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읽고쓰기 1234] ‘훌륭한 문학 작품은 정의로 나가는 문이다’

스르륵
2023-05-24 11:39
342

 

 

 

  익숙하거나 낯설거나

‘정의란 무엇인가’라는 짧은 질문에는 수많은 철학적 사상들과 유명한 철학자들이 줄줄이 소환되어 나온다. 미국의 저명한 법철학자이자 정치철학자인 마사 너스바움은 여기에 ‘시적 정의(Poetic Justice)’라는 조금은 낯선 정의를 하나 더 추가한다. 그러나 ‘시적 정의’라는 단어자체는 17세기 후반 영국의 문학비평가인 토머스 라이머가 쓴 말이기도 하고, 일반적으로 시나 소설 속 권선징악이나 인과응보 사상을 의미하기에 우리는 착한 일을 한 흥부가 복을 받고, 신데렐라와 언니들의 결말에 울고 웃음으로써 이미 시적 정의를 익숙하게 체화하며 살고 있었던 셈이다.

 

『시적 정의』는 너스바움이 1994년부터 미국 시카고대학교 로스쿨에서 <법과 문학>이라는 강의를 한 경험에서 비롯한다, 밤낮없이 법전을 외우는 미래 법률가들의 모습에 더 익숙한 우리에게 ‘법’과 ‘문학’의 만남은 왠지 좀 낯설다. 더군다나 문학작품에서 옹호되는 감정은 합리적인 추론들 사이에서 배제되기 일쑤이니 말이다. 그렇다면 미래의 법률가인 로스쿨 학생들뿐만 아니라 정치인, 그리고 합리적인 의사결정을 수행해야 하는 공적 영역에 위치하고 있는 이들에게 왜 너스바움은 다른 무엇보다도 ‘문학 작품’을 읽어야 한다고 강조하고 있는 것일까? 왜 합리적 영역들 속에서 비합리적이라 여겨지는 ‘감정을 이야기하고 있는 것일까?

 

 

  1. 왜 문학적 상상력일까

오늘날 우리는 문학이란 것을 선택적인 것으로 생각하는데 익숙하다. 문학은 흥미롭고 소중하고 훌륭하지만 어쩐지 정치, 경제, 법적인 사유와는 거리가 멀다고 느껴지거나 부수적인 것으로 여기기 때문이다. 하여 경제적인 합리성이라는 것이 공적 영역을 넘어 사적인 일상을 좌우하는 보편적인 원리가 된 지금 오히려 문학적 사유나 상상력은 어떤 의미에서는 피해야할 위험한 것이 되기도 한다.

 

그래드그라인드 씨는 동굴처럼 움푹 들어간 두 눈을 난롯불에 고정하고 주머니에 양손을 찌른 채 생각에 잠겨 말했다. “루이자나 토모스가 그런 유의 글을 읽은 걸까? 극도로 조심했지만 쓸데없는 이야기책이 집 안으로 들어 온 걸까? 어릴 때부터 규정대로 정확하게 실제적인 교육만 받은 아이가 이런 일에 관심을 갖다니, 이상하고 이해할 수 없는 일이야.”

                                                                       -  찰스 디킨스 『어려운 시절』중에서 -

 

                                                         

 

 

그래드그라인드 씨의 걱정은 옳다. 문학은 단순한 장식용이나 재미를 위한 것이 아님을, 또 평소엔 관심없던 일에 뜬금없이 관심을 가질 수도 있게 하는 위험한 것임을 그가 이미 알고 있기때문이다. ‘문학은 인간 삶의 복잡함을 도표로 나타내는 정치경제학 텍스트들의 세계관과는 양립할 수 없는 삶의 의미를 표현하며, 어떤 면에서는 합리성이라는 과학적 기준을 전복시키는 욕망과 상상력에 기여하는(26)’ 불순한 것이기 때문이다.

 

허나 문학과 대결하고 있는 과학적 합리성에 기초한 공리주의적인 경제적 모델은 생각보다 훨씬 막강한 상대다, ‘합리적 선택 모델들은 대체로 철학적 예리함을 내포하며, 아니 어쩌면 철학적 설명들보다 훨씬 영향력이 크다.(58)’ 왜냐하면 우리에게 경제적 모델들은 측정하기 어려운 질적인 차이들을 편리하게 양적인 차이로 축소해주고, 복잡한 개별적인 삶의 정보를 집합화해주며, 무엇보다도 불확실한 미래 예측에 유용하게 사용되고 있기에 말이다.

 

 

이 세상은 사실만을 원하오. 여러분, 누가 뭐라 하건 자와 저울, 구구표를 주머니에 항상 가지고 다니면서 인간성의 어떤 쪼가리라도 무게를 달고 치수를 재고 그 결과를 여러분에게 정확히 알려줍니다. 그건 그저 숫자의 문제이고 간단한 산술의 문젭니다.’                                                                           - 같은 책 -

 

 

우리는 이렇게 합리적인 모델들에 근거하여 도출된 ‘사실’을 편애한다. 그러나 사실을 ‘진리’로서 받아들일 경우, 경제학적 접근법은 반드시 의심해 봐야 한다고 너스바움은 강조한다. 왜냐면 정치경제학에서 말하고 있는 ‘사실’은 사실상 환원주의적인 완전하지 못한 인식이며, ‘이성’은 빈번히 신뢰를 배반하는 독단적 작동(72)’임을 우리가 이미 알고 있기 때문이다. 하여 질적인 세계의 풍부함과 인간 존재의 개별성과 내면적 깊이, 사랑, 두려움, 희망, 이런 복잡함을 표현하는데 적합한 문학적 언어들과 사유의 능력들이 과학이라는 이름하에 폐기되어 버려선 안되는 것이다.

 

그렇다면 우리는 ‘어떤’ 문학 작품을 읽어야 하는 것일까? 너스바움은 어떤 소설이 이런 문학적 상상력을 재현하는지, 또 소설에서 어떤 일이 벌어지는지도 중요하지만, 무엇보다 독자와의 생생한 소통 방식을 통해 생의 감각을 구현해내는 소설 ‘자체의 형식’이 중요하다고 말한다. ‘일어난’ 일을 보여주는 것이 아닌 ‘일어날 법한’ 일을 보여준다는 점에서, 또 허구의 형식이지만 ‘일반적’인 것과 ‘구체적’인 것 사이를 오가며 ‘평범한 것’들에 관심을 가지는 장르로서의 소설에 주목한다.

