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읽고쓰기 1234] 게임의 미학

우현
2023-05-25 17:11
356

 

 

게임의 미학

 

 

0. 인트로 : 얘가 웬종일 게임만 하더니..

 미학을 공부하겠다고 했지만, 사실 난 회화나 조각을 비롯한 고전 미술에 관해서는 관심과 조예가 별로 없다. 그래서인지 원래 읽기로 했던 『문학과 예술의 사회사』를 읽으면서는 매번 졸음을 참을 수가 없었다. 서양 철학사를 공부하다보니 미학사와 철학사가 맞닿는 지점들은 재밌었지만, 기본적으로 그런 지점이 생각보다 많지 않았다. 반대로 미디어 세미나에서 읽은 『20세기 매체철학』 과 개인적으로 읽은 『게임 : 행위성의 미학』은 시간 가는 줄 모르고 읽었다. 이는 내가 디지털을 기반으로 한 미디어 예술들을 훨씬 많이 접하고 있기 때문이리라. 미디어 예술이라고 해서 꼭 백남준이 떠오르는 ‘미디어 아트’만을 가리키는 게 아니다. 유투브 영상, 인터넷 방송, 영화, 게임 등 온갖 디지털 매체를 통해 접하는 모든 것을 이야기하고 싶은 것이다. 그중에서도 게임은 역시나 내 ‘최애’라고 할 수 있다. 그러나 이것들은 고전 예술에 비해 ‘미학적’이라고 여겨지지 않는 듯하다. ‘메타버스’니 ‘증강현실’이니 ‘대 유투브 시대’니 많은 말들이 오가고 있지만, 게임과 디지털 매체들이 갖고 있는 사회적 지위는 여전히 좋지 않다 (물론 점점 나아지고는 있다). 나와 동은, 정군이 게임에 대해 이야기 할 때마다 어이없다는 듯이 웃는 선생님들, 과연 고흐의 작품이나 고전 예술을 다룬 전시에 대한 이야기였어도 같은 반응일까? 나마저도 바쁜 와중에 시간을 쪼개서 게임을 하고 나면 조금의 죄책감을 느끼곤 한다. 디지털 매체를 통한 예술은 고전 미술과 무엇이 다른가? 왜 우리는 게임과 영상들을 ‘시간 낭비’라며 평가 절하하는가? 그래서 나는 『20세기 매체 철학』과 『게임 : 행위성의 예술』 두 책을 통해 디지털 매체를 통한 예술, 그중에서도 게임이 가진 즐거움과 아름다움을 간략하게나마 적어보려 한다.

 

  1. 게임 : 무정형적 이미지들의 다발

 우선 디지털 매체를 통한 비디오 게임이 어떤 것인지, 고전 예술과 다른 점은 무엇인지 정리해야겠다. 이에 대해서는 산업혁명과 디지털혁명을 거쳐 매체와 예술의 상관관계를 이야기한 노르베르트 볼츠(1953~)의 논지를 가져오는 게 유효할 것으로 보인다.

 볼츠는 디지털 미학과 전통 미학 사이에 명확한 선을 긋는다. 산업혁명 이후로 예술은 특권화된 계급과 그들이 향유하던 고급문화가 아니게 됐다. 디지털혁명을 거치면서는 기계들의 디지털화, 전문 기술들의 대중화를 통해 더욱더 다양한 형태의 예술이 탄생하게 되었고, 우리는 누구나 쉽게 무언가를 만들거나 접할 수 있게 되었다. 그에 따라 지금까지 미학 내에서 예술을 둘러싼 담론이었던 ‘존재', ‘진리', ‘정신’, ‘아름다움’ 등의 개념들을 그대로 디지털 매체 예술에 적용할 수 없게 되었다. 결국 우리는 예술이라는 것 자체에 대해 다시 이야기해야 하는 시점에 놓였다는 것이다.

 디지털 매체가 가진 복합성에 따라 우린 시각, 청각, 촉각 등 다양한 지각 체험이 가능해졌다. 따라서 볼츠는 ‘미학’이라는 이름은 아름다움에 관한 학문 또는 예술작품에 대한 분석 등에 머무를 수 없다고 말한다. 오히려 중요한 건 작품 분석이 아니라 각각의 수용자의 체험과 지각방식이 된다. 좀 더 정확히 말해서, 중요한 것은 해석과 관조를 기반으로 한 예술 이해 또는 미적 체험이 아니라, 오히려 감각과 이미지의 스펙터클 그리고 몰입이라는 것이다. 그렇기 때문에 예술과 수용자 사이에 있는 매체가 더욱더 중요해진다.

 예술에서 중요한 것은 수용자와의 관계라는 점에서, 지금의 디지털 매체를 통한 예술과 그 수용방식은 어떠한지 분석할 필요가 있다. 볼츠는 발터 벤야민(1892~1940)이 언급한 ‘아우라의 몰락’과 같은 맥락을 짚는다. 사진의 등장으로 원본성이 없어진 이미지들, 무한정 복제가 가능해진 이미지들. 여기에 더해 디지털혁명에서 추가된 특징은 “일시적이고 비물질적인 속성”이다. 이는 기술과 예술의 결합에서 나타나는 특징이며, 반드시 디지털 매체 시대에서만 나타나는 속성은 아니다. 여기서 중요한 건 재현된 대상이 아니라, 무정형적이며 무대상적인 이미지의 다발들이다. 디지털 스크린의 광원을 통해 전달되는 대상은 이미지적 재현과 전달이 아니라 이미지 그 자체인 것이다. 회화가 재현하던 대상은 해체되었고, 실제 대상보다 더 실제 같은 이미지들만이 남았다. 여기서 우린 감상의 차원이 아니라 체험의 차원에서, 새로운 유희 공간이라는 예술의 새로운 움직임을 볼 수 있다는 것이다. 이것이 바로 비물질적 미학의 배경이 된다.

 디지털 매체를 통한 비디오 게임은 볼츠가 설명하고 있는 맥락과 매우 맞닿아 있다. 게임은 실체가 없는 무정형적 이미지의 다발들이다. 우리는 대부분 어떤 게임을 좋아한다고 말할 때 특정 요소를 지칭하지 않는다. 나는 캡콤사의 격투게임 <스트리트 파이터> 시리즈를 무척이나 좋아하는데, 이는 ’게임의 스토리가 좋다’, ‘게임 캐릭터의 디자인이 좋다’는 차원만으로는 설명이 안 된다. 나는 이 게임이 가진 규칙, 게임을 통한 경험, 게임이 가진 그래픽 이미지, 스토리 등등 전반 모두를 가리켜서 ‘좋다’고 말하는 것이다. 회화처럼 특정 작품이 재현하는 고정적인 대상이 없다. 그런 맥락에서 게임은 무정형적 이미지 다발의 표본이라고 할 수 있다.

 

게임계를 뒤집었다고 평가받는 게임들. 여러분은 몇개나 알고 계신지?

 

2. 게임 : 디지털 환경을 통한 ‘총체적인 주의 집중’ 활동

 하지만 게임이 가진 진정한 의미는 집중과 침잠을 통해 게임에 몰입함으로써 단순한 수용자를 넘어선 그 게임의 ‘플레이어’가 된다는 것이다. 플레이어가 된 주체는 직접 자신만의 게임플레이를 만들어 가며 각자의 행위성을 경험한다.

 볼츠는 벤야민이 언급한 ‘시각적 촉각성’을 가져오는데, 벤야민은 캔버스의 그림을 보며 ‘침잠적 지각'을, 반대로 영화관을 보며 '정신오락적/분산적 지각'을 얘기했다.

 

전통 회화에 있어 자발적 수용자는 이미지를 해석하고 수용하기 위해서 이미지 앞에서 서서 관조적 침잠과 몰입을 통해 이미지를 받아들인다. 반면에 움직이는 이미지인 영화는 미처 그럴 여유 없이 이미지의 전환, 즉 장면의 전환이 일어나는데, 이 과정 속에서 수용자는 관조적 침잠과 몰입 대신에 분산적 지각과 촉각적 지각을 체험하게 된다.

