 온몸에 힘이 빠졌다. 그가 오랜 시간 겪어온 삶의 고통이 짧은 기간에 해방될거라 생각하지 않았음에도, 번번이 착각에 빠진다. 그러나, 그가 똑같은 지점으로 돌아갔다고 단정하진 않는다. 상담실을 나가는 그에게 내가 바라는 것은 단 한 가지다. 이곳에서 우리가 추앙한 그 순간의 힘을 기억하며 삶을 견뎌내길 바란다. 그렇게 견뎌내면, 분명 아주 조금 가벼워지는 날이 올거다. ‘진짜 나’말고, ‘그냥 나’의 모습을 조금 더 편안하게 볼 수 있는 그런 날 말이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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