 

즉, 소설이라는 형식은 독자들로 하여금 작품 속에서 등장인물들의 입장에 서는 ‘연습’을 하게 만들고, 각각의 경험들과 마주치게 함으로써 주인공들이 처한 현재의 상황과 또 미래의 상황에 대해 스스로 의문을 가지고 ‘상상과 성찰’ 을 하게 만든다. 하여 타인의 행복이라는 아주 복잡한 가치를 수치화 하거나, 또는 내가 경험하지 못한 사건을 합리적으로 판단해내야 하는 여러 공적 판단의 영역에서 문학적 상상력은 그 합리성의 지평을 더욱더 넓고 선명하게 만들어 준다.

 

 

  1. 감정(感情)을 감정(鑑定)하다

한편, 문학은 감정과 결부되어 있다. 눈앞에 없는 다른 것을 보게 해주는 트레이닝으로서의 문학적 상상력이란, 실은 작품 속 인물들과 자신이 연루(연결)되어 있다는 특별한 경험에 감정을 이입하는 것에 다름 아니기 때문이다. 하여 문학적 상상력의 공적 역할을 주장할 때 반드시 넘어야 할 산이 하나 있는데 이는 바로 ‘감정 불신론’ 즉 ‘감정을 신뢰하지 못하는 수 백(?)가지 이유들’이다. 너스바움은 대표적인 네 가지 감정 불신론에 맞서 문학적 상상력의 핵심 주자 ‘감정’을 변호한다.

 

첫 번째는 ‘동물적 힘’으로서의 감정이다. 이는 감정이 이성적 사유와는 전혀 관련 없는 충동, 온전치 못한 맹목적인 힘이기에 비합리적 계열에 위치 시켜야 한다는 가장 ‘일반적인’ 감정 불신론이다. 그런데 이는 요즘은 이미 인정되기 어려운 주장이기도 하고, 무엇보다 ‘충동’(욕구)과 ‘감정’은 서로 다른 것이라는 서양 철학 전통 내에서의 구분에 너스바움도 동의하며, 감정 변론은 두 번째 주장으로 넘어간다.

 

두 번째는 ‘공평하지 못한’ 감정, 즉 편향된 애착으로서의 감정이다. 쉽게 말해 이는 흔히 우리가 혈연, 지연, 학연 같은 개인적인 유대에 지나치게 집착한 결과, ‘있는’ 사실도 공명정대하게 보지 못한다는 일상의 비판에서 쉽게 마주 칠 수 있다. 그러나 너스바움은 공평한 시각이 진정 무엇인지 묻는다. 빈곤률 3.4%로로 표기되는 수치적 공평함, 또는 그 포괄적인 시야가 진정 공평한 시각일까. 이러한 시각들은 사회적 관심 유발에 매우 불리하다. 모든 것에 공평한 자는 실은 그 어떤 구체적인 것에도 관심을 가지지 않는 자이기 때문이다. 감정이 해결 방법을 말해주진 않지만, 감정은 관심을 유발한다.

 

세 번째, 감정은 부르주아적 개인주의에 봉사하는 ‘낭만적 도구’일 뿐이라는 주장인데, 이는 보다 큰 사회적 단위나 계급 문제에 신경을 쓰지 않는 감정을 비판하는 마르크스주의자들과 여타 정치적 사상가들의 주장이다. 감정이 계급과 정치 같은 거대 문제에 무관심하고 개인의 자유에만 기여한다는 주장은 일견 일리가 있어보일 수도 있다고 너스바움은 말한다. 전통적으로 장르 속 개인들은 거대 제도들에게 자유를 침해 받는 개인으로 묘사된 경우가 많았기에 말이다. 그러나 너스바움은 '개별 이야기가 빠진 계급 운동 이야기는 늘 개별적 삶의 개선을 추구하는 계급적 행동의 핵심과 의미를 보여주지 못한다(157)' 말한다.

 

마지막 네 번째는 서양 철학 전통 내에서 주장되어온, '사유로서의 감정'이다. 일명 스토아적인 이 감정은 배고픔이나 갈증같은 충동과는 구분되는, 판단이나 믿음이 수반되는 일종의 사유적인 지각 방식이다. 그런데 사유, 혹은 지각 방식로서의 이 감정은 우리를 오직 스스로에게서 근원하는 지혜가 아닌 외부 세계와 대상에 지나치게 끄달리게 하는 원인이다. 즉 이 감정은 우리에게서 내면의 안정적 평정심을 빼앗고, 오류적 판단을 반복케하여 우리를 불완전한 존재가 되게 하기에 제거되어져 할 것으로 호명된다.

 

그렇다면 이런 철학적 관점 안에서 연민 같은 동정심은 우리도 그런 처지가 될 수 있으리라는 ‘오류적인’ 믿음에서 야기되는 불필요한 감정이 되어 버린다. 허나 너스바움은 이런 철학적 성찰이 연민의 동기를 남겨두지 않는다면 우리는 타인에게 일어나는 나쁜 일들에 어떻게 관심을 가지며, 위험에도 불구하고 행해지는 사회 정의와 선행에 또 어떻게 연루될 수 있겠느냐고 질문한다. 문학적 상상력과 연결되는 감정의 이입이라는 이 '복잡한 마음의 경로' 를 힘들게 왕복하지 않는다면, '진정한' 합리적 공리주의는 실현될 수 없다.

 

 

  1. 시적 정의는 우리를 어디로 데려갈까

이 나라에서 시인은 한결 같은 인간이다

그는 다양성의 중재자이며, 열쇠다

그는 자신의 시대와 영토의 형평을 맞추는 자이다

그는 논쟁자가 아니다, 그는 심판이다

그는 재판관이 심판하듯 판단하지 않고 태양이 무기력한 것들 주변에 떨어지듯 판단한다

그는 남자들과 여자들 안에서 영원을 보며, 남자들과 여자들을 꿈이나 점으로 보지 않는다

                                                                             - 월트 휘트먼, 『나 자신의 노래』 중 -

 

플라톤은 좋은 나라를 위해서 시인을 추방해야 한다고 말했지만, 휘트먼은 좋은 나라를 위해서 시인이 꼭 필요하다고 노래한다. 휘트먼이 보기에 시적 정의를 갖춘 시인은 그 누구보다 정의를 심판하기에 적격인 자다. 그는 '다양성의 중재자' 이자 '자신의 시대와 영토의 형평을 맞추는 자' . 그는 '(일반적인) 재판관이 판단하듯 판단하지 않고, 태양이 무기력한 것들 주변에 떨어지듯 판단하는 자' 다. 그러나 햇빛과도 같은 시인 재판관의 시선은 세상의 다양한 존재들을 구석구석 살피고 감싸 안는 따스하고 친밀한 시선인 동시에 그 어떤 것도 인식되지 않은 채로 남겨두지 않고 밖으로 드러나게 하는 엄중한 시선이다.