『기술복제시대의 예술작품』 발터 벤야민

 

 허나 볼츠는 디지털 세대에서는 다시 영상 속으로 함몰하는 집중과 침잠이 요구되고 있다고 말한다. 일종의 환각 체험처럼 영상에 몰두하는 우리들. 밤을 새워 넷플릭스 드라마를 보고, 새벽까지 게임에 빠져있고, 다양한 방식으로 연예인 컨텐츠에 개입한다. 수용자는 단지 수동적으로 관찰자의 입장에 머무르는 게 아니라, 작품의 플레이어가 되고, 실시간 채팅으로 방송 주체와 소통하고, 댓글을 다는 등 ‘총체적인 주의 집중’을 통해 영상과 컨텐츠에 개입하는 것이다.

 그리고 바로 여기가 문제 지점이다. 우리가 ‘총체적인 주의 집중’을 통해 새벽까지 게임을 붙드는 모습은 얼마나 이상해 보이는가? 심하게는 먹지도 마시지도 않으면서까지 게임을 붙드는 이유는 무엇인가? 그런 집중력으로 공부를 했으면 서울대에 갔을 거라는 어머니의 말은 과연 사실인가(?)

 

3. 게임은 왜이렇게 재밌는가? : 게임이 가진 미학적 가능성

 ‘왜 게임을 하는가?’ 에 대한 대답은 사실 게임을 직접 해보지 않는 이상 이야기하기 쉽지 않다. “총체적인 주의 집중을 통해 무정형적 이미지들을 보며 다양한 지각 체험을 경험하는” 게임은 확실히 전통 예술과 구분된다는 걸 알겠지만, 그것이 어떤 가능성을 가지고 있는지나, 얼마나 재미있는지를 알려주는 지표는 아니기 때문이다. 그래서 나는 『게임 : 행위성의 예술』 을 통해 게이머들은 어떤 경험을 하는지, 그 경험들이 가지고 있는 가능성은 무엇인지 살펴보고자 한다.

3-1. 행위성의 미학

『게임 : 행위성의 예술』의 저자 C. 티 응우옌은 게임만이 가지는 ‘행위성의 미학’을 분석한다. 일부 미학자들은 게임을 전통 예술에 포섭시키는 방식으로 게임의 가치를 강조한다. 게임을 픽션의 일종이라고 보며 해석과 관조를 통해 분석하는 것이다. 이 역시 게임이 가진 가능성임이 틀림없지만, 티 응우옌은 그런 분석은 게임이 가진 진정한 가치-행위성의 미학-를 간과할 수 있다고 지적한다.

 

  게임이 이야기를 들려주거나, 인상적인 이미지를 제시하거나, 심지어는 논변을 제시함으로써 좀 더 친숙한 종류의 미적 경험을 제공할 수 있는 것은 사실이지만, 게임은 그와 다른 일을 할 수도 있다. 즉, 게임은 우리가 가진 행위성의 경험을 디자인하여 제공한다. 그리고 행위적 매체는 우리의 실천적 참여가 가진 성격을 형성하는 데 특히 적절하다. <체스>는 논리적 가능성의 연쇄를 따라 다음 수를 내다보는 일에 집중한다. <테트리스>는 매우 빠른 공간적 추론에 집중한다. 그리고 이렇게 디자인된 행위성의 경험은 미적일 수 있다.

『게임 : 행위성의 예술』 C. 티 응우옌, 워크룸 프레스

 

 플레이어가 직접 특정 행동을 수행하며 느낄 수 있는 미적 경험-행위성의 미학-. 이런 미적인 경험이 게임에만 있는 건 아니다. 며칠 동안 에세이를 쓰며 고민하던 문제에 대한 명쾌한 답을 찾았을 때(사실 대부분 착각이다), 친구 손에서 미끄러진 접시를 완벽하게 잡아냈을 때, 처음 보는 이와 스텝을 척척 맞춰가며 춤을 출 때, 우리는 각각의 행위적 매체들을 통해서 일종의 미적인 경험을 하게 된다. 게임은 그러한 쾌를 정제하고 농축하여 우리에게 그 참신한 면모를 제시한다. 게임 디자이너는 일상생활에서는 만나기 힘든 순간을 보다 쉽고 명쾌하게 경험할 수 있게끔 디자인하고, 플레이어는 그 디자인에 푹 빠져서, 때때로는 자신만의 방식-룰을 따르지 않거나 변경하는-으로 행위성을 경험하고 미적인 요소를 발견한다. 특히 디지털 매체를 통한 비디오 게임은 더 다양한 규칙과 방식의 지각체험을 기반으로 행위성의 미학을 경험할 수 있다. 내가 즐겨하는 <에이펙스 레전드>(이하 에이펙스)라는 게임은 3명이 한 팀이 되어 총 20팀 사이에서 살아남는 ‘배틀로얄’ 장르의 FPS게임이다. 캐릭터들이 가진 특수능력과 맵 곳곳에 배치된 무기와 지형을 이용하여 마지막 생존팀이 되어야만 한다. 이때 플레이어에게는 같은 팀원들과의 소통, 캐릭터의 능력과 맵 지형에 대한 이해, 조준 능력, 시시각각 달라지는 상황에 대한 판단 능력 등이 요구된다. 1등을 차지하는 건 굉장히 힘든 일이지만, 그만큼 챔피언을 달성했을 때의 쾌감은 무척 크다. 이는 소설이나 영화를 보며 역경과 고난을 헤치고 1등을 차지하는 ‘주인공’을 보는 게 아니라, 고난과 역경을 직접 체험하고 그 ‘주인공’ 자체가 되는 경험이다.

『게임 : 행위성의 예술』 C. 티 응우옌 / 워크룸프레스

 

3-2. 분투형-플레이의 미학

 이때, 게임에서 제시하는 목표는 별로 중요하지 않아 보인다. 하지만 우리는 게임의 ‘목표’(goals)와 게임을 하는 ‘목적’(purpose)을 섬세히 구분해야한다. 에이펙스에서의 목표는 많은 처치 수를 기록하는 게 아니라 끝까지 생존하는 것이다. 반면 목적은 스트레스를 풀거나, 재미를 느끼거나, 어려운 과제를 달성하거나, 상대나 자신의 능수능란한 플레이(행위)가 지닌 아름다움을 경험하는 일 등이 있다. 이때 목표와 목적이 동일시되는 플레이어도 있는 반면, 꼭 목표와 목적이 구분되는 플레이어도 있다. 티 응우옌은 이를 ‘분투형-플레이어’라고 하는데, 게임의 목표보다는 목표를 달성하기 위한 과정-여기서는 분투가 곧 목적이 된다- 자체를 즐기는 플레이어를 뜻한다. 게임을 즐기는 모든 이들이 분투형 플레이어는 아니지만, 티 응우옌은 많은 사람들이 분투형 플레이어라고 확신한다. 그들은 꼭 승리만이 목적은 아니지만 그렇다고 승리를 진심으로 원하지 않는 것도 아니며, 그러한 이중 목적성을 가질 때 비로소 분투형 플레이가 가능하다고 설명한다. 이를테면 에이펙스에서는 챔피언을 할 수 있는 수많은 방법이 있다. 랜덤으로 생성되어 점점 줄어드는 서클-이 서클 밖에 있으면 지속적인 데미지를 받는다-을 이용하여 전투를 최소화하며 ‘생존’에 집중하는 방식도 있고, 서클에 상관 없이 수많은 적들과의 ‘전투’에 집중하여 19팀을 전멸시키는 방식도 있다. 다 같은 분투라고 표현할 수 있지만 대체로 승리 자체가 목적이라면 싸움을 최소화하는 게 도움이 된다. 하지만 다른 팀과의 격렬한 전투를 체험함으로써 겪는 분투와 그 과정 속에서 경험하는 플레이 경험, 승리 시에 느끼는 희열이 목적이라면 어디선가 들리는 전투의 소리와 흔적을 찾아다니는 게 도움이 될 것이다. 냉정하게 판단할 때 이는 1등을 할 수 있는 확률을 스스로 낮추는 행동이지만, 1등을 원하지 않는다면 열심히 전투에 임할 필요도 없다. 그리고 이들은 대부분 운이 좋아서 쉽게 차지하게 된 1등보다는 신나게 싸우다 장렬히 전사하여 차지한 6등이 더 값지게 느낄 가능성이 크다(내가 그렇다). 누구보다 목표를 달성하고자 하지만 동시에 언제든지 목표를 아무것도 아니게 바라볼 수 있기도 하다는 것이다.