 

다시 말해 시인 재판관은 어둠에 가려진 무기력한 자들의 상황을 따스하게 비추는 친밀함을 가지는 동시에, 모든 사물이나 특성에 과하지도 부족하지도 않은 적당한 비율을 부여 할 줄 알아야 한다는 것이다. 시적 지혜는 단순히 동일시의 감정 이입만으로 형성되는 것이 아니라 인간 존재의 역사성을 두루 두루 살필 줄 아는 분별 있는 관찰자적인 인식을 장착해야 하기 떄문이다.

 

적당한 비율을 부여하는 공평한 인식에 근거한 이런 시적 지혜는 어디에도 치우치지 않는 사법적 중립성과 일견 비슷해 보이지만, 시적 중립성은 규범적인 '일반성'이 아닌 '구체성' 즉 인간적 경험과 역사적인 테두리를 벗어나지 않는다는 점에서 다르다. 이는 일상에서 우리가 소설을 읽고 특정 형태의 사건에 감정을 이입하면서 어떤 실천적 판단을 고민할 때, 초월적인 기준이 아니라 인간 공동체 '안에서' 인간 공동체를 위한 좋음을 추구해야 한다는 말과 다르지 않다. 그래야 독서는 비로소 그저 자유로운 해석의 놀이, 낭만적인 공감과 공상의 놀이와는 다른 것이 되어 우리를 다른 곳으로 데려다 줄 수 있을 것이다.                          

 

 

 

'한 권의 책이 당장 우리에게 정의를 가져다 줄 수는 없겠지만 공감과 용기와 희망을 마음 속에 남겨둔다면(261)' 정의로 나가는 문은 적어도 사라지지 않을 것이다. 언젠가부터 감정 반론자들이 제기한 저 이유들을 대며, 또 숙제할 시간도 없는데를 외치며 '문학적 상상력‘과 '감정 이입' 이라는 영혼의 동요를 기피 하며 살고 있던 나에게 『시적 정의』는 그 영혼의 동요가 불평등과 돌봄, 빈곤, 기후, 전쟁 등의 전 지구적 문제들과 '나'를 복잡하게 뒤섞으며, 지금과는 다른 ‘낯선 곳’으로 우리를 데려다 줄 수 있음을 알려주었다.

 

 

댓글 4
  • 2023-05-24 19:39

    상상과 성찰!! 감정을 통로로 우리가 얻을 수 있는 것이군요~ 잘 읽었습니다!

  • 2023-05-28 14:59

    요즘들어 문학책 읽기가 중요하다는 생각이 많이 들기는 합니다.

  • 2023-05-29 09:40

    시적 지혜를 기르려면 시를 읽어야 할까요?
    사실 우리는 법관도 아닌데도 재판관이 재판하듯 매사를 판단해버릴 때가 많은 것 같아요.
    어떻게 하면 재판관이 재판하듯 현실을 일도양단으로 재단하지 않고 '태양이 무기력한 것들 주변에 떨어지듯' 세상과 만날 수 있을까요?

  • 2023-06-06 11:49

    얼마 전에 단편 소설집을 몇몇이 같이 읽었습니다.
    이런 저런 이야기를 하다가,
    문학적 상상력이란 타인에 대한 공감능력과 연결이 된다,
    는 말에 고개를 끄덕였습니다.

    우리가 영화를 보는 이유 또한 그와 다르지 않다고 생각이 됩니다. ^^

    스르르르르르륵님, 잘 읽었습니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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    게임의 미학     0. 인트로 : 얘가 웬종일 게임만 하더니..  미학을 공부하겠다고 했지만, 사실 난 회화나 조각을 비롯한 고전 미술에 관해서는 관심과 조예가 별로 없다. 그래서인지 원래 읽기로 했던 『문학과 예술의 사회사』를 읽으면서는 매번 졸음을 참을 수가 없었다. 서양 철학사를 공부하다보니 미학사와 철학사가 맞닿는 지점들은 재밌었지만, 기본적으로 그런 지점이 생각보다 많지 않았다. 반대로 미디어 세미나에서 읽은 『20세기 매체철학』 과 개인적으로 읽은 『게임 : 행위성의 미학』은 시간 가는 줄 모르고 읽었다. 이는 내가 디지털을 기반으로 한 미디어 예술들을 훨씬 많이 접하고 있기 때문이리라. 미디어 예술이라고 해서 꼭 백남준이 떠오르는 ‘미디어 아트’만을 가리키는 게 아니다. 유투브 영상, 인터넷 방송, 영화, 게임 등 온갖 디지털 매체를 통해 접하는 모든 것을 이야기하고 싶은 것이다. 그중에서도 게임은 역시나 내 ‘최애’라고 할 수 있다. 그러나 이것들은 고전 예술에 비해 ‘미학적’이라고 여겨지지 않는 듯하다. ‘메타버스’니 ‘증강현실’이니 ‘대 유투브 시대’니 많은 말들이 오가고 있지만, 게임과 디지털 매체들이 갖고 있는 사회적 지위는 여전히 좋지 않다 (물론 점점 나아지고는 있다). 나와 동은, 정군이 게임에 대해 이야기 할 때마다 어이없다는 듯이 웃는 선생님들, 과연 고흐의 작품이나 고전 예술을 다룬 전시에 대한 이야기였어도 같은 반응일까? 나마저도 바쁜 와중에 시간을 쪼개서 게임을 하고 나면 조금의 죄책감을 느끼곤 한다. 디지털 매체를 통한 예술은 고전 미술과 무엇이 다른가? 왜 우리는 게임과 영상들을...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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우현
2023.05.25 | 조회 355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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스르륵
2023.05.24 | 조회 342
세미나 에세이 아카이브
*양생글쓰기 <나이듦과 자기서사> 시즌2에서는 리뷰글쓰기를 해봤습니다. 시즌2을 마치며 쓴 학인들의 리뷰 중두 편을 북앤톡에 올립니다. 함께 읽어봤으면 합니다*     돌봄 초보의 ‘시민’ 되기 <<새벽 세시의 몸들에게>>(옥희살롱, 봄날의 책, 2021)   양해성     가족 또는 시설밖에 없을까?   나는 돌봄 초보이다. 우선 돌봄에 대해 진지하게 고민할 기회가 없었다. 부모님이 일찍 돌아가셔서 장기간 누군가를 돌본다는 게 어떤 것인지 경험하고 느끼지 못했다. 하지만 작년 85세의 파트너 어머니가 우리가 사는 집으로 들어 오게 되면서 쇠약해진 몸으로 일상을 겪는 것, 미래에 대한 기대가 없이 사는 것이 어떤 것인지 간접 경험하고 있다. 그리고 결정적으로는 2020년 후반, 가깝게 지내던 싱글 게이 친구가 기본적인 케어와 식사가 제공되는 노인돌봄 시설로 들어가는 일이 있었다. 70대 중반을 넘어선 그는 몇 년 전부터 파킨슨병이 진행되기 시작했고 경증의 치매 증상도 나타났다. 그 친구는 은퇴 후 낮엔 집수리와 조경, 요가와 산책, 저녁엔 친구들과 밥먹고 와인을 마시는 본인이 원하는 노년을 즐기고 있었다. 이러한 일상을 포기하고 자기 생활에 대한 통제권이 주어지지 않는 요양원에 들어가는 것은 그에게 매우 두려운 일이었다. 더 두려운 것은 시설 내에 동성애 혐오나 차별적 마인드를 갖고 있는 거주자, 스태프, 혹은 의료진이 혹시라도 있을까 하는 것이었다. 한 명이라도 있다면 위축되어 조용히 죽어 지내거나 저항하거나 둘 중의 하나를 택해야 하는, 정서적으로 불안한 생활이 될 게 뻔할 것이기 때문이었다. 그곳 생활에 어느 정도 적응했지만...
*양생글쓰기 <나이듦과 자기서사> 시즌2에서는 리뷰글쓰기를 해봤습니다. 시즌2을 마치며 쓴 학인들의 리뷰 중두 편을 북앤톡에 올립니다. 함께 읽어봤으면 합니다*     돌봄 초보의 ‘시민’ 되기 <<새벽 세시의 몸들에게>>(옥희살롱, 봄날의 책, 2021)   양해성     가족 또는 시설밖에 없을까?   나는 돌봄 초보이다. 우선 돌봄에 대해 진지하게 고민할 기회가 없었다. 부모님이 일찍 돌아가셔서 장기간 누군가를 돌본다는 게 어떤 것인지 경험하고 느끼지 못했다. 하지만 작년 85세의 파트너 어머니가 우리가 사는 집으로 들어 오게 되면서 쇠약해진 몸으로 일상을 겪는 것, 미래에 대한 기대가 없이 사는 것이 어떤 것인지 간접 경험하고 있다. 그리고 결정적으로는 2020년 후반, 가깝게 지내던 싱글 게이 친구가 기본적인 케어와 식사가 제공되는 노인돌봄 시설로 들어가는 일이 있었다. 70대 중반을 넘어선 그는 몇 년 전부터 파킨슨병이 진행되기 시작했고 경증의 치매 증상도 나타났다. 그 친구는 은퇴 후 낮엔 집수리와 조경, 요가와 산책, 저녁엔 친구들과 밥먹고 와인을 마시는 본인이 원하는 노년을 즐기고 있었다. 이러한 일상을 포기하고 자기 생활에 대한 통제권이 주어지지 않는 요양원에 들어가는 것은 그에게 매우 두려운 일이었다. 더 두려운 것은 시설 내에 동성애 혐오나 차별적 마인드를 갖고 있는 거주자, 스태프, 혹은 의료진이 혹시라도 있을까 하는 것이었다. 한 명이라도 있다면 위축되어 조용히 죽어 지내거나 저항하거나 둘 중의 하나를 택해야 하는, 정서적으로 불안한 생활이 될 게 뻔할 것이기 때문이었다. 그곳 생활에 어느 정도 적응했지만...
문탁
2022.08.30 | 조회 412
세미나 에세이 아카이브