 더 쉬운 예시를 들자면 문탁에서 점심식사 후 ‘가위바위보’ 게임으로 진행하는 설거지 내기가 있다. 이 게임은 3분의 1 확률로 결정되는 단순하고도 유치해 보이는 게임이다. 하지만 가위바위보를 이겨 설거지를 피하겠다는 목표에 몰입할수록 재밌어진다. 이에 대해 친구를 위해서 설거지를 해주는 것쯤은 아무것도 아니지 않냐고 물을 수 있다. 물론 그렇다. 하지만 그럼에도 설거지를 피하기 위해 분투하는 이들은 그 긴장감 속에서 재미와 승리의 기쁨-혹은 패배의 쓴맛-을 맛본다. 이들이 내기를 하는 목적은 설거지를 피하는 것이고 그에 몰입하지만, 분투형 플레이어에게 이 게임의 진정한 목적은 목표에 몰입하면서 느끼는 긴장감과 쾌감의 분투인 것이다.

 

읽고쓰기 1234 현장에서 동은과 <가위바위보>를 겨루고 있는 모습. 분투의 열기가 느껴지는가?

 

 이러한 분투형 플레이는 게임에서의 일이 ‘쓸데없다’거나 ‘비현실에 빠져있다’는 식의 말들에 대해 반론을 제기할 수 있게 한다. 게임에서 차지한 ‘1등’이라는 타이틀이 중요한 게 아니라, 그 1등을 차지하기까지의 과정 속 분투는 분명 ‘현실’의 일이고 가치 있는 것이다. 무엇보다 실재 세계에서의 복잡한 구조 속에서 행위의 미학을 느끼는 일은 무척 드물다. 게임은 보다 단순하고 명확한 목표와 구조를 제시해 주면서 더 폭 넓은 지각체험을 전달한다. 그 과정에서 우린 미적 요소들의 경험을 보다 뚜렷하게 지각한다.

 지금까지 게임이 가진 미학에 대해 간략하게 살펴보았다. 위에서 언급한 지점 이외에도 게임은 이미 멀티플레이어를 기반으로 다양한 사회적 관계를 형성하는 틀이 되었다는 점에서, 기존 예술을 바라보는 관점에 포섭시키는 방식으로도 충분히 미학적 요소들을 발견할 수 있다. 그런 점에서 게임은 명확히 (새로운 의미에서)미학적이고, 예술적인 작품이다. 그를 소비하는 행위에 대해서도 새로운 인식이 필요한 시점일 것이다.

댓글 6
  • 2023-05-28 15:29

    뭔가 맞는 말인 것 같기도 하고 아닌 것 같기도 하고...
    게임을 잘 못하는 저에게는 어려운 세계인 듯 합니다.

  • 2023-05-29 09:26

    <문학과 예술의 사회사>는 재미없었는데, 이 책은 재미있었다!!
    음.. 그렇지만, 아마도 이 책의 저자는 철학공부 충실히 하고 쓴 책이지 않을까요?ㅎㅎㅎ

  • 2023-05-31 09:49

    볼츠로 비물질적 미학을 가져오고, 그것이 체험형이며 몰입형이라는 특성에서 게임을 연결하고 있는거지요?
    분투형 플레이는 목표지향적인 경쟁자의 논리보다는 과정을 통해 성장하는 가치를 지닌다는 것이고요.
    게임은 예술의 영역이라고 주장하는 논리를 세우는 것 같군요.

    게임의 가치가 저평가된 것을 회복하기 위해 예술로 넣었다면 다음에는 이런 것도 해보는게 어때요?

    오늘날 예술은 윤리성의 고양이라는 차원에서 논의되기도 하잖아요?
    영성이 사라진 시대에 충만한 행복감의 경험과 그를 통한 윤리적 통찰 등을 예술에 부여하는 경우가 꽤 있는것 같아요.
    '게임에서의 일이 ‘쓸데없다’거나 ‘비현실에 빠져있다’는 식의 말'과
    살생을 주로 하는 게임때문에 폭력성이 커진다는 인식 등에서는
    게임은 스스로 고립된 존재자, 윤리성의 부재 등의 이미지가 들어 있는 것 같은데, 조금 더 적극적으로 반론을 제기해보실?
    이를테면 설겆이 가위바위보를 매번 할 필요가 있다던가하는...

  • 2023-06-06 11:38

    게임은 나 자신에 대해서 생각할 거리를 던져줍니다.

    게임을 하는 동안 왜 이리 시간은 빨리 지나갈까요?
    게임이 끝나면 밀려오는 멍한 상태는 무엇일까요?
    게임을 하는 동안 발생되는 엄청난 집중력은 무엇일까요?
    게임에서 이기고 싶은 승부욕은 어떻게 제어할 수 있을까요?
    왜 오프라인 게임보다 온라인 게임이 더 좋을까요?
    진짜로 축구를 하는 것보다 축구게임이 더 좋은 이유는 무엇일까요?
    현실보다 더 현실같은 게임을 만들지만, 현실에서는 오히려 게임을 안 하려는 건 왜 일까요?

    게임은 늘 우리에게 질문을 던지기에 여전히 유효한 매체인 듯합니다.

    게임 한 판?? ^^

  • 2023-06-15 16:42

    행위성의 미학이 어디까지 포괄할 수 있는 개념인지가 궁금해집니다. 본문에서는 체스와 테트리스가 언급되었는데, 가량 큰 돈을 걸고 포커를 칠 때 느끼는 극도의 긴장감이나 온라인 게임에서 가챠를 돌릴 때의 몰입과 흥분 같은 것들도 미학적 요소로 포착될 수 있는 것인가요?

    • 2023-06-20 13:50

      행위성의 미학과 분투형 플레이의 미학을 구분하는 게 좋을 듯 합니다.
      행위성의 미학은 어떤 예술에 대해 관찰자의 영역으로 남는 게 아니라 직접 예술의 행위자가 된다는 맥락이 포인트인 것 같고요
      분투형 플레이의 미학은 언제든지 그만둘 수 있는 걸 알고, 실제로는 유효하지 않다는 걸 알면서도 지정된 규칙과 역할에 몰입할 수 있는 플레이어의 주체적 가능성을 포인트로 짚고 있습니다.

      따라서 큰 돈을 걸고 포커를 칠 때의 긴장감을 미학적이라고 포착하기 보다는 포커를 치는 플레이어의 성향에 따라 분투적 플레이의 미학으로써 포착할 수도 있는 거라고 봅니다. 가챠든 포커든 행위성의 미학이 깃든 게임이라고 볼 수 있고요.

세미나 에세이 아카이브
    게임의 미학     0. 인트로 : 얘가 웬종일 게임만 하더니..  미학을 공부하겠다고 했지만, 사실 난 회화나 조각을 비롯한 고전 미술에 관해서는 관심과 조예가 별로 없다. 그래서인지 원래 읽기로 했던 『문학과 예술의 사회사』를 읽으면서는 매번 졸음을 참을 수가 없었다. 서양 철학사를 공부하다보니 미학사와 철학사가 맞닿는 지점들은 재밌었지만, 기본적으로 그런 지점이 생각보다 많지 않았다. 반대로 미디어 세미나에서 읽은 『20세기 매체철학』 과 개인적으로 읽은 『게임 : 행위성의 미학』은 시간 가는 줄 모르고 읽었다. 이는 내가 디지털을 기반으로 한 미디어 예술들을 훨씬 많이 접하고 있기 때문이리라. 미디어 예술이라고 해서 꼭 백남준이 떠오르는 ‘미디어 아트’만을 가리키는 게 아니다. 유투브 영상, 인터넷 방송, 영화, 게임 등 온갖 디지털 매체를 통해 접하는 모든 것을 이야기하고 싶은 것이다. 그중에서도 게임은 역시나 내 ‘최애’라고 할 수 있다. 그러나 이것들은 고전 예술에 비해 ‘미학적’이라고 여겨지지 않는 듯하다. ‘메타버스’니 ‘증강현실’이니 ‘대 유투브 시대’니 많은 말들이 오가고 있지만, 게임과 디지털 매체들이 갖고 있는 사회적 지위는 여전히 좋지 않다 (물론 점점 나아지고는 있다). 나와 동은, 정군이 게임에 대해 이야기 할 때마다 어이없다는 듯이 웃는 선생님들, 과연 고흐의 작품이나 고전 예술을 다룬 전시에 대한 이야기였어도 같은 반응일까? 나마저도 바쁜 와중에 시간을 쪼개서 게임을 하고 나면 조금의 죄책감을 느끼곤 한다. 디지털 매체를 통한 예술은 고전 미술과 무엇이 다른가? 왜 우리는 게임과 영상들을...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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우현
2023.05.25 | 조회 356
세미나 에세이 아카이브
        익숙하거나 낯설거나 ‘정의란 무엇인가’라는 짧은 질문에는 수많은 철학적 사상들과 유명한 철학자들이 줄줄이 소환되어 나온다. 미국의 저명한 법철학자이자 정치철학자인 마사 너스바움은 여기에 ‘시적 정의(Poetic Justice)’라는 조금은 낯선 정의를 하나 더 추가한다. 그러나 ‘시적 정의’라는 단어자체는 17세기 후반 영국의 문학비평가인 토머스 라이머가 쓴 말이기도 하고, 일반적으로 시나 소설 속 권선징악이나 인과응보 사상을 의미하기에 우리는 착한 일을 한 흥부가 복을 받고, 신데렐라와 언니들의 결말에 울고 웃음으로써 이미 시적 정의를 익숙하게 체화하며 살고 있었던 셈이다.   『시적 정의』는 너스바움이 1994년부터 미국 시카고대학교 로스쿨에서 <법과 문학>이라는 강의를 한 경험에서 비롯한다, 밤낮없이 법전을 외우는 미래 법률가들의 모습에 더 익숙한 우리에게 ‘법’과 ‘문학’의 만남은 왠지 좀 낯설다. 더군다나 문학작품에서 옹호되는 감정은 합리적인 추론들 사이에서 배제되기 일쑤이니 말이다. 그렇다면 미래의 법률가인 로스쿨 학생들뿐만 아니라 정치인, 그리고 합리적인 의사결정을 수행해야 하는 공적 영역에 위치하고 있는 이들에게 왜 너스바움은 다른 무엇보다도 ‘문학 작품’을 읽어야 한다고 강조하고 있는 것일까? 왜 합리적 영역들 속에서 비합리적이라 여겨지는 ‘감정’을 이야기하고 있는 것일까?     왜 문학적 상상력일까 오늘날 우리는 문학이란 것을 선택적인 것으로 생각하는데 익숙하다. 문학은 흥미롭고 소중하고 훌륭하지만 어쩐지 정치, 경제, 법적인 사유와는 거리가 멀다고 느껴지거나 부수적인 것으로 여기기 때문이다. 하여 경제적인 합리성이라는 것이 공적 영역을 넘어 사적인 일상을 좌우하는 보편적인 원리가 된 지금 오히려 문학적 사유나 상상력은 어떤...
        익숙하거나 낯설거나 ‘정의란 무엇인가’라는 짧은 질문에는 수많은 철학적 사상들과 유명한 철학자들이 줄줄이 소환되어 나온다. 미국의 저명한 법철학자이자 정치철학자인 마사 너스바움은 여기에 ‘시적 정의(Poetic Justice)’라는 조금은 낯선 정의를 하나 더 추가한다. 그러나 ‘시적 정의’라는 단어자체는 17세기 후반 영국의 문학비평가인 토머스 라이머가 쓴 말이기도 하고, 일반적으로 시나 소설 속 권선징악이나 인과응보 사상을 의미하기에 우리는 착한 일을 한 흥부가 복을 받고, 신데렐라와 언니들의 결말에 울고 웃음으로써 이미 시적 정의를 익숙하게 체화하며 살고 있었던 셈이다.   『시적 정의』는 너스바움이 1994년부터 미국 시카고대학교 로스쿨에서 <법과 문학>이라는 강의를 한 경험에서 비롯한다, 밤낮없이 법전을 외우는 미래 법률가들의 모습에 더 익숙한 우리에게 ‘법’과 ‘문학’의 만남은 왠지 좀 낯설다. 더군다나 문학작품에서 옹호되는 감정은 합리적인 추론들 사이에서 배제되기 일쑤이니 말이다. 그렇다면 미래의 법률가인 로스쿨 학생들뿐만 아니라 정치인, 그리고 합리적인 의사결정을 수행해야 하는 공적 영역에 위치하고 있는 이들에게 왜 너스바움은 다른 무엇보다도 ‘문학 작품’을 읽어야 한다고 강조하고 있는 것일까? 왜 합리적 영역들 속에서 비합리적이라 여겨지는 ‘감정’을 이야기하고 있는 것일까?     왜 문학적 상상력일까 오늘날 우리는 문학이란 것을 선택적인 것으로 생각하는데 익숙하다. 문학은 흥미롭고 소중하고 훌륭하지만 어쩐지 정치, 경제, 법적인 사유와는 거리가 멀다고 느껴지거나 부수적인 것으로 여기기 때문이다. 하여 경제적인 합리성이라는 것이 공적 영역을 넘어 사적인 일상을 좌우하는 보편적인 원리가 된 지금 오히려 문학적 사유나 상상력은 어떤...
스르륵
2023.05.24 | 조회 342
세미나 에세이 아카이브
*양생글쓰기 <나이듦과 자기서사> 시즌2에서는 리뷰글쓰기를 해봤습니다. 시즌2을 마치며 쓴 학인들의 리뷰 중두 편을 북앤톡에 올립니다. 함께 읽어봤으면 합니다*     돌봄 초보의 ‘시민’ 되기 <<새벽 세시의 몸들에게>>(옥희살롱, 봄날의 책, 2021)   양해성     가족 또는 시설밖에 없을까?   나는 돌봄 초보이다. 우선 돌봄에 대해 진지하게 고민할 기회가 없었다. 부모님이 일찍 돌아가셔서 장기간 누군가를 돌본다는 게 어떤 것인지 경험하고 느끼지 못했다. 하지만 작년 85세의 파트너 어머니가 우리가 사는 집으로 들어 오게 되면서 쇠약해진 몸으로 일상을 겪는 것, 미래에 대한 기대가 없이 사는 것이 어떤 것인지 간접 경험하고 있다. 그리고 결정적으로는 2020년 후반, 가깝게 지내던 싱글 게이 친구가 기본적인 케어와 식사가 제공되는 노인돌봄 시설로 들어가는 일이 있었다. 70대 중반을 넘어선 그는 몇 년 전부터 파킨슨병이 진행되기 시작했고 경증의 치매 증상도 나타났다. 그 친구는 은퇴 후 낮엔 집수리와 조경, 요가와 산책, 저녁엔 친구들과 밥먹고 와인을 마시는 본인이 원하는 노년을 즐기고 있었다. 이러한 일상을 포기하고 자기 생활에 대한 통제권이 주어지지 않는 요양원에 들어가는 것은 그에게 매우 두려운 일이었다. 더 두려운 것은 시설 내에 동성애 혐오나 차별적 마인드를 갖고 있는 거주자, 스태프, 혹은 의료진이 혹시라도 있을까 하는 것이었다. 한 명이라도 있다면 위축되어 조용히 죽어 지내거나 저항하거나 둘 중의 하나를 택해야 하는, 정서적으로 불안한 생활이 될 게 뻔할 것이기 때문이었다. 그곳 생활에 어느 정도 적응했지만...