*양생글쓰기 <나이듦과 자기서사> 시즌2에서는 리뷰글쓰기를 해봤습니다. 시즌2을 마치며 쓴 학인들의 리뷰 중두 편을 북앤톡에 올립니다. 함께 읽어봤으면 합니다*     늙어감에 맞서 애쓰지 마라. 늙어감을 직시하라. - 『늙어감에 대하여』(장 아메리, 돌베개, 2014)- 권영애   1. 장 아메리(Jean Améry)는 어떤 인물인가?     『늙어감에 대하여』는 끝까지 읽어 내기 쉽지 않은 책이다. 독자에게 친절하지 않다. 문학, 역사, 철학을 넘나드는 비유와 은유적 표현이 책장을 넘기는 손을 더디게 붙잡는다. 무엇보다도 동굴 속을 헤매는 듯 어둡고 음울하다. 빛을 어디에서 찾아 나갈지는 각자의 몫으로 남겨두는 책이다.         이 책을 읽기 전에 장 아메리(Jean Améry)의 삶을 들여다보아야 한다. 아메리는 ‘홀로코스트 생존 작가’로 알려져 있다. 오스트리아 빈에서 태어나 유대 문화 전통과는 상관없이 자랐지만 유대인 혈통이라는 이유만으로 익숙한 사회로부터 모든 것을 박탈당한다. 벨기에로 망명하여 레지스탕스 활동을 하다 체포되어 아우슈비츠 수용소 등을 거쳐 1945년에 석방되었다. 벨기에에서 이송된 2만여명의 수감자 중 생존한 사람이 615명이었는데 아메리는 그 중 한 명이었다.  수용소에서 겪은 뼈가 으스러지는 고문을 그는 ‘세계에 대한 신뢰를 빼앗아 간다.’라고 회고한다.         그후 본래의 이름, 한스 차임 마이어(Hans Chaim Mayer)를 버리고 벨기에에서 독일어로 저술활동을 하면서도 독일에서 자신의 저술이 출판되는 것을 거부하였다. 그의 작품이 독일에 소개되게 된 것은 젊은 작가 헬무트 하이센 뷔텔이 그를 찾아와 무릎을 꿇고 용서를 구한 후의 일이다. 이때 그가 헬무트에게 한 말이 매우 함축적이다. “인간은 오로지 자기 자신만이 책임질 수 있는 존재다. 나는 내 귀중한 인생을 위해 싸운 것이다.”(p.269)          대중의 기대와는 달리 아메리는 수용소에서 겪은 처참한 경험을 직접적으로 증언하지 않았다. 정치적 지식인, 에세이스트로서 시대를 성찰하는 작품을 남겨두고 두 번의 자유 죽음 시도 끝에 1978년 그의 나이 예순 여섯에 태어난 곳인 잘츠부르크로 돌아가 호텔에서 스스로 생을 마감하였다. 이 책의 두번째 서문에서 그는『자유 죽음』이 이 책의 속편이 될 것이라 썼는데 이를 암시한 것일까?       2.늙어감을 인식하는 다섯 관점         아메리는 이 책을 55세에 -결코 노년의 삶에 대하여 이야기하기에는 너무 젊은 나이에- 세상에 내 놓았다. 젊은 나이로 인해 비평도 있었지만 늙어감에 대해 많은 것을 경험한 10년후에도 서문에서 자신이 옳았으며 자신이 무엇을 이야기하는지 알고 썼다고 했다. 이 책은 인간의 노화 과정을 시간의 인식, 몸의 쇠락, 사회적 노화, 문화적 노화 그리고 이 모든 과정의 끝인 죽음이라는 시각에서 성찰한 철학 에세이라 할 수 있다. 아메리는 이 책을 ‘저항과 체념의 모순을 탐색하는 여정’이라 소개하였다. 하지만 어떠한 위로나 길을 제시하지 않을 것임을 이렇게 밝혔다. “한 걸음씩 차분하게, 어둠 속을 더듬어 헤쳐 나가면서 나는 늙어가는 사람들이 언제나 바랐던 희망, 곧 위로해주었으면 하는 기대를 안타깝지만 깨뜨리지 않을 수 없었다.”(p.7)           늙어감을 성찰하는 아메리의 일관된 핵심은 모순, 혹은 부조리라고 생각되었다. 모든 현상은 궁극적으로 소멸을 향해 나아가는 것이다. ‘시간’과 ‘몸’은 소멸을 실감하는 노년에 이르러서야 비로소 발견된다. 몸이 감옥이 되어감을 경험하면서 몸에 대해 성찰하고 “몸은 인간이 지닌 가장 지극한 진정성”(p.71)임을 알게 된다. 그리고 이 성찰을 통해 밖에서 주어졌던 사회적 자아가 아닌, 진정한 자아를 발견하게 된다. 몸이 세상을 향해 나가가는 다리였을 때가 아니라 장애물이 되었을 때 비로소 온전히 ‘나의 몸’이 된다.            아메리는 노화를‘사회적 연령’이라는 새로운 시각으로 성찰한다.  사회적 연령이란 ‘사회적 노화’를 타인의 시선으로 볼 때 규정되는 것이다. 신체적 연령과는 달리 사회적 노화는 소유가 있을 때를 전제로 한다. 교사라는 직업을 가졌던 나는 사회적 노화 과정을 거치며 타인에 의해 사회적 연령이 규정되었다. 나의 직업은 소유의 세계에 속했으며 그 소유를 지켜 내기 위해 나는 자율성을 누르고 순종하는 소시민으로 살아왔다. 이제 나는 사회적 연령의 수명을 다하고 은퇴하였다. 그리고는 이런 질문에 마주서게 되었다. ”난 어떻게 살아왔는가?” “나의 진짜 삶은 과연 있었던가?”        인간의 노화는 문화적 영역에서도 진행된다. 여기서 떠오르는 단어가‘꼰대’이다. 새로운 것을 거부하고 과거에만 머물려고 하며 그것을 강요하는 나이든 사람을 가리키는 말이다. 새롭게 생겨나는 문화적 유행에 대한 저항감 혹은 소외감을 느끼는 것은 현재의 표시 체계와 과거의 표시 체계가 충돌하기 때문이다. 현재의 문화적 현상을 과거의 표시 체계로 해석하려 하는 만큼 현재로부터 소외될 수밖에 없다. ‘꼰대’는 새로운 표시 체계를 거부한 사람이다. 반대로 이것을 수용하는 ‘열린 노인’은 그 대가로 개인의 체계가 무너지는 것을 감수해야 한다. ‘꼰대’와 ‘자기 붕괴’ 사이에서 갈팡질팡하게 된다. 몸의 노화만큼이나 문화적 노화도 나이 들어가는 사람이 겪어 내야하는 힘든 과정이다.       아메리는 마지막 장 ‘죽음’에서 그가 겪었던 수용소의 경험을 간접적으로 풀어내며 삶과 죽음에 대해 이야기한다. 가장 어둡고 이해하기 어려운 부분이기도 하다. 왜냐하면 ’죽음’에 대해 이야기한다는 것은 절대부정, 근원적 모순, 부조리를 전제하는 것이기 때문이다. 산다는 것은 죽어가는 과정이다. 죽음을 이야기한다는 것은 결코 경험할 수 없는 것을 이야기하는 것이다. 죽음은 생각할 수 없는 것을 생각해야 한다는 점에서 허위이며 유일하고 완전하게 확실한 것이라는 점에서 진리이다. (p.201) 늙어감의 끝은 소멸, 즉 죽음으로 마침표를 찍는다. 가장 확실한 이 진리 앞에서 어떤 위로를 할 수 있단 말인가?    3.『늙어감에 대하여』가 건네는 위로는 진정 없는 것인가?        