*양생글쓰기 <나이듦과 자기서사> 시즌2에서는 리뷰글쓰기를 해봤습니다. 시즌2을 마치며 쓴 학인들의 리뷰 중두 편을 북앤톡에 올립니다. 함께 읽어봤으면 합니다*     돌봄 초보의 ‘시민’ 되기 <<새벽 세시의 몸들에게>>(옥희살롱, 봄날의 책, 2021)   양해성     가족 또는 시설밖에 없을까?   나는 돌봄 초보이다. 우선 돌봄에 대해 진지하게 고민할 기회가 없었다. 부모님이 일찍 돌아가셔서 장기간 누군가를 돌본다는 게 어떤 것인지 경험하고 느끼지 못했다. 하지만 작년 85세의 파트너 어머니가 우리가 사는 집으로 들어 오게 되면서 쇠약해진 몸으로 일상을 겪는 것, 미래에 대한 기대가 없이 사는 것이 어떤 것인지 간접 경험하고 있다. 그리고 결정적으로는 2020년 후반, 가깝게 지내던 싱글 게이 친구가 기본적인 케어와 식사가 제공되는 노인돌봄 시설로 들어가는 일이 있었다. 70대 중반을 넘어선 그는 몇 년 전부터 파킨슨병이 진행되기 시작했고 경증의 치매 증상도 나타났다. 그 친구는 은퇴 후 낮엔 집수리와 조경, 요가와 산책, 저녁엔 친구들과 밥먹고 와인을 마시는 본인이 원하는 노년을 즐기고 있었다. 이러한 일상을 포기하고 자기 생활에 대한 통제권이 주어지지 않는 요양원에 들어가는 것은 그에게 매우 두려운 일이었다. 더 두려운 것은 시설 내에 동성애 혐오나 차별적 마인드를 갖고 있는 거주자, 스태프, 혹은 의료진이 혹시라도 있을까 하는 것이었다. 한 명이라도 있다면 위축되어 조용히 죽어 지내거나 저항하거나 둘 중의 하나를 택해야 하는, 정서적으로 불안한 생활이 될 게 뻔할 것이기 때문이었다. 그곳 생활에 어느 정도 적응했지만...
문탁
2022.08.30 | 조회 412
세미나 에세이 아카이브
*양생글쓰기 <나이듦과 자기서사> 시즌2에서는 리뷰글쓰기를 해봤습니다. 시즌2을 마치며 쓴 학인들의 리뷰 중두 편을 북앤톡에 올립니다. 함께 읽어봤으면 합니다*     늙어감에 맞서 애쓰지 마라. 늙어감을 직시하라. - 『늙어감에 대하여』(장 아메리, 돌베개, 2014)- 권영애   1. 장 아메리(Jean Améry)는 어떤 인물인가?     『늙어감에 대하여』는 끝까지 읽어 내기 쉽지 않은 책이다. 독자에게 친절하지 않다. 문학, 역사, 철학을 넘나드는 비유와 은유적 표현이 책장을 넘기는 손을 더디게 붙잡는다. 무엇보다도 동굴 속을 헤매는 듯 어둡고 음울하다. 빛을 어디에서 찾아 나갈지는 각자의 몫으로 남겨두는 책이다.         이 책을 읽기 전에 장 아메리(Jean Améry)의 삶을 들여다보아야 한다. 아메리는 ‘홀로코스트 생존 작가’로 알려져 있다. 오스트리아 빈에서 태어나 유대 문화 전통과는 상관없이 자랐지만 유대인 혈통이라는 이유만으로 익숙한 사회로부터 모든 것을 박탈당한다. 벨기에로 망명하여 레지스탕스 활동을 하다 체포되어 아우슈비츠 수용소 등을 거쳐 1945년에 석방되었다. 벨기에에서 이송된 2만여명의 수감자 중 생존한 사람이 615명이었는데 아메리는 그 중 한 명이었다.  수용소에서 겪은 뼈가 으스러지는 고문을 그는 ‘세계에 대한 신뢰를 빼앗아 간다.’라고 회고한다.         그후 본래의 이름, 한스 차임 마이어(Hans Chaim Mayer)를 버리고 벨기에에서 독일어로 저술활동을 하면서도 독일에서 자신의 저술이 출판되는 것을 거부하였다. 그의 작품이 독일에 소개되게 된 것은 젊은 작가 헬무트 하이센 뷔텔이 그를 찾아와 무릎을 꿇고 용서를 구한 후의 일이다. 이때 그가 헬무트에게 한 말이 매우 함축적이다. “인간은 오로지 자기 자신만이 책임질 수 있는 존재다. 나는 내 귀중한 인생을 위해 싸운 것이다.”(p.269)          대중의 기대와는 달리 아메리는 수용소에서 겪은 처참한 경험을 직접적으로 증언하지 않았다. 정치적 지식인, 에세이스트로서 시대를 성찰하는 작품을 남겨두고 두 번의 자유 죽음 시도 끝에 1978년 그의 나이 예순 여섯에 태어난 곳인 잘츠부르크로 돌아가 호텔에서 스스로 생을 마감하였다. 이 책의 두번째 서문에서 그는『자유 죽음』이 이 책의 속편이 될 것이라 썼는데 이를 암시한 것일까?       2.늙어감을 인식하는 다섯 관점         아메리는 이 책을 55세에 -결코 노년의 삶에 대하여 이야기하기에는 너무 젊은 나이에- 세상에 내 놓았다. 젊은 나이로 인해 비평도 있었지만 늙어감에 대해 많은 것을 경험한 10년후에도 서문에서 자신이 옳았으며 자신이 무엇을 이야기하는지 알고 썼다고 했다. 이 책은 인간의 노화 과정을 시간의 인식, 몸의 쇠락, 사회적 노화, 문화적 노화 그리고 이 모든 과정의 끝인 죽음이라는 시각에서 성찰한 철학 에세이라 할 수 있다. 아메리는 이 책을 ‘저항과 체념의 모순을 탐색하는 여정’이라 소개하였다. 하지만 어떠한 위로나 길을 제시하지 않을 것임을 이렇게 밝혔다. “한 걸음씩 차분하게, 어둠 속을 더듬어 헤쳐 나가면서 나는 늙어가는 사람들이 언제나 바랐던 희망, 곧 위로해주었으면 하는 기대를 안타깝지만 깨뜨리지 않을 수 없었다.”(p.7)           늙어감을 성찰하는 아메리의 일관된 핵심은 모순, 혹은 부조리라고 생각되었다. 모든 현상은 궁극적으로 소멸을 향해 나아가는 것이다. ‘시간’과 ‘몸’은 소멸을 실감하는 노년에 이르러서야 비로소 발견된다. 몸이 감옥이 되어감을 경험하면서 몸에 대해 성찰하고 “몸은 인간이 지닌 가장 지극한 진정성”(p.71)임을 알게 된다. 그리고 이 성찰을 통해 밖에서 주어졌던 사회적 자아가 아닌, 진정한 자아를 발견하게 된다. 몸이 세상을 향해 나가가는 다리였을 때가 아니라 장애물이 되었을 때 비로소 온전히 ‘나의 몸’이 된다.            아메리는 노화를‘사회적 연령’이라는 새로운 시각으로 성찰한다.  사회적 연령이란 ‘사회적 노화’를 타인의 시선으로 볼 때 규정되는 것이다. 신체적 연령과는 달리 사회적 노화는 소유가 있을 때를 전제로 한다. 교사라는 직업을 가졌던 나는 사회적 노화 과정을 거치며 타인에 의해 사회적 연령이 규정되었다. 나의 직업은 소유의 세계에 속했으며 그 소유를 지켜 내기 위해 나는 자율성을 누르고 순종하는 소시민으로 살아왔다. 이제 나는 사회적 연령의 수명을 다하고 은퇴하였다. 그리고는 이런 질문에 마주서게 되었다. ”난 어떻게 살아왔는가?” “나의 진짜 삶은 과연 있었던가?”        인간의 노화는 문화적 영역에서도 진행된다. 여기서 떠오르는 단어가‘꼰대’이다. 새로운 것을 거부하고 과거에만 머물려고 하며 그것을 강요하는 나이든 사람을 가리키는 말이다. 새롭게 생겨나는 문화적 유행에 대한 저항감 혹은 소외감을 느끼는 것은 현재의 표시 체계와 과거의 표시 체계가 충돌하기 때문이다. 현재의 문화적 현상을 과거의 표시 체계로 해석하려 하는 만큼 현재로부터 소외될 수밖에 없다. ‘꼰대’는 새로운 표시 체계를 거부한 사람이다. 반대로 이것을 수용하는 ‘열린 노인’은 그 대가로 개인의 체계가 무너지는 것을 감수해야 한다. ‘꼰대’와 ‘자기 붕괴’ 사이에서 갈팡질팡하게 된다. 몸의 노화만큼이나 문화적 노화도 나이 들어가는 사람이 겪어 내야하는 힘든 과정이다.       아메리는 마지막 장 ‘죽음’에서 그가 겪었던 수용소의 경험을 간접적으로 풀어내며 삶과 죽음에 대해 이야기한다. 가장 어둡고 이해하기 어려운 부분이기도 하다. 왜냐하면 ’죽음’에 대해 이야기한다는 것은 절대부정, 근원적 모순, 부조리를 전제하는 것이기 때문이다. 산다는 것은 죽어가는 과정이다. 죽음을 이야기한다는 것은 결코 경험할 수 없는 것을 이야기하는 것이다. 죽음은 생각할 수 없는 것을 생각해야 한다는 점에서 허위이며 유일하고 완전하게 확실한 것이라는 점에서 진리이다. (p.201) 늙어감의 끝은 소멸, 즉 죽음으로 마침표를 찍는다. 가장 확실한 이 진리 앞에서 어떤 위로를 할 수 있단 말인가?    3.『늙어감에 대하여』가 건네는 위로는 진정 없는 것인가?        아메리는 단칼에 잘라 말한다. “속절없이 늙어가는 사람에게 ‘우아한 체념’이라거나 ‘황혼의 지헤’라는 말 따위로 위로하는 것은 굴욕적인 기만에 지나지 않는다.” (p.7) 그렇다면 순수히 항복하고 체념하며 살아야 한다는 것일까? 그래도 나는 동굴 속에서 희미한 빛이 들어오는 틈을 보았다. ‘수상한 타협’과 ‘소홀한 감정’이 그 틈이다. 위로가 아니라 할 수도 있다. 그러나 ‘늙어감’에 대한 성찰은 절대 불변의 유일한 귀결, ‘죽음’과 함께 하는 것이다. 저항은 애초에 불가한 것이다. 체념은 너무나 무기력해 보인다. 이것이 어찌할 수 없는 부조리이며 모순이다. 이 책의 부제, ‘저항과 체념 사이에서’가 암시하듯 아메리는 ‘수상한 타협’을 내민다. 두려움과 믿음, 저항과 체념, 거부와 수용 사이의 균형 감각을 말한다.         이 균형 감각을 유지하기 위해서는 ‘소홀한 감정’이 필요하다. 아메리는 ‘소홀한 감정’에 대해 이렇게 말한다. 죽음의 두려움을 벗어날 길은 없다. 그렇다고 그 두려움이 우리의 삶을 압도하도록 해서도 안 된다. “늙어가는 사람은 그 끝에 죽음이 기다리고 있는 시간을 그저 무관심하게 바라보는 소홀함 감정으로 그럭저럭 견뎌가야 한다.”(P.205) ‘수상한 타협’과 ‘소홀한 감정’은 끝까지 잡고 놓지 않는 성찰이 없이는 가능하지 않은 것이다. 위로를 기대하지 말라 했지만 냉철하게 진실을 드러내 줌으로써 기만적 위로가 아닌 스스로 위로를 찾아가도록 한다고 생각한다.          4. 품위 있는 노년을 위한 무용한 애씀을 내려 놓다. - 나의 ‘수상한 타협’ -        ‘품위 있는 노년’을 감히 꿈꾸었다. 노후를 숫자에 근거해 준비해오고 있었다. 통계가 제시하는 적절한 노후 생활비, 건강을 위협하지 않는 콜레스테롤, 혈당, 혈액 염증 등의 각종 수치들. ‘이만하면 되었다.’라는 안도감 아래에는 항상 알지 못할 불안감이 스멀거렸다. 그 정체를 알지 못했다. 삼 사년 전 어느 날 원인을 알 수 없는 공황감과 가슴 답답함을 느꼈다. 현대 의학 장비를 사용하여 각종 검사를 해 보았으나 뚜렷한 원인을 잡아내지 못하였다. 혼자 집에 있을 때면 불안감이 나를 압도하기도 했다. ‘나 혼자 아무 준비 없이 갑자기 떠나게 되면 어떻게 하지…’ 두려움의 정체는 죽음이었다. 그러나 나는 알고 있다. 이 두려움은 결코 극복될 수 없는 것임을.         덜어내는 노후로 방향을 바꾸어 보았다. 옷장 가득했던 옷들을 버리고 책도 정리했다. 많은 것을 비워냈다. 전원으로 돌아가 소박한 집을 짓고 정원과 텃밭을 가꾸며 평화롭게 살았다. 심지어는 늙는 것은 아름답고 좋은 일이라 고까지 느꼈다. 하지만 이중성도 동시에 드러냈다. ’노화의 속도계는 상대적이다.’라며 액티브 시니어로 이 사회가 강요하는 소비도 마다하지 않고 선택했다. 갖추던 덜어내던 두 길의 끝은 같은 곳에서 멈춘다. 속절없이 늙.는.다.         나는 받아들인다. 발버둥을 쳐보았자 노화라는 불치의 병을 앓고 있음을. 안정된 노후도 젊고 건강해 보이는 것도 약이 되지 못함을. 그저 ‘무해한 진통제’(p.11)일뿐이다. 이제 나는 이 무용한 애씀을 접으려 한다. 그러나 체념과 저항의 줄다리기에서 체념으로 건너간 것은 아니다. 저쪽 끝에는 저항이 있기에 내가 서 있는 줄이 팽팽하게 유지될 수 있는 것이다.         사람들이 나에게 묻는다. “육십이 넘은 나이에 머리아프게 어려운 책을 왜 읽니?” “글은 써서 뭐에 쓰려구?’ “그냥 편히 살어!” 그럼에도 나는 읽고 쓰고 시도해보기를 멈추지 않을 것이다. 건강한 심신을 위해 걷고 또 걸을 것이다. 무엇이 되기 위해서가 아니라 ‘나’가 되기 위해서. 무너져 내리고 상실되어가는 초라한 나, nobody인 내가 기꺼이 되기 위해서. 격렬한 저항의 끝에 택하는 체념은 그저 무기력한 선택이 아니다. 무용한 애씀을 내려놓겠다는 말은 아무것도 하지 않겠다는 선언이 아니라 ‘무엇이 되기 위한’ 애씀은 헛된 것임을 받아들인다는 뜻이다. 거품 같은 위로를 거두어 내고 늙어감을 직시할 때 nobody인 나를 연민없이 바라볼 수 있을 것이다. 이것이 내가 찾은 저항과 체념사이의 ‘수상한 타협’이다.      