아메리는 단칼에 잘라 말한다. “속절없이 늙어가는 사람에게 ‘우아한 체념’이라거나 ‘황혼의 지헤’라는 말 따위로 위로하는 것은 굴욕적인 기만에 지나지 않는다.” (p.7) 그렇다면 순수히 항복하고 체념하며 살아야 한다는 것일까? 그래도 나는 동굴 속에서 희미한 빛이 들어오는 틈을 보았다. ‘수상한 타협’과 ‘소홀한 감정’이 그 틈이다. 위로가 아니라 할 수도 있다. 그러나 ‘늙어감’에 대한 성찰은 절대 불변의 유일한 귀결, ‘죽음’과 함께 하는 것이다. 저항은 애초에 불가한 것이다. 체념은 너무나 무기력해 보인다. 이것이 어찌할 수 없는 부조리이며 모순이다. 이 책의 부제, ‘저항과 체념 사이에서’가 암시하듯 아메리는 ‘수상한 타협’을 내민다. 두려움과 믿음, 저항과 체념, 거부와 수용 사이의 균형 감각을 말한다.         이 균형 감각을 유지하기 위해서는 ‘소홀한 감정’이 필요하다. 아메리는 ‘소홀한 감정’에 대해 이렇게 말한다. 죽음의 두려움을 벗어날 길은 없다. 그렇다고 그 두려움이 우리의 삶을 압도하도록 해서도 안 된다. “늙어가는 사람은 그 끝에 죽음이 기다리고 있는 시간을 그저 무관심하게 바라보는 소홀함 감정으로 그럭저럭 견뎌가야 한다.”(P.205) ‘수상한 타협’과 ‘소홀한 감정’은 끝까지 잡고 놓지 않는 성찰이 없이는 가능하지 않은 것이다. 위로를 기대하지 말라 했지만 냉철하게 진실을 드러내 줌으로써 기만적 위로가 아닌 스스로 위로를 찾아가도록 한다고 생각한다.          4. 품위 있는 노년을 위한 무용한 애씀을 내려 놓다. - 나의 ‘수상한 타협’ -        ‘품위 있는 노년’을 감히 꿈꾸었다. 노후를 숫자에 근거해 준비해오고 있었다. 통계가 제시하는 적절한 노후 생활비, 건강을 위협하지 않는 콜레스테롤, 혈당, 혈액 염증 등의 각종 수치들. ‘이만하면 되었다.’라는 안도감 아래에는 항상 알지 못할 불안감이 스멀거렸다. 그 정체를 알지 못했다. 삼 사년 전 어느 날 원인을 알 수 없는 공황감과 가슴 답답함을 느꼈다. 현대 의학 장비를 사용하여 각종 검사를 해 보았으나 뚜렷한 원인을 잡아내지 못하였다. 혼자 집에 있을 때면 불안감이 나를 압도하기도 했다. ‘나 혼자 아무 준비 없이 갑자기 떠나게 되면 어떻게 하지…’ 두려움의 정체는 죽음이었다. 그러나 나는 알고 있다. 이 두려움은 결코 극복될 수 없는 것임을.         덜어내는 노후로 방향을 바꾸어 보았다. 옷장 가득했던 옷들을 버리고 책도 정리했다. 많은 것을 비워냈다. 전원으로 돌아가 소박한 집을 짓고 정원과 텃밭을 가꾸며 평화롭게 살았다. 심지어는 늙는 것은 아름답고 좋은 일이라 고까지 느꼈다. 하지만 이중성도 동시에 드러냈다. ’노화의 속도계는 상대적이다.’라며 액티브 시니어로 이 사회가 강요하는 소비도 마다하지 않고 선택했다. 갖추던 덜어내던 두 길의 끝은 같은 곳에서 멈춘다. 속절없이 늙.는.다.         나는 받아들인다. 발버둥을 쳐보았자 노화라는 불치의 병을 앓고 있음을. 안정된 노후도 젊고 건강해 보이는 것도 약이 되지 못함을. 그저 ‘무해한 진통제’(p.11)일뿐이다. 이제 나는 이 무용한 애씀을 접으려 한다. 그러나 체념과 저항의 줄다리기에서 체념으로 건너간 것은 아니다. 저쪽 끝에는 저항이 있기에 내가 서 있는 줄이 팽팽하게 유지될 수 있는 것이다.         사람들이 나에게 묻는다. “육십이 넘은 나이에 머리아프게 어려운 책을 왜 읽니?” “글은 써서 뭐에 쓰려구?’ “그냥 편히 살어!” 그럼에도 나는 읽고 쓰고 시도해보기를 멈추지 않을 것이다. 건강한 심신을 위해 걷고 또 걸을 것이다. 무엇이 되기 위해서가 아니라 ‘나’가 되기 위해서. 무너져 내리고 상실되어가는 초라한 나, nobody인 내가 기꺼이 되기 위해서. 격렬한 저항의 끝에 택하는 체념은 그저 무기력한 선택이 아니다. 무용한 애씀을 내려놓겠다는 말은 아무것도 하지 않겠다는 선언이 아니라 ‘무엇이 되기 위한’ 애씀은 헛된 것임을 받아들인다는 뜻이다. 거품 같은 위로를 거두어 내고 늙어감을 직시할 때 nobody인 나를 연민없이 바라볼 수 있을 것이다. 이것이 내가 찾은 저항과 체념사이의 ‘수상한 타협’이다.      
*양생글쓰기 <나이듦과 자기서사> 시즌2에서는 리뷰글쓰기를 해봤습니다. 시즌2을 마치며 쓴 학인들의 리뷰 중두 편을 북앤톡에 올립니다. 함께 읽어봤으면 합니다*     늙어감에 맞서 애쓰지 마라. 늙어감을 직시하라. - 『늙어감에 대하여』(장 아메리, 돌베개, 2014)- 권영애   1. 장 아메리(Jean Améry)는 어떤 인물인가?     『늙어감에 대하여』는 끝까지 읽어 내기 쉽지 않은 책이다. 독자에게 친절하지 않다. 문학, 역사, 철학을 넘나드는 비유와 은유적 표현이 책장을 넘기는 손을 더디게 붙잡는다. 무엇보다도 동굴 속을 헤매는 듯 어둡고 음울하다. 빛을 어디에서 찾아 나갈지는 각자의 몫으로 남겨두는 책이다.         이 책을 읽기 전에 장 아메리(Jean Améry)의 삶을 들여다보아야 한다. 아메리는 ‘홀로코스트 생존 작가’로 알려져 있다. 오스트리아 빈에서 태어나 유대 문화 전통과는 상관없이 자랐지만 유대인 혈통이라는 이유만으로 익숙한 사회로부터 모든 것을 박탈당한다. 벨기에로 망명하여 레지스탕스 활동을 하다 체포되어 아우슈비츠 수용소 등을 거쳐 1945년에 석방되었다. 벨기에에서 이송된 2만여명의 수감자 중 생존한 사람이 615명이었는데 아메리는 그 중 한 명이었다.  수용소에서 겪은 뼈가 으스러지는 고문을 그는 ‘세계에 대한 신뢰를 빼앗아 간다.’라고 회고한다.         그후 본래의 이름, 한스 차임 마이어(Hans Chaim Mayer)를 버리고 벨기에에서 독일어로 저술활동을 하면서도 독일에서 자신의 저술이 출판되는 것을 거부하였다. 그의 작품이 독일에 소개되게 된 것은 젊은 작가 헬무트 하이센 뷔텔이 그를 찾아와 무릎을 꿇고 용서를 구한 후의 일이다. 이때 그가 헬무트에게 한 말이 매우 함축적이다. “인간은 오로지 자기 자신만이 책임질 수 있는 존재다. 