*양생글쓰기 <나이듦과 자기서사> 시즌2에서는 리뷰글쓰기를 해봤습니다. 시즌2을 마치며 쓴 학인들의 리뷰 중두 편을 북앤톡에 올립니다. 함께 읽어봤으면 합니다*     늙어감에 맞서 애쓰지 마라. 늙어감을 직시하라. - 『늙어감에 대하여』(장 아메리, 돌베개, 2014)- 권영애   1. 장 아메리(Jean Améry)는 어떤 인물인가?     『늙어감에 대하여』는 끝까지 읽어 내기 쉽지 않은 책이다. 독자에게 친절하지 않다. 문학, 역사, 철학을 넘나드는 비유와 은유적 표현이 책장을 넘기는 손을 더디게 붙잡는다. 무엇보다도 동굴 속을 헤매는 듯 어둡고 음울하다. 빛을 어디에서 찾아 나갈지는 각자의 몫으로 남겨두는 책이다.         이 책을 읽기 전에 장 아메리(Jean Améry)의 삶을 들여다보아야 한다. 아메리는 ‘홀로코스트 생존 작가’로 알려져 있다. 오스트리아 빈에서 태어나 유대 문화 전통과는 상관없이 자랐지만 유대인 혈통이라는 이유만으로 익숙한 사회로부터 모든 것을 박탈당한다. 벨기에로 망명하여 레지스탕스 활동을 하다 체포되어 아우슈비츠 수용소 등을 거쳐 1945년에 석방되었다. 벨기에에서 이송된 2만여명의 수감자 중 생존한 사람이 615명이었는데 아메리는 그 중 한 명이었다.  수용소에서 겪은 뼈가 으스러지는 고문을 그는 ‘세계에 대한 신뢰를 빼앗아 간다.’라고 회고한다.         그후 본래의 이름, 한스 차임 마이어(Hans Chaim Mayer)를 버리고 벨기에에서 독일어로 저술활동을 하면서도 독일에서 자신의 저술이 출판되는 것을 거부하였다. 그의 작품이 독일에 소개되게 된 것은 젊은 작가 헬무트 하이센 뷔텔이 그를 찾아와 무릎을 꿇고 용서를 구한 후의 일이다. 이때 그가 헬무트에게 한 말이 매우 함축적이다. “인간은 오로지 자기 자신만이 책임질 수 있는 존재다. 나는 내 귀중한 인생을 위해 싸운 것이다.”(p.269)          대중의 기대와는 달리 아메리는 수용소에서 겪은 처참한 경험을 직접적으로 증언하지 않았다. 정치적 지식인, 에세이스트로서 시대를 성찰하는 작품을 남겨두고 두 번의 자유 죽음 시도 끝에 1978년 그의 나이 예순 여섯에 태어난 곳인 잘츠부르크로 돌아가 호텔에서 스스로 생을 마감하였다. 이 책의 두번째 서문에서 그는『자유 죽음』이 이 책의 속편이 될 것이라 썼는데 이를 암시한 것일까?       2.늙어감을 인식하는 다섯 관점         아메리는 이 책을 55세에 -결코 노년의 삶에 대하여 이야기하기에는 너무 젊은 나이에- 세상에 내 놓았다. 젊은 나이로 인해 비평도 있었지만 늙어감에 대해 많은 것을 경험한 10년후에도 서문에서 자신이 옳았으며 자신이 무엇을 이야기하는지 알고 썼다고 했다. 이 책은 인간의 노화 과정을 시간의 인식, 몸의 쇠락, 사회적 노화, 문화적 노화 그리고 이 모든 과정의 끝인 죽음이라는 시각에서 성찰한 철학 에세이라 할 수 있다. 아메리는 이 책을 ‘저항과 체념의 모순을 탐색하는 여정’이라 소개하였다. 하지만 어떠한 위로나 길을 제시하지 않을 것임을 이렇게 밝혔다. “한 걸음씩 차분하게, 어둠 속을 더듬어 헤쳐 나가면서 나는 늙어가는 사람들이 언제나 바랐던 희망, 곧 위로해주었으면 하는 기대를 안타깝지만 깨뜨리지 않을 수 없었다.”(p.7)           늙어감을 성찰하는 아메리의 일관된 핵심은 모순, 혹은 부조리라고 생각되었다. 모든 현상은 궁극적으로 소멸을 향해 나아가는 것이다. ‘시간’과 ‘몸’은 소멸을 실감하는 노년에 이르러서야 비로소 발견된다. 몸이 감옥이 되어감을 경험하면서 몸에 대해 성찰하고 “몸은 인간이 지닌 가장 지극한 진정성”(p.71)임을 알게 된다. 그리고 이 성찰을 통해 밖에서 주어졌던 사회적 자아가 아닌, 진정한 자아를 발견하게 된다. 몸이 세상을 향해 나가가는 다리였을 때가 아니라 장애물이 되었을 때 비로소 온전히 ‘나의 몸’이 된다.            아메리는 노화를‘사회적 연령’이라는 새로운 시각으로 성찰한다.  사회적 연령이란 ‘사회적 노화’를 타인의 시선으로 볼 때 규정되는 것이다. 신체적 연령과는 달리 사회적 노화는 소유가 있을 때를 전제로 한다. 교사라는 직업을 가졌던 나는 사회적 노화 과정을 거치며 타인에 의해 사회적 연령이 규정되었다. 나의 직업은 소유의 세계에 속했으며 그 소유를 지켜 내기 위해 나는 자율성을 누르고 순종하는 소시민으로 살아왔다. 이제 나는 사회적 연령의 수명을 다하고 은퇴하였다. 그리고는 이런 질문에 마주서게 되었다. ”난 어떻게 살아왔는가?” “나의 진짜 삶은 과연 있었던가?”        인간의 노화는 문화적 영역에서도 진행된다. 여기서 떠오르는 단어가‘꼰대’이다. 새로운 것을 거부하고 과거에만 머물려고 하며 그것을 강요하는 나이든 사람을 가리키는 말이다. 새롭게 생겨나는 문화적 유행에 대한 저항감 혹은 소외감을 느끼는 것은 현재의 표시 체계와 과거의 표시 체계가 충돌하기 때문이다. 현재의 문화적 현상을 과거의 표시 체계로 해석하려 하는 만큼 현재로부터 소외될 수밖에 없다. ‘꼰대’는 새로운 표시 체계를 거부한 사람이다. 반대로 이것을 수용하는 ‘열린 노인’은 그 대가로 개인의 체계가 무너지는 것을 감수해야 한다. ‘꼰대’와 ‘자기 붕괴’ 사이에서 갈팡질팡하게 된다. 몸의 노화만큼이나 문화적 노화도 나이 들어가는 사람이 겪어 내야하는 힘든 과정이다.       아메리는 마지막 장 ‘죽음’에서 그가 겪었던 수용소의 경험을 간접적으로 풀어내며 삶과 죽음에 대해 이야기한다. 가장 어둡고 이해하기 어려운 부분이기도 하다. 왜냐하면 ’죽음’에 대해 이야기한다는 것은 절대부정, 근원적 모순, 부조리를 전제하는 것이기 때문이다. 산다는 것은 죽어가는 과정이다. 죽음을 이야기한다는 것은 결코 경험할 수 없는 것을 이야기하는 것이다. 죽음은 생각할 수 없는 것을 생각해야 한다는 점에서 허위이며 유일하고 완전하게 확실한 것이라는 점에서 진리이다. (p.201) 늙어감의 끝은 소멸, 즉 죽음으로 마침표를 찍는다. 가장 확실한 이 진리 앞에서 어떤 위로를 할 수 있단 말인가?    3.『늙어감에 대하여』가 건네는 위로는 진정 없는 것인가?        아메리는 단칼에 잘라 말한다. “속절없이 늙어가는 사람에게 ‘우아한 체념’이라거나 ‘황혼의 지헤’라는 말 따위로 위로하는 것은 굴욕적인 기만에 지나지 않는다.” (p.7) 그렇다면 순수히 항복하고 체념하며 살아야 한다는 것일까? 그래도 나는 동굴 속에서 희미한 빛이 들어오는 틈을 보았다. ‘수상한 타협’과 ‘소홀한 감정’이 그 틈이다. 위로가 아니라 할 수도 있다. 그러나 ‘늙어감’에 대한 성찰은 절대 불변의 유일한 귀결, ‘죽음’과 함께 하는 것이다. 저항은 애초에 불가한 것이다. 체념은 너무나 무기력해 보인다. 이것이 어찌할 수 없는 부조리이며 모순이다. 이 책의 부제, ‘저항과 체념 사이에서’가 암시하듯 아메리는 ‘수상한 타협’을 내민다. 두려움과 믿음, 저항과 체념, 거부와 수용 사이의 균형 감각을 말한다.         이 균형 감각을 유지하기 위해서는 ‘소홀한 감정’이 필요하다. 아메리는 ‘소홀한 감정’에 대해 이렇게 말한다. 죽음의 두려움을 벗어날 길은 없다. 그렇다고 그 두려움이 우리의 삶을 압도하도록 해서도 안 된다. “늙어가는 사람은 그 끝에 죽음이 기다리고 있는 시간을 그저 무관심하게 바라보는 소홀함 감정으로 그럭저럭 견뎌가야 한다.”(P.205) ‘수상한 타협’과 ‘소홀한 감정’은 끝까지 잡고 놓지 않는 성찰이 없이는 가능하지 않은 것이다. 위로를 기대하지 말라 했지만 냉철하게 진실을 드러내 줌으로써 기만적 위로가 아닌 스스로 위로를 찾아가도록 한다고 생각한다.          4. 품위 있는 노년을 위한 무용한 애씀을 내려 놓다. - 나의 ‘수상한 타협’ -        ‘품위 있는 노년’을 감히 꿈꾸었다. 노후를 숫자에 근거해 준비해오고 있었다. 통계가 제시하는 적절한 노후 생활비, 건강을 위협하지 않는 콜레스테롤, 혈당, 혈액 염증 등의 각종 수치들. ‘이만하면 되었다.’라는 안도감 아래에는 항상 알지 못할 불안감이 스멀거렸다. 그 정체를 알지 못했다. 삼 사년 전 어느 날 원인을 알 수 없는 공황감과 가슴 답답함을 느꼈다. 현대 의학 장비를 사용하여 각종 검사를 해 보았으나 뚜렷한 원인을 잡아내지 못하였다. 혼자 집에 있을 때면 불안감이 나를 압도하기도 했다. ‘나 혼자 아무 준비 없이 갑자기 떠나게 되면 어떻게 하지…’ 두려움의 정체는 죽음이었다. 그러나 나는 알고 있다. 이 두려움은 결코 극복될 수 없는 것임을.         덜어내는 노후로 방향을 바꾸어 보았다. 옷장 가득했던 옷들을 버리고 책도 정리했다. 많은 것을 비워냈다. 전원으로 돌아가 소박한 집을 짓고 정원과 텃밭을 가꾸며 평화롭게 살았다. 심지어는 늙는 것은 아름답고 좋은 일이라 고까지 느꼈다. 하지만 이중성도 동시에 드러냈다. ’노화의 속도계는 상대적이다.’라며 액티브 시니어로 이 사회가 강요하는 소비도 마다하지 않고 선택했다. 갖추던 덜어내던 두 길의 끝은 같은 곳에서 멈춘다. 속절없이 늙.는.다.         나는 받아들인다. 발버둥을 쳐보았자 노화라는 불치의 병을 앓고 있음을. 안정된 노후도 젊고 건강해 보이는 것도 약이 되지 못함을. 그저 ‘무해한 진통제’(p.11)일뿐이다. 이제 나는 이 무용한 애씀을 접으려 한다. 그러나 체념과 저항의 줄다리기에서 체념으로 건너간 것은 아니다. 저쪽 끝에는 저항이 있기에 내가 서 있는 줄이 팽팽하게 유지될 수 있는 것이다.         사람들이 나에게 묻는다. “육십이 넘은 나이에 머리아프게 어려운 책을 왜 읽니?” “글은 써서 뭐에 쓰려구?’ “그냥 편히 살어!” 그럼에도 나는 읽고 쓰고 시도해보기를 멈추지 않을 것이다. 건강한 심신을 위해 걷고 또 걸을 것이다. 무엇이 되기 위해서가 아니라 ‘나’가 되기 위해서. 무너져 내리고 상실되어가는 초라한 나, nobody인 내가 기꺼이 되기 위해서. 격렬한 저항의 끝에 택하는 체념은 그저 무기력한 선택이 아니다. 무용한 애씀을 내려놓겠다는 말은 아무것도 하지 않겠다는 선언이 아니라 ‘무엇이 되기 위한’ 애씀은 헛된 것임을 받아들인다는 뜻이다. 거품 같은 위로를 거두어 내고 늙어감을 직시할 때 nobody인 나를 연민없이 바라볼 수 있을 것이다. 이것이 내가 찾은 저항과 체념사이의 ‘수상한 타협’이다.      
문탁
2022.08.30 | 조회 532
세미나 에세이 아카이브
*단짠단짠 글쓰기 클래스 시즌2는 '여행'이 주제였습니다. 시즌2을 마치며 쓴 에세이 가운데 두 편을 북앤톡에 올립니다. 함께 읽어봤으면 합니다.      ‘내 방’이 생겼다   “인간의 불행의 유일한 원인은 자신의 방에 고요히 머무는 방법을 모른다는 것이다”(『팡세』 단장 136, 『여행의 기술』, 알랭 드 보통, 청미래, 2011년, 30쪽, 재인용)   나에게 고요히 머물 ‘내 방’이 생긴 건 약 1년 전쯤이다. 단순히 물리적 공간으로서 ‘내 방’이 아니다. 나 이외 그 어떤 존재도 쉽게 나를 흔들 수 없는, 적어도 이 공간 안에서는 내 의지대로 모든 것이 돌아가는 완전무결한 독립적 공간으로서 ‘내 방’ 말이다. 집에 대해 사랑한다는 감정을 가져보기는 처음이다. 이건 모두 독립해 나간 딸이 나에게 준 선물이다. 덕분에 나는 더욱 '집순이'가 되었다.   내가 퇴직을 하면서 가장 많이 받은 질문은 ‘이제 뭐 할 거에요?’도 아닌 ‘어디로 여행갈 거예요?’였다. 사람들은 진정한 쉼이나, 자유로움은 집에서 찾을 수 없다고 생각하는 듯 했다. 자꾸 어딜 떠나라고 한다. 제주 1년살이도 좋고, 산티아고도 좋지만 나는 내 방에 머무는 것도 좋다.   알랭 드 보통은 ‘여행할 장소에 대한 조언은 어디에나 널려 있지만, 우리가 가야하는 이유와 가는 방법에 대한 이야기는 듣기 힘들다’(『여행의 기술』, 17쪽)고 한다. 어쩌면 내가 퇴직 이후 ‘여행’ 계획을 딱히 세우지 못하고 있는 이유가 여기 있는지도 모른다. 여행을 통해 결국 우리가 되찾고자 하는 것은 무엇일까? 삶에 지쳐있는 혹은 정체되어 있는 ‘자신을...
*단짠단짠 글쓰기 클래스 시즌2는 '여행'이 주제였습니다. 시즌2을 마치며 쓴 에세이 가운데 두 편을 북앤톡에 올립니다. 함께 읽어봤으면 합니다.      ‘내 방’이 생겼다   “인간의 불행의 유일한 원인은 자신의 방에 고요히 머무는 방법을 모른다는 것이다”(『팡세』 단장 136, 『여행의 기술』, 알랭 드 보통, 청미래, 2011년, 30쪽, 재인용)   나에게 고요히 머물 ‘내 방’이 생긴 건 약 1년 전쯤이다. 단순히 물리적 공간으로서 ‘내 방’이 아니다. 나 이외 그 어떤 존재도 쉽게 나를 흔들 수 없는, 적어도 이 공간 안에서는 내 의지대로 모든 것이 돌아가는 완전무결한 독립적 공간으로서 ‘내 방’ 말이다. 집에 대해 사랑한다는 감정을 가져보기는 처음이다. 이건 모두 독립해 나간 딸이 나에게 준 선물이다. 덕분에 나는 더욱 '집순이'가 되었다.   내가 퇴직을 하면서 가장 많이 받은 질문은 ‘이제 뭐 할 거에요?’도 아닌 ‘어디로 여행갈 거예요?’였다. 사람들은 진정한 쉼이나, 자유로움은 집에서 찾을 수 없다고 생각하는 듯 했다. 자꾸 어딜 떠나라고 한다. 제주 1년살이도 좋고, 산티아고도 좋지만 나는 내 방에 머무는 것도 좋다.   알랭 드 보통은 ‘여행할 장소에 대한 조언은 어디에나 널려 있지만, 우리가 가야하는 이유와 가는 방법에 대한 이야기는 듣기 힘들다’(『여행의 기술』, 17쪽)고 한다. 어쩌면 내가 퇴직 이후 ‘여행’ 계획을 딱히 세우지 못하고 있는 이유가 여기 있는지도 모른다. 여행을 통해 결국 우리가 되찾고자 하는 것은 무엇일까? 삶에 지쳐있는 혹은 정체되어 있는 ‘자신을...
먼불빛
2022.08.22 | 조회 253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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