나는 내 귀중한 인생을 위해 싸운 것이다.”(p.269)          대중의 기대와는 달리 아메리는 수용소에서 겪은 처참한 경험을 직접적으로 증언하지 않았다. 정치적 지식인, 에세이스트로서 시대를 성찰하는 작품을 남겨두고 두 번의 자유 죽음 시도 끝에 1978년 그의 나이 예순 여섯에 태어난 곳인 잘츠부르크로 돌아가 호텔에서 스스로 생을 마감하였다. 이 책의 두번째 서문에서 그는『자유 죽음』이 이 책의 속편이 될 것이라 썼는데 이를 암시한 것일까?       2.늙어감을 인식하는 다섯 관점         아메리는 이 책을 55세에 -결코 노년의 삶에 대하여 이야기하기에는 너무 젊은 나이에- 세상에 내 놓았다. 젊은 나이로 인해 비평도 있었지만 늙어감에 대해 많은 것을 경험한 10년후에도 서문에서 자신이 옳았으며 자신이 무엇을 이야기하는지 알고 썼다고 했다. 이 책은 인간의 노화 과정을 시간의 인식, 몸의 쇠락, 사회적 노화, 문화적 노화 그리고 이 모든 과정의 끝인 죽음이라는 시각에서 성찰한 철학 에세이라 할 수 있다. 아메리는 이 책을 ‘저항과 체념의 모순을 탐색하는 여정’이라 소개하였다. 하지만 어떠한 위로나 길을 제시하지 않을 것임을 이렇게 밝혔다. “한 걸음씩 차분하게, 어둠 속을 더듬어 헤쳐 나가면서 나는 늙어가는 사람들이 언제나 바랐던 희망, 곧 위로해주었으면 하는 기대를 안타깝지만 깨뜨리지 않을 수 없었다.”(p.7)           늙어감을 성찰하는 아메리의 일관된 핵심은 모순, 혹은 부조리라고 생각되었다. 모든 현상은 궁극적으로 소멸을 향해 나아가는 것이다. ‘시간’과 ‘몸’은 소멸을 실감하는 노년에 이르러서야 비로소 발견된다. 몸이 감옥이 되어감을 경험하면서 몸에 대해 성찰하고 “몸은 인간이 지닌 가장 지극한 진정성”(p.71)임을 알게 된다. 그리고 이 성찰을 통해 밖에서 주어졌던 사회적 자아가 아닌, 진정한 자아를 발견하게 된다. 몸이 세상을 향해 나가가는 다리였을 때가 아니라 장애물이 되었을 때 비로소 온전히 ‘나의 몸’이 된다.            아메리는 노화를‘사회적 연령’이라는 새로운 시각으로 성찰한다.  사회적 연령이란 ‘사회적 노화’를 타인의 시선으로 볼 때 규정되는 것이다. 신체적 연령과는 달리 사회적 노화는 소유가 있을 때를 전제로 한다. 교사라는 직업을 가졌던 나는 사회적 노화 과정을 거치며 타인에 의해 사회적 연령이 규정되었다. 나의 직업은 소유의 세계에 속했으며 그 소유를 지켜 내기 위해 나는 자율성을 누르고 순종하는 소시민으로 살아왔다. 이제 나는 사회적 연령의 수명을 다하고 은퇴하였다. 그리고는 이런 질문에 마주서게 되었다. ”난 어떻게 살아왔는가?” “나의 진짜 삶은 과연 있었던가?”        인간의 노화는 문화적 영역에서도 진행된다. 여기서 떠오르는 단어가‘꼰대’이다. 새로운 것을 거부하고 과거에만 머물려고 하며 그것을 강요하는 나이든 사람을 가리키는 말이다. 새롭게 생겨나는 문화적 유행에 대한 저항감 혹은 소외감을 느끼는 것은 현재의 표시 체계와 과거의 표시 체계가 충돌하기 때문이다. 현재의 문화적 현상을 과거의 표시 체계로 해석하려 하는 만큼 현재로부터 소외될 수밖에 없다. ‘꼰대’는 새로운 표시 체계를 거부한 사람이다. 반대로 이것을 수용하는 ‘열린 노인’은 그 대가로 개인의 체계가 무너지는 것을 감수해야 한다. ‘꼰대’와 ‘자기 붕괴’ 사이에서 갈팡질팡하게 된다. 몸의 노화만큼이나 문화적 노화도 나이 들어가는 사람이 겪어 내야하는 힘든 과정이다.       아메리는 마지막 장 ‘죽음’에서 그가 겪었던 수용소의 경험을 간접적으로 풀어내며 삶과 죽음에 대해 이야기한다. 가장 어둡고 이해하기 어려운 부분이기도 하다. 왜냐하면 ’죽음’에 대해 이야기한다는 것은 절대부정, 근원적 모순, 부조리를 전제하는 것이기 때문이다. 산다는 것은 죽어가는 과정이다. 죽음을 이야기한다는 것은 결코 경험할 수 없는 것을 이야기하는 것이다. 죽음은 생각할 수 없는 것을 생각해야 한다는 점에서 허위이며 유일하고 완전하게 확실한 것이라는 점에서 진리이다. (p.201) 늙어감의 끝은 소멸, 즉 죽음으로 마침표를 찍는다. 가장 확실한 이 진리 앞에서 어떤 위로를 할 수 있단 말인가?    3.『늙어감에 대하여』가 건네는 위로는 진정 없는 것인가?        아메리는 단칼에 잘라 말한다. “속절없이 늙어가는 사람에게 ‘우아한 체념’이라거나 ‘황혼의 지헤’라는 말 따위로 위로하는 것은 굴욕적인 기만에 지나지 않는다.” (p.7) 그렇다면 순수히 항복하고 체념하며 살아야 한다는 것일까? 그래도 나는 동굴 속에서 희미한 빛이 들어오는 틈을 보았다. ‘수상한 타협’과 ‘소홀한 감정’이 그 틈이다. 위로가 아니라 할 수도 있다. 그러나 ‘늙어감’에 대한 성찰은 절대 불변의 유일한 귀결, ‘죽음’과 함께 하는 것이다. 저항은 애초에 불가한 것이다. 체념은 너무나 무기력해 보인다. 이것이 어찌할 수 없는 부조리이며 모순이다. 이 책의 부제, ‘저항과 체념 사이에서’가 암시하듯 아메리는 ‘수상한 타협’을 내민다. 두려움과 믿음, 저항과 체념, 거부와 수용 사이의 균형 감각을 말한다.         이 균형 감각을 유지하기 위해서는 ‘소홀한 감정’이 필요하다. 아메리는 ‘소홀한 감정’에 대해 이렇게 말한다. 죽음의 두려움을 벗어날 길은 없다. 그렇다고 그 두려움이 우리의 삶을 압도하도록 해서도 안 된다. “늙어가는 사람은 그 끝에 죽음이 기다리고 있는 시간을 그저 무관심하게 바라보는 소홀함 감정으로 그럭저럭 견뎌가야 한다.”(P.205) ‘수상한 타협’과 ‘소홀한 감정’은 끝까지 잡고 놓지 않는 성찰이 없이는 가능하지 않은 것이다. 위로를 기대하지 말라 했지만 냉철하게 진실을 드러내 줌으로써 기만적 위로가 아닌 스스로 위로를 찾아가도록 한다고 생각한다.          4. 품위 있는 노년을 위한 무용한 애씀을 내려 놓다. - 나의 ‘수상한 타협’ -        ‘품위 있는 노년’을 감히 꿈꾸었다. 노후를 숫자에 근거해 준비해오고 있었다. 통계가 제시하는 적절한 노후 생활비, 건강을 위협하지 않는 콜레스테롤, 혈당, 혈액 염증 등의 각종 수치들. ‘이만하면 되었다.’라는 안도감 아래에는 항상 알지 못할 불안감이 스멀거렸다. 그 정체를 알지 못했다. 삼 사년 전 어느 날 원인을 알 수 없는 공황감과 가슴 답답함을 느꼈다. 현대 의학 장비를 사용하여 각종 검사를 해 보았으나 뚜렷한 원인을 잡아내지 못하였다. 혼자 집에 있을 때면 불안감이 나를 압도하기도 했다. ‘나 혼자 아무 준비 없이 갑자기 떠나게 되면 어떻게 하지…’ 두려움의 정체는 죽음이었다. 그러나 나는 알고 있다. 이 두려움은 결코 극복될 수 없는 것임을.         덜어내는 노후로 방향을 바꾸어 보았다. 옷장 가득했던 옷들을 버리고 책도 정리했다. 많은 것을 비워냈다. 전원으로 돌아가 소박한 집을 짓고 정원과 텃밭을 가꾸며 평화롭게 살았다. 심지어는 늙는 것은 아름답고 좋은 일이라 고까지 느꼈다. 하지만 이중성도 동시에 드러냈다. ’노화의 속도계는 상대적이다.’라며 액티브 시니어로 이 사회가 강요하는 소비도 마다하지 않고 선택했다. 갖추던 덜어내던 두 길의 끝은 같은 곳에서 멈춘다. 속절없이 늙.는.다.         나는 받아들인다. 발버둥을 쳐보았자 노화라는 불치의 병을 앓고 있음을. 안정된 노후도 젊고 건강해 보이는 것도 약이 되지 못함을. 그저 ‘무해한 진통제’(p.11)일뿐이다. 이제 나는 이 무용한 애씀을 접으려 한다. 그러나 체념과 저항의 줄다리기에서 체념으로 건너간 것은 아니다. 저쪽 끝에는 저항이 있기에 내가 서 있는 줄이 팽팽하게 유지될 수 있는 것이다.         사람들이 나에게 묻는다. “육십이 넘은 나이에 머리아프게 어려운 책을 왜 읽니?” “글은 써서 뭐에 쓰려구?’ “그냥 편히 살어!” 그럼에도 나는 읽고 쓰고 시도해보기를 멈추지 않을 것이다. 건강한 심신을 위해 걷고 또 걸을 것이다. 무엇이 되기 위해서가 아니라 ‘나’가 되기 위해서. 무너져 내리고 상실되어가는 초라한 나, nobody인 내가 기꺼이 되기 위해서. 격렬한 저항의 끝에 택하는 체념은 그저 무기력한 선택이 아니다. 무용한 애씀을 내려놓겠다는 말은 아무것도 하지 않겠다는 선언이 아니라 ‘무엇이 되기 위한’ 애씀은 헛된 것임을 받아들인다는 뜻이다. 거품 같은 위로를 거두어 내고 늙어감을 직시할 때 nobody인 나를 연민없이 바라볼 수 있을 것이다. 이것이 내가 찾은 저항과 체념사이의 ‘수상한 타협’이다.      
문탁
2022.08.30 | 조회 532
세미나 에세이 아카이브
*단짠단짠 글쓰기 클래스 시즌2는 '여행'이 주제였습니다. 시즌2을 마치며 쓴 에세이 가운데 두 편을 북앤톡에 올립니다. 함께 읽어봤으면 합니다.      ‘내 방’이 생겼다   “인간의 불행의 유일한 원인은 자신의 방에 고요히 머무는 방법을 모른다는 것이다”(『팡세』 단장 136, 『여행의 기술』, 알랭 드 보통, 청미래, 2011년, 30쪽, 재인용)   나에게 고요히 머물 ‘내 방’이 생긴 건 약 1년 전쯤이다. 단순히 물리적 공간으로서 ‘내 방’이 아니다. 나 이외 그 어떤 존재도 쉽게 나를 흔들 수 없는, 적어도 이 공간 안에서는 내 의지대로 모든 것이 돌아가는 완전무결한 독립적 공간으로서 ‘내 방’ 말이다. 집에 대해 사랑한다는 감정을 가져보기는 처음이다. 이건 모두 독립해 나간 딸이 나에게 준 선물이다. 덕분에 나는 더욱 '집순이'가 되었다.   내가 퇴직을 하면서 가장 많이 받은 질문은 ‘이제 뭐 할 거에요?’도 아닌 ‘어디로 여행갈 거예요?’였다. 사람들은 진정한 쉼이나, 자유로움은 집에서 찾을 수 없다고 생각하는 듯 했다. 자꾸 어딜 떠나라고 한다. 제주 1년살이도 좋고, 산티아고도 좋지만 나는 내 방에 머무는 것도 좋다.   알랭 드 보통은 ‘여행할 장소에 대한 조언은 어디에나 널려 있지만, 우리가 가야하는 이유와 가는 방법에 대한 이야기는 듣기 힘들다’(『여행의 기술』, 17쪽)고 한다. 어쩌면 내가 퇴직 이후 ‘여행’ 계획을 딱히 세우지 못하고 있는 이유가 여기 있는지도 모른다. 여행을 통해 결국 우리가 되찾고자 하는 것은 무엇일까? 삶에 지쳐있는 혹은 정체되어 있는 ‘자신을...
*단짠단짠 글쓰기 클래스 시즌2는 '여행'이 주제였습니다. 시즌2을 마치며 쓴 에세이 가운데 두 편을 북앤톡에 올립니다. 함께 읽어봤으면 합니다.      ‘내 방’이 생겼다   “인간의 불행의 유일한 원인은 자신의 방에 고요히 머무는 방법을 모른다는 것이다”(『팡세』 단장 136, 『여행의 기술』, 알랭 드 보통, 청미래, 2011년, 30쪽, 재인용)   나에게 고요히 머물 ‘내 방’이 생긴 건 약 1년 전쯤이다. 단순히 물리적 공간으로서 ‘내 방’이 아니다. 나 이외 그 어떤 존재도 쉽게 나를 흔들 수 없는, 적어도 이 공간 안에서는 내 의지대로 모든 것이 돌아가는 완전무결한 독립적 공간으로서 ‘내 방’ 말이다. 집에 대해 사랑한다는 감정을 가져보기는 처음이다. 이건 모두 독립해 나간 딸이 나에게 준 선물이다. 덕분에 나는 더욱 '집순이'가 되었다.   내가 퇴직을 하면서 가장 많이 받은 질문은 ‘이제 뭐 할 거에요?’도 아닌 ‘어디로 여행갈 거예요?’였다. 사람들은 진정한 쉼이나, 자유로움은 집에서 찾을 수 없다고 생각하는 듯 했다. 자꾸 어딜 떠나라고 한다. 제주 1년살이도 좋고, 산티아고도 좋지만 나는 내 방에 머무는 것도 좋다.   알랭 드 보통은 ‘여행할 장소에 대한 조언은 어디에나 널려 있지만, 우리가 가야하는 이유와 가는 방법에 대한 이야기는 듣기 힘들다’(『여행의 기술』, 17쪽)고 한다. 어쩌면 내가 퇴직 이후 ‘여행’ 계획을 딱히 세우지 못하고 있는 이유가 여기 있는지도 모른다. 여행을 통해 결국 우리가 되찾고자 하는 것은 무엇일까? 삶에 지쳐있는 혹은 정체되어 있는 ‘자신을...
먼불빛
2022.08.22 | 조회 253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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